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행간 > 오역의 음모
믿음에 대하여 - 행동하는 지성 동문선 현대신서 136
슬라보예 지젝 지음, 최생열 옮김 / 동문선 / 2003년 3월
평점 :
절판


지젝의 글들, 특히 <깨지기 쉬운 절대성>,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그리고 압권인 이 책 <믿음에 대하여>(글라보이 지젝이라는 새로운 저자?) 등 기독교와 관련된 책들은 모두 오역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모범적인 사례들이다. 특히 이 책은 짐작하기에 번역자는 초고를 그냥 넘겼으며, 출판사는 원고를 단 한번도 검토하지 않았을 것이다. 틀림없다. 물론 이 책이 번역자의 초고를 아무런 검토 없이 출판한 것이라 해도, 번역자는 애초에 이 책을 번역할 능력이 없었다. 대체 무슨 똥배짱이란 말인가? '케보이?' 여기서 우리는 어떤 음모를 상상하게 된다. 거의 비밀경전에 가까운 해독 불가능한 텍스트가 독자에게, 특히 인쇄된 문자 앞에서 주눅드는 독자에게 다양한 환상을 구성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는 것은 지젝이 라캉을 빌려 말하는 바로 그것, "환상은 스크린이다"가 아닌가? 설마 이 책의 번역과 같은 야만이 출판되었으랴? 우리는 이 비이성적인 폭력 앞에서 일관된 상징계를 구성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상징계들 중 하나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악마의 계략? 그렇다!

지젝은 서구사회에서 완전히 한물갔다고 여겨지는 텍스트들을 뒤져서는 "여기 바로 오늘의 우리를 위한 중요한 길이 있다!"고 소리치는 학자이다. 그렇게 헤겔이 쓰레기 더미에서 구출되었다. 그렇지만 지젝이게 그에게 일종의 방법론을 제시하는 헤겔보다 더 중요한 것은 레닌주의, 나아가 지젝에게는 레닌주의의 원류가 되는 기독교이다. 지젝에게 기독교는 상징계의 종교인 유대교를 돌파한(환상을 횡단한) 실재계의 종교로 여겨진다. 예수의 십자가 상에서의 일성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는 지젝에게 상징계를 돌파한 주체의 절망인 동시에 자기 제정의 새출발을 알리는 탄성이기도 하다(여기서 지젝은 들뢰즈와 만난다). 그런데 현실의 기독교는 어떤가? 출구없이 보이는 상징계의 네트워크, 즉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체계로 기능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민중신학을 비롯해 7,80년대 제삼세계 신학들이 이 틀을 깨려 분투하였지만 역부족이었고,  라캉이 68에 대해 우려했던 것처럼, 오히려 상징계의 약점을 보강하는 체제신학으로 전락한 면도 없지 않다. 더 강력한 아버지! 현대 인문학이 기독교 신학에 무심해진 것이 이유가 없지는 않다. 특히 한국의 인문학은 종교학과 신학적 사유에서 거의 유아 수준에 있다. 그렇다.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되는가?

 

지젝은 기독교 신학의 사유에 새로운 출구를 열고 있다. 물론 그는 신학자가 아니다. 그래서 더욱 소중하다. 대개의 신학은 체제에 기능하는 도구로 전락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만일 종교, 혹은 제도로서의 기독교가 아니라 그 정신의 원류에서 기독교가 상징계를 돌파하여 새로운 세계를 구성하는 어떤 모범을 간직하고 있다면, 이러한 모범은 그 어느 시대보다 '문화의 시대'인 오늘날 더욱 중요하다. 바로 여기서 음모론이 제게되는 것이다. 지젝의 새로운 기독교 읽기는 신학 내부의 작업이 아니라 외부의 작업이라는 점에서, 현존하는 기독교의 체제를 비판하는 내부의 움직임과 공명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만일 지젝이 <깨지기 쉬운 절대성>이라는 책의 부제에서 말했듯이, 기독교가 "그것을 지키기 위해 싸울만한 가치가 있는" 어떤 유산을 가지고 있다면, 이 싸움의 당사자는 단지 신학에 국한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류의 유산일 뿐 아니라, 오늘날 전세계가 봉착한 위기에 하나의 빛을 밝히는 긴급한 무기이기 때문이다.

 

그간 종교의 문제는 종교 내부의 문제라는 비상식이 상식으로 여겨졌다. 바로 이 비상식에 터하여 교권은 소중한 인류의 유산을 전유, 독점할 수 있었다. 지젝은 환상의 기제에 대한 탐구를 통해 종교와 신앙의 문제가 단지 제도적인 종교 내부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에 만연된 보편적인 삶의 문제임을 밝혀왔다. 그의 작업은 제도적인 종교권력의 독점적인 소유권에 강력한 의문을 제기하는 실천이기도 하다. 당연히 종교권력으로서는 매우 불온한 실천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지젝을 금서 목록에 올려야 할까? 제도종교가 그렇게 아둔하지는 않다. 그렇다면 대책은? 바로 <믿음에 대하여>와 같이 그를 왜곡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어, 독자의 접근을 막는 것이다. 혹은 이 책의 번역과 같이 무슨 비밀스런 암호집처럼 만들어 전혀 비판성 없는 새로운 숭배를 조직하는 것이다.  혹시 번역자나 출판사의 담당자는 교권과 모종의 커넥션이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그들 스스로 보수반동적 신앙인들일지도 모른다. 물론 추측이다. 그러나 냄새는 그들이 풍겼다.

 

이 글은 한결 아빠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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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의 글들, 특히 <깨지기 쉬운 절대성>,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그리고 압권인 이 책 <믿음에 대하여>(글라보이 지젝이라는 새로운 저자?) 등 기독교와 관련된 책들은 모두 오역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모범적인 사례들이다. 특히 이 책은 짐작하기에 번역자는 초고를 그냥 넘겼으며, 출판사는 원고를 단 한번도 검토하지 않았을 것이다. 틀림없다. 물론 이 책이 번역자의 초고를 아무런 검토 없이 출판한 것이라 해도, 번역자는 애초에 이 책을 번역할 능력이 없었다. 대체 무슨 똥배짱이란 말인가? '케보이?' 여기서 우리는 어떤 음모를 상상하게 된다. 거의 비밀경전에 가까운 해독 불가능한 텍스트가 독자에게, 특히 인쇄된 문자 앞에서 주눅드는 독자에게 다양한 환상을 구성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는 것은 지젝이 라캉을 빌려 말하는 바로 그것, "환상은 스크린이다"가 아닌가? 설마 이 책의 번역과 같은 야만이 출판되었으랴? 우리는 이 비이성적인 폭력 앞에서 일관된 상징계를 구성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상징계들 중 하나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악마의 계략? 그렇다!

지젝은 서구사회에서 완전히 한물갔다고 여겨지는 텍스트들을 뒤져서는 "여기 바로 오늘의 우리를 위한 중요한 길이 있다!"고 소리치는 학자이다. 그렇게 헤겔이 쓰레기 더미에서 구출되었다. 그렇지만 지젝이게 그에게 일종의 방법론을 제시하는 헤겔보다 더 중요한 것은 레닌주의, 나아가 지젝에게는 레닌주의의 원류가 되는 기독교이다. 지젝에게 기독교는 상징계의 종교인 유대교를 돌파한(환상을 횡단한) 실재계의 종교로 여겨진다. 예수의 십자가 상에서의 일성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는 지젝에게 상징계를 돌파한 주체의 절망인 동시에 자기 제정의 새출발을 알리는 탄성이기도 하다(여기서 지젝은 들뢰즈와 만난다). 그런데 현실의 기독교는 어떤가? 출구없이 보이는 상징계의 네트워크, 즉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체계로 기능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민중신학을 비롯해 7,80년대 제삼세계 신학들이 이 틀을 깨려 분투하였지만 역부족이었고,  라캉이 68에 대해 우려했던 것처럼, 오히려 상징계의 약점을 보강하는 체제신학으로 전락한 면도 없지 않다. 더 강력한 아버지! 현대 인문학이 기독교 신학에 무심해진 것이 이유가 없지는 않다. 특히 한국의 인문학은 종교학과 신학적 사유에서 거의 유아 수준에 있다. 그렇다.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되는가?

 

지젝은 기독교 신학의 사유에 새로운 출구를 열고 있다. 물론 그는 신학자가 아니다. 그래서 더욱 소중하다. 대개의 신학은 체제에 기능하는 도구로 전락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만일 종교, 혹은 제도로서의 기독교가 아니라 그 정신의 원류에서 기독교가 상징계를 돌파하여 새로운 세계를 구성하는 어떤 모범을 간직하고 있다면, 이러한 모범은 그 어느 시대보다 '문화의 시대'인 오늘날 더욱 중요하다. 바로 여기서 음모론이 제게되는 것이다. 지젝의 새로운 기독교 읽기는 신학 내부의 작업이 아니라 외부의 작업이라는 점에서, 현존하는 기독교의 체제를 비판하는 내부의 움직임과 공명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만일 지젝이 <깨지기 쉬운 절대성>이라는 책의 부제에서 말했듯이, 기독교가 "그것을 지키기 위해 싸울만한 가치가 있는" 어떤 유산을 가지고 있다면, 이 싸움의 당사자는 단지 신학에 국한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류의 유산일 뿐 아니라, 오늘날 전세계가 봉착한 위기에 하나의 빛을 밝히는 긴급한 무기이기 때문이다.

 

그간 종교의 문제는 종교 내부의 문제라는 비상식이 상식으로 여겨졌다. 바로 이 비상식에 터하여 교권은 소중한 인류의 유산을 전유, 독점할 수 있었다. 지젝은 환상의 기제에 대한 탐구를 통해 종교와 신앙의 문제가 단지 제도적인 종교 내부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에 만연된 보편적인 삶의 문제임을 밝혀왔다. 그의 작업은 제도적인 종교권력의 독점적인 소유권에 강력한 의문을 제기하는 실천이기도 하다. 당연히 종교권력으로서는 매우 불온한 실천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지젝을 금서 목록에 올려야 할까? 제도종교가 그렇게 아둔하지는 않다. 그렇다면 대책은? 바로 <믿음에 대하여>와 같이 그를 왜곡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어, 독자의 접근을 막는 것이다. 혹은 이 책의 번역과 같이 무슨 비밀스런 암호집처럼 만들어 전혀 비판성 없는 새로운 숭배를 조직하는 것이다.  혹시 번역자나 출판사의 담당자는 교권과 모종의 커넥션이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그들 스스로 보수반동적 신앙인들일지도 모른다. 물론 추측이다. 그러나 냄새는 그들이 풍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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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의 글들, 특히 <깨지기 쉬운 절대성>,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그리고 압권인 이 책 <믿음에 대하여>(글라보이 지젝이라는 새로운 저자?) 등 기독교와 관련된 책들은 모두 오역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모범적인 사례들이다. 특히 이 책은 짐작하기에 번역자는 초고를 그냥 넘겼으며, 출판사는 원고를 단 한번도 검토하지 않았을 것이다. 틀림없다. 물론 이 책이 번역자의 초고를 아무런 검토 없이 출판한 것이라 해도, 번역자는 애초에 이 책을 번역할 능력이 없었다. 대체 무슨 똥배짱이란 말인가? '케보이?' 여기서 우리는 어떤 음모를 상상하게 된다. 거의 비밀경전에 가까운 해독 불가능한 텍스트가 독자에게, 특히 인쇄된 문자 앞에서 주눅드는 독자에게 다양한 환상을 구성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는 것은 지젝이 라캉을 빌려 말하는 바로 그것, "환상은 스크린이다"가 아닌가? 설마 이 책의 번역과 같은 야만이 출판되었으랴? 우리는 이 비이성적인 폭력 앞에서 일관된 상징계를 구성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상징계들 중 하나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악마의 계략? 그렇다!

지젝은 서구사회에서 완전히 한물갔다고 여겨지는 텍스트들을 뒤져서는 "여기 바로 오늘의 우리를 위한 중요한 길이 있다!"고 소리치는 학자이다. 그렇게 헤겔이 쓰레기 더미에서 구출되었다. 그렇지만 지젝이게 그에게 일종의 방법론을 제시하는 헤겔보다 더 중요한 것은 레닌주의, 나아가 지젝에게는 레닌주의의 원류가 되는 기독교이다. 지젝에게 기독교는 상징계의 종교인 유대교를 돌파한(환상을 횡단한) 실재계의 종교로 여겨진다. 예수의 십자가 상에서의 일성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는 지젝에게 상징계를 돌파한 주체의 절망인 동시에 자기 제정의 새출발을 알리는 탄성이기도 하다(여기서 지젝은 들뢰즈와 만난다). 그런데 현실의 기독교는 어떤가? 출구없이 보이는 상징계의 네트워크, 즉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체계로 기능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민중신학을 비롯해 7,80년대 제삼세계 신학들이 이 틀을 깨려 분투하였지만 역부족이었고,  라캉이 68에 대해 우려했던 것처럼, 오히려 상징계의 약점을 보강하는 체제신학으로 전락한 면도 없지 않다. 더 강력한 아버지! 현대 인문학이 기독교 신학에 무심해진 것이 이유가 없지는 않다. 특히 한국의 인문학은 종교학과 신학적 사유에서 거의 유아 수준에 있다. 그렇다.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되는가?

 

지젝은 기독교 신학의 사유에 새로운 출구를 열고 있다. 물론 그는 신학자가 아니다. 그래서 더욱 소중하다. 대개의 신학은 체제에 기능하는 도구로 전락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만일 종교, 혹은 제도로서의 기독교가 아니라 그 정신의 원류에서 기독교가 상징계를 돌파하여 새로운 세계를 구성하는 어떤 모범을 간직하고 있다면, 이러한 모범은 그 어느 시대보다 '문화의 시대'인 오늘날 더욱 중요하다. 바로 여기서 음모론이 제게되는 것이다. 지젝의 새로운 기독교 읽기는 신학 내부의 작업이 아니라 외부의 작업이라는 점에서, 현존하는 기독교의 체제를 비판하는 내부의 움직임과 공명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만일 지젝이 <깨지기 쉬운 절대성>이라는 책의 부제에서 말했듯이, 기독교가 "그것을 지키기 위해 싸울만한 가치가 있는" 어떤 유산을 가지고 있다면, 이 싸움의 당사자는 단지 신학에 국한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류의 유산일 뿐 아니라, 오늘날 전세계가 봉착한 위기에 하나의 빛을 밝히는 긴급한 무기이기 때문이다.

 

그간 종교의 문제는 종교 내부의 문제라는 비상식이 상식으로 여겨졌다. 바로 이 비상식에 터하여 교권은 소중한 인류의 유산을 전유, 독점할 수 있었다. 지젝은 환상의 기제에 대한 탐구를 통해 종교와 신앙의 문제가 단지 제도적인 종교 내부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에 만연된 보편적인 삶의 문제임을 밝혀왔다. 그의 작업은 제도적인 종교권력의 독점적인 소유권에 강력한 의문을 제기하는 실천이기도 하다. 당연히 종교권력으로서는 매우 불온한 실천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지젝을 금서 목록에 올려야 할까? 제도종교가 그렇게 아둔하지는 않다. 그렇다면 대책은? 바로 <믿음에 대하여>와 같이 그를 왜곡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어, 독자의 접근을 막는 것이다. 혹은 이 책의 번역과 같이 무슨 비밀스런 암호집처럼 만들어 전혀 비판성 없는 새로운 숭배를 조직하는 것이다.  혹시 번역자나 출판사의 담당자는 교권과 모종의 커넥션이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그들 스스로 보수반동적 신앙인들일지도 모른다. 물론 추측이다. 그러나 냄새는 그들이 풍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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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Ritournelle > * 정민 선생의 지식경영 비법을 다산에게 배우다.

 

 

 

 

* 정민 선생의 따끈한 신간이 나왔다. 놀랍게도 책의 제목이 {다산 선생 지식 경영법}이다. 정민 선생은 안식년 동안 이 책의 내용을 집필하였고 이를 출간한 것이다. 그 동안 선생이 냈던 책과는 이번 책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서술된 것이 특징이라고 하는 것으로 봐서는 뭔가 새로운 내용을 가득 담고 있음이 분명하다. 우리에게 정민 선생이 정말 특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그가 죽어가고 있는 인문학을 다시 살리는 첨병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야말로 '인문학적 콘텐츠'를 가장 포스트 모던한 방식으로 전유하는 대표적 소장학자이기 때문이다. 아래는 동아일보(2006. 11. 29)에 실린 책의 소개 내용이다.

* 동아일보(2006. 11. 29) / “茶山의 500권 多産… 그 비법은 지식경영”



정민 교수는 “다산의 지식경영은 오늘날에도 논문작성법 가이드, 경영지침서로 쓰일 수 있다”고 말했다. 김희경 기자
18년간 약 500권의 책을 썼으니 1년에 28권꼴이다. 그것도 참고 서적이 변변치 않은 귀양지에서다. 한 분야만 들이판 것이 아니라 행정가, 교육학자, 사학자였으며 토목공학자 기계공학자 지리학자 의학자 법학자 국어학자이기도 했다.

다산(茶山) 정약용. 어떻게 한 사람이 이렇게 많은 분야에서 동시에, 그것도 탁월한 성취를 이룩할 수 있었을까.

정민(46) 한양대 국문과 교수는 그 비결을 “정보를 필요에 따라 수집하고 배열해 체계적이고 유용한 지식으로 탈바꿈시킬 줄 알았던 지식경영의 힘”에서 찾았다.

최근 정 교수가 펴낸 ‘다산선생 지식경영법’은 다산이 ‘무엇을 했느냐’보다 ‘어떻게 했느냐’에 초점을 맞춘 책이다. ‘미쳐야 미친다’로 잘 알려진 정 교수는 최근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1년간의 안식년을 마친 뒤 고전에서 현대에 필요한 지혜를 퍼 올린 이 책을 들고 돌아왔다.

“18세기 지성사를 연구하다 보니 그 시기를 실학이 아니라 정보화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청대 ‘사고전서’ 간행 이후 정보들이 쏟아져 들어온 18세기는 21세기 정보화 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경전에 대한 사소한 해석 차이를 두고 티격태격하던 시대는 힘을 잃고 넘쳐나는 정보를 어떻게 재편집해 가치 있는 정보로 만들 것이냐가 중요해진 거죠.”

수집벽과 정리벽이 대단했던 18세기 지식인들을 좇다 정 교수가 마주친 사람은 ‘지식경영, 지식편집의 귀재’인 다산이었다. 정 교수가 연보를 통해 저술 연대를 추정해 본 결과 다산은 언제나 동시에 7, 8가지의 작업을 병행해 추진했으며 한 작업이 다음 작업의 원인이자 결과로 엮여 있었다.


 

                

책을 계통별로 분류해 놓은 조선시대 선비의 서재를 보여 주는 ‘책가도 8폭 병풍’. 일본 구라키시 민예관 소장. 사진 제공 김영사

예컨대 ‘목민심서’는 역대 역사기록 속에서 추려 낸 수만 장의 카드를 바탕으로 정리한 목민관의 사례 모음집이다. 이 책을 쓰다가 형법 집행의 중요성을 절감해 이 부분만 확대해 ‘흠흠신서’를 엮었다. 또 ‘경세유표’는 이 작업의 결과들을 국가 경영의 큰 틀 위에서 현장 실무경험을 살려 하나의 체계로 재통합한 것이다.

정 교수는 이 책에서 다산의 정보 처리 방식을 촉류방통법(觸類旁通法·묶어 생각하고 미루어 확장하라), 어망득홍법(魚網得鴻法·동시에 몇 작업을 병행하여 진행하라) 등 50개의 방법으로 정리했다.

“다산의 작업 진행과 일처리 방식은 아주 명쾌합니다. 먼저 필요에 기초해 목표를 세우고 관련 있는 자료를 취합해 카드 작업을 합니다. 이를 분류한 다음 통합된 체계 속에 재배열하는 것이죠.”

스스로 정교한 체계를 세워 지식을 조직화했을 뿐 아니라 다산은 자식과 제자들에게도 하나의 정보가 나오면 계속 찾아서 체계를 잡고 질서화하는 것이 공부라고 누누이 강조했다.

“다산은 아들이 닭을 기른다고 하면 빛깔에 따라 구분해 보기도 하고 횃대를 달리해 보기도 하고 닭에 관한 글들을 모아 ‘계경(鷄經)’을 쓰라면서 그것이 ‘글 읽는 사람의 양계’라고 가르쳤습니다.”

정 교수는 다산이 ‘목민심서’를 집필할 때와 똑같은 방식을 따라 이 책을 썼다. “이전엔 대개 몇 년에 걸쳐 쓴 글을 모아 책을 냈는데 이번엔 처음부터 설계 도면을 만들어 작업하면서 다산식의 작업이 얼마나 효율적인지를 체험했다”고 한다.

“다산의 위대성은 그의 작업량이 아니라 작업의 방식에 있습니다. 그의 지식경영은 효율적인 공부 방법과 경영 지침서로도 여전히 유용합니다.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과거가 오래된 미래가 될 수 있는 것이죠.”

김희경 기자 susanna@donga.com

http://www.donga.com/fbin/output?sfrm=1&n=20061129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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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최근에 나온 책들(83)

연휴를 앞두고 최근에 나온 책들 가운데 몇 권을 꼽아본다. 나로선 당장 연휴에 읽을 책들은 아니지만 한두 권 정도는 연휴에 구입할 계획이다. 개인적으로 일주일에 평균 5-60권의 도서정보를 처리하고 그 중 최소 10여 권을 구입하거나 복사한다. 절반 정도는 전공이나 관심사와 관련된 원서들이고 나머지 절반쯤이 우리말 책들인데, '최근에 나온 책들'은 그 가운데 특별히 눈에 띄거나 한번쯤 관련서들을 뒤적거려보고 싶은 책들에 속한다. 이번 경우엔 <로맹 가리>나 <도구적 이성비판>이 특별히 그러한 종류에 해당된다. 먼저 <로맹 가리>부터 시작해보자. 

 

 

 

 

도미니크 보나의 <로맹 가리>(문학동네, 2006)는 공쿠르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유일한 작가이자, 수수께끼 같은 작가 로맹 가리, 혹은 에밀 아자르에 관한 전기로 1987년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전기부문 대상을 수상했다고 하는 만큼 신뢰할 만한 평전이다(보나의 책으론 <세 예술가의 연인>도 출간된 바 있다). 요컨대 "<자기 앞의 생>,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의 작가, '로맹 가리'와 '에밀 아자르'의 이름으로 번갈아 소설을 발표하며 '매너리즘에 빠진 거장'과 '자유로운 영혼의 신인'이라는 두 페르소나를 연기했던 작가, 1980년 권총 자살로 생을 마치기까지 열정과 야망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소설가 로맹 가리의 66년 생애를 조명한다."

소개를 좀더 옮겨보면 "<로맹 가리>는 문학비평 기자이자 르노도 상 수상 작가인 도미니크 보나가, 저널리스트의 치밀함과 소설가의 감수성으로 쓴 평전이다. 프랑스 문학계를 뒤흔들었던 '아자르 사건'을 포함하여, 로맹 가리의 내면세계와 모든 작품과 창작의 배경, 파란만장한 생애를 그린다. 화려한 성공을 꿈꾸는 한 가난한 소년의 열망이, 화려한 언변과 세련된 외모로 세계 외교 무대를 사로잡은 한 외교관의 카리스마가,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하는 한 남자의 외로움이, 창조적 에너지를 마음껏 분출하고자 했던 한 작가의 자유에 대한 갈망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사실 내게 로맹 가리보다 더 친숙한 이름은 그의 가명이자 '또 다른 작가' 에밀 아자르이다. <자기 앞의 생>을 먼저 읽었기 때문이다(카롤린 봉그랑의 <밑줄 긋는 남자>의 여주인공도 내 기억에 로맹 가리의 광팬이었다). 

내가 책을 읽은 건 기억에 1990년 봄쯤이다. 나는 제대를 얼마 안 남겨두고 한 부대 관사의 당번병 방에서 뒹굴며 몇몇 소설들을 탐독했었는데, 파스칼 레네의 <레이스 뜨는 여자>와 함께 가장 기억에 남는 소설이 바로 <자기 앞의 생>이었다. 주인공 모모와 로자(로쟈가 아니다) 아줌마가 엮어가는 가슴 뭉클한 이야기. 이후에 다시 읽은 적이 없으므로 작품에 대해 정확히 평하기는 어렵지만 여하튼 에밀 아자르란 이름을 기억하게 해주었고 이후에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까지 관심이 이어지도록 했다. 비록 <유럽의 교육>(책세상, 2003)은 구입해두지 않은 것이 지금 생각으론 다소 의아하지만. 아무튼 이번에 나온 전기를 읽다 보면 로맹 가리, 혹은 에밀 아자르란 한 작가(혹은 두 작가?)에 대해서 좀더 분명한 판단과 열정을 갖게 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두번째 책은 역시나 평전으로 '과학지식인의 탄생'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 폴 화이트의 <토머스 헉슬리>(사이언스북스, 2006)인데, 실상은 지난번에 다루어져야 할 책이 마땅한 자리가 없어서 이월됐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헉슬리'란 성이다. 조금 견식이 있는 독자라면 이 '허슬리'가 여럿 된다는 것쯤은 상식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에겐 주로 <멋진 신세계>의 작가 올더스 헉슬리가 잘 알려져 있는데, 헉슬리 가문을 일으켜세운 토머스 헉슬리(1825-1895)가 바로 올더스 헉슬리의 조부이다. 토마스의 또다른 손자인 생물학자 줄리안 헉슬리 경은 올더스의 형이고, 그들의 배다른 동생 앤드류 헉슬리는 노벨상 수상 과학자이다. 토머스 헉슬리는 '다윈의 불독'으로 불렸을 만큼 진화론의 강력한 옹호자로 유명한데, 이 '불독' 집안이 가히 지성의 명가인 것이다.

저자 화이트는 책에서 "19세기 과학계의 발전사와 '과학 지식인' 토머스 헉슬리의 삶을 다뤘다. 헉슬리가 신문, 잡지 등에 기고한 글과 부인 및 동료들과 나눈 서한 등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며 과학 및 과학자의 정체성을 확립시킨 토머스 헉슬리를 재조명한다. 좁게 정의되는 과학이 아닌, 다른 문화 영역들과 연결되는 실천방식으로서의 과학을 추구한 그의 삶을 세세하게 그려낸다... 책은 과학의 실천, 대중화, 변호 과정에서 헉슬리에 관련된 여러 자료를 통해,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에 한 사람의 '과학 지식인'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추적한다. 따라서 오늘날 현대 과학 및 과학자들의 사회.문화적 위상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세밀하게 밝힌다."

해서 '과학 지식인의 탄생'이란 부제가 공으로 붙여진 것은 아닌 셈인데, 헉슬리 가문과 과학 지신의 자기정체성이 모두 토머스에게서 기원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니까 이 '대단한' 위인의 생애에 한번 눈길을 주어볼 만하다.  

 

 

 
 
 
 
세번째 책은 포르투갈의 대표적인 작가로 199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는 주제 사라마구(1922- )의 신작 <도플갱어>(해냄, 2006). 제목 그대로 자신과 똑같은 대상을 마주하게 되는 '도플갱어'의 모티브를 차용한 소설이라는데, <눈먼 자들의 도시>, <동굴>과 함께 주제 사라마구 '인간의 조건' 3부작으로 불린다고 한다(영역본의 제목은 ' The Double').
 


"인구 500만의 대도시에 거주하는 중학교 역사교사 테르툴리아노 막시모 아폰소, 어느 날 그는 동료교사의 추천으로 비디오 한 편을 빌려보다 믿을 수 없는 장면을 목격한다. 자신의 5년 전 모습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 영화에 나오고 있었던 것. 막시모는 집요한 추적을 시작, 배우의 본명과 거주지를 알아낸다. 그리고 배우와 그 부인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배우를 발견하면서 그가 가졌던 자신에 대한 불안감은 이제 배우 부부에게까지 전염되고, 거울 앞에 선 것처럼 몸에 난 상처까지 똑같은 두 남자는 누가 원본이고 누가 복사본인지를 따지며 존재의 불안감을 떨치려 한다..."
 

 

 

 

나는 아직 사라마구의 책을 읽어본 바 없지만 노벨상 수상작인 <수도원의 비망록>(문학세계사, 1998)을 읽어본 지인의 호평은 기억하고 있다(드라마들도 번역되지 않았나?). 그럼에도 다소 낯설다는 느낌은 주지만, 이번에 출간된 '도플갱어'는 상당히 낯익은 테마의 작품이다. 도플갱어, 혹은 분신을 다룬 문학작품들이 적지는 않기 때문이다(만화와 영화에도 두루 걸쳐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분신>에서 최수철의 <분신들>에 이르기까지.

사실 자신과 똑같은 또다른 존재를 다룬다는 것 자체가 좀 섬뜩한 이야기를 함축하는 것이어서 공포영화에서도 즐겨다루어지는데, 가령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도플갱어> 같은 게 (나는 아직 보지 못했지만) 대표적인 경우이다. 아무튼 이러한 배경하에 놓이는 작품이기에 사라마구의 <도플갱어> 읽기도 다소 수월할 수 있을 거라는 짐작을 해본다.

 

 

 

 

'도플갱어'란 테마가 정신분석을 자극하고 요청하는 테마인데, 네번째 책은 이와 무관하지 않은 연구서 박찬부 교수의 <라캉: 재현과 그 불만>(문학과지성사, 2006)이다. 모처럼 국내 필자의 저작이어서 반가운데(국내에서는 홍준기, 권택영 교수 등이 라캉 관련 저작을 갖고 있는 정도이다), 저자는 이미 10년전에 <현대정신분석비평>(민음사, 1996)을 상자한 바 있고(알라딘의 저자 소개에는 역서로 돼 있지만 저서이다), 프로이트 전집의 <쾌락원칙을 넘어서>(열린책들, 1997)를 우리말로 옮긴 바 있다.

'재현과 그 불만'이란 표제 자체는 프로이트의 <문명 속의 불만>의 영어 제목인 '문명과 그 불만'에서 따온 것인데, 라캉에 대한 접근에 있어서 저자의 길잡이가 되는 듯하다. 소개에 따르면, "이 표현은 프로이트의 '문명과 그 불만'에서 유래한 것. 프로이트가 인간 발달의 동인으로 문명화의 필연성을 강조하면서도 '죽음 본능'으로 대변되는 '그 불만'을 주요 논제로 다루었듯, 상징적 재현의 불가피성을 인간 주체의 '강요된 선택'으로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이 언제든지 불만 세력인 실재계에 의해 전복될 수 있다고 말한다. 라캉의 '상상질서'에서 시작되어 '실재계' 쪽으로 옮겨졌던 관심사를 그대로 되짚어 살핀다. 지나치게 어렵거나 해체적인 서술을 지양해, 라캉의 이론에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였다."

'죽음본능' 혹은 '죽음충동'을 화두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라캉-지젝 라인의 사고방식과 겹치는 듯하지만 저자는 지젝과 같은 입장에 서 있지는 않다('라캉 담론의 탈근대적 유산'이란 서론의 제목이 이미 이를 암시해준다. 지젝이 방어/보존하고자 하는 것은 라캉의 '근대적' 유산이기에). 방점이 '정신분석'보다는 '비평'에 두어져 있던 <현대정신분석비평>에서 저자가 사숙한 스승으로 거명한 이는 미국의 저명한 정신분석비평가 노만 홀란드였다. 독자반응이론가로도 분류되는 홀란드의 대표작은 <문학적 반응의 역학(The Dynamics of Literary Response)>(1968)이다. 말하자면 '미국화된 라캉'의 한 사례를 <라캉>에서 읽어볼 수 있을지 모른다.  

 

 

 

 

끝으로 프랑크푸르트학파를 이끌었던 독일의 사회학자 호르크하이머(1895-1973)의 대표적인 저작 중 하나인 <도구적 이성비판>(문예출판사, 2006)이 거의 40년만에 출간됐다. 아도르노와의 공저인 <계몽의 변증법>으로 더 잘 알려져 있긴 하지만, 그리고 아도르노의 그늘에 가려 사실 덜 주목받는 편이긴 하지만,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멤버들을 그린 한 캐리커쳐가 말해주듯이(이 흔한 이미지가 잘 검색되지 않는군) 대학의 사회문제연구소장이었던 호르크하이머는 학파의 대부이자 좌장이었다.  

호르크하이머는 책에서 "부정의 철학을 지향하며, 자연과 인간을 도구화하고 파멸로 이끄는 도구적 이성의 전면화에 대해 고발한다. 오늘날 이성은 이성이라고 불리는 것들의 비이성적 태도를 고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이성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한 고발은 이성의 전면적 해체가 아니라, 오직 이성의 자기 비판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이론적 염세주의자이면서 실천적 낙관주의자가 되자.' 개인을 무력하게 만드는 파시즘의 출현을 인식하는 비관주의와 보편적인 인간의 유대를 꿈꾸는 낙관주의를 가진 호르크하이머의 사상을 느낄 수 있다."

호르크하이머의 책이 이번에 처음 소개된 것은 아니다. 예전에 <철학의 사회적 기능>(전예원, 1983)이란 책이 출간된 바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절판된 책이지만 이 참에 새로 때깔을 입혀도 좋지 않을까 한다. 더불어, 황재우(시인 황지우) 등이 공역한 마틴 제이의 <변증법적 상상력: 프랑크프르트 학파의 역사와 이론, 1923-50 >(돌베개, 1981)도 다시 손을 봐서 재출간하는 건 어떨까? 저자의 박사학위논문을 근간으로 한 책은 지상사적 시각으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탄생과 이론적 진화과정을 섬세하게 추적하고 있는 저작이다...

06. 09. 2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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