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최근에 나온 책들(79)

'프리뷰'의 필요성이 없어지면서 쏟아져나오는 신간들에 대해 참견할 자리가 마땅치 않았는데, (구당이 명당이라고) '최근에 나온 책들'을 마저 연재하기로 한다. 한 넉달은 쉰 듯한데, 그렇다고 그간에 뭔가 재충전된 건 아니며 단지 에드워드 로렌츠의 <카오스의 본질>이 신간으로 나온 걸 보고서 문득 연재에서 다루고픈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사람의 뇌 또한 '카오스의 가장자리' 아닐까?). 그럼 시작해보기로 할까? 

 

 

 

 

제일 먼저, 에드워드 로렌츠의 <카오스의 본질>(파라북스, 2005)이 출간됐다. 이게 '드디어'인지는 잘 모르겠다. 한데, 카오스이론, 혹은 복잡계이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인 '에드워드 로렌츠'를 저자로 한 책이어서 무엇보다도 그냥 반갑다. 로렌츠란 성으로 더 잘 알려진 이름은 '콘라트'이지만, '나비효과'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 독자라면 '에드워드'란 이름도 함께 기억해두는 것이 형평에 맞겠다.

소개에도 나와 있지만, "'브라질에 있는 나비가 한번 날갯짓을 하면 텍사스에 토네이토가 분다' 이는 최근 들어 동명의 영화 등을 통해 너무나 잘 알려진 '나비효과'의 유명한 명제이다. 하지만 이것이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에 필적한다고 평가받는 카오스 이론의 장을 연 논문 제목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물론 이러한 사실을 이 분야의 베스트셀러인 <카오스>(누림, 2006 *새로 나왔군!)의 저자 제임스 글릭은 빼놓지 않고 있으며(역자 박배식 교수는 <카오스의 본질> 또한 우리말로 옮겼다), 최근에 재출간된 <카오스에서 인공생명으로>(범양사, 2006)에서도 저자 미첼 월드롭이 언급했던 기억이 있다. 기상학자 로렌츠와 그의 '이상한 끌개'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소개에서 언급되는 있는 영화는 애쉬턴 커쳐가 나오는 영화 <나비효과>를 말한다.

 

이번에 약간 놀란 건 로렌츠의 나이가 생각보다 많은 것. 1917년생이니까 우리 나이로 90세이다. 책에서 읽을 때의 '젊은 기상학자'가 더이상 아닌 것이다.

로렌츠의 원저는 1993년에 나왔으며, 일역본은 1997년에 나온 것으로 돼 있다. 카오스이론에서만큼은 우리가 일본보다 10년 정도는 뒤처지는 것 같은데, 이게 그저 '인상'일 뿐일까?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 카오스이론이나 복잡계과학에 관한 번역서들 가운데는 일본책들이 적지 않다. 국내에서는 수학자 김용운 교수의 책 정도가 눈에 띌 따름이다. 벌써 10년쯤 전에 유행을 탄 카오스이론이지만, 스튜어트 카우프만의 <혼돈의 가장자리>(사이언스북스, 2002)나 <카오스의 본질> 같은 주요 저작들이 번역된 김에 한번쯤 '뒷북'을 쳐보는 것도 의미있어 보인다. 피서객들이 다 빠져나간 백사장을 되밟다보면 간혹 동전들 이상의 횡재를 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조금 복잡해보이지만, 사실 정재승 교수의 베스트셀러 <과학콘서트>의 내용 대부분이 이 카오스이론/복잡계과학과 연관된 것들이다. 콘서트장의 연주를 즐기는 것 이상을 원한다면, 이제 '악보'를 찬찬히 들여다볼 수도 있겠다.

 

 

 

 

최근에 나온 과학서들 가운데, <뇌가 나의 마음을 만든다>(바다출판사, 2006)도 눈길을 줄 만한 책이다. 소개에 따르면, "이 책은 세계의 뇌 과학자 중 한 명인 라마찬드란 박사가 BBC의 ‘리스 강연’에서 행한 내용을 담고 있다. 라마찬드란 박사는 환상사지나 공감각 같은 희귀한 신경이상 사례들을 통해 우리 뇌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설명한다. 더 나아가 ‘예술이란 무엇인가?’, ‘자유 의지란 무엇인가?’. ‘자아란 무엇인가?’ 같은 이제까지 철학의 영역에 속한다고 여겨졌던 질문들에 대해 외 과학자로서 새로운 의견을 제시하며, 과학과 인문학이라는 두 문화의 연결을 시도한다." 그러니 읽어봄 직하다. 뇌과학 관련서들이 근래에 부쩍 눈에 띄는데, 사실 게놈프로젝트 이후에 꼽을 만한 메가프로젝트란 대뇌지도 만들기 아니었나? 그게 얼만큼 진행되고 있는지 문득 궁금하다.

 

 

 

 

그리고, 두번째 책은 영국 비평가 매슈 아널드/아놀드(1822-1888)의 <교양과 무질서>(한길사, 2006). 아널드 전공자인 윤지관 교수의 번역으로 출간됐다. 기억에, 아널드에 대한('Arnold'를 꼭 '아널드'라고 표기해야 할까?) 박사학위논문을 펴낸 <근대사회의 교양과 비평>(창비, 1995)이 10년도 더 전에 나왔으니까 본 저작에 대한 소개 자체는 상당히 뒤늦은 감이 없지 않다. 그 전에 <삶의 비평>(민지사, 1985)이란 아널드의 책이 한번 소개된 걸로 돼 있지만, 본격적인 것이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번에 나온 <교양과 무질서>는 어떤 책인가? 소개를 좀 따라가본다: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대표적인 지식인 매슈 아널드는 당대의 사회적 갈등과 계급현실에 대한 처방으로 '교양(culture)'의 이념을 내세운 것으로 유명한 문학비평가이다. 오늘날 '교양' '교양인' '교양교육' 등의 개념을 널리 사용하게 된 배경 중 하나로 매슈 아널드를 꼽아도 무방할 정도라고 한다. <교양과 무질서>는 그런 매슈 아널드의 사상을 집약한 정치·사회평론서이다." 그러니가 '교양의 원조'라 할 수 있겠다.

"<교양과 무질서>는 1867년부터 당시의 사회·정치적인 쟁점을 두고 매슈 아널드가 1년 이상 벌인 논쟁문을 묶은 책이다. 차티스트 운동이나 각종 법률의 제정 등 정치적·경제적 개혁이 진행되고 있던 당시 빅토리아 사회는 거대한 변화의 과정에 있었고, 그 과정에서 대중교육 문제가 커다란 사회적 과제로 등장한다. 이러한 당시 사회의 갈등과 혼란을 '무질서'로 규정하는 지은이는 그 대안으로 '교양'을 제시한다. 노동계급을 포함, 파당성에 사로잡혀 '무질서'를 일으키는 중간계급을 '속물'이라고까지 비판하는 매슈 아널드의 이러한 주장은 당시 많은 파란을 일으킨다. <교양과 무질서>에서 지은이는 이러한 반론에 하나하나 반박하며 자신의 교양 개념을 자세히 설파한다. "교양이란 우리의 고정관념과 습관에 신선하고 자유로운 생각의 줄기를 갖다대는 것"이라고 말하며 교양의 시대적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짐작할 수 있는 것이지만, 아널드의 정치적 입장은 오늘날의 스펙트럼에서 볼 때 중도보수에 가깝지 않나 싶다(여러 번 언급했지만, 우파의 교양론에 대응하는 것은 좌파의 품성론이다). 단, 이 보수주의의 자격조건이 교양(culture)이며, 그게 결여된 이들을 통칭해서 '속물(philistines)'이라고 칭하는 것. 그러니까 우리 주위에서 유감스러운 것은 '교양 대가리'라곤 없는 속물적인 우파들이 보수주의를 떠들어대는 것이다. 물론 아널드의 분류에 따르자면 속물적인 좌파들 또한 비판에서 열외가 되는 것은 아니겠다. 사실 이러한 교양주의가 '창비'와 보다 급진적인 노동/민중문학론자들을 가르는 입각점이 아니었나 싶다. 한편, 아널드가 폄하해마지 않는 '무질서'에 대해서는 '다른 과학', '다른 지배자'가 필요한 듯하며, 참조할 만한 책 몇 권을 나열해보았다.   

 

 

 

 

세번째 책은 촘스키와 함께 미국의 '좌파적 교양'을 책임지고 있는 역사학자 하워드 진의 대표작 <미국민중사>(시울, 2006)이다. 예전에 <미국민중저항사>(일월서각, 1986)이라고 나왔던 책의 개정판인데, 20년만에 나온 것이니까 어느덧 '한 세월'을 감당한 책이기도 하다. 이로써 하워드 진에 대해서만큼은 '연장 탓'이 통하지 않게 되었다. 읽을 수 있는 만큼 읽으면 되는 것이다.

잠시 소개를 옮겨오면, "<달리는 기차에 중립은 없다> <오만한 제국> <전쟁에 반대한다> 등의 책들을 통해 노엄 촘스키와 함께 미국의 가장 대표적인 실천적인 지식인으로 평가받는 역사학자 하워드 진.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지향하며 민중의 시각으로 미국사 전체를 읽어낸 <미국민중사>는 그의 역사학자로서의 면모가 가장 잘 드러난 역작으로, 1980년 첫 출간 이래로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린 대표적인 저서이다." 미국에서도 베스트셀러였다고 한다.



"'민중사'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이 미국사를 바라보는 관점은 미국을 구성하는 일반 사람들에게서 출발한다. 그렇다면 그 미국의 민중은 누구를 뜻하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처음 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한 청도교인이나 지배층의 부유한 백인들을 떠올리기 쉽지만, 이 책은 오히려 기존 역사의 현장에서 소외된 이들에 더 주목하고 있다. 나아가 책은 소외된 이들의 시각을 적극적으로 끌어온다. 예컨대 콜럼버스의 아메리칸 대륙 발견에서 하워드 진은 인디언 부족인 아라와크족의 시각을 빌려온다. 그리고 헌법제정의 역사에는 노예의 관점을, 산업주의 발흥의 역사에는 방직공장에서 일하는 젊은 여성들의 관점을, 멕시코 전쟁의 역사에는 탈영병들의 시각을, 뉴딜의 역사에는 할렘 흑인들의 관점을 도입한다." 이러한 관점들을 중재해줄 수 있는 객관적 시점이라는 게 과연 가능한가, 그런 의문을 갖게 한다. 정복자와 피정복자가 서로 동의할 수 있는 역사? 진의 표현을 빌자면,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뜻있는 건 이번에 데이비드 조이스의 평전 <하워드 진>(열대림, 2006)이 같이 출간된 것. "노암 촘스키와 더불어 '실천적 지식인', '미국의 양심'으로 불리는 하워드 진의 생애와 저술을 다룬 전기"로서 "책은 주로 민권 운동과 반전 운동에 중점을 두고 진의 생애를 돌아본다. 전기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지은이는 진의 삶이 보여주는 궤적 속에서 그의 주요 저서를 소개하고, 그의 혁명적 사상을 분석하며, 그의 삶과 업적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평가한다." 그러니 길잡이로서 유익하겠다. 물론 하워드 진의 자서전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이후, 2002)와 나란히 읽으면 더 좋겠다. 참고로, 미국사 관련서들을 몇 권 나열해 보았다.  

 

 

 

 

네번째 책은 고모리 요이치의 소세키 평전 <나는 소세키로소이다>(이매진, 2006)이다. 제목은 소세키의 대표작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 따왔는데, 이 일본근대문학의 태두를 다루고 있는 저작이 이번에 처음 나온 건 아니지만, 저자가 <포스트콜로니얼>(삼인, 2002)의 저자 고모리 요이치라는 게 눈길을 끈다. 현재 도쿄대학교 교수로 재직중인 저자는 가끔씩 내한강연도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일본의 내셔널리즘에 대해서 적극적인 비판을 가하고 있는 고모리 교수의 문학비평가로서의 솜씨를 구경해볼 수 있는 책이겠다.

 

 

 

 

소개에 따르면, "일본 근대문학의 대표적인 작가, 나쓰메 소세키 평전. 금전, 호적, 우정, 사랑, 영국 유학 등 다양한 요소들을 동원해 소세키와 그의 작품을 해석하고 평가한다. 폭넓고도 치밀한 연구를 통해, 소세키라는 필명을 얻기 전의 '나쓰메 긴노스케'의 삶을 드러내고자 했다. 어릴 때 친부모와 양부모에게 버림받은 기억, 런던 유학 시절에 고향에서 죽어가는 친구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한 죄책감, 다섯 번의 전쟁으로 인한 정신적 외상. 최초의 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부터 마지막 장편 작품인 <한눈팔기>, 필생의 역작으로 꼽히는 <문학론>과 '자기본위'라는 말로 유명한 강연 <나의 개인주의>까지, 지은이는 소설 속에 조각조각 나뉘어 숨어 있던 소세키의 삶을 하나하나 짚어낸다"

일본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의 출세작도 소세키론이었다는 걸 염두에 두면, 일본비평가들에게 작가 나쓰메 소세키는 자기입증을 위한 척도 같은 게 아닐까도 싶다(과문했던 나는 국내에서 소세키가 유행을 타기 전 아쿠다가와, 미시마 유키오, 다자이 오사무 등이 일본근대문학을 대표하는 걸로 알았다). 프랑스문학쪽으로 가면 마르셀 프루스트나 사뮤엘 베케트 같은 경우가 그런 듯싶은데, 쟁쟁한 비평가나 철학자들이 이들에 대한 연구서들을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문학의 경우는 어떠한가? 어느 작가론을 써야 비평가로서 자기존재를 입증할 수 있나?.. 

 

 

 

 

끝으로 마지막 책은 사랑 이야기이다. '중세 최대의 연애사건'으로도 불리는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책이 <내 사랑의 역사>(북폴리오, 2006)로 또 출간된 것이다. 원제는 '엘로이즈와 아벨라르'(2003) 순절한 사랑의 대명사가 된 이 커플의 이야기는 어떤 '역사'를 갖고 있는 것일까?

"12세기 프랑스의 수녀였던 엘로이즈는 중세 철학의 대가이자 성직자인 아벨라르와 숙명적이고도 질긴 사랑을 나눴다... 12세기 초, 파리의 열혈 논객이었던 아벨라르는 성당 참사관인 퓔베르의 집에 하숙을 청하고, 퓔베르의 조카딸이었던 엘로이즈를 가정교사로 맞게 된다. 스승과 제자 사이로 만난 이들은 곧 육체에 대한 탐닉과 사랑에 빠져 비밀결혼을 하고 아들까지 낳게 되지만, 이 사실을 안 퓔베르는 아벨라르를 거세시키는 것으로 복수를 한다. 이후 두 사람은 헤어져 수도승과 수녀로 살아가게 되지만 15년 후 다시 만나게 된다. 사랑과 종교, 철학이 어우러진 이들의 삶은 어떻게 끝맺게 될까?..."

이번에 나온 "책은 최근에 발견된 엘로이즈와 아벨라르의 편지 뭉치와 각종 사료를 바탕으로 두 사람의 삶을 마치 역사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느낌으로 풀어나간다"고 한다. 이미 이전에 출간된 독어권의 책 <중세 최대의 연애사건>(생각의나무, 2005)과 나란히 읽으면 이들의 사랑을 훔쳐보는 데 더 도움이 되겠다.  

한편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거나 변주한 책들도 적지 않은데, 장 자크 루소의 <신 엘로이즈>를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겠다. 생각보다는 방대한 분량인데다가 그만한 문학성을 갖추고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루소와 누벨 엘로이즈>(만남, 2002) 같은 연구서만 달랑 하나 갖고 있다는 건 좀 궁색한 일이다. 예전에 출간된 루소전집에 들어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 새 번역본이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 '사랑의 역사'가 좀더 번듯하게 채워질 수 있도록... 

06. 09. 05-06.

P.S. 참고로, 아널드의 <교양과 무질서>에 대한 서평 하나를 옮겨놓는다.

경향신문(06. 09. 09) 어지러운 사회 바로잡는 힘

-19세기 영국의 시인이요, 비평가였던 매슈 아널드(1822~88)의 <교양과 무질서>가 아널드 전문가에 의해 번역·출판됐다. 우리가 이 책의 출간을 반갑게 여기는 것은 이 문화·사회·정치 비평의 고전에서 아널드가 펼치고 있는 논설이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 자신을 돌아보는 데에도 여러모로 의미 있는 시사를 던져주리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아널드의 시대에 영국은 산업혁명의 여세로 경제적 번영을 누리는 한편 정치적 개혁과 사회적 변화에서 야기되는 혼란과 무질서를 겪고 있었다. 더욱이 다윈의 ‘종의 기원’에서 제시된 진화론을 비롯한 과학사상은 오래된 맹목적 신앙을 뿌리째 흔듦으로써 엄청난 정신적 의혹과 혼란을 초래했다. 그러므로 아널드가 ‘도버 해변’이라는 유명한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꿈속의 땅처럼 눈 앞에 펼쳐진 세계/다채롭고, 아름답고, 싱그러우나/실은, 그 속에 기쁨도, 사랑도, 빛도/확신도, 평화도, 고통을 위한 도움도 없네./우리의 이 어두워 가는 평원엔/갈등과 패주의 경적이 어지럽고/밤마다 무지한 군대들이 충돌하고 있을 뿐”이라고 노래했던 것도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아널드의 혼란 인식은 이런 일반론에만 머물지 않고 그 나름의 구체성을 띠고 있다. 특히 귀족, 중간 계급 및 노동 계급 등 이른바 3대 계층에 대한 그의 인식에는 각별한 데가 있다. 그가 보기에, 귀족들의 개인적 자유 및 야외 스포츠 선호는 그 뿌리가 야만성에 있었고, 그 자신이 속한다고 여겼던 중간 계급은 온통 속물주의로 물들어 있는가 하면, 거칠고 무식한 노동계층은 우중(愚衆)이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무질서는 필연적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사회현상이었다.

-아널드는 중간 계층이 사회 발전의 중추적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지만, 그 계층은 물질주의에 물든 채 가난한 계층의 고통에 대해 무관심하고 부도덕하기만 했다. 그리고 그에게는 당대 중간 계층의 도덕적 지주이던 청교도 정신이 편협하고 무미건조하기만 했다. 뿐만 아니라 아널드는 당대를 풍미하던 자유방임주의가 정치적 편견과 무책임으로 흐를 가능성을 경계했는데, 이는 제2장 ‘내키는 대로 하기’의 주제이기도 하다.

-그가 지도자적 자질의 필수 덕목으로서의 교양을 강조하게 된 배경도 바로 여기에 있다. 실로 교양이야말로 사회의 모든 병폐를 치유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 방안이라고 그는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 교양은 무엇보다도 ‘완성에 대한 공부’이며,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즐거움을 위해서 보려는 욕망’과 ‘세상을 지금보다 더 낫고 행복하게 하려는 숭고한 열망’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교양은 단순히 희랍어나 라틴어 문헌을 겉핥기할 수 있는 능력이나 순수한 과학적 지식을 의미하지 않고 삶을 향유할 수 있는 능력과 선을 행하는 도덕적 힘을 의미했다.

-이런 의미에서 아널드가 이 책에서 ‘단맛과 빛’이라는 말로 제1장의 제목을 삼은 것은 아주 시사적이다. 조너선 스위프트는 일찍이 꿀벌의 덕성을 논하면서 꿀벌은 인간에게 꿀을 제공해서 단맛을 볼 수 있게 하는 한편 밀랍을 제공하여 촛불을 켤 수 있게 한다고 한 적이 있다. 여기에서 아널드가 ‘단맛’과 ‘빛’이라는 스위프트적 은유를 빌려서 교양의 속성을 규정하는 동시에 중간 계층이 바로 이 단맛과 빛을 결여하고 있음을 개탄한 것은 아주 흥미롭다.

-아널드가 말하는 단맛과 빛은 그 성격에 있어서 인간의 헬레니즘적 성향과 관계가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인간의 완성 또는 구원’이라는 지상 목표를 위해서는 헬레니즘만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도덕적 실천을 최고 덕목으로 삼는 헤브라이즘의 보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즉 헬레니즘의 ‘올바른 생각’과 헤브라이즘의 ‘올바른 행동’이 상호보완되어야 인간의 교양도 완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아널드의 교양론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까지도 여전히 적정할까? 물론 아널드가 이 책을 쓰던 1860년대는 우리 시대와 현저히 다르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땅에 처해 있는 정치·경제·사회적 상황은 140년 전 영국인이 처해 있던 상황과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교적 짧은 기간에 걸친 우리의 민주정치 실험과 급속한 경제 개발은 과격한 사회적 변혁을 일으키면서 혹심한 가치관의 혼란과 정신적 폐해를 야기해왔고, 이는 아널드가 짚었던 빅토리아 시대의 병폐와 그리 다르지 않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아널드가 제기한 문제는 여전히 우리에게 설득력이 있으며 그가 제시한 처방책도 우리에게 유효하다. 만약에 ‘교양과 무질서’가 이런 시공을 초월한 보편적 호소력을 지니지 않는다면 ‘고전’의 반열에 오를 수도 없을 것이다.(이상옥|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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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dasan > 안창홍 1994년의 사랑
실재의 윤리 - 칸트와 라캉 슬로베니아 학파 총서 4
알렌카 주판치치 지음, 이성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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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의 사랑 /1994/73 ×53cm/캔바스위에 아크릴릭

http://www.boseong51.net/user/ftp/art/k/40315-AhnChangHong.html

<실재의 윤리>의 책표지는 안창홍의 <1994년의 사랑>이다. 욕망과 배반이 교차하는 형식이 하나로 응축되어 있는 구도이다. 인간들은 이성애적인 열정을 유지하고자 한다. 그러나 과연 그 사랑의 실체가 진정성으로만 응축되어 있고, 이성애적인 갈망이 과연 윤리적으로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포옹의 형식은 이타적인 갈망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윤리적인 욕망의 이면에는 <칼>로 표상되는 배반의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 욕망의 이중성은 빨간색으로 전체 화면에 도배되어 있다.

요즘 우리 사회에도 수입되어 유행한 적이 있는 <안아주기 운동>는 인간의 이타적 윤리성만으로 진정한 인간성의 구현이 가능한 가에 대해 의문이다. <안아주기>를 운동의 차원에서 해야할 만큼, 고립과 소외의 인간의 외적 조건이 자발적인 윤리적 공간을 상호간에 마련하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상상이 매우 빈곤하게만 보인다.

 

칸트적인 도덕적 선의 의식의 존재 가치는 반칸트적인 욕망과의 공존을 통해서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한다면, <실재의 윤리>의 표지는 매우 성공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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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들뢰즈는 자신의 저서들의 영역판에 새로이 서문들을 붙이고 있는데, 이 서문들에서 자신의 핵심적인 주장들을 잘 정리해놓고 있기 때문에 입문자들에게는 더없이 요긴하다. 국내에 출간되고 있는 들뢰즈 번역서들이 영역판에서 중역을 하는 대신에 불어원전을 옮겨오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한편으로 이 영역판 서문들이 소개되지 못하는 것은 아쉽다. 예외적인 경우라면, 영역판 서문을 부록으로 옮겨놓고 있는 <베르그송주의>(문학과지성사, 1996), 그리고 불어판을 옮기고 있는 <니체와 철학>(민음사, 1998/2001)과는 달리 영역판을 옮긴 <니체, 철학의 주사위>(인간사랑, 1993) 등이다.

 


 

 

 

 

 

 

<니체와 철학>(1962) 영역판(1983) 서문은 역자인 '휴 톰린슨(Hugh Tomlinson)에게‘라는 헌사를 달고 있는데, 우리말로 옮겨진 첫문장은 이렇다: “어떤 책이 번역된다는 것은 항상 흥미로운 일이다.”(11쪽) 이에 대한 원문은 “It is always exciting for a French book to be translated into English."이다. 즉, ”어떤 불어 책이 영어로 번역된다는 것은 언제나 흥분되는 일“이라는 것.


우리말 번역대로, 이 흥분은 ’번역 일반‘의 것일 수도 있지만, ’불어에서 영어로‘라는 특정한 번역에 한정된 것일 수도 있다. 들뢰즈가 다른 언어의 번역본들에도 매번 서문을 달았는지 모르겠지만, 그에게서 영어와 영미문학/철학이 갖는 의미가 좀 각별하다는 점을 여기서는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경험론자로서 당대의 이질적인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를 나는 ’영국 철학자‘로 분류하고픈 유혹을 자주 느낀다).  


그에게서 왜 영어와 영국이 문제되는가? “니체가 가장 많이 오해되어 온 것은 아마 영국에서일 것”이기 때문이다. “니체가 프랑스 합리주의와 독일 변증법에 맞서서 투쟁한 주요 주제들은 결코 영국식 사유들에 있어서도 중심적인 것은 아니었다. 영국인들은 이론적으로 사용하기에 별다른 불편함이 없는 경험주의와 실용주의를 소유했었다. 그것은 니체를 통한 우회가 그들에게는 별로 큰 가치가 없음을 의미한다. 그들은 그들의 ‘양식’에 어긋나는 니체의 바로 그와 같은 특별한 경험주의와 실용주의를 통한 우회로를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이다.” 국역본에는 생략돼 있지만(Tomlinson suggests), 이러한 지적은 영역자 톰린슨의 견해를 들뢰즈가 수용한 것이다.


즉, 합리주의와 변증법에 감염돼 있지 않은 영국인들에게 ‘니체 철학’이라는 처방(우회로), 혹은 '백신'은 불필요했다는 것이다. 이미 그들은 면역돼 있는 상태였으며, 니체의 ‘망치로 하는 철학’ 대신에 이미 경험주의(empiricism)와 실용주의(pragmatism)라는 영국식 망치를 잘도 쓰고 있었던 것. 해서, 영국에서 니체는 (철학자들에게가 아니라) 소설가들, 시인들, 그리고 극작가들에게나 겨우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철학적으로 수용된 것이 아니라 문학적으로 수용됐다. 


여기서 상기해둘 것은 들뢰즈의 철학이 독특하게도 ‘장소’에 대해 질문하는 ‘지리철학(geophilosophy)’이라는 점이다. 그리스를 기원으로 하는 서구 형이상학과 철학을 동일시한다면, 그의 철학은 반철학(anti-philosophy)이기도 하다. 그는 다른 기원, 다른 계보, 다른 종족의 철학을 기획했었다(작년에 나온 들뢰즈 가이드북 하나는 'Deleuze and Geophilosophy'란 제목을 갖고 있다).

 


 

 

 

 

 

아무튼 니체 철학에 대한 자신의 해설을 영어권 독자들에게 소개하면서 그가 처음에 전제하고자 하는 것은 니체 철학이 영국인들에게 오해될 수 있는 소지가 있으며 그것은 일면 필연적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하에서 그는 비로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는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들 중의 한 사람이다”라고 단언할 수 있게 된다. 그는 왜 위대한가? 철학의 이론과 실천 둘 다를 뒤바꿔놓았기 때문이다. “그는 사유자(thinker)를 날고 있는 화살에 비유한다. 그것은 또다른 사유자가 그 이외에 다른 곳에 그것을 쏠 수 있기 위하여 그 떨어진 곳을 찾는 그러한 화살이다. 그에 따른다면, 철학자는 영원하지도 역사적이지도 않으며 ‘반시대적(untimely)’, 언제나 반시대적인 것이다.”(12쪽) 그래서, 이 반시대성은 니체 철학의 표지이다.  

 


 

 

 

 

 

 

그로 인한 당연한 귀결이겠지만, “니체는 (철학사에서) 어떤 선배도 거의 갖고 있지 않다. 그는 단지 오래전의 전-소크라테스학파(Pre-Socratics)와, 그로부터 따로 떨어져 있는 단 한 사람의 선배인 스피노자만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해서 니체 철학의 계보는 단촐하다. 사실 소크라테스에 대한 니체의 비판은 잘 알려진 것이다. 니체가 보기에 소크라테스는 우리의 삶을 ‘질병’으로 간주한 최초의 철학자이다. 그러한 ‘병적인 철학’에 맞서서 니체는 삶과 철학에 건강을 다시 되돌려주려고 한다. 그리고 이 ‘건강’의 문제는 들뢰즈에게서도 핵심적이다. 소크라테스의 금언이 “너 자신을 알라!”라고 하면, 니체-들뢰즈의 금언은 “너 자신이 돼라!”이다.

 


 

 

 

 

 

 

그렇다면 누가 불건강한, 병약한 자들인가? 주제를 파악한 자들이다. 그리하여, 삶을 두려워하는, 그래서 삶을 향유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삶을 (긍정하는 대신에) 부정하며 진정한 삶을 내세의 삶으로 유예시킨다. 말하자면, 감히 살려고 하지 않는다. 자의에서건 타의에서건. 가령 체홉의 <벚꽃동산>에서 늙은 하인 피르스의 마지막 대사: “인생이 다 지나갔군. 산 것 같지도 않게!..” 왜 그런가? 자신의 자발적인 의지에 따른 긍정의 삶을 산 것이 아니라 노예로서 타성과 관습에 의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해서 자신의 삶을 어떠한 술어로도 고정/한정시킬 수 없는 고유한 것으로, 유일무이한 것으로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의 표어는 "삶은 다른 곳에 있다!(Life is elsewhere!)"이다.


반면에 건강한 자들이란 주제 파악 못하는 자들이다. 삶에 대한 넘치는 식욕으로 잠못 이루는 자들이다. 자기 자신이 되고 싶어하는 자들이다. 이들의 구호는 "삶은 지금/여기에 있다!(Life is here/now!)"이다. 그들은 언제나 앙콜(Encore!)을 외친다. "좋아, 한번 더!" 하지만, 이러한 긍정은 '이대로!'라고 건배하는 '부유한 노예'의 나르시시즘적 동일시와는 다른 것이다.

 

이 ‘너 자신이 되는 것(To become what one is)’에 대한 주판치치의 창의적인 주해에 따르면, ‘자신이 존재하는 바가 되는’ 순간은 합일의 순간이 아니라 순수한 분열의 순간이다.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아는 순간’은 주체화로 진입하는 순간이자 합일의 순간이고, 니체의 ‘너 자신이 되는 순간’은 주체로 퇴거하는 순간이자 분열의 순간이다('주체화'와 '주체'의 차이는 토이 마이어스의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앨피, 2005) 참조. 한편, 이 ‘분열적 주체’는 막바로 들뢰즈의 ‘안티-오이디푸스’를 떠올리게 하지 않는가?).

 

 

 

 

 

 

 

 

“이 분열의 표현들 중 하나는 퇴락 또는 부정의 원칙과 시초 또는 긍정의 원칙 사이의 구분이다.”(<정오의 그림자>, 43쪽) 그리고 이 분열에 대한 ‘개념적 인물들’이 그리스도(십자가에 못박힌 자)와 디오니소스이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디오니소스란 그 분열 자체를 가리킨다는 것. “디오니소스는 십자가에 못박힌 자 뒤에, 완전히 다른 어떤 것으로서 오는 게 아니다. 디오니소스는 단순히 새로운 다른 가치들의 등가물이 아니다. 디오니소스는 낡은 것의 몰락 이후에 오는 새로운 시대의 시초, 신기원의 아침이 아니다. 디오니소스는 한낮으로서의 시초이며, ‘하나가 둘로 변하는(one turns to two)' 순간이며 다시 말해서 새로운 그 무엇으로서의 바로 그 '둘이 됨(becoming two)' 또는 분열의 순간이다."(43쪽)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에게 위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교량이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사랑받아 마땅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하나의 과정이요 몰락이라는 것이다. 나는 사랑하노라. 몰락하는 자로서가 아니라면 달리 살 줄을 모르는 사람들을. 그런 자들이야말로 저기 저편으로 건너가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책세상판, 21쪽) 내가 좋아하는 번역본은 아니지만, 당장 옆에 있는 거라서 인용한다(내게 친숙한 것은 최승자 역의 청하판이다. 나는 5종의 국역본을 갖고 있다).

독어의 'Untergang'은 이행과 몰락의 뜻을 동시에 갖는 것으로 안다. 내가 읽은 서론에서 주판치치가 들고 있는 사례는 아니지만, 디오니소스란 따로 하나가 둘이 되면서 이러한 과정(이행)과 몰락을 동시에 수행하는 자, 그러한 순간의 이름이 아닐까도 싶다. 그런 것들은 새로이 니체 전집도 완간된 김에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나는 불어본과 함께 영어본, 러시아어본, 2종의 국역본을 갖고 있다)과 주판치치의 <정오의 그림자>를 마저 읽어나가면서 확인해볼 작정이다. 

얘기가 길어졌는데, 어쨌든 여기까지가 영역본 <니체와 철학>에 들뢰즈가 붙인 서문의 첫 페이지 '브리핑'이다. 원문보다 길어지는 것도 브리핑에 속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점점 쌓여가는 머리속의 글들을 처치(!)하기 위해서 이 글의 초안은 어제 자정 넘어 (아주 드문 일이지만) 집에서 작성한 것이다. 하지만, 몇 시간 걸려 한 페이지를 소화하는 걸 보면, 위대하기는커녕 내 위장이 얼마나 작은지 알겠다(떠들어대는 것들을 조지기 위해서는 깍두기들이라도 동원해야 할 모양이다). 언제쯤이나 주제 파악을 하게 될는지!..

05. 11. 23.

P.S. 그러니까 들뢰즈의 이 서문의 '본론'에 대한 브리핑은 또 미뤄지는 셈이 됐다(덕분에 애초의 제목과는 달리 니체는 아무말도 하지 않은 게 돼버렸다!) 그런 식으로 미뤄지는 만큼 수명도 연장되는 것이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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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주판치치의 베르그송론(영문)

 

 

 

 

라캉과 칸트를 다룬 <실재의 윤리>(도서출판b, 2004)와 독창적인 니체론 <정오의 그림자>(도서출판b, 2005)로 우리에게도 소개된 슬로베니아의 여성 철학자 알렌카 주판치치의 베르그송론을 옮겨놓는다(출처는 http://www.cinestatic.com/infinitethought/2006/03/zupancic-lecture.asp.) 보다 정확하게는 강연내용의 정리이다. 지난 봄(06. 03. 06) 강연으로 돼 있는데, 베르그송의 <웃음>을 다루고 있다. 이 <웃음>(1900)은 종로서적판(1989)과 세계사판(1992)로 두 차례 번역/출간된 바 있지만, 아쉽게도 현재는 모두 품절상태인 듯하다. 베르그송 입문서로 가장 얇은, 그렇기에/하지만 가장 쉬운/좋은 책이다.



Alenka Zupancic on Bergson and the Comic, March 2nd 2006

Bergson's "formula" of the comic, namely 'something mechanical encrusted on the living' gives a clear indication of the division at the heart of his conception of comedy: the separation of life (flexible, elastic, light, novel) and the machinic (the automated, the repetitious, the inert, the rigid). Zupancic began with this phrase, arguing that this division formed the core of all the other dyads in Bergson. I argued in questions that it was perhaps rather the opposition soul/matter that was more fundamental, and that any Lacanian re-reading of the comic through a perversely redemptive reading of Bergson's concepts such as 'life' would be in danger of falling into more or less the same theologically 'redemptive' structure as in Bergson's original argument:



(Long quote from Bergson's essay) 'Our starting-point is again "something mechanical encrusted upon the living." Where did the comic come from in this case? It came from the fact that the living body became rigid, like a machine. Accordingly, it seemed to us that the living body ought to be the perfection of suppleness, the ever-alert activity of a principle always at work. But this activity would really belong to the soul rather than to the body. It would be the very flame of life, kindled within us by a higher principle and perceived through the body, as if through a glass. When we see only gracefulness and suppleness in the living body, it is because we disregard in it the elements of weight, of resistance, and, in a word, of matter; we forget its materiality and think only of its vitality, a vitality which we regard as derived from the very principle of intellectual and moral life, Let us suppose, however, that our attention is drawn to this material side of the body; that, so far from sharing in the lightness and subtlety of the principle with which it is animated, the body is no more in our eyes than a heavy and cumbersome vesture, a kind of irksome ballast which holds down to earth a soul eager to rise aloft.'

Anyway, Zupancic pointed to a fundamental weakness in Bergson's formula that, whilst seemingly specific, is nevertheless too general - in a different vein, the same formula of the 'mechanical encrusted on the living' could easily be applied to the uncanny, for example, the living dead, for example, do they not precisely demonstrate this comedic formula, only in a horrific mode? Are zombies funny? Sometimes...



Bergson's further argument that laughter serves as a 'social corrective' simultaneously reduces the affirmatory elements of comedy (as Hegel argues) to mere forms of scorn and mockery. (Just a banal consequence of Bergson's empirically-driven social conservatism, I would argue, not to mention his ridiculous racism (from 'On Laughter', again): 'why does one laugh at a negro?...I rather fancy the correct answer was suggested to me one day in the street by an ordinary cabby, who applied the expression "unwashed" to the negro fare he was driving. Unwashed! Does not this mean that a black face, in our imagination, is one daubed over with ink or soot? If so, then a red nose can only be one which has received a coating of vermilion. And so we see that the notion of disguise has passed on something of its comic quality to instances in which there is actually no disguise, though there might be').

Bergson overlooks, she argued, the possibility that this formula could instead be the retroactive (and reactionary) effect of comedy itself - alternatively put, is not the mechanical rather constitutive of life itself? If we remove the mechanical do we really get pure liveliness/spirit? No! Life is already an imitation of life - repetition (in language/personality) does not persist purely on one side (the 'bad', heavy side) of the comedic/non-comedic division. Comedy plays not with the mechanism/life opposition, Zupancic continued, but with the inconsistency of the one (as subject) - the fact that the two elements identified by Bergson function in fact 'in a most intimate bond', rather than a disjunctive one, and that it is ultimately impossible to separate the two terms because of the 'insistence' of the one qua (incomplete) subject - traversed by language, not prey to the discrepancies between the spirit and the letter, exactly, but rather the way in which the spirit emerges out of the mechanical letter...slips of the tongue, the way language itself is productive of thought...

Zupancic quoted Groucho Marx (Driftwood) and Mrs Claypool from Night of the Opera so as to demonstrate the effect of comic imitation at the very heart of 'personality':

'That woman?
Do you know why I sat with her?

Because she reminded me of you.

- Really?
- Of course.

That's why I'm here with you,
because you remind me of you.

Your eyes, your throat, your lips...
Everything about you reminds me of you...

except you.'




Is the mechanical thus an essential feature of life, rather than its comedic antonym? Zupancic briefly turned to a discussion of 'drive' in Lacan, though this was (unfortunately) not really cashed out. Questions drew upon the relationship between Freud and Bergson (and why it was that the former's book on jokes was so unfunny), what the relationship between life and theatre was, if we are already 'playing' at life, so to speak. Also, didn't we also need to understand what the temporality of laughter was in order to understand comedy (comic timing, etc.); what were the cultural/historical dimensions of mechanism, and didn't we really need to be aware of them in order to put Bergson's claims about machines etc. into context?

Zupancic concluded that we needed to read Bergson's own examples against him: to examine the real structure at work in them and show how vivacity emerges, not against, but from within repetition.

06. 0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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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철학과 정신분석의 만남

슬로베니아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과 김상환 교수(서울대 철학과)와의 대담을 이미지 버전으로 옮겨놓는다. 원래는 <철학과 현실>(2003년 겨울호)에 '철학과 정신분석의 만남'이란 제하로 실렸던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예전에 짤막한 코멘트를 단 바 있다. 알다시피 지젝은 2003년 10월에 방한하여 다섯 차례의 강연을 가진 바 있는데(이 강연문들은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이데올로기>(철학과현실사, 2005)로 출간돼 있다), 대담이 이루어진 것도 그 즈음이다. 가벼운 서두에 이어서 여섯 가지 주제에 관해 대담이 이루어지고 있다. 사실 대담 자체는 인터넷상에 떠돈 지 오래됐는데, 얼마전에 알라딘 서재에에도 전문이 돌아다니길래 좀더 읽기 편하게 정리해놓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지젝 입문'으로서 아주 유용하겠기 때문이다. 언제나처럼 이미지들 외에도 강조와 군말은 나의 것이다.

 

 

 

 

김상환: 시작하기 앞서 <철학과 현실>의 독자들을 대신해서 대담에 응해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독자들이 당신의 생각을 구체적이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 믿습니다.

지젝: 말씀을 끊어서 죄송합니다. "철학과 현실"이라는 제목에서 '현실'은 어떤 뜻을 담고 있죠? Wirklichkeit, realte, actualtite, matterialite 등등 중에서 어떤 말에 해당하죠?

김상환: Wirklichkeit에 가장 가깝습니다.

지젝: 아, 알겠습니다.

1. 정신분석과 철학의 관계에 대하여

김상환: 우선 정신분석, 혹은 정신분석과 철학 사이의 긴장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처음으로 당신 책을 읽었을 때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가령 푸코, 들뢰즈, 데리다 같은 프랑스 철학자들은 모두 정신분석과 논쟁을 벌였고, 그들 자신의 철학적 개념들을 가지고 정신분석을 넘어서거나 보완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출발점은 오히려 프로이트나 라캉의 정신분석 바로 곁에 위치하고 있고, 당신은 철학 쪽에서 가해오는 공격에 맞서 정신분석을 지켜내거나 옹호하고 있다는 인상을 줍니다. 그래서 정신분석과 철학 사이에 어떤 긴장과 갈등이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 갈등의 본질적 성격은 무엇입니까? 어떤 지점에서 이런 투쟁이나 논쟁이 이루어지는지요?  

지젝: 제가 정신분석을 대표한다고 주장할 수 없기 때문에 저로서는 대답하기 다소 곤란한 질문입니다. 저는 정신분석을 실천하는 사람이 아니라 단지 제가 알고 있는 정신분석을 이론화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정신분석과 철학 사이에 그와 같은 긴장이 감도는 방식을 살펴보면 대개 두 쪽의 관점에 모두 오류가 있는 것 같습니다. 먼저--물론 이것은 가장 통속적인 수준의 오류일 텐데--몇몇 정신 분석가들의 경우 진료적 용어들을 들먹여가며 철학을 예단, 처단해 버립니다. 마치 철학이 일종의 편집증, 과대망상증이기나 한 듯 단정하는 것인데, 이는 심지어 프로이트에게서조차 엿볼 수 있는 경향입니다. 

그는 철학자의 충동을 사유의 전능성을 믿는 어린아이 같이 순진한 태도에서 나온다고 보고, 이 태도가 철학에 남은 최후의 잔여라고 주장합니다. 이는 철학이 하는 모든 일을 병리적인 어떤 것으로 환원하거나 철학을 병리화 해버리는 일입니다. 게다가 프로이트는 철학자들이 항상 하나의 완성된 그림, 곧 총체성을 고민하고 있다고 비판하는데, 라캉 역시 이 점에서는 그를 따르고 있습니다.

사실 정신분석은 어떤 비일관성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을 포착, 해명하고자 합니다. 라캉이 반복해서 정신분석이 탁월하게 반(反)-철학적이라고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점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는 어떤 개별 과학의 입장에서 반대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총체성에 대한 해석학적 관점에서 반대한다는 것이고, 또 어떤 환원 불가능한 미해결의 간극을 포착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철학에 대한 이런 원초적인 반대에 대해 그 세부사항을 구구절절이 늘어놓는 것은 무용할 뿐 아니라 아무런 가치도 없을 겁니다. 진정한 철학은 모든 것을 설명해 줄 총체적 체계를 구축하려는 어리석은 시도가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철학도 역시 어떤 환원 불가능한 간극에서 출발합니다. 이를 하이데거처럼 "존재론적 차이" 등으로 부를 수도 있겠죠. 우리는 늘 생활세계, 삶의 세계에 함몰해 있고, 일차적인 철학적 제스처는 어떻게 이 세계에 균열이 존재하는가, 어떻게 그 균열이 기능하거나 하지 않게 되는가를 밝히는 일입니다. 심지어 철학은 본래적으로 이런 간극을 정식화하는 작업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가령 칸트 같은 철학자가 초월적인 것과 초월적이지 않은 것을 구별하면서 현상과 본체 사이의 어떤 간극을 발견하고 이 간극을 환원 불가능한 인간 조건으로 제시할 때가 그렇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정신분석 쪽의 비난내용과는 반대로 철학은 우리 지식의 유한성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칸트, 하이데거 등과 같은 최상의 철학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 유한성을 적극적인 존재론적 조건으로 발전시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와 맞서는 어떤 다른 경향이나 관점이 있습니다. 이는 철학이 정신분석을 초월론적 관점에서 비판, 단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는 관점입니다. 이런 쪽의 사람들은 정신분석이 그 자신의 용어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말합니다. 가령 프로이트에게서 나타나는 리비도 개념이나 에너지 개념, 이것들이 의존하고 있는 기계론적이고 생물학적인 모델 등이 그 사례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들은 정신분석을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렇게 주장할 뿐입니다. "정신분석은 개별 과학이고 그 자체로서는 근본적인 철학적 질문을 감당할 수 없다. 의미의 역사적 지평에 대한 물음과 같은 해석학적 질문을 수행할 수 없다. 가령 정신분석은 이미 의식, 무의식, 인과성, 섹슈얼리티 등등과 같은 일련의 개념들을 자동적으로 받아들이고 이 개념들을 통해 전개되고 있지만, 이 용어들의 존재론적 의미나 지위를 설명할 수는 없다."

정신분석 자체가 어떤 철학에 의존한다는 것이고 그 스스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철학적인 전제들에 의존한다는 것인데, 이런 의미에서 다른 모든 개별 과학처럼 정신분석 역시 철학적 반성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미묘한 지점입니다. 우리는 분명 프로이트에게서 생물학적인 진술을 찾을 수 있습니다. 가령 그가 억압, 트라우마 등에 대한 경험을 생명 에너지 차원에서 일어나는 어떤 생물학적 불균형으로 말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물론 이것들은 생물학이 더 발달한다면 풀릴 수 있는 문제일지 모르고,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정신분석의 개념적 장치를 필요로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이 문제를 생물학적 용어들로 곧바로 정식화할 수 있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여기서 저는 자크 라캉을 따르는데, 누구든 프로이트를 면밀하게 읽어본다면 그가 실천했던 고유한 의미의 정신분석은 바로 상호주관적인 실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정신분석이 어떤 단순한 실증과학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대화라는 것은 이미 명백해집니다. 물론 정신분석이론 자체를 생물학적 관점에서 읽을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어리석게도 프로이트의 충동, 죽음충동 등등의 개념을 일종의 선천적 본능이나 자기 해체, 자기 파괴 등과 같은 생물학적 개념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개념들이 프로이트 안에서 어떻게 기능하고 있는지를 자세히 살펴본다면 생각을 달리해야 하고, 또 이것이 라캉이 이루어낸 큰 성취입니다.

우선 프로이트는 상징적 질서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충동(Trieb)은 본능(instinct)이 아닙니다. 그것은 형이상학적인 어떤 것이고, 삶과 죽음 너머에 있습니다. 그것은 생물학적 본능이 아니라 정확히 자연 혹은 자연적 순환을 탈자연화하는 심급, 어떤 근본적인 심급입니다. 따라서 저는 정신분석이 단지 특수한 영역을 다루는 어떤 존재적(ontisch) 학문일 순 없다고 봅니다. 정신분석의 실천과 개념들의 존재론적 지위를 묻고 설명하기 위해서는 초월론적 철학의 수준으로 옮겨가야 합니다.

가령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억압 등과 같은 인간 심리의 발생을 설명할 때 프로이트는 셸링이 <세계시대 Die Weltalter>(1811)에서 하고 있는 것과 같은 어떤 사후적 추정작업을 벌이고 있습니다. 현실, 그리고 이 현실을 지각하는 주체가 어떻게 출현했는지에 대한 초월론적 성찰을 제공하는 것이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거세 등의 개념들은 존재적이지 않고, 심지어 정신분석의 범주에 속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개념들은 일종의 초월론적(=선험적)인 것, 독일어로 전(前)-역사(Vorgeschite)에 속하는 것을 명명하고 있고, 우리가 주체로서 출현하기 위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물음에서 비롯됩니다. 저는 "우리는 이미 언어 속에서 존재한다" 등과 관련된 라캉의 이론은 바로 이와 같은 초월론적 물음을 펼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우리가 되기 위해 어떤 일이 일어났어야만 하는가에 있는 것이고, 정신분석이 생물학적이냐 심리학적이냐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궁극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죽음충동 같은 프로이트적 사유의 가장 근본적인 차원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독일 관념론, 헤겔과 셸링 등이 말하는 어떤 근본적인 부정성 등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정신분석과 철학적 전통의 만남, 특히 정신분석과 독일 관념론의 예기치 못한 마주침은 두 쪽에 모두 중요합니다. 정신분석이 진정 무엇에 대한 물음인지를 파악하는 것은 이런 철학적 참조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고, 그 역도 마찬가지이길 바랍니다.

김상환: 프랑스 철학자 쥬랑빌(Alain Juranville) 교수를 알고 계실 텐데요, 그는 그 유명한 저작 <라캉과 철학 Lacan et la philosophie>(1984) 말미에서 오늘날 정신분석은 철학의 필수불가결한 조건에 해당하는 위치에 있음을 지적하고, 철학과 정신분석 사이에 어떤 적극적인 대화가 필요함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묻겠습니다만, 정신분석이 서양 현대철학의 전개과정에 적극적으로 기여한 바와 부정적으로 영향을 미친 바가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지젝: 저는 서양철학사를 어떤 근본적 통찰에 대한 망각의 역사로 읽고 있는 사람들에게 동의합니다. 이런 점에서는 라캉뿐 아니라 이른바 서양의 현전(現前)의 형이상학이 어떤 근본적인 수준에 대한 망각과 연루되어 있다는 하이데거에게도 동의합니다. 어떤 근본적인 간극, 차이, 잉여 등등과 같은 것을 하이데거는 "존재론적 차이"라고 부르고, 다른 사람들은 또 다른 이름으로 부르지요. 저는 이 잉여를 하이데거와는 달리 단지 철학의 시작(소크라테스 이전과 이후)에서만이 아니라 철학사 전체를 통해 여기저기 위치시킬 수 있다고 봅니다.

 

 

 

 

가령 데카르트와 같은 서양 근대 철학의 출발점을 생각해봅시다. 그가 코기토를 사유하는 실체(res cogitans)로, 다시 말해서 어떤 실증적인 실체로 바꿔버리는 순간 어떤 간극이 곧바로 닫혀버렸습니다. 이는 칸트에게서도 마찬가진데, 그가 뭔가에 접근해 가다가 끝까지 사유하기를 두려워할 때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좀 다릅니다. 셸링에 대한 위대한 해석에서 그는 인간자유에 대한 셸링의 논제에서 벗어나고 있는 어떤 차원을 돌파하고자 합니다. 따라서 저의 첫 번째 전제는 철학의 유한성이 그 자체로 닫혀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철학에는 어떤 근본적인 부주의(in-attention)가 존재합니다. 어떤 유한성, 불완전성에 대한 어떤 진정한 철학적 경험이 있지만, 이 경험은 어떤 형이상학적 구축물에 의해 곧바로 가려져 버리는 것이죠. 저는 정신분석이 철학 안에서 억압되어 있는 것을 어떤 근본적인 방식으로 자리매김하고 정식화할 수 있게하는 사유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억압된 것이 병리적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이데거가 셸링을 해석하면서 발견해 낸 멋진 구절처럼, 그것은 항상 자기-오인을 발견해내는 몸짓입니다.

우리는 이런 몸짓에 너무 맹목적입니다. 많은 분들이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제가 보기에는 바로 이런 의미에서 정신분석은 우리로 하여금 지금까지 등한시되고 잘못 지각되어온 철학 자체의 발견적 몸짓, 발견적 경험을 사유하게 합니다. 이는 칸트가 멋지게 표현했던 것처럼, 세계의 존재론적 불완전성의 관념에 대한 근본적 경험입니다. 이는 단순히 현실 바깥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 안에는 어떤 간극이 존재하고, 때문에 현실은 완결성을 띤 것이 아닙니다. 이런 문제나 문제제기야말로 유일하고도 독특한 철학적 물음이라고 생각합니다.  

2. 포스트 모더니즘에 대하여   

김상환: 그러면 철학에 대해 더 묻겠습니다. 당신은 꾸준히 데리다와 들뢰즈, 그 밖에 포스트모더니즘 등에 맞서는 또 다른 대안을 제시하려는 제스처와 노력을 보여주었습니다. 현대 프랑스 철학과 당신 사이에 어떤 긴장이나 갈등이 있는 것 같은데, 이 점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지젝: 이 갈등은 우리가 어떤 의미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지에 달렸습니다. 만일 우리가 포스트모더니즘을 "거대한 형이상학적 정초의 계획은 끝났다, 우리는 거대 사유는 할 수 없고 단지 일상적 행위만을 실천할 수 있을 뿐이다. 모든 시작에는 환원 불가능한 복수성, 분산과 산포가 존재한다" 등등의 의미로 이해하다면, 저는 이런 종류의 포스트모더니즘에 반대합니다. 물론 이 용어는 유행을 따르는 명칭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보통 포스트모더니스트라 불리는 사람들 중 거의 아무도 자기 자신을 포스트모더니스트로 생각하지 않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포스트모더니스트일까요? 들뢰즈는 거대하고 거의 고전적인 철학체계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데리다의 경우는 간단히 말하기 어렵고 훨씬 더 애매하지만, 어쨌든 레비나스처럼 일종의 부재하는 절대자에 다시 준거점을 두고 있고 윤리적 명령을 해체론의 해체 불가능한 조건으로 설정하고 있으므로, 그 역시 일종의 초월론적 관점을 끌어들이고 있는 셈입니다. 어떻게 보면 데리다는 해체론 자체를 일종의 초월론적 아프리오리(a priori)를 발견하는 활동으로 이해하고 있고, 이 아프리오리를 일종의 윤리-종교적 용어를 써서 메시아적 정의(正義)로 설정하는 것입니다.

 

 

 

 

흔히 위대한 포스트모더니스트라고들 하는 리오타르도 마찬가집니다. <포스트모던의 조건 La condition postmoderne>(1979)에서 그는 환원 불가능한 다양성이나 복수성을 강조하고 거대담론을 비판하지만, 이를 상식적인 의미의 비판이라고는 볼 수 없으며, 게다가 리오타르 자신이 거대담론의 종말에 대해 말할 때 그 자신이 거대담론을 구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또한 리오타르 자신이 나중에 다시 어떤 윤리적 차원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는데, 이는 자신이 말하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셈이지요. 이런 예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푸코는 더 복잡하구요.

따라서 여기서 일차적으로 주목해야할 점은,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은 매우 다의적으로 사용되는 용어라는 것이고, 이런 용어상의 애매성에는 최소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먼저 포스트모더니즘을 단지 문화적 영역의 역사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확실히 포스트모더니즘의 계기는 예술적 아방가르드가 위축되고 조형예술, 영화 등등에서 급진적 근대성이 종결되었을 때이고, 이는 1970년대에 일어난 일이었다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이런 표피적 관점에서 벗어나 보다 심층적인 사상사적 이해를 구한다면, 최초의 포스트모더니스트는 니체일 뿐 아니라 이미 셸링이었으며, 심지어 후기 헤겔도 포스트모더니스트였습니다. 이 때 포스트모더니즘은 근대성, 계몽의 기획에 대한 일종의 의심이자 자기 비판적 고찰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흔히들 포스트모더니즘과 결부시키는 이른바 후기구조주의에 초점을 맞춰보면, 여기서 역설은 훨씬 심하게 나타납니다. 당신도 알고 계실 테지만, 프랑스에서는 지금까지 그 누구도 실질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후기구조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이 용어들은 앵글로 색슨적 지칭일 뿐, 프랑스에서는 전혀 무의미합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어떻게 "후기구조주의"라는 딱지 아래 우리가 앵글로 색슨적인 학문 담론에 들어서게 되고 또 동일한 영역의 일부로 인식되는 일이 일어나느냐 하는 데 있습니다. 프랑스에서조차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스트나 후기구조주의자로 불리는 사람들은 서로를 무시하고 혐오합니다.

 

 

 

 

프랑스에서 데리다와 들뢰즈를 함께 묶어서 보는 것은 정신 나간 짓입니다. 그들은 사상의 차원에서는 물론이고 개인적 차원에서도 서로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저도 데리다가 들뢰즈와 가깝다거나 들뢰즈가 데리다와 가깝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후기구조주의자들이 만나는 방식은 데리다와 푸코 사이의 유명한 논쟁이 그렇듯이 대개 엄청나게 험악합니다. 데리다가 끊임없이 광기를 비웃으면 푸코는 광기가 어떤 극단적인 폭력 속에서 파열되고 사라져버렸다고 응수하지 않습니까. 저도 이 프랑스 철학자들이 서 있는 영역에 개입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제가 이때 항상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자크 라캉이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스트나 후기구조주의자들 중의 한 사람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적어도 앵글로 색슨적 관점에서 라캉은 "의미가 해체되어야 한다, 주체는 무의식적 메커니즘에 의해 지배된다, 등등......"을 입증했다고 간주되고 있는데,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저는 데리다적인 해체의 영역과 라캉적인 정신분석의 영역이 총체적으로 양립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며, 이에 대해 점점 더 커다란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때 두 사람이 "총체적으로 양립 불가능하다"는 것은 둘 중 누구 하나가 더 옳다는 게 아니라 그 둘 사이의 직접적 대화는 전혀 불가능하다는 의미에서입니다(*즉, 데리다와 라캉의 '관계'는 불가능하며, 이 불가능은 위상학적 불가능성에 속하다).

물론 저는 데리다를 존경하지만, 가령 <우편엽서 Carte postale>(1980)에서 그가 라캉을 직접적으로 비판할 때 명백히 단순한 오독을 범하고 있으며, 라캉 측에서의 몇 가지 답변 역시 마찬가지임을 저는 인정합니다. 따라서 적어도 이 수준에서 포스트모더니스트라면 정직하게 담론의 환원 불가능성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제가 거듭 밝히고자 하는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후기구조주의의 지배력에서 벗어나는 라캉의 특수성입니다. 저는 라캉의 이런 특수성을 이론적, 윤리적, 정치적 차원에서 부각시키고자 합니다.

먼저 이론적 특수성에 대해, 가령 데리다의 라캉 비판이 지닌 문제점을 생각해 봅시다. 데리다의 비판점은 라캉이 주체-형이상학의 울타리(cloture)에 머물러 있다는 것인데, 라캉 자신은 이 울타리 안에 남아 있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라캉의 기획 자체가 주체라는 울타리 안에 남아 주체 개념을 다시 부여잡는 것이었으며, 그러나 또한 이 주체를 근본적으로 다시 정의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해체주의자나 구조주의자에서와는 대조적으로 라캉에게서 주체는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라캉은 주체가 단지 담론의 효과라거나 어떤 익명적이고 전(前)-주체적인 텍스트적 과정으로부터 상이한 주체적 위치가 발생한다는 알튀세르 같은 사람들의 관점에 반대합니다. 라캉이 제기한 문제는 상징적 구조에 종속되어 있는 한에서의 이 주체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라는 데 있습니다.

저는 정치적-윤리적 차원에서도 어떤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해체주의에는 리오타르, 데리다 등의 여러 가지 형태가 있지만, 적어도 레비나스의 윤리학과 데리다의 윤리학은 어떤 근본적인 지평에서 서로 수렴하게 됩니다. 타자를 환대하고, 전적으로 우연한 타자와의 마주침에 열려 있어야 한다는 주장에서 그들은 한 목소리입니다. 이 수준에서 데리다와 라캉을 함게 묶어주는 뭔가가 있다면, 그것은 가령 사이몬 크리츨리(Simon Critchley)가 지적했듯이 데리다의 환대가 라캉이 말하는 전적으로 우연한 실재와의 마주침이라는 점입니다.

라캉의 용어로 말하자면, 그것은 상징적 구조의 바깥에 있는 실재의 우연성이라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런 점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라캉의 윤리학은 그 기본적 입장에서 데리다의 윤리학과 다릅니다. 물론 저는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차이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고, 이것은 라캉의 새로움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정식화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상환: 여기서 질문을 덧붙이고 싶은데, 차이란 정확히 무엇일까요? 현대 프랑스 철학은 보통 차이의 철학이라 불립니다. 그렇다면 데리다나 그 외 다른 철학자들의 차이 개념에 맞서 라캉의 차이 개념은 어떤 것입니까? 라캉의 차이 개념은 다른 이들의 차이 개념, 철학적 개념상의 차이와는 매우 다를 텐데요.

  

지젝: 아마 이것을 설명할 수 있는 한 가지 방식이 있다면 "은유 대 환유"라 할 수 있을 겁니다(*매우 흥미로운 주장이다. 은유/환유의 이분법은 사실 러시아 출신의 언어학자 로만 야콥슨을 원조로 가지며, 라캉은 야콥슨의 은유-환유론을 새롭게 전유한 바 있다). 보통 해체론에서는 환유가 은유에 대해 우위를 가지고 있을 겁니다. 여기서는 궁극적인 존재론적 사실은 원초적인 환유적 복수성, 분산과 산종(散種)에 있고, 이것이 데리다적 차이입니다. 은유는 언제나 그 다음, 두 번째에 옵니다.

 

 

 

 

기본적으로 니체나 다른 사상가들, 심지어 어떤 면에서는 들뢰즈 역시 이런 차이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원초적인 사실은 수동적이지도 능동적이지도 않은 창조적 행위로서의 분산적 생산성에 있고, 그런 생산성을 이루어내는 활동에 있습니다. 그것이 데리다가 말하는 원초적-기록(archi-ecriture)이나 초월론적 활동으로서의 차연(differance)이고, 또 그 차연의 생산성이죠. 그렇다면 우리는 이 창조적인 복수적 운동과 형이상학적 재현 사이에 어떤 간극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발생의 과정이 대개 그 자신의 장애를 생산하는 과정임을 뜻합니다.

 

 

 

 

당신도 알고 있듯이, 이미 니체가 바로 그와 똑같은 문제를 제기했죠. 그는 환원 불가능한 욕망의 복수성이나 다원성을 강조했고, 또 여기서 계보학의 문제를 찾았습니다. 이 문제는 어떻게 의지 자체가 그 자신의 장애물, 곧 도덕성 등을 생산했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지나친 단순화일지 모르지만, 저는 바로 이것이 데리다적 해체론이며, 심지어 들뢰즈적 접근 역시 이런 원초적인 발생적 분산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고 봅니다. 물론 데리다는 이를 다른 이름들, 가령 원초적 차이(archi-difference), 흔적(trance), 산종(散種) 등등으로 부르는데, 이런 운동은 어느 정도 그 자신의 한계나 마감국면을 스스로 발생시킵니다.

라캉에게서 이 모든 것이 거의 정확히 그 반대입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일종의 근본적인 간극, 어떤 입벌림 현상이 있다는 것이 중요하고, 다양성은 바로 이 간극을 사후적으로 메우기 위한 어떤 폭발현상이라는 겁니다. 원초적 사실은 다양성이 아니라 하나 안에 있는 간극입니다. 다양성은 이런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서 나중에 발생할 뿐입니다.

단순한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대부분 페미니스트인 미국의 해체주의자들은 라캉이 이항대립의 논리에 빠져 있다고 비난합니다. 다양성 대신 주체 대 타자, 남자 대 여자 등등의 대립 관계를 설정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실상은 그런 게 아닙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라캉이 성적 차이라는 토픽을 전개할 때, 그는 단순히 이항대립의 논리를 펼치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말해서 한 항이 사라지는 순간의 이항 대립의 논리를 펼치고 있습니다. 라캉은 이를 "여성의 기표는 부재하는 기표"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고대 우주론에서 남성과 여성이 각각 양(陽)과 음(陰)의 원리라면, 라캉은 우리엔 단지 양만 있고 음은 없다고도 말하는 셈입니다. 라캉의 문제는 우리에게 주어진 다양성이 하나 안에 있는 이 근본적 불균형을 메우기 위한 과정의 산물임을 보여주는 데 있습니다.

이에 대한 좋은 예로 제가 제 책에서 언급했던 영화를 들어보겠습니다. 그의 초기 작품 중 톨스토이를 패러디하고 있는 영화가 있는데(*우디 알렌의 영화 <사랑과 죽음>을 말한다), 톨스토이의 자연스러운 대립항은 물론 도스토에프스키지만, 이 영화에서 도스토에프스키는 어떤 식으로도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는 빠져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한 보충이 일어납니다. 두 주인공이 나눈 짤막한 대화에서 도스토예프스키가 쓴 대작의 거의 모든 제목들이 한꺼번에 언급되는 것이죠. "그 백치는 어디 있지?" "아, 카라마조프 형제 말이니?" "그는 지하생활을 하고 있어." 이렇게 다양성이 폭발되어 나오는 이유는 타자가 억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원초적 사실은 하나는 하나가 아니라는 점에 있습니다. 하나는 그 자신과 일치하지도, 일관적이지도 않습니다. 원초적 사실은 차이가 두 항 사이의 차이가 아니라, 구조주의적 용어로 말해서 어떤 한 항과 그것이 기입되는 자리 사이의 차이입니다(*지젝이 자주 인용하는 것은 말라르메의 시구이다). 이는 이미 유럽 중세 논리학에서 이중화(二重化), 상징적 이중화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가령 당신이 어떤 것에 이름을 붙일 때 당신 앞에는 대상과 이름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름이 단지 대상에 외부적인 무언가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름은 그 대상 자체의 구멍에 대한 포착이자 보충입니다. 이름은 어떤 대상을 명명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서 당신이 지각할 수 없는 어떤 구멍을 명명합니다.

고유명사가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생각해봅시다. 이상하게도 당신이 누군가의 이름을 부를 때 당신이 겨냥하는 것은 정확히 바로 기술(記述)할 수 없는 어떤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것이 이름 안에 있는 어떤 직관적 진리입니다. 이름이 의미하는 것은 내가 참되게 기술할 수 없는 새로운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이름을 기술(記述) 문장으로 번역할 수 있다는 버트란트 러셀의 생각은 여기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름은 꼭 필요한 것이고 이름 없는 언어는 존재하지 않지만, 왜 그런 걸까요? 만일 대상에 어떤 간극이 없고 그래서 그것이 꽉 차 있다면, 당신은 단지 그 대상을 기술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대상에는 어떤 구멍이 있는 것이고, 이 구멍을 명명하기 위해서 바로 이름이 필요한 겁니다.

또한 이런 원초적 간극이 저에게는 궁극적 사실, 궁극적 지평인데, 정신분석에서 그것은 상징적 거세에 해당합니다. 이 거세 개념은 하이데거의 의도와 매우 근접한 아이디어를 담고 있습니다. 거세는 역설적으로 부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거세는 당신에게 무언가를 제거한다는 의미에서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원초적인 증여에 해당하는 부정적 운동입니다. 나는 너에게서 무언가를 앗아감으로써 너에게 뭔가를 준다는 것, 어떤 공간이나 여백을 열어준다는 것. 바로 여기에 거세 개념의 역설이 있습니다.

 

 

 

 

부정성을 사유한다는 것은 오로지 부정적인 것만을 생각한다는 것이 아니라 뭔가를 주는 것을 사유한다는 것입니다. 하이데거가 차이(Unterschied), 빈터(Lichitung)를 언급할 때처럼, 이는 마치 물러서고 후퇴하면서 선사하고 증여하는 장면을 생각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물러감(Withdrawal)을 선사(Giving)로 사유하기. 어쩌면 이런 역설로부터 멋진 지각 이론을 전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대상에 너무 가까이 다가간다면 그것을 보지 못한다는 것, 대상에서 어떤 의미를 얻기 위해서는 대상으로부터 뭔가를 상실해야 한다는 것, 물러섬과 철회가 지각의 조건이라는 것 등등......

단순화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라캉과 데리다는 서로 다른 차이를 말합니다. 그들을 존경하느냐와는 별도로 우리는 이 차이를 평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에게 들뢰즈는 들뢰즈이고, 데리다는 데리다이며, 라캉은 라캉입니다. 이는 제 새 책의 토픽이기도 합니다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저는 이들의 작업이 어느 정도는 이전의 철학자들, 가령 스피노자, 칸트, 헤겔에 대한 거대한 재해석이자 반복이라고 생각합니다(*자세한 논의는 <신체 없는 기관>에 포함돼 있다).

들뢰즈는 스피노자이고, 그 자신이 그렇게 말합니다. 데리다에 대해 말하자면, 물론 그는 동의하지 않겠지만, 저는 그가 자신의 주요 용어들이 어떤 해체 불가능한 조건임을 강조하므로 칸트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라캉은 그 누구보다 헤겔적이죠. 혹은 더 멀리까지 소급하자면, 들뢰즈는 그리스적 이교도이고, 데리다는 유대교이며 라캉은 기독교인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런 3원성은 서양사상사의 근본적 정식이고 아마 계속 다시 반복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큰 구도를 제안하고 이를 증명하는 것도 큰 가치가 있겠지만, 제가 여기서 따르고자 하는 규칙은 프로이트가 "세부에 대한 해석"이라 부른 것, 곧바로 큰 대답을 찾지 말고 공명을 주는 작은 지식, 작은 과학들을 보라는 것입니다(*문학은 이러한 디테일에 관한 것 아닌가? 나는 이 디테일에 대한 주목이 과학/철학에 대해서 문학이 갖는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겸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큰 시각에서 이런저런 비교작업을 해 볼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것은 비교가 아니라 뭔가를 밝혀주고 빛을 비춰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서양 형이상학이고 이것은 동양 철학이고 하는 식의 거대한 종합을 저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만약 당신이 큰 것을 직접적으로 찾으려 한다면 바로 그 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3. 영화에 대하여  

김상환: 이제 주제를 철학에서 다른 주제로, 가령 영화로 바꿔보지요. 물론 세부적으로는 묻지 않겠습니다. 당신은 영화를 보는 새로운 방식을 보여주고 창안했다고도 할 수 있는데....  

 

 

 

 

지젝: 물론 그런 새로운 방식들이 있습니다. 가령 들뢰즈의 영화 이론 같은 것이 그렇다고 인정합니다. 영화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들뢰즈를 암묵적으로 참조하고 있죠. 그러나 저에게도 새롭게 뭔가를 창안했다는 말을 하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이 점에 관한한 저는 매우 자기 비판적입니다.  

김상환: 그래도 영화를 다루는 데 있어 들뢰즈적 방식과 구별할 수 있는 지젝적인 방식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지젝: 저는 여전히 회의적입니다. 다만 저 자신은 영화를 세 가지 수준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먼저 대부분의 경우 저는 영화를 단지 정신분석이나 철학의 문제를 설명하기 위한 사례로 이용합니다. 이용만 있지 창조는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 수준에서 저는 일상적 삶에 암묵적으로 함축되어 있는 이데올로기를 조명하기 위해 영화를 이용합니다. 오늘 이 시대의 징후로서의 영화라고 할까요. 이 수준은 그래도 첫 번째 수준보다는 나은데, 그 이유는 이런 작업이 이론적 논점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어떤 영화적 세계에 대한 설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진정한 영화 분석은 아닙니다. 영화를 어떤 존재론적 사태로서 다루고 있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가령 이미지의 존재론적 지위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건 아니죠. 저는 이런 물음을 소홀히 했고, 이 점을 자기 비판적 시각에서 지적하고 싶습니다.

 

 

 

 

대부분의 영화분석에서 저는 기본적으로 줄거리를 해석하고 배우들이 상호작용하는 방식을 해석하는데, 여기서 영화는 시각적 매개에 그치고, 정말 철학적인 분석은 아주 조금 밖에 안 됩니다. 그렇다고 그런 분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히치콕을 다룬 책에서 <현기증>이나 <사이코>를 분석할 때, 제가 진정으로 묻고자 했던 것은 고유하게 존재론적인 질문이었습니다. 이미지의 존재론적 지위에 대해서는 물론 "이미지와 사운드는 어떻게 상호작용하는가" 등과 같은 문제 말입니다.  

제가 공동편집자로 참여한 논문집 <사랑의 대상으로서의 응시와 목소리 Gaze and Voice as Love Objects>(1996)에서도 저는 이런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저는 영화에서 아주 흥미로운 현상을 봅니다. 그것은 영화가 자연적인 것으로 지각되지 않게 되는 현상입니다. 물론 영화에서 말하는 자는 현실적인 인간입니다. 그러나 목소리는 마치 떨어져 나온 공포스런 육체로, 무례한 침입자로 지각됩니다. 영화의 존재론적 의미가 드러나거나 영화가 영화로서 체험되는 것은 이런 대목입니다.

 

 

 

 

재미있는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가령 초기 유성영화에서 우리는 환각적인 목소리, 신체 없는 목소리, 감지할 수 없는데도 우리 주변을 떠돌아다니는 목소리만을 지각하게 됩니다. 이는 매우 길들이기 어려운 외상적 목소리죠. 이는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 Enjoy Your Symptom!>(1992) 1장에서 제가 검토한 찰리 채플린에게서도 발견됩니다. 찰리 채플린이 어떻게 유성영화에 저항했느냐를 살펴보면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는 목소리가 얼마나 외상적인가에 대해 남다른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고, 히틀러를 패러디한 위대한 작품 <독재자>(1939)에서조차 그는 전형적인 두 명의 목소리 캐릭터를 설정합니다. 좋은 녀석, 유대인 아버지는 항상 말이 없고 조용한 인물인 반면, 나쁜 녀석은 항상 목소리입니다. 그는 소리를 냅니다. 하지만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자기 비판적인 시각에서 말하자면, 저는 이런 현상에 어떻게 접근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욕심도 크지만 그만큼 좌절도 큽니다(*지젝을 읽고 좌절하는 이들은 어떡해야 하나?). 영화에 대해 더 정통해야 하고 더 근본적인 범주를 찾아야 하는데.... 저는 또 고전 음악에 대해서도 역시 어떤 정통하고 내재적인 지식을 가지고 싶습니다. <환상의 돌림병 The Plague of Fantasies>(1997)의 두 번째 부록(<로베르트 슈만: 낭만적인 반휴머니스트>)은 인간의 노래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주 유감스럽게도 저의 작업은 단지 모방에 불과했고, 명백히 저는 충분한 내재적 지식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저의 큰 좌절입니다.

김상환: 겸손하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계속 영화에 초점을 맞추도록 하죠. 문학, 연극 등 다른 장르에 비교할 때 영화만이 갖는 커다란 이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그리고 영화가 미래 문화에 대해 갖는 적극적 의미가 있다면 또 무엇일까요?  

 

 

 

 

지젝: 저는 영화가 20세기 예술이라는 질 들뢰즈의 개념을 기본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왜냐하면 영화에서 시선은 신체 없는 기관으로 자동화되기 때문입니다. 몽타쥬, 카메라 움직임 등등의 공정을 거친 영화에서 시선은 말 그대로 "실재적 대상"으로 주변을 둥둥 떠다니게 됩니다. 다른 한편 저는 새로운 시각적 디지털 기술에 주목합니다. 이를 아직 무엇이라 정의하진 못하겠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여기에 함축된 논리가 더 이상 과거와 동일한 논리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가상현실은 우리를 전혀 다른 곳으로 끌고 가고 있습니다. 여기서 당신에겐 프레임이라는 단위만이 남습니다. 당신은 시선을 도둑맞고 이 도둑맞은 시선은 당신 주변을 떠다니죠. 하지만 이런 디지털 기술과 가상현실에서도 어떤 유기적 전체성이 드러나지 않는 것은 아니고, 다만 그 드러남의 방식이 과거와 달라졌습니다. 프랑스의 영화 이론가이자 저의 좋은 친구인 미셸 시온(Michel Chion)은 풍경(Landscape)이라는 말을 따와 풍음(Soundscape)라는 아주 멋진 개념을 발전시켰습니다. 이런 아이디어는 뉴미디어의 영향 아래에서 나온 것입니다.

 

 

 

 

고전 영화에서 목소리는 기본적으로 이미지에 수반되는 것입니다. 사운드는 이미지에 맞춰 조정되고 부여되죠. 그러나 지금은 마치 유럽 중세의 그림으로 되돌아가기라도 하듯, 당신은 단지 시각적으로 파편화된 대상만을 발견합니다. 당신의 시각적 주의는 파편화되는 반면, 이 파편들에 전반적 배경(Hintergrund)을 제공하고 위치를 제공하는 것은 바로 사운드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현실을 총체적으로 지각하는 방식에서 더 중요한 것은 흔히들 생각하듯 시각이 아니라 사운드입니다. 시각이 파편화될 수 있는 것도 사운드 트랙이 배경을 제공하기 때문이죠.

저는 이것이 매우 다른 세계라고 생각합니다. 저로선 이런 현상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분석해야 할지 충분히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우리가 영화를 통해서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고 앞으로 무엇을 더 할 수 있을 것인지도 확실히 모릅니다. 다만 유감스럽게도 영화는 문학보다는 훨씬 더 커다란 변화와 고통을 겪을 것이라고만 생각합니다. 영화는 분명 테크놀러지와 매우 밀접히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테크놀러지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시선, 부분적 시선, 클로즈업 등에 대한 어떤 존재론적 함축을 지니는 기술입니다.

 

 

 

 

들뢰즈나 몇몇 형식주의자들에 따르면, 영화에서 근본적인 존재론적 현상은 화면상의 파편적인 대상이나 감각이 폭력적으로 현실 안으로 들어와 장악력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네 전부를 앗아가지 않는다, 다만 네 머리를 앗아가고, 네 손을 앗아간다...." 새로운 방식의 디지털 기술에 내재하는 이 새로운 유형의 폭력과 더불어 무엇인가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불행히도 저에게는 이를 설명할 수 있는 뽀족한 이론이 없습니다. 누군가는 정직하게 이렇게 말할 겁니다. 우리의 탈근대적 세계, 이 디지털 세계에는 형태소들을 만들어내는 공정이 있어 우리는 장면을 연출할 필요조차 없다고, 우리는 단지 하나의 형태를 다른 형태로 변형시키기만 하면 된다고 말입니다.

가령 제 아들이 갖고 노는 보잘 것 없는 로봇 장난감이 바로 그런 것이겠죠. 이 로봇은 인가의 형상과 신의 형상을 동시에 가지고 있고, 연속적으로 변신을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더 이상 우리가 포착하여 장면으로 연출해야 할 실질적 바탕 같은 건 없음을 뜻합니다. 현실 자체가 훨씬 더 탄력적인 조형성을 띠어가고 있으니까요. 이제 지각의 차원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요. 가령 청소년이나 성인들 간의 범죄 같은 데서 이 수준과 관련된 문제가 있다면, 이는 바로 우리 자신이 디지털 비디오게임 속의 현실과 관계하는 방식일 겁니다.

 

 

 

여기서의 현실, 가상현실의 기본 아이디어가 무엇입니까? "당신은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다, 당신은 되돌아갈 수 있다, 아무 문제없이 당신은 게임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당신은 심지어 여러 명이 될 수도 있다...." 이런 것 아닙니까? 아마 저는 여기서 "그렇다면 어떻게 진짜 현실 자체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던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령 전쟁의 테크놀러지화라는 콜린 파월의 생각은 저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비디오 게임의 모델을 전쟁으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아마 이 수준에서 생겨나고 있는 문제는, 어떻게 기술해야 할지 아직 적절한 용어를 찾지 못했지만, 하여간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둘러싼 어떤 근본적인 수수께끼일 겁니다. 무한한 조형성을 지니지만 논리적으로는 아무런 연루성(committement)을갖지 않는 자기 정체성 말입니다. 이는 우리가 항상 자아를 그 어디에도 진정으로 연루시키거나 개입시키지 않고서도 상호작용할 수 있다는 발상입니다.

가령 비디오 데이트나 가상 데이트는 오늘날 매우 대중화되었는데(*이미지는 왕가위의 영화 <2046>의 한 장면), 그 이유는 당사자가 완전히 연루되지 않고 언제든지 발을 뺄 수 있다는 데 있을 것입니다. 저는 아주 옛날 캘리포니아에 있던 호모섹스 공동체의 관습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익명의 섹스가 진행되는데, 어떤 구멍이 있어서 당신은 자신의 성기를 거기다 삽입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누가 자신의 파트너인지 모르고 단지 자기 자신을 한 쪼가리의 대상으로 환원시켜 제공할 따름입니다. 여기서는 인간 상호 간의 소통 같은 건 없습니다. 이는 영화극장과 거의 흡사한 상황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엔 작은 스크린 같은 게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기에 대단히 폭력적인 뭔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리가 미친듯이 고조될수록 당시은 더 자유로워지죠. 당신은 거기에 기관을 제공하지만 당신은 여전히 뒤에 머물러 지켜보고 있는 거예요.  

4. 종교에 관하여  

김상환: <철학과 현실>의 독자들은 종교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당신은 최근에 이 분야와 관련된 책을 몇 권 출판했습니다. 대부분의 현대 철학자들은 반-기독교적이거나 무신론자인데, 당신은 오히려 무신론에 맞서 기독교를 옹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당신은 유물론자입니다. 라이트(Wright) 부부가 출판한 <지젝 읽기 The Zizek Reader>(1999)의 서문에서 당신은 자신의 입장을 "바울적 유물론(Paulinian matterialism)"이라 불렀습니다. 이는 매우 역설적인 표현이지만, 어떻게 보면 이런 역설이 당신의 사유에서 매력적인 측면이기도 하지요. 하여간 자본, 기술, 소비주의 등등이 총체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우리 시대에 기독교나 종교가 갖는 적극적 의미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당신이 기독교나 종교를 옹호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지젝: 제가 기독교에서 찾는 것은 어떤 실증적인 교리가 아닙니다. 카톨릭 교회에서 악마의 실증적인 실존을 찾는 것처럼 말입니다. 저에게 흥미로운 것은 상징적 실천의 사회적 공간을 지배하는 논리 같은 것입니다. 이 점에서 저의 작업은 하이데거의 작업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지젝의 철학박사학위논문은 하이데거에 관한 것이다). <존재와 시간>을 위한 예비작업의 첫 단계로 <성 바울의 편지>를 읽을 때 하이데거가 말하고 있는 것은 어떤 형식적 구조입니다. 실증적 교리와는 독립적인 어떤 형식적 구조, 형식적 존재론을 기독교에서 떼 내어 볼 수 있다는 것이죠. 바로 이것이 제가 기독교에서 찾으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제 관심사는 기독교가 형식적 수준에서, 특히 인간의 사회적 공동체와 상호성에 대해 뜻하는 바가 무엇이냐에 있습니다. 제가 이런 데 관심을 두는 이유는 가까운 미래에 일어날 대규모의 투쟁은 쾌락주의, 유물론, 과학주의, 무신론, 유신론 등 사이의 투쟁이 아니라 표면적으로는 무신론이나 유신론으로 드러나는 다양한 형태의 정신주의 사이의 투쟁이라는 생각에 있습니다.

당신이 언급한 자본주의, 테크놀러지 등등에서도 저는 정신주의의 한 형태인 어떤 새로운 그노시즘을 봅니다. 이런 방향에서 등장하는 지도적인 인물은 프로이트의 적수였던 칼 쿠스타프 융입니다. 그를 중심으로 새로운 형태의 그노시즘이 열리고 있는데, 여기서 저는 어떤 위험이나 악(惡)을 감지하고, 이에 대한 치유책이나 대응방안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의깊게 보아야 하는 것은 근대 자본주의와 테크놀러지가 낳은 새로운 형태의 정신주의, 새로운 정신주의적 태도인데, 이것은 단지 주변적인 현상도 아닙니다.

미국에는 분명 이른바 테크노-그노시스(techno-gnosis), 그노시스틱-테크놀러지(gnostic-technology)를 향한 경향이 있고, 다시 말해서 가상현실과 디지털 세계를 삶의 가상화라는 그노시스적 논리와 연결짓는 경향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현실적 인간이 아니다. 현실은 빌어먹을 똥이다. 우리는 정신적-가상적-잠재적 존재로서, 우리 자신의 유한성에서 해방될 수 있고, 또 다른 현실로 자리를 바꿀 수가 있다...." 요컨대 이와 같은 새로운 그노시스적 정신성이 탄생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런 그노시즘은 윤리적 관점을 재도입하고 있습니다. 레비나스 같은 철학자는 이미 윤리학이 존재론보다 더 근본적이고, 일차적인 실존적, 사회적 경험은 타자에 대한 윤리적 체험에 있다고 했지만, 그노시즘에서도 근본적으로 윤리가 인식보다 근원적이고 원천적입니다. 윤리는 부차적이지 않고, 악은 오직 인식의 세계에만 존재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저는 이들이 말하는 계시나 영적 인식 등이 오늘날의 테크놀러지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적 관념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특히 미국에서 칼 쿠스타프 융은 프로이트와 비교하면 엄청난 베스트 셀러입니다. 프로이트의 저작은 학문적인 것이지만, 융의 저작은 수많은 대중들이 읽고 있습니다. 제가 문제 삼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고, 저에게는 종교 그 자체가 중요한 건 아닙니다. 이는 데리다의 문제의식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메시아주의적 방법론이 내건 쟁점이 형식적이고 초월론적인 구조에 있다고 했는데, 저도 오직 그런 관점에서만 기독교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5. 서양철학과 미국의 관계에 대하여

김상환: 프레스센터에서 있었던 어제의 강연에서 당신은 이미 미국의 현실에 대해, 특히 미국의 패권주의나 이라크 전쟁에 대해 언급하셨습니다. 저는 좀 다른 각도에서 묻고 싶습니다. 오늘날 서양 철학에 대해 미국은 무엇일까요? 저는 이것이 매우 흥미롭고 재미있는 물음이라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미국은 다양한 사조나 이론들이 서로 충돌하는 경쟁과 논쟁의 무대, 그 힘을 겨루는 거대한 싸움터입니다. 각각의 이론이 지닌 역량이 검증되는 장소라고도 할 수 있겠죠.  

지젝: 프랑스 철학자들이 공식적으로는 아무리 반미를 내세운다 하더라도, 이들은 모두 미국에 침투해 들어가려는 욕망이 있습니다. 당신 말대로 오늘날 글을 작성하고 널리 소통시키기 위해서는 물론이고 어떤 보편적인 철학으로 승격되기 위해선 미국의 학문시장을 거쳐야만 하니까요. 예를 들어 라캉 역시 그랬습니다. 처음에 그는 미국에서 완전히 무시당했지만 절망을 극복하고 서서히 침투하기 시작하여 드디어 입성할 수 있었습니다.

 

 

 

 

제 친구 알랭 바디우(Alain Badiou)도 마찬가집니다. 그는 처음에 미국을 무시했지만 그 다음엔 미국에 매료되었죠. 이런 매력에 어쩔 수 없이 이끌린다는 건 놀라운 일입니다. 물론 미국 그 자체는 전투를 위한 극장, 배경에 불과하죠. 미국 그 자신은 사유하지 않습니다. 유럽에 교훈을 주거나 직접적으로 유럽의 영향에서 비롯된 산물이 미국에 들어오면 곧장 수락되고 미국인들의 수중에 들어갑니다. 왜냐하면 미국 철학에는 아마츄어리즘은 아니라 하더라도 어떤 프래그머티즘, 실용주의가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보기에 미국에서는 이 실용주의가 철학에 선행합니다. 하지만 이것 자체가 철학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 점에서는 저는 유럽 보수주의자입니다. 실용주의는 일상적 삶의 훌륭한 건축술이지만 철학의 본령은 아니죠. 하지만 흥미로운 문제는 미국의 학문시장에 편입되기 위해 유럽 철학이 치러야 할 대가에 있습니다. 이는 데리다에게서 아주 명백히 드러나는데, 미국에서 성공하고 난 이후의 그의 텍스트들은 미국인들을 모방한 흔적을 담고 있습니다. 어떤 잘 보이지 않는 변형이 일어난 셈이지요.  

 

 

 

 

이는 푸코의 사례를 보아도 마찬가집니다. 처음에 그는 '성(性)의 역사'로 돌아가 차갑고 냉소적으로 권력을 분석하고자 했지만, 샌프란시스코에 다녀온 말년의 푸코는 모든 것을 자아의 문제로 환원시키고 있습니다. 이에 비할 때 들뢰즈는 지병과 같은 개인적인 이유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들 때문에 실질적으로 미국을 여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원래 꼼짝하지 않습니다. 들뢰즈는 이미 실천적으로 반(反)-데리다적이었던 거죠. 라캉도 마찬가집니다. 그는 몇 번인가 미국을 여행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 방문은 완전한 실패작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캉의 책은 몇몇 부분에 훌륭한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비상업적이진 않지만 매우 훌륭한 영화들이 그의 영향을 받았죠.

가령 로버트 알트만의 <숏컷 Short Cuts>이 그 사례인데, 제가 보기에 아주 훌륭한 작품입니다(*<숏컷>은 지젝이 꼽은 세계 10대 영화에 포함된다). 물론 이것말고도 다른 멋진 작품들이 많이 있죠. 특히 문학에서요.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사유에서는 아닙니다. 미국에서 사유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미국을 우리의 투쟁이나 논쟁을 수행하기 위한 어떤 분파영역이나 지국(支局)으로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철학사에 대한 괜찮은 연구가 매우 많이 있습니다.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헤겔에 대한 최고 수준의 연구가 그렇습니다. 미국에서 헤겔 연구나 독일 관념론 연구의 질은 제가 보아온 독일에서의 연구보다 월등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은 이런 측면에서 충분히 새롭게 기능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보다 더 나아가 보다 일반적 방식에서도 철학에 기여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이는 유럽뿐 아니라 한 때 제 2세계라 불렸던 나라들과 관련된 이야기이기 십상입니다.

산업화되긴 했지만 아직 미국화되지는 않은 이 나라들은 너무 작아서 반미의 중심에서도 벗어나 있죠. 저는 동유럽과 러시아, 한국, 일본 같은 나라들이야말로 유일하게 미국에 대한 저항의 장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 1세계와 제 3세계라는 두 세계의 구분을 믿지 않습니다. 미국은 이상적인 방식으로 두 세계에 명령을 내릴 수 있고, 그 명령은 항상 기능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미국 자신이 그 두 세계를 개발했으니까요.

미국과 저개발국 사이에는 식민주의나 신식민주의에 대한 반대 투쟁이 벌어지지만 저는 이를 믿지 않습니다. 제 1세계와 제 3세계는 늘 상호보완적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유럽인은 바로 이 양자 사이에 있습니다. 가령 일본의 철학자 가라타니 고진이 제시한 시차(Parallax)라는 개념을 생각해봅시다(*<트랜스크리틱>에서 다루어진다. 한데, 정작 지젝의 책에서는 특이하게도 고진이 한번도 인용되지 않는다). 우리가 하나에서 다른 것으로 이행할 때 진리는 바로 이 사이에서 일어난다는 것이죠.

이에 대해 칸트를 참조할 수도 있는데, 칸트주의의 가르침은 현상과 본체 사이의 대립이 아니라 이 양자 사이의 차이에 있습니다. 자유는 현상 가운데 출현하는 본체에서 옵니다. 자유는 양자 '사이'에 존재합니다. 이와 동일한 의미에서 저는 제 1세계와 제 3세계의 대립에서 우리 역시 시차라고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충분히 특권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안정된 위치에 있지 않고 '사이'에 있기 때문이죠. 새로운 가능성을 찾기 위한 해결의 장이 있다면, 바로 이와 같은 우리의 위치에 있는 것이지 두 세계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김상환: 당신은 유럽인이라는 데 대해 커다란 자긍심을 가지고 계시군요.

지젝: 요즘 미국에는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반대운동이 거센데, 이 나라에서는 정치적 올바름과는 무관하게 외설적 태도는 금기시되고 있습니다. 제가 제 모든 책에서 외설적 유머, 섹슈얼리티 등등에 대해 섰던 것은 이런 점잖은 경향의 제 친구들을 도발하기 위한 것이죠. 들뢰즈가 그만의 전형적인 방식으로 매우 천진난만하게 인간 안에 있는 어리석음에 대해 말할 때, 이 어리석음은 어떤 자연스러운 성질이 아닙니다. 프랑스인들은 반(反)-자연적이려고 노력하는데, 라캉을 참조하지 않더라도 사유는 그런 반-자연성, 반-정상성에서 잉태됩니다.

제가 내면으로의 여행에서 지혜를 찾으려는 그노시즘의 발상에 반대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저는 진리가 항상 어떤 외상적 마주침에 있다고 믿는데, 이런 마주침은 제가 저 자신을 스스로 보고 있는 곳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우리가 단지 내면으로만 여행할 경우 외상적 마주침의 대상인 똥, 작은 환상, 짐승 등등을 발견할 수 없다고 봅니다. 이와 같은 외상적 마주침에 대한 능력 없이 사유는 일어나지 않습니다(*전적으로 동감이다. 해서, 나는 면벽수도식의 온갖 명상주의 따위를 믿지 않으며, '자기계발'의 수작들을 혐오한다).  

6. 슬로베니아의 철학계와 지젝의 사후 계획에 대하여  

김상환: 당신은 유럽인이지만 프랑스인도, 독일인도, 영국인도 아닙니다. 그래서 묻겠는데, 당신의 글에서 슬로베니아적 요소를 찾을 수 있을까요? 당신이 의식적으로 계승하는 슬로베니아의 어떤 문화적 전통이나 유산이 있는지요?  

지젝: 아닙니다. 저는 종족주의를 혐오하니까요. 제가 유일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슬로베니아라는 이름 아래 앞에서 말한 시차를 새롭게 위치 지을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것뿐입니다. 슬로베니아는 공산주의 국가였지만 서유럽만큼이나 반공산주의 국가이기도 합니다. 꽤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서유럽으로 여행을 할 수 있었고, 정치적 생활이나 활동을 제외하면 책을 사거나 지적 생활에서 뭔가를 창안해 내는 등등의 모든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말 그대로 두 세계 사이에 있었습니다. 한편으로 우리는 이른바 공산주의적 전체주의라는 것을 경험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을 충분히 창안해내고 정식화했습니다. 또 서양을 자유롭게 방문할 수 있었던 것은 서양에 대해 가질 수 있는 환상이나 가상을 뿌리 뽑을 수 있는 기회였죠. 이는 매우 행복한 상황입니다. 제가 제 조국을 인정해야 한다면, 이는 이 나라가 바로 에피큐로스주의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두 세계 사이에, 그 사이의 틈에 있기 때문입니다.

시간적 질서에서 볼 때, 지금은 낡은 질서가 해소되는 국면이자 새로운 질서가 완전히 확립되기 이전의 단계죠. 바로 이 이행과정에서 곧바로 시야에서 사라져버리는 것들을 우리는 다시금 포착할 수 있습니다. 또 그렇기 때문에 저는 고유한 의미의 슬로베니아주의자도 아닙니다. 만일 그랬다면 슬로베니아에는 정신분석과 관련된 어떠한 이론적 전통도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와 제 친구들은 오히려 프랑스 철학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슬로베니아에서 '공식 철학', 지배적인 철학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사회철학과 하이데거적 현상학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지겨워졌고, 그래서 제3의 입장에 서게된 것입니다. 이는 우발적인 현상이었고, 분석해본다 해도 무엇인가 근본적인 이유를 찾을 수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김상환: 그러나 프랑스나 독일, 영국 등 다른 유럽 출신 철학자들과 비교할 때 당신이 슬로베니아인으로서 가질 수 있었던 이익이나 불리한 점은 없었습니까?

지젝: 제가 젊었을 때 프랑스 철학과 독일 철학 사이에는 교류가 없었습니다. 프랑스의 후기구조주의 등은 독일에 거의 낯설었고 프랑스에서는 독일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문화이론을 전혀 모르고 있었죠. 이 두 나라의 문화적 접촉은 우리나라 같은 데서는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미 70년대부터요. 우리나라의 지식인들은 실상 모든 영향들에 노출되어 있었고, 여기서 나름의 전통이 생겼습니다. 농업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큰 나라들은 단일경작체제이지만 우리는 다경작 체제인 것이고, 이는 매우 좋은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슬로베니아 철학계의 면모를 살펴보면, 이곳은 프랑크푸르트학파, 하버마스, 하이데거, 분석철학 등이 나란히 존재하고 있는 거의 유일한 장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독일, 미국, 프랑스에서는 그렇지 않죠.  

김상환: 한국도 그런 비슷한 장소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기획에 대해 묻겠습니다. 현재 준비하고 계시는 일이나 몰두하고 계신 주제가 있다면 무엇인지요?  

 

 

 

 

지젝: 지금은 이라크 전쟁과 그 귀결들에 대한 작은 책을 끝내가고 있습니다. 이는 별로 심각한 책은 아닙니다. 몇 가지 커다란 기획을 구상 중인데, 먼저 정신분석-철학과 생물학적 발생학, 과학, 두뇌과학 등을 체계적으로 대질시키고 싶습니다. 이런 영역들이 철학에 어떤 도전이 되는지, 이런 영역들을 경험주의적 관점에서만 다루지 않고 어떻게 철학에 융합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보려 합니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진지한 책을 쓰고 있는 중이기도 한데, 여기서 저는 어떤 근본적인 형이상학의 물음으로 되돌아가고자 하고, 특히 "오늘날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와 같은 역사 존재론을 다루고자 하며, 이런 절대적이고 근본적인 형이상학적 과제를 다루기 위해 데리다, 레비나스, 하이데거 등등을 다시 읽고자 합니다. 바로 이것이 제가 구상하고 있는 가장 커다란 기획이고, 또 이 책이 당분간 제가 역작이라고 자처하고 있는 <불안정한 주체(*까다로운 주체) The Ticklisch Subject>(1999)의 2부에 해당할 것이라 생각합니다(*아주 기대가 되는 책이다). 몇몇 잠재적 독자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저는 여기서 성생활 등에 관한 것들은 그렇게 많이 다루지 않고 오직 근본적인 철학적 문제만을 다룰 생각입니다(*다소 아쉬운 일인가?).  

김상환: 좋은 생각입니다. 정말 기대가 됩니다. 저는 당신을 다산기념강좌에 초대하자고 처음 제안했고 저와 제 동료들은 항상 서울에 초대할 후보를 찾고 있습니다. 유럽 철학자들 중에 당신이 추천하고 싶은 분이 있으신지요?  

지젝: 마피아들의 논리대로 한다면 제가 이번에 받은 강연료의 10프로를 당신에게 지불해야겠군요, 하하. 하여간 저는 알랭 바디우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제 친구라서가 아닙니다. 제가 좋은 철학자라고 생각하는 많은 친구들 중에는 그들이 사용하는 난해한 용어나 포스트모던한 특수어법들이 다소 어렵고 혼란스러운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바디우를 존경하는 이유는 그가 데카르트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프랑스 최고 전통의 연장선상에서 찬탄할 만한 명료성을 보여주는 철학자이기 때문입니다(*바디우의 주저 <존재와 사건>은 언제쯤 번역될 수 있을까?).

 

 

 

 

그 다음에는 이탈리아의 아감벤(Giorgio Agamben)을 추천하고 싶은데, 이 뛰어난 철학자도 시야가 큰 포스트모더니스트이지만, 글도 명료하고 학술회의에서도 명확하게 말합니다(*적어도 <호모 사케르> 정도는 올해 안에 나올 수 있을까?). 또한 바디우에게서는 유럽 사회철학의 공통 임무에 대한 이미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어떤 특이한 맥락을 전제로 하는 방언이나 관용어를 외부인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데, 바디우와 아감벤은 모두 이런 말들을 명확하게 설명하는 빼어난 능력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방언은 이미 특정한 공동체의 일부가 되어있기 때문에 이런 내부적 농담 없이는 그 세계를 설명하거나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바디우는 정말 저보다도 이런 농담을 더 잘할 뿐 아니라 고전적인 주제들에 대해서도 잘 말할 수 있고, 게다가 정치-신학적인 축을 가지고 있기도 하죠. 저로선 이들보다 더 훌륭한 사람을 추천할 수가 없습니다(*하지만, 아쉽게도 아직 지젝의 추천은 효과를 보고 있지 못하다).  

김상환: 감사합니다. 짧은 시간 동안이었지만 한국의 독자들이 당신의 깊이와 재미를 모두 즐길 수 있는 대담으로 남으리라 생각하고, 무엇보다 진지하고 열정적으로 질문에 응해주셔서 다시 한번 깊이 감사드립니다(*돌이켜보건대, 지난 90년대 이후 지젝이 없는 철학계의 풍경을 상상할 수 없다. 그의 열정과 파격적인, 리얼한 통찰들이 없었다면 철학은, 아니 삶은 또 얼마나 밋밋하며 막연했을 것인지. 그의 건강을 축원한다!).

06.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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