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감각의 박물학 > 누군 행복해서 행복하냐?

누군 행복해서 행복하냐?
행복은 의무다
예외는 없다
행복하자
하라구

 
 

 
 
 
 
Beck의 Sex Laws는 올해 만난 수작
모처럼의 경쾌발랄, 우울아 썩 꺼져라
내 몸은 너희들이 거처할 장소가 아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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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감각의 박물학 > 성숙이란 혼돈을 견디는 힘의 증가

이분법은 인간이 즐겨 세계를 파악하는 방식이다. 음과 양, 주체와 객체, 플러스와 마이너스, 선과 악, 정신과 육체, 분석과 직관, 아폴론과 디오니소스 등 2항 대립 칸막이들의 무수한 증식에 의해서 세계는 비로소 질서라는 이름 아래 포섭된다. 그러나 질서는 무수한 개별자들의 희생 위에서 세워진다. 칼금을 긋듯 딱 잘라 구분해버릴 수 없는 세계의 다양성 앞에서 인간은 현기증을 느끼게 마련이다. 어떤 식으로든 구획정리를 하겠다는, 그리하여 세상의 어지러움을 어떤 식으로라든 이겨내야겠다는 인간의 강박관념이 무수한 이분법을 만들어 냈으리라.

그러나 얼마나 많은 선지식들이 불이(不二)를 설파하였던가. 만법귀일(萬法歸一), 결국은 하나라는 말씀이시지만 어디 현실이 그런가. 나는 여전히 나이고 당신은 여전히 당신이다. 새는 창 밖으로 날아가고 나무는 가지를 출렁여 그 새의 흔적을 말해줄 뿐. 하나라고 생각하기 십상인 '나'만 해도 그렇다. '가시나무새'가 아니더라도 내 속엔 내가 또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나는, 그 많은 '나' 중에서 아주 그럴싸한 나를 선택해서 나이고 싶어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예 그런 나를 유일한 나로서 승인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나'라는 간판을 내걸고 드러내고 싶은 '나'는 결국 무수한 '나'의 억압을 전제로 해서 태어난다. 하나의 음성과 칼라로 수렴되는 '나'일 때 비로소 나는 안도한다. 하지만 억압했던 '나'는 언젠가 기필코 돌아온다. 누르면 누를수록 그것은 더 맹렬한 분출의 힘으로 나를 압도한다. 억압하고 싶어했던 또 다른 나의 모습을 나는 타인의 얼굴에서 본다. 나는 그를 비난함으로써 맹렬하게 분출하는 어두운 '나'를 억압한다.

나서기를 좋아하는 어떤 후배에 대한 나의 비난도 그런 성질의 것이었으리라. 누군가의 앞에 나서고 싶은 자기현시의 욕망이 내 안에 음험하게 도사리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그 후배를 비난함으로써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억압하였던 셈이다. 그렇다면 타인의 모습 속에서 읽어낸, 저 천박하기 그지없는 '나'를 껴안음으로써 세계에 대한 적의를 누그러뜨릴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비도덕을 껴안아 포옹하지 못하는 '도덕만을 위한 도덕'의 표정은 매서우리만치 비정하다. 그렇다면 내 아내에게서도 현숙(賢淑)만을 강요할 일이 아니다. 약간의 퇴폐가 그녀를 아름답게 할지도 모를 일. 세계의 이중성을 용납하지 않는 결벽주의, 일절의 퇴폐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순수주의는 파시즘으로 표정을 바꿀 위험이 충분히 있다.

성숙이란 혼돈을 견디는 힘의 증가가 아니던가. 내 안의 드라큘라, 내 안의 콰지모도, 내 안의 그림자를 또 다른 나로서 인정하는 데엔 관용의 지혜와 용기가 필요하다. 미성년은 말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니라고. 그러나 부인한다고 해서, 억누른다고 해서 내 안의 괴물이 고분고분해지는 것은 아니다. 억누르고 참아내는 인내는 결국 신경증을 부를 뿐이다.

구로자와 아키라의 영화 '7인의 사무라이'를 미국식으로 리바이벌한 영화, '황야의 7인 The magnificient Seven'에서 총잡이로 분한 찰스 브론슨은 '겁장이가 전장터 한 가운데로 스미는 법'이라는 의미심장한 화두 하나를 던진다. 그러나 내 안의 겁장이를 부인하지 않고 의식하는 나는 쉽사리 만용의 총부리를 타인의 심장에 겨누지 않을 것이다. '완전히 음울한 인간 곁에는 반드시 그에게 예속되어 있는 밝은 영혼이 있게 마련이다'라고 니체는 말했다. 어떻든 내 아내와 내 벗들과 나의 모순됨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리라. 정토(淨土)와 예토(穢土)가 둘이 아니고 승(僧)과 속(俗)이 둘이 아니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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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감각의 박물학 > 지중해, 따스한 햇살이 술처럼 목젖을 적시는 땅
작가수첩 1 알베르 카뮈 전집 11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1998년 10월
평점 :
품절



지중해, 따스한 햇살이 술처럼 목젖을 적시는 땅


 “지중해의 따뜻한 가슴, 프로방스는 완전히 절망한 사람이 올 곳은 아니다. 오직 행복한 자, 아무 것도 소유한 것이 없이도 이 땅 위에 태어난 것이 기뻐지는 자들만이 올 곳이다. 아니 적어도 많은 절망의 한구석에 아직 저 필사의 모든 생명들이 공유하는 생명의 행복감, 우리들의 건강한 육체가, 죄없는 육체가 아는 행복감의 씨앗을 아직 죽이지 않은 자들만이 올 일이다.” 라고 김화영은 그의 아름다운 산문집, 『행복의 충격』에서 말하고 있다. 나는 대책없이 그런 구절에 매혹되었다. 한 점 그늘도 없는 유쾌한 낙천주의, 이십대의 내겐 지중해의 정신은 그런 것이었다. 알베르트 까뮈는 『작가수첩』에서 풍부한 아포리즘으로 지중해의 정신을 엄호했다. “천재는 일종의 건강한 상태이며 고등한 스타일이며 유쾌한 기분이다-그러나 찢어질 듯한 아픔의 극치이다.”라는 구절은 니체를 연상시켰지만 까뮈는 누구의 아들도 아닌 지중해의 아들, 행복의 전령사였다. “무겁기 때문에 그만큼 더 가벼운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예술의 핵심이다”라는 구절엔 까뮈의 오만함이 묻어 있지만 그 구절은 아주 유쾌하게 유머의 정신을 구현해주고 있었다. 얼마나 무거워야 새털처럼 가벼운 질량을 얻을 수 있는 것인지. 가브리엘 살바토레의 영화, ‘지중해’는 새털처럼 가벼운 영화다. 무겁기 때문에 가벼운.


 살바토레는 ‘도피를 갈망하는 모든 이들에게 바침’이란 문구를 내걸었다. 도피란 중력에의 저항이 아닌가. 잡아끄는 모든 구속의 힘으로부터의 일탈이 아닌가. 그 일탈의 땅이 ‘지중해’다. 햇볕에 마음껏 이마를 적시며 무겁고 우울한 외피를 벗어버려도 좋다. 태양의 기총소사에 속진(俗塵)일랑 말끔히 샤워해버려도 좋다. 늠실대는 그랑블루의 바다를 보면 인생은 그렇게 심각한 것이 아니다. 이런 곳에선 축구가 제격이다. 차고 달리고 내지르면 그만이다. 엄숙한 얼굴만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까뮈의 『작가수첩』이다. “ 티파사의 아침에 폐허 위로 맺히는 이슬,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것 위에 가장 젊고 싱싱한 것, 이것이 나의 신앙이고 또 내 생각으로는 예술과 삶의 원칙이다.”


 가장 젊고, 가장 싱싱한 것들을 위해선 한 잔의 따뜻한 술이 필요하다. 뜨겁게 목젖을 넘어오는 그 무엇, 젊음이란 연소할 수 있는 힘, 탕진할 수 있는 힘이 아니면 무엇인가. 술 한 잔에서마저도 굳이 교훈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지중해’엔 더운 몸이 부르는 육체가 있다. 염소들을 몰고 절벽을 오르는 처녀의 육체, 거기엔 문명의 때가 없다. 무구하고 순수하다. 전쟁의 기억도 없다. 시시덕거리며 바다로 풍덩 뛰어드는 몸의 순수한 유희가 있는 곳, 영화 ‘지중해’는 그런 곳이다. 얼쑤 하는 추임새가 필요하다면 까뮈의 책을 열면 된다. 『결혼, 여름』, 『태양의 후예』, 『작가수첩』이 그것. 이 책들을 열면 지중해의 햇볕이 가득하다. 바람이 갈피를 열어주는 곳, 어떤 페이지든 게으르게 듬성듬성 읽어도 좋다.


 ‘지중해’는 혁명가의 땅이 아니다. 애국자의 땅도 아니다. 패잔병의 땅, 탈영병의 땅, 도피자의 땅, 노새를 적으로 오인해 쏘아 버리는 오합지졸의 땅이다. 축구와 태양과 그랑블루의 땅, 염소의 수염이 하얗게 널어놓은 빨래처럼 날리는 땅이다. 계율이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는 곳에서 창녀는 사랑스런 애인일 뿐이다. ‘지중해’는 그런 곳이다. 그곳은 임무의 땅이 아니라 도피의 땅, off-duty, 휴가의 땅이다. ‘지중해’는 '통신기‘가 운 좋게 박살나는 땅이다. 명령이나 하달하는 통신기란 축제의 땅에선 쓸모 없는 퇴물이다. 이런 통신기가 고장난 건 아주 다행한 일이다. 통신기가 먹통이 되었으니 이래라 저래라 하는 명령이 먹혀들지 않는 땅, ’지중해‘는 그런 곳이다. 까뮈는 다시 『작가수첩』에서 말한다. “자연풍경은 그 어떤 불의의 대가로 얻은 것이 아니어서 나의 마음은 그 속에서 자유롭다.” 그렇다. 지중해의 풍광 앞에서 술잔을 들며 중력의 법칙에 거슬러 볼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잠시일 뿐이다. 그러나 이런 휴가나 축제도 한번쯤은 있어야 한다. 술과 함께, 살바토레와 함께. 모래 바람이 책의 갈피를 열어주는 까뮈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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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감각의 박물학 > 프로방스, 행복의 충격
나의 프로방스
피터 메일 지음, 강주헌 옮김 / 효형출판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Sunny Stream-노무라 소지로 

프로방스, 행복의 충격
 

프로방스, 하면 떠오르는 구절이 있다. ‘지중해의 따뜻한 가슴, 프로방스는 완전히 절망한 사람이 올 곳은 아니다. 오직 행복한 자, 아무 것도 소유한 것이 없이도 이 땅 위에 태어난 것이 기뻐지는 자들만이 올 곳이다.’ 김화영의 아름다운 에세이『행복의 충격』없이 나는 나의 이십대를 말할 수 없다. 김화영의 번역물과 그의 에세이를 읽는 것만으로도 나의 이십대는 충분히 유의미했다.
 
현실은 참으로 막막했다. 미래는 불안했고 시국은 어수선했다. 어디든 떠나고 싶었지만 주머니엔 먼지와 바람뿐이었다. 대체 어디에 마음을 놓아야 할까, 모든 것이 막연하기만 했다. 그럴 때 나는 김화영을 읽었고, 김화영이 번역한 까뮈와 바슐라르와 모디아노와 르끌레지오를 읽었다. 프로방스는 불안한 청춘의 망명지였다. 적어도 그곳에서만은 내 안의 습기들이 바삭 증발할 것만 같았다. 일찍이 세잔느가 화폭에 담았던 프로방스의 쎙 빅투아르산, 김화영의 표현대로라면 ‘메마르고 강직하고 비정한 고전의 감성을 그 물리적인 표정 속에 담고 있다’는 그곳에서라면 나는 일체의 수식을 떨구어버린 건조하고 강직한 정신으로 나의 청춘을 응시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다. 프로방스는 구체적인 지명이 아니었다. 그곳은 가난한 젊음이 꿈꾸었던 관념의 땅이었다.
 
현란한 수사학으로 김화영은 프로방스를 광고했다. “행복의 외침으로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이 열려진 풍경, 전라(全裸)의 풍경 속에서, 나는 오직 어리둥절했을 뿐이었다.”라는 구절 앞에서 어찌 프로방스를 꿈꾸지 않겠는가. “모든 정경이 단단하고 메마르고 스러지지 않는 풍경을 만들고 있다”는 그곳에서 나의 젊음은 무언가를 보상받을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일찍이 고호는 그의 가장 행복하고 비극적인 만년을 프로방스에서 보냈다. 김화영은 고호의 그림에 등장하는 소용돌이치는 태양이 프로방스를 만난 고호의 ‘행복의 충격’을 표현한 것이라고 말한다. 누군들 그런 행복의 충격과 만나고 싶지 않을까.
 
미셀 투르니에의 산문집 『짧은 글 긴 침묵』의 한 구절에 나는 밑줄을 그었다. “프랑스 사람들이 자기네 나라의 지중해 연안 지방을 <미디(Midi)>라는 이름으로 지칭하는 것은 절묘하다. 왜 미디인가? 그곳은 태양의 운행 곡선의 정점이요 태양이 그 정점을 음미하기 위하여 걸음을 멈춘다고 인간들이 즐겨 상상하는 바로 그 균형점이기 때문이다.” 태양이 그 정점을 음미하기 위해 걸음을 멈추는 곳에서 서있는 나를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행복했다. 이어지는 미셀 투르니에의 구절들. “지중해는 이것인 동시에 저것이다.” 오직 하나의 선택을 강요하는 땅에서 이것이면서 저것일 수 있는 땅은 그 자체가 하나의 구원이었다. 왜 그것이어야만 하는가, 왜 이것이면서 저것이면 안 되는가. 시대는 엄혹했다. 이념은 발랄한 생의 약동으로서의 웃음을 몰랐고, 도덕은 일탈과 광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시대의 엄숙주의는 무겁게 삶을 압도했다. 그럴 때 지중해는 먼 곳에서 아득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는 우리는 우리의 땅에서 치고 받고 아옹다옹거릴 수밖에 없었다.
 
『나의 프로방스』라는 책을 나의 눈이 간과할 리가 없었다. 책장의 띠지에는 아름다운 사진이 있다. 사진 속에는 파란 하늘과 시프레나무를 배경으로 집 한 채. 뜰에는 가득한 보랏빛 제비꽃. 저곳은 얼마나 고즈넉한가. 책 속에는 수많은 수채화들이 들어있었다. 순진무구한 프로방스의 풍광들, 잘 구어진 빵과 포도주가 화사한 느낌의 수채화로 그려져 있다. 그 느낌이 얼마나 신선한지, 책도 이렇게 감각적일 수 있구나 하는 작은 감탄마저 인다.
 
피터 메일의 『나의 프로방스』는 현학적인 책이 아니다. 그 속에는 고호도 없고 르네 샤르나 알퐁스 도데도 없다. 루르마렝에 있다는 카뮈의 묘지도 언급되지 않는다.  장 그르니에는 『지중해의 영감』에서 “이 고장은 너무나 잘 빚어져서 장인(匠人)인 신의 작품을 보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라고 말하고 있지만 피터 메일의 책에는 현란한 수사학도 없다.
 
그의 책에는 그림 같은 바다에서 혼자 빈둥대는 게으름이 있다. 그러므로 한참 바쁜 사람들은 피터 메일의 책을 붙잡지 말 일이다. “참으로 팔자 좋군” 빈정대는 한 마디로 남의 행복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너무도 가난한 자는 이 책을 읽을 것이 아니다. 피터 메일의 행복이 부러움을 넘어 고통스러운 질투로 느껴진다면 굳이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
 
그의 책에는 프로방스 사람들의 당나귀 같은 고집이 있다. “자동차 한 대가 눈이 치워진 중앙선을 따라 조심스럽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데 맞은편에서 오던 자동차와 마주치고 말았다. 두 자동차는 주둥이를 맞대고 멈춰 섰다. 하지만 누구도 후진해서 길을 양보하지 않았다. 길가로 붙이다가 자칫하면 눈더미에 처박힐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때문이었을까? 두 운전자는 앞 유리로 서로 노려보면서, 다른 자동차가 그들의 꽁무니에 붙어주길 기대하며 마냥 기다렸다. 그렇게 되면 ‘다수의 힘’에 따라 한 대인 자동차가 어쩔 수 없이 후진할 테니까 수적으로 우세한 쪽이 먼저 지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 구절은 이 책의 문체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이 책에는 이렇게 소박한 문체에서 우러나는 유머가 있다. 그 유머는 피터 메일에게서 나오는 것이기도 하면서 프로방스 사람들의 소박함에서 나오는 것이기도 하다.
 
피터 메일은 영국과 미국에서 15년간 광고 카피라이터로 활동했단다. 광고 카피라이터가 어떤 일을 하는 자인가. 소비자들의 욕망을 분석하고 그들의 잠재적 욕망을 소비로 연결시키기 위해 온갖 첨단의 기법을 동원하는 자들이 아닌가. 그들이야말로 자본주의의 첨병이다. 광고인으로서 치열하고 분주하게 살아온 그였기에 햇살과 공기에 대한 갈망은 그만큼 더 컸을 것이다. “마약 중독자가 마약을 갈구하듯이 마을의 상점들과 포도밭을 찍은 사진을 보았으며, 침실 창을 통해 비스듬히 스며드는 햇살에 잠을 깨는 것을 꿈꾸기도 했다”는 피터 메일 부부는 충동적으로 프로방스에 집을 구매한다. 우리에게도 저 만큼의 충동은 필요하리라. 충동과 도발이 없이는 혁명도 없다. 오직 구질구질한 일상만이 있을 뿐이다.
 
그가 프로방스에 구매했다는 집은 나의 미의식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다. 질투가 느껴졌다. “이 지역의 돌로 지은 그 집은 바람과 햇빛을 2백년 동안이나 견뎌온 탓에 옅은 꿀색도 아니고 옅은 회색도 아닌, 중간색으로 바래 있었다.......벽의 일부는 두께가 1미터나 되어 지중해의 미스트랄을 견딜 수 있게 지어졌다. ......우물이 세 군데 있었고, 그늘을 드리우려고 심은 나무들과 호리호리한 초록의 사이프러스들, 로즈메리 울타리, 커다란 아몬드 한 그루도 있었다. 그리고 오후 햇살에 졸린 눈꺼풀처럼 반쯤 닫힌 나무 덧문까지! 그 집은 우리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피터 메일을 사로잡은 집은 독자들을 사로잡는다. 행복은 반드시 풍족한 물질에 깃드는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저런 집에서는 행복이 더 잘 깃들 거라는 생각도 그다지 터무니없어 보이지는 않는다.

 
피터 메일의 책은 매우 감각적인 책이다. 그는 프로방스를 관념적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면도날 같은 미스트랄 바람, 송로 버섯의 진미, 팔월의 염소 경주대회, 구월의 포도 수확, 그리고 십일월의 올리브기름 등 그의 책은 우리의 이성에 호소하기보다는 우리의 감각에 호소한다. 올리브유를 몇 방울 떨어뜨리고 토마토 과육을 살짝 바른 빵, 따뜻하게 데워 샐러드와 함께 먹는 거위간, 꿩과 산토끼, 파테와 치즈, 햄과 수탉, 양파빵, 마늘빵, 올리브빵, 양젖치즈빵, 포도주와 와인 등 수많은 음식으로 피터 메일은 전직 카피라이터답게 끊임없이 우리의 욕망을 부추긴다.
 
스쳐 지나가는 관광객으로서가 아니라 프로방스에 집을 사고 그곳에 포도나무를 심고 이웃들과 한 식탁에서 음식을 먹는 피터 메일에게  부러움과 동경을 느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나는 주저 없이 『나의 프로방스』를 권하겠다. 행복은 사치가 아니라 우리의 의무다.
 
“다른 곳이었다면, 조금이라도 완벽한 날씨가 아니었다면 암담한 심정이었겠지만 프로방스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태양은 대단한 신경안정제였다. 아련한 행복감에 적어 시간은 흘렀다. 살아있다는 자체만으로도 너무 즐거워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시간이 길게 천천히, 움직이지 않는 듯이 흘러가는 나날이었다.“
 
모든 살아 있는 자의 특권은 꿈꾸는 것이 아닌가. 오늘은 마음만이라도 당신이 그곳에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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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감각의 박물학 > 이일훈, 불편함의 미학을 말하다
모형 속을 걷다 - 이일훈의 건축 이야기
이일훈 지음 / 솔출판사 / 2005년 1월
평점 :
절판



이일훈, 불편함의 미학을 말하다
모형속을 걷다 / 이일훈 지음 / 솔, 2005


함석헌 선생의 스승이셨던 다석 유영모 선생의 인간적 됨됨이를 보여주는 일화는 많다. 그 중의 하나. 유영모 선생은 서울에서 인천까지 걸어 다니셨던 모양이다. 우리 중의 누가 그런 모험을 감행할까. 체력도 문제겠지만 시간 낭비도 문제겠다. 그러나 유영모 선생은 기꺼이 그런 불편을 감수하셨다. 오히려 그런 불편함 속에서 기계적 매카니즘에 묶이지 않은 대자유의 삶을 사셨는지도 모르겠다.

기술이 삶의 편익을 증진시킨다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다 안다. 차가 있으니 발이 편하고, 식기세척기가 있으니 손이 편하다. 몇 천 자리 계산도 알아서 척척 해주는 컴퓨터가 있으니 머리가 편하다. '삼분카레'니 '삼분짜장'이니 하는 인스턴트 식품들, 캔만 따면 당장 먹을 수 있는 통조림, 세탁은 물론 다림질까지 척척해주고 심지어는 양말까지도 빨아주고 개켜주는 세탁소……. 이제는 돈만 있으면 홀아비들도 궁색함과는 안녕이다.

그러나 불편함을 무슨 훈장처럼 껴안고 사는 사람들도 있다. 산악인들은 말한다.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던 고통의 크기가 그가 차지할 수 있는 영광의 크기라고. 그들은 가장 험난한 시즌과 가장 험난한 코스를 택해서 에베레스트에 오른 자에게만 최고의 알피니스트라는 칭호를 준다. 헬리콥터를 탔다고? 첨단의 장비를 빌렸다고? 그대는 실격이다. 실격의 이유는 간단하다,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분투의 과정이 중요하는 것!.

사랑의 행위는 또 어떤가. 사랑의 행위는 엎치락뒤치락하는 그 비효율성에 있는 것이 아닐까. 영화 <데몰리션맨>에서의 사이버섹스를 생각해보시라. 체액과 타액을 교환하지 않는 간편하고 산뜻한 사랑의 행위가 과연 사랑의 본질에 부합하는 것일까. 사랑의 시간은 루즈타임과 연장전을 요구하는 법이다. <데몰리션맨>에서처럼 후다닥 기계적으로 성급하게 해치우는 사랑의 행위는 위생적이고 효율적일지는 몰라도 사랑의 심리학에 얼마나 부합하는지는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어쨌든 편리와 효율은 기술개발로 이득을 보는 자들에게는 최고의 미덕일지 몰라도 피와 살이 도는 우리네 선남선녀들에게까지 능사일 수는 없다는 말이다. 바로 이 점을 도드라지게 역설하는 건축가가 있다.

인천시 만석동에 위치한 저소득층 어린이 보금자리 '기찻길 옆 공부방'을 설계한 이일훈이 바로 그다. 저소득층 맞벌이 부부, 결손가정의 아이들을 돌보는 신앙공동체인 '기찻길 옆 공부방'의 이름을 그대로 붙인 이 건물은 1998년말 만석동에 지어졌다. 건축주의 빠듯한 예산 때문에 일반 다세대주택보다도 적은 공사비로 지어진 연건평 45평짜리 이 작은 건물은 건축계의 젊은 비평가들로부터 찬사를 이끌어 낸다.

<행복이 가득한 집>류의 잡지를 뒤적이다 보면 은근히 부아가 난다. 그런 유의 잡지들이 말하는 행복은 광고가 말하는 행복의 모습과 닮은꼴이다. 물질의 소비만이 행복을 보장해준다. 행복을 원한다면 일단 구입해라. 광고는 은근히 우리 무의식을 강제한다. '부드러운 협박'이다. 여기에 손들면 끝장이다. 일단 일벌레가 되야 하고, 할말은 꾹꾹 가슴속에 쟁여놓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물질이 보장해주는 안락함에 동참하려면 있는 성깔 다 죽이고 고분고분해져야지 다른 도리가 있겠는가. 그런데 이일훈은 좀 불편해지자고 말한다. '빈자의 미학'을 역설하는 건축가 승효상도 반갑지만 '불편의 미학'을 말하는 이일훈 또한 반갑기 그지없다.

승효상은 '빈자의 미학'을 말하지만 그의 건축에선 어쩐지 돈 냄새가 난다. 지나치게 세련되어 보이는 것도 어쩐지 마뜩찮다. '빈자의 미학', 논리로 보면 버릴 게 없지만 속내를 보면 왠지 찜찜하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일훈의 건축에서는 승효상적인 세련미는 덜해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네 건축의 주류적 마인드를 흠집 내는 어떤 거칠고 속 깊은 배포가 느껴진다. 그 '거침'과 '질박함'이 이일훈의 미학이다. 건축미학하면 흔히 가진 자들의 몫이었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일훈은 '기찻길 옆 공부방'에서 소규모 서민 공공건물에 철학과 미학을 스며들게 한다. 『모형 속을 걷다』(솔)의 거의 모든 페이지가 그런 철학과 미학을 말하는 데 바쳐진다.

이일훈은 동물의 집짓기를 예로 들면서 우회적으로 인간의 건축을 비판한다. 길지만 그의 육성을 들어보자.

집에 대해서 부리는 과도한 욕심, 갖고도 더 가지려 하는 욕심, 살지도 않으면서 여러 채를 갖고 싶어 하는 욕심, 여기저기 경치 좋은 곳에 별장 짓고 살고 싶은 욕심, 더 크게 더 높게 더 화려하게 짓고 싶은 욕심, 결국 그런 욕심은 치장과 장식으로 나타난다. 장식도 일종의 기능이긴 하지만 필요 이상의 과도함은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보기 위해서가 아닌 보여주기 위한 것, 보여주기의 속뜻은 우월감을 나타내고픈 속내이다. 종종 그것이 건축으로 표현되면 역겨운 졸부의 치졸함으로 나타난다. 과잉/과도가 낳는 그 우스꽝스러움.

바로 그 우스꽝스러움이 '세계 제일'이니 '동양 최대'니 하는 화려한 수사로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바로 그 우스꽝스러움이 대리석으로 발림이 된 '무늬만 르네상스풍'인 국적불명의 건축물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가. 보여주기 위해서 지어진 건축물에 침묵과 겸손이 깃들 여지는 없다. 엄청난 규모로 지어진 교회의 건축물에 신비가 깃들 여지는 없다. 신비가 없는 곳에 침묵이 있을 리 없다. 이 시대의 건축은 이 시대의 종교를 닮아간다. 그리고 이 시대의 종교는 이 시대의 화두인 자본을 열심히 따라간다. 침묵이 사라진 곳에 여지없이 번쩍거림의 광택과 소음이 들어선다.

이일훈이 설계했다는 '자비의 침묵' 수도원은 그가 말하는 '불편의 미학'을 눈으로 볼 수 있는 공간으로 구현해준다. 우리는 흔히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통로는 넓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일훈의 생각은 다르다. 어떻게 다른가. '자비의 침묵' 수도원의 통로를 설계한 이일훈의 말이다.

복도가 넓으면 지나는 걸음걸이가 빠르고 빠름은 사람끼리의 예의를 소홀히 여기게 만든다. 서로 간섭 없이 스쳐갈 수 있는 넓은 복도는 언뜻 여유로울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인간관계에서는 외면/소외를 조장하는 악덕의 동선이다. 서로 마주치면 한 사람이 비켜서야만 둘 다 지나갈 수 있도록 복도를 아주 좁게 만들자.

좁은 복도에서 서로 마주치면 후배가 양보하면서 비껴 설 것이고 바로 그 비켜서는 데서 예의와 공경이 묻어난다는 것이다. 서로 먼저 가라고 양보하는 사이에 겸손이 배는 것이니, 겸손을 미덕으로 지키는 수도원에서는 좁은 통로가 알맞춤이라는 말이다. 모든 복도를 좁게 하자는 것이 아니다. '불편의 미학'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건축에서의 공간설계는 그 건축물이 상징하는 정신까지를 포괄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적 삶이 공간의 효율성을 지향하는 것까지야 타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종교는 일상적 삶을 초월하는 데에 그 속깊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닌가. 초월의 의미를 간단히 방기해버리는 우리의 건축문화에 대한 그의 일갈은 아프게 음미해볼 만하다.

아무리 노자연하고 공자연해도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구복이 웬수'이고 보니 그런 건축가도 없다. 그는 "냉혹한 자본주의 현실 속에서 사회적 기능과 미학적 성취를 동시에 이루는 건축가들은 존경받을 만하다."라고 말한다. 주판알을 퉁기다 보면 이념이 뒷전이 되어야 하는 현실이다. 자재비와 인건비도 제때 지급해주지 못하는 판에 철학이니 미학이니 따지는 것도 한심하다. 이일훈도 여느 건축가처럼 현실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경박한 도시에 신중한 건축 드물고 기품 있는 공간 속에 비로소 기품 있는 생활이 따른다."라고 주장하는 그가 돈이 되는 만큼만 대충 지을 사람은 아니다.

동선(動線)은 짧아야 한다, 집은 한 덩어리로 지어야 한다, 공용면적은 최소화해야 한다는 규범화된 건축양식을 그는 거부한다. '조금 편하자고 많은 것들을 잃어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불편하게 살기'의 철학이 그가 말하는 '채나눔'의 논리다. 채나눔'은 이일훈이 일관되게 고집해온 건축형태다. "집은 작을수록 공간을 나누고, 한 가족일수록 적당히 떨어져 살아야 한다."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공간이 좁다고 집을 한 덩어리로 만들면 햇빛이 한쪽에서만 들어와 집 전체가 어두워지지만, 채를 나누면 나눠진 면은 모두 남향이 되어 채광과 통풍, 환기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아파트 같은 거실 중심의 획일적인 실내구조는 친부모라 해도 두 세대가 함께 살기에는 불편함이 따르는데 비해 채 나눔을 한 집에서는 사적인 공간을 침해받지 않고 동선이 길어져 가족 간의 충돌을 줄일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는 주장이다. 바로 그런 주장의 연장선상에 그가 설계했다는 자비의 침묵 수도원, 도피안사 향적당, 천주교 우수영공소 등의 종교용 건축물과 BK메디텍 본사 및 공장, 문학과지성사 사옥, 나루터 공동체, 기찻길 옆 공부방 등이 있다.

일전에 아스카 문화의 중심지라는 나라현으로 일본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그곳에서의 문화적 충격을 나는 어떤 일간지에 다음과 같이 소개한 적이 있다.

울긋불긋한 도시의 간판들은 한 명의 손님이라도 더 끌기 위해 안달이다. 행인들이 어떤 미적 취향을 가지고 있느냐는 관심 밖이다. 오직 강렬한 빛깔로 행인들의 시각을 사로잡겠다는 의지 하나로 도시의 간판은 번쩍거린다./ 관광지라고 해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일상의 소음으로부터 벗어나 한적한 여유를 누리고 싶다는 소망은 관광지의 입구에서부터 여지없이 깨어진다. 노래방, 음식점, 모텔과 각종 위락시설들이 끊임없이 소음을 생산해낸다./ 침묵은 자기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이고, 여행은 침묵을 찾으러 가는 시간이다. 소리도 침묵하고 빛도 침묵하는 곳에서 우리는 비로소 '나'를 생각한다. 그러나 번쩍거리는 간판으로 눈은 고역이고, 호객의 외침으로 귀 또한 고역이다. 백 번 양보해서 장삿속이니 어쩔 수 없다고 치자. 더 큰 문제는 시설물들이 주는 시각적 공해다. 시멘트를 나무처럼 보이게 하여 글씨를 판 안내문은 조악하기 이를 데 없고, 사찰입구의 유럽식 가로등도 우리네 한심한 미의식을 증명해준다. 새로 건축한 건물들은 주변건물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튀는 느낌을 준다./ 일전에 일본 나라현의 동대사(東大寺)를 다녀온 적이 있다. 커피를 마실까 해서 동대사 입구에 있는 자동판매기를 보니 나무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거참, 신기하군 하는 생각이 들어 가까이 가서 보니 자동판매기의 표면을 나무로 덧내어 놓았다. 자동판매기의 생뚱맞은 빛깔이 사찰의 고색창연함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미학적 판단에서 비롯된 발상이었다. 배울 건 배워야 하지 않겠는가./ 한복에 하이힐을 신을 수는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한복엔 고무신이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네 미학적 판단이다. 미학은 학자들의 학술적 연구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네 쾌적한 감각을 위해서 먼저 필요한 것이 아닐까.

『모형 속을 걷다』에서 만난 이일훈의 이런 구절이 아마도 그가 '우리편'임을 확신하게 했을 것이다.

시간의 흔적을 거부할수록 빛나는 것은 소위 보석이나 귀금속 종류이다. 그것들은 녹슬면 안 되고 퇴색하면 가짜이지만 건축 배료는 시간이 지나 갈수록 퇴락하고 변형되며 상해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래서 노후된 건축물을 고치고 새로 짓는 것이다. 오히려 시간 따라 변해가는 그 푸석함을 즐기는 것이 건축의 참맛을 아는 것이다.

그의 시선을 빌어 우리네 건축을 보라. 경복궁에만 가도 울화가 치민다. 이일훈의 책,『모형 속을 걷다』를 읽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그의 책을 빌어 우리네 건축물을 보는 일은 울화가 치미는 일이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건축물은 무너지지도 않고 우뚝 서있다. 시각적 폭력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과 하나가 되려는 선인들의 미학이 아니다. 어떡해서든 자본을 증식시키고야 말겠다는 자본의 확장 논리다. 그 자본의 제국주의적 논리 앞에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논리는 현실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얼빠진 인문주의자의 넋두리에 불과하다는 빈축을 언제까지 사야 하는 것일까. 언제까지 우리의 풍경은 '자본의 풍경'이 되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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