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LoveIt! > 라깡이론의 친절한 안내서
라캉과 정신의학 - 라캉 이론과 임상 분석
브루스 핑크 지음, 맹정현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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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가를 위한 정신분석 연구를 진행하며 현대 인문사회과학에 큰 뿌리를 형성한 라깡의 이론을 체계적으로 분석, 정리한 책입니다. 라깡에 대해 무지몽매한 상태에서 접근을 시도했던 저같은 사람에게도 이 책은 차근차근 따라가다보면 책의 말미에선 어느 샌가 이론적 핵심들이 체득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분석가가 정신분석의 과정에서 분석주체(환자)에게 어떤 역할을 해야하는가? 라깡의 작업은 분석가를 향한 것이었지만 결국 이 책을 읽어가며 우리에게 유의미하게 던져지고, 우리가 포착해내어, 우리의 것으로 만들게 되는 것은 '인간정신'이란 큰 화두입니다.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의 강을 건너는 인간 정신 형성의 여정에서 우린 분석주체들에게서 당혹스런, 일반과는 다른 문제들을 목격합니다. 정신병과 신경증의 주체들은 통념과 달리 가엾은 존재들입니다. 또 우리 모두 가엾은 존재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들에 대한 우리의 인식구조를 변화시킵니다. 나아가 데까르트 이후 인간 정신을 괴물처럼 지배해온 주체의 계사 구조, 인간대 대상이라는 인식구조가 우리의 정신을 어떤 방식으로 규정하는지까지 거슬러 올라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체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합니다. 과연 우리는 주체로 설 수 있을까요? 그의 후기 작업은 우리 모두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우리 모두는 상징계에 얽매여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아마 사회성에서 연루된 것일 것입니다. 최초의 언어구조 습득에서 시작하여 사회라는 존재하지 않는 실체가 상징을 만들어내고 우린 상상적 단계에서 '인간 사회'에서 적응해 살아갈 수 있는 '적응된 생물'이 됩니다. 이것은 상징적 체계를 체화해 나가는 과정일 것입니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우리에게 가장 일반화된 형태의 타자의 욕망은 '돈'일 것입니다. 돈을 욕망하는 인간들, 무의식에서 충동을 버겁게 억누르며 살아가는 비정상인인 인간 모두들에게 라깡은 인간이 되라고 충고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 왜곡된 삶을 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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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노바리 > 괜찮은 라캉 입문서
라캉과 정신의학 - 라캉 이론과 임상 분석
브루스 핑크 지음, 맹정현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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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을 통해 주로 다양한 문화이론과 사회현상 분석의 툴로 일반화되긴 했지만, 라캉은 정신분석학자였고, 임상의였다. 브루스 핑크의 이 책은 그런 '임상을 위한 툴로서'의 라캉의 정신분석학에 대한 입문서라 할 수 있다. 브루스 핑크 그 자신 혹은 그가 키워낸 프로이트 원인학교의 후배들 / 제자들의 임상 경험을 수록하여, 그는 라캉의 이론체계가 다분히 '지나치게 단순화 / 도식화되는' 위험을 무릅쓰고 기본개념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임상에 다소 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논의들, 거기에 브루스 핑크의 전작 - 국내엔 아직 소개되지 않았고, 현재 번역중이라는 루머만 전해지는 - 인 [라캉의 주체]에서 다룬 논의들은 과감하게 생략되어 있다. 외려 지젝을 통해 문화이론 혹은 사회이론의 분석 툴로서의 라캉을 읽는 자들에게 중요할 주인기표 1, 2 (S1, S2) 에 대한 설명이랄지, 라캉이 가정한 '실재(계)'에 대한 이야기랄지 등은 주석에 '그런 게 있는데 [라캉의 주체]를 참고하라'고만 소개되어 있을 뿐.


그리하여 이 책을 읽고나면 대략 세 가지 욕망에 시달리게 된다. 1. 브루스 핑크의 [라캉의 주체]에 대한 호기심을 해결하고픈 욕망, 2. 프로이트 전집에 손대봐야겠다는 욕망, 3. 지젝의 일련의 책들에 대한 호기심을 해결하고픈 욕망. (모두 거창하기만 하고 시도 가능성은 스스로 봐도 별로 없어보인다.) 안타깝게도 라캉의 원저들에 대한 욕심들이 전혀 일지 않는 것은 브루스 핑크가 얼핏 언급해놓은 바, '워낙에 까다로울 것 같아서'이다. 하긴, 브루스 핑크의 [라캉의 주체]도 까다롭고 읽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라고 하긴 하더만.


이 책을 읽고, 왜 요즘 영화 주인공을 그렇게도 '히스테리증자'니 '강박증자'니 '도착증자'니 혹은 (이 모두를 아우르는) '신경증자'니 하고 구분하는 유행이 부는지 감을 잡긴 했는데, 솔직히 좀 웃겼다. 그러한 구분과 분석은 브루스 핑크의 서술에 의하면 임상 경험이 풍부해야만 정확하게 할 수 있는 것이며, 불과 지젝과 부르스 핑크, 프로이트, 그리고 번역 후지기로 유명한 라캉의 번역서 몇 권을 읽고 섣불리 시도하며 어설픈 임상의 흉내를 내는 것은 전형적인 강박증자의 증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찌됐건, 내가 이 책을 읽은 덕에 그래도 이 책을 권해준 친구와 나 사이에는 새로운 농담체계가 생겨났다. 예컨대 "그건 전형적인 히스테리증자의 증상 아니야?"라던가 "이런 도착증자 같으니!" 혹은 "당신의 상징계는 위협받고 있어!" 따위의. 물론 친구 쪽은 몰라도 내 쪽에서 내뱉는 농담은 라캉의 이론체계에 대한 무지를 숨기지 않으며 그대로 뻔뻔하게 드러내는 그런 종류의 농담이긴 하다. (역시 강박증자들 특유의 농담체계인 것일까?)


이 책에서 오히려 내가 관심을 가진 부분은, 꼴에 그래도 학부 전공이 명목상 언어학이었다고, 브루스 핑크가 빙산의 일각으로 소개해 놓은, 언어에 대한 라캉의 언급들이다. 브루스 핑크도 명시해 놓은 바, 프로이트가 지시어를 찾을 수 없어 신화들을 새로 창조함으로써(즉 '서사'의 방식으로) 에둘러 표현한 개념들을, 라캉은 프로이트를 되살리면서 언어학적 지식을 차용해 정신분석학을 업그레이드시켰다. 아무리, 미국 의학의 세례를 받은 정신의학계에선 "오래전에 유효기간 끝난 판명난 프로이트 가지고 울궈먹는 후진 인문학"이라며 비아냥댄다 한들, 정신분석학에서 제시하는 기본 개념들과 이론체계는 여전히, 인간의 정신과 영혼을 탐구하는 데에 있어 하나의 좋은 가이드가 된다.


언어는 원래부터가 다의적이고 불명확한 것이다. 비록 언어는 말하려는 자의 의도가 아니라 청자의 해석이 더 중요하다는 브루스 핑크의 관점엔 여전히 동의하지 못하지만, 브루스 핑크가 소개하는 라캉의 언어에 대한 접근은, 비록 이 책에서는 매우 제한된 부분만 보여주고 있을 뿐이라 해도, 그것만으로도 대단히 통찰력이 있고 진지하게 파볼 만한 구석이 많다. (솔직히, 졸업하기도 전에 손에서 놓은 언어학쪽 책들을 몇 권 읽어볼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심지어 비트겐슈타인조차 다루지 않았던 내 모교의 언어학과에서 당시 지나가는 이름으로 들었던 라캉을, 이런 식으로 접하(는 시늉을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었지만, 어쨌건 최근의 인기를 등에 업고 라캉과 브루스 핑크의 책이 속속 번역이 될 예정이라고 하니 잘난척 향연에서 바보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조금 더 지켜보며 깔짝대봐야겠다.






ps. 번역이 꽤 괜찮은 편이어서, 라캉 입문서로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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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베이컨이란 무엇인가
베이컨: 회화의 괴물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84
크리스토프 도미노 지음 / 시공사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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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컨'이란 이름을 듣고 가장 먼저 연상되는 것이라면 돼지 뱃살을 훈제한 바로 그 베이컨일 것이다. 거기에 인문학적 소양이 좀 있고 약간 배가 부른 사람이라면 영국의 경험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을 떠올려볼 수도 있겠다. 나는 오래 전에 '아는 것이 힘!'이라는 붉은 고딕체 페인트 글씨가 흰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고등학교를 3년 동안 다닌 적이 있다. 그 학교 또한 한국의 대부분의 고등학교와 마찬가지로 베이컨 계열의 학교였던 것...

자, 여기까지가 '베이컨'이란 기호가 가지고 있는 외연적 내포적 의미들이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나에겐 돼지고기 베이컨을 물리치고 '베이컨'의 외연적 의미(디노테이션)를 차지하고 있는 강적이 등장했으니 그가 바로 '회화의 괴물' 프란시스 베이컨(1909-1992)이다. 철학자 베이컨과 동명이인이겠거니 했는데, 알고 보니 베이컨 가문의 후손이고, 프란시스란 이름을 그의 아버지가 일부러 붙여 주었다고 한다. 이 베이컨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에 셰익스피어가 있는데, 한때는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철학자 베이컨이 쓴 게 아닐까 하는 의혹이 있었던 만큼 그의 셰익스피어 선호에는 농담 반 진담 반의 이유도 있는 셈이다...

아일랜드 태생으로 한번도 미술교육을 받아보지 못했던 베이컨은 엄마의 속옷을 입어 봤다가 열여섯 살에 집에서 쫓겨난다.(나중에 그는 동성연애자가 된다.) 그리고 전전했던 여러 직업 가운데는 요리사도 포함돼 있다고 하니 그의 생활고를 짐작케 한다. 하지만, 1927-1929년 사이의 파리 생활을 통해 그는 인생의 전환기를 맞게 되고 자수성가한 화가가 된다(그는 20세기에 가장 잘 팔린 화가의 한 사람이다).

여기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던 인물이 바로 파블로 피카소(정확히는 그의 그림들). 미술의 문외한인 나로서는 처음 그의 그림들을 보고(들뢰즈의 <감각의 논리>에서 처음 보았는데) 입체파라고 해야 하나, 표현주의라고 해야 하나 헷갈렸는데, 그건 좀 무식한 생각이었고, 그의 비틀린 육체의 형상들은 좀더 고차원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걸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들뢰즈의 표현을 빌면, 그는 형상적인 것에서 '형상'(Figure)을 빼내고자 한다. 더 쉽게 말하자면, 그는 외치는 사람들이 아니라 외침 그 자체를 그리고자 한다. 한 대목을 인용하자면:

'베이컨에게 이 고통받는 육체는 보편적 존재의 체험과 자기 자신의 삶의 경험을 뒤섞어준다. 너무나 자주 그려진, 고통의 보편적 상징으로서의 예수의 이미지와 푸줏간의 도마 앞에서, 그리고 쉽게 부패하는 고기 앞에서 느끼는 구체적 감각이 그 안에 섞여 있다. 가죽이 벗겨지고 피 흘리고 퍼렇게 멍든 그 육체를 그려 베이컨은 고집스럽고 친절하게 이를 일깨우려 한다. 베이컨의 잔혹함은 모든 애정이나 감정뿐 아니라 혐오스러움마저 초월한 바로 이 급진적인 유물론에서 나온다.'(90-93쪽)

다시 들뢰즈의 말을 빌면, 현대 회화는 두 가지 조건에 직면해 있다. 우선 사진이 회화적이고 자료적인 기능을 떠맡게 되었고, 다음으로 작품에 회화적 의미를 부여했던 종교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이처럼 종교적 감정을 거부하고 사진에 포위당한 현대 미술은 회화에 잔존해 있는 것으로 보이는 비참한 영역인 '구상성'과의 관계를 끊어야'(121쪽) 했으며 추상회화는 그 사례이다. 그리고 베이컨이 제시하는 건 그 또다른 사례이다. 그 또다른 사례에 대한 입문서로서 이 책은 더할 나위없다. 134개의 각종 도판과 사진이 그 증거이다. 그래서 아쉥보와의 대답집 <화가의 잔인한 손>과 더불어 적극 추천할 만하다. 그 대담집에 있는 거지만, 베이컨은 영화감독도 되고 싶었다고 한다.

어쨌거나 베이컨의 그림들은 강렬한 몰입의 기회를 제공해 준다. 그리고 '느끼는 것이 힘!'이란 걸 정말 느끼게 해준다. 이것이 내가 돼지고기 베이컨이나 철학자 베이컨보다 화가 베이컨을 더 좋아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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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역사가를 위한 역사!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
케이스 젠킨스 지음, 최용찬 옮김 / 혜안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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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역사학자인 저자 젠킨스는 소위 포스트모던 역사연구의 권위자로 인정받고 있다 한다. 몇몇 관련 서적에서 그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허언은 아닌 것 같고, 실제로 이 책은 대단히 재미있게 씌어져 있다. 원제는 <역사를 다시 생각하기Rethinking History>. 그것이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란 제목으로 번역된 것은, 다분히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의식해서이다. 카의 책이 소위 모던 역사학 입문의 정수를 요약하고 있다면, 젠킨스의 책은 포스트모던 역사학의 윤곽을 그려보이고 있다.

책은 서문과 세 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다. 1장에서는 '역사란 무엇인가'란 주제를 재검토한다. 저자의 시각은 '역사는 이론이고 이론은 이데올로기적이며 이데올로기는 바로 물질적 이해일 뿐이다'(62쪽)란 말로 요약될 수 있을 터이다. 그는 대학제도 안에서 만들어지는 역사만들기(making histories)의 관행에 대해서 의심하며 '공식적' 역사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그리하여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해 그가 내리는 답은 간단하다. '역사란 역사가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2장에서는 역사담론의 근본문제들이 다루어진다. 과연 역사는 사실인가 해석인가를 놓고 이런저런이 토론이 벌어진다. 그에 대한 저자의 입장은 이번에도 간단하고 명확하다. '모든 역사는 과거 사람들의 마음의 역사가 아니라 역사가의 마음의 역사'(121쪽)라는 것. 따라서 역사는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인 것이다(근래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일본의 역사 교과서는 이에 대한 비근한 예이다).

3장은 포스트모던 세계의 역사연구에 대한 조감이자 저자의 결론이다. 그는 회의주의, 좀더 심하게 말해 허무주의가 우리 시대(=포스트모던)의 지배적인 지적 전제임을 인정하고, 거기에서 다양한 역사만들기의 가능성을 타진해 보고자 한다. 요컨대 그는 역사인식에서의 허무주의를 긍정적으로 수용하고자 한다.

아주 간명하지만, 대단히 유익한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의 만듦새는 낙제에 가깝다. 좀더 본때있게 만들어졌다면, 더 많이 읽힐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책장을 볼 때마다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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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철학자 마그리트
르네 마그리트 시공아트 18
수지 개블릭 지음, 천수원 옮김 / 시공아트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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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푸줏간에서 한 여인이 좋은 콩팥 두 점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나는 끔찍한 콩팥 두 점을 달라고 요구하고 싶었습니다.'(17쪽) 마그리트의 말이다. 그의 그림들이 감동을 주지는 않지만 우리를 놀라게 하는 이유가 절반은 숨어있지 않을까? 나머지 절반은 장담컨대, 저자인 수지 개블릭이 책임지고 있다.

그녀는 마치 '당신이 마그리트에게 알고 싶었던 모든 것, 하지만 차마 옆사람에게 물어보지는 못한 것'에 대해서 답해주려고 작정이라도 한 듯이 마그리트와 그의 철학과 그의 회화에 대해서 폭넒고 깊이있게 쓰고 있다. 그래서 뒷표지에 실린 '확실히 마그리트 연구의 모범이 될 것'이라는 타임스의 서평이 허사만은 아니지 싶다.

의미심장하게도 책의 시작은 '철학과 해석'이다. 사실 재현을 거부하는 그의 그림들에서 중요한 것은 이미지-개념들의 낯선 병치와 그것이 거두는 효과이다. 이런 사실은 그가 일생동안 '우울증'에 시달렸다는 걸 알게 되면 아주 자연스레 이해된다.

요컨대 '회화작품에서 그는 거의 천부적인 싫증을 보여 주었으며, 권태, 피로, 혐오감 사이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꾸며냈다'(9쪽) 그에게 회화가 가지는 의미? '그에게 있어서 회화란 정신이 지닌 두세 가지 기본적인 문제들을 끊임없이 변화하는 빛으로 표현하는 효과적인 수단이었고, 존재의 평범함에 대항하는 영원한 반란'(9쪽)이었다.

그는 일생을 두고 자신의 생각(정신)을 그림으로 그렸던 것이리라. 그런 의미에서 그는 화가의 특이한 유형이면서 동시에 철학자의 특이한 유형에 속한다. 넓은 의미에서 초현실주의 계열에 속하면서도 브르통 등과 결별했던 것도 그런 기질상의 차이가 빌미를 제공하지 않았을까 싶다.

저자는 마그리트와 초현실주의 회화의 선구자로 데 키리코와 시인 로트레아몽을 들어 자세히 설명하고 있고, 마그리트의 영향을 받은 팝아트와 마그리트의 관계에 대해서도 요령있게 설명한다.

하지만 그녀가 무엇보다도 자세하게 분석하고 있는 것은 회화에서의 '재현의 위기'를 주제화하고 있는 마그리트 회화의 특징과 그 전략이다. 그녀는 파이프를 그려놓고 밑에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써놓아 어깃장을 놓는 그의 심보(?)를 아주 유려하게 해설해 보이는 것이다.

마그리트의 전략을 아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이렇다(138-140쪽) (1)회화에서 단어는 이미지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단어=이미지) (2)회화에서 오브제는 단어나 이미지와 동일하지 않다(오브제≠단어, 이미지) 그리하여 이제 더이상 재현적 회화란 가능하지 않으며 유효하지도 않다.

재현으로부터 해방된 회화는 무한한 가능성과 함께 회화적 불가능성에 직면한다. 무엇을 그린다는 것이 더이상 가능하지도 의미있지도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가는 무언가를 그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모순으로부터 현대 회화의 희소한 가능성과 과제가 동시에 산출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책은 비단 마그리트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뿐만 아니라 현대 회화를 조망하는 데 있어서도 아주 유익한 지침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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