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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프로방스
피터 메일 지음, 강주헌 옮김 / 효형출판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Sunny Stream-노무라 소지로
프로방스, 행복의 충격
프로방스, 하면 떠오르는 구절이 있다. ‘지중해의 따뜻한 가슴, 프로방스는 완전히 절망한 사람이 올 곳은 아니다. 오직 행복한 자, 아무 것도 소유한 것이 없이도 이 땅 위에 태어난 것이 기뻐지는 자들만이 올 곳이다.’ 김화영의 아름다운 에세이『행복의 충격』없이 나는 나의 이십대를 말할 수 없다. 김화영의 번역물과 그의 에세이를 읽는 것만으로도 나의 이십대는 충분히 유의미했다.
현실은 참으로 막막했다. 미래는 불안했고 시국은 어수선했다. 어디든 떠나고 싶었지만 주머니엔 먼지와 바람뿐이었다. 대체 어디에 마음을 놓아야 할까, 모든 것이 막연하기만 했다. 그럴 때 나는 김화영을 읽었고, 김화영이 번역한 까뮈와 바슐라르와 모디아노와 르끌레지오를 읽었다. 프로방스는 불안한 청춘의 망명지였다. 적어도 그곳에서만은 내 안의 습기들이 바삭 증발할 것만 같았다. 일찍이 세잔느가 화폭에 담았던 프로방스의 쎙 빅투아르산, 김화영의 표현대로라면 ‘메마르고 강직하고 비정한 고전의 감성을 그 물리적인 표정 속에 담고 있다’는 그곳에서라면 나는 일체의 수식을 떨구어버린 건조하고 강직한 정신으로 나의 청춘을 응시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다. 프로방스는 구체적인 지명이 아니었다. 그곳은 가난한 젊음이 꿈꾸었던 관념의 땅이었다.
현란한 수사학으로 김화영은 프로방스를 광고했다. “행복의 외침으로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이 열려진 풍경, 전라(全裸)의 풍경 속에서, 나는 오직 어리둥절했을 뿐이었다.”라는 구절 앞에서 어찌 프로방스를 꿈꾸지 않겠는가. “모든 정경이 단단하고 메마르고 스러지지 않는 풍경을 만들고 있다”는 그곳에서 나의 젊음은 무언가를 보상받을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일찍이 고호는 그의 가장 행복하고 비극적인 만년을 프로방스에서 보냈다. 김화영은 고호의 그림에 등장하는 소용돌이치는 태양이 프로방스를 만난 고호의 ‘행복의 충격’을 표현한 것이라고 말한다. 누군들 그런 행복의 충격과 만나고 싶지 않을까.
미셀 투르니에의 산문집 『짧은 글 긴 침묵』의 한 구절에 나는 밑줄을 그었다. “프랑스 사람들이 자기네 나라의 지중해 연안 지방을 <미디(Midi)>라는 이름으로 지칭하는 것은 절묘하다. 왜 미디인가? 그곳은 태양의 운행 곡선의 정점이요 태양이 그 정점을 음미하기 위하여 걸음을 멈춘다고 인간들이 즐겨 상상하는 바로 그 균형점이기 때문이다.” 태양이 그 정점을 음미하기 위해 걸음을 멈추는 곳에서 서있는 나를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행복했다. 이어지는 미셀 투르니에의 구절들. “지중해는 이것인 동시에 저것이다.” 오직 하나의 선택을 강요하는 땅에서 이것이면서 저것일 수 있는 땅은 그 자체가 하나의 구원이었다. 왜 그것이어야만 하는가, 왜 이것이면서 저것이면 안 되는가. 시대는 엄혹했다. 이념은 발랄한 생의 약동으로서의 웃음을 몰랐고, 도덕은 일탈과 광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시대의 엄숙주의는 무겁게 삶을 압도했다. 그럴 때 지중해는 먼 곳에서 아득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는 우리는 우리의 땅에서 치고 받고 아옹다옹거릴 수밖에 없었다.
『나의 프로방스』라는 책을 나의 눈이 간과할 리가 없었다. 책장의 띠지에는 아름다운 사진이 있다. 사진 속에는 파란 하늘과 시프레나무를 배경으로 집 한 채. 뜰에는 가득한 보랏빛 제비꽃. 저곳은 얼마나 고즈넉한가. 책 속에는 수많은 수채화들이 들어있었다. 순진무구한 프로방스의 풍광들, 잘 구어진 빵과 포도주가 화사한 느낌의 수채화로 그려져 있다. 그 느낌이 얼마나 신선한지, 책도 이렇게 감각적일 수 있구나 하는 작은 감탄마저 인다.
피터 메일의 『나의 프로방스』는 현학적인 책이 아니다. 그 속에는 고호도 없고 르네 샤르나 알퐁스 도데도 없다. 루르마렝에 있다는 카뮈의 묘지도 언급되지 않는다. 장 그르니에는 『지중해의 영감』에서 “이 고장은 너무나 잘 빚어져서 장인(匠人)인 신의 작품을 보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라고 말하고 있지만 피터 메일의 책에는 현란한 수사학도 없다.
그의 책에는 그림 같은 바다에서 혼자 빈둥대는 게으름이 있다. 그러므로 한참 바쁜 사람들은 피터 메일의 책을 붙잡지 말 일이다. “참으로 팔자 좋군” 빈정대는 한 마디로 남의 행복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너무도 가난한 자는 이 책을 읽을 것이 아니다. 피터 메일의 행복이 부러움을 넘어 고통스러운 질투로 느껴진다면 굳이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
그의 책에는 프로방스 사람들의 당나귀 같은 고집이 있다. “자동차 한 대가 눈이 치워진 중앙선을 따라 조심스럽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데 맞은편에서 오던 자동차와 마주치고 말았다. 두 자동차는 주둥이를 맞대고 멈춰 섰다. 하지만 누구도 후진해서 길을 양보하지 않았다. 길가로 붙이다가 자칫하면 눈더미에 처박힐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때문이었을까? 두 운전자는 앞 유리로 서로 노려보면서, 다른 자동차가 그들의 꽁무니에 붙어주길 기대하며 마냥 기다렸다. 그렇게 되면 ‘다수의 힘’에 따라 한 대인 자동차가 어쩔 수 없이 후진할 테니까 수적으로 우세한 쪽이 먼저 지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 구절은 이 책의 문체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이 책에는 이렇게 소박한 문체에서 우러나는 유머가 있다. 그 유머는 피터 메일에게서 나오는 것이기도 하면서 프로방스 사람들의 소박함에서 나오는 것이기도 하다.
피터 메일은 영국과 미국에서 15년간 광고 카피라이터로 활동했단다. 광고 카피라이터가 어떤 일을 하는 자인가. 소비자들의 욕망을 분석하고 그들의 잠재적 욕망을 소비로 연결시키기 위해 온갖 첨단의 기법을 동원하는 자들이 아닌가. 그들이야말로 자본주의의 첨병이다. 광고인으로서 치열하고 분주하게 살아온 그였기에 햇살과 공기에 대한 갈망은 그만큼 더 컸을 것이다. “마약 중독자가 마약을 갈구하듯이 마을의 상점들과 포도밭을 찍은 사진을 보았으며, 침실 창을 통해 비스듬히 스며드는 햇살에 잠을 깨는 것을 꿈꾸기도 했다”는 피터 메일 부부는 충동적으로 프로방스에 집을 구매한다. 우리에게도 저 만큼의 충동은 필요하리라. 충동과 도발이 없이는 혁명도 없다. 오직 구질구질한 일상만이 있을 뿐이다.
그가 프로방스에 구매했다는 집은 나의 미의식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다. 질투가 느껴졌다. “이 지역의 돌로 지은 그 집은 바람과 햇빛을 2백년 동안이나 견뎌온 탓에 옅은 꿀색도 아니고 옅은 회색도 아닌, 중간색으로 바래 있었다.......벽의 일부는 두께가 1미터나 되어 지중해의 미스트랄을 견딜 수 있게 지어졌다. ......우물이 세 군데 있었고, 그늘을 드리우려고 심은 나무들과 호리호리한 초록의 사이프러스들, 로즈메리 울타리, 커다란 아몬드 한 그루도 있었다. 그리고 오후 햇살에 졸린 눈꺼풀처럼 반쯤 닫힌 나무 덧문까지! 그 집은 우리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피터 메일을 사로잡은 집은 독자들을 사로잡는다. 행복은 반드시 풍족한 물질에 깃드는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저런 집에서는 행복이 더 잘 깃들 거라는 생각도 그다지 터무니없어 보이지는 않는다.
피터 메일의 책은 매우 감각적인 책이다. 그는 프로방스를 관념적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면도날 같은 미스트랄 바람, 송로 버섯의 진미, 팔월의 염소 경주대회, 구월의 포도 수확, 그리고 십일월의 올리브기름 등 그의 책은 우리의 이성에 호소하기보다는 우리의 감각에 호소한다. 올리브유를 몇 방울 떨어뜨리고 토마토 과육을 살짝 바른 빵, 따뜻하게 데워 샐러드와 함께 먹는 거위간, 꿩과 산토끼, 파테와 치즈, 햄과 수탉, 양파빵, 마늘빵, 올리브빵, 양젖치즈빵, 포도주와 와인 등 수많은 음식으로 피터 메일은 전직 카피라이터답게 끊임없이 우리의 욕망을 부추긴다.
스쳐 지나가는 관광객으로서가 아니라 프로방스에 집을 사고 그곳에 포도나무를 심고 이웃들과 한 식탁에서 음식을 먹는 피터 메일에게 부러움과 동경을 느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나는 주저 없이 『나의 프로방스』를 권하겠다. 행복은 사치가 아니라 우리의 의무다.
“다른 곳이었다면, 조금이라도 완벽한 날씨가 아니었다면 암담한 심정이었겠지만 프로방스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태양은 대단한 신경안정제였다. 아련한 행복감에 적어 시간은 흘렀다. 살아있다는 자체만으로도 너무 즐거워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시간이 길게 천천히, 움직이지 않는 듯이 흘러가는 나날이었다.“
모든 살아 있는 자의 특권은 꿈꾸는 것이 아닌가. 오늘은 마음만이라도 당신이 그곳에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