전출처 : 로쟈 > 최근에 나온 책들(51)

 

 

 

 

최근에 나온 책들이 또 하나의 '방앗간'을 이루어놓은 탓에 몇 마디 남겨놓기로 한다(가급적 간단하게? 짹짹!). 가장 먼저 꼽을 책은, 나의 선호와 맞물려, 단연 데리다의 <정신에 대해서>(동문선)이다('정신에 대하여'보다 낯선 표현이군. '-에 대해서'란 책제목이 있었던가?). 동문선 책이라면 가급적 소개를 삼가하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역자 박찬국 교수가 하이데거 전공자인 분이어서 번역상의 문제점은 최소화되었으리라고 믿어지기에 주저없이 소개한다. '하이데거와 물음'이란 부제를 갖고 있는 이 책은 데리다가 1987년에 개최된 한 하이데거 학회에서 발표한 내용이며, 내가 갖고 있는 영역본은 1989년에 나왔고 139쪽의 얇은 책이다(강연한 내용이므로 그만한 분량 이상일 수도 없다). 국역본도 177쪽이니까 '노멀'하다(하지만 20,000원이다).

역자도 후기에서 인용하고 있지만, (영역본 뒷표지에 실린) 하이데거 연구자 데이비드 크렐의 표현을 빌면 '하이데거에 관한 책으로서 우리 세기에 이만한 책이 또 나올 수 있을까? 데리다가 또 쓴다면 모를까'이다. 하이데거 전문가로서 역자 또한 거기에 전폭적인 공감을 표하고 있을 정도이니까 책의 의의에 대해서는 중언부언할 필요가 없겠다(일반적으로 하이데거는 데리다에게서 가장 중요한 철학자로 꼽힌다). 데리다는 하이데거와 관련하여 한번도 질문된 적이 없는 '정신(Geist)'의 문제를 제기하면서도 하이데거의 철학은 해체/구축한다. 이런 '대결' 장면은 며칠전 이종격투기 프라이드 경기에서 표도르('효도르'라는 이름은 러시아어가 일어로 음역된 걸 다시 옮겨오면서 생긴 '괴상한' 이름이다)와 크로캅이 맞붙은 것만큼이나(나는 직접보지 못했지만 매니아인 후배로부터 생생한 '재방송'을 들었다) 흥미진진한 볼거리이다. 그런 걸 놓쳐도 좋은 삶은 또한편 나름대로 재미있을지 모르겠으나 내가 부러워하는 삶은 아니다.

데리다가 하이데거와 '한판' 붙는다고 하니까 하이데거에 관해서도 배경지식을 갖춰두는 게 좋겠다. 박찬국 교수의 소개서 <들길의 사상가, 하이데거>(동녘, 2004) 정도가 별로 부담없이 참조할 만한 책 같다. 내가 읽은 책으로는 조지 스타이너의 <하이데거>(지성의샘, 1996)가 번역도 훌륭하고 감동적이었다(비록 절판된 듯하지만). 하이데거의 저작으로 내가 언제나 추천하는 것은 <형이상학 입문>(문예출판사, 1994)이다. <존재와 시간>으로 막바로 들어가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겠지만, 초보자라면 헤맬 가능성이 높다.  <형이상학 입문>은 그럴 때 아주 유익한 스파링 파트너이다. 하이데거의 '파워'를 슬쩍 맛보기로 보여주므로 맷집을 좀 키운 다음에 도전하면 되겠다.

 

 

 

 

두번째 책은 전방위 전업작가 장석주의 니체 읽기, <진리는 미풍처럼 온다>(북인)이다. 80년대에 잘나가던 출판사 청하의 대표로서 마광수 필화사건 때문에 옥고를 치르기던 했던 장석주는 청하판 니체전집의 기획자이기도 했다. 현재 간행중인 책세상판 전집이 나오기 전에 니체에 대한 목마름을 달래주던 10권짜리 전집이 그의 '작품'인 셈. 그러한 '열정'에 견주어 본다면 이번에 나온 250여쪽의 '니체 읽기'는 '미풍'에 불과해 보이지만, '한국에서의 니체'에 그가 끼친 기여는 언급해둘 만하다.   

사실 니체에 관한 책으로 보다 본격적인 것은 지난 여름에 나온 백승영의 <니체,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자>(책세상)이다(저자가 7년 동안 집필했다는 이 책의 분량은 717쪽이다). 책세상 전집의 편집위원으로서 번역에 참여하고 있는 저자의 니체 공부를 중간결산하고 있는 듯한 책인데, 규모나 성취도 면에서 국내에서는 아직 이만한 책이 나온 적이 없었다. 니체 사망 100주기를 맞이하여 지난 2000년에 출간된 <니체가 뒤흔든 철학 100년>(민음사)는 한국 니체학의 수준을 정면에서 보여주는데('한국의 책 100권'에도 포함됐었다), 내가 '백승영'이란 이름을 처음 본 것은 그 책에서였고 1부 '니체의 생애와 사상' 파트를 도맡은 것으로 봐서 새로운 '강자'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그가 여성 철학자라는 건 최근에야 한 인터뷰를 읽어보고 알게 되었는데, 그의 독일 유학기 한 토막은 이렇다.

"니체를 공부하겠다고 한국에서 온 그녀를 절망케 한 최초의 인물이 바로 울리히 교수였다. 독일 사람에게도 어려운 철학자를 외국인이 어떻게 정복하겠는가, 그런 걱정이었다. 세 번의 퇴짜를 맞고서도 뜻을 굽히지 않자 그는 조건부로 승낙했다. '다른 책 보지 말고 니체의 책 전부를 달달 외우고 나서 다시 와라.' 독일어판으로 39권 분량인 니체 전집을 2년 6개월 동안 여섯 번을 읽어냈다. '죽을 것처럼 답답했어요. 참고서를 보면 쉽겠는데, 그 원서를 완벽하게 읽기가 쉽지 않아 울기도 수없이 했어요. 그 괴팍한 교수 때문에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지 몰라요. 하지만 그럴수록 오기가 발동했어요.' 얼마나 읽어댔는지 어느 페이지 몇째 줄에 있는 ‘오자’까지 기억했다고 한다. 예전에 보이지 않던 니체가 보이기 시작하더란다. 학자로서의 삶의 일대 전환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해서, 다른 건 몰라도 그 정도로 공부한 그가 니체 '전문가'라는 건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몇 권 읽고서 아는 체하는 '포스트모던' 연구자들과는 종류가 다른 것). 그런 그가 권하는 니체 공부법: "그녀가 학생을 가르치는 방법은 무엇일까. '읽으라는 것입니다.'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이끌어줄 것 같았던 그녀의 일갈이다. 니체를 알 수 있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다고 잘라 말한다. 그렇다면 주부들이 좀 더 쉽게 니체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미안한 말이지만 읽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머리를 싸매면서, 고민을 하면서 이해될 때까지 읽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에 니체를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조금은 야박한 듯한 그녀의 권유는 은사의 교육법과 닮아 있다." 그러니 그저 읽어보시라!..

물론 니체가 (거의) 인생의 전부이고, 세상의 전부라면(그런 이들이 없지는 않겠다), 읽고 또 읽는 일을 마다하지는 않겠다. 한데, 어디 사정이 그러한가? 나 또한 '니체 애호가'로서 니체의 '위버멘쉬' 모티브를 중심으로 짤막한 책을 쓰기도 했었지만(제목은 <탱고레슨>이었고, 지금은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는 책이다) 다른 많은 책들을 무시할 만큼의 매니아는 아니다. 그런 만큼 얼마간 거리를 두고 니체를 (즐기며) 읽게 되는데(요즘 읽는 건 영역돼 나온 지아니 바티모의 <니체 입문>이다), 그런 독자의 관점에서 간혹 '전문가'들의 주장은 좀 오버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가령, "초인 사상이라는 말 들어보셨을 겁니다. 사실 이 말은 일본 사람이 번역한 말입니다. 대신 ‘위버멘시Ubermensch’라고 써야 합니다. 독일어 그대로 쓰는 거죠.”라는 저자의 주장에는(이건 책세상판 니체 전집 편집위원회의 결정이기도 한데) 동의하기 어렵다. 

허다한 철학용어들을 일본어 번역에서 갖다 쓰는 주제에 우리가 '일본 사람이 번역한 말'이라고 일방적으로 타박할 수 있을지 의문일 뿐더러('정신'은 어떻고, '주체'는 어떠하며, '사회'는 또 어떠한가?) 독일어를 그대로 쓰면 (아무런 오해 없이!) '이해'가 되는 건지 지극히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저자는 독일 사람들만큼 독어가 유창하다고 하니까 '위버멘쉬' 대신에 '초인'이란 말을 쓰는 데 이질감이나 거부감을 느낄지 모르겠지만, 일반 독자들도 과연 그러한가?(정 못마땅하다면, 김진석의 제안대로, '넘어가는 인간'으로 옮기는 건 불가능한가?) 그와 같은 논리의 연장선상에서라면, 니체는 (말 많고 탈 많은) 번역본으로 읽을 게 아니라 원어인 독어로 읽어야 한다(그런데, '위버멘쉬'로 읽는 독일 사람들이야말로 니체를 오독한 장본인들 아닌가? 그들은 '초인'이 아닌 '위버멘쉬'로 읽는데 어찌하여 니체와 나치즘의 불미스런 '연루'가 생겨난 것일까?). 해서, 열심히 공부한 사람들을 우리는 신뢰할 필요가 있지만, 그렇다고 곧이 곧대로 다 믿을 필요는 없어 보인다(대충 주워듣는 우리의 무기는 전문지식이 아니라 '상식'이다).

상식적으로 알아둘 일. 데리다가 하이데거의 극복을 필생의 과제로 삼았었다면, 하이데거가 표나게 내세웠던 건 니체철학의 극복이었다. 하이데거는 4권 분량의 니체론을 썼는데, 그 중 한 권이 <니체와 니힐리즘>(철학과현실사, 2000)이며 역시 박찬국 교수의 번역이다. 니체, 하이데거, 데리다가 다 얽혀들어간 해석의 문제에 대해선 앨런 슈리프트의 <니체와 해석의 문제>(푸른숲, 1997)이 훌륭한 안내자이다. 번역도 좋다. 이 '해석'의 문제에 대해서는 김상환 교수의 <니체, 프로이트, 맑스 이후>(창비사, 2002) 제2부도 참고할 수 있다. 슈리프트 이상의 훌륭한 해설이다.

 

 

 

 

 

세번째 책은 사드 후작의 <규방철학>(도서출판b). 이 책은 <안방철학>이라는 제목으로 한 차례 한국어로 번역된 바 있는데(나는 국립도서관에 있는 걸 복사했었다. 마광수 교수의 추천사가 붙어 있었던 걸로 기억된다), 소개에 따르면 거기엔 "책의 한 부분이 생략되어 있었다." 이번에 프랑스 문학 전공자가 상세하고 꼼꼼한 주석을 곁들여서 다시 옮겼다. 그래서 '완역비평판'이다. 목차를 보니 가라타니 고진의 해설도 말미에 붙어 있다. <소돔 120일>(고도, 2000) 정도면 분량도 분량이거니와 지루하고 부담스럽지만(사드에게서 '섹스'는 '쾌락원칙 너머'에 있다. 그러니 어찌 고통이 아니겠는가? 가령, 포르노 배우들의 '장시간 노동'을 떠올려보라. 누군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알아?), 300쪽 정도의 <규방철학>이라면 읽어볼 만하겠다(<규방철학>의 한 구절이 지젝의 <이라크>에 인용돼 있으며, 그 '오역'에 대해서는 모스크바통신에서 이전에 지적한 바 있다). 내 생각에 가장 좋은 사드 입문서는 분량으로 보나 집약성으로 보나 절판된 <미덕의 불운>(한불문화출판, 1987)인데, 이게 왜 다시 나오지 않는지는 좀 의아하다. 혹 사드가 생소한 분이라면, 영화 <사드>(1996)를 먼저 보셔도 되겠다. 좀 싱거운 영화이긴 하지만 '분위기'는 대략 파악하실 수 있으리라.





 

 

네번째 책(들)은 '1980년대 중국사상계의 대표적 인물'이라는 리저허우(리쩌허우)의 중국사상사론 3부작이다(이렇게 한꺼번에 나오는 건 '러시아식'만이 아닌 모양이다). 이전에 <고별혁명>(북로드, 2003), <역사본체론>(들녘, 2004) 등의 북리뷰들을 보면서 처음 이름을 기억해두게 됐는데(<미의 역정> 등의 미학서들을 갖고 있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중국학 연구자들이 이렇듯 공을 들여서 번역서들을 내는 걸 보면 필시 뭔가 있는 사상가이리라(이걸 언제 사둘 것이며, 언제 읽어볼 것이냐, 심히 의심스럽긴 하지만 이미지들을 늘어놓으니 보기엔 좋다). 그 이상의 내막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다. 좋은 리뷰들을 보았으면 싶다.

 

 

 

 

덧붙임: 리저허우의 <학설>(들녘)도 출간됐다. "'중국 사상계의 1인자', '중국 사상계의 4대 금강' 등의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리쩌허우가 중국의 전통사상(특히 유학)과 문화, 그리고 중국사회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고찰한 책. 앞서 출간된 사상사 3부작이나 미학 3부작 등의 저술에서 드러내고자 했던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엮어 지은이 자신만의 학설을 세우고 있다."고 하는데, 230쪽 정도의 분량이므로 '입문서'로서는 딱인 듯하다. 거기서부터 시작하면 되겠다.

 

 

 

  

중국학 책들을 소개한 김에 러시아쪽 신간들도 끝으로 소개해둔다. 먼저, 이 동네의 성실한 연구자 이장욱이 쓴 <혁명과 모더니즘>(랜덤하우스중앙). 부제는 '러시아의 시와 미학'이며, 20세기 러시아의 주요 시인들과 이론가들을 소개하는 걸 목적으로 한 책이다. 6명의 시인과 4명의 이론가 그리고 3가지 주의(형식주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모스크바 개념주의) 등이 다루어지고 있는데, '소개'를 목적으로 한 만큼, 품위를 유지하면서도 평이하게 씌어져 있다(잡지 등에 연재된 글들도 있기 때문에 어려울 수가 없다. '전문서'가 절대 아니니 오해들 마시길). 전공자들에겐 필독서가 되겠지만, 일반 독자들의 교양을 살찌우는 데도 유익해보인다.

사실 저자는 나의 친구이며 나는 이 책을 지난주에 우편으로 선물받았다(책이 나온다는 얘기를 들은 건 몇 달 전부터이다). 자주 만나는 형편은 못되지만 주변에 이렇듯 부지런한 친구들이 있다는 건 부듯하고 다행스런 일이다. 그의 책이 많이 나갔으면 싶다. 한편, 그는 시인이기도 해서 <내 잠 속의 모래산>(민음사, 2002)이란 시집도 갖고 있다. 최근엔 한 문예지에서 공모한 소설상에 당선되기도 했으므로 이젠 소설가까지 겸하게 됐다. 그의 비평문도 요즘 자주 눈에 띄는 걸로 봐서 아주 '작심하고' 쓰는 듯하다. 그런 의지와 재능을 반만 따라갔어도 내가 책 소개나 하고 있지는 않을 텐데, 라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그리고 지운다).

그리고 덧붙인 책은 우연찮게도 같은 출판사에서 나왔는데, '러시아연방 전 총리 프리마코프가 쓴 국제정치 비망록' <테러리즘과 세계정치>(램덤하우스중앙)이다. 소개에 따르면 프리마코프는 "현대 국제정치의 거물이다. 비록 그의 이름은 한국의 독자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지만, 그는 옛 냉전시절부터 최근까지도 주요 국제문제의 이면에서 조언가로, 중재자로, 때로는 협상의 당사자로 가장 활발하게 움직였다. 그는 소련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지의 중동특파원을 비롯해 다양한 형태의 언론경험을 한 후 학계에 투신, 동방학 연구소와 세계 경제 및 국제관계 연구소의 소장을 역임했다. 2005년 현재 러시아 상공회의소 소장으로 있으면서 푸틴 대통령에게 러시아 국정에 대해 자문하는 한편, 세계 주요 포럼과 토론회에 단골 연사로도 참가하고 있다."

작년 모스크바 체류시 간혹 언론에서 이름을 본 기억이 있지만 나는 그의 정치적 성향이나 뒷배경(마피아 연루여부 등)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이 책을 올려놓은 것은 그 '희귀성' 때문이다. 소위 '테러시대'에 테러리즘과 국제정세에 관한 책들은 그간에 많이 나왔지만, 러시아쪽 시각을 보여주는 건 이 책이 처음이 아닌가 싶다. 체첸문제를 떠안고 있는 러시아도 테러리즘의 변방이 아니며(대략 7-10건 정도의 크고 작은 테러사건이 해마다 터졌던 것 같다) 이에 대한 대응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무슨 '묘안'이 있는 건지 전직 러시아 총리의 의견을 한번 들어보자는 것. 사실, 누가 대신 읽어주면 좋을 책이다. 

뒤늦게 생각난 책 한권은 러시아의 민담연구가 블라지미르 프로프(쁘로쁘)의 <러시아 민담연구>(한국외대출판부)이다. 프로프의 책으론 이미 <민담형태론>(새문사, 1987; 예림기획, 1998)과 <민담의 역사적 기원>(문학과지성사, 1990) 등이 번역돼 있고, <웃음의 시학> 같은 책도 번역돼 나올 예정이다. 서사학에 관심이 있는 독자에게는 <민담형태론>이 필독서이겠지만, 일반 독자나 고전문학 연구자라면 프로프의 민담연구서들은 그냥 편안하게 일독해봄 직하다. 물론 부피들이 만만찮지만...

05. 08. 31

P.S. 날짜를 적고 보니까 '그 여름의 끝'이군. 이젠 생각을 좀 해야겠다. 살기 위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생각만 잘 하면, 어떻게든 살아볼 수 있지 않을까? 비록 살벌한 현실이라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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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디윈 > 옮긴이의 말
중국근대사상사론 한길그레이트북스 71
리저허우 지음, 임춘성 옮김 / 한길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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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 책상 위에는 3권의 ꡔ중국 근대사상사론ꡕ이 놓여 있다. 베이징 인민출판사본(1979년)과 안후이(安徽) 문예출판사본(1994년), 그리고 톈진(天津) 사회과학출판사본(2003년). 10여 년 간격으로 판본을 거듭하여 재출판되었다는 것은 개혁․개방 시기의 중국에서 이 책이 지니는 무게를 간접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처음 책이 출간되고 25년이 넘었으니 한국에서 이제 번역․출간된다는 것은 너무 늦은 감이 없지 않다. “늦은 봄 꽃 수풀에 앉아서 마른 국화를 비벼 코에 대는” 격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사실 한동안은 이 분야의 전공자들이 빨리 번역해주어서 이 책을 읽는 개인적인 수고를 덜 수 있기를 은근히 바랐다. 그러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는 격으로 조금씩 번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워낙 난해한 문장이 많아 우리말로 옮겨놔야만 내용의 구석구석이 명료하게 와 닿는 아둔한 내 공부방식의 탓도 있었으리라.

처음 이 책을 번역하면서는 연구관심 영역을 사상쪽으로 넓히는 것과 시기적으로 ‘근대’로 거슬러올라 간다는 의미를 부여하여 나름대로는 자못 고무적이었다. 그러나 번역하는 동안 곳곳에서 암초에 부딪혔고, 그때마나 원고를 던져두었다 다시 잡곤 하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처음 중국문학에 입문할 때 류다제(劉大杰)의 영인본『중국문학발전사』를 보면서, 제자백가서와 역사서가 문학사에서 서술될 수 있다는 사실이 퍽 경이로웠고, 그 경이로움으로 석사과정 첫 학기에『사기』(史記)를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선진(先秦)시기와 진한(秦漢)시기의 문장을 읽어내는 일이 간단하지는 않았지만, 수많은 독회를 통해 원전들을 읽어나갔다. 돌이켜보면 박사과정 수료 직후 근현대문학으로 방향을 바꾸기 전까지, 대학원 시절 대부분의 시간을 원전강독과 씨름하면서 보낸 셈이다. 그것을 밑거름으로 삼아 문사철(文史哲)을 경계 없이 넘보고자 했으며, 나름대로 오늘날 중국 및 중국학에 대한 커다란 그림 한 가닥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중국학의 기본은 문사철의 통합적 이해’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런 사고가 바탕이 되었기에 과감하게 이 책을 번역․출판하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집중적으로 번역한 때는 1998년 9월부터 1999년 8월까지 옌타이(煙臺) 대학에서 연구년을 보내던 시기였다. 돌이켜보면 그 기간은 나에게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이 책의 번역작업 틈틈이 손에 잡은 책이 진융(金庸)의 작품이었고, 그것을 계기로 무협소설 연구에도 손을 대고 계속 영화로 이어지는 등 대중문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옌타이 대학에서 안식한 그 1년은 내게 무척이나 소중한 시간이자 이 책의 번역에 중요한 시기라 할 수 있다. 개인적인 관심으로 량치차오(梁啓超) 관련 문장을 번역한 것은 1995년 무렵이었고, ꡔ중국 근대사상사론ꡕ을 우리말로 모두 번역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1997년 한길사의 제안을 받았을 때였다. 꼬박 10년이 걸린 더딘 작업이었다. 김태성 선생의 소개로 홍콩에 가서 류짜이푸(劉再復) 선생을 만나 밤이 이슥하도록 근현대 중국의 역사와 혁명을 논한 것이 2002년 가을이었고, 류짜이푸 선생의 주선으로 미국에 체류하는 리쩌허우 선생에게서 출판동의를 받았다. 곳곳에 벌겋게 표시를 해두었던 요령부득의 문장을 가지고 리쩌허우 선생과 여러 차례 편지와 전화를 주고받으면서 번역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리쩌허우의 문장은 난해하다. 그의 3부작이라고 하는『중국 고대사상사론』,『중국 근대사상사론』,『중국 현대사상사론』가운데 나의 경우는 유독『중국 근대사상사론』이 난해했다. 그 난해한 원인은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는데, 첫째는 문장의 호흡이 지나치게 길다는 점이다. 둘째는 인용하는 원전을 단장취의(斷章取義)하여 자신의 논의 전개에 종횡으로 배치하되 그 출처가 명시되어 있지 않은 날것이 많다는 것이다. 셋째는 도치문을 빈번하게 사용한 데서 오는 난해함이다. 이런 문제들에 대한 해결방법은 번역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몇 가지로 수렴되었다. 첫째, 원문의 맥락을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한 문장을 여러 문장으로 과감하게 나누었다. 둘째, 명확하게 인용문 출처를 밝힌 것을 제외하고는 원전에 있는 수많은 인용 표시를 생략하여 문장 안에 흡수하여 번역하되, 가능한 한 원전을 거의 확인하고자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필자의 인용 오류 혹은 인쇄상의 오류 확인도 적지 않았다. 이는 필자와 상의 후 정정했다. 셋째, 문장의 도치는 레토릭의 일종이거나 필자 특유의 문체이므로 최대한 존중하되 우리말로 옮겼을 때 어색한 경우에는 문장 구문을 정치(正置)시켰다. 그리고 근현대문학 연구를 하면서 별다른 필요를 느끼지 않던 자전을 다시 꺼내 들었다. 특히 ꡔ漢語大詞典ꡕ(1~12, 漢語大詞典編纂委員會 漢語大詞典編纂處 編纂, 漢語大詞典出版社)의 도움은 거의 절대적이었다.


1999년 가을, 번역의 초고를 마쳤을 때는 이 책을 김명호 선생의 주관 아래 출판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 즈음에 김 선생은 <마르코 폴로 총서>를 기획하고 있었는데, 옮긴이에게 여러 가지 유익한 이야기를 많이 해주었다. 이 자리를 빌려 그때의 따뜻한 성원에 감사를 드린다. 이 책의 출판과 관련하여 유세종 교수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 유세종 교수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이 책은 빛을 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는 번역 초고를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하게 읽고 교정했다. 이 과정을 통해 적지 않은 오역을 발견하여 바로잡았을 뿐만 아니라 직역 위주의 문어투를 자연스러운 우리말로 바꿀 수 있었다. 특히 ‘아름다운 한국어’를 고집하는 그는 문장의 리듬과 단어의 선택에서 거의 소모적이리만치 나와 피곤하게 논쟁하기도 했다. 탄쓰퉁 부분을 교정하면서 울었다고 하는 그는 수시로 날카로운 비판과 격려로 나를 지지해주었다. ‘난해한 암초’를 만나 내가 너무 오래 딴전을 피우고 있으면, 이 번역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라고 하면서.


최근 나의 연구와 관련된 교류는 주로 목포대학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학술공동체를 지향하는 아시아문화연구소의 동아시아학술포럼은 내가 주로 노니는 중국현대문학학회 이외의 또 하나의 학문적 둥지다. 그곳에서 학제간 연구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고 분과학문에 매몰되기 쉬운 연구의 균형감각을 얻을 수 있었다. 또한 인문관 교수들의 공부모임인 ‘문학/문화 이론연구회’는 부족한 공부를 서로 채찍질해주는 유쾌한 시공간이다. 몇몇 동료 교수는 이 책의 출간이 늦어지는 것이 나의 게으름 탓이 아닌가 하고 충고와 격려를 마다하지 않았다. 10년을 헤아리는 시간을 함께해온, 그리고 앞으로도 함께할 동료 교수들에게 두루 감사의 말을 전한다.

마지막으로, 처음 번역을 제안하고 오랜 시간을 기다려준 한길사의 김언호 사장님께 감사를 드린다. 난삽하고 방대한 원고를 꼼꼼하게 교정하고 우아한 책으로 꾸며준 한길사 편집부의 안과 밖 식구들에게도 모두 감사를 드린다. 옮긴이의 불성실로 인한 오류와 문제점에 대해서는 강호제현의 날카로운 비판과 충고로 계속 수정 보완할 것을 기대한다.

이 책은 안후이 문예출판사본(1994년)을 저본으로 삼았고 베이징 인민출판사본(1979년)과 톈진 사회과학출판사본(2003년)을 참고하였다.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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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디윈 > <해제> 실용이성 서체중용 개량
중국근대사상사론 한길그레이트북스 71
리저허우 지음, 임춘성 옮김 / 한길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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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춘추(春秋) 전국(戰國) 시기와 ‘근대(近代)’ 80년(아편전쟁~‘5․4’)은 “5․4 이전 중국의 수천 년의 사상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연구할 가치가 있는 두 시기”(李華興 1988, 『中國近代思想史』, 1쪽)라는 언급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춘추 전국 시기에 중국 사상의 원류(源流)라 할 수 있는 유가(儒家)와 도가(道家) 등의 사상이 정형화(定型化)되었다면, ‘근대’ 80년은 효력을 상실하여 무용지물이 되다시피 한 전통 사상을 대체할 새로운 사상체계의 수립을 모색하던 시기였다. 전통적 사상체계와 새로운 서양의 사상체계가 그들 앞에 놓여 있었고, 그들은 각자 취사선택하였다. 그들의 취사선택은 개인의 기질과 취향에 영향을 받았지만, 그 속에는 시대적 과제와 맞물린 역사의 흐름이 내재해 있었다.

‘전통의 창조적 계승’과 ‘외래의 비판적 수용’이라는 과제는 어느 시공간에서건 항상 함께 작동해야 할 기제(機制)이지만 그것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었다. ‘전통의 지속’이라는 측면에서 세계사에서 다른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중국의 경우 대규모의 외래문화 수용은 두 차례 있었다. 한 번은 인도 불교문화의 수용이었고 또 한 번은 서양문화의 수용이었다. 인도 불교문화의 수용은 한당(漢唐)시대의 거대한 문화적 사건이었다. 그것이 중국의 철학과 문학예술에 미친 영향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이 시기의 중국 문화는 가히 세계 최고 수준이었기 때문에 외래문화에 대해 관용적이고 주동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었다. 위진(魏晉)시대의 현학(玄學)의 흥성, 불경 번역 및 그 번역과정에서의 한자의 특성에 대한 인식, 그에 기초한 성운학(聲韻學)의 발달과 당시(唐詩)에 미친 영향, 불교 포교를 위해 구상된 변문(變文), ‘둔황(敦惶)문화’ 등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인도 불교문화에 대해 저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대체로 무리없이 수용되었고 ‘중국화’되어 ‘중국적 특색을 지닌’ 선종(禪宗)으로 발전시켰으며, 송대(宋代)에는 유학(儒學)과 불학(佛學)을 접목시켜 성리학(性理學)이라는 동양문화를 탄생시켰다.

이에 반해 ‘근대’로의 이행기에 들어온 서양문화는 제국주의의 중국 침략과 함께였다. 그러므로 불교문화에 대해서 대체로 환영과 수용의 태도를 취했던 중국은 서양문화에 대해서는 우선적으로 거부와 저항의 태도를 택하였다. 2천년이 넘도록 자신을 세계의 중심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문화를 세계 최고라고 여기던 중국이 서양문화에 대해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완강한 거부의 태도를 취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류짜이푸(劉再復) 등은 이런 심리상태를 ‘천조심태(天朝心態)’라고 하였고, “서방 사상과 문화적으로 접촉하고 사회가 불가피하게 근대화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근대 중국인의 천조심태가 강렬한 도전을 받았다”(劉再復․林崗 2002,『傳統與中國人』, 251쪽)고 평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서양문화에 대한 거부와 저항은 명말 천주교가 전래된 이래 ‘5․4’시기까지 모두 5차례에 걸쳐 나타났다고 한다. ‘명말청초의 사정(邪正)의 논쟁’, ‘아편전쟁 및 양무운동 시기의 이하(夷夏)의 논변’, ‘무술유신 전후의 중학과 서학의 논쟁’, ‘5․4 전후의 동서방 문화 문제의 논전’, 그리고 ‘중국은 어떤 문화를 채용해야 하고 어떤 길을 가야 하는가에 관한 논전’이 그것이다. 그 가운데 이 글에서 관심을 가지는 부분은 중학과 서학의 논쟁, 즉 ‘중체서용’설과 관련된 부분이다.



      2.



리쩌허우(李澤厚)는 ‘근대(近代)’ 사상사를 논하면서, 구제도를 비판하며 봉건 지주의 정통 사상과 대립하였던 세 가지 선진적 사회사조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것들은 서로 다른 역사시기에 처하고 세 가지 서로 다른 유형에 속하며 세 가지 서로 다른 특색을 가지고 있으면서 상호 전후 연속되어 있고 지양(止揚)하면서 보다 높은 단계로 매진하면서 중국에서의 맑스주의의 전파와 발전을 위해 길을 청소하였다. 이 세 가지 시대사조는 ‘태평천국 농민혁명 사상’과 ‘개량파 자유주의의 변법유신 사상’ 그리고 ‘혁명파 민주주의의 삼민주의’ 사상이다.(『中國近代思想史論』, 457쪽)


중국 ‘근대’의 사조․유파를 논할 때, 완고파(또는 보수파)-양무파-유신파-혁명파의 흐름에 비추어보면, 리쩌허우의 ‘개량파 자유주의의 변법유신 사상’은 궁쯔전(龔自珍)을 선구자로 삼은 광범한 의미의 ‘유신파’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 완고파에 대한 문제 제기가 태평천국 운동으로 드러났다면, 양무파는 태평천국 운동을 진압하면서도 그들의 문제 제기를 일정 정도 수용하였다 할 수 있다. 그것이 양무운동으로 표현되었고, 그 양무운동이 한계에 달했을 때 양무파 내부에서 개량파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개량파 역시 우파, 중도파, 좌파로 나눌 수 있으며 훗날 급진 좌파가 점차 개량파에서 이탈하여 혁명파로 전환하였다.

한 가지 재미있는 현상은, 유신파의 변법사조가 시대 사상의 주류로 나타났을 때 양무파는 완고파와 연합하여 유신파에 반대했다는 사실이다. 사실 “완고파는 맹목적으로 배외하고 우매하게 보수적이었다. 그들의 사상과 주장은 당시 지배적 지위를 점하던, 대다수 지주와 사대부들이 신봉하던 사회 이데올로기였다.”(『中國近代思想史論』, 79쪽) 그렇지만 변법 주장의 고조 속에서 완고파도 마지못해 각종 개혁 조치에 동의하고 그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이 시기 양무파는 완고파를 자신의 진영으로 아우르면서 거짓 ‘변법’ 주장을 제창하였다. 그리하여 유신파 대 양무․완고파라는 대립구도가 형성되었다. 그 속에서 유신파의 변법 방안과 양무파의 가짜 변법 방안이 투쟁하였고, 유신파의 민권 평등, ‘탁고개제(托古改制)’ 등 계몽주의적 사회 정치적 이론․사상과 봉건주의 통치자의 ‘중체서용(中體西用)’설이 대립하였다.

‘중체서용’이란 ‘중학위체(中學爲體), 서학위용(西學爲用)’의 약칭으로, 아편전쟁 이후 물밀듯이 밀려들어오는 서양문화에 대한 중국의 대응 논리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중학(中學)은 유교 경학(經學)과 그것에 기초한 봉건 예교(禮敎)를 가리키고, 서학(西學)은 과학기술->정치 제도->사상 의식의 순차적이고 층위적인 단계를 거치는 서양문화를 가리킨다. 그것은 중국의 전통을 본체로 삼되, 이전에는 업신여기던 서양의 정신적․물질적 문화를 부분적으로 수용하겠다는 태도였다. 체(體)와 용(用)이라는 가치 평가를 염두에 둔다면, 중체서용은 중화주의 또는 중국중심론의 변형이라 할 수 있다.

최초로 중체서용을 주장한 동시에 그 대표자로 평가되는 장즈둥(張之洞)의『권학편(勸學篇)』은 광쉬(光緖) 황제로부터 “논리 전개가 공정하고 통달하였으므로 학술과 인심에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라 칭찬 받았고 그로 인해 “조정의 힘을 빌려 전파되고 빠르게 국내에 퍼졌으며”(梁啓超) 그 영향이 매우 넓었던, 양무파의 거짓 변법론의 전형적인 대표작이었다. 장즈둥은 “공자(孔子)와 맹자(孟子)가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어찌 변법의 그릇됨을 논의하겠는가?”(張之洞, <變法第七7>,『勸學篇外篇』)라고 하면서 자신이 변법을 반대하지 않는다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각종 주장을 내놓음으로써 자신도 진보적인 변법유신주의자임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그가 주장한 ‘변법’의 특징은, “몇몇 지엽적인 주장을 제출하되 절실한 의의가 있는 당면 변화 문제의 주요 관건이었던 의회 개설과 정치 법률 제도의 개혁을 근본적으로 반대하였고 당면한 구체적인 실제 요구(厘金 폐지, 관세 부가 등)에 대해 가능한 언급을 회피하였다”(『中國近代思想史論』, 80쪽)는 점에 있었다. 그러므로 당시 유신파 인사들은 이를 강렬하게 비판하였다. 특히 허치(何啓)와 후리위안(胡禮垣)은 별도로 책을 지어 조목조목 반박함으로써 그 지배 계급적 입장의 본질을 폭로하였다.

장즈둥은 변법유신의 구체적 문제에 대해서는 유신파를 가장하는 속임수를 썼지만, 보다 관건적이었던 유신파의 민권 평등의 이론․사상에 대해서는 진보적인 사상을 정치적으로 박해하고 이론적으로 공격함으로써 자신의 본질을 폭로하였다. 사실 양무파는 부르주아 민권평등 사상을 두려워한 점에서 완고파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들은 이 사상이 인민을 선동․현혹시킴으로써 더 이상 충효와 절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게 하고 기강이 흐트러져 노예와 병졸들이 귀족과 관리의 위에 군림할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러므로 자신들의 통치를 수호하려면 수천 년간 내려온 “군주는 군주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운(君君臣臣父父子子)” 사회 질서와 사회 의식이 동요되지 않도록 진력해야 하였다.


중학은 내학이고 서학은 외학이며, 중학은 심신을 다스리고 서학은 세상사에 호응한다. 모든 것을 경문에서 찾을 필요는 없지만 반드시 경의(經義)에 어그러지지 말아야 한다. 그 마음이 성인의 마음이고 성인의 행동을 행하며 효제와 충신을 덕으로 삼고 군주 존중과 백성 비호를 정(政)으로 삼는다면, 아침에 자동차를 운전하고 저녁에 철로를 달리더라도 성인의 제자됨에 해가 없을 것이다.(張之洞, <會通第十三>,『勸學篇外篇』)


이것이 바로 유명한 양무파의 ‘중체서용’설이다. 그것이 의식적인 강령으로 제출된 것은 본래 캉유웨이(康有爲) 등의 민권평등의 이론을 겨냥한 것이었다. 그것은 당시와 이후,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지만, 당시부터 유신파 사상가들의 소박하면서도 신랄한 조소를 만났다.


체용(體用)은 한 사물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소의 본체가 있으면 무거운 짐을 지는 작용이 있으며, 말의 본체가 있으면 멀리 달리는 작용이 있다. 소를 본체로 삼고 말을 작용으로 삼는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중학과 서학의 다름은 중국인과 서양인의 면목만큼이나 다르고 억지로 비슷하다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중학은 중학의 체용이 있고 서학은 서학의 체용이 있다. 그것을 분별하면 함께 설 수 있지만 그것을 합하면 둘 다 망한다.(嚴復)


옌푸가 비판하는 기준은 체용불이(體用不二)의 관점이다. 흔히 양무파의 핵심이라고 하는 ‘중체서용’설은 유신파가 시대의 주류가 된 시점에 유신파의 민권평등 사상을 비판하기 위해 장즈둥에 의해 제기되었다. 그것은 표면적으로 유신파가 제기하는 변법의 내용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취하는 듯이 보였지만, 사실상 핵심적인 측면에서는 그것을 거부하였다. 다시 말해, ‘본체’와 ‘작용’을 나눌 수 없고 부르주아 민권평등과 변법유신이 일치한다는 유신파의 주장과는 달리, 민권평등은 반대하되 선박과 철도는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천연론(天演論)』을 번역하고 서양의 경험론 철학을 소개하였으며 ‘자유를 본체로 삼고 민주를 작용으로 삼았다(以自由爲體, 以民主爲用)’라는 평가(『中國近代思想史論』, 269~276쪽)를 받고 있는 옌푸(嚴復)는 체용불이의 관점에서 장즈둥의 ‘중체서용’을 예리하게 비판하였던 것이다.

리쩌허우는 이 시기의 사상사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캉유웨이와 탄쓰퉁(譚嗣同) 등의 ‘탁고개제(托古改制)’, ‘삼세대동(三世大同)’의 사상은 ‘중체서용’ 사상과 얼마나 본질적인 차별이 있었는지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전자는 ‘공자의 도’라는 성인의 외투 속에 성도(聖道)와 괴리되는 일련의 신선한 부르주아 사상을 주입하였고(이는 거꾸로 ‘西體中用’이라 할 수 있다), 후자는 오히려 봉건 성교를 사력을 다해 수호하기 위해서 서양의 황금으로 도금하여 강화 보호하였다. 그러므로 ‘중체서용’ 이론이 가장 일찍 사상 영역에 반영되어 봉건체제라는 강시(僵尸, 즉 ‘본체’)를 완고하게 끌어안고 놓지 않았다.(『中國近代思想史論』, 83쪽)


역사적 의미에서의 중체서용설은 ‘천조심태’라는 무의식의 표현이자 변형된 중국중심론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유신과 개량이 주류가 된 시대에 봉건 예교를 사수하기 위해 서양의 문화를 빌어 도금함으로써 거짓 변법을 주장하던 사람들의 주장이었던 것이다. 그 대표인 장즈둥의 ‘중체서용’의 본질은 유가의 기본 학설을 따르고 유학과 공맹(孔孟)의 기본정신에 충실하고자 한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후술하겠지만, 이는 중국 ‘문화심리구조의 보수성’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중체서용론을 ‘중학과 서학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그것을 외래문화 수용과 연계시킨 민두기의 논의는 흥미롭다. 민두기는 <중체서용론고>에서 ‘중체서용’론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에 의문을 표시하면서 그것을 양무파와 유신파를 아우르는 논리로 확장시키고 있다. 그에 의하면 “중체서용론은 체계를 달리하는 서양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한 것으로서 청말(淸末) 사상사의 경우 이른바 윤상(倫常)을 강조하는 양무론이나 공교(孔敎)를 강조하는 변법론을 다 포함해야”(閔斗基 1985,『중국근대개혁운동의 연구』, 52쪽)한다고 하면서, 중학과 서학의 관계맺기라는 관점에서 중체서용론을 이해해야 한다고 하였다. 중학과 서학을 각각 독립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서학이 물밀듯이 들어오던 시기에 중학과 서학을 연결지으려는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中)’이라 불리우는 자기 주체의 확인 및 기존가치질서의 보존, 서양문물의 수용을 연결시키고자 한 것이 중체서용론인데, ‘중’과 ‘서’의 관계는 체용(體用)이란 철학적 용어가 갖고 있는 엄격한 의미를 의식하고 사용된 경우는 별로 없고 거의가 선후(先後), 주보(主輔), 심지어 양(量)의 다소를 의미하기도 하였다. … 중요한 것은 ‘서’의 내용이며 어떻게 ‘서’를 수용할 것인가 하는 방법이었지, 체용의 논리관계가 아니었던 것이다.”(閔斗基 1985, 52쪽) 그러므로 그것은 “이질적 문화를 받아 그것을 수용해야 하는 상황에서 거의 보편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하나의 논리구조”(閔斗基 1985, 53쪽)라고 맺은 결론은 그야말로 탁견(卓見)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보면 중체서용론은 19세기 중엽부터 본격화된 중서 문화 교류에 대해 중국인들이 취한 외래문화의 수용 논리라 할 수 있다. 오로지 중화만을 고집하고 그밖의 것은 외이(外夷)로 규정하여 수용하지 않았던 기존의 관례를 염두에 둔다면, 중체서용론은 “서학, 서구문화가 중학, 중국문화와 필적하는 체계적 학문 또는 문화의 하나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임을 뜻한다.”(조병한 1997,「19세기 중국 개혁운동에서의 ‘中體西用’」) 한 걸음 더 나아가 중체서용론은 이 시기 “(중학과 서학의-인용자) 모순의 틈을 비집고 서학의 수용을 위한 공간을 마련한 것이며, 따라서 이 시기의 그 실천적 의의는 ‘중체’보다는 오히려 ‘서용’에 있는 것”(李時岳 胡濱 1988,『從閉關到開放: 晩晴洋務熱透視』)이라는 평가까지 나올 수 있다. 예를 들어, 캉유웨이(康有爲)의 ‘탁고개제(托古改制)’ 사상은 이 시기 중체서용론의 대표적인 것으로, 중학의 대표자인 콩즈(孔子)를 빌어 그도 제도를 개혁하려 했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서유럽의 부르주아 자유주의를 끌어들였던 것이다. 물론 캉유웨이 등의 사대부 계급적 한계를 무시해서는 안되겠지만, 캉유웨이의 ‘탁고(托古)’는 ‘개제(改制)’를 위한 전술․전략으로 이용되었던 점은 중세서용의 실천적 의의를 ‘서용(西用)’에 두고 있다는 주장의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으로 중체서용론을 중학과 서학의 관계맺기, 즉 자신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외래를 수용하는 논리로 파악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체(體)와 용(用)이라는 외피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중학과 서학에 대등한 지위를 부여하면서 상호 배척하기도 하고 상호 조화되기도 하는 것으로까지 확대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확대 해석이 가능하다면, 중체서용론은 전환기 중국의 ‘계승(繼承)과 수용(受容)의 논리(論理)’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즉 완고한 중화사상의 억압 아래 새로운 서양의 문물을 들여오기 위해 전술적으로 체용론의 외피를 입혀 반발과 압제를 완화시키면서 중학과 서학의 관계맺기를 탐색하는 ‘근현대화(近現代化)와 민족화(民族化)의 시대적 패러다임’으로서의 가능성도 부여할 수 있겠다.



      3.



민두기와는 다른 각도에서, 리쩌허우는 ‘중체서용론’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서슴지 않는다. ‘중학’이 가지는 강고한 전통의 힘이 ‘서학’을 뒤덮은 것이 근현대 중국의 역사과정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그러므로 ‘문화심리구조’와 ‘실용이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전통을 재해석하면서 역으로 ‘서체중용’을 내세운다.

리쩌허우는 <중국인의 지혜 시탐(試探中國人的智慧)>에서 ‘자아의식의 반사사(反思史)’라는 전제 아래, “중국 고대 사상에 대한 스케치라는 거시적인 조감을 거쳐서 중국 민족의 문화심리구조의 문제를 탐토(探討)하는 것”(『中國古代思想史論』, 294쪽)을 자신의 과제로 제시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사상사 연구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인간들의 심리구조 속에 침전되어 있는 문화전통으로 깊이 파고들어 탐구하는 것이다. 본 민족의 여러 성격 특징(국민성, 민족성) 즉 심리구조와 사유모식을 형성하고 만들고 그것들에 영향을 주는 것에 대한 고대 사상의 관계를 탐구하는 것이다.”(『中國古代思想史論』, 295쪽) 리쩌허우는 바로 그런 과정을 거쳐 중국의 지혜를 발견하고자 한다. 중국의 지혜란 “문학, 예술, 사상, 풍습, 이데올로기, 문화현상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그것은 “민족의식의 대응물이고 그것의 물상화이자 결정체이며 일종의 민족적 지혜”라고 생각한다. 그의 ‘지혜’의 개념은 대단히 광범하다. “사유능력과 오성”, “지혜(wisdom)와 지성(intellecture)”을 포괄하되, “중국인이 내면에 간직한 모든 심리구조와 정신역량을 포괄하며, 또 그 안에 윤리학과 미학의 측면, 예컨대 도덕자각, 인생태도, 직관능력 등을 포괄한다.” 중국인 사유의 특징은 바로 이 광의의 지혜의 지능구조와 이러한 면들이 서로 녹아 섞인 곳에 존재한다는 것이다.(『中國古代思想史論』, 295쪽)

지혜의 개념은 그의 또 다른 핵심어인 ‘문화심리구조’와 상통하는 것으로 보인다.  ‘문화심리구조’는 리쩌허우의 학술 체계에서 가장 핵심적인 개념의 하나다. 그것은 유가학설을 대표로 하는 전통문명과 더불어 이미 일반적인 현실생활과 관습․풍속 속에 깊숙하게 침투하여, 구체적인 시대나 사회를 초월하는 것이다. 그것은 ‘가정 본위주의’, 즉 ‘혈연적 기초’에 기원을 가지고 있고, 소생산 자연경제의 기초 위에 수립된 가족 혈연의 종법제도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혈연 종법은 중국 전통의 문화심리구조의 현실적인 역사적 기초이며, ‘실용이성’은 중국 전통의 문화심리구조의 주요한 특징이다. 황성민은 문화심리구조를 방법론의 총합으로 본다. “구조주의적 문화인류학의 성과를 받아들이고, 칸트의 선험적 인식론과 피아제의 발생인식론 등을 역사적 유물론과 결부시켜 이해하고 해석한 이론도 수용하였으며, 한편으로는 니덤 이후 중국철학연구의 중요한 방법으로 도입된 유기체이론 및 현대과학이론의 하나인 체계이론 등 다양한 분야를 하나의 관점에서 종합하여 제기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황성민 1992,「전통문화에 대한 반성과 서체중용론」,『현대중국의 모색 - 문화전통과 현대화 그리고 문화열』, 377쪽). 또한 실용이성은 이렇게 해설한다. “실용이성(혹은 실천이성)은 경험적인 실용성을 중시하는 이성이다. 이성이라고 해서 감성적인 것을 전혀 도외시하지 않고 감성의 지나침과 모자람을 적절히 조절하는 작용도 한다. 따라서 이 실용이성은 중국인이 광신적인 종교에 빠지거나 현실을 허무적인 것으로 보지 않게 하여 자기 생존을 유지케 하는 방법이자 정신이 되었다.”(황성민 1992, 378쪽).

‘실용이성’은 혈연(血緣), 낙감문화(樂感文化), 천인합일(天人合一)과 함께 중국의 지혜의 하나이다. 혈연이 중국 전통사상의 토대의 본원이라면, 실용이성은 중국 전통사상의 성격상의 특색이다. 그것은 선진(先秦)시기에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선진 제자백가(諸子百家)들은 당시 사회 대변동의 전도와 출로를 찾기 위해 제자들을 가르치고 자기 주장을 펼쳐, 상주(商周) 무사(巫史)문화에서 해방된 이성을, 그리스의 추상적 사변이나 인도의 해탈의 길이 아니라, 인간 세상의 실용적 탐구에 집착하게 하였다. 장기간의 농업 소생산의 경험론은 이런 실용이성을 완강하게 보존되게 촉진한 중요한 원인이었다. 중국의 실용이성은 중국 문화, 과학, 예술의 각 방면과 상호 연계되고 침투되어 형성, 발전하고 장기간 지속되었다. 중국의 실용이성은 중국의 4대 실용문화인 병(兵), 농(農), 의(醫), 예(藝)와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병, 농, 의, 예는 광범한 사회민중성과 연관되어 있을 뿐 아니라 생사(生死)와 관련된 엄중한 실용성과 관련되어 있고 아울러 중국 민족의 생존과 직접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중국 실용이성의 전통은 사변이성의 발전을 저지하였을 뿐 아니라 반(反)이성주의의 범람을 배제하였다. 그것은 유가사상을 기초로 삼아 일종의 성격-사유 패턴을 구성하여 중국 민족으로 하여금 일종의 각성하고 냉정하면서도 온정이 흐르는 중용(中庸) 심리를 획득하고 승계(承繼)하게 하였다.(『中國古代思想史論』, 301~302쪽)

중국의 실용이성은 불학을 수용할 때 “감정적인 고집에 사로잡히지 않고, 기꺼이 그리고 쉽사리 심지어는 자기와는 배척되는 외래의 사물까지도 받아들”(『中國現代思想史論』)이게 하였고, ‘5․4’시기에 “다른 민족의 문화에서는 나타난 적이 없었던 종류의 전반적인 반전통적 사상․정감․태도와 정신”이 나타나게 하여 “중국 현대의 지식인들은 아무런 곤란 없이 마르크스를 공자 위에 올려놓을 수 있”게 하였다. “그러한 전반적인 반전통적 심태는 바로 중국 실용이성 전통의 전개이기도 하다.”(『中國現代思想史論』)

그러나 이 ‘문화심리구조’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직관적이고 원시적이며 미성숙한 우주론 체계모델(앞의 오행론 체계모델)이 그곳에 자리잡으면서 완성되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본다. 이 우주론 체계모델은 반복적이며 변동이 거의 없는 농업소생산(순환성), 자급자족이라는 폐쇄적인 자연경제(폐쇄성), 강고한 종법혈연의 규범(질서성) 등을 중국사회에 장기적으로(현재까지) 지속케 하는 원인이 되었다.(황성민 1992, 380쪽)

문화심리구조는 전통의 다른 표현이다. 그것은 “때로는 전통의 우량한 정신이 새로운 사회로의 진입에 활기를 불어넣고 때로는 전통의 열등한 정신이 이를 저해하는 순환적 과정이었지만 결국 이러한 움직임이 귀착하는 곳은 문화심리구조의 보수성이었다.”(황성민 1992, 381쪽) 그러기에 우리는 ‘옛날부터 가지고 있었다(古已有之)’라든가, ‘선왕을 모범으로 삼는다(法先王)’ 라는 등의 교조에 얽매어 벗어나지 못하였던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개인적인 주관성의 범위를 벗어나 사회의 경제, 정치, 문화라는 복잡한 관계 속에서 형성․유지”되어와 “중국인이 서양 내지 세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제약”(황성민 1992, 388쪽)해왔다는 점이다. 이 점을 해결하기 위해 리쩌허우는 새로운 대안으로 ‘서체중용’을 제시하게 된다.


만일 근본적인 ‘체’는 사회 존재, 생산양식, 현실생활이라고 인정한다면, 그리고 현대적 대공업과 과학기술 역시 현대 사회 존재의 ‘본체’와 ‘실질’이라고 인정한다면, 이러한 ‘체’ 위에서 성장한 자아의식 혹은 ‘본체의식’(혹은 ‘심리본체’)의 이론 형태, 즉 이러한 ‘체’의 존재를 낳고 유지하고 추진하는 ‘학’이 응당 ‘주’가 되고, ‘본’이 되고, ‘체’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물론 근현대의 ‘서학’이며, 전통적인 ‘중학’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의미에서 여전히 ‘서학을 체로 삼고 중학을 용으로 삼는다’라고 다시 말할 수 있는 것이다.(『中國現代思想史論』)


맑스주의, 과학기술 이론, 정치․경제관리이론, 문화이론, 심리이론 등 갖가지 다른 사상․이론․학설․학파도 포함한 서학을 체로 삼고, 중국의 각종 실제상황과 실천활동에 어떻게 적용하고 응용하는가 하는 것을 용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리쩌허우가 중체서용론을 검토하면서 우려한 것은, 모든 ‘서학’이 중국의 사회존재라는 ‘체’, 즉 봉건적인 소생산적 경제기초와 문화심리구조 및 실용이성 등의 ‘중학’에 의해 잠식될 가능성이었다. 중국 근현대사의 진행과정에서 그것은 사실로 판명되었다. 태평천국운동이 서유럽에서 전래된 기독교의 교리를 주체로 삼고 중국 전통 하층사회의 관념․관습을 통해 그것을 응용한 것으로 보였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중체서용’이었다. 이때의 ‘중학’은 전통사회의 소생산 경제 기초 위에서 자라난 각종 봉건주의적 관념․사상․정감이었다. 이 때문에 여기서의 ‘서학’은 한꺼풀의 껍데기에 지나지 않았다. 농민전쟁은 그 자체의 법칙을 가지고 있으며, 홍슈취안(洪秀全)이 들여온 서유럽의 기독교는 그 ‘중국화’ 속에서 합법칙적으로 ‘봉건화’되어 버렸던 것이다. 이는 사회주의 혁명과정에서 맑스주의를 ‘중국화’하여 ‘중국적 맑스주의’ 또는 ‘중국적 특색을 가진 사회주의’로 바꾼 것에도 해당되는 것이다.



      4.



우리가 특정한 역사 사건을 고찰할 때, 당연히 사건의 역사적 맥락과 더불어 보편적 논리로의 승화 가능성을 검토해야 할 것이다. 중국 근현대의 역사과정에서 흔히들 양무파의 핵심 주장이라고 알려진 ‘중체서용’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그것이 명확하게 구호로 제창된 역사적 맥락은 캉유웨이 등의 유신파의 민권평등 이론을 비판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범위를 확대해 보면, 아편전쟁 전후부터 본격화된 외래 수용의 문제는 수많은 선각자들의 관심 대상이 되었고, 그들은 여러 가지 차원에서 서학을 학습하는 문제를 고민하였다. 그들이 관심을 가지고 고민했던 문제의식을 우리는 ‘중체서용적 사유방식’이라 개괄할 수 있을 것이다. 웨이위엔(魏源)의 ‘오랑캐의 장기를 배워 오랑캐를 제압하자(師夷長技以制夷)’라는 주장은 그 효시라 할 수 있다. 이후 양무운동의 주축이었던 리훙장(李鴻章)의 막료였으면서도 “개량파 사상의 직접적인 선행자였고 1830~40년대부터 1870~80년대 사상의 역사에서 중요한 교량”(『中國古代思想史論』, 47쪽)이라 평가되는 펑꾸이펀(馮桂芬)을 거쳐 왕타오(王韜), 정관잉(鄭觀應), 그리고 캉유웨이 등의 개량파 사상가들이 모두 ‘중체서용적 사유방식’을 운용하였다.

중체서용의 실천적 의의가 ‘서용(西用)’에 있다는 주장에 동의한다면, 리쩌허우의 ‘서체중용’을 이해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그는 근현대 중국의 역사과정에서 중국의 전통이 가지는 강고한 힘이 외래(外來)를 압도했다고 본다. 그러므로 그의 과제는 전통을 해체하고 재해석하는 것이다. ‘문화심리구조’, ‘실용이성’ 등은 이 과정에서 만들어진 개념이다. 그리고 현대적 대공업과 과학기술을 현대 사회 존재의 ‘본체’와 ‘실질’로 인정하여 그것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것은 전통적인 ‘중학’이 아니라 근현대의 ‘서학’인 것이다.

리쩌허우와 류짜이푸는 1989년 ‘6․4 천안문 사건’ 이후 중국을 떠나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20세기 중국’에 대한 심층적이고 종합적인 대화를 나눌 기회를 가진다. 두 사람은 20세기 중국을 혁명의 시대라고 규정하면서 혁명보다는 이성적인 개량이 필요했었다고 진단한다. 그리고 그 혁명의 핵심에 자리했었던 마오쩌둥(毛澤東)의 공과(功過)를 논하면서 그의 비극의 핵심을 “경제가 근본이라는 것을 무시하고 이데올로기를 맹신했던 점과 평화시기라는 것을 무시하고 전쟁의 경험을 맹신했던 점”(『고별혁명』, 233쪽)으로 요약하였다. 두 사람은 마오쩌둥의 비극의 연원을 개인으로만 국한시키지 않고 중국 근현대사의 본질적 특성과 연계시켰다. “1895년, 갑오해전에 패배한 이후로 중국은 줄곧 ‘혁명의 길’과 ‘개량의 길’ 사이의 논쟁에 휘말려 있었다. 전자는 ‘돌변(突變)’ 즉, 계급투쟁이라는 극단적인 방식(폭력수단)으로 국가기구를 전복시켜 역사의 발전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고, 후자는 ‘점변(漸變)’ 즉, 계급협력의 비폭력 수단으로 국가적, 사회적 자아의 경신을 추구하자는 것이다.”(『고별혁명』, 7쪽) 특히 리쩌허우는 1958년 ꡔ캉유웨이와 탄쓰퉁의 사상 연구ꡕ를 출간할 때만 해도 “캉유웨이를 중심으로 하는 변법자강운동의 개량사상이 20세기 초의 혁명에 반대하면서 점차 ‘반동적이고’ ‘역사의 진보를 가로막는’ 것이 되었다는 관점을 인정”(『고별혁명』, 448~9쪽)하였지만, 20세기를 관통하며 진행되었던 혁명이 격정적인 정서에 휩싸였다는 점을 인식하면서 ‘과도한 격정의 혁명’보다는 ‘이성적인 개량’이 중국에 필요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5.


중국 근현대사 시기구분에 관한 리쩌허우의 견해도 유연하다. 모두 알다시피 리쩌허우는 ‘사상사론’ 시리즈를 내면서 ‘고대’, ‘근대’, ‘현대’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그는 도처에서 ‘근대’와 ‘현대’를 하나로 묶어 ‘근현대’라 칭하면서 그에 대한 시기구분을 시도하였다. 미리 알아둘 것은 그의 시기구분이 하나만을 고집하지 않고 관점과 대상에 따라 유연한 유동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근현대에 대한 ‘개괄적인 시기구분’(Ⅰ)을 보자. 그는 “중대한 역사 사건은 의당 그 사건이 계급투쟁 총형세의 전환점을 체현하였는가라는 의미에 엄격하게 제한하여야만 사회 발전 추향의 계급적 성격을 표지할 수 있다”고 하면서 중국 전체의 근현대를 “(1) 1840~1895, (2) 1895~1911, (3) 1911~1949, (4) 1949~1976, (5) 1976 이후”의 다섯 단계로 나누었다(『中國近代思想史論』, 278쪽). 이는 ‘근대’의 시기구분을 설명하다가 그 상위 기준을 언급하면서 제기한 것이기에 그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생략되어 있다. 위의 시기구분에서 눈에 띄는 것은 1919년의 5․4 운동이 분기점에서 빠진 점이다. 아마도 ‘계급투쟁’의 관점에서는 5․4 운동이 신해혁명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파악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세대별 또는 문예사의 시기구분에서는 달라진다.

루쉰의 사상을 논술하면서 리쩌허우는 중국 근현대 ‘지식인의 세대구분’(Ⅱ)을 시도한다. 그에 의하면, (1) 신해 세대, (2) 5․4 세대, (3) 대혁명 세대, (4) ‘삼팔식’ 세대이다. 이에다가 (5) 해방 세대(1940년대 후기와 1950년대)와 (6) 문화대혁명 홍위병 세대를 더하면 중국 혁명의 여섯 세대 지식인이다. 그리고 (7) 제7세대는 완전히 새로운 역사 시기일 것이라 했다. 이는 물론 루쉰 이전 세대(아편전쟁 세대, 양무 세대, 유신 세대 등), 즉 (Ⅰ-1)은 제외한 세대구분이다. 이를 첫 번째 시기구분과 연계시켜 보면, (Ⅱ-1)은 (Ⅰ-2)에 해당하고, (Ⅱ-2, 3, 4)는 (Ⅰ-3)에 해당하며, (Ⅱ-5, 6)은 Ⅰ-4)에 해당하고 (Ⅱ-7)은 (Ⅰ-5)와 동일함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부분에서는 신해혁명이 실패한 후 지식인의 세대구분(Ⅲ)을 세밀하게 하기도 했다. (1) 계몽의 20년대(1919~27), (2) 격동의 30년대(1927~37), (3) 전투의 40년대(1937~49), (5) 환락의 50년대(1949~57), (6) 고난의 60년대(1957~69), (7) 스산한 70년대(1969~76), (8) 소생의 80년대, (9) 위기의 90년대. 이는 10년 단위로 근현대사를 이해하기 좋아하는 중국인의 문화심리구조를 염두에 둔 개괄로 보인다.

「20세기 중국(대륙)문예 일별」에서  ‘지식인의 심태(心態) 변이(變異)’(Ⅳ)를 기준으로 다음과 같이 구분했다. (1) 전환의 예고(1898 戊戌~1911 辛亥), (2) 개방된 영혼(1919~1925), (3) 모델의 창조(1925~1937), (4) 농촌으로 들어가기(1937~1949), (5) 모델의 수용(1949~1976), (6) 다원적 지향(1976년 이후).

사실 1990년대 중국 근현대문학 연구의 전환점을 이루었던 ‘20세기 중국문학’ 개념은 리쩌허우의 자장권 내에 있음을 알 수 있다. 20세기 중국문학의 대표 논자인 천쓰허(陳思和)는 그 영향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이 글(「중국 신문학 연구 정체관」)의 6개 문학 층위에 관한 묘사는 리쩌허우 선생의 ꡔ중국 근대 사상사론ꡕ 「후기」의 영향을 받은 것 … 그의 수 세대 인물에 관한 사로(思路)는 나를 계발하였고 나로 하여금 중국 신문학에 대해 금세기 초부터 신시기까지를 하나의 유기적 총체(整體)로 삼아 고찰하게끔 촉진하였다.”(『黑水齋漫筆』, 111쪽) 또한「20세기 중국문학을 논함」의 주집필자인 첸리췬(錢理群)도 1993년 서울에서 개최된 중국 현대문학 국제 심포지엄에 참가했을 때 사석에서 ꡔ중국 근대 사상사론ꡕ으로부터 받은 계발을 피력하면서 이 책이 아직도 번역되지 않은 사실에 의아해하기도 했다.

크게 네 종류의 시기구분을 요약하면서 리쩌허우의 유연한 유동성을 다시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확실한 사실은, 시기구분의 기준이 계급투쟁이 되었건, 세대가 되었건, 아편전쟁은 그 이전과 이후를 나누는 중요한 분기점이라는 사실이다. 문예의 시기구분에서 ‘20세기’라는 표현을 쓴 것은 아편전쟁 이후의 변화가 심태(心態)에 반영된 것이 19세기 말 20세기 초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고유명사 표기와 리쩌허우의 시기구분에 대해 요약하는 것이 필요할 듯하다.

지난 연말 <중국학센터>(http://www.sinology.org/)에서 ‘중국어 한글 표기’에 대한 논의가 벌어진 적이 있었다. 기조 발제자인 엄익상 교수가 기존의 ‘최-김안’과 ‘정부안’(문화체육부 고시 제1995-8호(1995.3.16) 외래어 표기법)을 검토하면서 자신의 안을 내놓고, 그에 대해 여러 논자들이 각각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여기에서 세 가지 안의 장단점을 논할 겨를은 없다. 이 책을 내면서도 중국어 한글 표기 문제로 6개월 이상의 씨름을 거쳤다는 사실만 말하기로 하자. 그 결과가 ‘정부안’을 따르는 것이었다. 1995년의 ‘정부안’은 그동안 떨쳤던 악명에 비해서는 무난한 편이다. 다만 여전히 납득하기 어려운 몇 가지 문제가 존재하고 있다. 자세한 것은 <일러두기>를 참조하기 바란다. 고유명사는 처음에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하다. 중국 최고 지도자 가운데 장쩌민(江澤民)까지는 ‘강택민’이라는 한자 독음이 혼용되었지만, 후진타오(胡錦濤)에 이르러서는 ‘호금도’라고 부르는 사람이 거의 없는 듯하다. 매스컴에서도 모두 원음 표기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매스컴의 중요성을 새삼 확인하게 만드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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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후훗 > 그림을 읽는다
동양화 읽는 법
조용진 / 집문당 / 1989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서양화와 동양화..그림에대한 많은 지식이 없어도 동양화와 서양화를 구분짓기는 아주 쉽다. 인물이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자연을 흐릿하게 그려놓은 그림은 대개 서양화이다. 반대로 커다란 화폭과 구름, 나무와 강이 펼쳐진 한편에 자연스럽게(아주 조그맣게)사람이 그려져 있는것이 동양화다. 그리고 나는 자연과의 조화를 중요시하는 이런 동양화에 더 관심이 간다. 그리고 동양화 중에 동양인만의 독특한 우주관 내지는 인생관을 조형하기에 적합한 그림인 산수화를 좋아한다. 자연에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고 자연과의 조화를 지향하는 물아일체를 추구하는것이랄까.

이 책에는 동양화를 보는 법이 아닌 읽는 법이 나와있다. 단순히 그림만 보는게 아니라 그림에 숨은 뜻이랄까.. 그런것을 찾게 해주는데, 그중에 인상 깊었던 것은 과거 시험에서 장원급제를 한 그림을 읽는 법이었다. 한 과거시험에선 '산속에 있는 절'을 그리는게 시험문제 였다고한다. 그 중에 급제를 한 그림이 이러했다.

커다랗게 산과 숲을 그리고 아래로는 시냇물이 흐르게 그려 놓고는, 아주 조그맣게 스님이 물을 길러 가는 모습을 그렸다. 그리고 절은 그림에선 찾아볼수가 없다. 스님이 물을 길러 가는 모습은 스님이 산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한다. 그리고 스님이 산속에 산다면 당연히 절이 산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림에서 절이 안보이는 이유는 산속 아주 깊은 곳에 있어 가려져서이다. 산속에 물을 길러가는 스님이 있는 그림 하나에 이렇게 깊은 뜻이 있었던 것이다.

또 어떤 과거 시험에선 '꽃밭을 걸어가는 말'을 그리는게 시험문제 였다고 한다. 이 책을 읽기전에 자신이 한번 '꽃밭을 걸어가는 말'을 그려보기 바라다. 생각하건데 분명 꽃밭을 그리고 그 위를 걸어가는 말을 그리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중에 한명이 이 책을 읽기전에 나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 시험에서 장원급제를 한사람의 그림은 실로 놀라웠다. 역시 배경에 커다랗게 산과 나무와 구름이 그려있다. 그렇지만 꽃밭은 커녕 꽃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보통의 숲길을 말이 걸어간다.

그리고...말의 다리 주위에 아주 조그만 나비 두마리가 날아디닌다. 이 부분을 읽고 '아~'라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잇는건지..말의 다리 주위에 나비가 날아다닌 다는 것은 그림에서는 찾아볼수 없지만, 전에 말이 꽃밭을 밟고 지나가 말의 발에 꽃 향기가 배어있음을 나타낸다. 이 그림을 읽고 놀라는건 나뿐이 아닐 것이다.

이 그림도 그냥 보았다면 '이 숲을 걸어가는구나..' 라고 생각 했을 건데, 이 책은 제목 그대로 그림을 읽는 법을 알려줘 그림을 즐기는 묘미를 한층 더해준다. 뿐만 아니라 이 그림들을 그린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의 심정이랄까..화가들의 재치랄까..이런 깊은 내면까지 엿 볼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이 책을 읽을수록 '동양화 읽는법'이라는 이 책의 제목이 정말로 잘 들어맞는다는 생각을 떨칠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은 이 책을 읽고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기분을 느꼈으면 하는 바램에 조금 긴 잡담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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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최근에 나온 책들(46)

장마철 치고는 모처럼 개인 날이다. 두 주 전에 책정리(=노가다)를 좀 한 후유증으로 며칠 앓고 나서는 '회복기' 같은 한 주를 보냈다(그래봐야 여기저기 좀 쑤시고 배탈이 난 정도였지만). 15년 전 제대를 하고 나서 다시 서울로 올라와 단촐한 하숙집 독방에 둥지를 틀었을 때, 내가 싸들고 온 책들은 4단짜리 책장을 절반도 채우지 못했었다. 물론 그러고 2년이 못 되어 내 방은 다리를 뻗고 자기도 어려울 만큼 책들로 가득 차게 되었지만(책이 많은 게 아니라 방이 작았다고 해두자). 당시는 책이 지금처럼 많이 나오지도 않았고, 책을 구할 수 있는 루트가 지금처럼 다양하지도 않았다(요즘은 소장하는 책 중 사는 책의 비율이 20% 정도밖에 안된다. 나머지는 다 복사/제본한 책들이다). 물론 요즘은 구하기 힘든 (원서)마스터본들을 당시에는 쉽게 접할 수 있었지만. 하여간에 그 증식 속도에 있어서 책들은 어느 박테리아 못지 않다. 한마디로 못말리는 책들인 것.

세월은 흘러, 6년전 지금 살고 있는 전세집에 이사를 올 때 아파트 경비 아저씨는 서점을 하다가 왔냐고 내게 물었다. 지금 그 책들은 2배가 넘게 불어나 있으며, 이번에 50-60권을 갖다 버렸다(그간에 이렇게 버리고 남주고 헌책방에 갖다 팔고 한 책들이 500권은 된다). 전체로 따지면 아마 1%도 안될 듯싶지만. 집사람이 몰래 갖다버린다고 하도 으름장을 놓길래 자진해서 읍참마속을 결행한 것. 장마철이지만 책은 다행히도 잠시 비가 멎은 날에 내다놓았다. 주로 잡지와 소설책(무슨무슨 수상작품집), 그리고 <복잡계 경제학> 같은 책들이었다(사다놓은 경제학 책만 해도 꽤 되는 내가 재테크의 기본도 모른다는 것은 아이러니이자 여기저기서 무시당하는 빌미이다). <어리숙한 척 남자 부려먹기> 같은 책도 누가 볼세라 이 참에 버렸다. 그렇게 갖다 버리고, 또 베란다에 마련한 새 박스들에다 잔뜩 구겨넣어서 생존공간을 얼마간 확보했다. 딸아이는 집이 아주 넓어졌다고 좋아했지만(남들이 보면 웃을 일이다), 읽을 책만 사서 읽으라는 충고도 잊지 않았다(그건 오늘 아침에도 반복됐다). 이젠 아이도 어느새 못말릴 나이가 돼 버렸다. 하지만, 아이도 언젠가는 알아줄지 모른다. 책이라는 환상이 아빠의 존재근거이며 아빠의 DNA는 (A-T-C-G 대신에) 어쩌면 B-O-O-K 라는 염기서열로 이루어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젠장, 이런 bookish한 책귀신 얘기 대신에 다시, 새로 나온 책들 얘기나 좀 하기로 한다.

     

제일 먼저 꼽을 책은 '러시아 문화사'란 부제를 단 올랜도 파이지스(O. Figes)의 <나타샤 댄스>(이카루스)이다. 소개에 따르면 "러시아의 근대화를 시작한 표트르 대제가 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한 18세기 초에서부터 소비에트의 브레즈네프시대인 1970년대까지 300백년간의 러시아 문화사를 다루는 책"으로서 "도식적인 사상사 혹은 문화적 인물들의 전기를 넘어 역사와 미술, 음악, 발레, 영화 등을 복합적으로 아우르고 있다." 저자는 1959년생의 비교적 젊은 러시아사가로서 런던대학에 재직중이다. 원서의 이미지를 나란히 올려놓았지만(표지는 원서의 것이 더 마음에 든다), 사실 이 책은 2년쯤 전에 몇 권의 러시아사 책을 아마존에서 구입하면서 사들였던 책 중의 하나이다(같은 저자의 러시아 혁명사 와 함께). 저자는 생소했지만, 러시아사 관련서들 가운데 평이 아주 좋았고(에릭 홈스봄도 상찬한 책이다) 분량도 미더웠다(우리말 번역본이 1015쪽인데, 원서도 729쪽에 이른다). 내가 놀란 것은 이만한 부피의 러시아사 책이 아무런 소리소문없이 툭 번역돼 나온 것.   

 

 

 

 

이 분야에서 그만한 부피에 버금하는 책들은 역시나 러시아 문화사의 전개의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이덕형의 <천년의 울림 -러시아문화예술>(성균관대출판부, 2001)와 존 톰슨의 <20세기 러시아 현대사>(사회평론, 2004)가 있다.  각각 528쪽과 776쪽. <나타샤 댄스>가 얼마나 방대한 분량인지 짐작할 수 있다. 러시아문화사 분야에 모처럼 읽을 만한 책이 출간된 것이 반갑고 기쁘다. 최근에 출간되어 예상밖(?)의 판매실적을 거두고 있는 책, <세계를 뒤흔든 열흘>(책갈피) '현상'이 거품이나 유행이 아니라면 러시아사의 폭넓은 맥락을 보여주고 있는 책들 또한 많이 읽힐 것으로 기대해봄 직하다. 덧붙여, 러시아사쪽 또다른 신간 리처드 휴의 <전함 포템킨>(서해문집). 에이젠슈테인의 영화 <전함 포템킨>(1925)로 더 잘 알려진 포템킨 호의 반란사건은 1905년 1차 혁명의 도화선이 됐었던 사건이자 상징적인 사건이다. 이 사건의 자초지종을 담은 책으로 보이는데, 영화의 결말과는 다르게 실제의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었고 주모자들은 총살을 당하거나 유형에 처해진 걸로 안다(에이젠슈테인의 <전함 포템킨>은 장르상 '(역사) 판타지'이다). <전함 포템킨>과 관련한 책들은 나는 두 권 더 갖고 있는데, 이것들이 어디에 처박혀 있는지는 신만이 아신다.

 

 

 

 

두번째 책은 지난 2003년 가을 방한했던 슬라보예 지젝의 강연록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이데올로기>(철학과현실사)이다. 지난 가을쯤에 나왔어야 할 책이 다소 연착했다. 이미 온라인상에 모든 강연원고와 번역문이 공개돼 있는 만큼 책으로 묶이는 게 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나 같은 지젝의 애독자에게는 나름대로의 의미를 갖는다. 일단 너절하게 널려있는 프린트물들을 시원스레 갖다버릴 수 있게 된 것. 그 비용이 18,000원이니까 싼 건 아니다. 책에는 네 개의 강연문과 한 개의 특별강연문, 모두 5편의 강연원고와 번역문이 차례로 실려 있는데, 아쉬운 건 그해 가을호인가 겨울호 <철학과 현실>에 실련던 지젝과 김상환 교수의 대담 등이 빠진 것. 지젝의 서문을 달고는 있지만, 책에는 아무런 역자 해제도 붙어 있지 않다. 아무래도 성의가 부족하다 싶은데, '다산 기념 철학강좌' 시리즈의 일곱번째 책으로서 억지로 구색을 맞추기 위해 출간된 것이 아닌가 싶다. 번역이라도 좀 수정이 됐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법한데, 실상은 역시나 그다지 개선된 듯하지 않다(짐작에 책임 교정자가 없었다는 얘기다). 가령, 17쪽에서 '선의(善意)의 봉사'는 '재화의 공급servicing of the goods'의 오역이다. 이런 단순한 오역(실수)도 체크되지 않고 책이 나올 수 있었다는 게 유감스럽다(이 강연문들은 시간이 되면 나중에라도 다시 한번 자세히 읽어볼 계획이다).

 

 

 

 

그런 유감을 좀 달래기 위해서 꼽아본 책은 프랑스의 정치인류학자 피에르 클라스트르의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이학사)이다. 이미 그의 <폭력의 고고학>(울력, 2002)이 출간돼 있으며('끌라스트르'로 검색해야 한다), 그에 대한 소개는 이미 그때 한번 이루어진바 있다. 다시 반복하자면, "삐에르 끌라스트르(Pierre Clastres, 1934~1977)는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인류학과 당시를 풍미하던 마르크스주의 인류학을 극복하고 원시 사회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1970년대 프랑스 지식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고, "국내에서 처음으로 출간되는 <폭력의 고고학>은 그가 죽고 난 후 1980년 그가 발표했던 에세이와 서평, 그리고 연구물을 모아 펴낸 유고집이다. 연구 논문들은 1976년에 나온 또 다른 논문집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내용들을 보다 세밀하게 다루고 있다." 이번에 나온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는 그 '또 다른 논문집'이다. 그러니 두 책이 서로 보족적으로 읽혀질 만하다. 클라스트르에 대한 해설은  <오늘의 프랑스 사상가들>(문예출판사, 1998)이 자세하다. 거기에서 클라스트르는 르네 지라르와 비교/대비되고 있는바, 가령 <폭력과 성스러움>(민음사) 등과 같이 읽어보는 것도 독서의 한 가지 방법.

세번째 책은 고전 번역으로 윌리엄 제임스의 <심리학의 원리>(아카넷). 전 3권 2,500쪽이 넘는 그야말로 방대한 분량이다. 존 듀이, 찰스 샌더스 퍼스와 함께 미국 프래그머티즘의 세 거두로 꼽히는 윌리엄 제임스의 주저 중 하나인데(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하버드대학에 오래 봉직했는데, 1875년 미국대학 최초로 심리학 강의를 개설했다고 한다. '미국 심리학'의 아버지인 셈이다), 소개를 보니까 이건 그의 저술여정에서 첫번째 시기의 결과물이다.

"제임스의 저술 시기는 대략 세 단계로 구분된다. 첫번째는 스코틀랜드와 독일철학의 정신이해와 골상학의 관점에서 심리학을 연구했던 당시 미국의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실험에 기초한 심리현상연구를 통해 독자적으로 기능주의 심리학을 수립한 시기이다. 이때 <심리학원론>을 출판했다. 두번째는 종교나 철학에 관련된 주제들을 연구하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 제임스는 여러 곳으로부터 초빙을 받아 강의를 하였는데, 그 결과물은 책으로 출판되어 제임스에게 명성을 안겨다주기도 하였다. 이 무렵 에든버러대학으로부터 기포드 강연 초청을 받아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을 20개의 주제로 나누어 강연하였다. 세번째는 프래그머티즘, 진리론, 그리고 그의 인식론적인 급진적 경험론에 대한 강연을 통해 자기만의 독특한 사상을 확립한 시기이다. 대표적인 강연은 1908~1909년에 행한 옥스퍼드 대학의 히버트 강연이다. 이 시기의 대표적 저술로는 <프래그머티즘> <다원적 우주> <진리의 의미> 등이 있다." 

이 중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한길사, 2000)이 이미 소개돼 있다(번역에 대해서는 장담하지 못하겠다. 역자의 지젝 번역으로 봐서는). 세번째 단계의 <프래그머티즘>은 비교적 얇은 책인데, 아직 소개되지 않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프래그머티즘의 길잡이>(철학과현실사)에 내용이 일부 발췌돼 있던가 정리돼 있었던 듯하다). 어쨌든, <심리학의 원리> 같은 고전의 번역/소개는 반가운 일이지만, 이걸 언제, 누가 읽어(줘)야 하는지는 의문이다(심리학 전공자들은 읽는가?) 멜빌의 <모비딕>보다 두꺼운 책이 그것도 소설이 아니라 철학책인 것이니까!

하여간에 심리학 분야에서 내가 언제쯤 번역될지, 과연 번역이 가능은 한 건지 의문을 가졌던 두 권의 책 중 하나가 이번에 나왔다. 나머지 하나는 야스퍼스의 <일반 정신병리학>(1913)이다. 1997년에 나온 리프린트 영역본의 분량이 594쪽이니까 이 책 역시 나름대로 방대하다. 러시아어로도 번역돼 있어서 가끔씩 모스크바의 대형서점에 가서 눈길만 주던 책이었다(2만원쯤 했던 듯싶다). 제임스와 야스퍼스는 모두 의대 출신 철학자들이다. 보통 철학자들은 신학이나 수학 전공자들이 많으며, 러셀에 의하면 그들이 철학의 두 계보이다. 거기에 다른 두 계보를 덧붙이자면 나는 문학과 의학을 꼽겠다. 이 네 가지 계보를 정리하는 건 물론 돈벼락을 맞은 이후에 주제를 모르는 상태에서나 가능한 일이겠지만... 

 

 

 

 

네번째 책은 'e시대의 절대문학' 시리즈의 첫권으로 나온 권미선의 <돈키호테>(살림)이다. 부제는 '비극적 운명을 짊어진 희극적 영웅'으로 돼 있고, 분량은 204쪽이니까 기대보다는 얇다. 아마도 중고생들까지 과녁 안에 넣고 있는 모양이다. 성에 차지는 않지만, 논술 입시용으로 고전들에 대한 급조된 요약정리들이 판치는 판국에 200쪽 정도라면 그래도 양호한 편이라고 해두어야겠다. <신곡>, <서유기>, <마담 보다리>, <모비딕>, <동물농장/1984> 등이 이번에 같은 시리즈로 나온 책들이다. 물론 이런 류의 해제를 읽고 나서 손에 들어야 하는 책은 원전이다. 돈키호테의 경우에는 출간 400주년을 기념하여 새 번역본 <돈키호테>(시공사, 2004)도 출간돼 있다(이게 최초의 스페인어 완역본이라면, 이전에 나온 책들은 어찌된 것인가? 범우사판은?). 시간이 부족하다면 책만 사두고 가끔씩 이 대목, 저 대목 뒤적거려보면 된다. 한편, 도스토예프스키 또한 돈키호테의 영향권하에 있는 작가인데, 특히 <백치>가 그렇다. 그 작품에서 우리는 가장 독특한 돈키호테 해석을 만나볼 수 있는데, 이른바 그리스도-돈키호테 형상의 주인공 므이쉬킨. 동시에 므이쉬킨은 그리스도 형상에 대한 가장 독특한 해석이기도 하다. 돈키호테-그리스도.(참고로 파스테르나크는 그리스도를 햄릿 형상으로 이해한다.)

다섯번째 책은  처음 러시아사와 운을 맞추기 위한 미국사 책으로 레이 라파엘의 <미국의 탄생>(그린비). '미국 역사 교과서가 왜곡한 건국의 진실들'이란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작년에 나온 아주 따끈따근한 책이며, 저명한 역사가 하워드 진이 품질을 보증하고 있는 책이다. 소개에 따르면, "하워드 진과 더불어 미국 민중사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인 역사가로 평가받는 저자가 미국의 역사 왜곡을 고발하는 책이다. 아울러 미국 건국을 둘러싼 신화의 본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미국이라는 나라가 독립을 성취할 수 있게 만든 미국 민중의 진정한 정신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그러니 나란히 읽을 책들도 자연스레 추려진다. 잘 모르는 분야에서는 믿을 만한 사람 한 사람만 물고 늘어지면 되는데, 미국사의 경우엔 <미국 민중저항사>(일월서각)의 저자 하워드 진 같은 경우가 그렇다. 그의 <오만한 제국>(당대, 2001)이나 자전적 에세이 <달리는 기차 위의 중립은 없다>(이후, 2002) 정도를 일단 리스트에 올려놓기로 하자...

05. 07. 03.

P.S. 이밖에도 나온 책들은 많지만, 내가 굳이 군말을 덧붙이지 않아도 좋은 책들이다. 보관함에 있는 책들을 차례로 다섯 권만 호명해보면 이렇다.

 

 

 

 

<나타샤 댄스> 대신에 박태균의 <한국전쟁>(책과함께),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이데올로기> 대신에 폴 패튼의 <들뢰즈와 정치>(태학사), <심리학의 원리> 대신에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선집>(아카넷), <돈키호테> 대신에 <단테>(푸른숲), 그리고 <미국의 탄생> 대신에 <엘리건트 유니버스>의 저자 브라이언 그린의 <우주의 구조>(승산)를 집어넣어도 다섯 권의 책으로 모자람이 없다. 이 또다른 선택도 충분히 옹호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건 또 다른 한판의 바둑이다.

 

 

 

 

지난번에 <시네마2>(시각과언어)에 대해서 언급한다고 해놓고 지나쳤는데, 이제 비로소 들뢰즈의 '영화론' 전체를 우리말로 읽을 수 있게 된 건 반가운 일이다. 2차 문헌만을 읽는 건 어떤 음식을 '알기' 위해서 안내서를 읽는 것만큼이나 싱거운 일일 수 있다. 중요한 건 '먹어보는' 것이다. 직접 말이다.

그간에 여러 차례가 역자가 바뀌었다는 소문을 들은바 있는데, 이번에 나온 <시네마2>는 최상의 선택/결과이었기를 기대한다. 재미있는 건 이 책의 책날개. 여전히 <시네마2>가 근간으로 돼 있고 역자는 엉뚱한 사람의 이름으로 돼 있다. 출판사가 얼마나 좋은 책을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정신없었는가' 를 웅변하는 듯하다. 하지만, 마무리를 잘해서 욕먹을 일은 없는 법이니, 끝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았으면 좋겠다. 교정/교열 등의 후반부 작업에 출판사들이 좀더 신경을 써야 할 때가 되었다...(그나저나 아마존에서 떠온 이미지들은 왜 안 뜨는 걸까?)  

 05. 07.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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