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적 영혼과 꿈 - 독일 낭만주의와 프랑스 시에 관한 시론, 모더니티총서 13
알베르 베갱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3월
평점 :
절판


18세기가 황혼으로 저물 무렵, 29세로 요절한 독일의 낭만주의 시인 노발리스는 미완성의 <푸른 꽃>에 실린 <수와 도식이 더 이상>이라는 시에서처럼 새로운 '황금세계'를 꿈꾸었지요. '수와 도식'이라는 계몽주의의 합리적 세계가 중세가 가두어놓은 세계의 비밀을 풀 수 있으리라 자부하면서 그 세계를 환한 빛에 비추어 칼날 같은 이성으로 분할하고 재단하고 있을 때, 독일 예나의 한 문학청년 모임의 회원들은 위의 합리주의자와는 전혀 다른 문자와 음성을 통해 '빛(계몽)'에 의해 가려진 어둠과 무의식, 비합리적인 꿈들에 대한 탐사를 하기 시작했지요.

그들은 밤의 신비 속에서 얼핏 본 '푸른 꽃'(노발리스)을 찾아 무작정 방랑을 떠났습니다. 방랑의 도정에서 이 나그네들은 깜깜한 전나무 숲과 새벽의 들길, 물안개가 피어나는 호수를 바라보며 아득한 몽상에 잠기기도 했습니다. 또 밤을 보내기 위해 머무른 여인숙에서 그들은 숲과 들길, 호수의 신비를 꿈꾸며 메르헨과 시, 그리고 짤막한 단장을 구상했습니다. 처음 그들이 습작한 동화와 시에서는 '빛(계몽)'이 밝혀주지 않았던 인간의 내면과 세계의 신비가 잠깐 잠깐 드러났는데, 이것이 너무 아득하고 엄청난 것이어서 이들 몽상가들은 자신들이 쉬기 위해 머무른 밤을 꼬박 지새면서 인간과 세계의 심연 깊숙이 내려갔지요. 어떤 이는 자신의 탐구를 에우리디케를 구하러 지옥에 내려간 오르페우스의 여정에 비교하기도 했고, 또 어떤 이는 이타카로 귀향하는 오딧세우스에 자신을 비유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그들의 이러한 인간과 세계의 밤에 대한 탐구가 항상 흥미진진하고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지요. 어떤 이는 도중에 미쳐버렸고, 어떤 이는 매일 밤을 악몽에 시달려야 했지요. 고야의 그림인 <이성의 잠이 괴물을 깨운다>라는 작품이 무시무시하게 예고하듯이 빛의 조명아래 명석 판명한 두뇌로 세계의 비밀을 풀 수 있다고 자부하는 한 계몽주의자가 오랜 작업에 지쳐 잠시 엎드려 잠들자마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온갖 괴물들이 잠자는 '빛의 자식'의 머리 주변으로 서서히 날아오르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생겨나는 건지, 아니면 이성이라는 잠이 괴물을 일깨우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예나를 중심으로 하는 이들 낭만주의자들은 지나치게 뒤쳐지고 도저히 개선될 수 없을 것만 같은 독일의 봉건적 현실에 절망했지만 동시에 서쪽의 프랑스에서 들려오는 자유와 혁명의 대포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일종의 '내적 망명'을 통해 문학과 예술에서 일대 혁명을 꿈꾸었더랬지요. 물론 몽상과 악몽을 밤의 신비로부터 길어올리는 위험을 그들만의 철저한 지성과 성찰을 통해 고스란히 감수하면서.

환상과 함께하는 성찰. 낭만주의자들은 환상이 제공해주는 꿈의 감칠맛을 알아챘지만, 동시에 세계의 비밀을 알아챈 댓가로 밤의 신으로부터 악몽을 선사받아야 했는데, 이 때문에 파멸할 수는 없어서 이들은 계몽주의의 유산이자 무기인 지성과 성찰을 수용하여 자신의 환상에 오성적인 제어를 하기 시작했지요. 노발리스의 싯구를 빌면 '빛과 그늘'의 잠정적인 조화를 위해서였죠. 그러나 이때의 조화는 고전주의적인 균형미나 조화미가 뜻하는 것과는 성격이 전혀 다르답니다. 어디까지나 인간과 세계의 반쪽에 대한 탐구는 지칠 줄 모르고 추진되었지요. 한편에서는 빛의 아들들의 합리주의적 자아와 세계의 탐구. 그에 못지 않게 다른 한편에서는 어둠의 자식들의 자아와 세계의 꿈과 어둠에 대한 탐구. 이들은 사실상 서로를 보완하는 관계일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독일 낭만주의자들의 노력은 '빛'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멀리 프랑스에서도 흔히 상징주의자들이라고 하는 동류들을 통해 이들의 정신과 꿈은 계승되었고, 20세기에 들어서는 초현실주의의 혁명적 물결에 합류되었지요. 이들 꿈 많고 진지한 독일 예술가들과 프랑스의 발랄하면서도 고뇌 어린 시인들이 어떤 영향관계를 주고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한 얘기는 별로 없습니다. 아무튼 독일 낭만주의가 정신과 자연, 혹은 자유와 자연을 동시에 고려하고 조화시키길 원했다는 노발리스의 바램으로 대표된다면,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 역시 여전히 고려하고 탐구해야 할 근대의 여명과 황혼을 동시에 살고있는 계몽주의자의 서자인 만큼이나 낭만주의자들의 후예들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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