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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문학과 예술, 그리고 문화의 비평이론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담론의 주류는 프리모더니즘과 모더니즘, 즉 플라톤에서 시작된 서양의 형이상학이라는 거대한 구조를 해체하는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구조주의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포스트구조주의의 핵심을 해체라고 보았을 때, 해체가 과연 인간성을 진정 해방시킬 수 있을 것인가? 필자는 선 시대의 형이상학자들이 만든 이분법의 구속을 풀어주어 모든 것이 가능하도록(Anything goes) 한다는 것만으로는 인간사회에 만연한 갈등의 문제의 근본을 두드리지는 못할 것이며, 문학과 예술의 비평 역시 해체로만 끝나서는 안 된다고 본다. 해체가 필요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평등을 핵심적 요소로 하는 해체를 당연한 근본으로 하여 한 발자국 나아가는 윤리비평을 모색하는 데에 집중할 때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작품에 나타난 총체성의 족쇄를 푸는 작업을 진행함과 동시에 보다 더욱 원초적인 차원을 인식하기 위한 (인식론적이고 존재론적인) 이론적 작업이 이루어져야한다고 믿는다. 필자는 이러한 이론적 작업의 전거를 임마누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의 윤리학과 가일즈 들뢰즈(Gilles Deleuze)와 펠릭스 거타리(and Felix Guattari)의 존재론적 철학논의에서 찾는다. 레비나스와 들뢰즈/거타리의 철학적 지식체계의 형성의 배경은 매우 다르다고 할 수 있으나 그들 철학의 유사성은 근대에서 벗어나는 탈근대적 의식을 공유한다는 정도 이상이다. 필자는 이 이론가들의 사고에서 해체적 비평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찾는데, 그것은 바로 "무한"과 그 무한으로 다가가고자 하는 인간의 순수한 욕망을 드러내는 일이다. 문학과 예술의 영역을 벗어나 일반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전쟁을 통하여 서로 죽이는 역사 속에서도 인간들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모든 것이 평등한 관계에 있는 윤리적 차원, 인간 자신들의 존재와 욕심의 유한성을 벗어나 있는 진정한 무한에 대한 순수한 욕망이었을 것이며, 인간의 삶과 역사의 스토리로 이루어진 문학 텍스트의 비평 역시 이러한 무한에 대한 순수한 욕망을 담고 있다고 믿는다. 필자는 그러한 대전제 하에서 레비나스의 윤리학과 들뢰즈/거타리의 존재론을 비교논의 하고자 한다. 필자는 무한에 대한 사고가 레비나스와 들뢰즈/거타리의 사고의 근본이라고 믿으며, 전자의 윤리학은 후자의 존재론보다 더 근본적 사고를 형성하고, 따라서 더욱 실재적인 삶의 요소들과 밀접하게 연결될 수 있는 후자의 존재론은 전자의 바탕위에 재정립될 수 있다고 본다. 즉 무한 그 자체에 그의 윤리철학의 초점을 맞추는 레비나스와 무한의 움직임의 탐구에 더욱 노력을 기울이는 들뢰즈와 거타리의 존재론적 사고의 합일은 그 어떠한 이론가의 사고보다도 무한과 무한의 표현인 예술의 의미를 더욱 밝혀줄 것이다. 본 논문은 이렇게 텍스트 분석의 틀을 생산해내는 이론적 작업을 하는 목적이 있으므로 주로 철학적 논의가 될 것이며, 구체적인 텍스트 읽기에 큰 지면을 할애하지는 않을 것이다. 레비나스와 들뢰즈/거타리의 무한에 대한 공통적 생각을 심도 있게 알아보고 그것을 기초로 하여 문학비평이론을 형성하는 것이 본 논문의 목적이다.
I. 포스트모던윤리와 무한
레비나스와 들뢰즈/거타리는 각기 철학뿐 아니라 문학과 예술의 비평 분야에서 가장 각광받고 있는 대학자들이지만 지금까지 이 학자들의 이론이 직접적으로 비교 논의되어온 바는 거의 없다. 다만 쟈크 데리다(Jacques Derrida)의 해체론과의 비교 연구는 행해져왔다. 해체론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앙에 위치해 왔다고 할 수 있는 바, 레비나스와 데리다, 들뢰즈/거타리와 데리다의 비교연구는 진척이 되었다. 특히 데리다와 레비나스의 비교는 영미철학과 문학비평의 영역에서 그들의 이론의 구조가 비슷한 점이 강조가 되어왔고, 데리다가 레비나스로부터 "타자의 흔적"등의 말을 빌려 쓰는 등 많은 영향을 받았고 레비나스의 죽음의 시점에 이르기까지 레비나스의 윤리학에 깊은 관심을 가져온 바도 잘 알려져 있다. 데리다와 들뢰즈의 비교연구도 그들의 철학이 공히 니체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본 논문에서 행해질 바, 레비나스의 타자에 대한 자아의 절대적 "윤리"에 대한 관점과 들뢰즈와 거타리의 "내재성" (immanence)과 "생성"(becoming)을 중심으로 하는 존재론을 비교하여 하나로 묶어내는 작업은 인간의 근본은 절대윤리성이며, 생성에 대한 사고는 자아가 그 자신의 유한성의 외계인 무한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욕망에 기초하여 이루어진 것이고, 문학텍스트는 그 숭고미(the sublime)를 통하여 독자의 의식을 바로 이 무한으로 향한 욕망을 해소해 준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다.
이들의 비교를 시작함에 있어 우선 공통점으로서 그들이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레비나스를 도덕주의자로 생각함은 그의 철학의 포스트모던적, 해체론적 요소를 간과하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그의 철학서적들에서 줄곧 "도덕"(morality)과 "윤리"(ethics)를 분리시킨다. 레비나스가 의미하는 바에 의하면 도덕이란 원칙들을 모아놓은 체계(set of rules)이고, 그에 반하여 자아의 절대타자에 대한 "윤리"는 현상으로 표현될 수 없는 가장 근본적 인간관계를 의미한다. 그는 윤리적이라 함은 보이는 것과 확실성을 초월하는 것으로서, 인간 자아의 외계(exteriority) 그 자체를 입증하는 것이라 한다(『총체성과 무한』 Totality and Infinity 304). 레비나스는 간혹 그가 도덕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에도 사실은 현상을 초월하는 윤리를 의미하기 때문에 오해의 소지가 많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으나, 그의 주체론은 데리다, 푸코, 료따르, 블랑쇼 등의 논지와 매우 가깝다. 아울러, 레비나스의 윤리학적 안목에서 보아서는 인간 주체의 사고능력을 높이 사는 모더니즘의 범주 내에서는 아무리 높은 차원의 생각 체계라 하더라도 모두 도덕률에 속함을 밝히고자 한다. 예를 들자면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 등은 도덕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지 윤리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나아가 레비나스가 말하는 윤리는 모든 현상을 초월하는 가장 근본적인,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것이다. 원칙들을 모아놓은 체계인 도덕에 반하여 자아의 절대타자에 대한 윤리관계는 초월적이므로 전혀 표현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고 존재와 현상의 바깥영역이다.
그런데 무한에 대한 본격적 논의를 펼치기 이전에 "초월"에 대해서 좀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초월이라는 단어를 쓰는 레비나스의 생각과 그 단어를 전혀 쓰지 않는 들뢰즈와 거타리의 생각이 내적으로는 통하기 때문이다. 들뢰즈와 거타리는 모든 것이 이미 순수하지 않고 복합적 상관관계에서 존재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다른 니체계열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생각과 이론이 없으나, 현상에서의 재현이 불가능한 원초적 순수함을 항상 강조하고 있다. 그 어떠한 이미지나 심지어는 생각과 같은 모든 것은 "현상"의 범주에 속하며, 따라서 유한한 것인데, 들뢰즈와 거타리는 그들의 공저들을 통하여 현상 너머에 있는 초현상의 차원, 무한의 차원을 계속하여 강조한다. 이 무한은 유한한 것들과 전혀 다른 영역이 아니라 바로 유한한 것들에 존재를 부여하는 근본이다. 모든 현상의 이전에 그 현상들을 생성하는 하나의 전체성이 있다는 생각은 『천개의 고원』의 영어제목이 "하나"를 뜻하는 "A"로 시작하는 A Thousand Plateaus임에 함축되어있다. 수없이 많은 생성이 무한성을 기반으로 하여 이루어지는데, 그 무한은 서양철학이 전통적으로 고수하여온 의미에서의 초월이 아닌, 현상적 수단으로 재현(represented/signified)되지 않는 초월의 영역이다. 이러한, 현상의 전체를 이해하는 단어가 아니라 그 현상의 원천을 생성하는 초현상적 전체성의 힘을 레비나스는 『타자성과 초월』(Alterity and Transcendence)에서 "최종적 전체성으로 향하는 움직임"(the movement toward the ultimate totality)이라고 한다(44). 레비나스는 자아와 타자의 대면의 장을 설명할 때에도 같은 종류의 개념을 보여준다. 그는 자아와 타자의 윤리의 영역을 초월적 감성(transcendental sensibility)의 차원으로 규정하며, "초월과 가시성/비가시성의 사이"(between transcendence and visibility/invisibility)인 "일종의 유사무"(a quasi-nothing)의 상태라고도 묘사한다(『총체성과 무한』 199; 『존재와 다르게 혹은 본질 너머로』Otherwise than Being or Beyond Essence 158).
레비나스는 주체와 타자의 윤리관계 자체를 통하여서만 주체가 무한에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에게는 오직 다른 인간만이 타자가 될 수 있고, 그러한 주체와 타자의 윤리관계는 이미 무한으로 가는 길이다. 이러한 초월적 구조에 대한 레비나스의 사고의 난해성은 그것이 서양철학의 틀을 무너뜨리면서도 윤리의 초월성을 인정한다는 것에 유인하는데, 이것은 들뢰즈와 거타리의 철학도 마찬가지이다. 많은 포스트모더니트들이 니체의 차이의 리듬 위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대명제에 그들 사고의 뿌리를 두고 있는데, 그들은 초월이라는 의미를 서양철학의 전통에서 허상을 만들어낸 것으로만 이해를 하는 경향이 농후하지만 레비나스와 들뢰즈와 거타리는 공히 초월의 영역과 그것이 무한에 이름을 인정하는 점이 같다. 레비나스는 그의 윤리학을 통하여 초월과 무한을 그의 철학언어로 온전히 인정하고, 들뢰즈와 거타리는 그들의 존재론적인 이론에서 초월이라는 단어는 쓰지 않으나 무한을 강조한다. 들뢰즈와 거타리는 그들의 마지막 공저 『철학이란 무엇인가?』(What is Philosophy?)에서 움직임의 개념을 통하여 무한으로 접근하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무한의 움직임"(movement of the infinite)이란 시간과 장소에 제약받는 유한성의 연속이 아닌 유한의 바깥에 있으며 유한의 한계를 밝히는 지평선이다(37-38). 여기서 중요한 점은 들뢰즈와 거타리가 레비나스가 "transcendence"로 지칭하는 것과 같은, 현상을 "초월"하는 상태를 온전히 인정한다는 점이다. 여기서의 초월은 서양철학이 전통적으로 규정해온 "transcendence"가 아니고 라깡이 "실재"(the real)라고 부르는 영역이라고 하겠다. 이들의 포스트모던적 사고는 서양형이상학의 전통을 벗어남과 동시에 초월과 무한을 인정한다는 특이성을 갖는다.
이렇게 보면 레비나스와 들뢰즈/거타리의 견해의 차이는 사실상 매우 작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윤리적 복종은 현상적으로 이루어지는 도덕적 행위가 아니고, 이때 추구되는 정의(justice)는 그 어떠한 가치판단이나 법률적 판단도 가해질 수 없는 것이다. 그가 의미하는 바의 윤리적 복종은 주체와 타자의 결합의 방법을 의미하며, 따라서 그것은 들뢰즈와 거타리가 주체와 타자가 하나가 된다고 함과 마찬가지라고 하겠다. 들뢰즈와 거타리는 자아의 안과 밖이 하나가 되어있는 상태를 강조하고 레비나스는 자아의 외계인 "타자의 무한성"(the infinity of the Other)을 강조한다는 차이점이 있으나 그들의 생각의 근본은 인간주체의 바깥인 무한에 대한 사고인 것이다.
Ⅱ. 무한에 대한 욕망과 예술
그러면 레비나스와 들뢰즈/거타리의 무한에 대한 사고가 문학과 예술의 비평에 어떻게 공헌할 수 있는가? 단순화하자면 예술작품이 독자나 듣는/보는 이의 자아, 혹은 주체의 외계로의 다리의 역할을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말하는 것보다 복잡하다. 자아의 바깥이 절대윤리의 차원이라고 보았을 때 그 자아의 상대가 무엇이 되는가의 문제가 있다. 예술작품이 독자나 감상자의 타자가 되는가? 이 문제에 대한 논의는 레비나스와 들뢰즈/거타리의 철학에 좀더 깊이 들어가며 개진하여야 한다. 우선 레비나스가 의미하는 "타자"라 함은 한 인간의 자아의 그 어떠한 의식적(현상적) 거리측량의 가능성도 미치지 않는 절대타자(the wholly Other)를 의미한다. 레비나스는 "윤리론(ethics)," 혹은 "타자의 철학"이라 불리는 그의 철학논지의 기초를 일상적인 의미에서 쓰이는 "self and other(l' Autre)"의 관계가 아닌 한 개인의 자아와 한 개인으로서의 타자성을 지닌 타자(the Other; d' Autrui)의 관계에 두고 있다. 타자(the other)는 보편적인 차원에서 "주체의 지각능력을 항상 초월하는, 그래서 자아는 도저히 잡을 수 없는, 일반적 의미에서 주체의 외계로서의 타자성(alterity)"이고, 타자(the Other)라 함은 "내가 피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애 치울 수도 없고, 그 앞에서 내가 정의로운지가 판단 받으며 내가 나 자신의 정의로움을 증명해야 하는 다른 한 인간"(the other human being, whom I cannot evade, comprehend, or kill and before whom I am called to justice, to justify myself), 즉 절대 타자로서의 다른 한 인간이다(Critchley 5). 레비나스는 "the other"를 이야기할 때에도 "the Other"의 개념과 결코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담론을 펴고 있다. 절대타자는 완전히 자아의 영역의 바깥에 있다. 즉 자아와 절대타자의 관계는 그 어떠한 이성적 사유도 초월하는 영역에서 이루어진다. 물론 레비나스의 이 말에 들어있는 감성 혹은 감각(sensibility)은 유령 이야기 등에서 그 원형이나 변형을 찾을 수 있는 성격을 지니지도 않고, 어떤 초능력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의 감각이란 타자에 대한 자아의 가장 원천적이고 절대적인 책임 그 자체에 대한 감각을 의미하는데, 이 책임은 초현상적임을 명시해둔다. 자아는 절대타자와 하나가 되려는 욕망을 지니는데 레비나스는 이 욕망을 형이상학적 욕망 (metaphysical desire)라 부른다. 『총체성과 무한』과 『존재와 다르게 혹은 본질 너머로』를 통하여 줄곧 논의되는 이 욕망은 그 중심이 결여되어있어서 그 결여(lack)의 대상을 가지기를 원하는 상태가 아니다. 그 무엇도 결여하지 않는 이 초현상적 욕망은 주체(자아)를 그 외계인 타자의 무한성으로 연결시켜준다. 레비나스의 이러한 타자에 대한 욕망에 대한 사고를 예술작품의 비평에 직결시켜서 한 작품이 독자나 감상자의 타자가 된다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한 인간의 타자는 오직 다른 한 인간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레비나스의 윤리학은 예술지상주의에 반대되는, 반 미학적(anti-aesthetic)인 철학이라고 알려져 있다. 예술작품은 다만 초월의 상태를 이미지로서 재현할 뿐이다. 그러나 이 말은 예술이 한낮 일상생활의 기록 정도(예를 들자면 신문기사와 같은)의 가치 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레비나스는 그의 에세이 "Reality and its Shadow"에서 예술작품은 무한과 윤리의 그림자라고 한다. 주체가 "의식과 무의식"(the conscious and the unconscious)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수단(쓰기, 그리기, 작곡/연주하기 등)으로 창조된 예술작품은 그 의식과 무의식의 외계를 "묘사"(describes)한다(4).
이제 인간의 근본적 욕망에 대한 레비나스의 이해를 들뢰즈와 거타리의 욕망에 대한 탐구로 이어서 우리의 담론을 계속하기로 한다. 들뢰즈와 거타리는 곧바로 그들의 첫 공저인 『반 오이디푸스』(Anti-Oedipus)의 첫 부분에서 모든 것이 욕망하는 기계라고 하며 이 기계는 그 성격이 이분(binary machines)되어있다고 한다(5). 이 이분된 욕망은 레비나스가 가리키는 초월적 욕망이 아니다. 이 첫 단계에서의 욕망, 이분되어지는 성격의 욕망은 모든 현상을 이루는 기본적인 힘이다. 들뢰즈와 거타리 역시 모든 욕망이 이분과 그 이분성에서 야기되는 갈등을 그 근본으로 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거울 속에 반영된 자신의 모습을 보아 자신이 어떻게 생겼는가를 아는 이치와 같이, 인간의 의식은 이분되어야 비로소 생겨나며 그 의식은 이분된 자신의 두 부분을 합치시키려는 욕망을 그 생명으로 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모든 사회현상은 이분된 자아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져 리좀(rhizome)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나 그 근본은 이분이다. 이 말을 바꾸어 하자면, 이분된 자아는 이미 이분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다른 주체들의 존재에 자신의 존재의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이 욕망이 들뢰즈와 거타리의 표현에 의하면 "강도(intensity)가 0인," 즉 완전이완 상태에 머무는 온전한 기관 없는 신체(the full body without organs)와의 관계에서 갈등을 일으킨다. 이 말은 현상의 발생을 위해서는 에너지의 강도가 필요한데 이 에너지가 처음 생기기 시작하는 단계를 가리키는 것이다. 강도가 없는 기관 없는 신체는 사회현상의 근원이 되는데, 레비나스의 윤리학의 맥락에서 보면 주체와 타자의 관계가 시작되는 초현상적인 차원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이 기관 없는 신체는 강도를 지니는 욕망하는 기계를 거부한다. 인간의 주체란(subject) 이 둘, 즉 강도를 가지는 욕망하는 기계와 강도가 완전 이완된 상태인 기관 없는 신체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이다. 이 갈등으로 존재하는 주체는 강도를 유지하는 욕망과 완전이완 되어 아무것도 재현되지 않는 상태의 중간에 위치하며, 강도가 0인 상태를 경험할 때의 주체는 이미 양적으로 측정될 수 있는 현상의 상태를 넘어서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의 욕망은 그 뿌리를 다른 차원에 두고 있다. 그것은 이미 양적인 측정이 가능한 욕망의 수준을 "초월"하는 욕망이며 그 어떠한 감정의 억압도 없는 상태이다. 이제 우리는 들뢰즈와 거타리가 "초월"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그들이 말하는 욕망의 실체는 레비나스의 형이상학적 욕망과 매우 가까움을 알 수 있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대로 들뢰즈와 거타리의 욕망의 개념 또한 그 무엇도 결여하지 않는 욕망이다(26). 이러한 욕망을 지닌 기계는 아무 결여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그 자체가 욕망하는 대상이 없고, 따라서 그 위치가 고정되어있지 않고 유목민과 같이 자유롭게 이동하며 무엇이든 그 대상이 될 수 있으며, 욕망과 그것의 대상은 하나이다. 다시 말하자면 주체가 자신의 강도를 조절하는 과정 그 자체가 완전이완의 상태인 신체 없는 기관 위를 배회하는(wandering about over the body without organs) 과정이다(16, 20). 이렇게 생성, 혹은 됨의 과정은 이미 들뢰즈와 거타리의 공저의 시작부분에서부터 나오며 그것은 『천개의 고원』에서 극대로 강조된다.
필자는 여기서 이렇게 초현상적인 상태에 있지만 갈등을 내포하는 주체는 레비나스가 그의 윤리학의 맥락에서 갈파하는 윤리적 자아의 상태임을 주장하고자한다. 필자의 논지는 그들의 설명은 각기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으나 들뢰즈와 거타리가 말하는 자유로운(유목적인) 주체는 레비나스의 초현상적인 절대적 윤리성을 지니는 자아라는 것이다. 들뢰즈/거타리가 가리키는 (현상적)강도가 없는 상태는 레비나스가 말하는 윤리가 이루어지는 상태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레비나스가 의미하는 바의 윤리란 그 어떠한 도덕적 당위성 내지 의무를 설정한다든지 강조하는 것이 아니고, 들뢰즈와 거타리가 가리키는 아무런 현상적인 거리낌과 긴장이 없는(강도가 없는) 상태에 있는 주체는 레비나스의 윤리학적 입장에서 조명하자면 객체에 대한 절대윤리의 책임을 지는 초현상적인 주체인 것이다. 들뢰즈와 거타리의 철학에서 주체와 객체가 하나라는 설명은 레비나스에 의하면 주체와 타자가 절대적 윤리의 관계에 있음을 의미한다.
필자의 레비나스와 들뢰즈/거타리의 철학의 논의는 보다 나은 문학비평의 틀을 마련하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다음 장에서 이러한 윤리와 무한의 문제를 문학텍스트의 비평에 한정하여 논의하기 이전에 레비나스와 들뢰즈/거타리가 의미하는 주체의 무한에 대한 욕망이 어떻게 일반적 의미에서의 예술 전반과 연관될 수 있는가에 접근하기로 한다. 이 논의는 예술작품이 이러한 초월과 무한의 영역에 어떻게 접근하는가에 대한 탐구가 된다. 레비나스의 윤리학에서 자아의 타자에 대한 책임은 향유(enjoyment 또는 jouissance)를 통하여 접근이 가능하다. 숭고, 향유 등에 대한 논의가 예술비평의 필수적임은 당연하다 하겠다. 롱기누스와 버크의 숭고에 대한 생각, 특히 현대의 이론의 예를 들자면 프로이트의 "uncanny"라든가 쟈크 라깡의 "das Ding"이라든지 타자의 욕망을 지칭하는 오브제 a의 개념 등은 모두 인지를 초월하는 영역을 대상으로 삼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라깡은 『정신분석학의 윤리』(The Ethics of Psychoanalysis)에서 "이용할 수 있는 것 이상의 것"으로서의 "향유의 가치"를 높이고 있다(229). 그러나 그는 선에 대하여 온전히 그 자체로 긍정적 평가를 내리지 않고 자아의 만족에 초점을 둔다. 결국 라깡의 정신분석학은 자아의 만족을 그 기반으로 하여 사람의 정신을 분석하는 학문이고, 들뢰즈와 거타리가 지적하듯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구조에 갇혀있는 것이다. 반면 레비나스의 윤리학은 인간성의 초월성을 그 자체로 인정하며 인간의 타자에 대한 초현상적인(현상의 근본이 되나 현상에 대한 설명으로는 표현되지 않는) 절대 책임을 강조한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향유는 절대적 인간성, 절대타자성, 자아의 바깥으로 향해 나아가는 필수조건이다. 인간은 고통을 즐기는 능력이 있다는 그의 설명은 기쁨과 고통이 따르는 라깡의 쥬이상스의 설명과 같은 맥락을 가지나, 레비나스에 따르면 인간은 향유 속에서 아프리오리(a priori)도 초월하는 능력이 있다. 즉 향유는 현상의 가장 근본적 구조도 해체시키고 초월로 우리를 이끌어주는 다리이다. 그는 진정한 외계인 인간 타자에 대한 자아의 경험을 초월적 감각의 차원으로 인식하여 "탁월한 경험"(experience par excellence)이라고 표현하는데, 이 향유의 감각은 그 어떠한 추상적 개념도 초월하는 것이기에 그는 이러한 경험을 오히려 육체의 본질을 가리키는 "육체성"(corporeality), 향락(voluptuosity) 등의 단어와 결합시켜 독자를 이해시키려한다 (『총체성과 무한』 196). 향유는 무엇보다도 자아의 만족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그 자아의 만족은 인간의 근본, 혹은 예술작품에서는 그 작품이 담고 있는 근본적 인간성의 표현으로 향하는 길이기 때문에 통상적 개념의 즐거움(pleasure) 뿐 아니라 고통(suffering), 타자에 대한 절대적 수동성(total passivity) 등의 개념을 사용한다. 예술은 인간이 아니므로 자아에 대치되는 타자가될 수는 없으나 타자와 자아의 윤리의 영역을 반영하여줄 수는 있다. 들뢰즈와 거타리에 관련하여 중요한 점은 그들도 또한 자아를 초월하여 그 바깥에 위치하는, 즉 재현되지 않는 감성이 생성을 가능하도록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반 오이디푸스』 19). 그들은 『천개의 고원』에서도 ("oy"로 영역된) 그러한 감성은 단순한 즐거움(pleasure)으로 측량될 수 없으며, 그 자신의 (결핍을 기본으로 하지 않는 내재적 생성능력을 지니는)욕망과 직결된 근본적인 향유임을 분명히 한다(155-57). 그것은 자아의 안과 밖이 내재성(immanence)을 통하여 혼합되어있는, 즉 녹아있는 (fused) 상태이다(156). 잘 알려져 있는 바대로, 들뢰즈와 거타리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그 핵심을 이루는 정신분석학이 만들어내는 틀에 주체에 대한 논의를 한정시키기를 거부하는데, 인간의 가장 근본적 감성을 말할 때에도 정신분석학에서 말해지는 즐거움이나 쥬이상스의 개념보다 더욱 내재적인 감각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레비나스와 들뢰즈/거타리는 모두 다른 이론가들에 비해서 구조를 파괴하는 데에 보다 그 구조를 초월하는 무한의 경지가 있음에 주안점을 둔다고 하겠으며, 그들의 사고에 의하면 예술작품은 궁극적으로 무한의 표현이라고 하겠다. 이 초현상적 감성은 무엇보다도 료따르(Jean-Francois Lyotard)의 포스트모던 숭고미(the postmodern sublime)의 의미와 흡사해 보인다. 료따르에 의하면 포스트모던 숭고미는 묘사와 서술, 생각 그 자체를 파괴하며 그것은 명백히 윤리적 중요성을 지닌다(Gibson 70).
Ⅲ. 무한으로 향한 얼굴과 생성
예술의 범위를 좁혀서, 문학과 음악은 미술과 달리 읽는 행위, 혹은 듣는 행위를 통하여 시간의 흐름에 따른 스토리나 리듬의 전개에 따라 감상이 이루어진다는 특징이 있다. 물론 미술작품의 감상도 단순히 첫인상이 아니고 순간들이, 혹은 더 장시간이 지남에 따라 감상이 이루어질 수 있지만 문학과 음악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내용의 변화를 필수로 한다는 점이 큰 차이를 이룬다. 그 둘 중에서도 언어로 이루어지는 문학은 비교적 단순하고 추상적인 음으로 표현되는 음악과 같지 않고 인간들의 실재의 삶의 이야기로 구성된다. 언어는 감성 뿐 아니라 강한 이성의 힘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문학텍스트의 논의에서는 스토리의 구성상 이루어지는 이성과 감성의 "변화," 혹은 움직임 그 자체가 중요하게 인식되어야한다고 하겠다. 이러한 점에서 레비나스의 "타자의 얼굴"(the face of the Other)의 변화와 들뢰즈/거타리의 생성으로 논의의 초점을 옮겨가고자 한다.
레비나스의 윤리학에서, 타자가 한 인간이 됨의 근본이, 혹은 삶의 현실의 근본이 "표현"된 상태가 그가 타자로서 가지는 "얼굴"이다. "표현"된다는 것은 이미 현상성과 구조의 형성을 내포한다. 왜냐하면 그 어떠한 종류의 것이든 표현은 현상 안에서만 가능하고 현상 안에 존재한다는 것은 구조를 가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타자가 얼굴을 지닌다함은 초현상적인 절대 타자성이 현상의 세계로 발현(레비나스의 용어로 "epiphany")함을 의미하며, 이것은 동시에 특정한 타자의 타자성의 구조가 형성됨을 뜻한다. 초현상적인 타자성의 현상성이라 함은 이미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레비나스의 초월의 개념이 무한과 현상이 겹쳐진 상태를 지칭한다는 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즉 절대타자의 타자성은 현상을 초월하나 최소한의 현상성이 남아서 구조를 이루고, 이러한 상태 자체가 초현상적인 것이다. 『총체성과 무한』 등에 설명되는 바의 "타자의 얼굴"이란 무한에서 유한의 세계로 진입하는 단계이다. 또한 이러한 최소현상의 단계는 변화와 움직임을 동반한다. 타자는 그 얼굴의 표정을, 즉 그 구조를 끊임없이 바꾼다는 것이다.
타자의 얼굴이 변화하는 이 과정은 역으로 유한에서 무한에로의 진행과정으로도 이해된다. 자기 자신에 아직 남아있는 최소한의 현상적 구조를 허물어뜨리는 과정이며, 무한으로 다가가며 자신의 감성적 현상성을 철회하는 과정(desensibilization)이다(CPP 42). 이것은 데리다의 해체론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자기해체(self-deconstruction)에 해당하는 과정이다. 이제 레비나스 윤리학의 핵심으로 가보기로 한다. 절대타자는 자아가 도달할 수 없는 가장 높은 자의 위치에서 "살인하지 말라"(Thou shall not kill!)라는 언어표현에 해당하는 명령을 하며, 그와 동시에 가장 낮은 자로서 자아에게 타자 자신에 대한 책임을 택하도록 헐벗고 알몸인 상태(destitution, nude)로 나타나 "이 전적 타자에게 책임을 다하라"라는 절대윤리를 지킬 것을 명령한다.(『시간과 타자』Time and the Other 108). 살인하지 말라는 것은 초현상적, 절대적인(상호적이지 않은) 윤리적 책임을 다하라는 말로, 현상적 도덕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다. 레비나스의 윤리학의 난해성이 바로 이 윤리가 초현상적이고 그 어떠한 방법으로도 표현될 수 없음은 이미 이야기한 바이다. 자아와의 초현상적 대면에서 타자는 일체의 비인간적 요소가 없는, 온전한 인간성 그 자체로서 나타나는데, 이러한 타자의 윤리적 명령과 자아의 수령은 해체론의 입장에서 일컫자면 윤리적 차연을 생성하는 과정이다. 윤리적 자아의 절대복종이 자아가 그 바깥인 절대타자의 타자성(alterity)로 향하여 나아가는 다리가 되고, 이 절대복종을 통하여 자아는 타자와 하나가 됨을 추구한다. 그런데 이러한 초현상적 윤리관계가 성립될 때에 타자의 얼굴은 항상 변화하며 현상으로부터 점점 탈피하여 자아의 세계, 즉 현상적 세계에서부터 그 외계인 무한성으로 나아간다. 이 상태의 타자는 정확히 말하자면 완전한 초현상의 상태가 아닌 준(quasi)초현상/초월(재현되고 의미화 된 초월이 아님)의 상태에 있기 때문에 최소한의 현상성을 지니고 있고, 이 이야기는 얼굴이 그 자신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를 지닌다. 즉, 타자의 얼굴은 현상의 차원에 머무는 자아를 더욱 온전한 초월의 경지인 무한으로 이끄는 중간단계인 것이다.
이 윤리적 관계, 레비나스가 일컫는 바의 근접(proximity)의 관계에서 자아는 타자가 그 얼굴의 표정을 통하여 주는 절대윤리의 메시지를 따라간다. "살인하지 말라"라든가 "이 전적 타자에게 책임을 다하라" 등의 명령어는 타자의 얼굴이 자아(주체)에게 주는 전체적인 메시지일 뿐 그 구체성은 언제나 변화하는 것이다. 주체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또한 주체가 (타자를 따라서) 자신의 현상성을 해체하며 타자의 얼굴을 좇아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타자와 주체가 각기 자신의 현상적 감각을 해체시키고(desensibilizes) 이렇게 자아와 타자가 하나가 되어가는(진정으로 하나가 되지는 않지만) 과정을 들뢰즈와 거타리식으로 일컫자면 자아의 타자됨의 과정에 다름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타자의 얼굴과 표현한다고 함은 변화한다는 것이며, 변화한다는 것은 움직임을 뜻한다는 의미에서 (앞서 언급한 바의) 들뢰즈와 거타리가 가리키는 (높낮이에 의해서가 아니라 수평적으로 행해지는)"무한의 움직임"이다. 다만 레비나스는 윤리적 자아와 절대타자가 하나가 되는 과정을 포스트모던 윤리의 관점에서 갈파하고, 들뢰즈와 거타리는 그들의 포스트모던적 존재론에 입각하여 논하는 것이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주체와 타자의 윤리적 만남은 상호적이지 않고 오직 한 방향으로만 진행되는데, 들뢰즈와 거타리에 의해서도 생성(됨)은 상호적인, 즉 현상적인 관계형성이 아니다(『천개의 고원』 237). 레비나스에 있어서, 주체는 타자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지지 않고 그를 윤리적으로 살해하나 타자는 죽지 않는다. 레비나스는 이렇게 그의 윤리학을 통하여 자아가 타자의 절대타자성에 미치지는 못하고 계속 따라가며 그 무한성으로 다가가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고, 이 의미는 들뢰즈와 거타리가 그들의 존재론에서 주체의 탈영토화(deterritorialization)와 재영토화(reterritorialization)를 통하여 생성(becoming)이 이루어짐을 역설하는 것과 같은 내용이다. 말하자면 레비나스의 윤리학에서 타자나 자아가 자신의 감성적 현상성을 철회하는 과정(desensibilization)이 들뢰즈와 거타리에 의하면 탈영토화의 과정이라고 하겠다.
레비나스와 들뢰즈/거타리의 다른 점은, 자아와 타자의 윤리관계를 설명함에 있어 전자는 한 인간과 다른 인간의 관계를 그 철학적 설명의 장으로 설정하는 반면 후자는 비인간성을 포괄하려 한다는 점이다. 레비나스는 한 인간인 "나"와 다른 인간인 "너"의 관계에 집중하는 반면 들뢰즈/거타리는 다양성의 내재, 그리고 인간과 비인간의 혼재를 강조한다. 주체와 (헤겔 방식의 "객체"가 아닌)타자는 갈려있기 때문에 하나가 되고자 하는 것이고, 들뢰즈/거타리는 한 인간과 다른 인간의 관계는 이미 인간성과 비인간성의 다양한 개체가 군집된 하나의 총체와 또 다른 다양성의 개체의 만남으로 보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결국 모두가 전통적 인간관과 잘못된 초월의 개념에 반대하는 것이지 결코 초현상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레비나스와 들뢰즈/거타리가 모두 자아의 무한에 대한 초현상적인 욕망에 그들의 이론의 기초를 둠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레비나스에 있어서 뿐 아니라 들뢰즈와 거타리에 의해서도 자아는 무한성의 표면 위를 배회한다. 들뢰즈와 거타리의 논의 중 레비나스의 윤리학에 더욱 근접하는 점을 거론하자면, 그들도 얼굴에 대한 논의를 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천개의 고원』에서 설명되는 바, 들뢰즈와 거타리의 "얼굴" 역시 이성적인 특색을 지니고 인간성 안에서 만들어진다(170). 얼굴은 그 인간의 총체성을 이루는 주체가 형성되는 과정을 방해하고 무너뜨리는 역할을 하는 고로 주체의 중력장(the black hole of subjectivity)을 형성한다고 표현된다(168). 이 얼굴은 무한의 표현이기 때문에 유한한 주체를 해체하는 중력장이 된다고 하겠다.
Ⅳ. 텍스트와 하나 되기로서의 읽기
이제 이러한 주체와 타자의 관계 형성을 문학텍스트 읽기에 적용하여 보자. 먼저 문학텍스트가 한 주체의 타자가 될 수 있는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레비나스에게는 오직 한 인간만이 다른 인간의 타자가 될 수 있다. 레비나스가 의미하는 (주체에 대한 타자의)윤리적 명령은 가장 근본적인 인간성의 단계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레비나스의 사고를 반 미학적이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예술은 감상자의 감성의 힘에 호소한다. 레비나스는 진정한 초월은 이성의 힘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비평(criticism)이 필수적으로 동반되어야 한다고 한다. 비평의 설명은 현상적인 것으로서 인간적이지 않은(inhuman) 작품이 어떻게 무한을 그 그림자의 역할을 함으로써 가리키고 있는 가를 보여주는 것이다(CPP 11). 그러나 그는 예술작품을 필요이상으로 폄하하지는 않는다. "진실과 그 그림자"라는 소논문에서 그는 예술작품의 세계를 절대윤리의 영역인 "진실"의 "그림자"로 지칭한다(CPP 1-13). 진실, 혹은 초월이란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서만 접근이 가능한 것이고 따라서 예술작품은 한 인간주체에 대한 타자가 되지 못하나 주체의 외계의 그림자는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예술작품은 (근본적인)인간성과 비인간성이 한데 녹아있는 상태이다. 들뢰즈와 거타리는 얼굴에 대해 논의할 때에 인간의 얼굴을 가면이 덮을 때 그 가면은 인간얼굴의 비인간성이 된다고 한다. 이것은 인간과 비인간을 구분하면서 인간은 동물과 같은 비인간이 될 수 있는 반면 비인간은 인간이 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레비나스의 윤리적 관점에 비추어 보면 이 말은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는 인간이 주도한다는 말로 바꾸어질 수 있다. 예술작품은 인간이 만든 것으로서 인간성이 나타나있고, 인간이 비인간화되어(현상적으로 표현되어)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인간이 가지고 있는 초월(초현상)이 물질화(현상)되어있는 상태이다. 인간이 아닌 이 예술작품은 초월을 가리키고 있다. 이 예술작품의, 특히 문학텍스트의 독자는 스토리의 진행을 따라가며 텍스트가 보여주는 세계를 경험한다. 이때에 텍스트는 초현상과 현상이 함께 있는, 절대윤리가 반영되어있는 영역으로 안내된다. 그렇다면 예술작품은 그것의 감상자를 레비나스가 (다른 인간과의) 탁월한 경험이라고 지칭하는 숭고미를 직접적으로 경험하도록 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간접적 경험으로는 초월적 윤리를 경험하게끔 인도함에 틀림없다. 그 영역은 그 작품만이 가지고 있는 특이성(singularity)이 현상적인 방법인 주제화의 과정을 통하여 정의될 수가 없는 상태로서, 그 어떠한 개념도 해체되어야 작품의 숭고미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 영역으로 독자를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 것은 텍스트에 나타나있는 개념들이 아니라 꿈과 같은 내용(dreamlike context)이다. 텍스트는 현실과 같아 보이지만 사실 비현실성으로 독자에게 삶과 죽음의 사이를 가리켜준다. 말하자면 삶과 죽음사이에 텍스트의 특이성이 있고, 인간타자의 얼굴표정과 같이 항상 변하여 그 의미를 현상적으로 잡을 수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확히 이야기 하자면 인간이 아닌 텍스트의 특이성은 얼굴을 가지지 않는다. 단지 독자가 경험하게 되는 텍스트의 내용의 흐름은 본 논문의 초반부에서 다룬 "최종적 전체성으로 향하는 움직임"이라 할 것이다. 이 움직임은 들뢰즈와 거타리의 생각과 같음도 이미 설명되었다.
이제 들뢰즈와 거타리의 무한에 대한 사고에서 문학과 예술의 비평에 적용될 수 있는 부분에 집중하기로 한다. 들뢰즈와 거타리는 『천개의 고원』의 생성에 대한 부분(10과)에서 뱀파이어(vampire)와 늑대인간(werewolf)에 대하여 많은 분량을 할애한다. 물론 그들은 뱀파이어와 동물인간이 실제로 있어서 다른 인간들의 피를 빨고 자신들과 같은 상태로 변화시킨다든지 인간이 늑대인간으로 변화하는 것을 그들의 학문적 담론의 주제로 삼는 것이 아니고, 내재적 변형의 예를 들고 있는 것이다. 주체를 이루는 개체들은 code화 될 수 있는데 그 code들이 나뉘어져 흩어졌다가 (또 다른 code들의 집합상태인) 다른 하나의 개체로 되는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과정은 먼저 들뢰즈/거타리가 『반 오이디푸스』에서 원초적 감성 (primordial emotion)(18)이라 부르는 근본적 감각의 차원에 존재하는 작가의 내재적 감성의 움직임을 통하여 논의되어야 하겠다. 『천개의 고원』에서 그들이 작가의 생성의 예로서 먼저 드는 것은 글쓰기를 통한 작가의 동물 됨이다. 작가가 인간으로서 지니고 있는 원초적 감성이 비인간화될 때 그는 동물 됨의 감정을 경험하는데, 들뢰즈와 거타리는 이러한 미묘한 감성을 갖게 되는 과정을 "감동"(affect)라고 표현하며, 이 경험은 부자연스러운 결합(unnatural nuptials)이라고도 한다(240). 레비나스 역시 이러한 재현될 수 없는 원초적 인간감성의 비인간화를 주체가 영향을 받아서(affected) 재현의 주제가 되는 과정으로 설명한다(『존재와 다르게 혹은 본질 너머로』101). 들뢰즈와 거타리는 예로서 뱀파이어가, 하나의 정체성이 다른 정체성으로 변하는 상태(filiate)가 아니고 전염(infect, contagion)의 상태임을 설명한다(『천개의 고원』 241-42). 드라큘라와 같은 뱀파이어는 죽었으나 살아있는, 혹은 죽지도 살아있지도 않은(undead) 부정의(uncertain, indefinite) 상태에 있고, 종족을 만드는 방법은 상대와 정상적인 "관계"를 맺음으로써가 아니라 자신의 피를 전염시킴으로써 이다. 예술작품의 작가는 이러한 그 어떠한 구조도 벗어나는 탈구조적인 상태를 경험한다고 하고 독자에게 전염시킨다고 하겠다. 전염에 대한 사고는 다양성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들뢰즈와 거타리는 자아는 두 개의 다른 다양성의 단위들 사이에 존재하며 하나의 다양성의 개체로부터 다른 다양성의 개체로의 문(threshold)으로서의 역할을 한다고 한다(『천개의 고원』249). 그들이 "꾸러미"(pack)라고 부르는 다양한 개체들의 집합인 한 주체나 종이 다른 다양한 개체들의 집합인 개체나 종으로 뒤얽힘(involution)을 통하여 변형되는 것이 생성/됨이라 할 수 있는데, 중요한 것은 이 됨은 일단 직접적으로 현상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현상을 변형하는 모태를 생성시킨다는 의미를 가진다. 텍스트의 궁극적 역할은 독자를 초현상적 영역의 표현으로 전염시키는 것이지, 그 어떠한 이데올로기적 구조를 납득시키거나 주입하는 것이 아니다.
들뢰즈와 거타리는 『천개의 고원』의 시작부분에서 코드들(codes)의 집합은 그 잉여가치(surplus value)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10). 텍스트가 잉여가치를 가지고 있다함은 탈구조는 소위 무엇을 하든지 다 괜찮은 것으로 치는 식이 아니라 무한으로 이어지는 가치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대중예술이라 하여 낮은 평가를 받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좋은 작품과 하류작품은 이 비밀스러운 잉여가치의 차이에 의해서 결정되어야한다. 구조주의로는 이 잉여가치를 지닌 생성을 설명할 수 없는 이유는 (237) 이 잉여가치는 읽는 독자로 하여금 자아의 구조를 해체하고 외계로 나아가게끔 하는 감성적 장치라 하겠으며, 이 영역이 레비나스의 용어로는 진실의 그림자로서의 역할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진실의 그림자는 인간의 절대적 윤리의 영역의 그림자임은 이미 설명된 바이며, 레비나스의 그러한 생각은 들뢰즈와 거타리의 생각과 같다고 하겠다. 즉 텍스트는 그것을 읽는 인간주체에게 초현상적 윤리의 영역, 그 누구이든 인간이라면 다 타자에게 완전 복종을 하도록 명령을 받는 영역, 혹은 "최종적 전체성으로 향하는 움직임"의 영역인 외계를 가리켜준다. 문학작품의 비평에 있어서 중요한 점은 독자/비평가가 작품을 읽는 행위는 어느 특정주제를 이용하여 그 작품을 해석하는 것도 아니고, 단순한 즐거움이나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그 자체도 아니며, 초현상적 감성의 영역으로 향한 상태에서 그 작품과 하나가 돼가는 과정이라 하겠다. 읽기는 개체들의 집합인 작가가 다른 하나의 집합인 작품으로 무한으로 향하는 움직임 속에서 하나가 되는(becoming) 과정이다. 텍스트와 하나가 되는 읽기는 텍스트의 핵심을 구축하는 움직임을 파악하는 것이다. 앞서 논의한 바와 같이, 레비나스와 들뢰즈/거타리의 포스트모던 윤리 비평은 공히 텍스트를 인간성이 비인간성으로 굳어지는 단계의 표현으로 보고 마치 뱀파이어의 존재와 같은 상태인 인간과 비인간의 사이를 표현하는 방법이라 하겠다. 텍스트가 독자에게 "영향"을 주고 "전염"하는 차원은 레비나스의 용어를 빌자면 현상적 언어인 종이에 인쇄되어진 "말하여짐"(said)이 초현상적인 언어인 "말함"(saying)으로 깊어지는 단계를 가능한 한도까지 비평언어로 설명해 보이는 것이다. 말함은 작품의 진정한 주체이며 인간의 얼굴에 해당하고, 이 영역에서 독자와 텍스트는 하나가 되어간다고 하겠다.
이렇게 보면, (인간의 초월적 얼굴에 해당하는)작품의 특이성은 이성보다 감성의 힘을 통하여 접근할 수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본 논문은 철학적 비평이론을 순수하게 그 자체로만 가치를 평가하고 논의하는 데에 목적이 있는 논문이라 구체적 작품을 논하기에는 지면이 허락지 않지만 한가지의 예만 들어보려 한다. 들뢰즈와 거타리가 뱀파이어를 예로 들고 있음에 비추어보면,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과 『드라큘라』(Dracula)와 같은 고딕문학 작품들은 이러한 초월적 감성의 차원으로 감상자를 이끄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여기서는 『드라큘라』만 짧게 논의하기로 한다. 『드라큘라』의 비평은 드라큘라 백작의 인물분석(character study)을 통하여 이루어질 수 있다. 백작이 기존의 인간사회, 특히 기독교사회에 전통적으로 존재하여온 선과 악의 개념을 파괴함으로 하여 독자의 의식을 모호한 의식의 세계로 안내하는 꿈길(dreamlike context)이 됨을 보여줄 수 있다. 즉 드라큘라 백작은 선과 악의 개념이 녹아져있어 명확치 않은, 죽었으나 죽지 않은(undead) 상태로서 비현실적 내용을 통하여 독자의 자아 속에 형성되어있는 선과 악의 개념과 삶의 형태를 해체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읽는 것이다. 자아가 존재하는 유한의 세계에서는 선과 악의 개념 등이 명확한 구조를 가지고 있으나 이 소설은 으스스한 무드에서 선과 악, 그리고 삶과 죽음의 경계선 등을 허물어 독자의 의식을 무한으로 향하게 하는 것이며, 이 과정은 독자와 텍스트가 끊임없이 하나가 되어가는, 그러나 현상적으로(주제 등의 표현수단을 통하여) 하나가 될 수는 없는, 그러한 과정이다.
결론으로 다시 한번 말하자면, 문학텍스트는 이미 탈영토화를 하고 있으며, 해체된 개념의 총체성의 재인식은 감성을 동원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하겠다. 다시 말해 작품의 특이성, 즉 초현상적 전체성은 영토화, 탈영토화, 재영토화의 과정이다. 이 방법의 비평은 지금까지 해체론자들이 해온 것처럼 한 관념적 총체적 주제를 붕괴시키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감성을 동원하여 독자자신이 그 작품에 대하여 어떻게 느끼는 가를 세밀히 논함으로써 개념의 총체성을 붕괴시키고 잉여가치를 드러내는 데에 감성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그것은 타자의 위치에 있는 텍스트가 만들어내는 초월적 감성의 차원을 최대한 가능한 한도까지 표현하는 방법이다. 독자의 읽는 행위는 개념과 작품의 구조를 통하여서라기보다 주로 감성을 통하여 텍스트의 자기해체를 따라가는 과정이며, 이것은 곧 들뢰즈와 거타리의 용어로는 텍스트의 특이성이 독자에게 "전염"되는 과정이라 하겠다.
《부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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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Infinity and Critical Theory: Levinas and Deleuze/Guattari
Lee, Jae Seong
Levinas's ethical thinking is profoundly different from the traditional Western mode of speculation in that he illuminates how a finite human subject approaches the infinity of the Other. Levinasian ethics distinguishes itself in essence even from other postmodern philosophies also for its explanation of what can be termed trans-phenomenal (that is beyond the level of phenomenality but still sensible) sensibility. For Levinas, the proximity between the self and the Other is the ethical dimension in which the Other approaches the self as a transphenomenal face, commanding the self to take its ethical responsibility. This process of the subject's movement is, after all, an approach to infinity; the alterity (absolute otherness) of the Other is completely exterior to the self. Infinity takes a position of paramount importance in Gilles Deleuze and Felix Guattari's writings. Right from the beginning of Anti-Oedipus through A Thousand Plateaus to What is Philosophy?, Deleuze and Guattari manifest that the becomings are possible owing to the most fundamental "emotion" which should be considered as correspondent to trans-phenomenal sensibility. This fundamental emotion is the passage toward the exteriority of the self, and it already is outside.
This paper finally proposes that we use our faculties of feelings and sensibility more than reason in writing literary criticism to illuminate the text's passage to the exteriority of the reading subject. The text's phenomenological ways toward the transphenomenal realm can be thought and logically explained to the extent that it is shown by the language written on the pages, but the transphenomenal sensibility cannot be explained; the locus of the transphenomenal sensibility can only be pointed at. All movements in the dimension of transphenomenal sensibility are caused by, and returning to, infinity.
key words: Levinas, Deleuze and Guattari, postmodern ethics
이름: 이재성 소속: 부산대학교 인문대학 영어영문학과 주소: 부산광역시 금정구 장전동 산30번지 Tel: 051-510-2052 Fax: 051-513-5935 Email: ethicsjl@pusan.ac.kr 원고접수일: 2004년 1월 5일 게재여부 판정일: 2004년 2월 2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