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기인 > 바흐찐, 쉬클로프스키

시험때가 닥치니 또 안 읽던 책까지 막 읽게 된다. 앞으로 두 주 동안은 벼락치기의 연속과 스페인 소설 시험을 위해 스페인 텍스트를 무지하게 읽다가 결국 다 못 읽고 번역판을 구해 읽게 되는 만행으로 점철될 것이다. 점철. 참 이상한 단어네. 그래도 다사다난했던 한 학기가 다 끝나간다고 생각하니 홀가분한 기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오랜만에 다니면서 많이 힘들었지만 그래도 재미있었다. 수업을 들으면서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얼마나 할 수 있는가, 를 제대로 예측하지 못하는 바람에 헛짓도 많았지만 그래도 헛공부가 헛섹스보다는 더 유익하다는 신념으로 후회는 않으련다. 살아있다는 게 어딘가. 살아있다는 게 언젠가.

레포트가 하나 남았는데 스페인 소설 시간에 다룬 작품 하나랑 딴 작품을 비교해서 쓰는 거다. 특별한 주제는 없다. 돈키호테를 잡고 쓰려는데 처음엔 <담화의 놀이들> 뻬껴서 쉽게 쓰려고 디드로 <운명론자 자끄>를 골랐다가 너무 뻔히 보이는 것 같아서 그나마 조금 위장이 가능한 <트리스트럼 섄디>를 집었는데 그러다 쉬클로프스키가 <트리섄>에 관해 쓴 논문을 발견했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에게 <트리섄>이 자기들 이론을 설명해주는 원형적인 작품으로 받들여졌다는 건 처음 알았다. 얼핏 생각해도 그럴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은 들지만 쉬클로프스키가 자기 회고록 제목을<sentimental journey>라고 정할 정도였으니 역시 특정한 이론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 이론을 만들어낸 작품을 반드시 같이 읽어야 한다는 너무나 당연한 진리. 그래서 아직은 시간이 쪼옴 있으니 논문을 몇 개 읽어보고 주제를 잡아야 할 듯 싶다. <담화의 놀이들>은 정 주제가 안 잡히면 마지막 보루로 남겨두고 쉬클로프스키가 <트리섄>하고 <동키> 다룬 논문을 읽어야겠고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 1부를 써나가면서 소설을 'invent'했다는 논의가 담긴 <Novel according to Cervantes>라는 책을 읽을 것 같다. 조금 읽어봤는데 재밌다...어쨌든 쉬클로프스키랑 바흐친을 방학 때 읽어야겠다. 도대체 논리적 연관관계가 있는 글을 쓸 수 없다. 께하다 할아범한테 전염됐다. 그런데 2부로 넘어가면 돈끼호테랑 산초 둘 다 지나치게 논리로 무장해서 말도 잘 한다. 2부 첫부분은 재미있었는데 다 읽고 나니 1부가 더 재미있다. 돈끼호테가 죽지 않았다면 3부에선 목동으로 변한 '끼호띠스' 이야기가 이어졌을텐데...죽는 건 마음이 아프다.

모임에서는 아직 다음에 뭘 읽을지 안 정했는데 나는 사드의 <규방철학>을 읽자고 제안할 테다. '엄마가 딸에게 읽도록 시켜야 한다 La mere en prescrira la lecture a sa fille'.
점점 머리가 나빠져서 이대로 가다간 다빠지고 자빠질 것 같다. 숨이 가빠지고 나는 바빠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