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행복나침반 > 레비나스의 타자윤리에 관한 연구 (참고로, 양이 엄청납니다)
모군 홈페이지에 오픈되어 있어 가져왔던 것.
재작년 초에 아래의 필자와 동일한 김연숙의 레비나스에 관한 책을 한참 탐독하였는데,
그 때 어찌어찌 어떤 홈페이지를 찾아들어갔고, 긁어 싸이월드에 나 혼자 쓰는 곳에 올려놨는데(백업용;)
싸이를 안들어가니 도무지 볼 겨를이 있어야지.
아직 안읽어봐서 그 책이 박사논문을 찍어낸 건진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 논문이 토대는 되었겠지.
다시 읽어보잔 의미에서..
한글로 옮겨보니 150여 페이지 육박; 하는 상당한 양이니 보실 분들은 작심을 하시는 게..;
레비나스의 타자윤리에 관한 연구(서울대박사학위논문)
김연숙(金連淑)
본 논문은 자아와 타자사이의 윤리적 관계를 중심내용으로 하는 레비나스의 ‘他者倫理學’을 고찰한다. 본 논문의 구성은 레비나스 ‘他者倫理’의 윤리학적 배경, 자아와 타자 사이의 분리를 가능하게 하는 자아의 內面性, 자아와 타자의 윤리적 관계를 가능하게 해주는 마주보기의 만남과 多元性의 수용, 윤리적 자아와 무한한 타자성의 관계를 중심으로한 他者性 윤리의 구성, 끝으로 타자윤리의 도덕?윤리 교육적 의의로 되어 있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서구철학의 일원론적인 전통은 윤리 부재의 중립의 철학 또는 全體性의 철학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전체성의 철학이란 同一性의 철학을 의미하며, 자아외부에 존재하는 타자의 外在性을 자기화하고 대상화하면서, 자기-동일시하는 철학을 의미한다. 의식의 전개 과정에서, 대상은 의식에 종속된다. 이때 만일 의식의 대상이 다른 사람인 경우에 자아와 다른 자아 사이에는 적대적 인간관계의 문제가 발생한다. 이같은 상황에서 레비나스는 타인의 존재를 자아의 대상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로 인정하는 새로운 관계를 고려한다. 자아와 타자의 올바른 관계는 타인의 존재를 인정하는 倫理的 關係 즉 形而上學的 關係이다. 윤리적 관계는 타자를 자기동일성의 영역으로 환원시키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熱望하는 움직임 즉 타자에로의 超越性에 있다.
레비나스에게서 자아와 타자(타인)사이의 올바른 관계는 하나로 혼합되거나 융화되는 관계가 아니라, 자아와 타자의 거리를 유지하는 관계이다. 이는 타자의 외재성, 절대적 다름, 차이 그리고 他者性을 보존하기 위한 전제이다. 몸과 感性의 존재로서, 향유적 자아의 내면성이야말로 거리와 분리를 가능하게 해준다. 인간존재는 자기보존원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노동을 통해 익명성을 지닌 물질의 영역을 지배하고, 소유하면서 경제활동을 수행한다. 하지만 인간존재는 자신의 배고픔만 아는 이기적 자아 안에 머물지 않는다. 몸은 향유의 내재성으로 자아의 內面性을 보여주는 동시에 외부의 영향을 感受하는 장소로 외면으로 향한다. 따라서 몸은 타인에 의해 영향받고 상처 입을 수 있는 感性의 영역으로 나타난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윤리적 관계를 가능하게 해주는 출발점은 바로 타인의 얼굴이 나타내는 顯現을 수용하는 것이다. 現象이 목적하는 바에 근거하여 대상을 인식하는 작용인데 반하여, 현현은 우리에게 보여지고 나타나는 것이다. 타인은 어떤 맥락과도 무관하게 가장 벌거벗은 얼굴 그 자체로 근원적 언어 즉, 윤리적 根源語를 계시하고 있다. 타인의 얼굴은 우리에게 윤리적 요청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는 命令이자, 우리의 도움을 구하고 간청하는 呼訴이다.
레비나스는 전통 윤리학을 익명적?무인격적?추상적인 보편성으로 향한다고 비판한다. 이같은 비판적 관점에서, 그는 인간의 얼굴을 향한 윤리, 마주보는 만남의 윤리를 제시한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는 만남에서, 가장 중요한 함의는 말을 건네고 應答하는 발화행위의 근본적 윤리성이다. 만남의 나-너 관계는 또한 우리와 친하지 않은 이방인에 대한 윤리적 태도로까지 확대된다. 이같은 주장의 근거는 자아에 대한 너(autrui)로서의 他者는 존재 그 자체로 절대적 다름과 무한한 타자성의 의미를 내포한 모든 인간 존재자들로 치환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타자의 자리에는 이방인, 과부, 고아, 약한 자, 굶주린 이, 박해받는 이, 고통받는 자, 외국인 노동자, 거지, 여자, 등등의 모든 인간이 올 수 있다. 자아와 타자 사이에 형성되는 윤리적 관계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非對稱性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에서 ‘非對稱性’의 의미는 주고받는 관계를 전제하는 相互性과 달리, ‘받을 것을 생각하지 않고 주는 행위’이다.
레비나스에게서 주체성의 단독성과 고유성은 우리가 타인의 呼訴와 要請 즉 타인의 指名과 選任을 받아들일 때 형성된다. 우리가 타인의 호소와 요청을 받아들이면 받아들일수록, 내 안에는 타자의 자리가 커지며, 동시에 나의 윤리적 자아의 크기도 커진다. 이같은 윤리적 자아는 人質, 代贖으로 표현된다. 대속은 타인의 책임까지도 책임지는 사람, 자기와 무관한 사람들의 몫까지도 책임지는 존재 그리고 타자에 의해 사로잡힌 존재이다. 이같은 맥락에서, 레비나스에게서 이기적 자아는 ‘ego’나 주격적 형태인 ‘I’로 표현되는 반면, 타자와의 윤리적 관계에서 형성되는 윤리적 자아는 ‘self’나 목적격의 형태인 ‘me’로 표현된다. 타자윤리학은 또한 타자의 타자성과 접하면서 자아의 유한성을 넘어서는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사랑이 가져오는 出産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이해된다. 유한한 자아는 사랑의 결실인 아이를 통해서 미래의 무한성에 접하게 된다. 무한한 미래의 시간성은 나의 지배를 벗어나 있는 것이지만, 나는 나의 아이(타자안의 나)를 통해서 무한한 미래로 연결된다. 이같은 점에서 미래의 무한한 타자성과 주체는 불연속적 연속성을 띠게 된다.
끝으로, 본 논문은 타자윤리의 도덕?윤리교육적 의의를 고찰한다. 이제까지 도덕윤리과를 주도해온 인지론적 도덕교육은 윤리적 행위의 근원을 自律性 즉 자기원리에서 찾아 왔다. 그런데 이같은 접근법은 자기로부터 근원하지 않은 윤리적 호소나 명령을 받아들일 통로가 없는 문제점이 있다. 레비나스는 타자의 높이로부터 오는 他律性의 의미를 밝혀주면서, 이 문제를 해결해간다. 그밖에 도덕?윤리과의 중요한 과제중의 하나는 피교육자의 윤리적 자아를 형성하는 문제이다. 오늘날의 인간의 自我性의 의미는 윤리적 자아성보다는 합리적 자아 또는 합리성을 왜곡한 이기적 자아성으로 왜곡되고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레비나스의 윤리적 자아 구성의 원리는 피교육자의 윤리적 자아 형성에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주요어 : 第一哲學으로서의 倫理學, 無限의 理念, 他者로의 超越性, 享有, 몸, 感性의 受容性, 自我의 內面性, 他者性, 顯現, 마주보기의 만남, 對話, 多元性, 非對稱的 責任倫理, 應答의 倫理, 代贖, 倫理的 自我性, 孝, 慈愛, 友愛, 連帶性 >
目 次
국문초록 ⅰ
목차 ⅳ
Ⅰ. 서론 1
1. 문제제기 1
2. 연구목적 및 방법 6
Ⅱ. 레비나스 ‘他者倫理’의 윤리학적 배경 13
1. 레비나스 ‘他者倫理’의 이론적 배경 13
1) 레비나스 사상의 형성과정 13
2) 유대 종교와 서구철학의 만남 18
2. 현상학의 비판적 수용 22
1) 후설현상학의 자아론 25
2)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세계관 31
3) 사르트르의 적대적 타인관 38
3. 全體性의 한계와 無限의 이념 44
1) 전체성과 同一性의 억압 45
2) 무한의 이념과 타자로의 초월성 48
4. 第一哲學으로서 윤리학 59
1) 존재론적 형이상학 비판 59
2) 윤리적 형이상학으로의 전환 63
Ⅲ. 享有的 자아의 內面性 67
1. 享有의 누림 68
2. 향유적 자아와 感性 73
1) 감성의 의미 73
2) 향유적 자아의 自我性 77
3. 자아의 내면성과 집 79
1) 몸 79
2) 노동과 소유 81
3) 집의 안온함 84
Ⅳ. 他人과의 만남과 多元性의 수용 88
1. 타인의 顯現 89
1) 타인의 얼굴 89
2) 타인의 根源的 倫理語 94
2. 대화의 윤리적 相互主觀性 97
1) 언어의 사회성 98
2) ‘마주보는 만남’의 윤리 102
3) 대화의 윤리성 106
3. 나와 타자의 다원성의 윤리 111
1) 나와 타자의 倫理的 非對稱性 111
2) 나와 타자의 다원성 116
Ⅴ. 他者性 윤리의 구성 122
1. 윤리적 자아의 타자에 대한 도덕적 책임 122
1) 시간의 通時性과 책임의 근원 122
2) 감성적 受動性과 타자로 향한 자아 126
3) 윤리적 자아의 타자를 위한 책임 133
2. 자아와 타자의 윤리적 관계 141
1) 사랑의 二元的 관계 141
2) 出産과 무한한 타자와의 관계 146
3) 효와 자애, 우애의 공동체 150
Ⅵ. 레비나스 ‘他者倫理’의 도덕?윤리교육적 적용 156
1. 타자윤리에서 본 인지론적 도덕교육의 한계 156
1) 도덕성 발달원리로서 합리적 추론의 한계 156
2) 도덕성 발달목표로서 자율성의 한계 165
2. 피교육자의 정체성으로서 ‘倫理的 自我’의 형성 173
1) 피교육자의 자기이해와 정체성의 관계 173
2) 피교육자의 ‘윤리적 자아’의 확립 176
3. 他者受容의 다원적 관계 180
1) 가정생활에서 타자수용: 부모-자녀, 형제?자매의 관계 181
2) 학교생활에서 타자수용: 교사-학생, 급우간의 관계 184
3) 사회생활에서의 타자수용: 아는 사람 또는 모르는 사람과의 관계 188
4) 국제관계에서의 타자수용: 국가간의 관계 190
Ⅶ. 결론 194
참고문헌 201
Abstract 213
1. 서론
1. 문제제기
우리는 지금 과학 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시대에 살고 있다. 과학과 기술은 지난 2세기 동안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여 인간에게 많은 혜택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근대 이후 인류가 과학?기술에 관한 윤리적인 반성을 배제하면서부터 인류에게 엄청난 재난이 다가왔고, 특히 인간의 윤리의식도 큰 타격을 받았다. 기술 그 자체는 자기반성과 절제를 모른다. 그래서 기술의 발전은 지구의 중요한 자원을 급속하게 소모시키며 마침내는 자연파괴와 가공할 공해를 초래하였다.1) 그 뿐만 아니라 오늘날 첨단과학은 모든 삶의 비밀스런 것들, 신비로 남아 있어야 할 것들을 마구 들춰내고 있고, 과학에 대한 맹신주의는 ‘증명할 수 없고, 합리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것들’을 거부하게 되어, 급기야 脫形而上學(postmetaphysics), 형이상학의 종말2)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물질적 삶이 풍요로워질수록 인간들의 삶은 점점 더 황폐해져 간다. 물질만능적이고 도구화된 합리성에 젖어 있는 현대인에게 판단의 준거점은 경제적 이익이나 이기심으로 제한되고, 인간 자신들까지도 도구화되어 간다. 이제 인간들은 점점 형이상학적 지평을 상실하고, 점점 근시안적으로 되고 있다. 그래서 대체할 수 없는 인간생명의 존엄성이 달린 뇌사나 장기이식과 같은 생의학적 문제는 장기의 실험적 이식에 관심이 많은 의료종사자의 의견이 결정적이고, 시시때때로 접하는 북한 난민과 기아에 관한 문제에서도 윤리적 시선보다는 정치의 논리가 우선한다.
현대의 윤리적 위기상황에 대해서 철학적 인간학자인 겔렌(Arnold Gehlen)은 회복이 어려울 정도로 심각한 것으로 보고 있다. 현대문명의 심각한 위기를 감지하면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의 반응은 무질(Robert Musil)이 지적한 것처럼 “되는대로 내버려둠(gewahren lassen)”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현대기술문명의 위기는 이제 방관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인류는 인간의 이성이 고려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까지 책임을 져야 하며, 이같은 책임에는 모든 인류가 관련된다. 데리(T. Dery)가 말하였던 것처럼, “개개인은 일어났던 것, 사건에 선행하였던 일이나 그에 追隨하는 것에 대해 함께 책임져야 한다.” 3)
사실상 학으로서의 윤리학은 현재 분기점에 놓여 있다. 당위의 학인 윤리학이 이 모든 사태에 대해서 적절한 방향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학으로서의 고유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것이고, 동시에 존재의미를 상실할 것이다. 반면 당면한 인류의 위기에서 구속력 있는 요청을 제시할 수 있다면, 윤리학은 학으로서의 자기의 위상을 재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류의 미래에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윤리적 요청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혼란 속에 있다. 누구도 어디로부터 착수하고, 누구를 상대로 싸워야 할지를 아직 확실히 모르고 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점에서 대략 일치된 견해를 갖고 있다고 하겠다. 가치와 규범에 근거를 주기 위한 시도인 종래의 도덕이론이 이미 오늘날의 인간의 삶과는 일치되지 않고 있다는 것과 또 그 시도는 전통적인 철학체계의 도식에 구속을 받지 않아야 하고 인간의 본질과 상태에 대한 새로운 오리엔테이션 속에서 기초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4)
이같은 관점에서 우리는 근대적 패러다임은 더 이상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본다. 윤리학의 근대적 패러다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相互性(reciprocite)의 원칙에 입각한 이성을 중심으로한 권리-의무의 패러다임이라고 볼 수 있다. 권리-의무의 패러다임에 내포된 궁극적 의미는 주고받는 상호계약적 거래관계의 틀 안으로 윤리를 끌어들이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도덕적 고려의 범위, 도덕 공동체의 범위에서 권리의 담지자와 의무의 담지자를 전제로 한 것이고, 결국 권리-의무의 주체가 될 수 있는 대상만을 윤리적 고려의 대상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이 경우 필연적으로 이성을 지닌 성인만을 고려하는 제한적 윤리로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윤리공동체의 범위를 이와 같이 권리-의무를 수행할 수 있는 이성적 주체로 제한하는 것은 변화된 시대적 요청에 더 이상 적절하지 못하다. 현재 환경윤리에서는 대지윤리, 동물권, 식물권, 미래세대의 권리 등으로 확대되는 탈인간중심적 윤리의 요청이 있고, 생명윤리에서도 성숙한 사람뿐만 아니라 태아, 소아, 미성년자, 의식불명자, 뇌사자 등에 대한 윤리적 고려가 요청되고, 핵절멸의 위협은 인류에게 무조건적 화해와 평화를 요구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이성적 주체를 중심으로한 권리-의무의 제한된 윤리적 지평의 범위 안에서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들이다. 그렇다면 이성적 주체를 전제로한 상호성의 근대윤리 이후에 새로이 요청되는 윤리이론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이성적 주체만을 고려하는 상호성의 윤리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단기적 계산이나 나의 삶 안에서는 어떤 이익이 없을지라도, 넓게 보고 베풀 줄 아는 慈悲의 윤리이어야 한다. 그리고 주변의 약한 자를 돌아볼 줄 알고, 配慮할 수 있어야 하며, 윤리적 현상에 대해 민감히 반응할 수 있는 도덕감이 있어야 한다.
이같은 관점에서 볼 때, 현대윤리를 주도해 온 서구인의 합리성과 이성중심의 自我論的 존재윤리를 반성하고, 새로운 他者倫理를 정초하려는 레비나스의 시도는 본 논문의 요구에 매우 적실 하다. 레비나스는 오늘날 철학과 과학으로부터 빚어진 윤리학의 위기로부터 새로운 윤리학을 정초하는 것을 자신의 소명으로 삼고 있다. 그는 합리성과 이성을 말하는 서구 문화에서 어떻게 이렇게 오늘날의 비이성적인 사태5)가 벌어질 수 있는가에 대하여 묻는다. 이런 출발점에서 레비나스는 서구인의 인간이해, 나아가 자아와 타자의 관계가 애초부터 잘못 설정되어 있다는 점을 깨닫는다. 레비나스가 존재론적 전통에서 경계하는 것은 파르메니데스이래 하이데거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나타나는 一元論的 傳統이 가져올 수 있는 폭력성의 위험이다. 이같은 전통은 헤겔의 변증법적 관념철학이나 하이데거의 同一性의 철학에서 정점에 이른다.6) 변증법적 관념론은 필연적으로 개체의 고유성과 단독성을 말살하면서 倫理學의 不在상태를 초래하고, 동일성의 철학은 자아중심으로 타자를 자기화하면서 필연적으로 타자에게 폭력적으로 나타난다. 이같은 형태의 철학적 사유는 자아중심의 의식철학안에서는 심각한 문제로 제기되지 않을지라도, 자아와 타인의 관계에서 특히 윤리적 관계에서는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왜냐하면 자아의 자기화, 동화 과정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적대적이고 폭력적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같은 문제의식에서 레비나스는 서구인들이 자아중심으로 인간본질을 탐구하는 것을 자아론(自我論, egologie)으로 비판하면서, 이제 자아론으로부터 타자와의 관계중심으로 윤리이론을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레비나스는 자아와 타자의 관계는 타자의 외재성을 자아안으로 동화하거나 통합하는 관계 또는 表象의 관계가 아니라, 타자의 절대적 다름인 他者性(alterite)을 보존하는 관계로 본다. 그런데 절대적 다름인 타자성을 보존하는 거리와 분리가 확립될지라도, 이들의 관계는 유아론에 빠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은 형이상학적 熱望(besoin)7)을 갖고 타자에게로 향하는 초월8)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레비나스는 자아와 타자의 초월적 관계야말로 윤리적 관계이자 형이상학적 관계9)로 본다. 그러므로 레비나스는 형이상학의 해체로부터 가중된 현대 윤리학의 위기에서 ‘形而上學(metaphysique)의 재건’을 선언한다. 그러나 레비나스에게서 형이상학은 더 이상 전통적인 존재론의 범주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윤리학으로서의 형이상학이다. 存在論이 존재에 관한 탐구라면, 형이상학은 ‘마땅히 존재해야 할 것들’ 즉 ‘존재보다 善한 것’에 대한 탐구를 내용으로 한다.
이제까지 윤리적 주체는 인식론적 주체의 능동성, 자기원인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은 능동적 인식자이기에 앞서 우선 外在性(exteriorite)에 영향받는 감성적인 수동적 존재이다. 이같은 관점에서 레비나스는 타자를 자기화 하는 동일성의 철학으로부터 타자의 타자성(alterite)10)을 인정하는 주체의 발견으로 윤리학적 발상의 대전환을 가져오고 있다.
2. 연구목적 및 방법
본 논문은 자아와 타자사이의 윤리적 관계를 중심내용으로 하는 레비나스의 ‘타자윤리’를 고찰하고자 한다. 본 논문은 레비나스 사상이 등장할 수밖에 없었던 사상적 맥락을 살펴보고, 독창적인 그의 사상 중에서도 특히 타자윤리학의 구성에 필수적인 자아의 內面性 형성의 원리와 의미, 타자와의 만남의 윤리적 의미와 더불어 多元性의 원리, 그리고 倫理的 自我의 타자에 대한 도덕적 책임과 타자성의 윤리적 관계형태로 사랑, 출산, 효, 자애, 우애, 연대성 등의 의미를 연구한다. 그리고 끝으로 타자윤리를 도덕?윤리과에 적용하여, 현행 도덕?윤리과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시사하는 내용들을 살펴본다.
본 논문의 연구방법은 전체적으로는 레비나스의 주저11)를 바탕으로 하고, 2차문헌들은 레비나스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자료를 참고로 읽어 가는 문헌중심의 연구이다.12) 그리고 세부적으로는 현상학적 방법을 통해서 현상학적 철학의 한계를 넘어서는 레비나스의 현상학적 방법과 철학적 인간학의 방법중에서 “인간 삶의 개별현상의 인간학적인 해석의 원리”13)의 방법을 함께 사용한다. 그래서 현상학의 지향적 분석방법을 통해 윤리현상의 새로운 지평을 밝혀내는 동시에, 인간학적인 해석의 원리를 통해 인간의 고유한 개별적 현상들 즉 고통, 타자성의 경험, 시간의 의미, 효와 자애 등의 윤리적 의미를 묻게 될 것이다.
본 논문의 Ⅱ장은 타자윤리의 윤리학적 배경을 중심으로 한다. 구체적 내용으로는, 레비나스 윤리학의 기본입장인 제일철학으로서의 윤리학, 근대철학의 토양에서 배제되었던 無限 理念의 회복, 그리고 타자의 다름? 타자성? 他律性(heteronomie)을 인정하게 되는 자아와 타자의 윤리적 관계 등이다.
레비나스에서 주체에 대한 타자14)는 주체의 외재성(exteriorite)을 구성하는 영역이다. 주체의 외재성15)으로 나타나는 것은 대상적 사물의 세계와 단순한 대상적 사물과는 구분되는 다른 사람 즉 타인(autrui)으로서의 타자의 영역, 그리고 인간과의 관계를 넘어서는 무한한 타자와의 관계 등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본 논문의 Ⅲ.Ⅳ.Ⅴ장은 이와 같은 타자에 대한 개념 구분을 중심으로 주체와 외재성(타자) 사이의 관계구조를 살펴본다. 즉 Ⅲ.향유적 자아의 內面性(주체와 대상세계와의 관계), Ⅳ.타인과의 만남과 다원성의 수용 (주체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 Ⅴ.타자성 윤리의 구성(주체와 무한한 타자와의 관계)으로 구분하여 논할 것이다. 그리고 Ⅵ장은 타자윤리의 도덕?윤리과 교육에의 적용가능성을 살펴보고, Ⅶ장의 결론 부분에서는 본론의 요약과 더불어 레비나스 타자윤리의 한계와 본 논문의 한계점을 간단하게 살펴본다.
본문의 내용전개에서, Ⅲ장 「향유적 자아의 내면성」에서는 레비나스가 왜 인간을 享有와 감성의 존재로 보는지, 자아와 대상세계의 관계를 향유로 놓을 때 인간에 대한 이해와 세계에 대한 해석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그리고 향유적 자아와 인간의 내면성의 관계가 무엇인가를 살펴 볼 것이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내면성은 윤리적 관점에서는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왔다. 왜냐하면 자아의 내면성의 확대는 타자의 내면성을 자기화 하는 것, 나의 생명의 지속을 위하여 나와 똑같이 지속을 시도하는 타자의 생명을 손상시킬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인간이 자기를 지탱하려는 내면성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인간의 한계이며, 비극으로 이해되어 왔다.16) 그러나 레비나스에게서 인간의 내면성을 통한 타자로부터의 분리는 바로 윤리적 관계 형성을 위한 전제조건이다. 왜냐하면 자아가 향유적 감성의 내면성에 의해 타자로부터 분리될 때, 타자는 자아의 동화나 통합으로부터 자기를 보존하는 거리를 유지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Ⅲ.享有的 自我의 內面性의 부분에서는 인간이 세계 안에서 자신의 내면성을 지닌다는 것의 의미를 살펴볼 것이다. 자아의 내면성은 내적으로는 향유적 자아의 감성으로 나타나며, 외적으로는 세계안의 주거의 형태로 나타난다. 향유적 자아로서의 인간은 맛보고, 영양을 섭취하고, 산책하고, 행복과 고통을 느끼는 심리학적 존재이다. 그리고 세계안에 자신의 편안한 둥지를 트는 존재로서 인간은 집을 짓고, 보다 완전한 내일을 위해 노동하며, 자신의 살림살이를 꾸려간다.17) 이와같은 내면성의 형성이야말로 자아와 타자를 분리시키는 동시에 인간존재의 독립을 가능하게 해준다.
Ⅳ장 「타인과의 만남과 多元性의 수용」에서는 자신의 내면성을 통해 세계로부터 분리와 독립을 확보하는 자아중심적 자아가 어떻게 타인과 윤리적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가를 살펴 볼 것이다. 이같은 문제에서 레비나스는 인간존재를 안으로 향한 존재인 동시에 밖으로 향한 존재로 설명하면서 접근한다. 인간이 밖으로 향한 존재임을 설명해 주는 중요한 요소는 인간이 ‘몸(신체)적 존재’이자 ‘말하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몸적 존재로서 인간은 자기만족을 구하는 내재적이고 향유적인 자아인 동시에, 몸을 통해 외부로 노출되어진다. 이 말은 인간이 밖으로 노출되어져 타자로부터 영향받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인간의 이와 같은 측면이 윤리현상의 설명에 어떤 중요성을 띠는가? 이 문제는 윤리학이 오랫동안 받아온 難問과도 연결된다. 타자의 고통과 호소에 대한 윤리적 배려를 거부하는 이들은 오래 전부터 “나와 어떤 관계도 없는 그 사람이 헐벗고, 굶주리거나 박해를 당하는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인가?”고 변명해왔다. 이 말은 근대인의 철학적 언어로 바꾸면 다음과 같다. “설령 그가 苦痛을 呼訴한다고 할지라도, 나의 이성이 인식하기를 거부하는, 즉 나의 이성적인 선험적 자아의 지향적 의식이 의식의 대상으로 삼기를 거부한다면, 그의 고통이 나와 무슨 상관인가?” 이와 같이 타자의 호소와 요청에 대한 주체의 수동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의 입장을 레비나스는 “내가 동생의 파수꾼인가?”18)고 반문하는 카인의 말에 비유한다. 윤리적 호소의 근본적인 수용가능성을 거부하는 당혹스런 반문에 대하여, 레비나스는 인간이 몸적 존재라는 사실을 통해,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자명한 사실을 보여준다. 레비나스는 이것을 어떤 ‘受動性보다도 더 受動的인’ 존재의 차원으로 설명한다. 인간존재의 근원적 차원의 조명은 자아와 타인의 관계구조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온다.
자아와 타인의 윤리적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레비나스는 타인의 존재 방식을 되묻는다. 그리고 타인은 자아의 인식대상인 現象(l'phenomene)이 아니라, 顯現(l'epiphanie)19)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타인을 현상이 아니라 현현으로 구분할 때, 타인에 대한 이해에서 달라지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타인과 자아의 윤리적 관계에서 타자중심성을 확보할 수 있게 해준다. 뿐만 아니라, 레비나스가 제시하는 윤리의 비대칭의 相互主觀性을 정초 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Ⅳ장에서 논자는 이같은 기본적인 개념적 구도를 바탕으로 하여, 자아와 타인의 윤리적 관계가 어떻게 설정되고 논해지는가를 살펴본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타인의 얼굴이 현현하는 根源的인 倫理語의 의미, 마주보기의 만남에서 형성되는 구체성의 윤리, 對話(dialogue)에서 특히 ‘말하기’를 통해 조명되는 윤리성의 의미를 논한다. 그리고 2자적 관계인 對面的인 만남의 윤리로부터 제3자에게로까지 윤리의 적용이 확대되어 가는 이치, 나와 타자사이의 윤리적 상호주관성으로서 비대칭성(asymmetrie)의 의미와 비대칭적 무한의 윤리가 어떻게 제3자 즉 모르는 사람에게로까지 확장되어 갈 수 있는가와 나와 타자의 윤리적 관계에서 형성되는 다원성의 의미 등을 논할 것이다.
Ⅴ장 「타자성 윤리의 구성」에서는 윤리적 자아의 도덕적 책임을 중심으로 레비나스가 어떻게 고유한 主體性으로 윤리적 주체성을 구성하는가를 살펴본다. 레비나스는 他者에 대한 道德的 責任의 근원을 자기책임이나 自律性(autonomie)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통시성이 보여주는 타자의 痕迹이나 他律性(heteronomie)에서 찾는다. 이같은 논리는 타자가 겪는 불행이 나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닐지라도, 우리자신이 타자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무엇보다도 몸적 존재, 감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타자로부터 영향받을 수 있고, 타자의 고통을 수용할 수 있고, 상처받을 수 있다. 이같은 의미의 인간존재는 타자에게 사로잡히고, 타자에게 지명당한 존재로, 타자에게 무관심하고 냉정할 수 없이 ‘자기안에 타자의 자리(동일자안의 타자, l'autre dans le meme)’를 마련하는 존재이자 타자를 가까이20) 느끼는 존재이다. 그래서 타자의 불행에 냉담할 수 없이, 나와 무관한 타자의 고통에 대해서까지 책임을 지는 존재가 바로 윤리적 자아인 것으로, 이같은 의미의 자아를 레비나스는 代贖21)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그런데 자아와 無限한 他者性의 관계는 단순히 인간과 인간의 윤리적 관계를 넘어서는 관계로 확대된다. 이같은 관계는 사랑의 二元的 관계, 出産(fecondite)의 관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형제의 관계 등으로 구체화된다. 논자는 타자의 다름 · 타자성을 수용하는 인간관계가 무한한 타자성의 관계로 확대되는 이치를 Ⅴ장안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Ⅵ장에서는 타자윤리가 도덕?윤리 교육에 어떻게 적용가능한가의 문제를 살펴본다. 구체적으로 인지론적 도덕교육에서 주장하는 도덕성발달원리인 합리적 추론형식을 타자윤리에서 주장하는 감성의 원리와 비교해 볼 것이며, 도덕성발달목표인 자율성을 타자윤리에서 주장하는 他律性의 원리와 비교해 볼 것이다.22) 그리고 도덕?윤리과의 개인윤리 수준에서 피교육자의 윤리적 정체성 형성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타자윤리의 ‘윤리적 자아’의 내용을 적용해본다. 그 다음, 일상생활에서 타자수용의 원리를 적용시키는 방법으로 가정생활에서의 타자수용으로 부모-자녀, 형제-자매의 관계, 학교생활에서 타자수용의 원리로 교사-학생, 친구간 관계, 사회생활에서 타자를 수용한 아는 사람과의 관계형태와 모르는 사람과의 관계형태, 국제관계에서 타자를 수용한 국가간 관계형태 등을 살펴볼 것이다.
끝으로 결론에서는 본 논문의 전체적 내용의 정리와 더불어 레비나스 이론의 한계와 본 논문이 지닌 한계를 간단히 지적하면서 마무리할 것이다.
Ⅱ. 레비나스 ‘他者倫理’의 윤리학적 배경
1.레비나스 타자윤리의 이론적 배경
1) 레비나스 사상의 형성과정
우리가 레비나스의 사상이 현대사상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레비나스의 사상을 형성하게 된 지적 토양의 다문화적 요소이다. 레비나스는 러시아 리투아니아의 카우나스의 독실한 종교적 분위기의 유태교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러시아 언어와 문학을 접할 수 있었다. 이후 18세에 프랑스로 이주해 대학을 다녔고, 24세에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같은 해에 프랑스로 귀화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레비나스는 그 혈통과 출생과 교육과 삶이 그 누구보다도 다채롭기 때문에, 그 만큼 그의 사상 안에는 서구전통에서 배태되기 어려운 풍부함이 있고, 그 누구보다도 서구철학에 대해 비판적 거리를 가질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에게는 유대교적 사상, 러시아적 문학의 감수성, 프랑스 철학의 명철함, 독일 현상학의 정수 등의 지적토양이 철학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 새로운 사상의 방향을 제시해 주는 영감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여진다.
레비나스가 여러 저서에서 도스토예프스키(Dostoyevsky)를 인용하여23) 자아와 타자의 비대칭적 책임 윤리를 설명하는 것은 어린 시절에 접한 러시아 문학의 영향을 보여주는 예이다. 러시아 문학의 감수성은 서구철학의 사유방식에 새로운 영감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같은 영향은 동시에 그로 하여금 철학의 문제를 인간의 문제, 구체적인 삶의 의미에 대한 물음과 별개의 것이 아님을 자각하도록 해 주었다.
프랑스로 이주한 이후, 레비나스는 스트라스부르크(Strasbourg)대학에서 고전철학, 현대철학, 심리학 그리고 관념철학 등을 전공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홀바흐(Maurice Halbwachs) 등의 스승 밑에서 프랑스 학문의 지성과 성실성과 명료함과 우아함에 접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레비나스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테카르트주의자들, 칸트 등을 수학하였다. 이밖에 레비나스는 뒤르케임과 베르그송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면 이들 사상가들과 레비나스와의 사상적 교류를 중심으로, 레비나스의 윤리학의 이론적 배경을 살펴보자.
플라톤 철학에 대한 현대철학의 지속적인 공격과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에 대하여, 『전체성과 무한』은 형이상학의 재건과 플라톤 철학의 심오한 통찰을 복원시키고자 한다. 플라톤의 ‘선의 이데아로 향한 에로스의 무한한 충동, 열망의 움직임’의 이념은 레비나스의 무한의 이념에 대한 열망,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열망, 타자로 나가는 움직임, 타자로의 초월성의 개념으로 되살려진다. 레비나스는 형이상학을 ‘존재보다 선한 것’, 존재의 영역을 넘어서는 사유의 초월적 운동으로 표현한다. 그에 따르면 모든 사유와 존재가 향하는 궁극적인 것은 존재나 존재자들의 전체와 일치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탄생과 성장, 쇠퇴의 계기를 부여해 주는 것이다. 궁극적인 것은 자기 자신을 존재의 지평으로 제한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궁극적인 것의 의미를 듣고, 전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초월성, 피안(Beyond)이 요구된다.24)
레비나스는 뒤르케임(Durkheim)을 경험적 사회학과 합리적 사회학의 창시자일 뿐만 아니라 형이상학자로 보고 있다. 그는 뒤르케임이 사회를 영적인 질서 즉 ‘집합적 표상’으로 본 것을 인간의 개인적 삶에 새로운 정신적 차원을 열어 준 것으로 평가한다.25) 뒤르케임은 교육학에서는 도덕규범의 사회화(Socialization)와 교사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레비나스가 뒤르케임의 교육이론을 직접적으로 인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교사와 학생 사이에 형성되는 교육을 자아와 타자 사이에서 무한성의 이념을 전해 주는 계기로, 즉 자아 안에 있지 않은 타자적인 것을 심어주는 과정으로 본 점은 뒤르케임 교육이론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시사한다.
레비나스는 그 밖에도 베르그송(Bergson)의 ‘지속 이론(The theory of duration)’의 탁월성을 지적한다. 그는 베르그송의 ‘기계적인 직선적 시간의 우선성 파괴’가 없었다면, 하이데거가 현존재의 유한한 시간성의 개념을 생각해 내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26) 베르그송의 철학은 특히 현상으로부터 해방된 새로운 존재의 정신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된다. 27)
우리가 레비나스의 박사논문이 훗설현상학 이론에 관한 것이었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그와 훗설현상학의 연관성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레비나스는 ‘우리가 철학을 통해 연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직접적으로 보여준 이는 누구보다도 훗설이었다’고 말한다.28) 그는 훗설의 철학적 작업을 독단의 체계에 갇힘이 없이 또는 혼란스런 직관에 사로잡힐 위험 없이 작업할 가능성을 보여준 것으로 평가한다. 이같이 레비나스를 매료시킨 훗설의 논문은 “엄밀학으로서의 철학”29)이었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자신이 훗설로부터 세계나 세계구성에 관한 이론보다는 가치론적 지향성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강조한다.30) 그는 가치의 특성은 지식에 의해 변형된 존재자들에 부수되는 것이 아니라, 비이론적 지향성의 특수한 태도에서 오는 것임을 강조한다. 이같은 점에서 레비나스는 훗설 철학이 윤리적 문제나 타자와의 관계에 대해 논했던 것을 넘어서 발전해 갈 가능성을 본다.31)
훗설현상학에의 입문은 레비나스에게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다. 레비나스는 1930년 현상학의 기초개념에 관한 내용을 다룬 “훗설현상학에서의 직관이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이후 훗설보다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 심취하였고,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하이데거의 강의를 경청하였으며(1928-9), 훗설 이해에 있어서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훗설의 의식에 관한 현상학보다는 하이데거의 실존적 존재론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32)
레비나스는 철학사에서 가장 탁월한 책들중의 하나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거명할 정도로 하이데거의 철학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33) 그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존재론’으로 존재하는 것에 대한 이해라고 본다. 그의 논문 “훗설현상학에서의 직관이론”은 존재자의 본질보다 존재자의 위상에 관한 문제 즉 존재의 존재론적 문제를 다루고 있는 만큼 『존재와 시간』의 영향을 받고 있다.
레비나스는 하이데거의 염려, 죽음을 향한 존재, 불안의 분석 등을 현상학의 최상의 작업으로 평가한다. 특히 그는 인간의 본질이 아니라, 인간존재, 실존을 기술하려는 하이데거의 시도를 높이 평가한다. 그 뿐만 아니라, 현상학적 방법의 정수를 정서, 처지성(Befindlichkeit), 불안 등에 관한 분석으로 볼 정도로 하이데거를 높이 평가한다. 레비나스는 하이데거가 이론적 단계를 거쳐 무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불안 속에서, 직접적이고 환원할 수 없는 접근으로부터 무에 도달하고 있음을 지적한다.34) 그는 유한성, 현존재, 죽음을 향한 존재 등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존재와 시간』을 존재론의 모범으로 본다. 35)
그러나 레비나스는 하이데거의 후기 작품은 실망스런 것으로 평가한다. 그는 하이데거가 후기에 집중하고 있는 휠더린(Holderlin)의 시나 어원학(etymology)의 분석을 통해 언어의 예지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언어이론에서 말해진 것(the Said, le dit)은 말하기(the Saying, le dire)만큼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레비나스에게 말하기는 정보적 의미보다는 말하기의 행위 자체가 발화자에게 다가가서 말을 거는 행위이기 때문에 의미 있다.36) 우리는 이에 대한 내용을 앞으로 Ⅳ장.‘대화의 윤리성’에서 논하게 된다.
이후 레비나스는 자신의 현상학이라 할 『존재에서 존재자로』라는 소책자를 발간하였다. 책제목이 말해 주는 바와 같이, 이 책은 하이데거의 철학적 기획의 전도를 선언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 책은 레비나스의 방법에 익숙하지 않은 당시에는 난해한 것으로 여겨져 널리 알려지지 못하였다. 박사학위 취득이후에도, 레비나스는 장 발(Jean Wahl)이나 마르셀(Gabriel Marcel)37) 등과의 교류가 있었지만, 여전히 학계의 주변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후 그의 논문 “존재론은 근본적인가?”는 하이데거 사상에 대한 비판적 해석과, 새로운 사상의 방향을 제시해 주었으며, “자유와 명령” “자아와 총체성”은 『전체성과 무한』38)을 예비해 주었다. 그리고 “철학과 무한의 이념”은 『전체성과 무한』의 좌표를 제시해 주는 논문이었다. 1961년 발간된 『전체성과 무한』은 서구철학의 존재론적 자아론을 극복하면서, 자아와 타자의 윤리적 관계를 형성하려는 시도로서, 레비나스에게 세계적 명성을 가져다주었다. 『전체성과 무한』은 레비나스를 세계적인 도덕철학자로 만들어 주었고, 『존재와 다른 것 또는 존재사건 저편』은 그의 사상의 심오함을 더해 주었다.
레비나스는 후기 저작에 속하는 『타인의 인간주의』와 『존재와 다른 것 또는 존재사건 저편』에서 주체의 주체성, 즉 주체가 주체로서 정립되는 모습을 더욱더 급진적으로 밀고 나아간다. 여기서 레비나스는 자유를 근거로 도덕적 책임을 근거지운 칸트와 정반대로, ‘자유에 앞선’ 다시 말해 나의 자율과 능동적 행위에 앞서 나에게 부과된 책임의 의미를 드러내고자 한다. 이런 책임을 그는 ‘人質’, ‘代贖’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대속은 타인을 대신해서 자율적으로 짐을 짊어지는 능동성을 가리키기보다는 ‘타인의 자리에 놓이는 수동성’을 가리킨다. 주체가 짊어지는 수동성은 ‘수동성보다 더 수동적인 수동성’, 즉 타인을 위해 고통받는 수동성(la passivite)이다. 타인을 위해, 타인아래서, 타인의 짐을 짊어지는 수동적, 윤리적 주체는 타인 아래 종속되어 타인을 아래서 떠받쳐 줌으로써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이런 주체의 모습을 레비나스는 유대교에 관한 그의 책에서 ‘메시아’로 비유한다. 39)
2)유대적 종교와 서구철학의 만남
우리가 레비나스 사상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 중의 하나는 그의 윤리학에 부단한 영감을 제공해 준 유대교의 탈무드의 지혜와 예언적 말씀이다. 깁스(R. Gibbs)가 지적한 바와 같이, 레비나스는 유대적 사유로부터 철학의 새로운 근원을 찾고자 한다.40) 레비나스는 그의 철학이 성경의 사유방식과 철학적 사유방식을 조화시키고자 하는 것인지에 대한 물음에 대해, 오히려 이들이 조화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하여 반문한다. 성경과 그에 대한 고대 랍비들의 사색을 담은 전통적인 주석서들에 대해 경외심을 갖고 있는 레비나스는 두 전통은 조화나 화해의 문제가 아니지만, 만일 조화를 이룬다면 모든 철학적 사유들이 철학이전의 경험에 의존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한다.41)
레비나스는 서구철학의 근원인 그리이스적인 것에 대하여 세 가지 특징을 지적한다. 그가 말하는 그리이스적인 것의 세 가지 특징은 첫째, 보편적 규칙과 정치적 국가를 지향하는 점, 둘째, 지에 대한 사랑 특히 윤리와 무관한 방식에서 알려는 열망과 모든 인식을 자기의식에로 돌리는 나르시시즘, 셋째, 수사학적 언어이다. 레비나스는 이 세 가지 특징 중에서 수사학적 언어의 장점은 현대인이 주목해야할 장점으로 보지만, 나머지 두 가지 특징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다. 42)
그리이스적인 것으로 보편성의 추구와 나르시시즘(le narcissisme)은 밀접히 연결된다. 만일 그리이스적인 것이 전체주의적 국가의 정치학과 개체를 파괴하는 보편주의를 표현한다면, 그리이스적인 것은 인식의 양식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타자를 동화시키는 관계이다. 그래서 타자에 대한 그리이스적 정복은 자아가 아니라 타자를 협박한다. 보편적인 것은 자아의 방식, 나의 방식이 되며, 모든 것을 자신에게로 복종시키게 된다. 레비나스는 오디세우스를 아브라함에 비교한다. 오디세우스(Odysseus)는 자신에게로 돌아오기 위하여 미지로 떠나는 사람이지만 아브라함(Abraham)은 새롭고 낯선 장소(etrangete)로 인도하기 위하여 떠나는 사람이다. 레비나스는 서구철학을 근본적으로 오디세우스와 같이 자기에게로 돌아오는 사유로 본다. 서구적 사유안에서 타자적 경험은 자아의 인식안으로 환원된다. 그는 의식의 자기 도취적 순환이 서구철학의 본질이라고 본다.43)
레비나스는 윤리학을 제일철학으로 고양하면서, 냉혹한 역사의 심판44)을 윤리의 심판으로 전도시킨다. 이것은 국가의 정치적 폭력에 대한 비판과 관련된 것으로, 그는 정치학을 윤리학에 의해 계도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무엇보다도 그리이스적인 것에서 유래하는 서구적 전통에 대한 비판은 정치학과 힘을 궁극적인 것으로 평가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보편성의 추구가 개체와 개체들의 다양한 도덕적 기호를 하나의 익명적 규칙 아래 종속시키게 되는 점을 비판한다.45) 이에 대하여 레비나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보편성을 향하도록 하는 힘은 무엇인가? 그것은 여러 신념들의 다양성에 직면하면서도 모든 것을 포함하는 하나의 일관된 담론, 즉 보편적 질서를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이 정확하게 서구철학의 운명이며, 그 논리는 자기 자신을 조건으로 삼는다. 진리의 완전한 표현은 보편적 국가의 구성과 일치한다. 46)
레비나스는 인용문에서 보여주는 그리이스적 보편성을 거부한다. 그는 이같은 논리가 개체를 희생하고 보편을 형성하는 것으로 비판한다. 다음의 인용문은 레비나스의 주장을 더욱 강화시켜 준다.
정치적 삶이 인간성의 변증법적 조정으로 보이지 않고, 폭력과 바보스러움의 지옥과 같은 사이클로 보이는 계기를 가정해 보라. 너가 정치학의 의미를 상실하는 경우를 가정하라. 그때 세계정치학의 무의미와 무가치가 분명해질 것이다. 너는 다른 사람들의 외부에 있는 사람으로, 분리되어 체류하는 사람이고, 사람으로 취급되지 않는 사람이다. 너가 유랑인일 수 있고, 국외자일 수 있고, 홀로 버려질 수 있다는 것을 가정한다면, 너는 보편성에 대하여 다른 시각을 가질 것이다. 47)
우리는 이 인용문을 통해 레비나스가 유대인 학살의 경험뿐만 아니라, 생존자의 절망48)을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레비나스는 법과 제도의 외부에서 철저히 보호받지 못하는 경우에 인간들에게 무엇이 남는지를 묻는다. 그때 인간들은 철저히 인간의 도덕성에 의존하게 된다. 레비나스는 보편성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개체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획일적 보편성을 거부하는 것이다.
인종학살과 같은 인간성의 막다른 골목에서, 레비나스가 새롭게 추구되어야 할 것으로 제시하는 보편성은 히브리적 보편성이다. 그것은 고유한 타인에 대해 나의 고유한 책임을 구속시킨다. 나 자신만이 도덕적 행위를 할 수 있다. 나는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 대해 구속되어 있으며, 다른 그 누구도 아닌 고유하고 대신될 수 없는 바로 나 자신이 그 의무를 지고 있다. 이같은 관계는 나에게 봉사를 요구한다. 나와 타자의 관계는 추상적 규범의 규칙에 대한 복종으로 나가지 않고, 개개의 사람을 초대하고 배려하고 수용하도록 한다. 49)
2. 현상학의 비판적 수용
앞에서 레비나스의 지적배경과 위상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그가 그리이스적인 서구철학에 대하여 획일적 보편성을 추구하는 것으로 비판함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이와 같은 사상적 경향이 근대 이후의 현상학적 철학의 전통에서도 재현됨을 발견한다. 그러면 이제 왜 현상학을 문제삼는지, 그리고 어떻게 현상학적 철학을 비판적으로 극복해 가는지, 현상학적 철학의 기초이론과 이에 대한 레비나스의 논의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인식론적 측면에서 보면 근세 이후의 서양 철학에서는 二分法的(dichotomisch)인 사고방식이 큰 주류를 이루고 있다. 또 데카르트의 정신과 물질의 구분도 그러하다.50) 이러한 서양 근세 이후의 이분법적 사고방식이 자연탐구에 적용될 때 인식하는 주체와 인식되는 대상은 분리된다. 주관과 객관의 임의적 구분은 대상을 추상화시키고 세분하며, 인간이 대상을 지배하는 원리가 되나, 이런 상태에서는 인간과 자연의 상호교통은 철저하게 단절되고 만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가장 확실한 것은 ‘내가 생각한다’51)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밖에 있는 자연도 나의 사고를 통해서만 실재를 얻게 되겠고, 존재의 의미도 나의 사고를 통해서만 있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내가 생각하지 않는다면 데카르트에게서는 존재조차 부인되고 만다. 데카르트의 이분법에 따르면 인간의 주관화나 자연의 대상화가 뚜렷하게 구분된다.52)
현상학은 전통적인 데카르트적 관념론에 비해 세계에 대해 훨씬 개방적이었다. 의식의 본질을 지향성으로 보았다는 점이 이를 입증한다. 의식은 항상 무엇에 대한 의식이며, 이 무엇은 자기가 아닌 것, 자기와 구별되는 무엇이다. 의식은 세계를 떠나 자기 속에, 절대 고독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지향성은 의식의 속성이 아니라 의식의 실체성이다. 의식은 지향성으로서 존재한다. 이런 의미에서 의식은 그 자체 벌써 자기초월을 특징으로 한다. 이것을 레비나스는 “지향성으로서의 의식의 실체성은 스스로 초월하는데 있다”고 적절히 표현한다. 이 점에서 훗설의 현상학은 데카르트를 극복한다. 53)
훗설에게서 의식은 무엇과 떨어져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무엇에 대한 의식이듯이 사물도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에 대해, 의식에 의해 나타날 때 비로소 사물로서 존재하게 된다. 의식과 사물은 지향적 관계에 의해 존재한다. 지향적 관계가 있을 때 지향적 관계를 갖는 양극에 대해 비로소 ‘주체’와 ‘대상’이란 말을 각각 붙일 수 있다.54)
여기서 의식외적인 것, 정신외부의 것들은 필연적으로 대상으로 전락하여 그 고유의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레비나스는 의식외부의 것들에서 그 고유성을 인정하지 않고, 자아의 대상으로만 인정하는 철학적 방법이 가져올 수 있는 위험을 숙고한다. 훗설의 경우 그것은 자아외부의 총체적 대상세계를 주체의 대상화로 전락시키는 유아론으로 나타난다. 하이데거의 경우 훗설의 주-객분리는 세계-내-존재의 염려(Sorge)를 통해 근원적 통일을 얻지만, 자아는 염려를 통해 독립된 주체 또는 자아로서 자신을 구성한다. 아직도 세계는 주체의 유용성이나 고려의 대상으로 남아 있을 뿐 그 자체의 근원적 의미를 획득하지 못하고 있다. 하이데거의 현존재 분석과 헤겔 면경이론을 수용한 사르트르는 타인이나 사물 모두가 의식의 대상으로 된다는 점, 그리고 또 다른 의식의 주체인 타인에게서 나 자신이 그의 의식의 대상으로 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결국 사르트르는 타인의 눈길에 던져진 나를 의식하면서 타인이 곧 지옥이라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우리는 이제 타인을 지옥으로까지 몰고 오게 된 철학적 배경을 살펴볼 것이다. 레비나스의 관점에서 이같은 배경은 모든 의미 주체를 자아로부터 구성하는데서 시작된다. 그는 자아를 중심으로 세계를 구성하기에 앞서 내 앞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구체적 실재인 타자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우리가 타자의 존재를 사실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타자의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 타자의 다름을 인정하고, 타자의 외재성(exteriorite)을 향해 가고자 열망하는데서, 형이상학적 관계 즉 레비나스적 의미의 윤리적 관계는 가능해진다. 그럼 이같은 맥락을 따라 구체적 내용을 살펴본다.
1) 훗설현상학의 자아론
훗설(E. Husserl)에게서 현상학의 궁극적 목표는 모든 다른 학문들의 존립을 정초하여 줄 수 있는 제1철학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이 목표를 위하여 그는 먼저 현상학 자체가 엄밀한 학문성을 지닌 철학 즉 “개념상 확고하게 경계지어지고 충분히 그 의의가 밝혀진 문제들, 방법 및 이론”을 갖춘 엄밀학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55) 훗설은 『이념』에서 현상학적 환원을 통해 데카르트적인 명증의 영역을 탐구하였다. 훗설의 “엄밀학으로서의 철학”은 바로 명증성을 지닌 선험적 현상학이라고 할 것이다. 현상학을 엄밀한 제1철학으로서 확립하고자 한 훗설은 그 근원자체가 절대적 확실성 즉 그것의 비존재를 생각학 수 없는 필연적 명증성을 지닌 것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런 명증성을 갖지 못한 것을 괄호에 넣어 배제하고 근원적 기반을 찾는 방법이 현상학적 환원이다. 현상학적 환원의 방법을 통하여 도달한 기반은 바로 선험적 주관성으로서의 자아이다.
훗설에게 자아는 제1철학의 근원이라는 점에서 ‘아르키메데스의 점’의 성격을 갖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존재자 내지 세계가 그 안에서 의미로 바뀌어 대상화되도록 하는 원천이요, 이를테면 존재일반의 근원범주(Urkategorie) 내지 근원영역(Urregion)이었다. 그러므로 현상학적 환원은 바로 이 근원적인 것에로 돌아간다는 적극적인 의미를 가진다. 이 환원에는 언제나 그 대상을 의식과의 상관관계에서 고찰하기 위하여 소박한 정립을 괄호에 넣고 판단을 유보하는 에포케(Epoche) 다시 말해 판단중지가 수반된다.56)
훗설에게 판단중지란 객관적 인식 가능성을 입증하기 위해 수행된다. 그에게서 판단중지는 어떤 사물에 대한 우리의 일상적 판단을 배제하거나 그 타당성을 일단 괄호 속에 묶어 두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사물의 우연적 속성을 배제하고 본질을 찾아낼 수 있다. 그런데 사물의 본질은 사유작용을 통해 우리의 의식 속에서 구성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질을 발견하기 위하여 그것을 구성하는 원천인 의식의 내부로 되돌아가야 한다. 이런 인식상황에 적용되는 방법이 환원이다.57)
이같은 환원의 방법이 요구되는 이유는 사물을 인식하는 우리의 태도를 분석하면서 밝혀질 수 있다. 훗설에 의하면 사물을 인식하는 우리의 태도는 크게 “자연스런 태도(naturale Einstellung)와 이론적인 태도(theoretische Einstellung)로 구분된다. 전자는 무비판적이고 생래적인 태도로 다시 자연적 태도58)(naturliche Einstellung)와 인격주의적 태도(personalistische Einstellung)로, 후자는 비판적이고 문화적이며 역사적인 산물로 형성된 태도로서 자연과학주의적 태도59)(naturalistische Einstellung)와 선험적 태도(transzendentale Einstellung)로 구분된다.
훗설은 자연스러운 태도와 자연과학주의적 태도를 선험적 태도로 변화시키기 위해 환원의 구체적 절차를 제시한다. 선험적 태도는 자연적 태도의 일반정립을 비판하고 “모든 인식형태와 인식하는 자의 자기자신 및 그의 인식생활에 관한 자기반성의 최종근거를 반문”60)하는 태도이다. 이 절차는 형상적 환원, 분석?기술의 단계 그리고 선험적 환원과 본질직관으로 구분된다.
형상적 환원은 사물을 인식 비판적으로 검토함이 없이 그 존재를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존재확신을 배제하고 사물을 명증적으로 인식하기 위해 그 본질을 찾아내는 절차이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사물의 경험적 현상에 관한 판단을 중지하고 그것에 관해 갖고 있는 존재확신을 인식 비판적으로 아무런 타당성도 갖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괄호 속에 보류한다.61) 그 다음 사물들의 속성을 분류하여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서술하는 분석과 기술의 절차가 수행된다. 분석과 기술이 정밀할수록 사물의 본질규정도 자세하나, 실제로 대상의 모든 속성을 드러내는 것은 한계를 지닌다. 형상적 환원은 이와 같이 판단중지, 분석?기술을 통해서 사물의 본질을 찾아내는 절차이기 때문에 본질적 환원이라고도 한다.
선험적 환원은 형상적 환원을 통해 얻어진 본질을 다시 의식 내재화하는 절차이다. 형상적 환원은 자칫 사물의 본질을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의식의 영역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실재로 간주하기 쉽다. 그러므로 본질을 우리의 의식 속에 명증적으로 근거 짓기 위해서는 그것을 일단 의식의 내면으로 끌어 들여야 한다. 이와 같이 본질을 의식 내재화하는 절차가 선험적 환원이다. 선험적 환원의 참뜻은 선험적인 주관성과 그 지향적인 구조에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같은 환원의 목표는 모든 현상의 존재의미에 대한 절대적인 명증을 얻으려는 요청에 의한 것이다. 이같은 현상학적 환원은 의식의 지향성62)의 원리에 근거하고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훗설의 초월론적 현상학은 레비나스가 볼 때 본질적으로 자아론(egologie)이다. 현상학은 의식뿐만 아니라 사물존재의 존재의미를 의식의 구성적 활동을 통해 설명한다. ‘존재’는 의식에 의해 의미가 부여된 것, 의식 앞에 주어진 것으로 의미를 갖는다. 마찬가지로 사물도 의식에 의해 구성되는 한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의식활동의 표상적 측면이다. 다시 말해 지향성으로서의 의식은 대상의 지각활동에서 그것의 고유한 작용을 보여준다. 대상에 대한 의식뿐만 아니라 의식에 대한 의식, 즉 반성조차도 결국은 대상에 대한 지각이며 대상에 대한 표상이다. 그래서 앎이란 대상을 표상하고 대상을 내 앞에 재현하는 행위이다. 후설이 표상의 지향성과 구별해서 의욕과 감정의 지향성을 말하고는 있지만, 이 때 다른 형태의 지향적 작용을 뒷받침해 주는 것 역시 표상이다. 훗설은 의식의 ‘객관화하는 작용’ 또는 이론적 측면에 끝까지 집착하였다. 63)
훗설현상학에서 에포케는 순수의식을 제시하는 방법론적 장치로서 사용되어진다. 에포케의 결과는 모든 경험을 현상적 세계로 환원하는 것이고 훗설이 ‘현상학적 환원’64)이라고 부른 것을 완성하는 것이다. 이같은 환원은 훗설을 고립된 의식 안에 머물게 한다. 에포케의 방법론적 작업으로 돌아가서, 훗설은 경험적 세계는 의식에 의존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여기서 데카르트는 창조자를 발견하기 위하여 신으로 돌아가지만, 비록 현상적 세계에 관한 것일지라도, 훗설은 에고로 향한다. 에고는 세계구성의 행위 속에서 자신의 세계를 창조한다. 세계가 모든 사람에 의해 경험될 수 있는 것일지라도, 전체세계는 선험적 구성으로부터 발생하며, 따라서 전적으로 나의 것이 된다.65) 여기서 타자는 객관적 의미 안에서만 표현된다. 이것은 타자가 나의 정신에 의존하는 세계에 던져져 있다는 의미이다. 훗설체계에서 타자는 정신외부의(extra-mental) 타자가 아니다.66)
훗설은 그 자신이 유아론(solipsism)의 문제를 피했다고 생각한 만큼, 자신의 이론의 결과에 무심하였다. 왜냐하면 그의 목표는 나의 의식과 무관한 타자나 정신-외부의 세계에 있지 않고, 의식과 관련된 세계의 의미를 해명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훗설은 현상학이 현상과 의미의 영역에 있는 현상의 구성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초기의 입장을 재차 강조한다. 이같은 입장은 현상 그 자체의 형이상학적 지위에 관계하지 않는다. 의식이 지향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모든 의식은 대상의 의식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대상은 의식을 위한 대상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인식행위안에서 대상을 구성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같은 입장들은 정신과 무관한 대상이 존재하는 것을 불가능한 것으로 보게 된다. 인식에 앞선 의미의 구성에서 나에게 저항할 수 있는 대상은 없다. 결국 의미는 나의 사유 행위의 결과이고, 훗설은 의미에 관한 한 유아론자로 남는다.67)
위의 논의들로부터 볼 때, 우리는 인간경험에 관한 훗설의 분석에서 대상의 존재론적 위상이 다루어지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외부의 대상들은 의미구성과 무관하게 된다. 레비나스는 이와 같은 후설의 이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현상학적 환원의 혁명적 특징에도 불구하고, 훗설철학에서 혁명은 자연적 태도가 이론적인 정도로만 필요하다. 환원의 역사적 역할과 실존의 특정순간에 나타나는 의미 등은 그에게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다. 68)
레비나스는 훗설의 주장이 혁명적인 방법이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나의 삶의 의미와 무관하다는 주장을 함축하고 있음을 문제시한다. 훗설은 자신의 이론적 정향으로부터 이같은 입장으로 강요되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의식은 지향적 관계에서만 세계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이와 같은 훗설의 주장을 불완전한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철학을 엄밀학으로 만들려는 야망에서, 훗설은 의식을 인식으로 환원하고, 결국 철학을 생생한 일상생활의 구체성으로부터 분리시켰기 때문이다.69)
훗설은 표상적 의식의 분석을 통하여 합리적 주관성의 풍토를 제공하였다. 그리고 인식작용에서 일어나는 것을 정확하게 기술한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한 방법론적 장치가 아니라, 사유의 영역으로 들어서는 인간존재에게 발생하는 실존의 변형이다. 인식은 본질적으로 정신을 정신외부의 영역으로부터 분리시킨다. 데카르트적 개념으로 표현하자면, 이것은 감각으로부터 정신의 철회(withdrawl)이다. 훗설에 관한 레비나스의 비판은 이같은 인식에서 비롯된다.
레비나스는 표상(representation)의 한계를 ‘본질적으로 다른 것을 자아의 영역으로 환원’시키는 것으로 지적한다. 결국 표상은 다름의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 “의심할 바 없이, 유한한 존재인 우리는 인식의 과제를 완전히 해명할 수 없다. 그러나 인식과정에서 타자는 동일자로 환원된다.”70) 다시 말하면 경험을 표상으로 환원하는 과정에서, 표상은 그들의 대상을 객관화하고 주제화한다. 71)
레비나스는 단 하나의 지향성 즉 표상적 지향성만이 존재한다고 보는 훗설을 주지주의로 본다.72) 레비나스는 인식을 관념적인 것으로 보면서, 인간존재에게는 관념적 인식 이상의 것이 있다고 주장한다. 표상안에서 대상을 이해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타자인 것으로부터 타자성(alterite)을 벗겨낸다. 표상안에서 동일자는 타자에 의해 결정되지는 않는 반면, 타자는 동일자에 의해 결정된다.73) 그리고 타자를 동일자로 환원시키는 과정에서, 타자인 것의 근본적 특성 즉 다름은 변형된다. 일단 ‘이질성’, ‘다름’, ‘타자성’ 등이 표상에 의해 타자로부터 제거되면서, 타자는 자아의 의식에 의해 구성되며, 나의 의식에 속하게 된다. 여기서 자아와 타자의 본래적 관계74)는 뒤집어지고, 정신외부의 타자는 자아안의 개념으로 전환된다.75)
이같은 오류를 피하기 위해서 레비나스는 모든 지식에 앞서 체험되는 사태를 직시한다. 그리고 이성에 선행하는 근원적인 영역으로, 감성의 영역이 있음을 강조한다. 레비나스는 “자아가 주제화, 대상화, 객관화하는 이성과 동일시될 때, 자아는 자신의 자기성을 잃는다”76)고 말한다. 이것은 자아를 인식론적 자아와 동일시할 때, 자아가 탈신체화되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훗설의 주지주의를 비판하면서, 레비나스는 행복과 향유 그리고 정서의 광범위한 범주아래, 즉 표상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감각작용의 충만을 분석한다.77) 이것은 레비나스로 하여금 현상학을 넘어서도록 한다. 감각작용은 그에게서 객관성의 선험적 형식을 채우도록 운명지어진 단순한 내용들이 아니다.78) 다시 말해 감각작용은 객관적 특성의 주관적 요소가 아니라, 의식에 앞서 있는 향유로 다루어질 때 정당한 의미를 회복한다. 우리가 충만한 감각작용의 의미를 수용할 때, 타자는 의식을 넘어서 있는 타자로서 다가온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다름을 다른 것 자체로, 나에게로 동화시킴이 없이 만나는 방법이다.
2)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세계관
레비나스가 하이데거(M. Heidegger)의 철학에 접근하는 방식은 여러 갈래이다. 그 자신도 밝히고 있듯이, 레비나스의 현상학 이해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현상학에 대한 비판과 하이데거에 대한 비판은 같은 맥락 안에서 수행되고 있다. 하이데거에 대한 레비나스의 비판은 다각도에서 이루어지고 있지만, 본 논문과 관련지어 특히 지적되어야 할 것은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세계이다.79)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세계관에 대한 레비나스의 비판은 크게 두가지 방향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째, 현존재와 대상적 세계와의 관계설정, 둘째, 자아와 타인간의 관계설정에 관한 것이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세계관에서 현존재와 대상적 세계는 어떤 관계인가? 먼저 하이데거가 어떻게 인간을 이해하고, 세계를 해석하는지 구체적으로 살피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자. 하이데거는 ‘철학을 보편적인 현상학적 존재론’으로 규정한다. 하이데거에서 철학은 ‘존재가 철학의 근본과제’라는 점에서 존재론80)이며, 존재의 해명이 현상학적 방법에 의존한다는 점에서는 현상학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그 대상이나 내용의 측면에서 보면 존재론이 되고, 그 취급양식이나 접근방식의 관점에서는 현상학이 된다. 따라서 “존재론은 현상학으로서만 가능하고”, 역으로 “현상학은 내용상으로 보면 존재자의 존재에 관한 학문 즉 존재론이 된다.” 81)
하이데거는 철학을 현상학적 존재론으로 규정한 다음, 철학 즉 현상학적 존재론의 출발점이 「현존재의 해석학」또는 「실존의 분석론」임을 첨언하고 있다.82) 그가 말하는 현존재 또는 실존의 존재론적 핵심은 각자성(Jemeinigkeit), 자기성(Selbstheit), 그리고 자기동일성(Selbst-standigkeit) 등으로 표현되는 “자아”개념이다. 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존재론의 출발점은 현존재의 분석에서 찾을 수 있고, 현존재 분석의 핵심은 자아론에서 찾을 수 있다.
하이데거는 전통적인 형이상학과 존재론을 인식론으로 규정하고, 전통철학이 존재자에 고착한 나머지 존재를 망각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그리고 자신의 현상학적 존재론을 존재의 사유(Denken des Seins) 또는 존재의 물음(Frage nach dem Sinn des Seins)으로 정의한다. 하이데거에 있어,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과 사유한다는 것은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말은 인간이 부단히 사유활동을 수행한다는 뜻에서가 아니라, 인간각자가 자기 자신의 존재를 이해?염려?문제시하는 방식으로 자기의 존재를 확인?실현한다는 뜻에서 인간의 존재는 그 자체가 사유이며 물음이라고 규정한 것이다.83)
인간존재를 해명함에 있어, 하이데거는 인간을 현존재(現存在, Dasein)라고 표현한다. 존재사유의 입장에서 인간은 존재를 이해하고 있는 존재자이다. 현존재란 그의 존재에서 바로 이 존재 자체가 그 자신에게 문제되는 유일한 존재자이다.84) 존재이해란 인식주관으로서의 인간이 객관적인 존재자의 성질?상태?관계를 이론적으로 파악한다는 존재자의 범주가 아니라, 존재이해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현존재의 존재규정이다.
이와 같이 현존재가 관계할 수 있고 또 언제나 관계하고 있는 존재 자체는 실존(實存)이다.85) 따라서 실존은 윤리학적 개념이 아니라 존재를 이해하고, 존재에 대해 관심을 가지면서 존재 그 자체를 문제삼으면서 존재하는 현존재의 존재규정이다. 실존은 부단히 자신으로부터 벗어 나와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를 탐색하고, 존재가능성을 모색한다는 뜻에서 존재에로 나아감(ek-sistere) 또는 존재아래 서는 것(Ver-stehen=vor oder unterhalb dem Sein stehen)을 의미한다. 이같은 의미에서 실존은 탈자존재(脫自存在, Ausser-sich-sein)로도 표현된다.86) “현존재는 자기자신을 항상 자신의 실존에서부터 이해하고 있다”라고 하였을 때, 여기서 이해는 자기 자신의 존재가능에서부터 자기자신을 이해함을 의미한다. 현존재는 그가 존재하는 한, 항상 가능성으로부터 자기자신을 이해한다.87) 가능성과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하이데거는 기투(企投, Entwurf)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요컨대 이해로서의 현존재는 자기의 존재를 가능성에로 기투한다.
세계안에서 현존재가 거주하는 방식은 어떤 것과 관계 맺는 것, 어떤 것을 생산하는 것, 어떤 것을 주의하고 돌보는 것, 결정하는 것 등이 있다. 이와 같이 세계-내-존재로서 현존재방식이 다양할지라도 이들은 모두 염려의 양태이다. 인식론적 물음이나 표상은 염려를 보여주는 하나의 방식이다. 세계-내-존재를 실존적 관심으로 설명해가면서, 하이데거는 염려 위에 정초되는 인식을 검토한다. 현존재의 염려 위에 정초되는 인식의 특징은 주체와 대상이란 인식론적 범주의 삽입에 앞서, 현존재와 세계 사이의 관계를 확립한다. 인식에 앞서서 현존재는 세계 안에 거주한다. 그러면 현존재와 세계의 관계는 무엇이고, 이들은 어떻게 인식에 앞서 관련되는가. 베버스(A. F. Beavers)에 의하면, 이같은 물음은 훗설의 경우 인간존재를 현상학적 환원에 앞선 환경 세계(생활세계)에 관련지어 묻는 것이다.88)
하이데거는 현존재를 근본적으로는 행위자이고, 부차적으로 인식자로 특징지으면서 이 문제에 답한다. 현존재는 근본적으로 어떤 목적에 유용한 정도로만 환경안의 존재자들과 마주친다. 이런 의미에서 존재자들은 이론적 인식의 대상이 아니다. 그들은 사용되는 것이며, 생산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그들을 도구(zeuge)라고 부른다. 그런데 어떤 도구도 다른 도구들로부터 고립되어 존재할 수 없다. 도구는 항상 다른 도구와의 관련 속에 있다. 하이데거는 이같이 유용한 도구들을 ‘손안에 있음’으로 부르면서, 그들을 시각에 또는 인식 안에 포섭되는 ‘외적 현상’과 비교한다. 예컨대 ‘펜’의 ‘손안에 있음’은 결코 그 자신을 나타내 줄 수 없다. 그것은 사용가능성안에서만 의미화된다. 그런데 인간이 도구를 다루는 것은 맹목적이지 않다. 도구를 다룰 때, 현존재는 특별한 관점아래 조작하며, 그로부터 도구의 특수한 사물적 특성이 획득된다. 이같은 주시양식(Umsicht)은 인식론적으로 대상의 세계를 구성하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 사물은 그냥 이론적으로 바라보기만 하는 시선(視線, Sicht)으론 이해되지 않는다.89) 왜냐하면 사용하고 조작하는 교섭은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제나름의 고유한 주시양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주시양식이 조작을 유도하고 그 조작에 특수한 확실성을 부여한다. 도구와의 교섭은 ‘하기 위한’의 다양한 지시에 종속된다. 그렇게 적응해 가는 것을 이끄는 ‘봄’은 배시(配視)이다.90) 다른 도구와의 관계에서 도구를 끼어 넣는 것은 도구의 기능적 측면을 고려한 것이다.
작업과정에서 작업자로서의 현존재는 모든 사람, 모든 것들로부터 현존재를 분리할 수 없게 만드는 총체적 상호작용에 놓여진다. 주체와 대상의 범주들은 작업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는 세계 안에 나타나지 않는다. 하이데거는 세 가지 형태의 문제가 발생한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눈에 띔(Auffalligkeit), 눈에 거슬림(Aufdringlichkeit), 저항(Aufsassigkeit)이다. 도구적 존재는 특수한 도구가 부러지거나 기능을 다하지 못할 때 눈에 띄게 된다. 내가 도구를 잃어버려 찾게 될 때, 그것은 눈에 거슬리게 된다. 이런 경우 도구는 부재를 나타낸다. 이 두 가지 경우에 도구는 유용하지 못하게 된다. 때때로 갖춰지지 못한 것은 다른 계획에 대한 장애로서 나타난다. 망치가 더 이상 망치로서 기능하지 못할 때, 우리는 망치를 인식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가 도구를 사용할 수 없게 될 때, 도구의 기능은 분명해진다. 도구들의 상관성은 신중한 고려(Circumspection)속에서 총체성으로서 나타난다.”91) 그래서 현존재가 거주하고 있는 총체적 지시 세계는 문제발생으로 드러나게 된다. 도구적 사물의 총체적 지시 세계야말로 현존재가 상호관련된 다른 모든 존재자들과 총체성 속에서 거주하는 곳이다.
이와 같이 하이데거가 현존재를 복합적인 도구적 장치의 총체적 지시체계안에 위치시킨 반면에 레비나스는 인간존재를 환경의 요소성안에 살고 있는 향유적 존재로 특징짓는다.92) 향유는 물질성과의 궁극적 관계로 사물과의 모든 관계를 포괄한다. 레비나스는 가구, 집, 음식, 의복 등은 개념적으로도 도구적 의미로 제한될 수 없는 대상적 실질성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의복은 몸을 보호하거나 장식해준다. 집은 몸을 보호해주며, 음식은 몸을 회복시켜준다. 우리는 그들을 향유(enjoy)하거나 또는 그들로부터 고통 당한다(suffer). 이런 점에서 그들은 궁극성을 띤다. 도구들 자체가 향유의 대상들이 된다. 사물의 향유는 이 사물의 조립된 용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즉 펜은 글을 쓰는 것에만, 그리고 망치는 못박는 데만 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들 도구들을 사용하면서, 그 작동에 대해서 고민스러워하거나 기뻐하는 데 있다. 어떤 유용성 없이 그리고 다른 연관성 없이, 순수한 소비와 사용에서 즐거워하는 이가 바로 인간이다. 93) 이같은 점에서 하이데거는 주변적 요소의 환경으로부터 살아가는 몸과 감성의 의미를 망각하였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레비나스와 하이데거에 있어서, 자아와 세계의 관계양상에 대한 이해방식은 서로 다르다. 더욱이 인간과 인간의 사회적 관계에 대한 이해도 근본적으로 서로 다르다. 인간의 존재 의미에 대한 하이데거의 탐구는 세계-내-존재의 분석으로부터 출발한다. 현존재는 세계-내-존재인 인간의 특별한 양태로서, 존재가 그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다. 현존재는 자기자신의 가능성에 적절한 존재 과정에서 그 스스로를 드러낸다. 자기 자신의 가능성의 이해, 행위의 자율성, 존재 이해는 서로 관련되며, 진실한 현존재의 중심모습으로 설명된다. 하이데거에게서 모든 이해와 해석은 이해의 선구조, 즉 문제되는 대상에 적절한 이해를 유도하는 전제 안에서 작동한다. 현존재는 존재이해로부터 자신의 가능성을 설계하고, 취합한다.
레비나스의 관점에서 볼 때, 지향적 의식에서 실재는 이미 주체에 의해 소유되어진다. 이같은 상황에서 이해는 자기주장으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 표상 안에서 대상을 이해할 때, 자아는 본질적으로 이질적인 것을 자아의 사유지평 안으로 가져오게 된다. 이것은 결국 타자의 타자성(alterite de l'autre)을 제거시켜 버린다.94) 레비나스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서 자아에 의한 동화와 통합의 전형을 본다. 그는 이같은 접근법을 ‘타자 속에서 동일자를 재발견’95)하는 접근법으로 본다. 이같은 방식의 접근은 새로움, 현상의 소여에 대한 자아의 개방성을 설명해 주지 못한다. 이런 자아론(egologie)에 반대하면서, 레비나스는 우리가 자아의 개념적 파악이나 행위의 자율성을 벗어나 있는 어떤 것, 절대적으로 외재적인 타자성에 직면하는 사실을 주지시킨다.
부버(Martin Buber) 역시 하이데거의 현존재를 독백적인 현존재라고 비판한다. 하이데거가 설명하는 현존재의 인간은 인간과 함께 살고 있는 그런 인간이 아니라, 더 이상 실제로 인간과 더불어 살 수 없는 그런 인간이며, 자기 자신과의 왕래 속에서의 삶만을 알고 있는 그런 인간이다. 이같은 이유로 부버는 하이데거의 고독한 인간을 다른 사람들에게 ‘너’라고 말할 수 없는 존재로 비판한다.96) 더욱이 하이데거의 현존재의 가능성은 근본적으로 공유될 수 없는 가능성이다. 이같은 관점에서 자아실현은 고립적인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사회적 관계는 기투(企投)를 통한 현존재의 자아실현의 과정에서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한다. 즉 하이데거의 실존의 가능성 실현은 타자와 어떤 관련성도 보이지 않는다.97) 단지 작업장에서 마주치는 다른 현존재일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이데거가 말하는 공존안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인간관계를 찾기 어렵다.
레비나스에게서 인간간의 사회적 관계(rapport social)는 보다 더 심층적 관계가 있다. 그는 사회적 현상의 근거가 되는 것은 타자의 절대적 타자성과 자아의 분명한 수동성(la passivite) 사이의 직접적 관계라고 본다. 그래서 타인의 실존의 구체적이고 벌거벗은 모습이라든지 타자의 인정을 사회적 실재의 기초로 본다. 더욱이 자아와 타자의 관계는 두개의 분리된 실체의 결합도 아니고, 두개의 이미 결합된 실체사이의 분리도 아니다. 인간간 의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타자의 타자성 그 자체이며, 자아와 타자를 연결하는 자아와 타자사이의 절대적인 차이이다. 타자는 나 자신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정확하게 타자와 나의 관계를 보장하는 내가 아닌 존재(not-being-me)이다. 98)
하이데거는 그의 존재론적 철학의 전반에 걸쳐 일관되게 윤리나 도덕의 문제에 침묵하고 있다. 도덕철학에 대한 그의 침묵은 형이상학적 사유에 대한 비판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에 따르면 윤리학은 형이상학적 사유에 속한다. 하이데거는 마음에 간직하는 사유, 즉 시원적 사유는 윤리학도 존재론도 아니라고 본다. 시원적 사유는 존재사유이며, 이것은 윤리학보다 더 근원적이다. 더구나 ‘에토스(ethos)’의 근원적인 의미는 하이데거에 따르면 행위와 무관하다. 에토스는 거주지, 머무는 곳을 뜻한다. 여기에는 인격?도덕?주체?책임?의무?정의?평화 등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레비나스는 하이데거의 철학을 ‘중립성의 철학(la philosophie du neutre)’ 또는 ‘유물론’이라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하이데거의 존재는 퓌시스(physis)이고, 그것은 전혀 어떤 얼굴을 가지지 않은 익명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익명적 존재에 자신을 내어놓은 하이데거의 사유는 인간이 당하는 고통과 악, 현실적 불평등이나 불의에 대해서는 완전히 침묵하고 있다. ‘존재 저쪽의(epekeina tes ousias)’(플라톤) 선의 이념에 대한 열망을 우리는 하이데거의 철학에 찾아볼 수 없다. 99)
하이데거의 철학은 인간학적 관점에서도 비판받게 된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인간의 현존재의 존재, 다시 말해 존재자의 존재에 관해서 묻는데 만 급급하기 때문에 인간의 의미를 제대로 밝혀주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해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인간학과 존재론은 서로서로 방해가 되며, 서로를 어둡게 하고 있다. 존재에 대한 물음과 인간에 대한 물음을 한데 묶어서 본 하이데거의 시도는 20세기의 二大 철학조류를 하나로 합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하이데거를 유명하게 만들었지만, 내용 없는 것이 되었다.100)
3) 사르트르의 적대적 타인관101)
사르트르(J. P. Sartre)의 현상학적 실존주의는 훗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을 배경으로 한다. 사르트르는 철학은 사유하는 자신에 대한 의식의 확실성에서 비롯된다는 이유에서 데카르트의 주관주의에 공감하고 있지만, 데카르트가 대상세계와 전혀 관련 없이 확인하였다고 하는 이른바 사유하는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 훗설의 지향성이론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래서 의식은 본질적으로 지향적이기에 의식과 대상세계는 상호관련아래 개념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수용한다.102)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은 하이데거의 실존분석이다. 그는 세계-내-존재인 인간이 대상세계와 갖는 관계란 훗설이 생각하는 인식론적 관계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실존이 이론적 본질에 선행해야 한다고 본다. 사르트르는 이같은 현상학의 철학에 헤겔의 변증법적 사상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다.103) 그래서 존재를 즉자존재와 대자존재, 즉자대자적 존재로 구분하고, 『정신현상학』의 기본개념인 主奴관계의 상호승인을 위한 필사적 투쟁으로서 노예의 변증법을 수용하여 자신의 이론을 전개시키고 있다.
사르트르 실존주의의 기본명제는 ‘실존이 본질에 선행한다’는 것이다. 무신론적 입장에 서 있는 사르트르는 인간을 만든 신이 존재하지 않기에 인간의 본질은 정해지지 않았다고 역설한다. 그러므로 인간 스스로 자유로운 선택과 자발적 결단을 통해 스스로를 형성해가야 하는 것이고 자신의 선택과 결과에 대해 무한한 책임을 짊어져야 하는 것이다.
실존의 출발점은 행위주체의 의식이지만, 모든 의식은 필연적으로 어떤 대상을 향해 있는 지향적 의식이다. 결국 의식과 대상, 의식적 존재와 의식이 없는 존재, 대자적 존재(fur-sich-sein)와 즉자적 존재(an-sich-sein )는 긴밀히 연결된다.104) 즉자적 존재는 필연성에 지배받지만, 대자존재는 자신을 대상화해서 관찰하고 반성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래서 내가 무엇을 갖추지 못했고, 무엇을 갈구하며, 무엇이 내게 가능한지를 생각할 수 있다. 대자존재는 자유로운 선택과 결단을 통하여 현재의 자기자신을 초월해 가는 탈자(脫自)적 삶의 양식을 뜻한다.
대자적 존재로서 인간은 사회적 역할, 지위, 명성, 자기정체감, 자아실현을 기대할 수 있다. 의식은 항상 의식에 외재하는 것, 현존을 초월한 그 무엇을 향하기에 자신의 가능성을 설계하고, 그것이 실현됨과 동시에 현상태가 아닌 또 다른 그 무엇을 지향해간다. 이같이 의식은 결핍 혹은 욕망 자체이며, 특정한 고정된 상태의 존재에 머물지 않기에 대자로서의 의식의 특징을 無라고 특징 지운다.105) 대자적 존재 즉 의식의 특징인 무는 자유의 개념으로 나타난다. 의식은 대상세계를 부정하고 무화하는 자유, 의심하고 물음을 제기하는 자유, 현재상태가 아닌 어떤 것을 지향하고 설계(projet de soi)하고 실천하는 자유를 가진다.
이같이 사르트르는 의식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대자적 존재로, 대자존재의 특징을 의식으로 규정하면서, 인간을 자유로 선고한다. 그런데 절대적 자유를 선고받은 나의 자아실현은 역시 절대적 자유를 실천하도록 선고받은 타인의 자아실현을 침해할 수도 있고 또한 그 역도 성립한다. 그는 이같은 자기논리에 빠져 ‘타인은 곧 지옥’이라고 선언한다. 헤겔의 노예의 변증법을 수용하는 그는 세계 내에 던져진 우리는 타인과 평화로운 공존을 누리기보다는 필사적 투쟁을 피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존재와 무』에서 그는 인간간의 적대적 관계를 「대타존재」(being-for-others)라는 제하에서 다루고 있다. 타인이나 사물이 모두 내 의식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보면, 타인과 대상세계의 사물이 다를 바 없다. 사물적 존재는 내 의식의 대상일 뿐 그 자체는 의식 없는 즉자존재이기 때문에 나를 대상적 존재로 환원할 수 없다. 그러나 타인은 내 의식의 대상이면서 그도 또한 나를 의식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대자존재이다. 그러므로 사물의 존재와 타인의 존재는 근본적 차이가 있다. 타자의 존재는 나에게 심각한 도전과 위협으로 다가온다. 이렇게 해서 사르트르의 대자적 존재와 대타적 존재는 심각한 적대적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세계 내에 던져진 인간존재는 타인과 평화공존보다는 필사적 투쟁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106)
사르트르는 대상에 대한 인간의 보편적 태도는 의식의 대상을 정복하고 부정하고 극복하고 무화해가는 것으로 본다. 대상과의 관계에서 작용하는 이러한 욕망과 태도, 대상에 대한 정복에의 의지는 부정의 원칙이고 죽임의 원칙이다. 대상에 대한 부정의 원칙은 대상이 인간인 경우에, 타인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전적으로 예외적인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인간은 가끔 사소한 갈등관계일지라도 타인을 악마와 같은 눈초리로 노려보면서 저주하기도 한다. 그러나 타자도 나에 대해서 마찬가지의 태도를 취하기 때문에 나의 자아와 타인의 자아 즉 자아와 타아는 서로 상대편을 정복하고 서로 상대편을 죽임으로써 자신의 주체성을 확립 보존할 수 있는 필사적 투쟁의 단계에 돌입한다. 헤겔 변증법의 주노관계의 투쟁은 상호승인을 향한 노예의 자유 성취로 나아가지만,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서의 자아와 타자의 관계, 대타존재와 대자존재의 사회적 관계는 끝없는 투쟁의 연속으로 적대적 갈등의 탈출구가 없다.107)
한편 사르트르는 자신을 하나의 자아로 인식하기 위해서, 자신을 비추어볼 타인의 자아를 필요로 한다는 헤겔의 면경이론(面鏡理論)을 더 정교하게 발전시켜 나간다. 사르트르에게서 나의 자아의식은 타자가 나를 의식의 대상으로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때 비로소 형성되며, 이때 나는 즉자적 존재로 전락되고, 타자는 대자적 존재로 나의 의식에 드러난다. 즉 나에 대한 타자의 의식, 나에 대한 타인의 시선(Other's look)108)을 근거로 해서야 비로소 나 자신을 내 의식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고, 이를 통해서 보다 완전한 자아의식이 생긴다는 것이다.109) 내가 타인의 관찰과 주시의 대상이라는 것, 내가 남의 눈길을 받고 있음을 의식한다는 것, 즉 타인의 시선이라는 개념은 사르트르가 인간관계를 파악하는 열쇠이다. 타인의 시선이 의미하는 바는 내가 ‘타인의 시선’에 한갓 대상으로, 즉자존재로 전락하게 됨이다. 타자의 눈에 나는 사물적 존재로 보여지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이제 그 상황의 주인이 아님을 자각하게 된다. 타자가 나를 자신의 뜻대로 평가하고 예측해 버린다. 이제 나란 존재는 내가 형성해 가는 것이 아니고, 타자가 만드는 것이 되버린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은 이제 타인의 눈길로 가득한 세계에 피투된 존재이다. 내가 타인을 대상으로 삼을 자유가 있는 것처럼, 타인도 나를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자유존재이다. 타인은 나를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그의 눈길을 통해 나의 자유를 파괴하고 부정한다. 결국 모든 인간관계는 갈등관계이고, 타인은 곧 지옥이라는 것이다. 한쪽이 자유이면 다른 쪽은 대상으로 환원될 수밖에 없는 것이 자유의 본질이다.
인간간의 갈등관계는 심지어 연인간 관계에도 여지없이 적용된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사랑이란 타자를 동시에 자유인이자 노예이게 하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내가 타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나를 타자에게 절대적으로 대상화하여 타자의 사랑을 받으려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사랑은 기만에 불과하다. 즉 내가 타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사실상 타자로부터 사랑을 받으려는 것이며, 따라서 나의 사랑은 허구이자 기만이라는 것이다. 결국 사랑은 좌절할 수 밖에 없는 것으로, 좌절된 사랑은 타자와의 동화를 이루기 위한 새로운 시도인 피학증과 가학증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피학증은 타자와 동화되기 위해 자신의 자유를 완전히 철회하는 것 즉 자신을 사물화하는 것인 반면 가학증은 타자의 자유를 타자의 육체에 가두어 버리려는 노력이다. 이같은 행위는 자아가 보다 능동적으로 타자의 자유를 소유하려는 행위로 생산된다.110) 사르트르는 에로스가 한쪽을 완전히 노예화시키는 사디즘(sadisme)이거나 타자의 자유를 위해 자신을 완전히 노예화하는 매조키즘(masochisme)에서 드러나는 사랑의 현상을 고려할 때, 타인과의 진정한 인격적 관계(I-Thou relation)는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레비나스는 서구의 철학적 전통에서 합리적 개념의 담지자로서 자율적 주체가 모든 의미의 척도가 되고 있음을 비판한다. 주체는 자기 폐쇄적이며, 합리적 개념으로서 표현될 수 없는 현상은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레비나스는 이같은 사고유형을 자아론으로 비판하면서, 자율적이고 합리적인 주체를 이론적인 정당화로서 선택한 바로 그 문화의 역사에 얼룩져있는 폭력과 테러의 배경, 합리적 개념이나 범주가 실제에 대한 포괄적 이해를 낳을 것이라는 생각에 도사린 폭력에 직면하도록 해준다.
존재의 척도로서 취해진 자유의 우선성의 전통에서, 자신의 자유를 선택하지 않는 것은 최고의 불합리성, 존재의 비극이 된다. 하이데거적 던져짐은 유한한 자유를 나타내며, 사르트르에게서 타자와의 만남은 나의 자유를 위협하는 것, 다른 이의 시선 아래로 놓여지는 것이다. 철학적 윤리학은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관점에서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설정해왔다. 사람들은 자신의 자유를 제한하는데 일치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법은 다른 이의 자유의 자발성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필요이다. 여기서 자유의 제약은 실패의식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기존의 자유에 관한 개념 자체를 문제시한다. 그러면 이에 대한 레비나스의 글을 직접 살펴보자.
“자유의 자발성(la spontaneite meme de la liberte)은 문제되지 않았다. 그것의 제약만이 비극으로 여겨져왔고, 문제가 되었다. ?????? 만일 내가 자유롭게 나 자신의 실존을 선택한다면, 모든 것이 정당화될 것이다.” 111)
레비나스는 이와 같이 이해되는 자유를 정당하지도 도덕적이지도 못한 것으로 문제삼는다. 왜냐하면 자유는 타자를 자신의 자유의 장애물로 여기며, 죽음으로 위협하는 존재로 몰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상 타자는 나의 자유의 장애도 아니고, 죽음으로 나를 위협하지도 않는다. 레비나스는 도덕성을 자유와 함께 시작되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이 자신의 자유의 과도함에 대하여 죄책감을 가지게 될 때, 인간의 의식 속에 도덕성이 발생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웃은 그의 자유를 나의 자유에 대립시키지도 않으며, 나의 자유에 도전하지도 않으며, 나를 그와 계약하도록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상호관계는 서로를 파괴시키게 되는 것도 아니다.112)
레비나스는 사르트르의 “우리는 자유로 선고된다(we are condemned to freedom, condamnes a la liberte)”는 명제를 비판하면서, 우리가 자신의 자유의 자의성(arbitraire)을 깨닫는데서 오는 부끄러움 즉 수오지심(羞惡之心)에서 우리는 윤리의 심판의 의미를 알 수 있다고 한다.113) 우리가 자신의 자유에 대해 부끄러움을 깨달을 때, 敍品(investiture)114)을 수여 받은 기사와 같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집과 조국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고아, 과부, 빈자, 이방인, 즉 다른 타자들의 벌거벗음과 연약함을 보호하는 과제를 부여받게 된다. 자의적 자유가 아닌 서품을 수여 받은 자유야말로 도덕적 삶을 구성한다. 그러므로 도덕의 기원은 자기로부터 오는 자율성이 아니라, 타자로부터 오는 타율성(heteronomie)이라고 본다.115)
타자에 다가서는 것은 나의 자유, 자기 보존적 존재로서의 나의 자발성, 사물에 대한 나의 모험, 모든 것 심지어 살인까지도 허용하는 성급함을 문제삼는 것이다. 타자의 얼굴이 현현하는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이 나의 자유를 저지한다.116) 여기에 레비나스가 도덕성의 기원을 자율성(autonomie)이 아닌 타율성에서 찾는 이유가 있다. 이웃이야말로 타율성의 기원이다. 도덕성(la conscience morale)은 이성적인 의지나 이성적인 자유에 뿌리를 가지는 것이 아니고, 이웃을 환대하는 태도, 이웃의 삶을 나의 삶보다 더 중시하면서 이웃을 환영(hospitalite)하는 태도 속에 있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자유를 자율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도덕적 자유는 타자의 타자성(alterite du l'autre)에 정향되어져야만 한다. 117)
3. 全體性의 한계와 無限의 이념
우리가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서구 철학을 주도해 온 현상학은 자아 중심의 철학으로 진행되어 왔다. 훗설은 정신외부의 존재자들을 의식으로 환원시키는 오류를 범했고, 하이데거는 실존의 가능성 실현에 몰두할 뿐, 타인과의 관계에 적절한 관심을 주지 못했으며, 사르트르에 이르러는 타인의 존재를 인정하나, 그의 ‘주체의 자유’의 구도아래서 볼 때, 타인은 나의 자유에 장애가 되는 방해꾼으로 평가될 뿐이다.
레비나스는 이와 같은 서구 철학의 전체적 흐름을 전체성(totalite)으로 특징짓고, 전체성에 저항하는 이념으로 무한성(infini)의 이념을 제시한다. 여기서 전체성의 추구는 동일자(the Same, Le Meme)의 특징이지만, 타자는 무한성의 이념을 계시한다. 일원론적 자아의 행위로 구현되는 동일자는 그리스와 유럽철학의 전체성으로 나타나는 반면, 무한의 이념은 타인의 얼굴(le visage d'autrui)로 구현된다.118) 그러면 먼저 레비나스가 어떻게 전체성과 동일자의 개념을 정의하고, 이들을 연관지어 설명하는지 살펴본다.
1) 전체성과 同一性의 억압
레비나스의 『전체성과 무한』은 일차적으로 동일자와 타자의 문제로 시작한다. 동일자(le Meme)는 자기중심적, 자기-동일시(l'identification du Moi)의 형태로 나타나면서, 자기이외의 것 즉 타자적인 것을 자기 안으로 흡수하게 된다. 자기화의 과정은 외재적인 것, 외재성의 다름을 자아로 흡수하면서, 전체화하는 과정이다. 이것은 동일자에 의한 타자적 존재의 환원(la reduction de l'Autre au Meme), 동일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레비나스는 이같은 내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자아 (I)’란 변화 속에서도 동일한 것이다. 자아는 다양한 것들을 그 자신에게 표상 하면서, 그들에 대해 사유한다. …… 자아란 또 다른 의미에서 변화 속에서도 동일한 것이다. 사유하는 자아는 그 스스로 사유하는 것에 대해 경청하며, 그것의 심오함에 놀라고, 그 자신에 대해 타자적이다. …… 그것은 직선적으로 사유한다. 그것은 사유하는 자신에게 귀기울이며, 그 자신이 자신에게도 낯설고, 독단적인 존재인 것에 놀란다. 그러나 이같은 타자성에 직면하면서도 자아(I)는 동일자이며, 그 자신에 빠져있다. …… 119)
레비나스는 이같이 외부세계의 모든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사유의 대상으로 변화시키면서, 결국은 자기화하는 자아를 동일자의 폭력으로 본다. 자신에게 감탄하면서, 자신의 낯섦에 놀라면서도, 자기를 유지하면서 자기 안에 머무는 자아를 레비나스는 ‘나르시시즘’(le narcissisme)으로 부른다. 이같은 자기 도취적인 자아는 헤겔 『정신현상학』에서도 발견된다. 일반적으로 서구철학은 총체성의 과정으로 평가된다. 철학의 역사는 보편적인 합제를 시도하여 모든 외부의 경험(즉 다름과 타자성의 영역)을 총체성으로 환원하며, 의식이 세계를 포괄하게 된다. 이같은 흐름은 헤겔 철학에 이르러 정점에 달한다. 헤겔은 그의 주저『정신현상학』과 『역사철학』에서 세계사의 흐름을 정신의 변증법적 전개과정으로 설명하고 있다. 세계사는 이성, 절대정신, 이념, 개념, 신의 이념이 변증법적 자기발전의 과정을 거쳐서 자신의 이념을 실현해 가는 과정으로 설명되며, 여기서 외계의 자연도 정신이 외화된 상태에 불과한 것으로 설명되며, 인간은 단순히 역사발전의 계기로 작용할 뿐이다.120)
레비나스는 헤겔 자의식이 분명치 않은 것을 명료화하며, 대상들의 타자성안에서 그 자신과 동일시하는 동일성의 우선성(le primat du Meme)을 표현한다고 말한다. 그는 “Self”에 저항하는 “I”,121) 그 자신에게 집중하는 자아를 자의식의 형태로 본다. 122)
자아는 항상 동일하게 유지되는 존재가 아니다. 자아는 현존적 존재가 스스로 동일시하면서 존재하며, 자기에게 발생하는 모든 것을 철저하게 자신의 동일성으로 되돌리면서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최초의 정체성이고, 자기-동일시의 근본적인 작업이다. 123)
우리가 인용문에서 보듯이, 자아 안에서 동일자의 동일시는 단순한 동어반복 “나는 나다”라는 것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동일시는 자아에 의한 자아의 추상적인 표현을 나타내면서 고정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나와 세계 사이의 구체적인 관계로 시작한다. 124)
이같이 자아의 자기동일시(l'identification du Moi)과정은 필연적으로 전체화로 나아간다. 전체성(totalite)의 이념은 유한한 인간 의식이 완전한 내재성, 즉 자기 자신과의 완전한 일치를 바라는 욕구에서 나왔다. 의식은 자기밖에 어떤 다른 것의 존재를 남겨두지 않으며, 다른 것을 의식 안에 포괄하려고 한다. 의식은 자기 충족적인 내재성이며, 자기 자신을 스스로 설정하는 전체성이다. 동시에 의식의 내재성은 무한한 것이다. 전체성의 개념은 주체가 무한한 자기성의 이상(완전한 자기성, 자기 소유의 이상)을 개념적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전체성이란 따라서 동일자 곧 자아의 존재 영역에 속하는 범주이다. 이때 자아는 고전적인 지성주의의 사유주체이거나 현대 실존철학의 행위주체이다. 이 두 경우 지배적인 이념은 자아의 본질을 자기 실현 혹은 자기 확립으로 보는 자아론(egologie)이다. 이같은 철학에서 내가 아닌 다른 존재는 나의 인식 대상이거나 내가 나 자신을 기획하고 서기 위해 어느 정도로 필요로 하는 삶의 공간 혹은 세계이며, 결국 모두 내 자신의 실현이나 확립에 기여할 뿐이다. 요컨대 타자는 자아로 환원되어 버린다. 125)
레비나스는 전체성의 철학은 중립의 철학이라고 말한다. 전체화의 과정은 관계의 互換可能性을 내포한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아무 상관없이 해석되는 관계의 호환가능성안에서 그들은 서로서로 짝지어진다. 그들은 외부로부터 볼 수 있는 체계 안에서 서로를 보완할 것이다. 내재적 초월성은 타자의 근본적인 타자성을 파괴하면서, 체계의 통일로 재흡수한다.126) 결국 동일자와 타자는 하나의 시선으로 다시 통일되며, 그들을 분리하는 절대적인 거리는 소멸된다. 正과 反은 서로에 저항하면서도 서로를 요구한다. 그들은 그들을 포괄하는 종합적 시선에 대립적으로 나타난다. 그들은 이미 전체성을 형성한다. 127)
그러나 이같이 전체화하고 일반화할 수 없는 경험이 있다.128) 레비나스에 의하면, 이같은 경험은 환원할 수 없는 궁극적인 관계의 경험이다. 환원할 수 없는 긍극적 관계는 종합에서가 아니라 인간의 얼굴을 마주보는 관계에서 즉 사회성과 도덕적 의미속에서 나타난다. 인간 관계에서 전체화하지 않는 관계는 자아와 타자를 종합적 체계아래 함께 생각하는 문제가 아니라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면서 형성하는 관계(face-to-face relation)이다. 인간간의 진정한 연합 또는 진정한 함께 함은 종합(synthese)의 합이 아니라 마주보면서 함께 하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전체성과 무한』의 “전체성의 파괴”에서 ‘절대적으로 다른 것은 다른 것임’을 강조한다. 절대적으로 다른 타자(absolument autre)는 형식적이지 않은 타자성(alterite)을 지닌 타자인 것으로, 동일성의 단순한 반복이 아니며, 동일자에 대한 저항에서 형성되지 않는다. 그와 나는 하나의 수를 형성하지 못한다. 절대적으로 다른 타자란 동일자의 모든 주도성과 패권주의에 선행하는 것으로, 바로 타자의 내용을 구성하는 타자성을 지닌 타자이다.129)
2) 무한의 이념과 타자로의 초월성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의식의 자아 중심적 자기-동일성은 외재성(exteriorite)의 실체를 밝혀주지 못한다. 더욱이 자기화 과정은 추상화, 보편화, 전체화의 과정으로 진행되어 구체적인 개인성이나 개체성을 말살하게 된다. 이같은 사유과정은 이질적인 것에 대하여, 적대적이고 억압적으로 반응한다. 전체화 과정의 귀결은 전쟁과 폭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레비나스는 동일자에로 환원 불가능한 타자성, 이질성, 타율성(Heteronomie)을 지닌 외재적인 존재를 말한다. 타자가 동일자 안으로 내포(com-pris)될 수 없는 이유는 타자가 무한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표상(representation)은 자아가 타자를 자기화하면서 작용한다. 레비나스는 자아와 타자를 자기화하는 종합이나 혼합이 아닌, 자아와 타자사이의 거리를 유지하는 관계를 설명하고자 한다. 자아와 타자의 거리를 유지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자아들간의 분리이다. 분리아래서 형성되는 자아와 타자를 연결해 주는 것은 바로 ‘초월성’이다. 레비나스는 초월성(transcendance)의 운동을 불만족한 사람이 그에게 놓여진 조건을 거부하는 부정과 구별한다. 부정(negativite)은 확정된 존재를 전제한다. 부정하는 자와 부정된 것은 함께 위치하며, 체계 즉 전체성을 형성한다.130) 그러나 형이상학적 운동은 부정과 일치하지 않는다. 형이상학적 타자성의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초월에로의 이행, 절대적으로 다른 타자에로의 이행이다. 레비나스는 이같은 초월성의 운동이야말로 형이상학적 관계, 윤리적 관계라고 말한다.131) 그러면 이제 이같은 레비나스의 기본개념들을 중심으로 무한의 이념(l'idee de l'infini)과 타자에로의 초월적 관계에 대하여 살펴보자.
(1) 타자의 개념과 무한의 이념
레비나스는 모든 진리나 가치들이 자율적 주체의 선험적 활동으로 환원된다는 주장에 반대하면서, 다름의 환원할 수 없는 계기들을 주장한다. 그는 모든 실재들의 근본적인 다름을 동일자로 불리는 하나의 근본적이고 중심적인 審級의 주변적 요소들로 보는 대신에, 다름의 환원 불가능성을 인식한다.132) 타자에 대한 이같은 인식은 존재론의 은폐된 일원론(monism)을 다원론으로 대신한다. 다원론의 기본적 구조는 동일자(le Meme)와 타자(l' Autre) 사이의 관계이다.
그러나 좀 더 구체적으로 ‘타자’란 누구인가? 무엇인가? 열망은 무엇을 누구를 초월하는 것이고, 누구와 무엇에 관련되는가? 우리는 여기서 타자의 개념을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레비나스는 타자를 자아의 내면성에 대한 외재성(exteriorite)으로 설명한다. 외재성의 범주는 대상의 사물적 세계로서의 타자, 인간존재로서 타인인 타자, 그리고 신으로서의 타자로 구분해 볼 수 있다. 대상적 세계로서의 타자는 자아의 이기주의나 경제학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으로, 자아에 의해 동화될 수 있는 영역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대상적 세계와 자아의 관계는 물과 물고기처럼, 자아가 세계의 요소적 환경 안에 젖어 누리는 것이지, 세계가 자아의 소유의 대상으로 전락되어 규정되는 것은 아니다.
레비나스는 열망되는 것의 타자성은 타인(the human other, Autrui)의 타자성, 신(the Most - High, God, le Tres - Haut)의 타자성이라고 명시한다. 이것은 윤리학과 종교학의 문제이기도 하다.133) 타인과 신은 모두 열망되며, 절대적이고 높다. 열망되어지는 타자는 대상과 같이 자아로 동일시되거나 통합될 수 없다. 타인(autrui)은 어떤 면에서 가시적이면서 비가시적이지만, 신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이같은 관계는 나의 위치, 타인의 특별함, 나-타자 관계의 특별한 구조로 구성된다. 타인과의 관계와 신(Dieu)과의 관계는 완전히 일치한다. 신과 관계 맺는 유일한 방법은 인간 얼굴의 요청에 응답하는 것이며, 그것을 통해서 선하게 되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신과 인간의 관계를 ‘형이상학적인 것과 인간’안에서 언급하고 있다.
형이상학은 사회적 관계(rapport social)가 실현되는 데서, 즉 우리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실현된다. 인간의 관계로부터 분리된 신과의 관계가 있을 수 없다. 타자는 형이상학적 진리의 중심이며, 신과 나의 관계에서 불가결하다. 그는 중재자적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다. 타자는 …… 그의 얼굴에 의하여, 그리고 그의 얼굴 속에서 신이 계시되는 높이를 나타낸다.134)
우리가 인용문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레비나스는 타인에 대한 관대한 다가섬 외에 신과의 관계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없다고 본다. 이같은 입장은 필연적으로 우리를 추상적 신의 이념으로부터 구체적 인간에로 향하게 한다. 이같은 점이 레비나스 이론이 구체성을 띠게 되는 탁월함이다. 레비나스는 자아와 타인의 관계를 형이상학적 관계, 윤리적 관계로 표현한다.
타인으로서의 타자는 자아의 자기중심적 표상의 논리 안으로 포섭될 수 없는 사실적 존재이다.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가능성 추구를 인간의 실존적 본질로 정의한다. 여기서 현존재와 현존재의 가능성의 등치가 명시된다. 자아의 능동성으로 가능성의 형식은 이미 훗설의 이념 안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레비나스에게서 인간존재가 자아실현의 본래적 가능성으로 정의되어야 한다는 개념은 전도된다. 즉 나의 자유의 구조는 완전히 전도된다. 여기에 아주 큰 저항이 아니라, 절대적 타자와의 관계, 무저항의 저항, 윤리적 저항의 관계가 형성된다. 그것에서 바로 무한의 차원, 동일자의 제국주의(imperialisme du Meme)에 제동을 거는 새로운 차원이 열린다. 레비나스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윤리적 저항이 무한의 현전이다. 만일 얼굴에 새겨진 살인에 대한 저항이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면, 실제로 우리는 매우 약하거나 매우 강한 실재에 접근해야할 것이다. 그것은 아마 우리의 의지를 막을 것이다. 의지는 비이성적인 것이나 자의적인 것으로 판단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적으로 가질 수도 없고, 소유할 수도 없는 외재적 존재에 접근해갈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자유는 자아에 적합한 제국주의를 거부하며, 그것이 자의적일 뿐만 아니라 부당한 것임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타자는 단순히 또 다른 자유가 아니다. : 나에게 불의(l'injustice)함을 알려주면서, 그의 시선은 이념적 차원으로부터 나에게 온다.135)
이처럼, 레비나스는 그의 전 작품에서 타인은 세계 안의 다른 모든 존재자들과는 구별되고 있음을 보여주려고 애쓴다. 레비나스는 정의란 타자와 더불어 시작되는 것임을 강조한다.136) 타자의 전통은 권력에의 의지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타인의 권리에 대한 자아의 자의성(arbitraire)의 과도함에 대항하는 것이다. 모든 타자적 존재자들( tout autre)이 동화에 저항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타자들 중에서 인간존재를 의미하는 타인(autrui)은 자아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다.137)
그런데 타인은 어떤 이유에서 환원 불가능한 것인가?
무한의 이념은 타자(the Other, Autrui)와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무한의 이념은 사회적 관계이다. 이 관계는 절대적으로 외재적인 존재에 접근하는데 있다. 사람들이 내포할 수 없는 이같은 존재의 무한성이 외재성을 구성하고 보장해준다. 138)
이 말의 의미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레비나스는 ‘무한자’를 절대적으로 다른, 나에게로 도무지 환원할 수 없는 타자라고 말한다. 타자를 ‘무한자’로 일컫는 것은 타자의 수가 한없이 많다거나 타자에게 도무지 접근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다. 타자는 나의 인식과 능력의 테두리 안으로 가져올 수 없을 정도로 무한하다. 타자는 전체화의 틀을 벗어나 있다. 타자는 레비나스에 따르면 나의 자율적 의식보다 더 깊이 나의 존재에 와 닿아 있다.139) 무한자의 타자성은 그것을 생각하는 사유 안에서 소진되지 않는다. 무한자를 생각하면서, 자아는 그가 생각하는 것 이상을 생각한다. 무한자는 개념 안으로 들어 올 수 없는 것으로, 근본적으로 절대적인 타자(absolument autre)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레비나스의 형이상학은 전환(turn)을 요구한다. 그것은 시각의 전환, 마음의 전환, 지성의 전환을 의미한다. 그것은 동일자안에 타자가 포함되는 것을 막는 대신에 그들 사이의 관계를 분리되면서도 연결되는 것으로 전환시킨다. 그렇다면 형이상학적 전환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우리는 사유의 전환(Kehre)을 통해 正義가 힘으로, 모든 타자가 동일자로 환원되지 않던 고대의 전통을 따라야 한다. 타자의 전통은 무신론(l'atheisme))으로 출발하는 하이데거주의자들이나 신헤겔주의자들에 반대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종교적인 것은 아니라 철학적인 것이다. 플라톤이 존재( l'etre)위에 선(Bien)의 자리를 놓고, 파이드로스(273e-4b)에서와 같이 진정한 대화란 신과의 대화로 정의 내릴 때, 그는 이같은 전통에 속한다. 140) 그러나 우리가 가장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무한성의 이념에 관한 데카르트적 분석이다. 데카르트에서 사유하는 자아는 무한자와 관계를 가진다. 이 관계는 그릇을 내용물에 관련 지우는 것이 아니다. 자아는 무한자를 내포할 수 없다. 그것은 또한 내용물을 그릇에 묶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자아란 무한자로부터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141)
앞의 인용이 말해주듯이 레비나스는 데카르트가 형이상학에서 본질적인 진리를 옹호했으나 현대철학자들이 대부분 외면하거나 망각하였던 무한성의 이념을 보여주고자 한다. 무한성의 이념에 대한 데카르트의 성찰은 코기토의 이념보다 더 근원적인 이념을 보여준다. 유한한 것을 궁극적인 것으로 하는 모든 철학과는 달리 데카르트는 무한한 것은 본래 다른 유한한 관념의 토대에서 그것의 이념을 구성하는 모든 시도를 거부하면서 의식 안에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데카르트의 사유하는 자아와 무한자의 관계는 그의 무한이념에 대한 설명으로 나타난다. 무한자를 생각하면서, 자아는 처음부터 그것이 생각하는 것 이상을 생각한다.142)
말브랑슈(Nicole Malebranche)143)를 인용하면서, 레비나스는 데카르트의 경우에 신이 의지하고 있는 코기토는 신의 실존을 정초하기에는 약간의 모호성이 남아있다고 지적한다. 데카르트에서 무한의 우선권은 의지의 자유에 종속된다. 페이프르작도 데카르트가 정의를 무한의 고유한 초월성으로 정초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성찰』의 모든 지식의 형성에 관한 논의에서 인간의 자율성을 강조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레비나스는 영혼과 인식의 구조는 다르다는고 본다. 이같은 깨달음은 그가 여타의 다른 데카르트주의자들을 넘어서도록 해준다. 이에 대한 레비나스의 설명을 직접 들어보자.
무한의 이념은 더 적은 것 안에 더 큰 것을 지니고 있는 것(le plus dans le moins), 생각하는 것 이상을 생각하는 사유이다. 그것은 열망으로 나타낼 수 있다. 열망은 무한의 무한성의 척도라고 말할 수 있다. 144)
우리가 인용문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무한의 이념은 사유의 크기를 넘어선 충만성을 지닌다. 유한한 사유와 무한의 이념의 관계를 설명해 주는 개념은 ‘열망’이다. 열망의 개념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레비나스가 『전체성과 무한』을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열망145)으로 시작하는 점을 염두에 두면 알 수 있다. 그는 열망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하여 플라톤의 에로스의 개념을 도입한다.146) 플라톤은 욕구의 만족이 공허로 귀결되는 것과는 달리 고통이나 결핍이 수반되지 않는 동경을 파악한다. 이것에서 레비나스는 열망(desir)의 형태를 인식한다.
열망은 타자에 대한 초월성이 나타나는 구체적인 방법이다. 그것은 욕구(need, besoin)의 형태와도 구분된다. 욕구는 항상 만족을 향하고 있다. ‘욕구’는 결핍(lack)된 어떤 것에 대한 모든 인간의 지향을, 불완전한 것을 얻으려는 인간의 지향을 나타낸다. 그것은 박탈의 고통이 수반된다. 굶주림이 그것의 좋은 예이다. 욕구의 만족이 삶과 사유의 서구적 양식에서 경제학을 지지해 주는 반면, 열망은 그같은 경제학을 뒤흔드는 다른 원리이다. 열망의 형태는 외재성, 열망되는 존재의 다름, 낯섦을 향하는 것으로 특징지어진다. 욕구와 근본적으로 다른 열망은 채워질 수 없는 것이기에 만족될 수도 없다. 외재적인 것에 대한 열망의 초월성은 완성될 수도 없고 통합되어질 수도 없다. 또한 열망되어지는 것은 나에게 친근하게 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열망되어지는 존재는 외재성(exteriorite)의 특징을 가진다. 타자는 자아의 소유로 전환되는 것에 대하여 저항한다. 타자는 표상에 의하여 제한되고 파악되는 명제(theme)나 노에마(noema)가 아니다. 모든 가시적 실재들이 표상에 의해 내 앞에 놓여지는 반면에, 열망되는 것들은 볼 수 없는 것이고, 표상될 수 없는 것이며, 비개념적인 것이다. 열망은 지향성의 구조를 갖지 않는다. 열망하는 주체와 열망되는 타자 사이의 분리는 어떤 통합도 불가능한 것이다. 열망되는 존재는 이런 면에서 죽음147)과 유사하다. 양자는 모두 절대적인 다름에 의해 나를 두렵게 하고 놀라게 한다. 죽음도 타자도 나의 가능성안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열망(desir)은 여타의 욕구(besoin)와도 다르다. 그것은 충족되도록 바랄 수도 없고, 충족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열망되는 것이 도달한 것으로 여겨지는 정도까지만 커진다. 인간실존과 철학의 뿌리에 있는 에로스는 타자를 타자로서 열망할 뿐이지 그것에 통일되거나 그것으로 채워질 수도 없다. 그것은 타자가 독립적으로 성장하기를 바란다. 열망은 혼합이나 종합의 나르시시즘적 충동에 저항하는 善性이다. 열망은 자아적 존재의 욕구충족을 위해서 빈 구멍을 메꾸는 것이 아니라 열어 젖히는 것이고, 헌신하는 것이다. 148) 그러므로 진정한 열망은 열망하는 것을 충족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이다. 그것이 선이다. 그것은 자기에게로 회귀하려는 향수병도 아니다. 그것은 완전한 존재 안의 결핍이자, 아무것도 결핍되지 않은 것이다. 열망은 누를 수 없는 것이다. 만족이 없는 이같은 열망은 타자의 타자성에 대한 인식을 가진다.
(2) 무한의 이념과 타자로의 초월성
레비나스는 『전체성과 무한』의 ‘형이상학과 초월성’에서, 초월성(transcendance)을 동일자와 타자 사이를 이어주는 개념으로 설명해간다. 그에게서 철학의 문제는 존재, 존재임, 존재자들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동일자와 타자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그와 같은 관계의 궁극적 지평이 초월성(transcendance)이다. 그러므로 동일자와 타자의 관계는 거리, 분리, 초월성 등의 개념으로 설명된다. 형이상학 또는 초월성은 외재성에 대한 열망에서 인식된다.149) 타자에 대한 자아의 올바른 태도는 열망(desir)이다. 이것이 타인의 다름을 존중하는 형태이고, 자아에 의해 다해질 수 없는 타인의 무한 의미를 대하는 방식이다. 초월은 타인의 다름을 열망하면서 가능해진다.150)
레비나스는 형이상학적 운동을 초월적인 것, 초월성으로 명시한다. 형이상학적 초월성은 자아와 타자 사이에 놓인 거리에서 명료해지며, 외재적 사물을 대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자아가 타자를 지향적 대상으로 삼아 총체화하는 방법, 자기화하고 동일시하는 표상(representation)의 방법과 구분된다. 형이상학적 초월성의 관계에서 타자의 근본적인 다름인 타자성(alterite)은 자아와의 관계에서도 자신의 본질을 시종일관 유지하면서, 상대적으로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존중받는다.151) 그렇다면 이기주의로 형성되어진 동일자가 어떻게 타자의 타자성을 빼앗지 않고 타자와의 관계로 들어가는가?152)
레비나스는 무한성의 이념은 타자와 관련하여 동일자의 분리를 가져온다고 말한다. 분리는 각각의 존재들이 자신의 시간, 각자의 시간을 가져서 보편적 시간으로 융해되지 않고, 그래서 자신의 내면성을 가진다면 근원적인 것이다. 내면성에 의하여 각각의 존재들은 개념화를 거부하고 전체화에 저항한다. 보편적 시간, 역사의 우선성은 존재 이해를 위해 선택적으로 구성되고, 그 속에서 내면성은 희생되어 왔다. 레비나스는 인류전체의 개념에서 개인의 내적 삶은 배제되어 왔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역사적 실재는 이같은 객관성뿐만 아니라 내적인 의도, 역사적 시간의 연속성을 깨는 비밀에 의해서 형성되며, 이같은 비밀을 토대로 사회의 다원성은 가능해진다.153) 레비나스는 분리는 무한의 이념에 요구되지만, 변증법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그는 분리가 없다면 참된 진리도 존재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 참된 진리는 거리를 유지하기 때문에, 인식하는 자와 인식되는 것의 결합을 초래하지 않는다. 인식하는 자는 인식되는 것에 참여하지도 않고, 일치하지도 않는다. 진리의 관계는 내면성을 포함하며, 여기서 형이상학자는 형이상학적 대상들과의 관계에서 분리를 유지한다.154)
레비나스는 분리된 존재의 독립은 타자적 관계의 반대편에서 분리된 운동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열망 속에서 타자를 향하여 가는데 있다고 본다. 분리된 존재는 자족적이며, 자율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자를 구한다. 레비나스는 이같은 상황을 대화의 관계로 본다.155)
이같이 형이상학적 지평 위에 펼쳐지는 대화의 형태를 레비나스는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에서 발견한다. 이에 대한 레비나스의 설명을 직접 살펴보자.
그것은 살아있는 존재 안에서의 이성, 생생하고 활기 있는 대화, 말할 때와 침묵할 때를 알면서 스스로 방어할 수 있는 대화 안에서 확립된다.156) 그러므로 대화는 미리 제조된 내적인 논리를 펼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자유의 위험 속에서 사유자들간의 논쟁 속에서 진리를 구성하는 것이다. 언어의 관계는 초월성, 근본적인 분리, 발화자의 낯섦, 타자의 계시를 함축한다. 그것은 초월성안에 자리를 가진다. 그러므로 대화는 절대적으로 다른 어떤 것의 경험이며, 순수한 지식 또는 경험으로 나타난다.157)
이로써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레비나스는 자아의 동일시, 총체성을 형성하지 않는 관계양태를 대화로 본다. 동일자와 타자의 관계, 즉 형이상학적 관계는 근본적으로 대화 속에서 작용하며, 여기서 동일자는 특수하고, 실존적이며, 단일하고, 자생적으로 유지된다.158)
전체성을 형성하지 않는 관계는 자아로부터 타자로 나아가는, 얼굴을 마주보는 관계,159) 거리를 묘사하는 존재 안에서 생성될 수 있다. 이것이 자아와 타인 사이에 형성되는 윤리적 관계이다. 초월적인 것과의 관계는 사회적 관계이다. 무한한 타자로서 초월적인 것은 우리를 분리시키면서, 호소하면서 여기에 있다. 레비나스는 타자의 가까움(proximite), 이웃(le prochain)의 가까움은 존재 안에서 절대적 현존을 계시하는 불가피한 계기라고 본다. 바로 그의 현현이 낯선 이, 과부, 고아의 얼굴 속에 나타나는 결핍이다. 형이상학은 사회적 관계가 작동되는 곳에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실현된다. 타자는 형이상학적 진리의 중심이며, 신과 나의 관계에서 불가결하다. 타자는 바로 신의 얼굴인 것으로, 신이 계시되는 높이를 나타낸다. 레비나스는 윤리적인 것의 우선성, 인간과 인간관계의 우선성을 확립하는 작업에 몰두한다. 그래서 형이상학을 윤리적 관계 속에서 작용하는 것으로, 모든 형이상학적 확신이 정신적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은 도덕적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밝히고자 한다.160)
4. 第一哲學으로서 윤리학
서구철학의 역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을 학문의 한 분과로 분류한 이후로, 존재론을 형이상학 안에 위치시켰으며, 존재론과 형이상학을 구분하지 않고 둘 다 ‘존재에 관한 학’으로 분류되어 왔다. 철학적 윤리학도 전통적으로 존재론과 형이상학을 동일한 차원에서 다루어왔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이제 존재론은 표상에 사로잡혀 있다고 비판하면서, 이같은 전통으로부터 결별한다. 레비나스에게서 타자에게로 향해 가는 계기는 감성과 정서이다. 그리고 자아와 타자의 형이상학적 관계는 초월적 운동이지 표상이 아니다. 이와 같은 전통철학에 대한 레비나스의 비판과 개념구분을 중심으로 왜 그가 존재론적 형이상학을 비판할 수밖에 없고, 왜 존재론에 대한 윤리학의 우선성과 윤리적 형이상학을 주장할 수밖에 없는가를 살펴본다.
1)존재론적 형이상학 비판
존재론의 원어인 ontologia는 그리이스어 onta(einai의 분사로서 ‘존재하는 것’이라는 뜻)와 logos(법칙, 논리 혹은 학문이라는 뜻)를 결합하여 만든 용어이다. 존재론에 대한 관심은 20세기 전반부터 커졌는데, 보통 존재자의 일반적인 근본구조와 그 마지막 근거를 문제삼는다. 이와 같은 의미의 존재론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형이상학과 같은 성격을 지니게 된다. 이러한 존재론은 원래 서양의 전통적 철학의 근원적 토대를 이루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자로서의 존재자’ 혹은 ‘존재자 자체’를 탐구하는 학문을 제일철학이라고 부른다. 그에 의하면 ‘존재자 자체’는 곧 실체(ousia)이며, 무엇을 연구한다는 것은 곧 그의 원인이나 원리를 탐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일철학은 실체의 근본구조를 그의 원인이나 원리에 따라 탐구하는 것이다. 이 제일철학이 후에 ‘Metaphysika’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그리이스어 ‘Metaphysika’는 주역 繫辭傳의 ‘형이상자를 도라 하고, 형이하자를 기라 한다’에서 나온 말을 빌어 形而上學으로 옮겨진다.161) Metaphysika는 meta(뒤라는 뜻)와 Physika(자연학)의 합성어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학을 먼저 배운 후에 모든 존재 전반에 걸치는 근본 원리 즉 존재하는 것으로 하여금 존재토록 하는 원리를 연구하는 학문인 제일철학(proto philosophia) 또는 신학(theologika)을 배우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한 바가 있다. 후에 meta는 trans(무엇을 넘어서고 있다)로 이해 되여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궁극적인 원인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뜻을 갖게 되었다.
이와 같이 제일철학 또는 형이상학이라는 이름아래 존재자 자체 또는 실체를 탐구하는 존재론은 그리이스이래 중세를 거쳐 근세에 이르기까지 철학의 중심주제가 되었다. 그러므로 서구철학의 역사는 존재론의 역사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나 칸트 이후 형이상학은 인식의 영역을 벗어나 있는 것으로 배제되어지고, 존재론은 인식론으로 대치되었다. 데카르트에 이르러 인간의 존재는 사유하기에 존재하는 것으로 되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사유에 앞선 인간의 현존재를 분석하게 되었고, 20세기로 들어 하이데거에게서 존재론은 철학의 중심주제로 들어온다. 그는 존재(das Sein)와 존재자(das Seiende)를 구별하면서, 종래의 존재론이 존재자론에 불과하였고, 이제 ‘존재’를 문제삼는 새로운 존재론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에 대한 관심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는 그리이스 철학자들로부터 존재의 문제가 중심문제로 되어 왔으나, 존재를 물어야할 형이상학이 실은 존재자를 문제로 삼는데 그치고 있었다고 경고하고, 존재의 질서를 결정하기 위해서 우리의 현존재를 철저히 규명하고 거기서 존재의 규명으로 나아가려고 한다.
앞의 하이데거에 대한 비판에서 논의되었듯이, 그에게서 이해된 인간존재는 자신의 현존재를 미래의 가능성으로 기투하는 존재이다. 자기자신의 실존을 염려하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가능성을 설계하고, 타자를 자신의 구도에 적절하게 배치하고 이용한다. 달리 말하자면, 주체가 사물을 자신의 목적성(finalite)에 따라 대상화하여 표상한다.162)
그런데 만일 표상이 우리에게 사람이건 사물이건 타자의 상을 올바로 제시하지 못한다면, 존재론은 의식을 초월해 있는 것에 대하여 밝혀줄 수 없다. 레비나스는 존재론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존재론적으로 탐구되는 존재와의 관계는 그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존재자를 중화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타자와의 관계가 아니라 타자를 동일자로 환원하는 것이다.”163)
인용문에서 말하는 ‘존재자의 중화’란 존재자를 의식의 대상으로, 즉 표상으로 끌어들이는 작업에서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것이다.
철학을 위시한 모든 근대학문들은 그 동안 두 가지 기본적인 관심사이에서 고민해왔다. 하나는 철학자가 연구하려는 구체적인 경험의 대상을 가능한 한 ‘있는 그대로’ 밝혀보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논리적으로, 체계적으로’ 밝히고 표현해 보려는 것이다. ‘있는 것’ 일반에 대한 논리적 접근은 존재론이요, 따라서 서양철학은 근본적으로 존재론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발생하는 문제는 논리란 그물에 걸리지 않는 존재의 고기는 잡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논리의 그물에 잡히지 않는 고기가 쓸데없는 것들이라면 문제가 없지만, 삶의 현실에서 절박하고 중요한 문제라면 심각한 것이다. 예를 들어 고통받는 이라든지, 굶어 죽어 가는 이라든지 하는 현실적 문제들이 논리적으로나 존재론적으로 접근할 수 없기에, 164) 그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중화하고 희석한다면 문제의 본질을 벗어날 수밖에 없다.
이같은 본질적 문제로부터 레비나스는 존재자와 실질적으로 관계 맺는 궁극적 방법을 형이상학으로 본다. 이것은 그가 존재론과 형이상학을 분리시키고 있음을 의미하는데, 존재론과 형이상학에 대한 레비나스의 입장은 “존재론은 형이상학을 전제로 한다”165) 라든지 “형이상학은 존재론에 선행한다”166)는 명제로 요약할 수 있다.
“형이상학은 존재자와의 관계를 통해서 존재론을 형성하는 인식행위의 토대를 제공한다. 그리고 이같은 존재자와의 관계는 모든 존재론에 앞선다. ; 그것은 존재 안의 궁극적 관계이다. 존재론은 형이상학을 전제로 한다.”167)
요컨대 레비나스는 존재론적 세계구성에 앞서서 즉 표상작용에 앞서, 다른 존재자와의 관계 즉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선행해야 함을 주장한다. 타자의 타자성에 접하려는 사람은 존재론을 초월해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존재론적 개념들은 이미 의식에 의해 주제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적 관계는 존재와의 관계가 아니라, 존재를 넘어선 것, 의식을 넘어선 것과의 관계이다. 나의 의식을 넘어서 무한성을 계시하는 존재자에게 다가가는 방법은 타자에로의 초월성을 통해서만 가능하고, 이같은 초월성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존재론과 인식론을 벗어 던질 수밖에 없다. 레비나스는 타자에로 초월해 가는 관계를 형이상학적 관계라고 말하며, 다른 사람에 대한 형이상학적 접근을 윤리적인 것으로 말한다.
레비나스는 윤리적 문제는 단순히 존재론적이거나, 존재사건의 문제와 대비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존재론은 윤리학의 근본문제를 존재론적 문제로 전락시키고 있다. 윤리적 문제에 대한 접근은 존재하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마땅히 존재해야 할 것에 대한 의무와 책임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 윤리학은 존재론을 가로지르는 존재이상의 것이어야 한다. 윤리학은 존재과정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존재보다 더 나은 것(better than being)에 관한 것을 문제삼는다.168)
존재론에 대한 윤리학의 우선성은 우리자신이 주관성, 공존재, 세계-내-존재 인 것에 앞서서, 다른 사람을 위한 존재( being-for-the-other)임을 인식하는 충격 속에서 확신되어진다. 그것은 존재, 본질, 정체성, 표상, 원리 등과 같은 존재 문제에 대한 윤리의 우선성169)에서 발생한다. 이것은 말해진 것, 의식되고, 지향되고 의도된 것 보다 마주보면서 말하는 것, 직접적으로 노출되어서 윤리적 호소와 간청을 보여주기도 하고 때로는 강력하게 윤리적으로 행할 것을 명령하는 얼굴의 현상 등이 더욱 더 근원적이라는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170)
윤리학은 강력하지만 그것이 군대, 무기와 같이 더 큰 힘을 가지는 세력에 대항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책임감이나 성실성의 미약함에 저항하기 때문이다. 도덕적 힘, 대면적 관계의 가까움, 다른 이의 얼굴이 나타내는 높이와 낮음은 핵무기를 포함한 세계의 모든 힘에 대한 대항세력이다. 도덕적 힘은 전체화하고 종합화하는 힘, 존재와 본질의 힘보다 더 강하지 않지만, 더 선하며, 이것이야말로 도덕의 진정한 힘이다.171)
2) 윤리적 형이상학으로의 전환
앞의 절에서 논의된 바와 같이, 존재론적 전통은 자아중심의 표상의 형이상학에 머물게 되었다. 레비나스는 이와 같은 이성의 지향성을 문제삼으면서, 의미를 구성하는 능동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에게로 부여되는 수동성으로 나타나는 비-표상적이고 정서적인 요소가 있음을 나타낸다. 이같은 인식으로부터 레비나스는 그의 시선을 신체성으로 돌린다. 그리고 훗설의 현상학적 환원의 세계에 들어가기 전에, 그리고 하이데거의 기능의 세계에 앞서서, 어떤 조직화된 총체성이나 체계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생생한 감각적 삶의 혼돈에 기반한 또 다른 의미의 세계가 전개되고 있음을 주목한다. 이것은 몸과 감성의 영역으로, 이성적 질서의 외부에 있다.172) 몸과 감성의 영역은 20세기 데카르트적인 프랑스 철학자 메를르 퐁티의 관심사였지만, 훗설이나 하이데거와 같은 독일 철학자들에게는 다루어지지 않는 부분이다. 하이데거의 세계이전에 하이데거가 인식하는데 실패한 몸의 삶, 심층적 존재가 있다. 만일 이같은 수동적 존재양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능동적 반응의 가능성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론적이건 기능적이건 특수한 방향에서 직접적으로 사상에 동인을 제공해주는 것은 정확하게 이같은 수동적 계기, 정념이기 때문이다.
몸적 사유에 대하여 레비나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몸은 다른 대상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분리가 지배하는 영역이다. ? ? ? ”173) “육화된 사상은 처음에 세계를 사유하는 사상으로부터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독립을 확신하는 분리된 실존으로부터 생산된다. ? ? ? ”174) 『존재와는 다른 것』의 번역자 서문에서 링기스(Lingis)는 레비나스의 입장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주관성이 외부로 드러나게 되고, 타자성을 수용하게 되는 것은 의식의 육화(incarnation)속에서이다.”175)
이와 같은 설명들은 모두 인간존재를 이성적 차원뿐만 아니라, 감성적 차원에서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계속되는 논의에서 거듭 확인하게 되듯이, 레비나스에게서 감성적 차원은 사회적 상호작용을 근원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것이고, 나의 의식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다른 존재와의 관련가능성을 나타낸다.
레비나스는 이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향유의 지향성은 표상의 지향성과 비교하여 설명할 수 있다. 그것은(향유의 지향성) 표상성안에 내포된 선험적 방법이 정지시키는 외재성을 유지하는데 있다. 외재성을 유지하는 것은 단지 세계를 확신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구체적으로 그 안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176)
그러나 표상적 지향성안에서 대상은 나로부터 분리되지 않고, 나의 것이 되며, 동일자로 환원된다. 합리적 주관성이 아닌 분리를 통해서 확신되는 주관성은 정서의 주체이다. 자아는 이제 차가운 인식론적 자아로부터 느끼는 자아, 살아 있는 자아, 숨을 쉬고 노동으로 흥분하는 자아로 된다. 정서를 인간존재의 요소로서 표현하는 것은 생생한 체험이야말로 이론적인 것에 앞선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생생한 체험이란 단순한 동물적 체험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이념 안에서가 아니라 느낌 안에 정초된 그 자신의 의미를 포함한다. 어떤 것을 통해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으로 살아가는 것이고, 어디에선가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삶은 이미 어떤 의미에서 타자성에 관련된다. 환경 속에 존재하지만 그 환경과 같은 뜻이 아닌 향유적 자아, 이기주의적 자아가 윤리이전의 주체를 구성한다. 그리고 생생한 경험의 세계는 나의 지배하에 있지 않다. 여기서 주관성은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인식을 포함한다. 레비나스에게서 삶의 세계는 타인으로서의 타자성, 다른 사람을 포함한다. 이 점에서 삶의 세계는 사회적이다. 그러므로 생생한 경험이 이론에 선행한다고 말하는 것은 사회적인 것이 이론적인 것을 넘어선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성의 의미를 인식론적 이성에서가 아니라 정서의 윤리성 위에 정초한 것이다. 177)
그러므로 레비나스의 형이상학은 정서의 주제아래 의식을 넘어서는 영역을 토대로 하는 철학으로 향한다. 비록 이같은 영역이 구성적 대상의 세계는 아닐지라도, 그것은 의미가 전개되고, 의미로 부여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의식을 넘어서 도달하는 것으로 정서의 형이상학적 요소를 본다. 향유 안에서 레비나스는 대상의 내용을 객관화하지 않고, 비표상적으로 연관시키는 지향성을 발견한다. 정서적 지향성은 타자성을 향하도록 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타자성에 보여지면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정서 안에서 인간은 자신을 초월해 있는 것에 보여지면서 정의된다. 비록 에고 코기토와는 다를지라도, 향유의 주관성은 합리적 주관성과 중요한 유사성을 공유한다. 양자는 이기적이며, 세계의 타자성을 자아로 흡수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등장하면서, 그는 이같은 에고이즘을 문제삼게 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타자로서 인식하는 것, 주관성의 다른 차원이 발생한다. 178)
레비나스는 자아를 다차원적인 것으로 보고, 자아를 선험적 자아내지는 합리성의 개념 안에서 설명하는 방식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그래서 능동적이고 합리적인 ‘에고 코기토’ 즉 합리적 주관성으로부터 감성에 근거를 둔 수동적 자아를 분리시킨다. 레비나스는 윤리적 주관성으로 정의되는 도덕적 인간은 합리적 주관성도 아니고, 고립 안에서 취해지는 존재의 향유적 주관성도 아니고, 이들 두 가지 양태의 주관성이 모두 필요하다고 본다. 레비나스는 합리적 주관성은 타자에 의해 심어지는 것으로 본다. 타자에게 보여지면서 자아의 형이상학적 조건이 발생한다.
자아의 소유적 경향성에 자신을 양도하는 세계의 타자성과 달리, 사람들간의 타자성은 자아의 소유적 경향성을 문제삼으면서 나의 향유를 압도한다. 다른 사람은 동일성의 자아로 환원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들 사이의 타자성과 사물과의 타자성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사람들은 소유에 저항하지만, 사물들은 자아의 소유적 경향성에 저항하지 않는다. 레비나스는 향유의 수준에서 전개되는 주관성과 ‘다른 사람에 의하여 인질로 잡힌 자아’(the self held hostage by the other)179)로 표현되는 윤리적 주체성을 구분한다. 후자의 윤리적 주체성으로부터 도덕적 자아의 탄생이 가능해진다. 향유적 자아가 세계 안에 위치하고, 향유 안에서 소유하고, 필요의 충족으로 나타나는 반면에, 윤리적 주체는 환경적 타자를 소유하려는 경향과 소유에 대한 다른 사람의 저항사이의 긴장 안에 놓인다. 정서의 형이상학과 윤리적 책임의 출발선은 다른 사람의 얼굴이 나타내는 근원적인 무한성의 의미이다. 얼굴의 의미는 윤리적이다. 무한성의 이념을 현현하고 있는 다른 사람의 얼굴은 표상적 사유의 범주, 모든 존재론적 범주, 존재와 본질의 범주를 넘어서 간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얼굴의 현현을 무의미한 내용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정서의 의미로서 감성적으로 이해되는 의미를 제공한다. 180)
다른 사람의 윤리적 의미는 다른 사람이 나의 소유, 동일성의 대상이 아니라는 단순한 인식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다른 사람이 나에게 응답을 명령하는 것에 대한 인식이다. 레비나스는 그 자신이 아닌 어떤 것의 직접적 현존에 맞닥뜨리는 인간존재는 응답해야할 의무를 지닌다는 응답의 윤리를 강조한다. 윤리적 정서는 나에게 영향을 주는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을 인식하는 것이자, 다른 사람의 윤리적 명령(commandement)을 인식하는 것이다. 응답은 다른 사람의 출현에 응답해야할 어떤 것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Ⅲ. 享有的 자아의 內面性
우리가 앞의 논의에서 살펴보았듯이, 레비나스는 서구철학을 존재론으로 규정하고 존재론을 ‘동일자의 철학’, ‘자아론’ 또는 ‘권력의 철학’으로 비판한다. 그러나 레비나스가 존재론을 전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향유적 자아로서 자기보존의 원리에 지배되는 한, 세계를 관리하고 노동하고 그 가운데서 집을 짓지만, 동시에 타자와 함께 거주하며 사회를 형성하게 된다. 그런데 거주와 노동에는 사물을 전체화하고 소유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요컨대 레비나스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나의 범주와 도식으로 환원하는 이론과 활동, 즉 인간의 자기실현과 관련된 일을 존재론이라 부르고 있다. 존재론은 전체성의 이념과 자기실현의 두 축 위에 있다.181)
그러므로 존재론 자체를 거부하기보다는 타인과 관계하는 인간주체의 의미를 다시 새기는 일이 더 긴요하다. 『전체성과 무한』에서의 무한자의 이념을 바탕으로 한 ‘주체성의 변호(une defence de la subjectivite)’라는 말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레비나스가 변호하는 주체의 주체성은 ‘타인을 영접하고 손님으로 받아들이는 행위’에서 성립한다. 하지만 타인을 영접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타인과 나 사이에 거리가 있어야 한다. 타인과의 거리가 없이는 가까움과 친숙성이 있을 수 없다. 타인과의 거리는 타자가 타자로서 나에게 환원될 수 없는 ‘외재성’을 갖듯이 바깥과 구분되는 ‘내면성’이 나에게 있을 때 성립한다. ‘내면성’과 ‘외재성’, 나와 타인, ‘동일자’와 ‘타자’ 사이에 거리가 형성되는 것을 레비나스는 ‘분리’(separation)라고 부른다. 내가 나로서 독립성을 가짐은 다른 것과 분리된 고유의 내면성(interiority)을 가짐을 뜻한다. 내면성이 없는 곳에는 밖으로 향한 초월이 없다. 초월은 언제나 동일자와 타자의 분리를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자기로의 복귀’, 내면성의 형성, 자아의 자기성의 확립을 레비나스는 향유와 거주의 행위로 본다. 향유와 거주는 동일자와 타자, 내면성과 외재성의 분리에 구체적인 내용을 채워준다. 182)
레비나스는 『전체성과 무한』의 제2부 「내면성과 경제」에서 인간의 자기성(ipseity, ipseitas), 자아의 독립성183)이 실현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자아의 자기확립과정은 분리(la separation)184)라는 개념으로 나타난다. 자기 스스로 선다는 것은 자기자신을 타인과 사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고, 세계 안에서 자신이 설 자리를 점유하는 것을 뜻한다. 이같이 세계로부터 자신의 분리를 도모하고, 자신의 주거를 확보하는 자아의 원초적 상태는 향유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이제 이와 같은 내용을 중심으로 자아의 내면성이 확립되는 과정을 살펴본다.
1.享有의 누림
레비나스는 자아와 대상적 세계와의 관계, 사물과의 관계를 향유(jouissance)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프랑스어 jouissance는 한자어 享有로 우리말로는 ‘전신적 기쁨’으로 옮겨진다. jouissance는 원래 자연의 주기적 리듬과 일치하는 여성들의 월경에서 비롯된다. jouissance를 분철하면 가 되는데, 이것의 뜻은 “나는 의미를 듣는다”이다.
이것은 정신과 정신외적인 대상세계의 관계를 주관의 노에시스와 대상적 노에마의 도식에서 보는 훗설이나, 사물들의 의미를 인간의 생존을 위한 도구 사용의 관점에서 보는 하이데거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인간과 사물의 관계를 도구적 관계로 볼 때, 인간의 존재양상은 염려(sorge)가 된다. 그런데 염려가 세계 속에 살아가는 인간의 원초적 존재방식인가? 레비나스는 오히려 즐김과 누림, 향유가 세계 내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존재방식이라고 주장한다. 향유는 염려와는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세계는 염려하는 존재에게는 삶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삶을 향유로 본다면 햇볕과 맑은 공기, 바람과 흙냄새는 향유의 대상이다. 우리는 먹고, 일하고, 놀이하고, 산책하면서 산다. 우리가 산책하는 이유는 어떤 다른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우리에게 만족을 주기 때문이다. 185) 요컨대 향유는 타산이나 고려 없이 받아들이는 삶의 내용인 것으로, 전신적 감성의 체험으로 나타나는 기쁨과 슬픔, 원기회복, 생기 등으로 설명된다.
향유의 관점에서 볼 때 사물의 세계는 우리의 생존을 위한 수단이나 유용성의 대상이기보다는 존재의 원천이고 만족으로 체험된다. 향유는 주변세계를 삶의 요소 또는 삶의 환경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세계는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젖줄이고, 생활환경이다. 세계의 이런 성격을 레비나스는 ‘요소적’(elemental)이라고 부른다. 물이 물고기에게 삶의 요소이듯이, 세계는 인간에게 삶의 요소이다. 요소는 규정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요소는 사물들이 나타나고 사물들이 다시 돌아가는 포괄적인 환경이다. 공기, 바다, 흙, 바람 등은 ‘형식 없는 내용’이고, 이 포괄적인 환경 속에서 우리는 고향을 맛본다. 내가 딛고 서 있는 땅은 내가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과 상관없이 나를 떠받치고 있다. 나는 나를 에워싼 공기와 물과 햇볕을 한가하게 즐길 수 있다. 바로 이 향유를 통해서 주체성의 모습이 최초로 드러나는 것으로 레비나스는 묘사한다. 186)
레비나스는 인간과 환경세계와의 근원적 관계를 사물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방법으로부터 탐구한다. 사물은 우선 요소적인 모습으로 존재한다. 요소적인 것은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니고, 소유가 될 수도 없는 것인 대지, 바다, 빛, 도시 등이다. 바다와 바람을 이용하는 항해사는 이들 요소들을 지배하지만, 그렇다고 바다와 바람을 사물로 변형시키는 것은 아니다. 요소들은 형상을 갖지 않는 내용으로, 오히려 해수면, 들가, 바람결 등과 같은 모습을 띤다. 요소의 깊이는 그것이 땅과 하늘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연장된다. “끝도 시작도 없다”187)
우리는 요소적인 것을 환경에서 발견한다. 나는 항상 요소 안에 있다. 들판을 경작하며,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숲의 나무를 벤다. 요소와 나의 관계는 침수하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요소는 어느 곳으로부터도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보여지는 측면으로 요소적인 것이 제한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요소적인 것은 익명적인 것이다. 그것은 바람, 대지, 하늘, 바다, 공기이다. 이들은 무한성의 개념에 상응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유한성이나 무한성이란 개념적 구별 이전의 것이다. 사유도 요소를 대상화할 수 없다. 레비나스는 요소적인 것을 순수한 성질로서, 자족적인 것으로 설명한다. 레비나스는 요소에 의한 감각작용은 향유에 자신을 제공하는 불확실성으로 나타나며, 순간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본다. 향유 안에서 자질(quality)은 어떤 것의 본질이 아니다. 즉 대지의 견실함, 하늘의 푸르름, 바람의 숨결, 바다의 물결침, 빛의 섬광은 실체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니다. 188)
레비나스는 모든 대상적 세계와의 관계, 사물과의 관계를 향유로 설명한다. 향유는 존재의 풍요함이나 물질성과의 궁극적 관계, 사물과의 관계를 포함한다. 이것은 도구적 세계를 유용성의 개념으로 본 하이데거와의 근본적 차이점이다. 물질이든 도구든 일상용품의 대상들도 향유에 속한다. 더욱이 레비나스는 가구, 집, 음식, 옷 등은 인간에게 있어 도구가 아니라 궁극적인 것으로 설명한다. 의류는 몸을 보호해주고 장식해 주는 것, 집은 몸을 쉬게 해 주는 것, 음식은 원기를 회복해 주는 것이다. 우리는 이들을 향유하기도 하지만, 이로부터 고통받기도 한다. 따라서 레비나스는 이들을 도구가 아니라 궁극적인 것으로 설명하며, 그같은 관계를 향유로 표현한다. 도구자체는 시선의 관점아래 있으며, 향유의 대상이 된다. 사물의 향유란 글을 쓰기 위한 핀이나 못을 박기 위한 망치와 같이 사물을 사용하는 것 뿐만 아니라, 사물을 사용하면서 체험하는 고통이나 기쁨 속에 있다. 도구가 아닌 사물들도 자신을 향유로 제공한다. 예컨대 담배, 빵, 불꽃놀이 등이 있다. 이같은 사물의 사용은 유용성이 없이도, 무용한 손실 속에서, 순수한 소비에서 즐거워하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이같은 향유의 상태를 하이데거에게서처럼 유용성으로 말할 수 있는지 묻는다. 189)
레비나스에서 인간 삶의 근원적 모습인 향유는 자아와 물질적인 대상적 세계의 관계를 말해준다. 우리는 좋은 음식, 물, 향기, 컴퓨터, 일, 관념, 휴식 등을 향유하고 누리면서 살아간다. 이들은 표상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가 향유하면서 살아가는(virve de) 대상적 세계의 사물들은 삶을 위한 도구나 삶의 목적의 개념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들은 하이데거에서처럼 보완의 개념으로 규정되지도 않고, 공리주의적 유용성으로 제한될 수도 없다.190)
레비나스는 도구에의 의존이 합목적성을 의미하고 타자에의 의존을 나타내는 한편, 향유하면서 살아가는 삶은 분리와 독립성을 의미한다고 구분한다. 향유적 자아의 독립성은 삶의 내용을 함축한다. 숨쉬는 것, 먹는 것, 보는 것, 일하는 것 등의 기쁨과 고통이 삶의 내용이다. 삶을 구성하는 내용물들은 삶에 불가결한 것이 아닐 수도 있지만, 때에 따라서는 그들이 없다면 죽을 수도 있는 것이 인간이다. 예컨대 원기회복으로서의 영양(aliment)은 타자를 동일자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향유의 본질이다. 타자인 에너지는 향유 속에서 나 자신의 에너지, 나의 힘, 나로 된다. 모든 향유는 이런 의미에서 영양의 흡수이다. 기아는 욕구이며, 궁핍이다. 그러므로 향유적 삶은 단순히 삶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 영양을 주고 삶을 채워주는 삶의 내용을 대상으로 한다.
향유는 나의 삶을 채우는 모든 내용의 궁극적 의식이다. 레비나스는 내용으로서의 삶은 현상학적 실존이 아니라, 노동과 영양의 삶이라고 단언한다.191) 사물과 삶의 관계는 향유이다. 이것은 행복을 의미하며, 행복으로서의 독립성이다. 그것은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향유하는 것이다. 향유는 심리적 상태가 아니라 자아의 맥박이다. 향유 안에서 인간은 생기를 얻는다. 향유의 행복을 위해서 활동하는 것은 존재를 넘어서는 것이다. 단순히 존재하는 것은 평정(ataraxy)이지만 행복은 성취이다. 향유는 갈증의 기억으로 이루어진다. 향유적 삶이 표상이 아니라면, 삶을 능동성과 잠재성으로 놓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적 도식은 맞지 않는 것이다. 목적과 도구의 체계 안에서 인간은 행위를 통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 자신을 실현시켜 간다.
레비나스는 무엇인가를 향유하며 산다는 것이 인간을 구속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인간들은 그것을 즐긴다. 인간은 자신의 욕구로 행복하다. 욕구는 동일자의 운동이다.192) 타자의 타자성은 욕구에 의해 정복된다. 플라톤을 계승하는 철학적 전통에서는 욕구의 만족에 수반되는 쾌락을 허상으로 부정하면서193) 욕구에 대해 부정적인 관념을 고착시키고 있다. 이에 대하여 레비나스는 욕구를 단순한 결핍으로 인식하는 것은 욕구를 양심도 남지 않은 사회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194) 레비나스는 인간과 세계사이에 놓여진 거리가 욕구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본다. 존재는 세계로부터 분리되어 있으며, 그 관계는 욕구라는 것이다. 세계는 자유롭지만 결핍된 존재에 속하게 된다. 여기에 접합 점으로서의 육체가 있다. 동물적 욕구는 식물적 의존으로부터 자유롭지만, 투쟁과 공포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외적인 세계의 위협이 남아 있기에 욕구는 또한 노동의 시간으로 전환된다. 춥고 굶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피난처를 찾아 헤매는 것, 세계와 관련된 이 모든 의존은 욕구가 되며, 익명적 위협으로부터 본능적인 존재를 구하며, 욕구의 충족을 확신할 수 있는 주체를 구성한다. 나의 몸은 주체가 자신이 아닌 것에 의존하면서 노예화되는 길일뿐만 아니라, 소유하고 노동하며 시간을 가지고, 내가 향유해야 할 것들의 타자성을 극복하는 길이기도 하다.195)
플라톤의 욕구의 심리학에도 불구하고, 욕구는 단순한 결핍으로 해석될 수 없으며, 칸트 윤리학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수동성으로 해석될 수 없다는 것이 레비나스의 주장이다. 인간존재는 자신의 욕구로 번창한다. 어떤 것으로부터 살아간다는 향유적 삶의 역설은 생명이 의존하고 있는 것과 관련된 자기만족이다. 향유하면서 산다는 것은 행복, 자기만족으로, 본질적으로 이기주의에로 전환되는 의존이다.196)
향유와 행복 안에서 자아의 운동은 자아의 충족성을 나타낸다. 자아는 행복, 자신과 집에 있는 현존이다. 그러나 그것은 비아속에 유지된다. 그것은 “그 밖의 다른 것”의 향유이지, 결코 그 자신의 향유가 아니다. 사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동의는 자아를 소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아를 유지하는 것이며, 집에 거주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구성하는 것이다. 거주, 주거는 자아의 이기주의에 속한다. 익명적인 있음, 공포, 전율, 그 자신과 일치하지 않는 자아의 혼란에 저항하면서, 향유의 행복은 집에 있는 자아를 다진다.197)
향유의 근본적인 긍정성은 어느 것에도 대립하지 않으며, 이런 의미에서 처음부터 자족적이다. 욕구는 의존이기 때문에 자유로 특징 지울 수도 없고, 그것이 이미 친숙한 무엇인가로부터 사는 것이기 때문에 수동성으로 특징 지울 수도 없다. 욕구의 고통은 무욕(anorexy)속에서 완화되는 것이 아니라 만족으로 진정된다. 욕구는 사랑 받게 되는 것이다. 욕구가 없는 존재는 욕구가 있는 존재보다 더 행복한 것이 아니라, 행복과 불행의 바깥에 있는 것이다.
2. 향유적 자아와 感性
1) 감성의 의의
서구철학은 감각적 경험에 대한 태도에 따라 인식론적으로 경험론과 합리론으로 구분된다. 함리론은 우리가 감각적 경험을 통해 발견하는 ‘감성적인 것’을 비실재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플라톤에게 이 감성적인 것은 일시적인 것이고, 진정한 실재는 자기 동일적이고 영원하고 순수한 형상이다. 이 형상의 파악이 고대적 합리론의 중추를 형성하였다. 데카르트에서도 감성적인 것은 의심스러운 것이다. 『성찰』에서 그는 가장 의심스러운 것인 감성적인 것으로부터 조금씩 덜 의심스러운 차원으로 나아가 결코 의심할 수 없는 원리에 도달하고자 한다. 바슐라르의 경우, 감성적인 것은 우리를 객관적 인식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붙드는 ‘인식론적 장애물’이다. 우리는 감성의 세계에서 사물에 대해 가졌던 이미지들을 떨쳐버리지 못함으로써 세계인식에 있어 오류를 범한다. 진정한 인식은 이 원초적 경험의 수준으로부터 벗어나 세계를 이론적 존재의 매개를 통해 바라보았을 때 성립한다. 이렇게 플라톤, 데카르트, 바슐라르로 대변되는 서구 합리주의의 근본 특성들 중의 하나는 경험적인 것과 합리적인 것의 불연속이다. 진정한 인식은 감성적인 것을 떨어내고 합리적인 것에 도달할 때이다. 그래서 합리주의 인식론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측면으로 형성된다. 첫째, 실재는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세계가 아니다. 실재를 찾으려면 감각적 현실을 넘어서 심층적 존재를 찾아야 한다. 둘째, 그래서 우리의 감각은 믿을 수 없다. 감각보다는 이성을 믿어야 한다. 즉 몸보다는 이성을 믿어야 한다. 셋째, 진리의 인식이란 세계의 심층과 우리 이성의 대응을 통해 발생한다. 우리 몸과 감성적인 것이 대응한다면, 우리의 이성과 심층적 실재가 대응하는 것이다. 198)
이와 같은 전통과는 달리 레비나스는 감성을 통하여 감각을 인식론에 도입한다. 서구철학은 존재론, 의미화의 구조 위에 정초 되어 왔다. 레비나스는 이같은 이성의 철학을 비판하면서 감성의 철학을 구축하고자 한다. 그는 감각적 경험과 직관의 토대인 감각작용은 이념이나 명료성으로 환원될 수 없다고 본다. 감성은 감각으로서 인식의 요소라는 의미를 가진다. 감성이 “감각적 직관”이 될 수 있다는 사실과 인식의 모험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감성의 의미는 ‘상처 입을 가능성’(Vulnerability)안에 이해된다.199) 감성을 정초 지으면서 레비나스는 존재론적 본질을 넘어서는 의미화로 나간다. 여기서 감성의 특징인 살갗에 맞닿는 직접성, 상처 입을 수 있음이 인식의 과정에서 정초된다. 이같은 상처 입을 수 있음과는 달리 오성적 인식은 추상이다. 추상은 상처받지 않는다. 감각적인 것의 직접성은 상처를 드러내는 것이고, 향유 안에서 상처에 노출되는 것이다. 그것은 상처를 즉자적으로 자족한 상태인 향유적 자아의 주관성에 닿게 한다. 이같은 직접성은 먹고 마시는 것보다도 더 직접적인 향유이며, 요소의 심층에 잠기는 것이며, 근원적인 생기와 풍요함에 젖는 것이다. 그것이 삶의 만족이며, 즐거움이고, 고통일지라도 삶을 사랑하는 것이다. 주관성의 자기만족은 바로 자아성(Ipseity)이며, 실체이다.200)
레비나스는 향유의 양식을 감성으로 본다. 이것이 인간과 대상적 세계와의 근원적 관계를 지향성의 개념에서 설명하는 훗설이후의 현상학적 관점과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레비나스는 인간과 세계의 관계에서 인간은 우선적으로 실체가 없는 질로서 설명되는 요소의 세계에 놓여진다고 본다. 요소 안에 존재하면서(to-be-in-the-element) 인간은 전체에로의 맹목적 참여로부터 해방되어 분리되며, 개념화의 과정인 사상과도 구분된다. 요소와의 관계에서 운동은 끝없이 나를 향하여 다가온다. 이것은 표상으로 환원할 수 없는 것으로, 감성에 속하는 향유의 양식이다. 이것은 선험적 자아의 능동적 의식형태와 구분되는 차이이다. 감성은 세계를 구성하지 않는다. 감각적 세계는 표상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의 만족을 구한다. 감각하는 것은 조건 없이 내적인 것으로, 사유에서는 무의미한 것으로 존재하는 세계의 대상물들도 감각에서는 새로운 지평으로 펼쳐진다. 감각은 이면을 생각함이 없이 표면을 전하며, 이것이 내용으로 된다. 201)
데카르트는 감각적인 것을 합리성의 외부의 영역에 존재하는 것으로 이미 통찰하였고202), 칸트 역시 감성(Sensibility)과 지성(understanding)을 분리시키면서 표상의 종합적 인식은 물질과 독립되어 있다는 것을 통찰하고 있다. 레비나스는 이같은 인식의 탁월성을 지적하면서, 감성은 요소적 질과의 관계임을 명시하고 있다.203) 감성은 향유이다. 이것이 감각적 존재로서의 몸의 존재방식이다. 감성은 표상의 계기가 아니다. 향유는 표상의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 그리고 설령 표상의 지평에 놓일지라도, 감각작용이 명석 판명함을 결여한 것으로 말할 수는 없다. 감성은 정서적 상태에 묶여 있는 저급의 이론적 지식이 아니다. 감성은 향유이다.
몸은 고양이지만, 또한 위치의 전 무게이다. 벌거벗고 누추한 육체는 지각하지만, 세계의 중심과 동일하다. 몸은 내가 구성하는 사물들 사이에서의 사물이 아니며, 또한 사고를 나타내는 도구도 아니다. 몸은 바로 사유로 환원할 수 없는 것이다. 벌거벗은 육체는 자신의 필요, 자신의 외재성을 비구성적인 것, 모든 것에 앞선 것으로 확신한다. 204)
“향유하면서 사는 것”(virve de), 내가 무엇인가로부터 산다는 것은 표상이 동일자 안의 표현 안에 있는 것처럼, 나의 삶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구성된 것은 그 의미를 유출하고, 구성 안에서 구성하고 있는 조건이 되며, 또는 더 정확하게 구성하고 있는 것의 영양(nourishment)이 된다.205) 이같은 의미의 유출은 영양의 개념으로 설명된다. 영양물은 그것을 조건으로 생각하려는 사고를 조건 지운다. 예컨대 먹는 것은 영양물의 화학작용으로 환원할 수 없다. 그러나 먹는 것은 또한 미각, 후각, 생리적 운동감각, 다른 먹는 것의 의식을 구성하는 감각다발로 환원될 수 없다. 살아 있는 존재의 물질성과 벌거벗고 굶주린 육체로서 그것의 원시성은 이같은 구조의 완성이다. 분명히 욕구의 충족에서 나를 정립하는 세계의 이질성은 자신의 타자성을 잃는다. 포만감 속에서 내가 이로 씹는 실재는 동화되며, 타자 안에 있던 힘은 나의 힘이 되고, 내가 된다. 모든 욕구의 만족은 어떤 면에서는 영양이다. 노동과 소유를 통해서 영양의 타자성은 동일자에로 들어온다. 내가 사는 세계는 단순한 구성적 자유가 아니라, 조건 지우는 것이고 선행하는 것이다. 세계가 나를 살찌우고 나를 씻겨준다. 206)
레비나스는 “감성은 경험의 질서에 속한 것이 아니라 향유의 질서에 속한다”207)고 말한다. 감각적 대상의 의미는 사물로서 분석되지만, 내용은 사물과의 관계로 숨는다. 우리는 땅위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이 도시, 이웃, 거리, 삶의 지평에 서 있다. 자아가 이같은 삶의 지평을 더 방대한 체계로 정초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이들이 나를 정초한다. 세계는 나 자신에 의한 표상에 의존하지 않는다. 나 자신은 나에 앞서 존재하는 세계 안에 서 있을 때 완성된다. 이것은 나의 자아를 절대적인 것으로서 간주할 수 없는 지평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세계 위에 분명히 서 있다.
그러나 서 있다는 것은 인식한다는 것과는 다르다.208) 감성이 영양을 취하는 감각적 자료들은 욕구를 충족시켜 주면서, 경향성에 응답한다. 배고픔과 음식의 동시성이 향유의 초기조건을 구성한다. 향유하면서 사는 것의 실존이 몸이다. 그러나 몸은 요소로 기우는 것이 아니라, 머물고 거주하고 소유하는 것이다.
내가 서 있는 대지가 나의 대상인 것만은 아니다. 장소들은 나에게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지지해준다. 이 위치(sance, tenue)에서 자아는 사유와 노동에 선행한다. 몸, 위치, 서 있다는 사실은 나 자신과의 근원적 관계로 관념주의자들의 표상과 구분된다. 나는 나 자신이며, 여기 집에, 주거지, 세계 안에 있다. 나의 감성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나의 몸으로, 땅에 발을 대고 서 있는 존재로 있는 것이다. 초월성이 없이, 절대적인 것으로서의 위치는 하이데거의 현존재적 세계이해와도 다르다. 그것은 존재의 배려(a care for being)도 아니고, 존재자와의 관계도 아니며, 세계의 부정도 아니며, 단지 향유로 다가간다.
감성은 바로 삶에 가까운 것으로, 본능을 넘어서 있지만 이성의 아래에 있는 반성되지 않은 상태의 자아의 소박성이다. 이성적 시각으로 보자면 감성은 조소거리다. 그러나 감성은 눈먼 이성이 아니다. 감성은 이성보다 근원적인 것이다. 감성적인 것은 폐쇄적인 총체성이 아니라 존재의 분리로 작용한다.209)
2) 향유적 자아의 自我性
레비나스는 향유적 자아의 자기성을 향유가 열어주는 개별화, 내면성, 분리로 나타낸다. 그러면 이제 이들 개념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서, 레비나스가 말하는 향유적 자아의 자기성을 자세히 살펴본다.
레비나스는 향유적 자아의 관점으로부터 행복의 이기주의를 설명한다. 행복은 앞에서 타자의 영양과 관련지어 설명되었다. 행복은 욕구를 충족시키는데 있는 것이지, 억제하는데 있지 않다. 그것은 “각자 그 자신을 위해서”(each for himself)라는 표현에 있는 것처럼 그 자신을 위한다. 그 자신을 위한다는 것은 귀를 갖지 않은210) 굶주린 이가 빵 한 조각을 위해서 살인을 할 수 있는 것과 같이 그 자신을 위한다. 과식하는 사람이 배고픔을 이해하지 못하고, 굶주린 사람에게 이방인과 같이 접근하는 것처럼 그 자신을 위한다.
향유하는 것의 자기 충족성은 이기주의, 동일자의 동일성의 지표이다. 향유 안에서 나는 절대적으로 나 자신이다. 타자에 대한 참조가 없는 이기주의자인 나는 고독할 것도 없이 나 혼자이다. 타자에 대하여 저항하는 것도 아니고, 나에 관한 것으로서도 아니고, 전적으로 타자에 대하여 귀를 막고, 모든 의사소통의 바깥에서 모든 소통을 거부하면서 나 혼자이다. 211)
그러므로 자아는 객관화와 주제화의 힘으로서 이해되는 이성과 동일시되었을 때, 바로 그 고유성을 상실한다. 자신을 표상하는 것은 향유에 무감각해지는 것이다. 이성은 인간사회를 가능하게 만든다. 그러나 구성원들이 이성적일 수만 있는 사회는 퇴색할 것이다. 자아가 되는 것은 향유 안에서 존재를 넘어서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자아가 되는 것은 어떤 것에 대립하는 것도, 표상하는 것도, 사용하는 것도, 열망하는 것도 아니며, 단지 어떤 것을 향유하는 것이다. 212)
향유적 자아는 분리된다. 분리되는 것은 집에 머무는 것이다. 그러나 집에 머무는 것은 향유물로 사는 것이고, 요소적인 것들을 향유하는 것이다. 우리가 향유물들을 구성할 수 없는 것은 대상의 비합리성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양적 기능으로 인한 것이다. 음식은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자신의 표현에 내재한다. 그러나 자아는 그 안에서 다시 자신을 발견한다.
향유가 열어 주는 내면성의 주체적 속성으로, 향유의 내면성은 분리 자체이다. 행복은 개별화의 원리이지만, 개별화 자체는 단지 내면성안에서 내면성을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다. 향유의 행복 속에서 과거의 무한한 깊이와 본능을 망각하면서, 개별화, 자기-인격화, 실체화, 자아의 독립이 이루어진다. 향유는 존재의 산물이다. 레비나스는 “향유를 자아가 발생하고 맥박치는 곳”213)으로 설명한다. 자아는 자유에 의하여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자아, 집에 있음, 분리, 행복 등의 개념들은 동일한 연장선상에 놓인다.214)
3. 자아의 내면성과 집
레비나스는 자아의 내면성을 형성해주면서 자아의 분리가 이루어지는 곳을 몸215)으로 본다. 몸적 삶의 독립성은 세계에 대한 사유에서가 아니라, 욕구충족을 위한 의존과 욕구충족의 긍극성에 있다. 몸은 나의 소유가 아닌 것으로, 나의 존재의 내면성과 외면성의 경계를 나타낸다. 몸적 삶은 한편 요소의 익명성과 불확실성으로부터 불안과 위협을 느낀다. 이와 같은 불가해한 익명적 요소들은 노동을 통해 동일화의 세계로 전환되며, 나의 소유로 전환된다. 노동과 소유에 의해 향유적 존재는 의식과 주거의 구체화로 나타난다. 이같은 관점에서 레비나스는 집이야말로 향유적 자아의 몸적 삶의 완성이자 분리로 본다. 이제 이들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 몸
레비나스는 몸을 다른 대상들 중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분리가 지배하는 영역으로 나타낸다. 몸의 향유적 삶에서 능동성과 수동성의 분리가 유쾌하게 원상태로 돌아간다. 향유의 몸은 자신이 머무는 외계로부터 영양을 취하면서, 욕구를 충족시킨다. 이같은 유쾌함은 몸의 주권을 나타낸다.216)
하이데거가 인간의 존재조건을 세계 안에 던져진 존재로서 세계-내-존재라고 정의 내렸지만, 레비나스는 몸적 삶에서는 외부의 어느 것도 하이데거의 던져짐(Geworfenheit)과 같은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본다. 분리된 존재는 숨쉬고, 보고, 느끼는 즐거움 속에서 만족하는 것이다. 타자는 처음에 그것에 찬성하지도 반대하지도 않는다. 어떤 가정도 향유의 근본적 관계를 나타내지 못한다. 그것은 타자와의 화해도 타자에 대한 억압도 아니다.
인간의 삶은 몸의 삶이다. 삶은 자기충족성이 나타나는 살아있는 몸적 삶일 뿐만 아니라 물리적인 힘의 교차점이기도 하다. 몸적 삶은 서 있는 것이고, 대지 위에 선 것이고, 타자와 더불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몸적 삶이 전적으로 의존적인 것은 아니고, 향유하면서 자신의 행복을 형성한다. 자아는 자존하면서 나의 존재에 관심을 가진다. 나는 의존으로부터 즐거운 독립으로 이행한다. 자신 외의 어떤 다른 것 안에서 집에 있는 것, 자신 외에 어떤 다른 것으로부터 살면서 자신으로 되는 것, 향유하면서 사는 것은 몸적 존재에서 구체화된다. 육화된 사유는 세계에 작용하는 사유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분리된 존재로서 욕구 충족에서 자신의 독립성을 확신한다.217)
몸적 삶에서 생명의 몸과 물리적 몸이라는 이원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일치한다. 주거는 숙박하고 생명을 연명한다. 생명이 요구하고, 노동으로 이용하는 세계는 또한 물리적 세계이다. 물리적 세계에서 노동은 익명적인 힘의 작용으로 해석된다.
레비나스는 생명의 자발성에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는다. 반대로 육체와 세계의 상호작용의 문제를 주거로, ‘향유하면서 살아가는’것으로 환원하고 있다. 여기서 제한된 자유의 도식은 더 이상 발견되지 않는다. 타자와 함께 하는 삶의 관계로서의 자유는 생명의 자발성을 보호하며, 집에 있는 삶은 유한한 자유가 아니다. 자유는 생명의 부산물이다. 몸, 요소적 실재의 부분은 세계를 점유하도록, 노동하도록 하는 것이다. 자유로운 것은 세계를 형성하는 것이며, 세계 속에서 사람은 자유로울 수 있다.218)
노동은 사물들 중의 하나의 사물적 존재로부터 오며, 사물과의 접촉으로부터 온다. 그러나 존재로부터 오는 접촉에서 온다. 주거의 모든 자유는 시간에 의존한다. 환경을 둘러싼 엄청나고도 무한한 구성은 시간을 남겨둔다. 자아가 넘겨주는 요소와 관련된 거리는 미래의 거주에서만 그것을 위협한다. 현재의 위험과 공포를 인식하는 것은 탁월한 감정이다. 요소의 불확실성, 그것의 미래는 의식이 되며, 시간의 사용을 만드는 가능성이 된다. 노동은 존재로부터 분리된 자유를 특징 지우는 것이 아니라, 의지를 특징 지운다. 존재는 위협되지만, 위협을 피할 시간을 가진다. 219)
2) 노동과 소유
향유의 주체는 향유의 내용에 의존해 있다. 향유를 통해 주체가 누리는 독립성은 ‘의존성을 통한 독립성’이요, ‘의존성안에서의 독립성’이다. 향유의 주체는 무엇을 누릴 때 자신이 아닌 다른 것, 즉 타자에 늘 의존해 있다. 주체는 향유의 내용에 대해 절대적 주권을 행사하지 못한다. 향유 속에서 자아가 누리는 자유는 그러므로 절대자유가 아니라 제한된 자유이다. 자유의 한계성은 세계에 던져진 현존재의 피투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순간의 향유가 향유의 내용이 되어주는 요소세계의 익명성을 통제할 수 있는 어떤 수단도 보장해 줄 수 없다는 데서 오는 한계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관리하고 지배하고 요소를 정복하고 싶은 충동을 갖게 된다. 이제 향유는 내일을 위한 걱정으로 바뀌고, 이 걱정 때문에 인간은 집을 짓고 노동하며 이를 통해 삶을 안전하게 만든다. 거주와 노동은 요소의 위협에 대하여 인간이 보이는 반응이다. 집을 짓고 거주하며, 노동하는 것은 인간의 자기긍정, 자기 자신의 독립성을 실현하는 일이다. 220)
물질의 불가해한 모호성에 접근하는 방법은 노동의 이념이다. 소유는 노동, 손에 의해 이루어진다. 손은 잡고 쥔다.(prend et comprend) 그것은 나에게, 나의 이기적 목적에, 요소들로부터 끌어내는 사물들에 관련된다. 손은 필요의 궁극성과 요소적인 것을 관련시키는 사물을 만든다. 손은 기투의 모든 계획을 실현하면서, 적절한 기능을 수행한다. 손은 요소적 성질을 향유로 가져오고, 그들을 미래의 향유를 위해서 취하고 유지한다. 손은 요소로부터 형상을 그린다. 형상 없이 형성하는 것이 고체화이며, 이해할 수 있는 것의 출현이다. 그러므로 실체는 사물의 본성에 있는 것이 아니다. 손은 요소의 불확실성을 관통한다. 손은 만지고 파악한다. 그것은 그림자가 아니라 실체를 잡으면서, 구체적 존재를 인식한다. 손은 사물을 파지한다. 손은 그것을 유지하고, 보존하고, 집안에 소유하고 있다. 221)
도시, 들, 정원, 경치 등은 요소적인 실존을 다시 열어준다. 노동은 자신을 향한 움직임으로 초월성이 아니다. 노동은 요소들에 관련되며, 그 요소들로부터 사물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물질을 원료로서 파악한다. 물질은 동시에 익명성을 공표하며 그것을 거부한다. 물질은 이미 무한성과의 관계에 의해서 정의된다. 물질은 근본적으로 불분명하며,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있다. 그러나 노동은 그것을 동일화할 수 있는 세계로 가져온다. 노동은 물질을 정의한다. 요소들을 잡고, 찢고, 누르는 손은 사물의 무한성과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목표와 관련된다. 요소의 불가해한 깊이는 노동에 맡겨지며, 노동은 미래, 현존의 익명적인 중얼거림, 요소적인 것의 통제할 수 없는 소요를 지배한다. 물질의 불가해한 모호성은 저항으로 노동에 표현되는 것이지 대면적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저항의 이념도 아니며, 또 이념 안에 나타나는 저항도 아니며, 그 자신을 절대적인 것으로 주장하는 얼굴도 아니며, 단지 그것을 깨뜨리고 극복하는 손과의 관계이다. 노동자는 그것을 정복할 것이다. 노동은 이름 없는 물질의 저항과 투쟁하며, 물질이 지닌 무의 무한성에 맞붙어 투쟁한다. 노동은 얼굴 없는 것을 그리고 무의 저항을 대상으로 한다. 하늘의 불을 훔친 프로메테우스는 그것의 불경함에서 산업적 노동을 상징한다.222)
노동은 요소의 불확실한 미래를 지배하며, 존재에 영향을 미치는 미래의 불확실한 빈곤을 극복할 것이며, 미래를 자신에게 보존한다. 노동은 시간에 대해서, 그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미래에 대해서, 자신의 힘을 확신한다. 소유는 노동의 산물을 시간 안에 영속적으로 남는 것, 실체로 놓는다. 그러나 삶의 불확실성에 저항하면서 나 스스로 확신하는 노동 그 자체는 삶에 최종적 의미화를 가져오지 않는다. 삶은 내가 살고 있는 곳으로부터, 삶의 전체내용으로부터, 심지어 미래를 확신하는 노동으로 산다. 나는 내가 공기, 빛, 빵으로 사는 것처럼, 노동으로 살게 된다. 욕구가 향유에 만연된 제한된 경우에 프롤레타리아는 불행한 노동이 운명 지워진다. 그 속에서 물질적인 존재의 가난은 그 자신과 더불어 집에서 피난처도 휴식처도 발견하지 못하고, 불합리한 세계에 던져진다. 223)
부트루(E. Boutroux)는 소유가 우리의 신체를 연장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벌거벗은 몸으로서의 신체는 최초의 소유가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소유나 비소유의 바깥에 있다. 몸은 나의 존재가 내면성과 외면성의 경계로, 집안에서 자신을 유지한다는 것에 따르자면 나의 소유이다. 224)
존재의 도구적 기능은 실체가 아니라 존재적 속성들 중의 하나이다. 가치, 사용, 조작, 제조는 소유에 의존하며, 잡고 획득하고 집으로 가져가는 손에 의존한다. 소유와 상관되는 사물의 실체성은 그 자신을 절대적으로 표현하는 사물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사물의 동일성은 그것의 본래적인 구조가 아니다. 소유만이 향유 안에서 항구성을 구성하지만, 이같은 항구성은 돈으로 계산되는 현상 속에서 사라지게 된다. 사고 파는 소유물, 상품으로서 사물은 시장 안에서 소유할 수 있는 것으로서, 교환되는 것으로서, 따라서 돈으로 교환될 수 있는 것으로, 돈의 익명성안에서 흩어질 수 있는 것으로서 드러난다.
그러나 소유 자체는 좀 더 심오한 철학적 관계를 말한다. 사물은 소유에 저항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나의 소유에 이의를 제기하고, 소유 자체를 제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물의 소유가 담론에서 문제시된다. 225) 사물을 도구로, 존재와 관련된 실존의 장비로 표현하고 세계를 해석하는 사상은 거주를 가능하게 만드는 내면성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다. 도구와 장비 체계를 조작하는 모든 노동은 사물과 소유에 대한 본래적인 이해를 전제하며, 그의 잠재성은 내면성의 전면에 있는 집에 의해 특징 지워진다. 세계는 소유가능하고, 산업에 의한 세계의 변형은 소유 양식의 변형이다.
3)집의 안온함
주거로 분리된 존재는 자연적 실존과 단절된다. 우리의 집, 우리의 자리, 우리의 둥지가 출입문이다. 집의 본래적 기능은 건물의 건축에 의해서 존재를 지향하는데 있지 않고, 요소의 충만함을 열고, 그 안에 유토피아를 여는데 있다. 그러나 분리는 나를 고립시키지 않으면서, 노동과 소유를 가능하게 만든다. 226)
주거는 살림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집은 못을 박기 위한 망치나 글을 쓰기 위한 펜과 같이 주거를 위해 봉사할 것이다. 날씨로부터 인간을 보호해 주며, 적이나 귀찮은 것으로부터 숨겨주기도 한다. 인간의 삶을 유지하는 합목적성의 체계에서 집은 궁극적 목적은 아니지만, 특권적 위치를 차지한다. 우리는 하이데거가 말한 것처럼 도구를 조작하고, 작업하고, 완성하면서 합목적성의 체계로 맞추는 행동을 하면서 즐거워 할 수 있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인간의 삶의 목적은 이같은 고립된 행위 자체에 의해서 초래되는 즐거움이나 고통을 넘어서 있다고 본다. 레비나스는 집의 특권적 역할을 존재 안에 있는 인간활동의 목적에 놓지 않고, 존재의 조건으로 본다. 인간은 사적인 영역으로부터, 그리고 이미 그 자신의 소유인 공간으로부터, 세계 안에서 자신으로 머문다. 227)
노동과 소유의 총체적 문명화는 분리를 수행하는 존재의 구체화로서 일어난다. 그러나 이같은 문명화는 의식과 주거로 구체화된다. 집의 친밀성으로부터 실존, 최초의 육화가 말해진다. 관념주의적 주체의 관념은 이것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였다. 거주 자체가 분리를 보증하며, 분리의 생산에 불가결한 계기이다. 228)
주거는 요소들로 향한다. 요소들은 자아의 처분에 맡겨진다. 노동은 요소들로부터 사물을 끌어내며, 따라서 세계를 발견한다. 이같은 본래적 파악, 노동의 모험은 자연을 세계로 변형시키며, 자아의 거주 안에서 자아의 자기에로의 복귀를 가져온다. 존재가 집을 짓고, 자신의 내면성을 확신하는 것은 노동에 의한다. 주거 안에서 세계의 잠재적인 탄생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세계를 응시하는 주체는 거주의 사태, 요소로부터의 움츠림(즉 즉각적인 향유, 그 이후에 대한 불안), 집의 친밀성 안에 있는 자기로의 복귀(se recueillant)를 전제한다. 분리의 작업은 거주, 경제적 존재의 실존으로 구체화된다. 가정에 의해 완성된 내면성, 거주 안에서의 자기로의 복귀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다. 어떻게 자기로의 복귀와 가정의 친밀성이 분리의 구조를 완성하는가?
세계의 친숙성은 이 세계에서 획득한 습관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친숙성과 친밀성은 사물의 얼굴 위에 펼쳐지는 관대함으로 생산된다. 이같은 관대함은 단지 처음부터 그들을 향유하고, 향유 안에서 분리로서, 자아로서, 자신을 구성하는 분리된 존재의 욕구와 본성의 일치성이 아니라, 자아에 대한 애정에서 오는 관대함이다. 친숙성이 전제하는 친밀함은 어떤 사람과의 친밀함이다.229)
그러나 어떻게 친밀성이 타자의 얼굴 안에 생산될 수 있을까? 타자의 현존재는 이미 언어와 초월성이 아닌가? 기억의 친밀성이 존재의 보편성안에서 생산될 수 있기 위해서, 타자의 존재는 얼굴 안에 계시되어야 할뿐만 아니라, 동시에 이같은 현전과 부재 안에서 동시에 계시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타자의 존재는 친밀성의 영역을 나타내며, 여성의 우선적인 따뜻한 환대가 완성되어진다. 여성은 가정의 내면성이며, 주거이다.
단순한 향유적 삶, 요소의 자발적 동의는 아직 주거가 아니다. 그러나 주거는 또한 아직 언어의 초월성인 것도 아니다. 친밀성안에서 환영하는 타자는 높이의 차원에서 자신을 계시하는 얼굴의 타자(Vous)가 아니라, 정확하게 말하자면 가족애적 친밀성의 너(thou, toi)이다. 부버(M. Buber)는 “나-너”(I-Thou)를 통해 인간간 관계의 범주가 발화자적 관계가 아니라 여성적 타자성과의 관계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같은 타자성은 언어와는 다른 지평에 위치한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같은 친밀성의 관계야말로 타자와의 모든 초월적 관계를 가능하게 만든다. 230)
그러면 어떻게 이런 친밀성은 가능한가? 그것은 타인(l'autrui)의 등장으로 가능하다. 하지만 이 때 타인은 벌거벗은 얼굴로 나를 질책하고 불의를 고발하는 타인의 모습보다는 ‘다소곳이’(discretement) 나를 수용하는 타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다소곳이 나를 수용하는 타인을 일컬어 레비나스는 ‘여자’라고 부른다. 그러한 너는 나에게 명령하지 않는다. 너와 나가 나누는 언어는 은밀한 표현이며, 말없는 이해며, 조용한 언어이다. 231)
우리는 가정의 의미를 통해서 이같은 친밀감에 대하여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나의 안식처인 ‘내집’의 포근함은 건축적인 외형구조보다는 가족간의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내면적?정서적 분위기에 의해 좌우된다. 가정은 식구들의 일상적인 섭생에 필요한 욕구를 충족시켜 주면서, 다른 편에서는 포근하게 감싸주는 따뜻한 어머니로서 표현되는 사랑이 있다.232) 가정은 사회의 세포이며 사회애의 진원지이다. 가정은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서로 믿고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인격공동체이다. 페스탈로치는 이같은 과정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233) 그의 설명을 살펴보자.
“어떻게 나는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을 믿고 사람에게 순종하게 되었는가? ..... 우리는 이런 것들이 젖먹이와 어머니 사이에 싹튼 것임을 알 수 있다.” “어머니는 어린이를 기르고 키우고 보호하며 기쁘게 하여 준다. ...... 어린이는 보살핌을 받으며 즐거움을 받음으로써 사랑의 싹을 마음속에 기른다.” “이런 어머니와 어린이 사이의 미소의 교환 속에서 신뢰의 싹이 튼다.”
이렇게 하여 인간의 사회애가 발로된다. 가정은 가족들의 정신적 긴장을 해소시키고 정서를 순화시켜 주고 안정시켜 주고 휴식을 취할 수 있게 해준다. 가정에서는 감정의 표현이 매우 자유로와 가족들은 희노애락의 감정을 마음껏 토로할 수 있다. 그래서 억눌렸던 감정이 풀어지고 맺혔던 서러움이 후련하게 사라질 수도 있다. 그러나 가족간에는 때로는 갈등과 충돌이 있고 언쟁이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가족간의 언쟁과 대립은 오래가지 않고 당사자들이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오히려 긴장을 해소시켜주는 순기능을 발휘하여 가족들의 정서를 안정시켜 주는 작용을 하기도 한다. 가족간의 단결과 상호협조와 보살핌은 거의 무조건적이다. 따라서 어떤 인간집단도 가족공동체의 응집력을 우선할 수 없다. 234)
레비나스는 가족애적 관계와 같이, 인간간에 형성되는 친밀성과 친숙성을 완성이자 분리의 에너지로 본다. 친밀성을 지닌 자아의 분리는 주거로 구성되어진다. 이같은 의미에서 존재한다는 것은 주거에 머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머문다는 것은 실존철학에서 주장하듯이 실존으로 던져진 익명적 존재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으로 오는 것인 동시에, 타자를 환대하고 인간애로 환영하면서 응대하는 것이다. 235)
Ⅳ. 他人과의 만남과 多元性의 수용
레비나스는 자아의 존재방식을 동일자의 동일시로 추상적으로 기술한 이후, 타인의 얼굴(visage)안에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타인의 의미를 중심으로 타자에 관한 분석을 수행한다. 그는 자아론적 심리주의와 경제의 내면성에 반대하면서, 다름에 의해 열리는 외재성의 차원을 설명한다. 여기서 내재적인 것과 외재적인 것 사이의 대립은 자아와 세계사이에 또는 주체와 객체 사이에 전개되는 전통적 대립의 재연이 아니다. 레비나스는 그같은 대립을 결국 경제의 일부인 것으로 본다. 경제에서 독아적 자아는 필요와 향유를 통해서 뿐만 아니라 표상과 객관적 지식을 통해서 요소들, 장비, 사물들, 대상들의 외재성에 관련된다. 여기서 외재성은 자아 안으로 통합하려는 포괄적 능력에 저항할 수 없다. 그러나 얼굴의 외재성에 의해 계시되는 타자의 타자성은 내면성과 외재성, 주체와 객체, 정신과 물질 등 전통적인 대립이나 변증법적 모순과 종합의 차원으로부터 벗어난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내면성으로 분리된 향유적 자아와 절대적 다름의 외재성으로 남아있는 타인이 어떤 방식으로 관계되는지를 다루어야 한다. 이에 관한 문제 해법의 대략적 구도는 이미 앞에서 논의된 무한의 이념과 타자로의 초월성에서 언급되어 있기는 하다. 레비나스는 향유적 자아가 내면성을 유지할지라도, 타자를 향한 존재의 정향성으로 타자를 위한 존재로 될 수 있다고 본다. 이것은 내면성의 주체와 말하는 주체의 차이와 관계를 말한다. 자아가 말하는 주체(speaker)인 외재적 존재로 돌아가는 것은 얼굴을 맞대는 직접성(droiture)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나의 책임과 의무를 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같은 자아를 레비나스는 “존재의 바깥에 존재의 무게중심을 놓는다”고 표현한다. 236) 더욱이 이같은 의미의 자아는 타자를 인식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에게 자신을 제공하는 것, 타자에게 봉사하는 것, 선하게 되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타자와의 관계가 분리를 무화시키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타자와의 관계는 전체성안에서 형성되는 것도 아니고, 나와 타자를 통합시키는 전체성을 형성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대면적 관계는 주관성을 무화시키면서, 나와 타자를 공통의 관계로 집어넣는 보편성을 전제하지 않는다. 자아와 타자의 관계는 서로에 대하여 초월적이다.237)
그러므로 이제 타인의 얼굴이 나타내는 현현의 의미, 얼굴의 근원적 윤리성, 타자와의 대화가 가져오는 상호주관성의 윤리성, 나와 타자의 비대칭적 관계구조와 다원성의 내용을 중심으로하여 본 장을 전개해간다.
1. 타인의 顯現
레비나스는 타인의 존재는 의식의 대상이나 주제화, 개념화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강력히 주장한다. 주제화와 대상화에 대립하는 의미를 나타내는 개념은 ‘현현’(l'epiphanie), ‘보여지는 존재’이다. 타인은 나의 의식작용과 무관하게 그 스스로 내 앞에 출현하며, 나의 자기화 하는 의식에 대해 무한한 저항을 보인다. 여기에서의 저항은 윤리적 저항인 것으로, 얼굴 그 자체로 의미하는 윤리적 요구의 계시라 할 수 있다. 이제 레비나스가 이같은 내용을 어떻게 구체화하는지 살펴보자.
1) 타인의 얼굴238)
레비나스는 외재성으로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는 타인의 존재를 우리가 어떻게 수용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가를 『전체성과 무한』의 “감성과 얼굴”의 주제아래 논하고 있다. 여기에서 얼굴은 표상적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감성의 작용과 관련된다.
레비나스는 서구 전통철학에서 시각에 부여한 특권을 비판한다. 서구철학에서 시각은 사물에 대한 접촉을 주관하게 되었고, 모든 경험을 구성하여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플라톤이 『국가론』의 동굴 비유에서 나타내 주는 바와 같이, 시선은 눈과 사물이외에 빛을 전제한다. 눈은 빛을 보지 못하지만, 빛속의 사물을 본다. 빛은 그림자를 쫓아내면서 사물을 드러나게 한다. 시각으로 시작하는 것, 그것의 도식은 보는 것에 필요한 빛속에서 무엇인가를 보는 눈으로 정초된다. 빛은 사물이 아니라 사물이 나타나도록 하는 것이다. 이같은 설명방식은 존재와의 일치를 주장하면서, 객관성의 특권을 추론해 낸다. 이같은 시각의 구도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하이데거에 이른다. 존재하지 않는 일반성(generalite)의 빛속에서, 개체와의 관계가 확립된다.239) 레비나스가 빛으로 은유하고 있는 일반성의 구조, 비인칭적 구조를 해체하는 이유는 그들이 어떤 얼굴도 명령하지 않는 익명적 복종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존재에 대한 접근이 시각에 관계되는 한, 그것은 존재들을 지배하며, 그들에 대해 권력을 실행한다. 여기서 사물은 소여된 것으로, 그 자신을 나에게 제공하게 된다. 레비나스는 시각을 표상과 관련된 것으로 본다. 시각은 자아의 이해로 나아갈 뿐, 초월성이 아니다. 시각은 동일성을 넘어서는 절대적으로 다른 타자적 존재에로의 지평을 열어주지 못한다. 시각의 객관성은 그것에 관여된 다른 감각작용 없이 해석된다. 자기동일적 객관성은 시각의 관점이나 손의 움직임 안에서 정초된 것이다. 얼굴은 시각의 대상이 아니다. 타자에게 시각으로 접근하게 될 때, 나는 나 자신을 동일자(le Meme)로 유지한다.240)
시각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얼굴은 지성의 양식과 논리?개념의 형식적 관계를 넘어서 그 이전의 다른 이해방식으로 나타난다. 존재와는 다른 것』과 『전체성과 무한』에서, 레비나스는 얼굴을 이미 ‘관계 안에 있는 자아(a self-already-in-relation)’,241) ‘동일자 안의 타자242)(an other-in-the-same)’로 설명한다. 이같은 개념들은 동일자에 의한 타자의 인식으로 환원할 수 없는 동일자와 타자 사이의 관계를 설명해준다.
레비나스는 우리가 타자를 경험하게 되는 현상에 관하여 인식론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타자의 존재를 나타내주는 얼굴을 마주하게 될 때 어떤 종류의 경험, 지각, 사상, 지향이 얼굴의 계시를 받아들이려는 존재자에 전제되고 요구되는가? 이에 대하여 레비나스는 감성과 표상의 특징을 비교하면서, 타자의 顯現(l'epiphanie)과 現象(phenomene)의 차이에 관한 문제로 답한다.243) 즉 향유의 직접적 감성에 의한 현현은 현상학적 의식철학의 현상과 비교해 볼 수 있다. 의식철학의 자아론에서 사용하는 현상의 개념은 타인에 대한 적용이 유보된다. 왜냐하면 타인은 자아론적 전체성의 계기가 될 수 없기 때문에, 타인은 현상이 아니라 오히려 현상학의 개념으로는 정의할 수 없는 수수께끼(enigme)이다. 타인은 표상의 대상, 현상학적 노에마로 제한될 수 없는 충만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에, 타인의 존재양식을 계시, 현현, 수수께끼로 나타낸다.
이에 대한 레비나스의 글을 직접 살펴보자.
타자적 존재의 외재성은 절대적 저항으로 표명되어진다. 그것은 현현에 의해서, 나의 힘에 저항한다. 얼굴의 현현은 단순히 감성적이고 지성적인 빛안에서의 형상의 환영이 아니다. 그것의 로고스는 ‘살인하지 말라’이다. 244)
인용문에서 보듯이, 레비나스는 그 스스로 나에게(an I) 직접적으로 그래서 외재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것을 현현이라고 부른다. 레비나스가 강조하는 현현과 계시는 파르메니데스 이후 하이데거에 이르기까지 주장되어온 자신의 지평안에서만 정의될 수 있는 본질이 아니라, 명령형의 형태로 부각되는 자기 스스로 나타내는 존재의 출현이다. 타자의 다름은 타인의 얼굴 속에서 구체화된다.245) 타자들은 세계를 바라보는 나의 자아 중심적 또는 존재론적 지평을 파괴하는 것으로, 보편적 존재자들의 질서 안에서, 다른 현상들 가운데 하나의 특수현상으로 그들 자신을 나타내는 것에 대하여 저항한다. 레비나스는 자아의 동일시 작용에 대한 타자의 저항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타자는 나의 모든 힘에 노출되어 있다. 나의 모든 책략과 범죄에 굴복한다. 그러나 그의 온 힘을 다하여 나에게 저항하고, 자신의 자유의 예측할 수 없는 방책으로 나에게 저항한다. 그는 그의 시선의 절대적 솔직함, 직접성(droiture), 무방비한 눈의 벌거벗음을 가지고 모든 척도를 넘어서, 나에게 대항한다. 진정한 외재성은 나의 정복을 금하는 시선 속에 있다. 타자의 외재성에서 나는 타자의 정복을 통해 나의 약함을 극복해 가는 것이 아니라, 나는 더 이상 힘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Je ne peux plus pouvoir: I am no longer able to have power. )246)
위의 진술을 자세히 살펴보면, 레비나스가 어떻게 자아 중심적 존재론을 극복해 가는가의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레비나스에게서 얼굴의 의미는 그림이나 사진에 의해 그려지는 복합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바라보는 타인으로서 그와 접하면서 우리가 보고 느끼고 깨닫는 경험을 주는 타자를 의미한다. 타인의 얼굴은 나를 보고, 나를 주시한다(autrui me vise). 특별한 관심을 받을 가치가 있는 특수한 모습이 절대적 다름으로 나를 인도한다. 타자의 다름을 집중적으로 논의하면서 레비나스는 종종 타인의 얼굴의 벌거벗음(la nudite du visage)의 의미를 강조한다. 만일 내가 타자의 존재를 의식하게 된다면, 그것은 타인의 미, 재능, 역할, 기능 때문이 아니라 단지 타인의 절대적 다름 때문이다. 247)
로젠츠바이크(Franz Rosenzweig)248)는 인간의 교우를 나타내기 위해서 얼굴(face)이나 얼굴빛(countenance) 등의 용어를 사용한다. 그는 우애를 인간의 얼굴을 가진 이의 동일성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다양한 얼굴을 가진 인간들의 조화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얼굴빛을 가지고, 서로서로 바라본다. 얼굴은 개개인에게 고유한 개체적 인간의 인간성을 분명히 나타내 준다.
얼굴은 비인칭적인 익명적 존재와 대립해 있다. 유일하고 개인적이라는 인간의 함축을 가지는 용모 또는 낯빛은 철학적 이성의 추상적이고 비인칭적인 빛에 대한 반대 개념이다. 그것은 현상의 개념을 대신한다. 그리고 헤겔의 “구체적 보편(concrete universal)”의 반대편에 서 있다. 이같은 양식은 자아의 시선 아래 있는 주제로 나타나는데 있지 않다. 얼굴은 현대 존재론에서와 같이 비인칭적인 중립자(neuter)의 드러냄이 아니라, 그 자체로 표현이다. 그리고 이같은 얼굴의 표현은 언어를 통한 대화 속에서 나의 능력을 넘어서 타자에 대한 개방성으로, 환영으로 나타난다. 얼굴은 개인주의적이고 개체적인 것의 구체적이고 환원할 수 없는 직접적인 신호이다. 249)
타인의 얼굴은 내포되기를 거부한다. 타인의 얼굴은 자아의 동일성의 내용이 되기를 거부한다. 타자는 자아에 대해서 무한히 초월적으로 남으며, 낯설게 남는다. 타인의 현현과 호소가 나타나는 얼굴은 동일자와의 분명한 거리와 차이를 나타낸다. 충만한 무한성을 내포하고 있는 타인의 얼굴은 대화에서 동일자와의 관계를 유지하지만, 동일자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타자가 지닌 무한성의 이념이야말로 동일자와 관련된 타자의 외재성을 주장할 수 있게 해준다. 존재의 외재성안에 새겨지는 본질은 합리적 추론이 아니라, 얼굴로서 나타내는 현현이다. 얼굴은 타자를 당신으로 대면하거나 마주 대할 수 있는 나의 윤리이다. 얼굴 그 자체는 하나의 윤리이자, 인간적 윤리라 할 수 있는데, ‘얼굴의 등장이야말로 곧 윤리의 시작’250)이기 때문이다.
얼굴이란 비트겐스타인이 표현한 것처럼 ‘몸의 영혼’251)이며, 인체에서 가장 노출이 많은 곳이고, 표현이 가장 잘 되는 면이다. 레비나스는 얼굴을 ‘가릴 수 없는 노출’252)이라고 말한다. 몸의 낯빛은 영혼의 깊이만큼이나 많은 것을 말한다. 레비나스는 ‘절대적 타자에 대한 형이상학적 열망은 얼굴을 향한 무한성으로 향한다’고 말한다.253) 무한성의 이념은 동일자의 힘을 넘어선다.
요컨대 레비나스에 따르면, 타자의 얼굴이 현현하는 의미는 현상학의 범주나 모델에 의해서는 파악되지 않는다. 타자는 자의식의 한계와 그것의 지평을 넘어서 간다. 나에게 충격을 주는 시선과 목소리는 나의 동화능력에 비하여 훨씬 큰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타자는 완전히 낯선 것으로 나에게 다가오며, 나를 능가하면서 다가온다. 레비나스는 타자의 다름에서 높이(hautener)의 차원을 밝힌다. 타인은 그의 출현자체로 나의 자아 중심적 일원론의 지평을 깨뜨리며, 그 경우에만 타자로서 전면으로 온다. 타인은 나의 세계로 침투하면서, 모든 현상들을 나의 우주의 계기로 아 프리오리하게 선고하는 동일자의 제국(imperialisme du Meme)을 파괴한다. 타인의 얼굴 즉 나를 마주보는 타인의 얼굴 또는 나에게 말을 거는 타인의 언설은 나의 자아 중심적인 세계질서를 깨뜨린다. 254)
2)타인의 根源的 倫理語
앞에서 우리는 타인의 얼굴은 현상이 아니라 현현임을 분명히 하였다. 그렇다면 얼굴은 무엇을 현현하는가? 타인의 얼굴은 레비나스 윤리학의 핵심적 주제를 단적으로 나타낸다. 내가 다른 사람을 마주보고 있을 때 발생하는 얼굴의 현상학은 무엇인가? 우리가 타인의 얼굴을 바라볼 때, 대상을 향하는 것처럼 나 자신을 타자에게로 돌릴 수 있다. 그러나 타자를 만나는 최선의 방법은 눈의 색깔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다. 얼굴과의 관계는 얼굴이 무엇인가의 문제 즉 본질의 문제가 아니다. 이같은 방식은 타인의 얼굴을 의식의 대상으로 삼을 뿐, 타자와 사회적 관계나 윤리적 관계에 도달할 수 없다.
레비나스는 ‘얼굴은 근원적으로 의미, 컨텍스트 없는 의미를 현현하고 있다’고 말한다.255) 타자의 얼굴의 정직함은 그가 문맥 속에 있는 인물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본래 ‘하나의 인간임’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모든 의미는 문맥과 관련된다. 어떤 것의 의미는 다른 것과의 관련 속에 있다. 그러나 얼굴은 얼굴 그 자체로서 모든 것을 의미한다. 당신은 당신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람들의 얼굴은 나의 사유의 내용이 될 수 없는 것, 나의 의식의 지평을 넘어서 가는 충만한 의미이다. 시각이 목적하는 것에 대한 탐색이고, 존재를 흡수하는 것이라면, 얼굴의 관계는 아주 윤리적이다.
얼굴의 근원적 의미는 “살인하지 말라”256)는 계시이다. 얼굴은 소유에 저항하며, 나의 힘에 저항한다. 그것의 현현에서, 표현 속에서, 감각할 수 있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이해에 대한 총체적 저항으로 된다. 이같은 변화는 새로운 차원의 개시에 의해서만 즉 윤리적 차원에서만 발생할 수 있다. 얼굴은 인간윤리의 상징인 것으로, 각 개인은 다른 사람에게 독특한 양식인 얼굴을 통해 (침묵의) 말을 건네는데, 이 경우 얼굴은 이미 하나의 윤리적 담론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얼굴은 몸의 해석학 또는 체화된 인간의 윤리적 해석학이라 할 수 있다. 257)
타인의 얼굴은 자아의 지배에 저항하는 무한성을 나타낸다. 그것은 근원적 표현이며, 원초적 언어이다. 무한성은 살인에 대한 무한한 저항에 의해서 폭력을 무력화시킨다. 이것은 타자의 얼굴 속에서, 그의 무방비한 눈의 전체적 벌거벗음 속에서, 초월적인 것의 절대적인 열림의 벌거벗음속에서 나타난다. 여기에 엄청난 저항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다른 것과의 관계, 윤리적 저항이 있다. 얼굴의 현현은 살인에 대한 유혹을 총체적 파괴의 유혹으로서가 아니라, 이같은 유혹과 시도가 윤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평가하는 것으로 온다. 만일 살인에 대한 저항이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것이라면, 우리는 그에 대한 지각을 가져야 할 것이다. 얼굴의 현현은 윤리적인 것이다.258)
초월성은 타자의 벌거벗음과 불행(misere)과 결핍을 통하여, 이웃의 가까움(proximite)을 통하여 우리를 촉구한다. 타자의 얼굴은 응답을 요구하는 벌거벗고 결핍된 이의 울부짖음이며, 근원적 호소이자 명령이 되는 상처 입기 쉬운 벌거벗음이다. 얼굴의 상처받기 쉬움에서 강요받고, 포획되고, 노출되는 관계가 나타난다. 얼굴의 벌거벗음은 비합리적 환상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해의 가능성인 노출이다. 그리고 비인격적인 추상이나 강제적 논리의 필연성이 아니라 보편적인 것으로서, 타자와의 관계로서 이성의 토대이다. 그것은 오히려 호소하는 자아를 부정하거나 파괴하지 못하게 하는 명령이다. 논리적으로 또는 물리적으로 강압적이지 않기 때문에, 그것의 호소와 명령들은 실제로 거부될 수 있다. 우리 이에 대한 설명을 레비나스의 인용을 통해서 살펴보자.
살인의 불가능성은 단순히 부정적이고 형식적인 의미화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무한성과의 관계, 우리 안의 무한성의 이념이 그것을 적극적으로 조건 지운다. 무한성은 나의 힘을 무력화시키는 윤리적 저항(resistance etique)속에서 스스로 얼굴로서 나타나며, 그리고 무방비한 눈의 깊이로부터 그것의 벌거벗음과 결핍 속에서 확고하고 절대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이같은 결핍과 기아의 이해가 타자의 가까움을 확립한다. 무한성의 현현은 표현이고 담론이다. 표현과 담론의 본래적 본질은 내면적이고 숨겨진 세계에 대하여 그들이 제공하는 정보 속에 있지 않다. 표현에서 존재는 그 자신을 나타낸다. 그 자신을 나타내는 존재는 그것의 표현을 수반하며, 결과적으로 나에게 호소한다. 이런 참여는 이미지의 중화(le neutre)가 아니라, 결핍이나 높이에 의해 나와 관련되는 간청이다.259)
우리가 인용문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얼굴로서 자신을 표현하는 것은 순전히 현상학적 형상을 넘어서 자신을 부과하는 것이고, 표상으로 환원할 수 없는 양식 속에, 마주보기의 직접성에서, 자신의 벌거벗움속에서 즉 자신의 결핍과 기아 속에서,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다. 열망안에서 타자에 대한 겸손과 높이로의 움직임이 결합된다. 표현 안에서 그 자신을 부과하는 존재는 나의 善性을 일깨워서 나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고 증진시켜준다. 책임의 질서는 또한 불가피하게 자유가 호소되는 질서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나의 자유를 일으키는 존재의 피할 수 없는 무게이다. 그 불가피함은 더 이상 ‘운명적인 것의 잔인성’260)을 가지지 않으며, 엄격한 선의 진지성을 지닌다.
표현과 책임의 유대와 같은 윤리적 조건, 언어의 본질 또는 모든 존재의 폭로에 앞선 언어적 기능은 우리에게 근원적 언어를 뽑아 내도록 도와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얼굴로서 나타나는 현현이 개시하는 담론을 침묵으로 피할 수 없다. 레비나스는 랍비 요하난의 말을 인용한다. “음식 없이 사람을 남겨두는 것은 어떤 상황으로도 변명되지 않는 잘못이다. 여기서 자발적인 것과 비자발적인 것 사이의 차이는 적용되지 않는다.”261) 인간의 굶주림 앞에서 짊어지는 책임은 단순히 객관적으로도 알 수 있다.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것이다. 얼굴의 근원어가 의무의 원초적 대화를 열어준다. 그것은 어떤 자아의 주관적 내면성도 회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귀기울이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확신할 수 밖에 없는 힘, 그리고 진정한 이성의 보편성(universalite)을 발견하는 담론으로 들어가도록 의무 지우는 담론이다. 일반적으로 지식의 기초로 그리고 존재의 의미로 존재의 폭로에 선행하는 것은 그 자신을 표현하는 존재자와의 관계이다. 존재론적 지평에 앞서는 것은 바로 윤리적 지평이다.262) 타인의 출현이 모든 윤리학이 가능한 뿌리이며, 이론적인 철학의 모든 통찰이 출발해야 하는 근원이다. 타자의 존재는 그 자체로서 나에게 나의 의무의 토대이자, 근원적 의미를 드러낸다.263)
2. 대화의 윤리적 相互主觀性
현대사상의 이해에서 ‘언어’의 중요성은 간과할 수 없다. 현상학적 주체철학이 언어를 이성에 부수하는 것으로 평가절하한데 비하여, 구조주의 사상가들은 그들 사상의 근원을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의 구조언어학264)에 둘 만큼 언어이론에 의존한다. 뿐만 아니라 후기구조주의자인 라깡(Jacques Lacan)은 언어를 ‘무의식 형성의 조건’265)으로 설명할 정도이다. 언어에 관한 논의에서 그 의미의 중요성은 무엇보다도 언어를 ‘유아론’을 피할 수 있는 계기로 보는 점이다. 언어의 규칙(랑그, langue)을 공유하면서, 자아와 자아들 사이의 상호 소통의 가능성을 찾으려는 언어철학자들은 이같은 사상적 조류를 대변한다. 그런데 이들은 언어를 통해 인간간 사회성의 근거를 찾으려 한 점이 높이 평가되지만, 화자(speaker)와 발화(parole, speaking)의 의미를 놓치고 있다. 우리는 레비나스의 경우 대화의 언어구조안에서 ‘말해진 것’에 대한 ‘말하기’의 우선성과 말하기의 현상에서 나타나는 윤리성을 밝혀준 점에서 기존의 논의들을 넘어서는 것으로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우리는 이같은 내용을 중심으로 다음의 논의를 진행해 간다.
1) 언어의 사회성
일반적으로 언어의 의미는 실재세계를 나타내거나 주관적인 관념 혹은 의식을 표현하는 도구로 생각되어 왔다. 논리실증주의나 초기 비트겐스타인(Ludwig Wittgenstein)의 언어그림이론은 언어가 실재세계를 있는 그대로 반영하며, 언어구조와 실재세계의 구조가 구조적으로 대응하기 때문에 언어는 실재의 모사 또는 사진과 같다고 본다.
이에 대해 현상학자들은 언어를 인간의 의식과 관념의 상태를 표현하는 도구로 보았다. 훗설의 경우, 그는 언어가 통용되는 화용론적 맥락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형상적 본질직관과 관련된 인식론적이고 논리적인 차원의 분석에 초점을 두고 논리적 성찰을 통해 의미를 파악하고자 하였다.266) 훗설의 현상학적 언어이론은 의심의 여지없이 절대적으로 확실한 의미 혹은 형상적 본질이 언어의 매개 없이 의식에 직접적으로 현전한다는 것이다. 훗설은 『논리연구』에서 기호의 두 가지 유형으로 표현적 기호와 지시적 기호를 구분하고, 표현적 기호는 추상적 관념적 내용을 표현하는 기호, 형상적 본질을 자각하는 본질직관에 관련된 기호이고, 지시적 기호는 사물과 말을 연결하는 인과적 관계 및 인접관계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구분한다.267) 훗설은 지시적 기호는 단순한 연결기능만을 할 뿐 본질직관에 이르지 못하므로 이는 피상적 기호이며, 인식론적으로 무용하다고 하였다. 그는 순수의식에 본질을 직접적으로 현전하는 표현적 기호만이 참된 언어라고 본 것이다.
레비나스는 언어에 대한 이같은 접근의 타당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타자와의 관계나 계시와 같은 담론의 가능조건과 우선성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가능성의 조건으로서 우선성은 윤리적 우선성이다.268) 담론 안에서 분리된 존재들 사이의 관계는 얼굴의 현현이며, 형상과 주제화를 넘어서는 그 자체의 표현으로서의 계시이다. 얼굴의 표명은 이미 담론이지, 인식자의 시선에서 접근할 수 있는 시각이 아니다.
그러므로 언어는 외재성과의 관계가 본질적인 것이지, 지적직관으로 열려지는 관념과의 관계가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언어가 유지하면서 매개하는 것은 동일자와 타자사이의 분리된 관계이다. 언어는 매개하지만, 분리된 주체와 타자를 혼합하지 않는다. 언어는 타자와 합해지지 않지만, 그에게 요청하면서, 명령하면서, 또는 복종하면서, 다가간다. 또한 언어는 타자와의 대화로서 타자의 완전성을 위해 필요한 분리와 차이를 유지하는 동시에 타자의 계시도 허락한다. 그것은 개념을 총체성안에 가두지 않는다. 이같은 맥락에서 레비나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리269)는 타자로부터 분리된 존재가 타자를 위험에 빠뜨림이 없이 타자에게 말을 거는데서 발생한다.”270) “분리가 없다면, 진리도 있지 않을 것이다. 분리가 없다면, 단지 존재만이 있을 것이다. 진리는 거리를 폐기하지 않으며, 인식자와 인식된 것의 결합을 낳지도 않으며, 전체성의 폭력으로 문제되지도 않는다. 그것은 현현이다.”271)
여기서 ‘타자를 위험에 빠뜨림이 없이’ 분리된 존재가 타인과의 대화에서 형성하게 되는 관계는 다원적 관계이며, 비-폭력적 다원성이다. 이것은 모든 다원성을 일자 또는 존재의 동일성에로 환원하는 존재론의 바깥에서 행해질 수 있는 진리의 토대이다.
구조언어학은 “랑그(langue)가 말한다”272)고 한다. 이에 대한 레비나스의 입장은 “담론이 의미를 정초한다”273)로 표현할 수 있다. 말하기는 비인격적 문법체계나 구조의 산물로서 인식되는 언어이해와는 본질적으로 다름을 보여준다. 얼굴이 없다면, 언어의 시작도 없고, 의미도 없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언어가 어떤 사람에게 소리내거나 말을 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언어는 합리적 사유작용의 조건이다. 여기서 언어는 문법체계나 규칙과 같은 비인칭적이고 익명적인 체계로서의 언어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다른 타자에 관한 동일자의 태도로서의 언어이다.
여기서 레비나스는 언어에 의해 형성되는 타자와의 상호 주관적 관계를 설명한다. 주체는 비인격적 신호의 체계로 소멸되지 않는다. ‘동일자 안의 타자’로 구성되는 주체성은 전통적이고 철학적인 의식의 주체성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의식이전에 타자에 대한 성실성이고, 의식을 낳도록 하는 책임이다.274) 주체의 동일성은 책임을 피할 수 없는데서 온다. 언어로서의 얼굴은 일종의 비추상적이고 근원적이며, 보편적인 것으로 또 다른 이성이다.275) 그것은 비인도성과 폭력으로부터 도덕성의 영역을 정초한다.
레비나스는 인식에 선행한 담론의 연대성을 말한다. 그것은 그 자체가 자아의 박탈(dispossession)에 의존한다. 레비나스에게서, 박탈은 자아 안의 근본적인 결여나 부정성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충만으로부터, 동일자를 부르는 타자의 얼굴로부터 온다.276) 자아는 그를 환영하고, 받아들이며, 그로부터 배운다. 언설은 바로 가르침 이다. 그는 나에게 말하고, 단어를 넘어서 그 자신을 나에게 제시하며, 나를 판단하는 타자의 근본적인 낯섦을 유지한다. 277) 비록 언어가 자아와 타자 사이의 분리된 관계에 의존할지라도, 주체의 나누어줌은 공동체를 세울 수 있게 해준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의 것인 사물을 타자에게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기는 세계를 구체적인 공통의 장소로 놓는다. 타자와의 관계는 이 세계 밖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소유적 세계를 문제삼는 것이다. 타자와의 관계, 초월성은 타자에게 말을 거는 세계에 있다. 여기서 보편화는 감각적인 것들을 관념적인 것에로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세계를 낳는 것이다.278) 우리는 여기에서 다른 사람들이 간과하였던 타자의 환영과 연대성 등을 중시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언어의 많은 잠재성 가운데 하나가 아니며, 다른 것들 중의 하나의 발화행위도 아니다. 레비나스는 타자를 환영하고 나누어주는 관계를 토대로 한 경우라야 진정한 의미의 객관성, 일반성, 보편성이 가능해질 것으로 보고 있다.
2) ‘마주보는 만남’의 윤리
현대 사상의 주된 과제 중의 하나는 우리가 인간간의 상호주관성을 어떻게 확보해 갈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이 문제의 맥락에서 가장 큰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의식철학이 지닌 자아 중심의 유아론과 의식철학의 한계를 넘어서 가려는 언어철학적 상호주관성간의 격론이다.
이같은 논쟁을 해결하려는 강력한 시도는 비트겐스타인의 후기철학에서 구현된다. 비트겐스타인은 인간존재는 본질적으로 언어적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모든 인간의 경험을 구성하며, 우리가 실재라고 부르는 것을 다루는 방법이다. 비트겐스타인은 본질이 문법에 의해 형성된다라고 주장하지는 않지만, “본질이 문법에 의해 표현된다”는 칸트-하이젠베르크적 관점에 동의한다.279) 이같은 관점에서 볼 때, 비록 실재가 단지 언어적으로만 구성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의미는 언어적으로 구성된다. 비트겐스타인은 자신의 초기 언어그림이론을 스스로 본질주의로 비판하고, 언어에 본질이란 없고 일상적 문맥에 따라 언어가 어떤 방식으로 사용되는가를 검토하는 게 중요하다고 보았다. 즉 언어현상도 놀이처럼 상호 주관적 규칙에 따르기 때문에, 이같은 규칙에 따름으로써 언어사용자들이 합의에 이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비트겐스타인의 이와 같은 관점은 자아중심주의를 피한다. 왜냐하면 그는 언어는 규칙에 지배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과 표현은 반복될 수 있고 재생산될 수 있으며, 그래서 언어는 원칙적으로 광범위한 인간공동체에서 상호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그래서 언어가 화자에 의해서 형성된다는 관점은 사적 언어, 자아 중심적 언어로 불가능하며, 모순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비트겐스타인은 언어가 인간경험을 구성한다는 주제를 발전시키지도 못하고, 또 자아의 의미를 적절히 밝혀주지도 못하고 있다. 이원론, 이기주의, 자아중심주의, 유아론에 대한 공포는 규칙의 관점 외에 달리 인간경험을 형성할 수 있는 근거를 거부한다. 따라서 그는 원초적 인간(first person), 자아, 또는 에고의 개념을 문제삼게 되며, 반면 자아의 발전된 관념이나 자아들간의 상호관계를 다루지 못한다.280) 이같은 분석은 반-자아주의에는 기여하지만, 자아들간의 관계를 설명해주지 못한다. 따라서 비트겐스타인은 자아중심주의에 대하여 성공적으로 비판하는 반면, 내면성으로서의 자아의 실체를 밝혀주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낸다.281)
이와 같이 인간의 의식도 언어적으로 구성되고 언어를 통해서 형성되어야 한다고 보는 후기 비트겐스탄인의 언어철학은 하버마스(Jurgen Habermas)의 비판이론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하버마스는 의식철학이 부딪친 한계로부터의 탈출구를 언어철학으로의 전회(Linguistic turn)를 통해서 극복하고자 한다. 하버마스는 일상적 의사소통형식안에 이미 자유, 정의, 진리와 같은 보편적 원칙이 내재해 있으므로, 의사소통적 행위이론이 사회이론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촘스키(Noam Chomsky)의 언어학이론과 오스틴(Austin)과 서얼(Searle)이 제기한 언어행위이론에 힘입어, 하버마스는 의사소통능력의 합리적 재구성을 시도한다. 보편언어설과 언어생득성을 주장하는 촘스키는 언어능력(linguistic competence)과 언어수행(linguistic performance)을 각기 심층구조와 표면구조에 비유하여 엄격하게 구별하였다. 그는 심층구조에 해당하는 언어능력만이 보편적 개념화가 가능하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러나 하버마스는 언어능력뿐만 아니라 의사소통능력 즉 언어수행도 보편적 개념으로 정립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282) 무엇보다도 하버마스는 촘스키가 언어능력을 생래적으로 결정되어 있다고 상정한데 거부감을 느끼고, 비트겐스타인처럼 일상적 언어수행의 분석에 초점을 두었다. 하버마스는 비트겐스타인의 언어놀이이론을 수용하고, 의사소통행위가 상호 주관적인 규칙에 대한 성찰을 내포한다고 보았다. 283)
담론의 방법은 갈등상황에 있는 일상의 실천 속에서 모든 관련된 이들에게 화용적이고 구속력 있는 해결책을 얻기 위해 사람들이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를 말해준다. 284) 하버마스는 실천적 담화의 방법(Methode des praktischen Diskurses)은 규범에 대한 평가요청의 적절성이 개별적 권위자의 절대명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담론적으로 검토되어져야 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러므로 행위규범의 적절성에 대한 합의이론에서 실천적 담론의 논리를 발전시킨다. 담론이 진행되어야 할 논의지평으로 ‘보편적 화용론’의 출발점은 ‘의사소통적 행위’로서 실천적 용무에 대한 일상언어에 관한 것이다. 담론적 의사소통은 규범과 가치의 보편적 구속성을 문제삼는다. 또한 담론의 참여자들은 이성적이고 선의지를 가진 한 모든 사람들이 찬성할 수 있는 합의에 도달하고자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윤리적 언어에 관한 것으로, 모든 담론참가자들은 도덕적 자기이해를 표현할 수 있고, 자신의 욕구를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선택된 언어체계나 개념체계가 부적절하고 언어비판이 불가피한 경우에는 담론의 영역을 교환해서 공동의 언어영역을 형성해야 한다. 결국 하버마스는 상이한 담론지평을 검토하는 실천적 담론은 결국 ‘이상적 언어상황’의 전제아래서만 가능하다고 본다. 이들이 적합한 합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모든 담론참여자들이 의사소통적 능력, 대등한 대화, 진실성, 합리성을 가져야 한다.285)
하버마스는 자아와 사회의 관계를 ‘진보적으로 분화된 이해’의 개념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그는 ‘이상적 담화상황’으로부터 보편적인 도덕적 담론을 목표로 한다. 분화의 과정은 자기이익의 초기적인 인습이전의 단계와 사회화를 일으키는 개별화로부터 발전해간다. 그러나 하버마스 스스로 실천적 담론의 한계를 밝히고 있듯이, 담론윤리학은 올바른 규범의 교육을 위한 방식이 아니라, 가설적으로 제안된 규범들의 타당성을 검토하기 위한 방식이다. 또한 담론윤리학의 기본명제들은 개별적으로 적용의 문제를 조정할 수 없다. 적용의 조절은 실천적 지혜를 요구한다. 실천적 지혜는 담론의 법칙에 속하지 않는다. 286)
이와 같이 현대철학에서 의식철학을 극복하는 계기를 발견하려는 시도와, 언어를 통해 자아와 사회의 관계를 규명하려는 시도에서 레비나스의 위상은 무엇인가? 레비나스는 의식철학자들이나 개인주의자들과 같이 자아, 개인, 인식과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또는 비트겐스타인처럼 공동체, 언어, 합의로 시작하지도 않는다. 또한 롤즈와 같이 “정의가 사회제도의 제일 덕목이다”287)라는 메타윤리적인 직관적 토대에서 출발하지도 않는다. 또한 담론윤리에서처럼 합의를 목표로 하지도 않는다.
레비나스는 바로 ‘얼굴과 얼굴(face to face)’, ‘타자와의 만남’에서 출발한다. 이같은 만남은 기술적이면서도 규범적이다. 사람이 누구인지 그리고 정의正義가 어떻게 定意되는지는 단지 이같은 만남 안에서 설정된다.288) 언어이전의 만남으로부터 출발하기에, 레비나스는 ‘말하기’와 ‘말해진 것’을 노출의 근거로 삼는다. ‘마주보기’는 그 무엇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궁극적인 관계이다. 왜냐하면 말하기(dire)가 말해진 것(dit)속으로, 문법, 규칙, 언어의 주제화로 흡수될 수 없는 것처럼, 타자는 무진장하고 무한하기 때문이다. 말하기는 주제화될 수 없는 것으로, 언어 안에서 초월적이면서도 내재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레비나스는 언어를 통해서 사회성을 설명하는 이들이 범하기 쉬운 오류, 즉 자아의 관념이나 자아의 세계 등을 희생시키는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 타자에로 자신을 노출함은 모호하고, 환원할 수 없고, 독립적이고, 초월적이어서 자아의 세계로 흡수되지 않는 또는 자아의 대상이나 자아를 위한 대상으로 재규정될 수 없는 존재로서의 타자의 개념을 포착한다. 289) 레비나스는 상징과 언어적 합의에 의해 구성된 세계와 공동체에서, 그리고 초월적이면서도 환원할 수 없는 고유한 타자의 세계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지에 대하여 분석한다. 우리는 마주보기, 말하기 또는 근원적 사회성으로 출발하면서, 자아 중심적 관점으로부터 공동체의 구성에 요구되는 정당화의 문제나 사회적 관점으로부터 에고를 구성하면서 제기되는 문제를 피한다. 더욱이 타자와 마주보는 만남에는 규범적인 것이 개입된다. 이것은 단순히 내면성으로 자아를 드러낼 뿐만 아니라 사회성, 인간책임의 본질, 규범적 의미까지도 규정한다.
이같은 논쟁의 배경에서 레비나스의 기여는 분명하다. “도덕성은 철학의 가지가 아니라 제일철학이다”290)라고 주장하는 레비나스의 목표는 윤리적인 것의 우선성 즉 인간과 인간 관계의 우선성, 그리고 모든 다른 구조들이 의존하고 있는 환원할 수 없는 관계의 우선성을 확립하는 것이다. 이같은 목표는 비트겐스타인의 논의를 종결짓는 동시에 하버마스의 담론윤리를 넘어서는 새로운 출발점이 된다. 레비나스는 언어의 수행적 기능인 말하기는 언어적 상징, 언어체계, 의미론 등의 분석 이전에 이미 근원적이고도 본래적인 의미를 지님을 밝히고자 한다. 이같은 연구의 성과로 말하기의 현상에서 책임, 다가섬, 접근, 타자를 위하는 존재(l'un-pour-l'autre)의 의미를 찾은 것이다.
3) 대화의 윤리성
본 절의 서두에서 언급하였듯이, 레비나스 언어이론이 지닌 탁월성은 언어현상이 나타내는 윤리성을 밝힌 점이다. 어떻게 대화(entre-tien)안에서 윤리성이 정초될 수 있는가? 타자는 얼굴인 동시에 내게 말을 걸어오며, 나도 그에게 말을 건넨다. 이와 같이 실현되는 인간의 대화는 전체성을 깨뜨리는 또 다른 방법이다. 얼굴과 대화는 함께 묶여 있다. 얼굴이 모든 대화를 가능하게 하고 모든 대화를 시작하게 한다. 자아와 타자와의 사이에 신뢰할만한 관계는 시각의 관계가 아니라, 대화이며 좀 더 정확하게는 대화에서 나타나는 응답의 책임성이다.
대화에서 응답가능성, 대답가능성의 의미는 중요하다. 우리말의 대답은 마주 대하여 응답함을 의미한다. 독일어 Antwort(대답), 대답하다(antworten), 책임지다(verantworten) 등은 모두 어원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이룬다. antworten, Antwort, verantworten 의 낱말에 공통적으로 들어있는 접두사 ‘ant’는 ‘~에 대해서’의 뜻을 가지며, ‘wort’는 ‘말, 언어’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은 공통적으로 ‘~에게 말하다’는 의미를 내포한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상대방을 전제하고 있다. 대화에서 보여지는 주체성은 결코 혼자서 하는 독백이나 나 중심에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해서 즉 타자중심에서 나타난다.291) 레비나스에 있어, 윤리적 관계는 지식을 넘어서는 것으로, 대화를 통해 확신된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언어는 타자로부터 자아로 온다. 대화는 순수의식안에 있는 내재성의 개념을 깨뜨린다. 의식 안에서 무한성의 이념이 의식의 충만으로, 의식에 새로운 영감을 부여하듯이, 대화는 의식에 환영, 환대, 도움의 손을 준다. 레비나스는 이것이 담론의 근원적이고 일차적인 기능임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담론의 영역에서 인식되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언어를 현상학적 관점에서 분석할 때, 명료함은 주제화에서 일어나며, 사상은 주제화, 개념화를 목표로 한다. 레비나스는 ‘말해진 것’에서는 ‘말하기’ 자체가 주제화 되며, ‘말하기’의 주제화는 결국 의식의 특성으로 가져오게 됨을 지적한다. ‘말하기’와 ‘말해진 것’에서, ‘말해진 것’은 지향적 행위의 노에마에 상응하는 것이다.292)
레비나스는 현상학에서 언어를 다루는 방법에 대해 불만스러움을 나타낸다. 다음의 인용은 그같은 레비나스의 입장을 말해준다.
말의 기능은 이성에 대한 의존으로 이해되어 왔다. 말은 사고를 반영하였다. 명목론은 말을 이성의 도구라는 또 다른 기능에서 찾는 것이다. 훗설은 언어를 이성에 종속시키고 있으며, 하이데거의 경우 언어에 역사적 실제의 정조와 무게를 싣고 있지만, 이해의 과정과 결합시키고 있다. 언어적 표현(verbalism)에 대한 불신은 모든 표현작용에 대하여 합리적 사고의 우선성을 낳았다. 표현은 사유를 상징체계와 같은 특수언어로 집어넣으며, 언어체계에 결합시킨다. 293)
우리가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레비나스는 언어의 근본적 본질을 사유를 표현하는 언어적 기능에서 찾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언어의 본질을 나와 타자의 관계를 열어주는 실질적 기능이나, 의미의 표현에서 찾는다. 이것은 우리를 대상구성의 선험적 의식에로 환원하지 않는다. 의미는 타자의 얼굴이고, 말의 의미는 이미 언어의 근원적 마주보기에서 일어난다. 레비나스는 또한 언어에서 의사소통적 담론의 의미를 넘어서 간다. 말하기는 의사소통을 가져오는 것이지만, 그 뿐만 아니라 모든 의사소통을 위한 조건, 노출”294)이다. 타자에게 노출되어짐은 언어구성에 필수적이다.295)
그런데 ‘말하기’는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지만, 얼굴을 관찰하는 것은 아니다. ‘말하기’는 타자를 환대하는 방법이며, 타자를 환대한다는 것은 그에게 응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다른 이가 있는데서 침묵하는 것은 어렵다. 296) 우리가 말하기의 언어현상에서, 근원적으로 경험하는 것은 타인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기’에서 보여지는 이웃과의 관계는 타자를 유지해가야 한다는 것, 타자에 대하여 응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발화적 기능에서 언어는 본질적으로 타자를 유지시키게 됨을 주목한다. 언어에는 주-객 관계로 환원할 수 없는 관계를 구성하는 타자의 계시가 있다. 언어는 발화자, 복수를 전제하는 것으로, 언어의 지평에서 이들의 교제는 타자에 대한 일자의 표상도 아니며, 보편성에의 참여도 아니다. 레비나스는 이같은 교제를 윤리적인 것으로 특징짓는다.297) 언어를 통한 대화에서, 교제의 윤리적 성격을 파악한 것은 레비나스의 탁월성으로 지적할만하다. 또한 레비나스는 언어의 작업을 얼굴과의 관계로 들어가는 것, 윤리적 관계를 가능하게 한다.298)
레비나스는 이와 같이 대화가 나타내는 발화(parole)의 관계양식과 마주보는 얼굴이 나타내는 인간관계의 양식을 연관지어 설명한다. 근원적 윤리어로서 얼굴, 얼굴과 얼굴을 맞대는 마주보기의 윤리적 관계는 모든 관계이전의 관계, 근원적인 관계형식이다. 마주보기에서, 절대적으로 다른 타자는 자아에 동화됨이 없이 그 자신을 나타내며, 또 동일자를 부정하지도 않고, 동일자에게 폭력적으로 나타나지도 않는다. 타자의 얼굴이 나타내는 현현, 표현은 비폭력이며, 나의 자유가 아닌 책임(responsabilite)이다. 여기서 자아와 타자 사이에 유지되는 관계는 흡수나 동화, 폭력이 아니라, 동일자와 타자의 다원성, 평화이다. 절대적으로 다른 타자와의 관계는 헤겔의 변증법적 총체성에서 나타나듯이, 이질적인 것에 대한 불화, 투쟁과 거부가 아니다. 타자는 변증법적 이성의 오점이 아니라, 합리적 지도이며, 가르침의 조건이다. 초월적 관계로서, 타자와의 관계는 내 안에 있지 않은 것을 나에게로 들여온다. 그것은 무한성의 이념을 지닌다.299)
타자가 자신의 얼굴로 계시하는 무한성의 이념과 언어가 어떻게 연관될 수 있는지를 레비나스의 글을 통해 알아보자.
타자는 나를 바라보며, 나를 문제삼으며, 무한성으로서의 그의 본질에 의하여 나에게 의무를 부과한다. 의미는 언어를 지닌 존재 안에서 일어난다. 언어의 본질은 타자와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같은 관계는 내면적 독백에 붙여지는 것이 아니다. 얼굴 안에 나타나는 존재의 환영, 사회성의 윤리적 사건은 내적으로 대화를 요구한다. 그리고 얼굴로서 나타내는 현현은 모든 다른 존재들처럼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한성을 계시하기 때문이다. 의미는 무한성 즉 타자이다. 의미는 의미부여에 선행한다.300)
위의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얼굴의 현현은 무한성의 계시이다. 무한성의 충만은 의식에 흘러 넘치며, 따라서 얼굴은 더 이상 의식이나 시각의 대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얼굴이 지닌 윤리적 절박성과 환영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다. 의무를 깨닫는 것은 더 이상 인식론적 문제가 아닌 것으로, 타인의 얼굴(visage d'autrui)에 응답하는 것으로, 타인을 환영하면서 말을 걸고 대화하는 것이다.
우리는 무한성을 계시하는 얼굴로 나타나는 존재의 계시에서, 얼굴과의 관계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을 대화라고 볼 수 있다. 대화에서 행해지는 말하기, 말을 나눔은 이웃을 의미로 대하면서, 그에게 다가서는 것이다. 말하기란 모든 대상화에 앞서서 타자를 대하는 의미이다.
말하기에서 이웃에 대한 응답의 책임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그리고 역설적으로 순수한 말하기 그 자체에서 수동성을 이해하는 것이다. ‘말하기’의 행동은 처음부터 타자에게 보여지는 극단적인 수동성으로 시작한다. ‘말하기’에는 주권적인 것으로 또는 능동적인 것으로 이해되는 주체성이 포기된다. 바로 여기에 타자와 주관성의 관계가 있다.301)
여기서 주체의 노출은 주제화와 근본적으로 다른 의미를 가진다. 살갗으로서 타자에게 드러내진 사람은 그것을 상처낸 사람에게로 노출되는 것이다. 말해진 것 이전에, 존재와 실체의 모호성의 이면에, 말하기는 말하는 사람을 이론에 의해 노출된 대상으로가 아니라, 은신처를 떠나 자신의 방어를 소홀히 한 채 자신을 드러낸 사람, 자신을 모욕과 상처에로, 분노에로 드러낸 사람으로 발화자를 나타낸다. 말하기는 노출의 노출이며, 노출의 표현이다. 노출의 수동성은 나를 고유한 존재로 정의하는 약속에 응답하지만, 나를 나 자신에로 환원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모든 동일시되는 본질로부터 그리고 모든 형상으로부터 나를 벌거벗김에 의해 응답한다. 말하기는 이같은 수동성을 의미한다.302)
우리는 다가감, 접근으로서의 말하기에서, 주체의 배제를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대치할 수 없는 단일성으로 남는, 주체의 주체성이다. 이같은 수동성은 어떤 수용성보다도 더 수동적이다. 그 안에 주체의 수동성의 최고 모델이 자리한다.303) 말하기의 주체는 그 자신을 표현하면서, 장소로부터 추방되어(non-lieu), 더 이상의 거주도 없는 존재 안에서, 이웃에게 접근한다. 이제 주체는 집에 머무는 자아(chez soi)가 아니다.304) 말하기의 주체는 신호를 주지 않고, 그 자체로 신호가 되며, 성실성으로 된다.
이와 같이 가장 수동적인 수동성의 형태로서의 말하기는 그 자체 인내와 고통을 의미한다. 말하기에서 고통은 주는 것의 형태로 나타난다. 말하기는 벌거벗음이다. 말하기는 타자에로 드러남이다. 지명된 이는 내면성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는 지점에까지 개방해야만 한다. 타자에 의해 침투된 사람, 고통, 피부의 이면은 모든 결핍보다 더 드러난 벌거숭이이다. 그것은 자신을 희생하기보다는 오히려 희생되어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고통의 경험 또는 불행에 묶여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체의 주체성은 상처받을 수 있음, 호의를 보임, 감성, 어떤 수동성보다도 더 수동적인 수동성, 돌이킬 수 없는 시간, 견뎌냄, 말을 건넴, 주는 것으로 설명된다.305) 타자에게 주는 신호의 성실성에서, 말하기는 나로부터 모든 동일성을 박탈한다. 말하기에 내포된 타자를 위함(pour autrui)은 타자를 표상화하는 의식의 개념이나, 상호성을 전제하는 계약의 개념 안에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말하기의 의미는 계약의 범위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306) 이것은 본질의 부정이 아니라, 타자를 위해 “스스로를 불태우는 것, 자신을 위한 가능성의 토대를 태우면서, 이런 소실의 재조차도 태우면서”, 타자를 위한 것(l'un-pour-l'autre)으로 되는 것, 사욕이 없는 것이다. ego가 self로 복귀하는 것, ego를 면직시키는 것이 바로 공평함의 양상이다. 그것은 표현과 주는 것에 헌신하는 구체적 삶의 형태를 가진다.
3. 나와 타자의 다원성의 윤리
1) 나와 타자의 윤리적 非對稱性
전통적으로 사회철학은 인간존재라는 종의 심급에서 근본적으로 평등한 권리를 가진 자율적 주체의 개념으로부터 출발한다. 이같은 입장에서 사회철학의 근본문제는 어떻게 이성을 지닌 다수의 독립적이고 평등한 개인들이 조화롭고 평등한 전체를 형성할 수 있는가를 문제삼는다. 이것이 평등을 전제로한 상호성의 관계이다.
그러나 레비나스에게서 타자와 동일자의 관계는 비대칭성, 비상호성 위에 정초된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인간관계에서 다음의 물음을 제시할 수 있다. 나를 바라보는 너로서의 타인(autrui)의 형태에서 타자(autre)는 무엇을 계시하는가? 나와 다른 타자들 즉 제3자의 관계에서도 비대칭적 관계는 형성되는가? 이 물음은 나와 친밀성을 지닌 이웃을 넘어서, 나와 무관한 사람(qua alienus)들에게까지 비대칭적 관계가 확대될 수 있는가의 가능성을 묻는 것이며, 비대칭적 관계를 토대로 하여 사회철학307)과 정치학이 가능할 것인지에 대해 묻는 것이기도 하다.
이같은 물음에 대해서 레비나스는 비대칭의 윤리적 관계가 모든 종류의 보편성과 공동체에 선행하는 근원적 관계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레비나스가 말하는 비대칭적 관계의 구조와 의미는 무엇인가? 자아와 타자의 윤리적 관계를 나타내는 비대칭적 상호주관성은 타자의 얼굴을 통해 나타나는 ‘윤리적 호소’와 그에 대한 ‘동일자의 응답’으로 형성되는 관계를 말한다. 레비나스는 타자는 높이로부터 온다고 말한다. 타자의 높이는 그의 얼굴의 벌거벗음 속에서 나타나는 가난한 이와 이방인의 결핍의 의미이다. 나에게 호소하는 이들의 빈곤은 그 자신에게 봉사하도록 나에게 온다. 그는 주인으로서 나에게 명한다. 이런 명령은 내가 나자신를 다스리는 정도만큼만 나와 관련된다. 내가 타자의 높이를 수용하면서, 나와 타자 사이에는 인간애가 형성된다.
타자와의 관계인 대화는 나의 자유를 문제삼고, 나에게 책임을 요구하는 타자로부터 다가오는 호소이다. 모든 사회적 관계는 어떤 이미지나 상징의 중재 없이 단지 얼굴의 표현에 의해서 타자의 표현을 동일자에게 나타낸다.
레비나스는 자아와 타자 사이에 형성되는 비대칭성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가 정의를 절규하는 타인의 불행과 결핍에 귀기울이는 것은 관념의 영역에 들어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응답하면서 자신을 부여하는 것이다. 얼굴은 나의 의무에로 나를 부르며, 나를 심판한다. 얼굴 안에서 그 자신을 표현하는 존재는 높이의 차원과 초월성의 차원에서 다가오며, 여기서 타자는 자신을 나의 방해물이거나 적으로 대립시킴이 없이 낯선 이(l'etranger)로 그 자신을 나타낸다. 더욱이 나로서의 나의 위치는 타자의 본질적 결핍에 응답할 수 있는 존재, 나 자신에 대한 의지를 발견할 수 있는 존재에 있다. 그러므로 초월성 속에서 나를 지배하는 타자는 나에게 의무를 부여하는 낯선 이, 과부, 고아이다. 308)
여기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은 과제는 너가 나에게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얼굴로 나타나는 너가 초월성 속에서 나에게 의무를 지우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존재는 타자에게 봉사하는 무한한 과제와 관련된다. 무한의 계시는 타자의 벌거벗음 그 자체에 있을 뿐 다른 특수한 모습에서가 아니다.
『존재와 다른 것 또는 존재사건 저편』의 중요한 결론은 다름의 보편화에 의해서 모든 다른 타자(타자의 타자)가 나의 삶을 포함하는 정의의 요구를 계시한다는 것이다. 나 또한 타자들(autre)에 대해서 타자(autrui)이다. 하나의 공통의 본질을 공유하는 모든 인간 개체들의 근원적 평등함 때문이 아니라, 초월성의 근원적 구조 덕분이다. 초월성을 토대로 하는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우리는 서로 관련된다. 레비나스는 “상호적 관계는 초월성의 흔적에서 나와 다른 사람을 묶어준다”.고 말하면서, 이같은 공동체를 ‘우애’의 공동체라고 부른다.309)
레비나스는 이와 같은 자아와 타자사이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세계 저 편으로부터 다가오는 얼굴의 현전은 공포와 전율을 일으키는 본질로 나를 압도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인간의 우애와 맺어 준다. …… 타자는 얼굴 안에서 현상학적 주체처럼 단지 자유의 능동성과 지배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가 들어서게 되는 관계로부터 무한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그 자신을 처음부터 절대적인 것으로 나타낸다. 자아는 그 자신이 관계로부터 자유롭지만, 절대적으로 분리된 존재와의 관계에서 그런 것이다. 얼굴을 가지고 나를 향해 있는 타자는 얼굴의 표상으로 재흡수되지 않는다. 310)
타자와 나의 차이와 유대는 나와 타잔에 내재하게 되는 서로 다른 속성에 기인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들이 만남으로부터 가지게 되는 서로 다른 심리학적 성향 때문도 아니다. 그들은 나와 타자의 관계, 자기로부터 타자에로 향하는 존재의 불가피한 정향에 연유한 것이다. 이같은 관계에서만 인간의 유대가 성립할 수 있다. 인간의 유대, 모든 인간이 형제라는 것은 인간의 종적 유사성에 의해서 설명되는 것이 아니며, 그들을 있게 하는 공통의 원인에 의한 것도 아니다. 나와 타자의 관계를 맺어주는 대화는 동질적 또는 추상적 매체 안에서 실시되는 것이 아니고, 도와주고 제공해주는 구체적 세계 속에서 실시된다. 존재의 다원성은 전체성을 거부하지만, 박애와 대화를 형성하며, 본질적으로 비대칭적인 공간 안에 위치하게 된다.
그러므로 레비나스는 공존의 처음 형태를 너와 나의 타자를 위한 존재(l'un-pour-l'autre)에 있다고 주장한다. 배려가 공존의 특수형태라고 말하는 하이데거에 대해서, 레비나스는 “타자에 대한 동일자의 무한한 관심이 인간간의 유대, 사회의 기원이다”고 반박한다.311) 그리고 정의는 그것이 고유한 타자를 위한 고유한 존재(the unique one-for-the (unique) other)의 책임에 근원한 것이 아니라면 불가능하다고 본다. 존재의 질서와 가까움 사이의 단절될 수 없는 유대에 의해서 얼굴은 모든 얼굴들의 이웃이자 얼굴이다. 그것은 타자의 얼굴(le visage d'autrui)안에 있다.
만남의 비대칭성은 모든 사람이 타인에 대해 무한한 책임을 부과하는 것으로 경험된다는 것을 가정할지라도 유지된다. 만일 비대칭성의 보편적 경험이 진실이라면, 그것은 ‘모든 사람은 동시에 모든 사람보다 높다’는 모순적 결론으로 이끄는 것으로 보여진다.312) 우리는 비대칭의 경험이 주관적 현상이라고 선언하면서, 이같은 모순을 피해야 하나? 이에 대하여 레비나스는 너-나의 배타적인 친밀성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공통의 세계가 타자의 복지를 향하도록 모든 타자들에게로 향한다. 즉 나의 도덕적 책임은 지금 여기에서 나를 바라보는 너에게로만 제한되지 않는다. 타자에 대한 나의 책임은 모든 인류에게로 확대되어 간다. 이것은 사회정의와 세계평화에 대한 나의 책임을 내포한다. 우리는 이제 이같은 레비나스의 구도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살펴 볼 것이다.
사회적 또는 집합적 관계에서 타자는 제3자(the third)로 불려진다. 레비나스는 동일자와 타자의 형이상학적 관계로부터 보편적 정의의 의무와 제3자를 연역해간다. 타자의 벌거벗음은 보호받지 못하고, 유랑하고, 탈사회화된 무한의 현전으로 봉사 받아야 하는 낯선 이로서의 타자의 존재를 상징한다. 제3자 즉 모든 타자들은 너와 관련된 나의 존재 안에 나타난다. 모든 타자들은 배타적 사랑 또는 우정으로 자신을 몰입하는 우리의 관계를 방해한다. 우리가 제3자의 현전을 존중하고 보편적 정의와 평화의 인도성의 차원으로 개방되어 있는 한, 우리는 세계평화와 보편성의 예언적 메시아를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내가 연인이나 가족주의나 혈연주의, 연고주의처럼 가까운 이웃에게만 친절하다면, 낯선 이나 제3자에 소홀할 것이고, 결국 그에게 불의할 것이다. 이런 이유로 사회정의는 필수적이고 본질적이다. 이것은 이원적 관계만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그리고 자아와 타자 사이의 본래적 관계에 의한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같은 상황은 모든 타자들을 그들의 무한한 요구로부터 배제하는 배타적인 사회로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편적 정의가 사랑보다 더 선하다는 것은 무인격성의 승리를 수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랑 받는 것이 아니라 존중받는 사람인 제3자인 타자와의 관계는 나의 헌신을 필요로 하고 요구하는 고유한 존재의 단독성과 선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사회정의의 영역, 즉 제도적 총체성은 보편법에 의해 지배되는 익명적 영역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구성원의 개체성은 파괴될 것이다. 정의의 요청에 의해 형성되는 사회적 공동체는 자신의 단일성을 주장하는 구체적 자아와 관계 맺는다.
또한 레비나스는 보편성은 근원적 타자와 제3자의 평등에 의해 상징되는 것으로, 초월적 관계의 근원적 결과라고 주장한다. 좀 더 본래적인 언어가 이론, 논리, 철학, 모든 주제에 선행한다. 보편성의 언어는 그것을 표현하는 존재능력을 발화자에 의존한다. 발화자의 발화를 통해서 그들은 서로에게 말을 건다. 언어는 보편적이다. 말하는 것은 세계를 공통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나아가 레비나스는 더욱 더 근원적 보편성을 제시한다. 그것은 유나 종의 보편성이 아니라 일종의 가까움의 보편성이다. 타자를 인식하는 것은 물건을 소유하는 세계를 넘어 그에게 다가가는 것인 동시에 나눔에 의해 공동체와 보편성을 확립하는 것이다. 담론의 세계는 더 이상 분리 안에, 존재 안에, 모든 것이 나에게 부여된 집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담론 안에서 동일자와 타자의 관계는 존재자의 형성이 아니라 주는 것으로 나타난다. 담론 속에서 객관적 인식을 넘어서 사회적 관계의 순수경험이 구성된다.313) 그래서 인간존재들의 공동체는 근원적인 우애적 공동체로 형성되어야 한다고 보게 된다. 레비나스는 “제대로 된 질서 잡힌 정의는 타자와 더불어 시작한다”(la justice bien ordonnee commence par Autrui)고 말한다. 우리는 다음Ⅴ장에서 우애적 공동체에 관한 논의를 심화시켜 갈 것이다.
2) 나와 타자의 다원성
(1) 의지와 윤리적 주체
레비나스에 의하면, 인간주체는 단지 개념의 계기나 존재출현이 아니다. 인간주체를 단지 개념이나 존재출현과 같은 방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결국 인간을 자의식으로 연역하게 된다. 그리고 자의식은 개념과 역사로 연역된다. 그런데 이와 같이 개념과 역사로부터 ‘주체성’과 ‘나’를 연역하는 것은 개별자들이 지닌 ‘선한 의도들’이나 ‘훌륭한 정신들’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다. 이같은 과정은 결국 개념화로 인해 ‘존재보다 선한 것’의 의미 즉 ‘선성’을 잃게 됨을 의미한다.
레비나스는 『전체성과 무한』의 ‘의지의 진실’에서 다원성과 보편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현대철학에서 보편성이 획일성과 총체성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음은 다각도로 논의되고 있지만, 레비나스와 같이 다원성을 살려내면서 다원성을 내포하는 새로운 이성의 질서를 구축하는 시도는 거의 없었다. 본절은 이점을 중심으로 논의해 간다.
레비나스는 먼저 보편성이 이성과 결탁하여 윤리학을 정치학의 영역으로 환원시키게 되는 것과, 개인의 고유성을 합의라는 미명아래 익명적 보편성으로 흡수시켜 버리는 것을 비판하면서 출발한다. 그는 공정한 사회에 대한 논의의 연속으로 윤리학이 정치학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는 얼굴의 계시에 의해 새로워지는 이성, 의지, 윤리학, 정치학, 사유, 의사소통과 같은 것의 의미가 밝혀져야 한다.
관념주의는 인간주체를 이성의 보편법에 지배되는 익명적 질서의 계기로 간주한다. 의지는 실천이성으로, 즉 이성적 보편성에 의해 감화되는 능력으로 정의된다. 반면 선한 의지는 동기와 행위가 전적으로 보편성에 의해 결정되는 의지이다. 레비나스는 칸트의 실천이성과 의지의 동일시도 이같은 맥락의 연장으로 본다. 관념적 체계에서 타자와 나는 계산의 인자로 기능하며, 그로부터만 실질적 존재를 얻고 있다. 타자와 나는 여기에서 동인의 역할을 할뿐이다. 의지가 이성을 열망하는 경우는 스피노자나 헤겔의 경우 잘 드러난다. 의지와 이성의 동일시는 관념론의 궁극적 목적이기도 하다.314) 그러나 레비나스는 이와 같은 의지와 이성의 동일시를 비판한다. 그는 이같은 자신의 노력이 자의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관념론의 불합리성과 비도덕성을 밝혀 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의지와 이성의 동일시는 관념의 익명적 보편성에 서로 다른 개인들을 참여시키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담론은 그 안에서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한다.
이같은 전통에서 역사의 심판은 항상 주체의 부재 속에서 진술되어 왔다. 객관적 심판은 합리적 제도로 구체화되며, 주관적 의지는 보편법에 복종하게 된다. 역사의 심판에서 의지의 부재가 의미하는 것은 역사적 심판이 익명적인 제3의 인간에서 행해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고유성과 개방성을 갖지 않는 간접적 담론에서 행해진다.
그러나 언설, 구체적 담론, 진리를 확증하는 심판에서 주체성은 다수의 존재사실이 아니라, 의지를 가진 주체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주체성은 자신의 심판을 주장하는 의지에 있다. 주체성은 단지 의지의 감성적 단면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주체들은 책임의 고유성으로 분리되기 때문이다. 의지는 자신의 고유성을 구성하는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책임 있는 주체를 말해준다. 만일 인간 개체들이 보편적 이성의 초연한 경우와 다르지 않다면, 무한은 유와 종의 보편성을 넘어서는 탁월성을 계시할 수 없다. 주체를 책임 있는 것으로 그와 더불어 의지하고 합리적인 것으로 구성하는 것은 선이다. 주체의 고유성과 단독성은 사유와 담론으로 흡수되는 위험을 피한다. 심판은 심리에 있어서 자신을 방어하는 의지에 관계되며, 자신의 변호를 통해서 담론의 전체성으로 흡수되는 것을 피한다.315)
역사의 심판은 가시적 체계 안에서 형성된다. 역사적 사건은 가시적인 것이고, 이들이 전체성을 형성한다. 그것은 사과를 배제하며, 매 순간 주체성에 전체성을 개입시킨다. 레비나스는 만일 역사가 정의를 잃고 주관성을 억압한다면, 비가시적인 것이 자신을 표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비가시적인 것의 표현은 가시적인 것에로의 이행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주체성의 선성에 의해 형성된다. 역사의 심판이나 순수이성의 보편적 규범은 변명을 내포하는 단독성을 억압한다. 역사의 심판은 모든 변명을 가시적인 논의로 전환시키며, 고유성의 무한근거를 제거한다. 전체성안에 단독성이나 고유성의 여지는 없다.
그러므로 레비나스는 역사의 심판에서 보여지는 비가시적인 것에 대한 공격을 비판한다. 비인간적으로 무자비하게 보편적 원칙으로부터 설정된 판결은 얼굴을 마주보는 직접적인 담론을 방해한다. 심판에서 사죄는 의지의 단독성을 고양시킨다. 의지의 단독성의 고양은 의지가 가지는 무한책임에서 발생한다. 어떻게 해서인가? 만일 주체성이 단지 존재의 결핍 양태라면, 의지와 이성간의 구별은 의지를 자의적인 것, 부정으로 만든다. 반대로 주관성이 절대적으로 다른 타자와의 관계에서 분리된 존재로 정의된다면, 그리고 얼굴이 의미, 합리성을 가져오는 것이라면 의지는 지성적인 것과 구별된다. 의지는 어떤 의미에서건 책임을 진다. 책임을 거절할 자유가 의지는 없다. 요컨대 타자의 얼굴이 가져오는 의미를 무시할 자유는 없다.
나의 자의적이고 분파적인 자유를 고소하는 정의는 단순히 보편적 질서에로 들어감을 은폐하기 위해 동의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나는 객관적인 법에 의하여 고정되는 모든 제한을 넘어서, 책임을 질 수 있는 정의를 요구한다. 여기서 자아는 특권이자 선택이다. 직선적인 법을 넘어서 즉 보편적인 것을 넘어서는 장소를 발견하는 유일한 가능성은 자아가 되는 것이다. 내적이고 주관적인 도덕성이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법이 실현할 수 없는 것을 실현시킨다.
그렇다면 책임을 지는 의지적 주체, 책임아래 새롭게 형성되는 자아의 주체성, 고유한 자아로서 자아의 단독성은 어떻게 정초되는가? 레비나스는 현대인들에게는 아주 이해하기 어려운 역설적 표현으로 주체의 도덕적 책임과, 책임을 짊어진 주체의 단독성을 설명한다. ‘의무는 이행함에 따라서 더 커진다.’ ‘내가 나의 의무를 완성하면 할수록 나는 더 적은 권리를 가진다.’ ‘내가 공정하면 할수록 나는 더 많은 죄책감을 가지게 된다.’ 그러면 이제 이같이 역설적 상황이 어떻게 해서 윤리적 현상의 본질에 나타날 수밖에 없는지 레비나스의 글을 직접 살펴보자.
무한한 책임의 요구는 참회하는 주체성에게서 확신된다. 내면성의 차원은 주관적 수준으로부터 다가온다. 심판은 더 이상 주체성과 별개가 아니다. 주체성은 객관적인 도덕성의 질서에로 들어가지 않으며, 스스로 심화되는 차원으로 남는다. 참회를 수행하면서, ‘나’라고 말하는 것, 환원할 수 없는 단독성을 확신하는 것은, 어느 누구도 나를 대신하여 책임질 수 없고, 어느 누구도 그로부터 나를 면제해 줄 수 없다는 의미에서 특권적인 자리이다. 책임을 면할 수 없는 것, 이것이 바로 나이다. 참회의 사적인 성격은 자아가 선택에 의해서 나로서 완성되어진다는 것에 의해서 주장된다. 나와 도덕성으로서 자아의 완성은 존재에 있어 유일하고 동일한 과정으로 구성된다. 도덕성은 평등에서가 아니라 무한한 절박성의 사실 속에서 가난한 이, 이방인, 고아, 과부들에게 봉사하는 속에서 온다. 도덕성에 의해서만 나와 다른 이들이 우주 속에 형성된다. 필요와 의지의 주관성은 소유 안에 존재할 것을 요구하지만, …… 의지의 진리는 심판아래 서게 하며, 심판아래 선다는 것은 내적인 삶의 새로운 방향으로 향한 것이며, 무한한 책임성안에 있는 것이다.316)
인용문에서 보여주듯이, 사죄할 수 있는 의지를 지닌 주체에게서만, ‘나’라고 말할 수 있는 환원할 수 없는 자아의 단독성과 고유성의 주체가 가능해진다. 이와 같은 의미의 주체는 벌거벗은 타자의 얼굴로부터 오는 윤리적 호소를 수용하면서, 무한한 책임성을 깨달으면서 형성된다. 역사의 심판을 넘어서, 진리의 심판아래 자기를 놓는 것, 표면적인 역사의 이면의 신의 심판 아래로 자신을 위치시키는 것은 주체성을 고양시키는 것이며, 존재의 한계를 넘어서 참된 진리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나에게 일어나는 심판에서 나의 책임감의 증대는 보편화의 질서가 아니다. 이제 보편법적 역사의 정의를 넘어서, 자아는 선에 의하여 심판 받게 된다. 역사가 도덕성을 심판하는 것으로부터 도덕성이 역사를 심판해야 한다.(la morale juge l'histoire) 317)
(2) 역사의 심판으로부터 윤리적 심판으로의 전환
레비나스는 누군가의 의지가 다른 이에 대해 힘을 가진다는 사실로부터 폭력과 불의가 자행될 수 있음을 목격한다. 사회적 전체성의 공동체 속에서는 불의가 자행될 수 있다. 작업은 본래적 양상을 가지면서, 생산자의 특성을 보일지라도 표현은 아니다. 작업은 제작자로부터 분리될 수 있으며, 제작자가 부재한 역사의 부분이 된다. 익명적 역사의 계기로서, 작업은 그 자신의 의미를 가지며, 작업자에 의해 의도된 의미와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작업의 의미는 사회질서의 기능이며, 역사적 경제의 기능이다.
사회?역사적 관점으로 보자면, 인간개체들은 작업 종사자들로서 평가된다. 그 밖의 다른 관점들 특히 도덕적 관점 등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산물과 동일시되는 것을 거부할 수 없다. 그들의 작업 덕분에 개체들은 동료나 시민들과의 관계로 진입할 수 있다. 작업의 생산에 기초한 사회는 돈의 힘, 폭력, 불의에 대해 무기력하다. 이같은 맥락에서 볼 때, 사회와 역사를 최고의 관점으로 고려하는 모든 철학에 은폐된 것은 전쟁과 착취이다.318)
레비나스는 세계역사에서 사람과 사람들이 폭력과 불의의 힘에 의해 결합되어져 있음을 본다. 사회의 영역은 이익과 자유의 갈등적 상호작용에 무기력해 보인다. 인간의 노동의 산물에 기초한 역사의 심판은 정의롭지 못하다. 그러나 구체적 인간의 표현은 그의 일 즉 작업(work, oeuvre)과는 다르다. 사람의 얼굴과 언설은 타자를 나타낸다. 비폭력과 정의의 힘은 언설과 마주보기의 직접적인 상호주관성의 차원에 있다. 레비나스는 ‘윤리학이 없는 사회는 필연적으로 불의하다’고 본다. 그에게서 집합체로서의 사회란 그 구성원들 사이의 마주보는 관계의 독특하고 사적인 특성을 은폐하는 총체성으로 간주된다. 319)
필연적으로 사죄하는 존재로서, 인간주체는 자아의 자유로운 행복이 아니라 타자에 헌신하는 책임 있는 주체로서 자신의 고유성(unicity)을 인식할 정의를 요구받는다. 진실한 심판은 사죄를 인정한다. 그러나 주관적이고 자기 도취적인 항의의 외침과는 다르다. 심판은 타자로부터 와야 하며, 책임과 선성을 깨달아야 한다. 실러(Schiller)나 헤겔이 세계사적 심판(weltgericht)과 세계사(weltgeschichte)를 동일시한 이래 유명하게 된 세계사의 심판은 책임 있는 주체의 단독성을 심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세계사는 익명적 노동과 제도에 기초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같은 관점은 인간을 정치적 문화적 산물들과 동일시하기에, 주변적 인물들 즉 외국인, 고아, 과부 등에 대한 고유한 책임의 사실을 부정한다. 이들은 세계사에 의해서 완전히 홀대받는다. 왜냐하면 그들의 작업은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관심을 끌지 못하기 때문이다. 제국의 건설이나 기념비의 건설을 위해 쓰여진 존재가 후에 얼마나 많이 학살되거나 잊혀져갔는가? 만일 이성의 보편성과 정치적 문화적 영웅의 중요성이 인식의 유일한 기준으로 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의 작은 선, 타자의 무한성, 주관성의 궁극적 의미 등은 전혀 고려되지 못할 것이다.
레비나스는 정의실현에 필수적인 정치학과 기술의 차원을 부정하지 않으나, 참회하는 주체들의 보다 본래적이고(preoriginal), 보다 더 우주적인(preuniversal) 책임은 필연적으로 현대철학에서 축복 받는 시간이나 역사와는 다른 시간과 역사를 내포한다고 본다. 시간과 역사는 모든 노동을 넘어선 책임으로, 고유한 주체들과 무한을 구성하는 형이상학적 관계의 진리를 드러낸다. 진실한 심판은 타자의 눈 속에 계시된다. 비록 우리가 타자의 현현을 이미지로, 개념, 작업, 텍스트로 환원할 수 없을지라도, 그는 나를 보고 나에게 말을 건넨다.
타자의 눈과 목소리는 내게 나의 무제한적이고 끝없이 증대해 가는 책임을 발견하도록 해주면서 진실한 심판을 표현한다. 그리고 나의 고통과 죽음의 의미를 보여주면서, 나에게 보편적 정의를 넘어서는 정의를 요구한다. 나의 의무를 드러내면서, 무한의 심판은 나의 사죄적 입장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것은 위안의 형태가 아니라, 나의 죽음에 대한 이기적 공포를 타자의 죽음을 일으키게 되는 것에 대한 공포로 전환시키면서 확신시켜 준다. 나의 사죄는 선의 심판 앞에서 참된 의미를 얻는다.320)
Ⅵ. 他者性 윤리의 구성
본 장은 레비나스의 타자윤리학에서도 특히 윤리적 자아의 형성원리와 자아와 타자사이에 형성되는 윤리적 관계를 중심으로 논한다. 레비나스는 특히 『존재와는 다른 것, 존재사건 저편』에서 윤리적 자아가 지닌 고유성의 의미를 다루고 있다. 윤리적 주체의 고유성으로서 자아성에 관한 논의는 시간의 통시성, 감성의 수동성, 윤리적 자아의 자아성을 타자에 대한 도덕적 책임과 관련지어 논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아의 윤리성과 타자에 대한 책임의 문제는 불가분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레비나스는 자아와 타자 사이에서 형성되는 관계양상을 『전체성과 무한』의 마지막 장인 Ⅳ부에서 「얼굴을 넘어서」라는 주제로 다루고 있다. 여기서는 자연적 사랑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자아와 타자의 타자성의 관계와 사랑의 결실인 출산의 생산성이 가져오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통해서 조명되는 유한한 자아의 무한한 타자로의 부활의 의미를 살펴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레비나스가 설명하는 타자성의 윤리적 관계는 동양적 관계윤리와 친화성을 가지고 있음을 주목해 볼 만하다. 본 장은 이와 같은 내용을 중심으로 전개해간다.
1. 윤리적 자아의 타자에 대한 도덕적 책임
1) 시간의 通時性과 책임의 근원
레비나스는 『존재와 다른 것 또는 존재사건 저편』의 서두를 ‘존재와 다른 것’, ‘존재사건 저편’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설명하면서 시작한다. 레비나스는 esse가 ‘interesse’이듯이(esse is interesse)321), “존재사건(essence)322)은 이해관계(interest)”라고 본다. 라틴어 Esse(존재, 실재, 실체, 본질)는 존재사건안에서 지속성으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이해관계에 사로잡혀 있는 존재는 존재의 자기보존성(conatus essendi)을 나타낸다. 존재의 이해관계는 서로서로 투쟁하는 이기주의에서 역동성을 가진다. 다수의 이기성, 만인간의 투쟁은 전쟁을 낳는다. 전쟁은 본질적으로 이해관계의 각축이며, 행위이다. 존재과정의 지속성이자, 자기보존과 이해관계의 존재사건으로 정의되는 존재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 레비나스는 이와 같이 갈등을 빚고 있는 개념들은 그들이 속하게 되는 영역이 서로 다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부딪치고, 파괴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323)
우리는 ‘존재와 다른 것’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존재사건을 지배하는 운명의 붕괴, 파괴의 가능성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레비나스는 『존재와는 다른 것』의 서두를 “만일 초월성이 의미를 가진다면, 그것은 존재사건(essence)이 존재와는 다른 것으로 이행하는 사실을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렇다면 어디로 이행해 가는가? 그것은 존재의 사태, 존재의 있음, 존재사건으로부터 ‘존재와는 다른 것에로 넘어간다’는 사실을 의미할 수 있다. 초월성은 존재의 다름으로, 존재와는 다른 것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다르게 존재하는 것(to be otherwise)이 아니라, 존재와는 다른 것(otherwise than Being)이라고 말할 수 있다.324)
그렇다면 존재의 타자란 과연 무엇인가? 레비나스는 존재의 타자를 밝혀내기 위해서 현상학에서 시간과 존재의 본질이 그려내는 시간화의 오류를 지적한다. 현상학적 전통에서 존재는 기억과 역사를 통해 모든 다양성을 회복한다. 현재는 존재사건이 시작하고 끝나는 곳이다. 시작과 끝은 주제화할 수 있는 결합으로 취합된다. 그것은 자유와의 관련 속에서 유한한 것이다. 여기서 시간의 시간성은 기억을 통해 회상하는 능동적 자아에 의해 회복된다. 그리고 지나간 과거를 재건한다. 선견이 미래를 예견하며, 기록 안에서 현존으로 취합되며, 타자를 위한 책임의 시간까지도 재현한다.
레비나스는 이같은 현상학적 시간에서 비가역적인 시간의 흐름, 회복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 모든 동시성에 저항하는 통시성, 초월의 통시성을 나타내 주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모든 의지의 바깥에서 회복할 수 없이 흐르는 것은 지향성의 구도와 대조적이다. 통시성은 결합의 거절이며, 총체화할 수 없는 것이고, 그러기에 무한한 것이다. 레비나스에게 시간은 존재의 모호성이나 ‘존재와 다른 것’을 보여 주는 것으로, 시간성은 존재사건이 아니라, 존재의 모호성 안에 유지되는 ‘존재의 타자’와 관련된다.325) 그렇다면 어떤 근거에서 시간은 시간화 되고, 초월성의 통시성, 존재와 다른 것의 통시성으로 나타나는가?
우리는 이와 관련하여 시간과 관련된 하나의 방식인 ‘회고回顧’가 절대적 통시성인 원-근원에 도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 레비나스는 “절대적 통시성인 원-근원은 기억이나 역사에 의해 회복될 수 없다”고 지적한다. 기억할 수 없고, 표현할 수도 없이, 비가시적으로 현재를 우회하는 과거는 회고로 회복될 수 없다. 왜냐하면 과거가 멀리 있기 때문이 아니라, 과거란 현재와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현재와 모든 재현할 수 있는 것의 다른 측면으로 현존의 질서에 속하지 않은 과거와의 관계는 타자의 태만이나 불행에 대한 나의 예외적이거나 일상적인 책임을 포함하게 된다. 다른 이의 자유는 나의 자유 즉 동일한 현재에 의거하면서, 나에게 재현되는 것으로 시작될 수 없다. 타자에 대한 책임은 나의 서약, 나의 결정에서 시작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 자신이 발견하는 무제한적 책임은 모든 기억보다 앞선 것으로부터, 비-표상적인 것으로부터, 비 근원적이고 비-원리적인, 어떤 존재사건보다도 앞선 또는 존재사건을 초월한 것으부터 발생한다.326)
그래서 타자를 위한, 다른 이의 자유에 대한 책임은 나를 타자에로, 그 장면의 첫 번째 사람으로 임명한다. 그리고 나로 하여금 그에게 접근하도록 하며, 나를 그의 이웃으로 만든다. 그것은 존재와 마찬가지로 무와도 다른 것이다. 그것은 나의 의지에 저항하면서, 나에게 타자를 代贖(substitution)하도록 하면서 책임을 일깨운다. 나의 모든 내면성은 나 자신을 희생함에도 불구하고, 타자를 위한 형태로 던져진다.327)
이상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우리가 타자를 위한 책임의 근원을 생각해 볼 때, 타자에 대해 짊어지는 책임은 자유계약으로부터 즉 현재로부터 귀속하는 것은 아니다. ‘타자에 대한 책임’(responsabilite pour les autres)은 모든 표상적 현재를 넘어선다. 그러므로 그것은 시작이 없는 시간 안에 있다. 현재에 앞선 현재로의 단순한 회귀나, 기억할 수 있는 시간에 앞선 현재의 외삽으로 이해될 수 없다. 이같은 무-원리, 재현으로 취합되는 것을 거절함은 나에 관한 그 자신의 방법을 가진다. 그것은 흐름이다. 그러나 시간의 시간성안에서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은 단순히 기억할 수 없는 것과 같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328) 레비나스는 시간의 흐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흐름으로서의 시간성, 시간의 상실은 에고의 주도권도 아니며, 행위의 목적을 향한 움직임도 아니다. 시간의 상실은 주체의 작업이 아니다. 이미 기억과 예견의 종합에서 훗설 현상학적 분석은 그 흐름을 회복하며, 자아를 지나간다. 시간은 흐른다. 수동적 종합으로 불려지면서, 끈기 있게 일어나는 이같은 수동성은 나이먹어가는 것이다. 그것은 나이 먹을수록 일어나며, 불가피하게 현재로부터, 즉 재현으로부터 이동한다. 자의식 안에서 자아에 대한 자아의 현존은 더 이상 없으며, 노쇠함만이 있다. 그것은 기억의 회복을 넘어선 노쇠함 같은 것으로, 돌아오지 않는 잃어버린 시간의 통시성이다. 현재와 비교할 수도 없고, 현재 안에 모을 수도 없이, 그것은 항상 이미 과거 속에 있다. 현재는 그 뒤에 뒤쳐지게 된다. 이같은 이행의 방식은 우리가 痕迹이라고 부르는 것이다.329)
인용문에서와 같이 흔적은 이웃의 얼굴과 연관된다. 여기서 바로 심판과 기소되는 얼굴의 수수께끼(enigme)가 있다. 이같은 맥락으로부터 근본적으로 나의 이웃과의 관계, 타자와의 관계, 타자적 존재와의 관계가 형성되며, 타자가 나를 지명하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나의 책임의 문제가 발생한다.
레비나스는 이같은 형태의 책임을 가까움의 책임으로 나타내며, 이같은 책임을 어떤 것보다 더 근원적인 것, 어떤 위임보다도 이웃에 선행하는 의무로 본다. 이웃의 가까움으로부터 오는 책임의 형태는 자발성과 무관하게 영향받게 되는 존재방식을 나타낸다. 레비나스는 “능동적 의식으로 환원할 수 없는 이같은 관계는 타자에 사로잡힘이다.”고 말한다.
시간의 통시성은 동일자가 동일자로 결합될 수 없는 동일성의 분열이다. 동일성의 대자성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자아 안에서 동일자의 동일성은 자신의 희생, 선임, 지명된 사람의 고유성 형태로,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다. 주체는 다른 이를 위한 것(l,un-pour-l'autre)이다. 자아는 타자를 위한 것으로 되며, 자신의 존재는 소멸되어간다. 이와 동시에 나이 들어가면서 주관성은 독특한 것, 대신할 수 없는 것,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me’로 된다. 이같은 성향은 타자에 대한 책임으로 어떤 계약보다도 더 오래된 책임으로 귀결된다. 이것은 이웃의 근사성의 형태에서 나타나며, 지불할 수 없는 빚의 의무이다. 늙어 가는 것, 고유한 존재의 죽음이 의미하는 시간성은 복종을 나타낸다.330)
2) 감성적 受動性과 타자로 향한 자아
서구철학의 역사는 부단하게 실체로서의 자아를 확신해왔다. 실체(substantia)는 어원적으로는 ‘아래에 깔려 있음’을 뜻하는 라틴어 ‘substare’에서 유래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러 가지 변화의 와중에도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을 제일실체로 규정하였다.
그런데 이같은 실체가 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담지하게 된 것은 근세에 들어서이다. 데카르트는 실체의 개념으로 ‘존재하기 위해 자기자신이외의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으로 정의하였다. 그런데 데카르트의 경우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것’은 바로 ‘생각하는 자아’이다. 나아가 의식은 스스로의 동일성에 대해 가지는 확실성에서 파악된다. 실체로서의 자아는 비본질적인 사건을 구성할 뿐만 아니라, 모든 의식상태에 깔려있는 지속적 실체이다. 선험적 자아는 다른 표상에 필연적으로 동반되거나 각 의식 안에서 동일한 것으로 머무는 주체의 표상이다.
칸트철학은 데카르트적 유산을 물려받았다. 주체와 대상, 주관과 객관, 자아와 세계, 또는 인식과 존재의 분리를 극복하기 위해서 칸트는 ‘사고방식의 혁명’을 감행한다. 사고방식의 혁명이란 주체의 관점에서 세계를 보는 것이다. 인식의 세계든 실천적 세계든 간에 세계는 주체 즉 나의 활동에 의해 규정되고 생산되며 실현되는 세계일 뿐 그 외 어떤 다른 것이 아니다.331)
모든 것을 자기의식에 근거 지은 칸트를 계승한 이는 바로 피히테와 셸링이다. 셸링은 칸트의 자기의식을 가능하게 한 ‘전제’를 찾아 나섰고, 그것은 바로 자기의식조차 가능케 한다고 본 ‘절대자아’였다. ‘절대자아’는 이들에게 인식과 존재를 떠받쳐 주는 절대적 근거로 된다.
헤겔 『정신현상학』은 절대자의 자기인식 곧 절대지의 생성과정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그는 의식의 출발점은 직접적 감각의 확신이고, 이것이 지각 및 오성의 단계를 거쳐 자기의식으로 발전하고 다시금 더 보편적인 자기의식으로서의 이성으로 높여진다. 이성은 개인적인 자기확실성과 현실사회와의 일치로서 객관적인 이성으로 발전해간다. 이것이 곧 인륜적 세계이고, 여기에서 정신의 세계가 열린다. 정신의 최후단계에서 지식과 사유와 존재가 완전히 동일시된다. 사유와 존재의 완전한 동일성의 주장으로부터 헤겔은 자립적이며 자기운동으로의 절대자의 현실적인 운동과정의 인식을 대상으로 하는 절대이념의 철학을 확립하게 된다.
독일관념론의 주체의 절대화의 기저에는 스피노자의 영향이 있다. 스피노자는 ‘자기자신 안에 존재하며 자신을 통해 파악되는 것’을 일컬어 실체라고 부른다. 실체는 동시에 ‘그 본질이 실존을 포함하는’, 즉 ‘자기원인’의 존재이며 존재하는 것은 모두 자기원인적인 실체의 속성으로 또는 그것의 구체적인 실현으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어느 것도 이 실체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독일 관념론은 이런 실체개념을 ‘주체’의 개념으로 전환하였다.332)
독일 관념론이 사유와 존재를 떠받쳐 줄 절대근거를 자기와 관계할 수 있는 의식주체에서 찾았다면 관념론 이후의 철학은 그런 절대적 의식의 주체를 문제삼는다. 이런 배경에 있는 이들은 포이어바흐, 로젠츠바이크, 부버, 니체, 키에르케고어 등이다. 이 중에서도 니체는 “인식주관의 근원적인 일반법칙은 각 대상자체를 그 자신의 본질에서 자기동일적인 것으로, 즉 스스로 존재하고 근본적으로 언제나 변화 없는 것으로, 요컨대 하나의 실체로 인식하는 내적 필연성에서 성립한다”고 비판한다.333) 니체는 이같은 주체의 계보학을 동일성의 형이상학 -자기의식, 자기동일성, 자기투명성의 주관성-위에 새겨진 자아의 실체화로 근대적 자아의 자율성 선언이자, 존재론적 허구하고 비판한다. 334)
레비나스는 실체를 주체로 인식하는 과정에서 주체가 근원, 자기원리, 주도성, 능동성, 가능성, 자율성, 자유, 자기동일성으로 나타남에 주목한다. 그는 서구철학의 본질, 서구철학을 주도해온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주체의 자의식과 근원, 원리라고 본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이같은 전통에서 살과 피를 지닌 몸의 의미는 배제되는 점이다.335)
그러나 몸적 존재로서의 주체야말로 신체이며, 피이고, 먹고, 빵을 나누고, 자신의 피와 살을 줄 수 있는 존재이다. 요컨대 몸적 존재로서의 주체는 공시적인 개념체계에서가 아니라, 감성을 지닌 타자적 존재에서 이해되어야 한다.336) 이같은 맥락에서, 레비나스는 인간의 정신(psyche)에 대해서도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제까지 지향성안에서의 정신의 개념은 어떤 것에 대한 인식, 주제화, 존재의 진리 안에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레비나스에게서 정신은 동일성을 약화시켜 주는 것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337) 여기에서 동일성의 약화란 타자에게 소외되고, 타자에게 종속되는 것으로서 동일자의 포기가 아니라, 타자에게 응답하는 자아(se respondre)로서의 의미이다. 이와 같이 응답으로서의 동일성은 ‘타자를 위한 책임’으로 발생하며, 타자에게 봉사하는데서 발생한다.
레비나스는 타자를 위해 책임을 지는 ‘윤리적 자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책임에서, 영혼 안의 정신은 내 안의 타자이며, 동일성의 멜로디이며, 타자를 위한 동일자이며, 타자에 의한 동일자이다. 그것이 代贖이다. …… 정신의 영, 동일성안의 타자성은 타자에게 보여지는 몸의 동일성이며, 타자를 위한 형태로 되는 것이고, 줄 수 있는 가능성이다.338) …… 말해진 것과 말하기의 상관성을 넘어서, 지향성안의 정신(psyche)은 말하기, 육화의 의미, 통시성에 기인한다. …… 정서적인 것, 가치론적인 것, 능동적인 것, 감각적인 것, 굶주림, 목마름, 욕망, 숭배 등을 일으키는 의미는 그 안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주제화에 기인한 것이 아니며, 주제화의 양상이나 변종도 아니다. 그들의 의미를 구성하는 타자를 위한 존재는 존재의 인식이 아니며, 존재사건에 대한 또 다른 형태의 접근도 아니다. 이같은 의미는 인식이건 또는 인식된 존재의 조건이건 그들의 의미를 가져오지 못한다.339)
우리가 인용문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몸적 존재에서 책임은 주제화의 양상이 아니라 내 안에 받아들이는 타자의 크기인 것으로, 감성의 의미를 띠고 있다. 정신의 의미는 ego와 화합하지 못하는 동일성으로, 타자를 위한 존재이다. 이것이 사실상 정신이 불어넣어진 몸의 의미이며, 타자에게 제공되는 것이며, 타자에게 열려지는 것, 노출되는 것이다.340) 레비나스는 ‘정신을 감성 안의 동일자와 타자의 통시성을 나타내는 것’341)으로 설명한다. 정신은 공통의 시간을 갖지 않은 채, 관계에 도달한다.
우리가 이 말의 의미를 좀 더 잘 이해하려면, 레비나스가 부연 설명하는 ‘지각작용’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지각은 기억이나 기대를 통해 설명되지만, 기억과 기대란 본질적으로 무감각한 것으로, 의지, 욕구, 배고픔과는 이미 멀어져 있다. 결국 지각?기억?기대 등은 이론적인 것의 관상과 고요함의 상태로 설명할 수 있다. “모든 의식은 무엇인가에 대한 의식이다”라든가 또는 “모든 지각은 지각된 것의 지각이다”와 같은 현상학의 명제도 이같은 공시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 관념으로 이해되는 지각, 기아, 감각 등의 의미는 언어체계안에서 개념의 시간성을 통해 나타난다. 342)
레비나스는 정신뿐만 아니라, 미각?후각?먹는 것?향유하는 것의 의미 역시 ‘타자를 위한 존재’의 의미에서 찾고자 한다. 먹거리는 배고픔을 달래 주는 동시에 ‘근본적인 물질’로 된다. 물질은 만족 안에서 물질화되며, 인식과 소유의 지향적 관계를 넘어서 ‘씹히는 것’으로 된다. 미각은 인식이 아니며, 공허하게 객관성을 채워주는 것도 아니다. 빵을 먹는 것, 그것이 바로 미각의 의미이다. 이미지로의 비약은 주체와 대상의 거리를 억압하는 것보다 더욱 더 근본적으로 거리를 억압하게 된다. 이에 비해서 향유는 이미지에로 향하지 않는다. 만족은 만족감 그 자체인 것으로, 생은 바로 삶을 향유한다. 의식의 반성작용에 선행하는 향유는 자신의 입맛을 즐기면서, 누리는 것으로, 자신의 결핍을 채우는 것이며, 즐기는 것이다. 반성작용에 앞서 향유의 누림이 있다. 우리가 앞의 Ⅲ장 「향유적 자아와 내면성」에서 살펴보았듯이, 향유는 ‘자아의 개별화’를 가능하게 한다. 이기적 자아는 자기 안에 만족해 있다. 343)
그렇다면 이같은 이기적 자아로부터 윤리적 자아로의 전환, 타자를 위한 존재는 어떻게 가능한가?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몸의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즉 어떻게 지극히 개인의 자기성(egoity)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감성의 의미가 타자와 관련되는지를 레비나스의 글을 통해 살펴보자 .
감성은 ‘다른 이의 필요에, 즉 그의 불운함과 잘못을 배려함’으로써, 즉 주는 것으로서만 의미를 가진다. 여기서 주는 것은 나자신을 희생하면서 나로부터 찢어내는 것일 때만 의미를 가진다. 나를 희생하면서, 나로부터 찢어냄은 향유의 특징으로 자기 안에서 만족해 있는 존재로부터 즉 자신의 입으로부터 빵을 넘겨주는 존재의 경우 의미를 가진다. 먹는 주체만이 대타적일 수 있으며, 타자를 위한 것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의미, 타자를 위한 존재(l'un-pour-l'autre)는 단지 피와 살의 존재들 사이에서만 의미를 가진다.344) 타자적인 것은 주체에 저항하고, 고통을 통해 내면성에서 주체에 영향을 준다. 변증법적 긴장을 벗어나 자기 안에서 만족할 수 있는 향유는 감성 안에 내포된 타자를 위함의 조건이며, 타자에 대한 보여짐으로서 상처 입을 가능성 속에서 내포되는 타자를 위한 것의 조건이다.345)
인용문이 보여주듯이, 감성과 향유는 이제 타자를 위한 존재의 조건인 것으로, 감성의 의미는 ‘다른 이의 필요에 배려하는 것’ 즉 ‘베푸는 것’으로서 의미를 가지며, 향유의 의미도 ego의 만족에 자족한 채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나로부터 찢어내는 희생의 의미를 지닌다. 몸은 향유적 자아의 내면성을 의미하는 동시에, 타자에게 보여지는 것으로 밖으로 드러난 것이다.
부버에 의하면, 몸은 자아의식 안에 단독적인 것이 아니라 타자에게 보여지는 존재이다. 이런 의미에서 몸은 그것이 나라고 말할 수도 없고, 내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으며, 그것이 나를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이같은 맥락에서 볼 때, 감성은 타자에게 노출되는 것, 보여지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감성은 타자에 의해 영향받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이같은 감성의 형태에서 존재과정에서의 자기보존성의 전도를 발견한다. 이것은 우리가 앞의 시간의 통시성과 주체의 수동성에서 논의하였던 과거의 무한성이 주체에게 가져오는 감성의 비-현재, 비-주도성의 의미를 되새길 때,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 여기서 비-주도성은 어떤 현재보다 더 오래된 것이다. 그것은 어떤 본성보다 더 오래된 본성으로서의 직접성, 탄생에 앞선 모성과 같은 것이다. 감성은 이곳에 속한 것이다.346)
감성의 특징인 직접성, 민감성이 인식의 과정에 정초된다. 민감성과는 대조적으로 인식은 추상적이다. 감각의 직접성은 상처에 노출되는 것, 향유에 젖는 것이다. 감각적 직접성은 상처를 주체의 주체성에 도달하게 해준다. 이같은 직접성은 무엇보다도 마시고 먹는 것보다 더 직접적인 향유이며, 요소의 심층에 가라앉는 것이며, 더 할 수 없는 신선함, 풍부함에 젖는 것이다. 이것은 쾌락 즉 삶에 대한 만족 그 자체이며, 삶을 사랑하는 것이다. 주체성의 자족, 만족은 바로 자아성(egoity)이며, 실체이다.
우리가 앞에서 강조해 왔던 것처럼, 레비나스에게서 감성의 의미는 이성에 앞선 근원적인 것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감성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개념은 ‘가까움(proximite)’이다. 감성의 의미인 가까움이 인식의 운동에 속하지 않는 바와 마찬가지로, 감각적 경험과 직관의 토대인 감각작용은 이념이나 명료성에로 환원될 수 없다. 상처받을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의 감성은 존재론과는 달리 감각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앞에서 감성의 가까움을 살펴보았듯이, 가까움은 접촉보다도 더 가까운 것이며, 모든 과거적 현재화보다 더 오래된 것이다.347) 레비나스는 ‘가까움’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물의 외재성에 관한 인식은 가까움에서 유지되지만, 가까움의 경험이나 주체가 대상에 대하여 가지는 인식이 아니다. 그것은 공간적 환경의 표상도 아니며, 제3자에 의해 관찰될 수 있는, 또는 나에 의해 연역될 수 있는 공간적 환경의 객관적 사실도 아니다. 주제화 되지 않는 가까움은 경험의 잠재성과 같은 접촉의 지평에 속한 것도 아니다. 감성 - 가까움, 직접성, 불안 - 은 의식을 몸과의 관계로 놓는 통각(Apperception)으로부터 구성되지 않는다. 육체의 감각적 경험은 처음부터 육화 되어 있다. 감성적인 것-모성, 상처의 가능성, 염려-는 육화의 끈을 자아의 통각보다 더 큰 구성에 연결시킨다. 이같은 구성에서 나는 나의 몸에 묶인 존재이기 이전에 타자에게 구속된다.348)
그러므로 몸안에서 피와 살의 주체성은 주체에 대해서 ‘자기-확실성’의 양상이 아니다. 피와 살의 존재자들의 가까움은 현전이 아니다. 먹거리와의 관계는 인식과 행위의 모험이 아니다. 몸안에서 피와 살을 지닌 주체성은 감각을 주는 것으로서 근원적 의미를 가진다. 근원적이라는 것은 그것이 어떤 근원보다 더 본래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감성의 특징인 통시성 때문이다. 통시성은 표상의 현재로 수집될 수 없으며, 회복 불가능한 존재이전의 과거, 모성에 관련된다. 요컨대 이들은 표상과 지식에 속하지 않는다. 349)
피와 살의 감성으로, 주체는 종합으로 통일될 수 없고, 주제화될 수 없으며, 존재의 저편에 있다. 레비나스는 주체가 주제화와 공시화될 때, 존재의 일자가 노출된다고 본다. 우리가 말하여진 주제 안에서 주체를 발견함은 육화를 이해하지 못함이고, 외연으로부터 분리된 “나는 생각한다”이고, 몸으로부터 분리된 인식(cogito)이다. 그러나 타자적 존재의 통시성의 흔적은 이같은 존재가 불가능함을 보여준다. 통시성의 흔적은 내면성에서는 분리의 흔적이며, 책임에서는 타자를 위한 대타성의 흔적을 나타낸다. 여기서 자아의 동일성은 자기-확신에서가 아니라, 타자를 위한 존재로서의 의미, 자신을 낮추는 겸손으로 형성된다. 여기서 자신을 낮춤이야말로 주체의 구현이며, 줄 수 있는 가능성이다.350)
타자를 위한 존재의 특징은 어떤 수동성보다 더 수동적인 수동성이며, 모든 벌거벗음보다 더 벌거벗겨진 벌거벗음이며, 기도와 발산이다. 이같은 수동성은 상처받을 수 있음이고, 출혈과 같이 자신을 소모시키는 고통이다. 이와 같은 것이 타자적 존재의 수동성이며, 내가 먹을 밥을 가슴으로 주는 것이다.351)
감성은 상처받을 수 있음이고, 타자에게 보여짐, 말하기이다. 상처의 수동성, 타자를 위한 출혈은 ‘맛을 음미하는 입’으로부터 빵을 잘라내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지만, 냉정한 초연함에서가 아니다. 이것은 자족해 있는 향유에서 자기-동일성에 대하여 가하는 공격이다. 이같은 개방성은 지갑을 여는 것, 내집 대문을 여는 것, ‘내 밥그릇을 굶주린 사람에게’, ‘불쌍한 사람을 나의 집으로 들이는 것’이다. 감성의 직접성은 나의 신체성이지만, 그것의 근본적 의미는 타자를 위한 것이다. 이것이 타자의 직접성이며, 가까움이다. 타자의 가까움은 타자를 위하여, 향유의 직접성을 여는 것이며, 맛을 보는 직접성이다. 352)
레비나스는 ‘현재의 자아성에 안주하는 것을 넘어서는 것으로, ego와 self의 불일치, 불안, 불면’을 말한다. 이 과정에는 ego를 혼동시키는 고통이 있다. 이같은 고통의 상처에서는 타자가 동일자를 고무하게 된다. 이같은 수동성, 이같이 상처를 감내하는 것은 타자를 위한 것, 타자에 의한 것이다. 이것은 고양된 느낌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배고픔을 감수하면서도 자기의 밥그릇을 나누는 것이다.
3) 윤리적 자아의 타자를 위한 책임
레비나스는 주체성의 개념을 정초함에 있어서, 주체성의 근원을 의식(consciousness)에서 찾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자아에 의한 자기-의식을 말할 때, 의식은 자아(Ego)나 나(I)라는 동일성에 근거한다. 이와 같이 주체성을 의식으로 환원시키는 철학적 전통은 헤겔 이후 실체를 주체와 동일시하면서, 존재와 사유의 이원성을 극복하려 했지만, 이 과정에서 실체의 실질성을 제거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연속적인 존재의 자기전개과정에서 인식과 발견은 존재자의 존재나 존재사건에 추가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소유화, 자기동일성이 된다. 존재사건을 존재론으로 나타내는 철학은 존재사건을 로고스에 의한 빛 중의 빛으로 말한다. 결국 의식이 실체의 근거를 완성하는 것으로 된다.353)
이에 대하여 레비나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자아의 동일성은 본질이 자기에로 돌아가는 것이다. 자아, 주체 혹은 조건으로 보여지는 일자, 존재자들 중의 존재자를 가지는 일자는 자의식의 구현과정으로 또는 역사 안에서 존재의 계시로 간주되는 추상으로 환원될 것이다. 그 속에서 존재는 자신을 그 자신에게 보인다. 시간, 본질, 시간으로서의 본질은 자아에로의 회귀에서 절대성 그 자체이다. 직접적이고 경험적으로 마주치는 고유한 주체들, 존재자들은 이같은 정신의 보편적 자아의식으로부터 생겨난다. …… 그들은 잊혀진 계기들이 될 것이다. 그들이 고려되는 경우는 체계 안에서 그들의 위치에서 비롯되는 동일성뿐이며, 그것은 체계의 총체성안으로 재흡수된다. 354)
우리가 인용문을 살펴 볼 때, 자아의 동일화과정과 이에 상응하는 자의식의 절대적 구현과정에서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마주치는 고유한 주체들이 체계의 총체성으로 흡수됨을 알 수 있다. 이 점이 바로 레비나스가 비판하는 점이다.
레비나스는 인간의 주체성이란 자기화하는 의식이 아니라, 바로 누구(the Who), 또는 불리어지는 나(the Me)에서 정초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자아의 자아성, 주체성을 ‘me’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me’는 언어구조에서 목적격에 해당하는 것으로 ‘타자를 향해 있는 나’를 가리키는 말이다. 즉 ‘me’는 너와의 관계에서 주어지는 명칭이자,355) 말하고 있는 너에 의해서 붙여진 것이다. 담론의 언어구조에서 ‘me’는 소여된 신호이고, 타자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고, 타자에 의해 붙여지는 것, 지명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받는 일자의 수동성을 알 수 있다. 선택함이 아니라 선택받는 데서, 자아의 회피할 수 없고 대치할 수 없는 고유성이 있다. 레비나스는 이같은 고유성을 ego와의 불일치, ego와 동일시되지 않는 것, 인식으로 향하지 않는 것으로 설명한다.
우리가 레비나스의 자아의 수동성, ‘수용성보다 더 수동적인 수동성’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타자가 나를 바라보는 상황, 내가 타자에게 보여지는 상황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같은 상황은 타자가 나에게 신호를 보내는 상황이다. 이때 나는 타자에 의해 선택되고 요구받는 상황, 즉 지명된 사람이다. 지명 받은 이로서 ‘주체의 수동성’은 합리적이고 능동적으로 선택하는 ‘자율적 주체’의 개념과 분명히 구분된다. ‘주체의 수동성’은 선택함이 아니라 선택됨인 것으로, 어떤 수용성보다도 더 수동적인 책임에 놓이게 된다.
이와 같이 주체의 수동성으로부터 떠맡는 책임은 자기-의식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자율성의 자기책임이나 자기근원을 갖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같은 책임의 근원은 ‘통시성’에 기인한다. 다시 말해 타자에 대한 책임의 기원은 현재나 기억할 수 있는 과거에서 기원한 자유로운 위임이 아닌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아의 자기성도 의식적 주체의 자기전망이나 기투, 진리와의 동일시, ego 와 동일시 할 수 없다.
우리는 레비나스가 새로이 밝히려는 자아의 자기성, 주체의 고유성을 자기 밖으로부터 선택받고 불리어지는 존재, 타자의 지명에 의해 형성되는 대체 불가능한 존재, 책임 안에 있는 존재로 이해할 수 있다. 상처와 분노에 맞닿은 채, 책임을 감수하며, 타자에게 헌신하며, 자신을 희생하는 육화된 존재에게서 자아는 고통받는 존재이고 내어주는 존재이자, 동시에 그 누구로도 대체할 수 없는 존재인 단독자로 된다. 356) 그러므로 레비나스는 주체성을 상처 입을 수 있는 존재, 상처에 노출되는 존재, 타자에게 보여지는 주체, 타자의 고통을 대리하고, 타자를 위해 볼모로 잡힌 존재로 설명한다. 357)
레비나스는 자아의 자기성(ipseitas)을 의식의 운동이나 현재화하는 순환의 중심지가 아니라, 의식의 시간보다 더 오래된 것, 현재에 그 자신을 동일시하지도 않고, 자신의 동일성을 나타내지도 않는 것으로 설명한다. 기억될 수 없는 과거는 인식에 상응할 수 없기에, 현재를 형성할 수 없다. 이는 자아가 동일성안에서 평화롭게 휴식할 수 없는 자신과의 불화, 존재의 결핍, 수동성, 인내임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같은 자아의 불안은 변증법적 분열이 아니며, 차이를 없애는 과정도 아니다.
자아의 수동성은 살갗 속의 존재와 같이 즉자적인 것, 상처받기 쉬움, 감성, 상처, 분노에 맞닿은 것으로, 모든 수동성보다도 더 수동적인 수동성의 의미이다.358) 다시 말해 자아는 단지 형상에 의해 주조되는 무감각한 재료가 아니다. 레비나스는 자아의 즉자성의 고통을 묻는다. 그는 이같은 존재의 고통은 하이데거가 말하듯, ‘죽어야 할 유한한 존재’의 실존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외연의 이면, 내면에의 진입, 주체가 희생되는 관계로 설명한다.359)
이같은 자아의 상황은 자신을 망각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로부터의 분리도 아니며, 자신의 관심에 사로잡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타자의 절박성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나의 존재를 넘어서는 의무이자, 빚이다. 여기서 의무는 소유를 넘어, 주는 것을 가능하게 해 준다. 이같은 전환을 레비나스는 육화(incarnation)로 본다.
그러면 이제 레비나스의 윤리적 자아구성의 핵심적 계기가 되는 전환의 의미를 살펴보자.
전환은 주체를 육화 하는 궁극적 비밀이다. ...... 이같은 (자아의) 수동성은 주제화할 수 없다. 그것은 傷處의 수동성이지만, 그 자신의 표상을 방해하는 것이며, 박해받는 이의 수동성이다. …… 박해를 가하는 증오 속에서 이웃의 얼굴은 연민을 강요한다. …… 이같이 타자로부터 오는 것에 의해 이미 대타적인 것, 타자로부터 고통받는 것은 절대적 인내이다. 이같은 전환, 자기의 관심에 사로잡히지 않는 존재사건과 다른 것이 바로 주체성이다. 전환은 박해의 상처 속에서 박해자에 대한 분노로부터 책임으로 이행해 가는 것, 이같은 의미에서 고통으로부터 타자에 대한 속죄로 이행하는 것이다. 박해는 주체의 주체성이나 상처에 부가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환의 운동이다. 360)
레비나스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전환을 통해 새롭게 형성되는 윤리적 자아는 자기이해에 사로잡혀 있지 않은 존재, 박해받는 고통 속에서 타자의 고통을 돌아보고, 그의 고통에 대해 책임을 감수하는 존재이다. 결국 ‘윤리적 자아’는 자신의 자유로운 결정과 선택으로부터 초래된 것이 아닌 것에 대한 책임을 떠맡는 존재이다. 자신이 무관함에도 불구하고, ‘기소’되는 것으로 표현되는 주체성은 다른 사람들이 행한 것에 대하여 기소 당하고, 다른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에 대하여 책임지는 것을 의미한다. 자아가 ‘ego’로부터 ‘self’로 전환되면서, 박해는 속죄로 전환된다.361) 레비나스는 ego로부터 self로 전환함에 따라서 나타나는 윤리적 자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ego가 self로 돌아가면 갈수록, 내가 ego를 버리면 버릴수록, 나는 더욱 더 나 자신이 책임져야할 존재임을 발견한다. 내가 정의로우면 정의로울수록, 나는 더욱 더 죄책을 가진다. 나는 타자를 통해서 “나 자신”안에 있는 것이다. 정신(psyche)은 동일자를 소외시킴이 없는 동일자 안의 타자이다. …… ego에 저항하면서, 살갗 속의 자아는 외부로 노출되는 동시에, 이같이 벌거벗겨진 노출로 인해 타자로부터 고통받는다.362)
인용문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ego로부터 self로 전환하면 할수록, 더욱더 큰 책임을 짊어지는 존재인 것으로, 윤리적 자아란 내 안에 타자를 받아들이는 의미로서 ‘동일자 안의 타자’라는 것이다. 이같은 윤리적 자아는 의식의 자유 안에 머무는 인식론적 자아와는 달리 절대적 수동성으로 나타난다.
자아의 전환은 자아의 수축이자, 동일성의 이면으로 가는 것이며, 양심의 가책에서 자신의 동일성을 부식시키는 것이다. 타자에 대한 책임은 주체로부터 발생하는 것도 아니며, 자기의 자유에 수반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어떤 행위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기소되어 있다. 즉 고통받고 있다. 이같이 다른 이를 위한 책임에서 주체성은 바로 목적격적인 무제한적 수동성을 띤다. 그러면 윤리적 자아 안에서 발생하는 타자에 대한 책임은 어떤 성격을 지니는가?
나(I)라는 말은 모든 것에 대해서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답변하는 “여기에 있습니다(moi, c'est moi. Here I am)”을 의미한다. 타자에 대한 책임은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동일성의 테두리를 유지하지 않는 수축이다. 전환은 동일성의 경계를 무너뜨리면서, 내안에 있는 존재의 원리를 깨뜨리면서, 동일성이 된다. 자아는 휴식의 저편에 있다. 그것은 모든 것으로부터 물러설 수 없음이요, 자기 자신만 염려할 수 없음이다. 타자에게 사로잡힘에서 책임은 자아가 원하지 않는 것에 대한, 즉 타자에 대한 자아의 책임이다. 전환에서 이같은 혼돈은 존재의 동일성이 주장하는 능동성과 수동성의 일상적 역할을 넘어선다. 그것은 동일성의 경계 저편에 있다. 내 안에 있는 타자성의 힘에 의해 가까움에서 체험되는 수동성은 동일성의 소외가 아니라, self로의 전환의 수동성이다. 이같은 과정은 소외가 아니다. 왜냐하면 동일자 안의 타자는 책임을 통해서 타자를 대속하기 때문이다. 그것에서 나는 대치될 수 없는 사람으로 소환된다. 나는 타자를 통해 존재하며, 타자를 위하여 존재하면서, 고무된다. 이같은 고무, 불어넣어진 것이 바로 정신(psyche)이다. 정신은 육화에서, 살갗을 지닌 존재(being-in-one's skin)이자, 나의 살갗 속에 타자를 가진 (having-the-other-in-one's-skin) 존재로, 동일자안의 타자성을 나타낸다.363)
이에서 알 수 있듯이, 레비나스는 타자에 대한 자아의 책임을 설명하기 위하여, 타자에게 사로잡히는 자아의 수동성, 내안에 있는 타자의 가까움 등의 개념을 사용한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대속364)하는 속죄로서의 자아는 능동성과 수동성에 앞선다. 우리가 ‘타자에게 사로잡히는 선택의 여지없는 책임’이란 말을 들을 때, 얼핏 폭력적인 것으로 느껴지지만, 레비나스는 자기자신만을 위하는 사람의 제한성과 이기성을 넘어서는 소명이 여기에 있다고 본다. “나는 타자이다.” 그러나 이것은 랭보(Limbaud)가 말한 것처럼 소외가 아니다.365) 나는 나 자신 안쪽의 외부에, 나 자신에 근거한 자애심과 동일성의 자율성 저편에 있다. 담담하게 경험되는 타자의 무게, 그것에 의해 고유한 존재로 불리우는 주체성은 더 이상 능동성과 수동성의 선택이 의미를 지니는 질서에 속하지 않는다.
이것은 존재를 자기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이를 위한 것 즉 공평함으로 설정하는 것이다. 다른 이들에 대한 책임, 다른 이를 위한 책임은 어떤 선행적 위임 없이 응답하는 것으로, 이것은 어떤 자유로운 선택보다 근원적인 것, 선행하는 것이다.366) 어떤 자기 결정적 선택 없이 짊어지는 타자에 대한 책임을 거부하는 이들의 입장은 “왜 타자가 나에게 관심 있는가?” “내가 아우의 파수꾼인가?”367)라는 말로 대변할 수 있다. 이같은 반문은 만일 우리의 자아가 나 자신에게만 관계한다고 가정한다면, 의미를 가질 것이다. 이같은 가정 속에서 나의 절대적인 외부성(the outside-of-me), 타자가 나에게 관련될 것이라는 것은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자신에 대하여 부여된 자아의 “선 역사(prehistory)”는 책임을 말한다.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듯이, “인질”로서의 존재는 항상 보통 이상의 책임을, 다른 이의 책임에 대한 책임까지도 대신하고 있다. 여기서 인질은 타자에 대한 책임, 무제한적 책임 앞에 놓인 주체를 말한다. 레비나스는 동일성의 원리를 갖지 않은 수동성의 자아성을 인질로 표현한다.368) 우리가 인질로 존재하는 경우에만, 세계 안에 동정, 연민, 용서, 가까움이 있을 수 있다. 인질적 존재의 무조건성은 연대성의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 모든 연대성을 위한 조건이다. 모든 기소와 박해, 보상 등은 자아의 주체성과 대속, 자신을 타자의 위치에 놓을 가능성을 전제한다. 그것은 타자에 의한 것으로부터 타자를 위한 것으로의 이행을 의미한다. 이것은 박해에서 타자에 의해 고통받는 분노로부터 그의 잘못에 대한 나의 속죄로 전환됨을 의미한다. 369)
레비나스는 善性은 자유보다 책임을 앞세우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타인의 얼굴 속에서 나에게 명령하는 윤리적 요청, 자아가 그같은 타자의 선택을 환영하는 것, 이같은 구조를 레비나스는 선이 주체로 하여금 타자와 이웃에게 다가가도록 요구하는 상황으로 설명한다. 이같은 상황은 선이 나를 지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요컨대 이웃에 대한 책임, 열망, 인질로서의 대속이야말로 주체의 주체성이자 고유성이다. 이웃에 의해 지명되어 부담 지워지는 자아는 그 누구에 의해서도 대치될 수 없는 존재이자, 선성의 담지자이다. 타자의 요청에 응답하는 자아의 고유성은 타자에 의해 사로잡히는 존재와 고통받는 상처에서 가능해진다. 여기서 상처는 타자가 요구하는 도덕적 요청의 부담 속에서 고통받는 이, 타자에 의해 고무된 일자를 표현한다. 타자에게 불리우는 목적격의 형태인 ‘me’에서 나는 이웃에게 다가가며, 대가를 바람이 없이 응답하며, 이같은 과정에서 어느 누구로도 대신할 수 없는 나가 발생한다.
이제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레비나스는 책임과 대속으로 형성되는 자아,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윤리적 자아의 형성을 논한다. 타자는 내 안에, 나의 동일성의 한 가운데 있다. 내 안에서 시작하지 않는 타자에 대한 책임은 무구한 인질의 책임과 같다. 이웃에 대한 나의 대속은 내 안에 있다. 레비나스는 면직된 자리에 있는 주체, 탈주체화된 주체로부터 대속과 책임으로서의 주체의 구성을 말하며, 그같은 자아를 ‘me’로 표현한다. 나의 이웃에 대한 책임, 책임 안에 내포되는 자아는 나(me)이다. 여기에서 대속과 희생이 요구될 수 있다. 가까움에서 타자에 의해 사로잡힌 자아의 고유성은 동일자안의 타자, 정신이다. 그것이 바로 나이고, 다른 이에 대하여 인질인 나이다. 대속에서 나의 존재는 나에게 속할 뿐, 다른 이에게 속하지 않는다. 대속에서 나는 나(me)의 고유성이 된다.
나와 다른 이들 사이에 공통적인 자기성은 없다. 나(me)는 비교될 수 없다. 그러므로 자아성은 이기적 자아가 아니라 선택되는 나(me)이다. 나는 고유하게 선택된다. 주체성은 인질로 존재하는 것이다. 자아는 대속을 통하여 보편적 원칙, 자아의 본질, 영혼의 일반화 등과는 다른 고유한 자아성을 회복한다.
2. 자아와 타자의 윤리적 관계 370)
본 절은 자아와 무한한 타자성 사이에 형성되는 윤리적 관계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가 타자의 절대적 다름인 타자성을 인정할 때, 자아와 타자의 관계는 사르트르에서처럼 적대적이지 않다. 오히려 타자는 무한성을 지닌 존재로서 나에게 다가오며, 자아로 하여금 도덕적 책임을 깨닫게 해준다. 이같은 관계는 에로스적 관계에서 발현되는 연인의 타자성과의 관계, 또 나로부터 타자에로 나가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또는 형제애적 평등의 관계에서 실현되는 우애적 공동체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이들 관계의 특징은 유한한 자아로 하여금 무한성에 닿을 수 있게 해주며, 동시에 ‘내안의 타자(l'autre dans le meme)’와 ‘타자 안의 나(moi etwanger a moi)’의 의미를 동시에 깨닫도록 해준다.
1) 사랑의 二元的 관계
우리는 이제 타자 성이 순수하게 나타나는 상황, 타자와의 타자성의 관계가 나타나는 상황을 살펴 볼 것이다. 인간의 타자성은 형식적이고 논리적인 것으로부터 나오지 않는다. 형식적이고 논리적인 구분은 개념에 따라서 이것과 저것을 구분한다. 이에 반하여 초월적 타자성 즉 시간을 열어주는 타자성은 내용의 타자성(altebite - contend)으로부터 출발한다.
레비나스는 ‘여성적인 것’의 개념을 어떤 존재가 타자성을 자신의 본질로 가지는 상황, 상반된 것에 대하여 완벽하게 상반된 것, 그 상반성이 자신과 상관자의 관계를 통해서도 어떤 영향을 받지 않는, 전적으로 다른 것으로 남아 있도록 혀용하는 것으로 본다.371) 그래서 여성은 그 자체로 타자, 타자성의 기원으로 설명된다. 여기서 성의 차이는 두 보충적 개념으로서의 이원성이 아니다. 두 개의 보완적 개념은 현존하는 것 이전의 하나를 전제로 한다. 전체를 전제하는 성의 이원성은 사랑의 혼합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러나 타자성의 에로스적 관계는 타자성을 중화하는 것이 아니라 보존한다. 여기서 다름으로서의 타자는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신비로움이 된다. 사랑이 감동스러운 것은 존재자들 사이에 이원성이 있기 때문이다. 타자성으로서의 타자는 에로스의 관계에서 나의 것이 되는 또는 나 자신이 되는 대상이 아니다. 타자는 대상이 되는 것과는 반대로, ‘신비’(mystere)속으로 물러선다. 우리가 여성적인 것을 아무리 거칠고 뻔뻔스럽게 표현할지라도, 그리고 여성성이 무미건조한 물질성으로 나타날지라도, 여성이 지닌 신비, 수줍음은 파괴되지 않는다.
‘여성적인 것’(le feminin)의 개념이 내포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인식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빛을 벗어나는 존재방식을 가진 것이다. ‘여성적인 것’의 존재방식은 스스로 자신을 감추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여성성의 타자성은 대상의 외재성이나 의지의 대립을 통해 형성되지 않는다. 타자의 저항은 그의 더 큰 힘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의 타자성의 ‘신비’에 있다.372) 타인의 타자성을 이와 같은 ‘신비’로서 정의할 때, 우리는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를 대립시키지 않는다. 즉 타인을 나와 맞서 있는 존재로 내세우지 않고, 타자의 본질로 타자의 타자성으로 내세운다. 에로스적 관계는 타자성과의 관계요, 신비와의 관계이다. 레비나스는 사랑을 가능성이나 우리의 주도권에 의존하지 않는 것으로, 사랑은 이유 없이 존재하고, 우리를 엄습하고, 우리에게 상처를 주지만, 그 가운데서도 자아는 보존되는 것으로 본다. 373)
본질적으로 사랑은 초월성으로 타자에게 나아가며, 우리를 내재성의 차원으로 던진다. 아리스토파네스는 『향연』에서 사랑을 하나의 영혼을 지닌 두 반쪽의 재결합인 것으로, 자기의 근원으로 회귀하는 것으로 주장한다.374) 레비나스는 향유의 관점에서, 에로스에 관한 이같은 주장을 일면적으로는 수용한다. 그러나 사랑은 타자와 욕망의 관계를 유지하기도 하지만, 사랑과 욕망은 전체적이고 초월적인 타자의 외재성, 애인의 외재성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사랑은 욕망의 관계를 넘어선다. 레비나스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랑은 정서적인 요인과 결합된 지식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주관-객관 구조를 갖지 않으며, 나와 - 당신의 구조를 갖지 않는다. 에로스는 대상에 고착된 주체로서 완성되지 않으며, 가능한 것을 향해 가는 설계로서도 완성되지 않는다. 그것의 움직임은 가능한 것을 넘어서 가는데 있다. 성애적인 적나라함은 얼굴의 의미에 앞서지 않는다. 그것은 미래로부터 다가오며, 미래를 초월하여 위치한 미래로부터 다가온다. 375)
그러므로 사랑은 사랑 받는 것을 넘어서 간다. 이것이 불투명한 빛을 뚫고 얼굴을 초월한 것으로부터 다가오는 이유이다. 그리고 아직 존재하지 않은 것, 결코 미래로도 다 할 수 없는 미래로부터 다가오는 이유이며, 가능한 것 보다 더 먼 곳으로부터 다가오는 이유이다. 욕망의 대상으로 나타나는 타자의 가능성은 타자를 즐기는 가능성을 유지하는 반면에, 욕망과 열망의 동시성, 육욕과 초월성의 동시성, 그에게 도달하고 그를 넘어서 가는 것이 성애의 본래성을 구성한다.376)
이에 대한 설명은 사르트르와 레비나스의 비교에서 분명해진다. 사르트르는 연인의 관계에서 ‘애무’를 연인의 의식을 육체로 집중시키도록 작용하면서, 육체의 지배를 통한 타자의 의식의 지배를 도모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377) 이에 대하여 레비나스는 연인의 애무를 대상화의 작용이나 타자의 자유를 지배하는 행위로 설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애무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378) 그러므로 애무는 감각적인 것을 초월하는 것, 끝없이 찾아 헤매는 것, 보이지 않는 것에로의 움직임으로 설명할 수 있다. 사랑은 표상에 앞서 타자성 자체를 중시한다.
레비나스는 에로스를 대상과 얼굴을 넘어서는 것으로, 단지 주체의 사상을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존재하지 않은(pas-encore-etre) 미래로 향한다고 설명한다. 레비나스 자신의 설명을 들어보자.
애정의 덧없음에서 주체는 가능성의 미래로 자신을 설계하지 않는다. 아직 존재하지 않음은 정확하게 다른 가능성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게 될 가능성이 아니다. 애무는 행위하지 않으며, 가능한 것을 잡지도 않는다. 그것이 작용하는 비밀은 그것을 경험으로 전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아와 자신과의 관계를 압도하며, 자아와 비아와의 관계도 압도한다. 익명적인 비아는 자아를 절대적인 미래로 휩쓸어 가며, 그리고 주체로서의 위치를 상실한다. 그것의 의도는 더 이상 빛에로 나아가지 않고, 의미 있는 것에로 나가지 않는다.379)
이와 같이 에로스의 운동은 ‘모든 모험으로부터 자신의 섬으로 돌아가는’ 율리시즈적 주체의 구조와는 다르다. 나는 나의 자아로의 회귀 없이, 스스로 다른 이의 자아를 발견한다.380) 에로스의 주체성이 경험하는 다차원적 상황은 욕망의 에로스와 초월의 에로스이다. 동시에 에로스의 주관성은 실체변화를 겪는 것으로 설명된다.
에로스의 주관성은 다른 이의 자아로서 감각하고 감지되는 공통의 행위 속에 구성되며, 얼굴과의 관계, 타자와의 관계에서 구성된다. 이같은 관계에서는 모호성이 작용한다. 타자는 나 자신에 의해 살려지는 것, 나의 향유의 대상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성애적 사랑이 열망을 넘어서는 존재와 욕망의 지배아래 있는 존재 사이를 오가는 이유이며, 성애적 사랑의 향유가 삶의 쾌락과 즐거움 사이에서 발생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이같은 향유의 누림은 다른 이의 자유를 가지는데서 누리는 쾌락이나 권력, 모든 전쟁을 초월해서 발생한다. 왜냐하면 사랑에 빠진 주관성은 실체변화(transsubstantiation)를 가져오기 때문이다.381)
여기서 ‘실체변화’는 자아를 확신하는 힘으로 향하지 않는다. 이것은 무인격적 존재, 중재자 안에서 생산되는 것도 아니다. 레비나스는 에로스를 통해 실체변화를 가져오는 근본적 구조를 출산(fecondite)을 통한 어린이와의 관계, 미래와의 관계로 설명한다.382)
에로스는 주체를 용서하며, 현재를 제공하는 어떤 것을 넘어서서 새로운 시작을 일으킴에 의해 주체를 현재로부터 해방시킨다. 그러므로 미래의 약속으로 생각되는 시간은 타자로부터 흐른다. 인간활동의 많은 부분이 과거에 의해 제약받는 가능성들 중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들 가능성을 제한하는 개념은 미래가 새로움과 놀라움의 가능성에 열려졌다는 의미를 놓친다. 레비나스는 “미래는 주체의 힘과 능력에 의한 계획이 아니라, 예측 불가능한 것, 타자에 대한 복종이며, 무한히 새롭게 하는 것, 무한한 것”으로 설명한다. 우리는 다음절에서 에로스와 출산의 관계, 즉 주체와 어린이의 관계, 어린이를 통한 미래와의 관계를 계속해서 논의해 갈 것이다.
우리가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에로스는 단순히 타자성에 의존하는 관계가 아니고, 근본적으로 주체와 타자의 관계를 규정하는 것이다. 에로스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 하나의 존재로 결합되기를 갈망한다. 그러나 이런 열망은 충족될 수 없는 것인데, 그 이유는 그런 결합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는 이들 사이에 존재하는 사랑의 토대인 자유와 사랑하는 이의 행위를 파괴시키지 않고서는 그를 소유할 수 없다. 에로스는 타자의 타자성이 절대적임을 나타낸다. 비록 사랑일지라도 사랑하는 이의 다름을 손상시킬 수 없다. 성적인 차이는 결코 그것의 다름을 양보할 수 없으며, 환원될 수 없는 자아와 타자의 이원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에로스 안에서의 남녀관계는 동양의 음양론적 남녀관에도 나타난다. 천지만물은 모두 음양의 양기가 느껴서(感應) 이루어진다(化生).383) 여기서 감응은 욕망의 에로스와 상통하는 개념으로 볼 수 있으며, 화생은 에로스의 출산과 연관지어 볼 수 있다. 또한 사랑의 관계는 서로를 욕망 할지라도, 욕망의 관계를 넘어서는 관계가 있다. 즉 우리가 아무리 상대를 자기화 할지라도, 연인의 타자성은 보존된다. 사랑과 출산은 어느 한쪽만으로는 생성이 불가하고 필연적으로 다른 한 쪽의 대상을 만나야 한다. 그러므로 남녀 어느 쪽도 완전한 것은 못되고, 어느 한 쪽도 우월한 존재일 수 없다. 이들은 철저히 평등하며, 필연적으로 서로를 요하는 대대적 동등관계를 가진다는 것이 동양적 생성론이다. 또한 동양의 평등관은 절대적인 차이를 전제로 한다. 즉 음이 양의 역할을 할 수 없고, 양 또한 음의 기능을 할 수 없다는 본질상의 차이로부터 상대편을 더욱 더 강하게 긍정하는 측면이 있다. 이같이 차이를 전제로한 평등이므로 평등은 곧 차이를 지양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차이 자체는 어디까지나 차이로 있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 동양의 남녀관이다. 차이를 차이로 인정하고 놓아 둘 때 그것은 영원히 그것으로 있게 된다.384)
2) 出産과 무한한 타자와의 관계
앞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레비나스는 주체와 미래의 관계를 에로스와 출산의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에로스가 자손을 낳기 때문에 시간의 생산성은 무한한 재생능력이 있다. 어린이는 부모에게 닫혀진 가능성을 표현하며, 따라서 부모의 시간과는 전적으로 무관한 시간의 관계를 확립한다. 출산을 통한 미래와의 관계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모든 것, 모든 가능성을 나타내지 않는다. 어린이와의 관계는 푸코가 말하는 것처럼 권력의 관계385)가 아니며, 생산성의 속성을 지닌 타자와의 관계로 절대적인 미래, 무한한 시간과의 관계이다. 출산에 의해 오게 되는 자아는 타자이고 어리지만, 고유성은 상실되지 않는다. 무한한 시간은 나이를 먹어 가는 주체에게 영원한 삶을 가져다 준다기보다는 세대의 불연속성을 가로질러 어린이의 꺼지지 않는 젊음을 약속한다.
레비나스는 『전체성과 무한』의 Ⅳ부에서 ‘생산성’, ‘새로운 시간성’, ‘실체변화’를 연관지어 논하고 있다. 주체와 미래의 관계는 하이데거에게서처럼 가능성과 기투의 관계를 통해 설정되는 것이 아니라 에로스와 출산의 관계를 통해 설명된다. 에로스의 간과할 수 없는 중요성은 에로스가 출산과 관련되는 것이다. 미래로의 초월성을 낳는 것은 성애적 사랑이 아니라 사랑을 통한 출산의 본래적 현상인 어린이와의 관계를 통해 가능해진다. 이같은 관계를 레비나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여성으로서의 타자와의 만남은 아이의 미래가 가능성을 넘어선 곳으로부터, 기투를 넘어선 것으로부터 다가오는데서 요구된다. 이같은 관계는 무한성의 이념을 설명하는 것과 유사하다. 나는 나자신이 명료한 세계를 설명하는 것처럼, 나자신이 그에 대해서 설명할 수 없다. 미래는 (존재보다 작은 것인) 아리스토텔레스적 배아도 아니며, 존재 자신을 구성하는 하이데거적 가능성도 아니다. 그러나 미래와의 관계를 주체의 힘으로 변형시킨다. 나자신의 것이면서 나의 것이 아닌 것, 나자신의 가능성이면서 또한 타자의 가능성이자 사랑하는 이의 가능성인, 나의 미래는 가능성의 논리적 본질로 진입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가능한 것에 대한 힘으로 환원할 수 없는 미래와의 관계를 우리는 출산으로 부를 수 있다.386) ...... 생산성은 내가 파악할 수 있는 것들 - 나의 가능성들을 나타내지 않는다. ;그것은 나의 미래를 가리키지만, 동일자의 미래가 아니다. ;동일성의 영역에서 발생하는 역사나 사건이 아니다. ...... 그렇지만 그것은 여전히 나의 모험이며, 결과적으로 새로운 의미에서 불연속성일지라도 나의 미래인 것이다.387)
우리는 레비나스가 ‘에로스의 출산’의 현상을 통해서 새로운 형태의 타자성의 관계를 발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제까지 레비나스에서 타자성과의 관계는 절대적으로 다른 타인을 인정하는 문제였다면, 에로스의 출산을 통해 논의되는 미래의 타자성의 관계는 불연속성을 띨지라도, ‘타자 안의 나’388)를 깨닫는 관계이다.
여기서 우리는 레비나스가 의미하는 ‘불연속적 시간의 흐름’의 의미를 살펴보아야 한다. 레비나스와 달리 서구철학은 고대 파르메니데스 이래로 존재를 불변하는 것, 일자, 사유와 동일시하여 왔다. 이같은 사유는 일자와 존재 사이의 불변적 유대에 의존한다. 이같은 일원론적 존재는 불변적 존재, 부단히 재개되는 시간의 연속성에 기반한 것이다. 그러나 다음 인용문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레비나스는 이제 시간의 흐름을 불연속적 연속성으로 보는 것이다.
“나는 존재한다.”속에서 존재는 더 이상 엘리아 학파의 합제가 아니다. 그 스스로 존재하는 것 속에 수다성과 초월성이 있다. 이런 초월성안에서 나는 일소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들은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아들이다. 나의 생산성은 바로 그것의 초월성이다. 이런 개념의 생물학적 기원은 결코 그것의 의미의 역설을 중화시키지 않으며, 생물학적으로 경험적인 것을 넘어서는 구조를 그린다. 389)
레비나스는 우리가 불연속적 연속성을 깨달을 때, 존재의 단일하고 단자적인 관념은 파괴된다고 주장한다. 생산성에서 존재는 다多로서 생산되어지며, 동일성과 다름으로 나눠지면서 생산된다. 이것이 사회이며, 시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파르메니데스적인 존재의 철학을 떠난다.390)
출산을 통해 존재하는 어린이는 나의 죽음(la mort)을 넘어서 살고, 부단히 재개되는 시간으로서 절대적인 미래와 즉 무한한 미래의 시간과 관계한다. 그러므로 생산성은 보편적 역사의 순환을 파괴하는 아직 존재하지 않은 것(pas-encore-etre)을 생산해낸다. 여기서 출산의 생산성은 동일성의 반복이 아니라 차이이다. 어린이는 동일자이자 타자이며, 미래로 살아 가는 것, 시간의 부활, 불연속성이다. 출산은 보편적 역사의 폐쇄된 순환을 파괴하는 아직 존재하지 않은 것을 생산하고 유지한다. 출산의 회복은 동일성의 반복이 아니다. -그것은 차이이다. 이같은 어린이와의 관계를 레비나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어린이와의 관계 즉 힘이 아니고 생산성인 타자와의 관계는 절대적인 미래, 무한한 시간과의 관계를 확립한다. 타자가 되려는 나는 가능한 것의 불확실성을 갖지 않지만, 그러나 그것은 가능한 것을 파악하는 자아의 고착의 흔적을 낳는다. 출산 안에서 이런 반복의 지루함은 그친다. 자아는 타자이고 어리지만, 그것에 기인한 고유성, 존재에서 그것의 의미와 기원은 자아의 포기 속에서 상실되지 않는다. 출산은 나이 먹음이 없이 역사를 지속한다. 무한한 시간은 나이를 먹어 가는 주체에게 영원한 삶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그것은 세대의 불연속성을 가로지르는 편이 더 나으며, 어린이의 꺼지지 않는 젊음에 의해 약속된다.391)
레비나스에 따르면, 우리는 출산을 통한 미래와의 관계 덕분에, 끝없는 반복과 노쇠함으로부터 구원될 수 있다. 시간의 불연속성은 소유가 아니라, 나의 것이면서 타인인 출산을 통해서 늙어 가는 권태를 극복한다. 자신의 아이에게서 아버지는 가능성의 종결을 넘어서며, 나의 가능성이나 운명의 사실성의 저편을 본다. 아버지는 미래에 대한 열망으로 자신의 아이를 열망한다. 출산이 가져오는 무한한 시간으로, 인간주체는 죽음을 초월해간다. 여기에서 초월이란 죽음이나 무아경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세대간의 실체변화를 가져오는 타자에 대한 초월성의 불연속성을 의미한다. 392)
타자는 불연속적 시간의 근원이다. 출산을 통해 가능해지는 무한은 다른 운명의 개시에 의해 과거와 현재의 가능성을 능가한다. 자신의 죽음을 넘어서, 아버지는 아들의 존재 안에서 새로운 변화를 얻는다. 아버지의 삶과 아들의 삶은 이들을 분리시키는 시간적 간격덕분에 새로운 시작이 가능해진다. 죽음을 넘어서 불연속의 토대 위에 연속성이 있다. 시간성의 무한은 죽음과 부활의 시간이다. 과거는 과거의 의미를 변화시킬 수 있으며, 미래는 선을 열망하는 새로운 기회가 된다. 393)
이와 같이 레비나스는 출산을 통해 가능해지는 타자의 불연속적 시간에서 주체와 무한한 미래사이의 적극적 관계를 발견한다. 뿐만 아니라 출산은 전적으로 새로운 것의 가능성을 내포하는 과거와의 관계도 포함한다. “유한하게 늙어 가는 존재에 대해 출산의 시간성은 再開이고, 용서이다.”394) 다시 말해 출산은 과거의 교정, 용서, 치료를 가져올 잠재성을 지니면서 새로이 출발하는 것이다. 망각이 과거를 무화시키는 것과는 달리, 용서는 과거에 작용하며, 재개하며, 정화한다. 395)
미래는 타자의 시간temps이지만, 무관한 계기들의 연속이 아니다. “미래는 절대적 간격을 가로질러 내게 온다.”396) 따라서 시간은 새로운 것을 존재로 가져온다. 유한한 시간의 간격과 불연속성은 시간이 부활하는 곳이며, 언제나 새로이 재개하는 무한성과의 관계이다. 그것은 하이데거가 생각하는 것처럼, 시간의 본질을 구성하는 존재의 유한성이 아니라 존재의 무한성이다.397)
3)효와 자애, 우애의 공동체
우리는 앞에서 출산을 통해서 형성되는 미래와의 관계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구조를 드러냄을 밝혀 보았다. 여기서 주체는 타자에 대해 언설의 구조를 갖지 않으며, 주체의 가능성이나 얼굴의 관계를 넘어서는 부성(paternite)을 구성한다. 부성에서 선성으로 말할 수 있는 열망이 이루어진다. 398)
레비나스는 “출산을 통해 형성되는 인간간의 상호주관성은 자아가 자신의 자아를 벗어 던지는 지평을 열어준다”399)고 한다. 여기에서 출산을 통해 형성되는 상호주관성은 단순히 집합적인 것도 아니며 또한 다원성에 대립하지도 않는 유대를 보여준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아들은 시나 사물과 같은 나의 작품인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푸코가 보는 것처럼 지식과 권력의 관계도 아니다. 나는 나의 아이를 소유하지 않는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비록 아버지일지라도 아들을 자기화할 수 없다는데서, 낯선 이와의 관계이지만, 낯선 이는 동시에 타자적 존재이면서 나이고, 나와 자아의 관계이면서 동시에 내가 아닌 존재이다. 레비나스의 설명을 듣자.
부성에서 나는 필연적인 죽음의 결정성을 가로질러 타자 안에서 자신을 연장하며, 시간은 불연속성에 의하여 노화와 운명을 이긴다. ...... 이런 불연속성이 중요하다...... 순간의 재개, 유한하고 늙어 가는 존재에 대한 생산성의 시간의 승리는 용서이자 바로 시간의 일이다. 사죄의 역설은 그것의 소급해 가는데 있다. 공통의 시간관념으로부터 그것은 사물의 자연적 질서의 전도, 시간의 가역성을 표현한다. ...... 잘못을 비는 것의 역설은 사죄를 시간 그 자체의 구성으로 말하는 것이다. 순간들은 서로서로 별개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타자로부터 나에게로 확장된다. 미래는 나의 현재로 흐르는 가능성들로부터 내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타자가 타자를 절대적인 타자로서 공유하는 절대적인 간격을 가로질러 내게 다가오는 것이다. 비록 그가 나의 아들일지라도. ...시간의 심오한 작용은 과거로부터, 그의 아버지와 더불어 시작하는 주체 안에서 온다. 시간은 유한한 것이 유한하지 않음이며, 계속해서 재개되는 타자성이다. 400)
이와 같이 레비나스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아버지의 자아가 ‘자신의 것’인 타자성과 관련되는 상황을 보여준다. 나의 존재는 출산을 통해서, 존재의 본질에 새겨진 가능성을 넘어선다. 당신 자신의 가능성으로 다른 이의 가능성을 본다는 사실, 당신의 정체성, 당신에게 부여된 종결을 피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존재, 당신에게 부여된 것은 아닐지라도 당신의 것이 어떤 것을 향하는 것, 레비나스는 이같은 것들을 부성으로 나타낸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아들은 나의 존재를 넘어서는 미래이다.
부성, 효, 부자관계는 분리인 동시에 의존관계를 나타낸다. 분리의 측면에서 나타나는 것은 再開, 아버지에 대한 거부, 효 등이 나타나지만, 역설적으로 존재는 무한히 그리고 불연속적 연속성으로 나타난다.401) 레비나스는 이같은 역설적 상황과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출산을 가로지르는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에서, 나는 자아로서의 단일성을 부적인 에로스에 빚진다. 아버지는 단순하게 아들을 생기게 한 것만이 아니다. 누구의 아들이라는 것은 거기에서 어떤 동일성을 주장함이 없이, 누구의 아들 안에서 내가 된다는 것, 본질적으로 그 안에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변증법적 결합을 확립하고자 하는 출산의 총괄적 분석은 두 가지 모순적인 움직임을 함축한다. 아들은 아버지의 단일성을 차지하지만, 아버지에 대해 외재적으로 남아 있다. :아들은 특별한 아들이다. 수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각각의 자식들로서 특별한 아들이며, 선택된 아들이다.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다른 이의 단일성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관계를 형성한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사랑은 부성애에 가까워야 한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어떤 횡재와 같이, 아들의 구성적인 자아에 덧붙여지는 것이 아니다. 부성애는 먼저 아들의 단일성을 부여한다. 자식으로서의 그의 자아는 향유에서가 아니라 선택에서 시작된다. 그는 아버지에 대해서 특별하기 때문에 그 스스로 특별하다. 이것은 어린이처럼, 그가 그 스스로 존재할 수 없는 이유이다. 아들은 자신의 단일성을 아버지의 선택에 빚지고 있기 때문에, 그는 양육되며, 명령받으며, 복종할 수 있다. 그리고 가족의 신비스런 결합이 가능해진다. 402)
그러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아들이 아버지의 존재를 통해 가지게 되는 의미는 무엇인가? 레비나스는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통해, 아버지의 특별한 아들이라는 자신의 동일성과 고유성을 얻는다고 설명한다. 아들의 자아는 향유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선택받는데서 시작한다. 아들은 자신의 단독성을 아버지의 선택에 빚지는 존재인 것으로, 양육되고 명령받으면서, 그리고 아버지의 말씀을 따르면서 가족의 구성원으로 결합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출산을 통해 선택된 존재는 특별한 동시에 특별하지 않다. 나는 여기에서 특별히 선택된 존재이지만, 형제들 중의 하나로 존재한다.
그러나 출산에서 자기의 동일성으로부터 해방된 자아는, 만일 자신의 미래가 특별한 아들에 구속되어 있다면, 자신의 미래에 관하여 분리를 주장할 수 없다. 선택된 존재로서, 특별한 아이는 특별한 동시에 특별하지 않다. 부성은 무수한 미래로서 생산되어진다. 선택된 나는 이 세계에서 특별한 존재인 동시에 형제들 중의 형제로서 존재한다. 나는 나이고 선택된 존재이지만, 그러나 만일 다른 선택되어진 존재들로부터, 평등한 것들로부터가 아니라면, 나는 어디에서 선택되었을 것인가? 그러므로 자아로서의 나는 윤리적으로 타자의 얼굴로 향해 있다. 우애는 얼굴과의 관계인 동시에 타자에 의해 나에게 실현되는 지배이기도 하다. 자아의 선임, 바로 그것의 고유성은 특권과 예속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른 선택되어진 존재자들 사이에 자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얼굴 안에 있기 때문이다. 403)
레비나스의 설명은 아버지로부터 선택받은 존재로서의 아들의 고유성은 동시에 이 세계에서 다른 형제들 중의 하나임을 일깨워준다. 형제들 중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윤리적으로 타자의 얼굴로 향해 있다. 우애는 이같은 상황을 말해준다. 타자로서의 아들은 비록 부모에 의해 형성되는 과거를 떠맡을지라도, 독립적으로 살고 열망한다. 그러므로 아들의 자유는 절대적이기보다는 제약받는 것이다. 아버지의 삶을 연장하는 아들로서, 아들은 또한 이에 대해 반항할 수 있다. 여기에서 불연속적 시간은 놀라운 전환과 부활로 열려진다. 아버지의 타자로서 아들은 모두 특별한 존재이다. 이같은 단독성은 아버지에 의한 선택을 전제한다. 아버지의 열망은 아들에게 아버지와 유사한 것인 동시에 새로운 책임을 서임한다. 아버지의 선택은 아들의 단독성을 구성한다. 이같은 관계를 통해서 아버지는 자신의 노쇠함과는 다른 미래를 얻는다. 그래서 생물학적 관계로부터 해방된 부성은 자신의 운명과는 다른 운명일 수 있는 존재, 자신의 존재와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게 된다.404)
레비나스는 “모든 사람이 형제라는 것이 나의 고유성을 구성한다”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자아로서의 나의 위치는 ‘우애’에서 실현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형제애적 우애에서 형성되는 얼굴의 관계에서, 타자는 다른 이들과의 연대를 나타내며, 사회적 질서를 형성한다. 사회질서를 다지는 사랑과 출산과 가족의 관계에서 나의 자아는 무화되는 것이 아니라, 선을 약속하게 되고, 선의 부름을 받게 된다.405) 우리는 여기에서 레비나스가 왜 인류의 우애를 정의로운 사회뿐만 아니라 마주보기의 관계에서 선의 실현을 위한 가능조건으로 보는지를 알 수 있다. 406) 물론 여기서도 우리는 우애적 공동체가 유래하는 출산을 생물학적으로만 한정해서 이해해서는 안된다.
우애적 공동체는 얼굴과의 관계이다. 선임과 평등의 우애적 공동체에서 나는 타자에 의해 실행되는 주도권을 본다. 특별한 아들들의 집합으로 보여지는 인류는 서로의 얼굴을 향해있는 자유를 형성한다. 그리고 자신의 부모로부터 나 자신이 존재하게 된다는 사실은 종과 유로부터 오는 보편적 본질과는 다른 고유성을 형성해준다. 우애적 공동체로서의 인류는 타자에 대해 고립된 개인들도 아니고, 단순히 사회적 집합체의 구성원도 아닌 것으로, 본래 고유한 형제들의 공동체이다. 레비나스는 “인간으로서 나는 우애 안에 자리한다. 모든 인간이 형제라는 것은 인간에게 도덕을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고유성을 구성한다. 자아로서의 나의 지위는 우애 속에서 구현되기 때문에 얼굴은 나에게 얼굴로서 나타날 수 있다”고 말한다.407) 우애 안의 얼굴의 관계에서, 타자는 모든 다른 타자들과 연대감으로 나타나며, 사회질서를 구성하며, 제삼자와의 대화의 여지를 구성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레비나스 사상의 많은 부분이 동양 사상이나 우리의 에토스와 일치하고 있다. 레비나스는 윤리나 규범을 법이나 제도에 우선하는 근원적인 영역에서 작용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그는 제도나 법으로 나아가기 이전의 인간의 생활세계에서 작동하는 삶의 원리로서의 윤리를 말한다. 사실상 일상의 많은 윤리적 행위들이 법의 영역과 합치되는 것은 아니다. 윤리와 도덕은 법 이전의 것이면서도, 법을 넘어서는 성격을 띠고 있다. 레비나스는 윤리와 도덕이 법과 제도화되었을 때 초래될 윤리의 중립화, 몰인격화, 비인격적 관계의 초래를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고 레비나스가 사회철학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님은 앞의 나-너 관계가 다른 타자에게로 확대되어 가는 부분들에서 알 수 있다.
우리는 레비나스의 통찰에서 동양적 전통윤리와의 상관성을 볼 수 있다. 중립적인 법과 제도의 영역이전에 작용하는 윤리는 인간관계의 윤리이고, 결국은 동양철학에서 오랫동안 지켜왔던 관계윤리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 그러하다. 부모자식 관계는 동양사상의 중핵적 가치로서, 孝經에서 자식의 아버지에 대한 공경을 의미하는 孝는 天之經이요 地之義로서 천지간에 뒤바뀔 수 없는 관계로 정하고 있다. 물론 아버지가 아들을 대하는 마음은 부성애, 즉 자애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오륜중의 父慈子孝에 해당한다. 周易에서도 남녀가 만나 부부관계를 맺은 뒤에야 다음 세대의 생명이 태어나는 관계를 가져오게 되고, 이 生命授受의 종적 관계를 經으로 하여 형제인척과 같은 위적관계로 확대시켜서 인륜관계를 정하고 있다. 더욱이 생물학적 관계를 갖지 않은 타자적 관계에서도 생하게 되는 효와 부성의 태도는 효의 확충으로서 忠, 孝悌, 敬과 같은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들은 오륜중에도 夫和婦順과 兄友弟恭에 해당한다. 이와 같이 우애와 가족애적 공동체의 개념은 동양적 에토스에서는 친숙한 개념이다. 408)
Ⅵ. 레비나스 ‘他者 倫理’의 도덕?윤리교육적 적용
1. 타자윤리에서 본 인지론적 도덕교육의 한계
1) 도덕성 발달원리로서 합리적 추론형식의 한계
(1)합리적 추론의 한계
현행 우리의 윤리교육의 학문 공동체는 학생들의 도덕성 함양에 적절한 윤리이론과 그에 부수하는 교수법을 고안하기 위하여 다양한 각도에서 연구가 진행되고 있으며,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도덕과 교육의 중핵적 내용중의 하나인 아동의 도덕성 발달과 관련된 논의 중에서 가장 비중 있게 연구되고 영향을 미쳐온 것은 삐아제와 콜버그로 대표되는 인지적 도덕성 발달이론이 있고, 이에 대한 반론에서 최근에 등장한 길리간의 도덕성 성차이론이나 나딩스의 배려윤리 등이 있다. 삐아제와 콜버그의 도덕성 발달이론은 이미 그 한계점이 여러 곳에서 지적되어 왔지만, 왜 그것이 윤리학에서 심각한 문제점을 가져올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논의는 피상적으로 진행되어 왔다. 레비나스의 타자윤리의 관점에서 볼 때, 인지적 도덕성 발달이론은 근본적으로 자아론의 범주 안에 있다. 본 절에서는 레비나스의 논지에 입각하여 인지적 도덕성 발달이론의 중요한 사안들을 검토해 본다. 인지론적 입장과 배려윤리, 그리고 레비나스 타자윤리의 이론적 입장차이는 아래의 <표 1>409)에서 보는 바와 같다.
인지적 도덕성 발달이론의 배경은 루소와 칸트의 자율적이고 이성적인 자아로부터 출발하며, 현대의 분석윤리학자인 헤어의 계보로 이어져 있다. 삐아제는 인지심리학자중의 한 사람으로, 이성적인 인간행위자가 자신의 경험적 요소를 배열하고 규칙과 원칙들을 형성하게 되는 방식에 관심을 나타낸다. 여기에 도덕적 이해의 성장과 발달에 대한 설명이 제시된다. 그에게서 지식과 이해의 성장은 우리가 경험을 구성하고 해석하는 방식에서의 질적 변화에 관한 것이다. 삐아제에서 지식과 이해는 상대적으로 주관적이면서 지각에 기초를 둔 이해형태로부터 좀 더 객관적이고 원칙이 있는 추상적 경험에로의 진보라는 생각이 담겨있다. 따라서 도덕적 추론과 판단의 발달도 다소 주관적인 것으로부터 객관적인 것을 거쳐 추상적으로 나가는 전개과정을 보여준다. 410)
피아제는 특정한 도덕적 행동방안을 택해야 하는 혹은 택해서는 않되는 복잡하고도 보편적인 이유들을 구성해가는 과정을 중시하였으며, 이것을 도덕적 발달로 규정하였다.411) 콜버그는 아동들이 도덕적 단계를 통해 질서정연한 방식으로 발달해 나간다고 주장한다. 즉 개인은 성숙해 가는 과정에서 질적으로 상이한 발달단계를 계열적으로 통과해 나간다는 것이다. 여기서 단계(Stage)란 추론의 구조를 뜻하는 것으로, 단계들은 구조화된 전체 즉 조직화된 사고체계, 불변의 계열성, 위계적 통합의 특성을 지닌다. 콜버그는 도덕교육의 목적은 도덕적 추론의 단계를 발달시킴으로써 각 개인들이 자율적인 도덕적 행위자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412)
콜버그는 그의 도덕발달단계가 범문화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도덕적 가치와 판단에 대한 존중은 사회적 상황에 따라 상대적이고 국지적인 것이 아니라, 보편적이어서 문화에 따라 다른 것이 아님을 보여주려 한다. 이 점에서 그의 연구는 헤어(R. M. Hare)에 의해서 제기되었던 주장-도덕적 사고와 행위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내용이기보다는 추론과 논리적 형식이다-을 아주 강력하게 강화하는 것으로 보인다. 헤어, 삐아제, 콜버그가 똑같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사람들이 특정방식으로 판단하는데 사용하는 이유와 기준의 성격이다. 413)
이같은 콜버그의 주장에 대하여 카는 도덕적 문제에 있어서 판단의 목표는 타당한 혹은 타당치 못한 추론을 밝히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올바른 행위로 우리를 인도하는데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이같은 주장은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다.
인지적 도덕성 발달이론을 타자윤리와 비교해 볼 때 가장 큰 차이점은 도덕성의 발달을 합리성, 합리적 추론의 발달원리에 준한 것으로 보는 점이며, ‘이성’에 그 출발점을 두고 있는 점이다. 이같은 이성 중심적 접근은 레비나스 이전의 많은 윤리학의 대가들에 의해서 그 문제점이 지적되어 왔다. 레비나스에 앞서 윤리학에 대한 이성적 접근이 윤리의 현상을 제대로 밝혀 줄 수 없음을 가장 명료하게 밝혀준 이는 현상학적 윤리학자인 셀러(Max Scheler)이다. 셀러는 윤리란 이성의 질서에서 작용되는 것이 아니라, 파스칼이 일찍이 팡세에서 말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마음의 질서(ordre du coeur)안에 있음을 지적한다.414) 셀러는 윤리적 가치판단은 이성의 작용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치의 질서를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가치감(Wertgefuhl)의 작용이라고 말한다. 셀러의 윤리학은 가치직관의 원리로서의 가치감, 타자에 대한 공감의 원리를 중시한다.415)
셀러와 마찬가지로 타자윤리 역시 윤리의 출발점이 근대철학의 범주 안에서 논의되는 합리적 이성416)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우리가 현상학적 자아론의 논의에서 살펴보았듯이, 이성작용의 특징은 구체적 경험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 사물에 대한 분석과 추론의 기능을 발휘해 가는 것이다. 그같은 과정은 사물을 자신의 의식의 대상으로 환원시키면서, 자신의 분석 대상으로 삼고, 대상화, 객관화, 주제화한다. 이같이 사유의 환원적 성격을 망각하는 것은 정신외부의 외재적 타자와의 관계를 망각하는 것이고, 동시에 타자와의 관계가능성인 정서적 심층구조를 거부하는 것이다. 우리는 절대적으로 이성적인 존재가 절대적으로 다른 이성적 존재와 만나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한다. 레비나스는 인식 안에서는 사회성의 자리가 없다고 말한다.
“인식 안에서 자아를 회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사회성은 인식과 동일한 구조를 가질 수 없다. ” “인식은 항상 동화로서 해석되어져 왔다. 가장 놀라운 발견일지라도 존재에 의해 흡수되어져 왔으며, 이해되어져 왔다. ……인식은 우리가 타자와 교제하도록 하지를 못한다. 그것은 사회성의 자리를 갖지 못한다. 그것은 항상 獨居的이다. ”417)
위의 인용문이 말해주듯이, 인식아래서는 모든 것이 자기소유로 전환된다. 타자윤리는 인간들 사이의 사회성의 가능성을 이성이 아닌 감성, 정서에 놓는다. 이성의 추론작용안에는 타인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유아론적 이성은 전적으로 외재성의 영역과 한 걸음 떨어져 있다.
(2)타자윤리에서의 이성의 재조명
그렇다면 타자윤리에서 이성은 완전히 쓸모 없는 것으로 폐기되는 것인가? 물론 그런 것은 아니다. 타자윤리에서 이성은 타자와 자아의 관계에서 재정의 된다. 타자와의 관계에서 이성은 인지론적 관점이나 인간의 의식작용에 준하여 그 의미가 밝혀지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를 열어주는 대화에서, 타자의 타자성과 외재성의 의미를 충분히 받아들이는 진리와의 관계에서, 정의와 선의 관계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새롭게 조명되는 이성의 의미는 무엇인가?
형이상학 또는 윤리성은 외재성을 열망하는 지성의 작업 속에서 즉 열망에서 인식되어진다. 그러나 외재성에 대한 열망은 객관적 인식에서가 아니라, 담론 안에서 우리에게 나타나며, 얼굴을 환영하는데서 정의로 나타난다. 언어는 타자를 접하지 않고도, 타자를 부르면서, 타자에게 명령하거나 복종하면서, 타자에게 도달한다. 정의와 진리의 관계는 무엇인가? 진리는 지성과 분리되지 않는다. 레비나스는 참된 인식의 본질이란 비판이라고 본다.418) 참된 인식의 본질이 비판이라는 것은 객관적 인식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서 비판적 인식은 타자에로 다가가는 것, 타자를 환영하는 것이다. 이 말은 인식의 본질을 코기토를 넘어서는 것으로 재정의 하는 것이다. 비판적으로 인식하는 것, 즉 자유의 근원을 탐구하는 것은 타자를 타자로서 나타내는 데 있다. 레비나스는 “이성의 본질은 주체에게 토대와 힘을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라, 주체를 문제 삼고, 그를 정의로 인도하는데 있다”419)라고 말한다. 이 말은 결국 선험적 자아를 인식의 궁극적 의미로 보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출현에서 자신에 앞서 있는 것을 돌아보는 것이다. 이는 타자의 출현과 타율성의 발견을 의미하는 것으로, 인식은 이같은 관계를 정교화하는 의미를 가진다.
우리는 타자윤리에서 주체의 탈중심화를 시도하는 여타의 프랑스 구조주의 또는 후기 구조주의자들이 이성을 거부한 것과는 달리, 언어적 관계나 윤리적 관계에서 나타나는 합리적 성격을 볼 수 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해지는가? 타자와의 관계에서 합리적 성격이 깃들 가능성은 주체의 이성에 기원한 것이 아니라, 타자의 얼굴이 계시하는 무한성의 이념을 받아들이는데 있다. 절대적으로 다른 타자는 얼굴로 자신을 나타내지만, 동일자를 부정하지도 않고 그에게 폭력적이지도 않다. 얼굴의 표현은 비폭력적이며, 나의 자유를 요구하는 대신에 책임을 요구한다. 자아와 타자의 관계는 비폭력인 것으로, 다원성을 유지하면서 평화를 형성한다.420)
레비나스는 “다원성을 갖지 않은 세계에서, 언어는 사회적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421)고 말한다. 이 말은 “정의란 단독성이 없다면 가능하지 않다. 정의에서 주체성은 형식이성이 아니라 개인성으로 나타난다”422) 라는 주장과 연관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발화자가 고유성이 아니라 보편성을 향해 간다면 그는 개체성을 상실한다. 이같은 상황에서 언어는 합리적 제도에 상응하게 되며, 합리적 제도에서는 무인격적이고 비인칭적인 중립적 이성이 객관적인 것으로 된다. 여기서 개별적 존재는 자신의 특수성을 상실한 채,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의지 안에 있다. 이같은 상황은 의지와 이성의 동일시가 일어나는 불합리성과 비도덕성의 상황으로 규정할 수 있다. 레비나스는 “만일 주체성이 절대적으로 다른 타자와의 관계에서 분리된 존재로 된다면, 만일 얼굴이 의미와 합리성을 가져온다면, 여기에서 이성은 윤리적 행위와 책임성안에 자리한다.”423) “얼굴의 환영에서 의지는 이성에 열려 있다”424)고 한다. 이성의 작업은 사유에 새로운 것을 도입하는 것으로, 합리적인 것을 경험적인 것에 대립시키지 않는다. “절대적인 경험, 결코 아 프리오리하지 않은 경험이 이성 자체이다.” 425) 그러므로 진정한 경험은 타자를 발견한다. 합리성에로의 이행은 비인칭적 객관성과 보편성의 구조로 사라져가는 비개체화가 아니라, 언설로서 즉 얼굴을 지닌 구체적 인간인 주체가 말을 거는 것으로, 그에 대하여 응답하는 윤리적 행위이다.
타자와의 관계가 분리를 없애는 것은 아니다. 얼굴을 마주 대하는 것은 주체성을 흡수한다든지, 나와 타자를 공통의 관계로 집어넣는 보편적 진리를 전제하지 않는다. 나와 타자의 관계는 서로서로 초월적 관계 안에서 개시되어야 한다. “이성은 나와 타자와의 관계를 형성한다. 타자의 가르침이 나에게 이성을 형성한다.”426) 여기에서 보여지는 근원적 다원성이 얼굴 안에서 관찰되어진다. 그것은 다양한 개성 안에서 형성되는 것이지, 그 밖의 것에 의존하지 않는다. 발화자에 공통적인 질서는 주체가 타자에게 증여하고 호소하고 참회하는데서 형성된다. 참회는 맹목적으로 자신을 변명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게 호소하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호소적 참회를 ‘이성의 근원적 현상’으로 본다. 개별적 발화자들은 세계와 교통하면서, 타자에게 호소하면서, 단독자로 된다. 이성은 이와 같은 단독성과 특수성을 전제하는 것으로, 독특하고 고유한, 따라서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존재자로서 마주보는 것이다.
나의 존재는 비인칭적 이성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만일 내가 역사 안에서의 나의 역할로 환원된다면, 역사 안에서의 존재는 나의 양심을 나의 외부에 위치시키게 되고, 결국 책임을 지지 않게 된다. 레비나스는 주체가 자신의 양심을 자기밖에 두게 되는 상황을 폭력적 양심 속에 있는 것, 인간성의 비인도성을 초래하는 것으로 본다. 개체로서의 자기를 포기하는 것은 전체성안에 머무는 것이다. 나의 개인성, 나의 고유성은 참회하는 이성의 차원에 있다. 즉 그것은 나로부터 타자에 이르는 대화이며, 대화에서 나는 나 자신을 타자에게 드러내는 것이다. 427)
(3)타자수용의 감성의 원리
만일 윤리학이 푸코의 윤리학적 문제설정428)에서와 같이 자기와의 관계, 자기자신의 존재론적 문제와 관련된 것으로 규정한다면, 윤리학이 자기 안의 존재론적 범위 안에서 실행되는 것은 별 문제 없다. 그러나 윤리의 문제설정을 자기와의 관계 안에 머물지 않는 자아와 타인과의 관계로 규정한다면, 우리가 자아의 타인에 대한 호소와 타인의 자아에 대한 호소가 어떤 통로를 거치게 되는가에 관하여 생각해야 한다. 그 통로는 감성이고 몸이다. 외부로부터 직접적으로 영향받고, 감동 받고, 외부의 자극을 감수하는 영역은 이성의 영역이 아닌 감성의 영역이다.
이제 우리는 형이상학적 윤리학의 정초에서 감성의 역할과 외부로 노출되어져 있는 몸의 의미를 되새긴 것의 의미를 알 수 있다. 감성과 몸의 구체적 의미는 우리가 앞장의 논의에서 살펴보았듯이, 말하기, 마주보기, 상처 입을 가능성, 감수성, 수동성, 수용성 등의 개념으로 구체화된다. 정서를 인간의 근원적 요소로 보는 것은 생생한 체험이야말로 이론적인 것에 앞서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생생한 체험이란 이념 안에서가 아니라, 느낌 안에서 정초된 의미를 포함한다.
인간이 감성적 존재임을 깨닫는 것은 세계 안에 나 홀로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는 것이다. 삶의 세계는 다른 사람을 포함한다. 이 점에서 삶의 세계는 사회적이다. 생생한 체험이 이론에 선행한다고 말하는 것은 사회적인 것이 이론적인 것을 넘어선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같은 의미에서 사회성의 의미는 이성에 토대한 이론에서가 아니라 정서 위에 정초한다. 윤리적 형이상학은 정서에 기초한다. 여기서 우리는 의식을 넘어서 도달하게 되는 정서의 윤리적 의미를 볼 수 있다. 자아와 타자의 관계는 동일자의 전체성으로 포괄되는 대신에, 자아에 의한 타인의 자율성을 깨닫게 되는 지점에로 간다. 429) 능동적 주체로서 이성의 인식작용과 달리, 타자의 다름과 무한한 타자성에 노출되어 있는 감성으로서의 자아의 수동성에서 레비나스는 타인과 자아 사이의 사회적 관계의 가능성을 본다.
2) 도덕성 발달목표로서 자율성의 한계
(1) 자율성의 한계
도덕교육의 목표로서 발달이론을 전제하고 있는 대표적 학자는 콜버그이다. 삐아제의 발달이론, 듀이의 성장개념, 칸트, 롤즈, 헤어의 자유주의 철학에 근거하고 있는 콜버그의 도덕교육론은 발달론을 강조하던 전기와 공동체적 접근을 보이는 후기로 구분된다. 여기서는 논의의 편의상 전기사상을 중심으로 한다. 전기 콜버그430)는 도덕교육에 있어서 교화(Indoctrination)의 위험성을 우려하며, 도덕적 가치들과 내용을 가르치는 것보다 도덕적 의사결정과 같은 과정자체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콜버그는 도덕발달에 관한 경험적 탐구과정에서 삐아제와 비슷한 방법을 택했다. 그는 상이한 연령의 아동들이 어떤 결정을 내림에 있어서 제시하는 이유들간의 질적 차이를 밝히기 위해 특정한 도덕적 딜레마의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이런 질문에 대한 다양한 반응을 분석하면서, 콜버그는 도덕적 사고판단에 있어 3수준으로 6단계의 도덕발달단계를 구분하고 있다. 도덕적 수준이 최고로 발달한 수준의 어린이는 양심이나 원칙을 지향하는 단계로서, 이 단계의 어린이는 도덕을 도덕적?사회적 규칙이나 계약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 넘어 도덕적 보편화 과정을 거쳐 독립적인 이성적 숙고의 결과로 도달하는 원칙에 대한 것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으로 가정된다. 이 단계는 교육철학자나 심리학자들이 도덕적 자율성의 단계라고 부르는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 개별행위자들은 도덕적으로 불확실하거나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양심의 이름으로 호소할 수 있는, 자기 스스로 받아들인 일련의 도덕원칙과 규정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콜버그에 있어서, 자율적 양심과 원칙을 지향하는 마지막 단계는 도덕적 발달의 궁극적 목적이며, 완전한 도덕적 성숙은 이 단계에 도달해야 얻을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카는 콜버그 류의 인지적 도덕성 발달이론이 도덕발달의 본질에 대해 객관적인 과학적 탐구의 형태로 우리에게 제시되었지만, 실제로는 경험적인 것으로 가장된 철학이론에 불과하다는 혹평을 가한다. 431) 카는 자신의 비판의 근거로 도덕발달에 대한 콜버그의 주장이 분석철학의 자유주의 전통 속에서 최근에 등장한 계몽주의적 견해와 전적으로 일치하는 점을 든다. 사실 이같은 전통에 있는 헤어는 콜버그의 연구를 자신의 연구를 지지해주는 이론으로 보고 있다. 이들 생각을 하나로 묶어주는 기본적인 생각은 개인의 도덕적 성숙은 주로 도덕적 가치와 관련된 합리적인 자기입법능력의 계발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도덕교육의 주된 목표는 학생들로 하여금 도덕원칙에 대하여 스스로 합리적이고 일관된 준칙을 세움으로써 그같은 원칙에 입각한 책임 있는 양심에 준하여 살아가도록 북돋아 주는 것이 된다. 432)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이같은 주장에 대해 숙고해 보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도덕성에서 개인의 양심이나 의지가 도덕적으로 효과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제대로 숙고된 양심이나 의지일 것이 요구된다. 사실상 양심은 일반적으로 도덕의 마지막 심급으로서 원용된다. 양심은 윤리적 가치인식의 기관이나 윤리적 가치의식으로 말해진다.433) 하르트만도 “양심안에 가치의식이 존재한다” 434)고 강조한다. 양심은 억압을 막으며, 행위의 총체적 측면을 생각하게 한다. 양심은 주의의 외침이다.
그러나 양심에 의한 명령이나 금지도 한번 더 비판적으로 논해질 필요가 있다. 양심에 반하여 행해진 것이 선일 수는 없다. 그러나 양심에 따라 행해진 모든 것이 선한 것이라고 볼 수도 없다. 왜냐하면 양심은 신탁(Orakel)이 아니고 기관(Organ)이기 때문이다.435) 기관으로서 양심은 잘못 인도될 수 있다. 그밖에도 그것이 정말로 양심인지에 대하여 우리의 내부에서 어떤 내성도 가르치지 않는다. 양심은 선에 대한 인간의 성찰이지만, 양심의 밝음의 크기는 사람마다 다르고, 우리 자신도 자신의 양심을 확신할 수 없다. 또한 양심의 소리로부터 권위적으로 말해지는 명령이나 금지가 교육과정에서 어느 정도 습득되어지고 내면화되는 것인지 또는 자기 자신이 자유롭게 결정하는 도덕적 능력이 양심으로 명료화되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436)
카는 칸트437)나 헤어에 이르는 흐름으로 대변되는 도덕에 관한 후기 계몽주의의 자유주의적 전통은 진정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것으로 인정될 수 있는 개인의 의지를 일깨워주는 내용을 제시한 바 없음을 지적한다.438) 칸트는 선험적인 방법을 자기철학의 원리로 끌어올리고 윤리학에 적용하였다. 칸트의 선험적 방법은 도덕적 행위를 자기의 가능성의 조건에로 환원하고 그시 그시 조건적인 것으로부터 조건 되어질 것에로 역추리하여, 그 자체로 더 이상 조건적이지 않은 무조건적인 출발점이자 최종근거인 모든 당위의 최고규범에로 나아간다. 439) 무조건적 당위의 최고규범은 누구나 일상의 도덕적 경험에 근거하여 자기 자신의 실천으로부터 획득하며, 당위요구 내지는 타당성 요청의 형태 속에서 인식하게 되는데, 칸트는 이들에 대한 근거를 항상 어떤 방식에서든 인정되는 양심법의 사실에서 묻는다. 이때 칸트에게 중요한 것은 왜 사람들이 이것을 해야 하고 저 것을 해서는 안되는가에 대한 경험적 설명이 아니고, 단지 도덕적 당위의 정초가 문제된다. 칸트의 선험적 방법은 도덕성을 정초하고, 이들을 인간의 실천을 위하여 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칸트는 이같은 작업의 근거를 자유의 원리로서 재구성하고, 자유를 자율성으로 정하였다. 도덕적 당위의 근거로서 자율적 의지가 이해되며, 자율적 의지는 스스로 법칙을 부여하며, 자율적 의지 스스로 그 법칙에 무조건적으로 구속된다. 그러므로 자유는 양심법속에 명료해진다. 칸트는 그것의 최고규칙을 정언명법속에서 정식화한다. 칸트와 칸트주의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도덕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진정한 자신의 것이 아닌 견해들의 영향하에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관습적 도덕의 영향으로부터 독립되어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따라서 도덕적 삶과 행위에 대한 자유론자들의 주장은 형식은 풍부하지만 내용은 많지 않다.
카는 자유주의적 전통아래 있는 인지적 도덕성 발달이론이 자기 입법적 자율성을 전제하고 있는 것으로, 도덕이론으로서는 부적절하다고 지적한다. 이같은 문제의식은 레비나스와 같지만, 카는 왜 그같은 접근방법이 윤리학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지에 대해서는 잘 설명해주지 못하고 있다. 레비나스는 인지주의적 접근법에 대한 피상적 비판의 수준에 머무는 카를 넘어설 뿐만 아니라 인지적 발달이론을 극복하는 윤리적 패러다임으로 ‘타자성의 윤리’를 제시해 주고 있다. 그러면 왜 레비나스가 자율성의 원리를 비판하고, 다른 대안을 제시하는가를 살펴보자.
(2) 타자윤리의 타율성의 원리
윤리학에 대한 접근방법으로서 타자윤리의 입장은 도덕성의 기원은 자율성이 아니라 타율성이라는 주장에 나타나 있다. 그런데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율성의 개념은 이제까지의 개념과 구분되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윤리학에서 타율성의 개념은 자기의지에 따라 기꺼이 자율적으로 도덕적 행위를 하는 것과는 반대로, 남이 시켜서 마지못해 하는,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경우에도 법칙이나 규칙이 명령하기 때문에, 또는 賞罰에 따라 도덕적 행위를 하는 것으로 극복해야할 개념으로 인식되어왔다. 이와는 달리 레비나스의 경우 타율성은 자기 입법적, 자기 결정적, 자기책임에 대하여, 타인으로부터 오는, 타인의 요청을 수용하는, 타인에 대해 그리고 타인을 위해, 도덕적 책임을 지는 윤리적 주체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좀 더 설명하자면, 타인이 우리에게 요청하고 현현하는 윤리적 명령을 주체가 받아들이는 것이 타율성의 의미이다. 그렇기에 윤리적 주체는 타자에 사로잡힌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타율성의 윤리적 행위는 남이 나에게 외면적으로 억압적으로 행위를 강제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나의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하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한 상태, 타자의 불행을 돌보지 않았을 때, 나의 마음이 불안하여 상대방을 보살피게 되는 원리를 나타낸다. 그렇기에 레비나스는 주체의 가까움을 불안, 불면, 자리 없음, 불편, 타자의 가까움 등으로 모호하고 복잡하게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면 자율성의 이념은 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는 가를 타자윤리의 관점에서 살펴보자. 우리는 앞에서 자율성의 발현을 근본적으로 타자를 동일자로 환원하는 것으로 비판하였다. 자율성, 자유, 존재의 동일성을 확신하는 철학은 자유 그 자체가 정당화되어지고 자족한 것임을 전제한다. 이같은 자유를 실현하는 삶속에서 낯선 것들 -우리를 굴복시키는 자연 또는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 -은 장애가 된다. 자아의 자율성은 이들을 자아의 삶안으로 정복하고 통합시키고자 한다. 타인을 내 안에서, 나를 준거로 해서 판단하고, 그에게 다가갈 때, 경우에 따라서는 폭력이 뒤따를 수 있다. 따라서 여기에는 그 자체 비도덕성의 여지가 이미 내재되어 있다.
칸트가 자기 결정적인 모든 것, 자율성, 순수실천이성, 자유, 선의지, 의무감에서 나온 행위를 윤리학에 속한 것으로 보고, 칸트 류의 도덕교육론자들이 자유와 자율성을 최고의 도덕성의 발달 단계로 본 것과는 달리, 타자윤리는 초월적인 것과의 관계에 속한 것이 윤리학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초월적 타자성과의 접촉은 윤리적 접촉이다. 왜냐하면 자아와 타자의 관계는 타자를 자아로 환원하지 못하는 의무감으로서 즉 타자를 죽이지 말라는 것과 같이 주장되기 때문이다. 주체성이 다른 사람과의 접촉에서 형성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윤리학은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가까움에 의해 나에게 요구되는 것이다. 칸트가 도덕적 당위의 근원으로 자유를 발견한 곳에서 레비나스는 자유에 앞선 근원 즉 타자와의 만남을 발견한다.
타자와의 만남이 나의 자유에 의무를 부과한다.440) 윤리적 힘은 동일자와 타자의 차이, 총체성과 무한성의 차이로부터 생겨난다. 사회적 자아는 이같은 깨달음으로부터 발생하며, 사회적 의미에서 형성되는 나의 주체성은 타자에 대한 의무를 짊어진다.
우리가 타자의 존재를 열망하는 초월성으로 타자에게 다가갈 때, 타자는 열망의 대상일 뿐 나를 제약하는 사실성도 아니며, 나의 자유의 장애도 아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불완전성을 깨달으려면 우리 자신을 무한성의 이념, 완전성의 이념에 비추어 반성해 보아야 한다.441) 우리자신이 무한의 이념을 가지게 될 때, 우리는 타자를 열망하고 타자를 환영하게 된다. 우리가 타자를 환영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자유 그 자체에 대하여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임을 말한다. 여기서 자아는 타자에 부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자신을 도덕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442)
자유의지가 자의적일 수 있다는 것, 우리가 이같은 초급단계를 벗어나야 한다는 것은 철학자들이 오랫동안 확신해온 것이다. 그러나 자의성은 합리적 토대, 자유 그 자체의 정당화에 의지해왔다. 레비나스는 “자유의 자발성은 문제시되지 않고443), 단지 자유의 제한만이 비극이자 오점으로 여겨져 왔던 서구의 전통”을 문제삼는다. 자유는 스스로가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서만 문제로 놓인다. 현대정치이론들은 홉스이래로 사회질서를 자유의 정당성, 양도할 수 없는 권리로부터 연역하였다. 이에 대하여 페이프르작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자유에 관한 문제는 그것의 유한성으로 제약되어왔다. 그러므로 진정한 자유 즉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자유와 의지적이고 자의적인 또는 우발적인 의지간의 대립으로 한정되어왔다. 그것에 숨겨진 의도는 그것을 자기원인으로 만들어 의지의 유한성을 폐기하는 것이다. 이같은 문제에 기반한 철학은 자의적인 의지와 합리적인 의지를 보편적 의지로 화해시키는 것이다. 보편적 의지는 그 스스로 다양한 개체들이 관여하는 특수욕구로 다양화된다. 온전한 자유의 정당성, 가능한 한 그것의 무제한적 자율성은 의심되지 않았다. 이같은 자유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타인의 얼굴이다. 그것은 나를 바라보면서, 자율성의 불의를 드러낸다. 철학이 인간실존의 윤리적 측면에 대한 답변을 무시하고 유보하는 한, 그것은 자신을 존재론적 관점이나 자아적 관점으로 선고하는 것이다.” 444)
자의적 의지는 타자를 결정하게 되는 동일자로 된다. 이같은 회귀에서 타율성은 자율성으로 흡수되어진다. 이것은 동화 또는 통합에 상응한 것이다. 왜냐하면 동화나 통합에 의한 판단은 더 이상 외부로부터, 타자로부터 올 수 없기 때문이다. 인식의 최종적 행위는 자유이며, 모든 확실성은 고립된 자유의지의 작업이다. 인식의 자유로운 작업, 외재성의 자기화는 마주보기의 상황에서 불공정한 것으로 문제된다. 마주보기의 관계에서 자유는 자유에 선행하는 윤리적 명령, 나를 심판하는 심판관과 마주하게 된다.
레비나스는 타자의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서, 자아가 고립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비대칭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같이 근원적이고 아 프리오리한 관계는 주제화나 객관화의 인식작업에 선행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타인의 얼굴은 의지의 자의성이 아니라, 그것의 불의를 드러낸다. 나의 불의는 나 자신이 타자의 앞에 머리를 숙일 때 깨닫게 된다. 타자의 얼굴은 나에게 장애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평가하는 것으로 나에게 나타난다. 내가 나 자신이 불공정하다고 느낄 때, 나는 나 자신이 무한에 접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우리는 데카르트가 인식했던 것처럼, 나 자신의 불완전함을 알기 위해서, 완전의 이념인 무한의 이념을 가져야만 한다. 무한성은 나의 힘의 나이브한 권리를 문제삼으며, 생명체로서의 자발성을 문제삼는다. 445)
무한의 완전성에 기준 하여 자신을 평가하는 방법은 이론적 고려가 아니다. 그 안에서 자유는 자발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획득할 것이다. 자유는 자신이 실천에 있어서 침해적임을 느낄 때, 자신이 강도와 다름없음을 발견할 것이다. 자의적 소유는 그의 자발성에 의해 정당화될 수 없다. 자유 자체가 불의함을 아는 자유의 삶, 타율성안의 자유의 삶은 자신을 끝없이 반성하는 자유의 무한한 운동에 있다. 이것이 내면의 깊이가 비어지는 방법이다.
윤리적 의식 그 자체는 자유보다 좀 더 근본적인 운동의 구체적 형태로서, 무한성의 이념으로서 일어난다. 그것은 자유에 선행하는 구체적 형태이지만, 우리를 폭력이나 필연성 또는 숙명으로 인도하지 않는다. 양심, 열망, 본래적 경험의 차원들은 전통적으로 가장 근본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왔던 차원들에 선행하며, 그들을 초월한다. 그것은 데카르트의 확실성의 탐구에 의해서도, 헤겔의 개념에 의해서도, 훗설의 구성에 의해서도 보여지지 않았다.446)
레비나스에게서 윤리와 타율성의 책임성은 밀접히 연관된다. 윤리적 주관성은 그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위해 존재한다. 즉 주관성은 타자 중심적인 것이며, 개인을 참된 주체로 만들어 주는, 타자에게 대답할 수 있고 책임지는 존재이다. 레비나스는 주관성을 타자 중심적이고 윤리적인 용어로 기술함으로써 책임성을 주관성의 근본구조로 이해한다.447) 레비나스에게서 제일철학은 윤리학이며, 타율은 여기서 핵심적 개념이다. 레비나스의 제일철학은 탈존재론(meontology)이며, 그것은 존재론을 부정(그리스어의 me)하는 윤리이다. 타율성은 타자성으로서의 타자를 우선시함을 뜻하며, 타자란 윤리적인 것의 구체적인 예로 보고 있다. 이 점에서 ‘타자와의 관계를 존재론에 종속시키는 하이데거에 근본적으로 반대’한다. 하이데거의 실존적 성실성과 불성실이라는 존재론적 도식이 윤리적 관심을 충족시키지 못한다고 보고, 윤리의 의미는 자기중심적인 몰입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관심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본 것이다. 타자성은 책임윤리의 터전이고, 여기에서 타율의 의미, 타자성으로서의 당신이 발견된 것이다. 이것은 사회철학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고까지 평가된다.448)
윤리적인 것은 필연적으로 타자 중심적 혹은 자기초월적일 수밖에 없다. 타자중심성 또는 자기초월을 통해서만 타인은 제2의 나(alter ego)가 아니라 자기보다 앞선다는 것을 인식하는 윤리가 가능해진다. 윤리적인 것은 그 중심이 다른 곳 혹은 달리 있는 자아 내지 주체성에 대한 관념이다. 윤리적 자아는 책임지는 자아이다. 현대의 많은 윤리사상에서 타자중심성이 활기를 띨 수 없게 되면서, 책임성도 사소한 것으로 남게 되었다.
레비나스에게서 당신이나 우리는 개별적 나의 복수적 집합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아중심성은 윤리적인 것이 될 수 없는데, 그것은 실로 윤리적인 것을 말살하고 지워버리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현존 즉 타자성을 통해서만 윤리는 가능하다. 왜냐하면 윤리적인 것은 자기몰입이 아니라 자기초월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복수성은 숫자의 많음이 아니라 타인의 근본적인 타자성에 근거한다. 타자성을 고양시키는 윤리에서 책임성은 자유의 부정이 아니라 자유에 앞서는 것이다. 책임과 타자중심의 관계는 자유와 자아중심성의 관계와 같다. 윤리의 근원을 책임으로 보는 레비나스에게 주체성은 그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자를 위해서 긍정된다. 주체성은 타율적인 것으로 존재하게 된다. 그래서 나를 한 개인으로서 나로 만드는 것은 타인에 대한 회피할 수 없는, 부인할 수 없는 응답가능성이다. 449)
2. 피교육자의 정체성으로서 ‘倫理的 自我’의 형성
1) 피교육자의 자기이해와 정체성의 관계
오늘날 도덕교육이 짊어져야 할 과제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중의 하나는 청소년기의 정체성 형성에 있어서, 윤리적 자아로서의 정체성 형성을 확립하도록 돕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청소년기는 인생의 어느 시기보다 삶의 의미나 인간의 의미에 관한 본원적 물음을 묻게되는 시기이다. 그래서 에릭슨(E. H. Erikson)은 청소년기의 발달과제를 정체성 형성으로 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셀러(Max Schler)가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450) 어느 시대에 있어서도 사람의 본질과 기원에 관한 여러 가지 견해가 우리시대보다 더 불확실하고 애매하고 다양한 적은 없었다. 오늘날 인류는 인류학, 생리학, 심리학, 의학, 사회학, 생물학, 정신분석학 등을 통해 사람에 관한 지식을 그 어느 시대보다도 많이 가지고 있다. 현대인은 그 많은 이론적 지식들로 말미암아 인간에 대해 더욱 더 혼란스럽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인간존재와 인간의 본질, 나에 관한 물음을 중지할 수 없는 것은 사람의 자기이해가 곧 삶의 바탕을 이루며, 삶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사람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우리 자신을 형성해 가는 내용이 달라지고, 인간이해에 준해서 자신을 형성해간다. 그렇기에 란트만은 ‘사람은 인식에 의해서 변화되는 유일한 존재자이다’고 말한다.451) 사람의 자기이해는 자기형성의 문제와 직접 관련된다. 철학적 인간학에 의하면, 사람은 삶의 주체로 삶의 창조자이며, 동시에 사회 문화에 의해 형성되는 삶의 피조물이다. 사람은 자기자신을 형성하는 과제를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존재이며, 따라서 사람은 자기자신에 대하여 묻고 자기자신을 밝힌다. 사람은 어떻게 자기를 형성해 가야 할 것인가를 자기에게 말해주는 자기이해를 조정자로 삼아야 한다. 그래서 플라톤은 사람은 자신의 삶의 모범을 선택해야만 한다고 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은 보다 더 좋은 것을 ‘먼저 택한다’고 말하고, 괴테는 ‘사람은 구별하고 선택하고, 방향을 취한다’고 했다. 452)
이같은 글들은 모두 인간의 자기이해가 인간의 자기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다. 이것은 청소년의 자기이해, 인간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청소년기의 정체성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이같은 상황에서 인간을 유아론적 시각에서 이해하고, 인간의 정체성에 있어서 타인과의 관계를 배제한 채 논의되는 윤리이론들은 필연적으로 청소년들의 인간이해에 왜곡을 낳고, 청소년의 자아형성에 악영향을 끼질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 나를 보는 시각에 따라 나의 자아형성에 영향을 받는 것에 미루어 볼 때, 내가 나를 어떻게 이해하고 구성하느냐가 자아의 정체성 형성에 있어서 결정적 영향을 받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청소년기 윤리적 자아로서 자신에 대한 도덕적 자기이해가 윤리적 자아의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도덕적 자기이해란 도덕적 인격인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에서 현재 자기자신이 어떤 인격상태에 있으며, 장차 어떤 모습의 도덕인이 되고자 하는지에 관한 인식을 바르게 갖는 것을 뜻한다. 사람이 도덕적 삶을 제대로 영위하기 위해서는 윤리적 자아가 먼저 숙고되어야 한다. 자기 자신이 도덕적으로 어떤 존재인지 아는 일, 도덕적 자기이해, 도덕적 자아인식은 도덕적 인격의 성취에 논리적으로 선행하는 전제조건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도덕적 자기이해는 가장 얻기 힘든 도덕적 앎이지만 동시에 인격적 성장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가 되고 있다. 453)
우리는 이같은 맥락에서도 청소년기의 자아형성에 있어서 청소년의 자기이해가 청소년의 자아정체성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과연 청소년의 정체성 형성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바람직한 인간의 상, 인간본질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노력하였는가를 반성해 보아야 한다. 이같은 윤리적 자아의 모범적 인간의 요청에 있어서 누구보다도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은 학교이고, 학교 안에서도 특히 학생들의 인성교육을 책임지고 있는 도덕?윤리과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도덕?윤리과 교육의 책무이자 존재이유이기도 하다.
이같은 입장은 이미 도덕?윤리학계에도 광범위하게 인식되고 있다. 현행 도덕?윤리학계는 도덕?윤리과 교육의 정당화에 있어서, 개인적 요구수준454)으로 정체성과 윤리적 인식체계의 확립을 들고 있다. 초?중등학교 학생들은 개인적으로 아동기와 청소년기에 해당하며,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성숙해가며, 개인의 정체성을 확립해 가는 시기이다. 에릭슨(E. H. Erikson)이 청소년기의 특징은 종합적 자아상 형성으로 보고 있고, 리코나가 타인과의 일치(interpersonal conformity)로 보고 있듯이, 도덕?윤리과에서는 나는 누구이며,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다룸으로써, 아동과 청소년기에 가질 수 있는 가장 기본적 삶의 의문점에 대한 물음을 공유하는데서 도덕? 윤리과 교과활동의 의미를 찾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문제의식에도 불구하고 도덕?윤리과의 역할이 많은 문제점에 봉착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청소년들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바람직한 인간상이 정립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하여 도덕과 ? 윤리과의 목표자체가 흔들리고 있음을 우려한다.455) 더욱이 학교교육이 실천위주의 인성교육을 부르짖고 있지만456), 바람직한 인성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 미약한 실정임을 지적하고도 있다.
이와 같이, 청소년의 자아정체성 형성에 있어서 윤리적 자아를 형성하도록 윤리교육이 도와야 함을 문제삼는 이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덕과 교과 교육에 있어서, 윤리적 자아의 개념이나 윤리적 자아형성을 위한 도덕교육의 이론적 토대 구축은 상대적으로 소홀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 근본적인 이유로는 도덕과 교육의 배경이 되고 있는 윤리학에 있어서까지도 인간의 이해, 인간관은 전통적인 서구의 철학적 윤리학에 영향을 받아 철저히 합리적 자아, 이성적 자아 내지는 자율적 자아관, 심지어 이들을 극단적으로 왜곡?축소하여 변형시킨 이기적 자아를 전제로 하는 윤리이론이 설득력 있는 이론으로 수용되고 있는 점이다. 합리적이고 이성적 인간관을 수용하고 있는 도덕교육의 접근방법 중에서도 대표적 이론은 콜버그 류의 도덕성 발달이론이다. 결국 현대사회에서 대부분의 청소년들은 무의식중에 왜곡된 인간이해와 자아성, 인간상을 형성하게 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제 대부분의 청소년들은 인간을 유아론적인 이기적인 존재, 자아실현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과 방법도 불사하는 출세 지향적 인간형을 자아상으로 그리고 있다. 이같은 자아실현의 영역에서 타인은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게 된다. 이같은 관점은 자아 중심적 일원론의 동어 반복적 구조로서, 이기주의와 경제가 지배하는 영역이다. 자아 중심적 일원론은 전체(Totality)의 과정으로 나타나고, 이 과정에서 전체로 통합되어질 수 없는 차이, 다름은 철저히 무시되거나 간과되고, 억압되어진다. 레비나스는 자아론적 전체성으로 통합되거나 동화될 수 없는 타자의 다름, 타자성, 무한성의 개념에 대해서 설명한다. 나를 바라보는 너로서, 타자(Autrui)는 동시에 나-너 관계를 초월한 제3자의 얼굴이자 신의 얼굴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의미의 타자는 그 자신 안에 이미 무한의 이념을 내포하고 있기에, 동일자는 타자를 일원론적 주체의 의식 안으로 동화시키거나 통합할 수 없다. 이제 도덕 ?윤리과에서는 청소년의 바람직한 인성형성에 있어서 자아와 타인의 올바른 관계를 정립하는 계기를 가져야 한다.
2) 피교육자의 ‘윤리적 자아’의 확립
앞의 논의에서 논자는 도덕·윤리의 교육에서 피교육자에게 윤리적으로 바람직한 자아상을 제공해주어야할 과제를 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올바른 ‘윤리적 자아상’을 제시하지 못하고, 오히려 경제적 의미로 제한된 ‘합리적 인간형’의 범위에 머물고 있음을 비판하였다. 이같은 문제의식으로부터 경제효율성에 민감한 ‘합리적 인간형’의 범주를 벗어나 베풀 줄 알고, 도와줄 줄 아는 윤리적 자아상으로서 레비나스 타자윤리에서 제시하는 ‘윤리적 자아’의 의미를 종합적으로 살펴본다.
레비나스에게서 윤리적 주체는 합리적 주체의 능동성과는 다른 차원의 주체로 그려지고 있다. 이 점이 레비나스를 여타의 철학자나 윤리학자와 뚜렷하게 구분시켜주는 점이다. 앞의 논의에서 보여주었듯이 서구의 철학적 윤리학은 주체의 능동성과 자율성을 전제로 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자유를 우선하는 서구적 전통은 권리주체의 우선성과 자기입법의 우선성을 낳았지만, 이같은 자유의 우선성이 초래할 수 있는 자의성에 대해서는 침묵하여 왔고, 자유가 제약받는 경우만을 문제삼아 왔다. 심지어 푸코의 윤리적 주체457)에서 능동성과 자율성의 상실은 존재론적 윤리의 질서에 어긋나는 것으로 된다. 존재론적 주체윤리의 관점은 자기와의 관계에서는 정념에 대한 이성의 통제를 의미하지만, 자아와 타인과의 관계에서는 권력관계로 전환된다. 주체적 자아가 타인에 대하여 능동성과 자율성을 띠는 경우에 있어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관계유형은 무엇인가? 이같은 논리의 맥락은 필연적으로 적대적 인간관계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그러나 타인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양심에서 나의 자유는 문제되며, 자유에 앞서 타인에게 응답하는 도덕적 책임을 느끼게 된다. 타인에 대한 올바른 태도는 그를 나의 인지구조로 통합시키거나, 나의 의식의 지향적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것이 아니라, 타자성, 다름, 무한을 현현하는 타인을 열망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레비나스가 나와 타자 사이의 윤리적 관계를 운동, 초월성의 형이상학적 움직임으로 표현하듯이, 타자는 경제의 이기주의가 지배하는 필요와 욕구의 대상이 아니라 끝없는 형이상학적 열망의 대상이다.
이같이 타자를 보는 시각의 전환은 인간까지도 경제적 효용성의 도구로 보는 현대인들의 도구적 합리성에 대한 반성이 될 수 있고, 추상적 관념적 형식적 윤리의 관념에만 사로잡혀 인간을 인간으로서 사랑할 줄 모르는 이론과 실천의 자기 분열적 윤리이론으로부터 전환점이 될 것이다. 이같은 주장들은 귀기울이기를 원하지 않는 자가 단순히 외면할 수 있는 독백이 아니다. 레비나스는 인간이 타인에 대해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하는 윤리적 존재일 수밖에 없는 근거를 정초하는 것을 자신의 철학적 과제로 삼고 있다.
현대 사상의 흐름에 있어서 극단적인 개인의 자율성은 극단적 구조 결정론에 의해 비판되기도 하고 일부는 탈중심화, 탈주체화, 주체의 완전분해로까지 치닫고 있다. 레비나스의 경우 철저히 자아론적 의식철학은 비판하지만, 그렇다고 개인의 의지의 개별성을 무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의지의 개별성과 단독성이야말로 역사의 심판 앞에 사죄하고, 타인의 부름에 응답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설명한다. 이와 같은 개별성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은 인간이 지닌 내면성이다.
그러므로 타자윤리는 인간의 내면성을 통해 자아의 자기성을 확립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주체는 세계와의 관계에서 인식론적 관계를 맺기 이전에 근원적으로 향유적 관계를 맺는다. 그것은 인간이 세계에 대해 합리적 사유의 대상으로 삼는 이성적 존재이기에 앞서, 세계의 삶의 환경에 침수되고 누리고 향유하면서 사는 감성적 존재임을 말하는 것이다. 근원적으로 감성적 존재이기에 인간은 배고프고, 상처입고, 영향을 받고, 포만감을 느끼고 향유하는 감각작용의 영향을 받는 수동성의 특성을 나타내는 존재이다. 이같은 인간의 감성과 향유의 특성은 인간의 내면성을 형성하게 되며, 내일을 걱정하는 인간은 세계 속에서 노동을 통하여 자기화하는 소유의 경제를 형성하고 주거를 마련한다. 세계의 주거 안에서 인간은 친밀하고 따스하면서 안온한 집을 마련하며, 자아의 자기성은 독립과 분리를 형성한다.
향유적 자아의 자기성은 자아의 이기주의가 지배하고, 경제의 이기주의가 지배하는 영역이다. 홀로 존재하는 獨居의 자아에게는 이같은 경향이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인간의 세계내존재가 이미 독거의 형태가 아니라면, 이같은 소유적 경향은 문제될 수밖에 없다. 타인의 존재는 나의 이기주의와 소유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등장한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타인이 등장하는 방식은 현현(Epiphany)이다. 현현은 나타남, 보여짐으로 타인은 주체의 능동성에 기인한 의식의 지향적 대상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 나의 감성에 작용하면서, 호소하면서, 계시하면서, 나타나는 것, 출현하는 것이다. 인간이 이성의 작용이전에 이미 감성의 작용에 의해 영향받는다는 사실은 우리가 타인의 현현을 외면할 수 없는 수용적 구조를 보여준다. 감성은 직접적으로 타자에 접하고 있는 부분이다. 인간이 근원적으로 감성적인 한, 인간은 능동적 오성의 작용이전에 수동적으로 영향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이것은 우리가 우물가에 어린이가 빠지려 할 때, 어떤 합리적 추론의 이성작용 이전에, 능동적 의식이 어린이를 의식의 지향적 대상으로 삼아 분석의 대상으로 삼기 이전에, 어린이가 부닥치게 되는 위험한 사태의 절박성으로부터 우리가 달려가 주의를 기울이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이다. 그래서 우리는 감성의 주체를 강조하는 레비나스의 윤리학을 정서의 윤리학, 타인의 호소에 귀기울이는 타자의 윤리학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타자윤리에서 타인의 얼굴을 마주한다는 대면의 윤리는 구체성의 윤리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칸트, 헤겔, 하이데거 등 기존 윤리학의 한계로 지적되는 것은 이들이 중립의 윤리라는 것이다. 중립의 윤리학이란 윤리학이 무인격적 관계로 환원되어 구체적 얼굴로 나타나는 인간에 대한 윤리이기보다는 보편적 인간, 인간의 이념 일반에로 향하게 되어, 구체성과 실천으로부터 괴리되는 윤리학을 의미한다. 이와는 달리 감성과 얼굴로 나타나는 정서의 윤리학에서, 윤리는 배고픈 사람에게 빵을 나눠주고, 목마른 이에게 물을 주는 구체적인 베풂의 윤리, 실천윤리로 나타난다.
그런데 구체성에서 의미하는 타인의 얼굴은 단순히 나의 앞의 너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나를 바라보는 너는 바로 제3자와의 관계까지도 나타낸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존재는 존재 그 자체로 내 앞의 타자로 나와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나-너 관계로부터 제3자에게로 관계 범위가 확대되는 이치이며, 신에 대한 사랑이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구현될 수밖에 없고, 이웃에 대한 사람이 이방인에 대한 사랑으로, 종파와 인종이 다른 제 3자에게로, 지구촌의 굶주리는 이들에게로, 부당하게 대우받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로, 전쟁 속에 헤매는 난민들과의 관계로 확대되는 이치이다.
이제 자아의 주체성은 자아를 위한 주체성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주체성으로 전환된다. 윤리적 자아의 크기는 나의 자아 안에 타인의 요청과 호소를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타인의 자리에 비례한다. 그러므로 윤리적 주체의 주체성은 에고(ego)가 아니라, 타자에 의해 지칭되는 대명사 ‘me’에 있다. ‘me’는 윤리적 자아의 특성을 나타낸다. ‘me’는 타인에게 불리움을 받고 지칭되는 의미로서, 대타적 자아로서의 주체를 의미한다. 또한 대타적 존재로서의 감성은 “다른 이의 필요에 배려함”으로서, 즉 주는 것으로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피와 살을 가진 몸의 주체, 감성의 주체에서 준다는 것은 나를 희생함, 나를 찢어냄의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내 손의 숟가락을 권하는 것과 같은 것, 콩 한쪽도 함께 나누어 먹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대문을 열어 놓는 것, 타인을 환영하는 것이다. 이같은 윤리적 자아의 자아성은 어떤 의식의 운동에 의해 현재화하는 순환의 중심지가 아니라 자기 안에 편안히 휴식할 수 없는 가까움, 자아의 수동성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윤리적 주체로서의 수동성은 모든 수동성에 앞선 수동성, 대부에 앞선 부채, 무질서, 수동성의 인내라고 부른다. 이같은 수동성은 타자의 요청, 타자가 요구하는 윤리적 짐을 진 자가 그 무게로 고통받으면서도 도덕적 짐을 부과하는 타인에게 응답하는 상황이다. 이같은 고통의 짐, 윤리적 의무를 짊어지는 고통은 타자로부터 가해지는 고통으로, 여기에 타자를 위함의 의미가 나타난다.
윤리적 주체의 핵심은 타자가 부여하는 윤리적 요청으로 고통받는 상처 속에서도, 박해자에 대하여 책임을 짊어지는 것에 있다. 이것은 화재 속의 시민을 보고, 자신의 희생을 무릅쓰고 구조하는 사람들의 행위에서도 잘 나타난다. 사람들이 불길 속에서 구조를 요청하는 호소는 듣고 있는 나에게 부담이 된다. 그러므로 레비나스는 이같은 상황을 타자에 사로잡힘으로 표현한다. 그것은 나에게 부담이고 고통이기에 상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같은 고통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타자의 윤리적 요청을 받아들이는 것은 사실상 나의 희생을 감수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기적 자아로부터 윤리적 주체로 회귀하면 할수록, 우리의 자아는 점점 더 우리 자신을 책임져야할 존재로 발견하게 된다. 동일자안의 타자는 책임을 통해서 윤리적 짐을 짊어지는 타자에 대한 주체의 대속(Substitution)을 의미한다. 책임과 대속에서 윤리적 자아는 그 누구로도 대신할 수 없는 주체의 고유성, 개별성, 단독자로 된다.
3. 他者受容의 다원적 관계
앞의 논의에서 살펴보았듯이, 개인적 수준에서 요구되는 도덕?윤리과의 책무는 아동들이 바람직한 자아상으로 ‘윤리적 자아’의 정체성을 형성하도록 돕는 것이었다. 우리는 아동의 윤리적 자아형성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레비나스가 제시하는 윤리적 주체성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그러면 사회적 수준에서 요구되는 도덕?윤리과의 과제와 구체적 내용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것을 타자윤리의 귀결인 타자의 다름과 차이를 수용하는 타자수용의 다원적 원리를 인간 관계에 적용시키는 것이라고 보고, 그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여기에서 구체적으로 ①가정생활에서의 타자를 수용하는 부모와 자식, 형제 자매의 관계와 ②학교생활에서 타자를 수용하는 친구간 관계와 교사-학생간의 관계 ③사회생활에서 타자를 수용하는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과의 관계 ④국제관계에서 타자를 수용하는 국가간의 다원적 관계형태를 살펴본다.
1) 가정생활에서 타자수용: 부모와 자녀, 형제?자매의 관계
유교전통의 영향을 받은 우리사회는 전통적으로 가정을 삶의 기초와 뿌리인 것으로 모든 인간관계의 출발점으로 삼아왔다. 우리의 전통은 가정 안에서 이루어지는 가족애를 모든 사랑의 근원이자 이웃사랑으로 향해 가는 단초로 소중히 여겨 왔다.458)
그런데 오늘날 가족은 점차로 파괴되어 가고 있다. 왜냐하면 이 시대에 팽배해 있는 개인주의와 황금만능주의가 가정의 질서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합리적인 것만을 정당시하는 행동과학자들과 타협하다보니 인격공동체로서의 가정의 神聖性이 파괴되고 가정도 이해가 얽힌 상업적 계약에 불과한 것이 되어 버리고, 종래에는 인간 모두가 편히 쉴 수 있는 아늑한 보금자리로부터 쫓겨나서 안정감을 상실하게 되었다. 459) 페스탈로치는 자본주의의 초창기에, 산업화가 농촌에까지 침투하여 가정을 파괴하는 것을 보고 크게 우려하여 이를 ‘안방의 약탈’(Wohnstubenraub)이라고 했는데, 이 말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460)
우리는 최근에 급속하게 확산되는 사회구조의 변화와 무반성적으로 밀려들어온 서구의 개인주의나 자유주의의 물결 속에서 가족의 의미를 극단적으로 축소시키게 되고, 점차 그 의미를 상실해 가고 있다. 그래서 가족 안의 관계를 다차원적 인간관계로 보는 것이 아니라, 부부간의 관계 중심으로 축소시켜 가고 있으며, 공동의 가정살림을 꾸려나간다는 개념도 희박해져 가고 있다. 우리는 이같은 사태에서 무엇이 문제일 수 있는가를 타자윤리와 도덕교육을 연계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타자윤리에서 가정은 가족 안에서의 자연적 사랑(eros)과 이같은 사랑의 결실인 출산에서 중요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래서 가족 안에서의 인간관계를 푸코가 주장하는 것처럼 부모와 자식의 대칭적 관계에서 형성되는 감시와 통제의 관계로 보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에로스의 출산을 통해 가능해지는 가족애를 중시하는 레비나스의 입장과 가족을 시민사회와 국가로 이행하기 위한 전 단계로 보는 헤겔의 입장을 비교해 볼 수 있다. 가족에서 출산의 존재론적 우선성을 주장하는 것은 헤겔의 입장에 정면으로 반대된다. 헤겔 체계에서 가족은 보편성을 지향하는 역사의식의 변증법적 전개과정에서 시민사회와 국가라는 다음단계로 나가기 위한 전 단계에 불과하다. 그러나 레비나스에게서 가족은 근원적 우선성을 지닌다.
여기에서 우리는 가족관계를 통해 인간관계의 유대를 발견하는 레비나스의 통찰이 동양의 사유방식과 유사하다는 점을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더욱이 그가 이같은 가족애적 관계야말로 오늘날 도덕성의 타락에서 善性을 회복하는 계기로 보는 점은 우리가 계속 음미하면서 정교화해 가야할 문제이다. 왜냐하면 가족이야말로 모든 도덕성의 발단이고 뿌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덕?윤리과에서 아동과 청소년들에게 가족의 의미를 어떻게 교육시킬 수 있겠는가? 이 문제에서 우리가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자들이 뿌리로부터 단절된 원자적 개인이해가 가져오게 될 폐해를 상기할 때, 타자성의 윤리는 더욱더 시사하는 바가 크다.
타자윤리에서 논의되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자연적 사랑이 출산의 의미로 연결되는 것, 출산을 통해 무한한 타자와 연결되는 계기 등을 살펴보는 것은 청소년들에게 많은 의미를 전달해 준다. 우선 타자윤리를 통해서 우리는 ‘나’라는 존재가 단순히 하늘에서 떨어진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부모에 의해 선임되어진 존재이자, 아버지의 삶을 미래로 연장시키면서 유한한 자아에 무한성을 부여하는 무한한 타자성을 지닌 고유하고 특별한 존재임을 깨닫도록 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우리는 타자윤리의 이같은 내용이 우리의 전통사상은 물론이고 동시에 그리스도교의 가족공동체의 의미를 溫故知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타자윤리는 가족 안에서 부모와 자식의 유대와 동시에 자아와 타자로서의 분리를 동시에 함축하고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라고 해서, 형이나 누나라고 해서, 어린 타자에게 일방적으로 억압하고 부리는 관계는 타자윤리의 관점에서는 자기-동일화의 행위인 것으로 폭력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다. 가족관계에서도 아버지의 타자성으로서 아버지의 아버지임이 존중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들의 고유한 타자성으로서의 아들의 아들임, 형의 형임과 동시에 아우의 아우임의 다름과 차이가 존중받는 다원적 관계가 고려되고 있다. 이같은 아버지와 아들의 고유한 유대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이를 보존하면서 형성하게 되는 덕목은 慈愛와 孝이다. 그리고 형제 자매간에 요구되는 덕목은 우애이다.
그렇다면 도덕교육에서 자애와 효의 덕목을 함유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의 구체적 형태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는 출세지향의 하나의 가치를 향해 자식들에게 법대와 의대를 강요하던 부모와 부모자신이 하지 못한 한을 풀기 위해 적성과 자질과 무관하게 획일적이고 일방적인 지식위주의 공부를 강요하는 부모로부터, 자녀의 특성과 재능을 고려하여 자녀에게 적절한 길을 세심하게 살펴주는 부모의 모습에서 부모와 자녀 사이에 형성되는 타자성을 보존하는 다원적 관계를 찾아 볼 수 있다.
이같이 타자성이 보존되는 타자수용의 원리는 아들의 태도에도 요구된다. 최근에 자녀들의 부모에 대한 태도는 부모를 단순히 자신의 양육의 의무를 지고 희생하여 마땅한 존재로 보는 등 부모에 대한 태도에까지 경제논리를 끌어들이는 경우461)가 비일비재하다. 그래서 가정에서 아버지를 단순히 ‘돈버는 기계’정도로 도구화시켜버리는 극단적 경우도 생겨난다. 이에 대하여 타자윤리의 관점에서는 아버지가 아들의 절대적 다름을 인정해 주어야 하듯이, 아들 역시 아버지의 타자로서의 타자성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고 볼 수 있다. 자녀들이 부모의 타자성을 인정한다고 했을 때, 구체적인 내용으로는 부모의 가치관이나 인생관이 자기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세대차를 논하기 전에 세대간 가치관의 차이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관용적 태도 등을 담을 수 있다. 요컨대 자녀가 부모로부터 다름과 차이를 존중받는 것처럼, 자녀도 부모세대의 다름과 차이를 인정해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부모와 자녀, 형제?자매 사이에도 서로에 대하여 타자성을 존중하는 관계, 타자수용의 원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2) 학교생활에서 타자수용: 교사-학생, 급우간 관계
오늘날 가족의 핵가족화는 대가족 안에서 아동들이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었던 사람사이에 갖추어야 할 기본예절이나 소양을 배울 기회를 주지 않는다. 그래서 할아버지와 아버지, 아버지와 아들, 형과 아우,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손자로 맺어지는 인간관계의 기본예절과 덕목을 보고 배우는 것은 고사하고,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도 어떤 차이의 질서를 찾기 어렵다. 또한 부모와 자녀간에 갖추어야 할 기본소양과 덕목을 갖추지 못한 청소년들은 가정 밖에서도 어른이나 선후배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갖추어야 할지를 모르고,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것이 요즘의 현실이다. 결국 청소년에 대한 기본소양교육은 학교의 몫이 된다.
이같은 세태로부터 학교 안에서 학생들의 도덕윤리교육을 전담하는 도덕?윤리과의 부담과 책임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이전에 가족 안에서 고유하게 행해지던 기본적 인간교육에 대해서도 도덕?윤리과에서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같은 시대적 요청에서 특히 타자윤리가 시사해 주는 것은 무엇인가? 이 문제는 특히 교사자신의 고유한 역할과 교사와 학생의 관계, 그리고 학생과 학생의 관계와 연관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삐아제와 콜버그는 도덕교육에서 교사의 역할을 단순히 가치개발의 ‘보조자’내지는 ‘촉진자’정도로 규정하는 반면, 뒤르케임은 교사란 사회적 가치의 적극적인 전수자와 옹호자로 규정하고 있다.462) 그러면 타자윤리에서 교사는 어떤 존재인가? 레비나스는 교사의 의미를 무한성을 계시해주는 스승으로 보고 있다. 이같은 입장은 소크라테스의 ‘상기설’(reminiscence)을 비판하는 그의 입장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소크라테스의 도덕교육 및 교육의 원리는 ‘상기설’에 토대를 두고 있다. 상기설에 대하여 레비나스는 자기에게로 돌아가는, 즉 자기-동일성의 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으로 비판한다. 레비나스에 있어, 교사는 상기설에서처럼 학생들 안에, 즉 이미 자아 안에 내재되어 있는 지식을 일깨워주는 보조자인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아동들에게 무한성의 이념을 심어주는 존재로, 아동 안에 있지 않은 외재성을 계시해주는 존재이다. 즉 교사는 학생에게 무한의 이념을 보여주는 존재이다.
우리는 이제 교사와 학생간에 형성되는 윤리적 관계란 어떤 형태이어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물론 우리는 교사-학생의 관계 역시 자아와 타자사이의 관계 안에서 생각해 볼 수 있으며, 이를 구체적으로 다원적 인간관계로 말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주도하던 푸코는 교사와 학생의 관계를 지식과 권력의 관계 안에서 설명한다. 지식-권력의 패러다임463)에 의하면, 학교의 위계와 조직?구조들은 모두 최소비용의 효율성으로 감시와 통제를 수행할 수 있는 판옵티콘의 구조를 원형으로 하고 있다. 이같은 지적은 한국교육의 현주소이기도 하다. 한국교육은 청소년들 모두가 대입의 관문을 향해 일렬로 줄 세워져 있다. 이들은 大入이라는 하나의 명분에 의해 모든 것이 통제되고 규제된다. 교실은 항상 반듯하게 일렬로 정돈되어 있고, 반장은 항상 같은 급우지간에도 담임이상의 권위를 휘두른다. 만일 이같은 입시를 향한 대열에서 조금이라도 한눈을 파는 순간 학생들은 학교전체로부터 배제되고 문제아로 낙인찍힌다. 일단 대열로부터 배제되어진 학생이 다시 학교생활로 복귀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같이 출구 없는 상황에서 타자윤리는 어떤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가?
우리는 이 문제에서 교사에게서 학생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앞의 논의에서 다루었듯이, 부모가 자녀에 대해 자녀의 타자성을 존중해주어야 하듯이, 교사는 학생에 대해 학생의 다름과 차이를 섬세하게 살피고 인정해 주어야 한다. 학생은 교사에게 맡겨진 관리?통제의 대상이 아니라, 교사가 보살피고 계도해 주어야 할 무한한 타자성을 지닌 존재이다. 자녀가 부모를 미래의 시간과 묶어주는 존재이듯이, 학생들은 교사에게 미래의 시간과 관계 맺도록 해주는 존재이다. 즉 교사는 단순한 지식전달자나 학생관리자가 아니며, 또한 학생들에게 일방적이고 억압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존재인 것도 아니다. 우리말에 靑出於藍이란 말이 있듯이, 오히려 교사는 학생들의 무한한 타자성을 통해 그 자신이 거듭남을 발견할 수 있다. 아버지가 아들의 시간을 통해 불연속적 연속성으로 재개되고 부활하고 거듭나듯이, 교사는 학생을 통해, 재개되고 부활하고, 거듭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선생의 지성과 인격은 학생을 통해 불연속적일지라도 연속적으로 새로워지고, 미래에까지 연장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사와 아동의 관계는 서로 서로에게 무한한 열망의 대상이 되는 윤리적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아동들 개개인이 교사의 동일성안으로 들어올 수 없는 무한한 타자성의 의미를 지닌 존재임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 요컨대 교사는 아동의 절대적 타자성을 인정하고 존중해 주는 동시에 그들 개개인의 차이와 개성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 교사가 아동의 차이를 인정해 줄 때, 아동들은 이제 모두가 자기의 고유성을 지닌 존재로 구분되어, 인정받을 수 있다. 그렇지 않고, 학생들이 성적순에 의해 일제히 점수 매겨지는 관계는, 아동들을 익명적 존재로 떨어뜨리고, 교사와 아동의 관계도 얼굴이 없는 관계, 윤리가 부재한 상태로 전락한다. 이같은 전근대적 사고방식은 타자성의 윤리에도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국제화시대의 시대적 요구에도 맞지 않는다. 세계화와 국제화 시대의 변화된 세계상에서 요구되는 교육은 이미 학교교육에서 성적순으로 매겨지는 내용들과는 괴리가 있기 때문이다.464)
그러면 이제 도덕윤리과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 우리는 도덕?윤리과는 학생들에게 비상대주의적인 다원적 가치의 개념을 이해시켜야 한다고 본다. 우리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때는 두 가지 문제에 부닥친다. ① 도덕수업에서 교사가 가치를 엄격히 위계화하고 절대화하고 보편화해서 일원론적 가치를 가르치는 문제가 있다. 이 경우 누구를 그리고 무엇을 기준으로 가치의 위계와 서열을 매길 것인가의 문제가 제기된다. 이 경우 자기의 가치에 부합하지 않은 타자와 화해할 방법이 없다. ② 또 다른 방법은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는 또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그래서 결국 어느 것도 옳은 것이 없고 단지 자의적 주관과 상대주의적 가치판단을 조장하는 경우이다. 이것은 다원성을 존중하는 장점이 아니라 가치회의주의와 허무주의에로 가는 지름길이다.
그러면 타자윤리가 제시하는 내용은 무엇인가? 우리는 비상대주의적 다원적 가치를 우리의 전통윤리와 연결 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오륜은 부부간의 유별과 부자간에 친애와 친구간의 신의와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한다. 만일 우리가 인간의 근본이 孝라고 해서, 친구간에도 형제간에도 효의 가치가 절대적 적절성을 가진다고 효를 중심으로 가치서열을 매긴다면 아주 이상한 적용이 된다. 마찬가지로 타자윤리는 하나의 위계적 가치질서나 특정가치의 획일적 적용이 가져오는 劃一主義를 경계한다. 왜냐하면 이같은 획일주의는 결국 유연성을 상실한 채 경직되고 폭력을 동반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타자윤리가 시사하는 바는 크다. 레비나스의 타자윤리는 차이를 강조하지만 자의적 상대성으로 나가지 않고, 인간의 근원적 우애와 비대칭성에 근거한 보편성을 강조하지만 획일성으로 나가지 않는다. 그래서 남녀간의 자연적 사랑은 상대방을 자기의 소유로 대상화하지 않고, 연인의 신비를 인정하면서 서로의 차이를 존중해주는 관계로,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권력과 통제의 대상이 아니라 효와 자애의 관계이자 불연속적 연속성의 계기로 중시하며, 형제간에는 특수한 우애적 관계인 동시에 평등한 관계로, 그리고 이와 같은 형제애적 우애를 확대한 사회적 연대성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이 레비나스의 타자윤리에서 제시하는 가치덕목의 구체적 교육방법으로 핵가족화로 인해 형제?자매를 갖지 못한 학생들을 선후배간에 의형제나 의자매를 맺어주어 우애의 돈독함을 맛보도록 해 줄 수 있다. 이같은 형제애는 유아론적 이기성에 머물러 있는 청소년들에게 새로운 사회성 형성의 계기가 될 것이다.
3) 사회생활에서의 타자수용: 아는 사람 또는 모르는 사람과의 관계
사회생활에서의 인간관계는 크게 아는 사람과의 관계와 모르는 사람과의 관계로 구분된다. 한국인의 경우 가족애적 가치관이 비판받는 이유중의 하나는 가족중심주의, 혈연중심주의, 연고주의, 지역주의 등이다. 이같은 비판은 우리가 지닌 배타적 정서를 잘 대변해준다. 이같은 배타적 정서는 사돈의 팔촌일지라도 연고가 있거나 아는 사람인 경우 아주 쉽게 친밀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어떤 인간간의 기본적인 윤리적 관계도 형성하기 어렵게 한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는 심지어 “남이야 죽거나 말거나”라든지, “공부해서 남주냐” 등과 같은 말이 오간다.
이같은 정서는 삶의 범위가 제한되어 마주치는 대부분의 사람이 아는 사람인 농업중심의 사회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삶의 세계에서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더 많고, 대부분의 사람과 익명적 관계를 형성하게 되는 정보화, 국제화시대에는 아주 심각한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최근에 우리 나라에도 다양하게 외국인이 들어오고 있다. 그 중에서도 동남아 등에서 들어오는 외국인 노동자의 경우, 그들의 대다수의 불평은 인간이하의 대접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대부분 공적으로건 사적으로건 인간으로서의 정당한 기본적 인권도 보호받지 못한다. 또한 특정국적을 가진 외국인에 대해서는 지나친 과잉친절을 베풀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이유 없이 무시하는 극단적인 태도가 사회문제로 제기되기도 한다.
이같은 심각한 문제상황에도 불구하고, 도덕 윤리과는 이같이 모르는 사람에 대한 기본소양교육에 대하여 진지하게 논의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같은 현실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타자를 대하는 태도와 서구인의 존재론적 전통에서 타자를 자기중심에서 이해하고 동일시하는 태도에서 귀결되는 적대적 인간관과 무엇이 다른가 반성해 보아야 한다. 실제로 우리의 상황은 조금도 낫지 않다.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청소년에게 타인을 대하는 태도에서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윤리적 관계를 이해시켜야 한다. 레비나스의 타자윤리는 타자의 도덕적 호소를 수용하는 윤리적 자아에 관한 이론이다. 이때 ‘타자’란 특별히 우리가 아는 사람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나에게 도덕적으로 행동할 것을 요청하고 호소할 수 있는 사람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그가 나의 이기적 자아를 침투하는 무한성을 계시하는 존재이기에 타자의 위치에 놓일 수 있다. 그가 아는 사람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흑인이건 백인이건, 미국사람이건 소말리아 사람이건, 여성이건 남성이건, 부자건 가난하건, 귀하건 천하건,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모든 사람이 자신의 타자성으로 말미암아 나에게 도덕적으로 행동하도록 명령하는 타자의 위치에 있을 수 있다.
이같은 맥락에서 타자윤리에서 제시하는 구체적 덕목은 타인의 절대적 다름과 차이의 인정과 존중, 그리고 그와 같은 것들을 수용하는 관대함 등이다. 무엇보다도 레비나스의 타자윤리가 도덕교육에서 중요한 이유는 특정한 가치내용이나 덕목을 제시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왜 인간이 이같은 가치나 덕목을 수행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학생들에게 모르는 사람에 대한 존중과 관대함, 모르는 사람의 고통에 대한 배려와 도덕적 책임, 그리고 우애적 연대감 등을 교육시킬 것인가? 구체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현장 방문 교육, 자원봉사, 낯선 곳으로의 여행 등이다. 학생들은 삶의 구체적 현장, 예컨대 양로원이나 고아원의 방문을 통해서 다른 사람의 고통을 직접 감성적으로 체험하는 계기를 갖고, 자원봉사를 통해 타인의 고통을 나누는 자기희생을 실천할 수 있다. 또한 낯선 곳으로의 여행은 자기자신이 주변으로부터 소외되고 배제되는 체험을 통해, 사회의 소외 받는 자, 주변인, 모르는 낯선 사람에 대한 태도를 몸으로 깨우칠 수 있을 것이다. 이같은 구체적 체험을 통한 학습은 윤리나 도덕이 추상적 이론이나 형식으로 치우치면서 빚어내는 무인격적 익명성으로 향하는 오류를 교정해 주고, 구체적 인간에 대한 실천적 태도를 함양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4) 국제관계에서의 타자수용: 국가간의 관계
오늘날 국제관계의 특징은 초국가적(transnational) 특징을 띠고 나타난다. 초국가적 현상은 경제뿐만 아니라 다양한 당면문제에서도 등장하고 있다. 예컨대 가장 가시적으로 우리를 위협하는 문제로 환경문제와 전쟁위협을 들 수 있다. 생태학적 위기를 말할 때, 그것은 단순히 지역적 차원이나 단기적 차원의 오염범위를 벗어나고 있음을 의미한다. 지구 가이아는 원래 그 속성상 자연적 치유력, 자정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현재 지구의 위기는 가이아의 한계를 지속적으로 그리고 장기적으로 넘어서게 된 결과, 환경의 영구적 황폐화를 초래하는 사태를 말한다.
생태학적 위기의 특성465)은 우리의 근대적 사고 패러다임으로는 수용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우선 환경오염의 경우 원인제공자와 피해자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중국에서의 오염이 한국에 황사현상을 일으키고, 낙농업 위주의 국가인 뉴질랜드의 하늘에 구멍이 뚫려(오존층 파괴) 주민들 상당수가 피부암의 가능성으로 전전긍긍하게 된 것이다. 복합적 환경오염의 결과 초래된 것으로 보이는 기후이상현상 역시 오염배출국가와 그렇지 않은 국가를 구분하지 않고 전지구적 차원에서 예측불허의 기후이변을 가져온다. 이같은 환경오염의 또 다른 특징은 재생불가능, 회복불가능에 그 특징이 있다. 한번 멸종된 종은 회복이 불가능하며, 한번 뚫린 오존층은 막을 방법이 없다. 이같은 사태는 우리의 시각을 전지구적 차원으로 확대시킬 뿐만 아니라, 미래세대에로까지 확대시키게 된다.
핵무기에 의한 지구의 위기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다. 핵시대의 전쟁은 총?칼로 싸우던 시대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근접전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인식이 가능하지만, 컴퓨터로 조작되는 전쟁의 양상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인지도를 낮춘다.466) 모니터와 마우스에 의해 조종되는 미사일은 누구를 얼마나 죽였는지 행위당사자가 알 수 없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현대의 무기, 그 중에서 핵무기는 이미 무기로서의 기능보다는 인류전체와 지구전체를 일시에 절멸시킬 가능성으로 인류전체를 위협하고 있다.
환경위기와 전쟁무기위협과 같은 문제들은 이제까지 우리가 국제관계를 이해하던 시각에 전면적 수정을 요구한다. 이제 국가간에 평화를 정착시키는 것은 선택인 것이 아니라, 필수적인 당면과제가 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지구상에는 많은 분쟁의 불꽃이 남아 있다. 남-북간의 대치상태, 끝없이 연속되는 인종간 갈등(유색인종차별, 인종 테러리즘 등), 이데올로기 갈등, 종교갈등, 민족갈등, 국가간 주도권 갈등, 경제전 ....... 등 분쟁과 갈등의 요소는 끝이 없다.
철학사에서 보면 피타고라스 학파를 비롯하여 헤라클레이토스, 홉스, 헤겔, 니체에 이르기까지 전쟁은 사유의 대상이 되어왔지만, 평화는 그렇지 못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전쟁은 자연질서의 한 부분이다. 전쟁은 모든 것의 아버지이며, 모든 것의 왕이다.”라고 말했고, 마키아벨리(Machiavelli)도 “전쟁이란 인간운명의 일부분”이라고 말했다. 헤겔도 “전쟁은 역사의 목표를 이어가는 접촉반응제”라고 말하기도 했고, 또 “인간은 전쟁을 용납하지 않으면 정지하고 만다.”는 극언도 했다. 니체도 “전쟁은 자연스런 인간의 행위”라고 하면서 위험스런 삶과 전쟁을 칭찬하기도 했다.467)
그런데 오늘날 전쟁은 이제 인류에게 한가하게 ‘사유의 대상’이 되기에는 너무나 치명적인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왜냐하면 끔찍한 살상무기의 도래 이전에는 전쟁이 어떤 문화간 접촉과 충돌을 가져오고, 변화와 발전을 가져오는 계기로 작용했을 수도 있지만, 현대인류에게 전쟁의 발발이란 인류절멸의 ‘대재앙’이고, 지구전체의 회복 불가능한 파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류에게는 이제 ‘평화의 철학’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고대 그리이스 철학에서, 특히 플라톤에게서 ‘평화’라는 말은 선(??αθο? ;agathon)과 같은 것이며, 이상성(idalt?t) 즉 이데아의 세계를 가리킨다. 희랍어의 평화라는 말 eirene는 전쟁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스도교에서 평화는 사랑의 질서(ordo amoris)이며, 정의와 관련되어 사용된다. 이후 서양근세철학의 칸트는 말년에 『영구평화론』을 쓰고, 평화가 도덕적 이성의 이상임을 주장하였고, 이것이 국제법의 목표가 되었다. 스피노자는 “평화는 전쟁이 없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덕이 있는 마음의 상태이며 사랑, 신념, 정의를 수행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고 말하였다. 또 셀러도 “평화는 사랑의 질서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고 말한다.468) 셀러는 “평화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 속에서 이해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469) 그러므로 평화란 개념정의가 어렵고, 단지 평화의 의미를 묻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상의 ‘평화론’이 오늘날의 국제문제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가능한지 또는 실효성이 있는지를 가늠하기 어렵다. 이 점에서 레비나스의 타자윤리는 좀 더 적극적 의미를 가진다. 2차 세계대전을 직접 체험하고,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부모 형제가 희생된 그의 인생사는 전쟁과 평화의 문제를 피상적으로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자기자신의 철학의 과제로 삼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철학을 ‘평화의 철학’으로 칭한다. 레비나스는 서구철학의 일원론적 사유전통은 필연적으로 타자를 자기화 하는 동일성의 철학으로 자아의 외재성을 인정하지 않는 폭력의 철학, 전쟁의 철학일 수밖에 없다고 비판한다. 그러므로 철학적 사유의 근본 틀을 재고하여 수정하고 사유방식을 전환하지 않는 한, 진정한 의미의 평화는 확립하기 어려움을 지적한다.
우리는 동일성의 철학의 유형을 자아의식을 중심으로 전체화하는 과정으로 정의하였다. 이같은 전체성의 철학은 이기주의와 소유의 경제로부터 광범위한 차원에는 파시즘, 나치즘, 제국주의, 자민족중심주의, 자국중심주의, 인종중심주의, 혈통중심주의, 종교중심주의, 인간중심주의, 남성중심주의 등으로 나타난다. 이같은 사유형태의 특징은 자기를 중심으로 자기외부의 것을 평가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민족의 생존을 위해서 침략을 자행하고, 자기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나라의 피해를 고려하지 않으며, 자기 민족의 종교를 위해서 다른 민족의 종교를 억압하고 심지어 전쟁까지도 불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태는 인류의 미래나 국제관계에서 어떤 희망적 요소를 발견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렇지만 현재 인류에게는 평화냐 전쟁이냐의 선택권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전쟁은 곧 절멸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평화의 철학’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이 문제에서도 타자윤리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평화의 문제는 정치적 문제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른바 ‘정치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레비나스는 보고 있다. 정치에는 그 자체로는 윤리도, 타인에 대한 고려도 없다. 따라서 영원한 평화를 모색하기 위해 인간과 세계, 나와 타인, 진리와 정의 등의 관계를 바로 설정해야 한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형이상학적 과제이고, 형이상학적 과제는 ‘존재와 다른’ 차원, 나와는 다른 타인의 자리로의 초월이 없이는 불가능하다.470)
우리가 절대적으로 다른 타자와 평화롭게 지내는 유일한 방법은 타자의 절대적 다름 즉 타자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타자의 타자성, 다른 인종과 민족과 국가의 절대적 차이와 다름을 우리가 인정한다면, 우리는 그들에 대해 너그러워지고, 관용을 베풀게 되고, 그들을 수용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타자의 타자성을 인정하게 되면, 자아와 타자의 관계에서 타자가 자아에게 무한의 이념을 계시하듯이, 우리는 그들이 절대적으로 다름으로서 우리에게 새로운 무한의 의미를 계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이 기본적인 사유의 반성과 전환을 통해서 우리는 새로운 의미의 적극적 평화의 가능성을 찾아 볼 수 있다. 자아와 타자사이의 적대적 관계가 윤리적이고 형이상학적 관계로 전환되는 단서를 우리는 이와 같이 국가와 국가간의 관계에도 적용해 갈 수 있다.
Ⅶ. 결론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레비나스의 타자윤리는 표상에 사로잡힌 존재론으로부터 ‘존재보다 선한 것’을 추구하는 윤리적 형이상학에로의 전환을 도모하고 있다. 이같은 전환은 주체윤리로부터 타자윤리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타자윤리에서 주체의 의미는 재조명되며, 자아와 세계의 관계, 자아와 타자의 관계도 근본적으로 재구성되고 있다.
타자윤리에서 인간의 삶의 세계인 환경과 인간의 관계는 재조명된다. 레비나스가 자연환경안에서의 인간의 모습을 바다 위의 항해사, 물과 물고기로 비유하듯이, 자연에서의 인간의 모습은 더 이상 정복자가 아니다. 자연으로부터 영양을 얻고, 피와 살을 만들고, 맛보고, 향유하기에 자연은 인간에게 궁극적 의미인 것이지 이분법적으로 분리된 정복의 대상일 수가 없다. 향유적 자아의 근본 속성은 의존과 분리이다. 자연에 의존해서 향유하는 존재인 동시에, 그 향유의 만족감이 가져오는 내면성은 동시에 ‘분리’를 가져온다. 향유적 자아는 노동을 통해 요소의 익명성을 극복하고, 소유를 통해 내일을 준비한다. 이 점에서 향유적 자아는 여전히 존재론적이고, 자기를 중심으로 동일성과 전체성을 형성하고 있다.
그렇지만 향유적 자아의 내면성에 의한 자아들간의 분리는 유아론으로 향하지 않는다. 인간은 향유적 자아인 동시에 타자를 향한 존재의 정향성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인간이 안으로 향한 주체이자 밖으로 향한 주체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향유적 주체인 동시에 말하는 주체임을 의미한다. 말하는 주체는 밖으로 향한 존재로, 얼굴을 맞대는 직접성으로 돌아가는 것이자, 책임과 의무를 지는 존재이다. 자아와 타자의 관계에서 전체성을 형성하지 않는 관계는 바로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는 관계이다. 이같이 자기화하지 않는 관계에서야 자아와 타자를 분리시키는 거리가 유지되며, 윤리적 관계의 형성이 가능해진다. 자아와 타자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타자로 향해 가는 운동은 열망과 초월성의 움직임이다.
레비나스는 자아와 타인의 관계에서, 타인을 자아의 의식의 대상인 ‘현상’이 아니라, 현현하는 존재로 구분짓는다. 타인은 현현하는 존재이다. 타인은 존재 그 자체로 우리에게 근원적 윤리성을 보여준다. 그는 어떤 맥락과도 무관하게 얼굴 그 자체로 우리에게 윤리적으로 행동할 것을 호소하고 요청한다.
어떻게 해서 우리는 타인의 현현을 수용할 수 밖에 없는가? 이 문제를 우리는 이성에 앞선 근원적인 감성의 수동성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감성의 의미는 이제까지 이성으로 나아가기 위한 전 단계 정도로 이성작용에 부수적인 것으로 평가 절하되어 왔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감성의 감수하는 수동성에서 타인의 호소를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작용을 이해한다. 타인을 추론의 대상으로 삼아 개념화하고 주제화하는 이성작용은 초연하고 냉담하고 무관심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감성은 이웃으로 말미암아 불안하고, 불편함을 느끼고, 부담을 느끼고, 초연할 수 없고, 냉담할 수 없고, 상처받을 수 있는 것이다. 레비나스가 이같은 상태를 자아에 있어 타자의 가까움으로 설명하고 있음을 앞에서 살펴 보았다.
레비나스가 자아와 타자의 관계를 윤리적으로 근거지우는 또 다른 방법은 자아와 타자 사이에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며 나누는 ‘대화’(dialogue)이다. 대화에서 ‘말하기’와 ‘말해진 것’은 구분된다. 말하여진 것이 주제화로 나타난다면, 말하기는 윤리성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말을 주고 받으며 대화를 나눌 때 대화는 ‘구체적인 얼굴을 가진 너’를 상대로 해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대화를 하기 위한 전제조건은 ‘너’를 유지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말하기에서 발화자들은 근원적 윤리어를 계시하는 얼굴을 가진 인간들일 뿐만 아니라, 대화구조 자체가 이미 타인을 인정하고 유지시켜 가야 할 의무를 전제한다. 왜냐하면 대화는 독백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말하기’는 타자적 요소를 강조하며, 대화에서 나타나는 ‘윤리적 상호주관성’은 말을 걸고, 상대방을 존중하고, 환영하고, 다가서는 것에서 가능해진다. 요컨대 타자윤리에서 언어의 본질은 훗설이나 사르트르와 같은 현상학자들이 주장하듯이 단순한 의미전달기능이 아니며, 구조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규칙의 구조만도 아니며, 비트겐스타인이 주장하듯 공통의 규칙을 통한 상호주관성의 확보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타자윤리에서 보는 언어의 본질은 보다 근원적인 것으로 나와 타자의 관계를 열어 주는 실질적이고 윤리적인 관계에 있다.
자아와 타자의 상호 주관적 관계에서 주목할만한 특징은, 그것이 상호성의 관계가 아니라, 윤리적 비대칭성의 관계라는 것이다. 도덕적 책임의 비대칭성의 의미는 우리에게 윤리적 행위가 요구되는 상황을 상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예컨대 우리가 결식아동들에게 얼마간의 보조비를 자청할 때, 우리는 그들에게 어떤 보답을 바라지 않는다. 단지 그들이 굶주린 배를 채우기를 바랄 뿐이다. 이것은 보답을 바라지 않는 행위이기에, 주고받는 상호성의 관계가 아니다. 이때 ‘결식아동’들은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가? 이들은 어떤 맥락과의 연관성 없이 존재 그 자체로 우리에게 도와줄 것을 호소하고 결핍을 드러내는 벌거벗은 모습이지만, 그 자체로 우리에게 윤리적 행위를 요구하고 명령하는 주인과 같은 존재인 것으로, 이런 의미에서 이들은 ‘높이’로부터 온다. 동시에 우리는 이들에 대하여 봉사할 의무를 진 ‘하인’이기도 하다.471)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비대칭성의 윤리를 어디까지 적용시켜야 하는가의 문제가 제기된다. 이 말은 우리가 전혀 안면이 없는 아프리카 난민이나, 혈통도 다르고 피부색도 다르고, 말도 통하지 않는 이방인에게까지, 비대칭적 책임윤리를 짊어져야 하는가의 반박으로 나타날 수 있다. 레비나스는 나의 도덕적 책임을 지금 여기에서 나를 마주하는 너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로 확대시킨다. 왜냐하면 타자의 얼굴이 말해주는 의미는 바로 제3자의 존재를 말해주는 것으로, 내 앞의 타자는 동시에 다른 타자를 계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나에게 무한한 의무를 지우는 방식으로 나의 동일성을 흔들면서 나에게 다가올 수 있다. 또한 모든 사람이 너에 상응한 것으로, 이것은 그의 특별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의 책임을 일깨우는 근원적 존재의미에서 그러하다.
레비나스는 윤리에서의 ‘보편성’이란 추상화되어 나타나는 관념과 이념의 보편성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고유한 타자로부터 오는 요청의 보편성이라고 말한다. 이같은 보편성은 유와 종으로부터 오는 인류의 이념의 보편성이 아니라 가까움에서 오는 보편성이다. 가까움에서 형성되는 우애적 공동체는 절대적 타자와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책임의 관계이자, 타자가 동일자에게 명령하는데서 구체화되는 평등과 책임의 관계이다. 이같은 의미에서 보편성은 무인격성, 추상성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헌신을 요구하는 고유한 존재의 단일성과 관련되며, 사랑 받는 것이 아닌 존중받는 관계로 나타난다.
이 점에서 우리는 타자윤리가 다원성과 차이를 강조하지만 동시에 보편성도 확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익명적이고 추상적으로 전개되면서 폭력성을 띠게 되는 획일적 보편성을 거부하는 것이지, 윤리적 요청과 책임의 보편성까지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윤리적 책임의 보편성이 어떻게 가능해지는가를 물을 수 있다. 레비나스는 이같은 물음에 대해 바로 책임의 고유성과 책임을 짊어지는 주체의 의지로 설명한다. 책임질 수 있는 가능성은 개인의 의지에서 가능해진다. 역사속에서 책임지는 주체의 모습은 책임을 지고 답변하면서 사죄하는 개별자의 단독성으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 책임을 지는 단독성으로서의 ‘윤리적 자아’는 타자의 불행에 대해 도덕적 책임을 감수하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윤리적 자아와 도덕적 책임의 관계는 어떻게 구성되는가? 논자는 본문에서 윤리적 자아를 주체의 수동성과 시간의 통시성에 근거하여 논의하였다. 현상학자들이 현재와하는 의식작용에 의한 예견과 기억을 통해서 시간을 능동적으로 현재화할 수 있다고 보는 것과는 달리, 레비나스는 시간의 본질을 비가역적이고 회복할 수 없는 시간의 통시성에서 설명한다. 현존의 질서에 속하지 않는 과거와의 관계는 타자의 불행에 대해서까지도 책임지게 만드는 책임의 통시성을 낳는다. 즉 현재에 있는 감성으로서의 나는 과거의 흔적인 타인의 얼굴이 나타내는 호소와 요청에 대해 윤리적 책임과 도덕적 책임을 지게 된다. 여기서 나로부터 기인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까지 책임을 지게되는 책임의 통시성이 있다. 이같은 근거로부터 타자에 대한 도덕적 책임은 나의 서약이나 나의 의지에 기원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본문에서 논하였듯이, 인간은 근본적으로 몸을 가진 감성적 존재이다. 몸적 존재는 자아의 만족만을 추구하는 이기적 자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게로 향하는 윤리적 자아이기도 하다. 몸은 외부로 노출되어져 외부의 영향을 받아들이는 수용성, 수동성으로 나타난다. 이같이 바깥으로 열려 있는 몸적 존재는 타인의 호소와 요청에 노출되어져 있고, 타인에 의해 선택되고 불리고 지명된다. 이같은 이유로 윤리적 자아는 ‘me’로 표현된다. 우리가 외부의 요청을 받아들이고, 귀기울일수록, 도덕적 책임의 크기도 커지며, 동시에 내 안에서 형성되는 윤리적 자아의 크기도 커진다. 따라서 윤리적 자아는 타자를 위한 존재, 타자로 향한 존재이다. 윤리적 자아가 지닌 몸의 수동성, 감성의 수동성의 의미는 타자에게 노출된 상처 입을 가능성, 출혈과 같이 자신을 소모하고 희생할지라도 타인을 위하는 존재, 나의 빵을 잘라내어 타인의 배고픔을 돌보고, 다른 이의 필요에 배려하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윤리적 자아의 크기’는 ‘내 안에 있는 타자의 크기’라고 말한 것이다.
윤리적 자아는 타자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형태로 나타나지만, 타자는 단지 자아에게 무조건적 희생을 요구하는 존재인 것만은 아니다. 우리가 타자성의 윤리적 관계에서 살펴보았듯이, 자아는 타자를 통해 불연속적으로 거듭난다. 다시 말해서, 사랑과 시간이 만들어내는 출산에서 형성되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아들의 존재는 아버지에게 무슨 의미인가? 아들은 ‘타자 안에 심어진 나’이기도 하다. 아들은 나이면서도 절대적으로 내가 아닌 존재로, 무한한 미래를 약속하는 존재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동양적 사고에 이미 익숙한 세대를 가로지르는 윤리적 관계형태를 볼 수 있다.
이상에서 논의된 타자윤리의 도덕?윤리교육적 시사점은 무엇인가? 우리는 타자윤리를 통해 윤리과 교육에 대한 반성과 앞으로 나갈 방향에 대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본문에서 논하였듯이, 인지론적 접근은 자아와 타자의 관계를 올바르게 설명해 줄 수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윤리교육의 개인적 수준의 목표가 청소년의 바람직한 자아,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자아를 형성하도록 돕는 것임을 감안할 때, 인지론적 접근이 목표하는 합리적 자아는 도덕교육의 목표와 어떤 연관성을 지녔는지에 대해 반문할 수 있다. 합리적 자아가 청소년의 자아실현에는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인간의 자아실현에 타인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고려의 대상이 되고 있는지 물을 수 있다. 보다 근본적으로 말한다면, 하이데거의 실존의 가능성 실현에 타인이 들어설 여지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대인의 자아실현에 타인은 경쟁상대로 이해될 뿐이다. 더욱이 도덕성 발달의 인지론에서 이해하는 인간의 이성은 합리적 추론의 기능으로 축소?왜곡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의 상업성에 익숙한 대부분의 청소년들에게 합리적 이성은 계산하는 이성, 경제적 이성의 제한된 이성으로 이해된다.
이제 우리는 인간의 이성을 제한된 합리성으로부터 나와 타인의 관계를 열어주는 윤리적 이성의 의미로 재정립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본 논문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타자의 다름, 타자성을 수용하는 이성은 유한한 자아 안으로 무한의 이념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이성, 나와 타자 사이의 대화와 교육을 가능하게 해줄 수 있는 이성이다. 레비나스의 이성의 개념은 우리가 이제까지 간과했던 측면을 조명해준다. 이제까지 주제화하고 개념화하고 대상화하는 ‘이성’과 달리, 타자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형성되는 새로운 이성의 의미를 밝혀준다. 이같은 타자지향의 이성은 무한의 이념을 심어주는 스승과 제자의 교육에서처럼, 자아 안으로 새로운 것을 전해주는 이성, 타자의 존재가 계시해주는 나의 자유의 자의성을 깨닫고 부끄러워하는 이성, 타인에 대해 도덕적 책임을 지는 이성이다.
앞에서 논자는 타자윤리의 고찰을 통해서 인간이 왜 윤리적 존재이어야 하고, 윤리적 존재일 수밖에 없는가를 논의하였다. 이같은 논의는 피교육자에게 인간의 고유성의 의미를 ‘윤리적 자아’에서 찾을 수 있도록 고무하는 윤리교육의 기초이론을 제공한다고 본다. 그리고 구체적 일상생활에서 광범위하게 적용될 수 있는 타자수용의 원리라든지, 타자윤리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되어 나오는 타인에 대한 존중, 관용, 효, 자애, 우애, 우애의 공동체, 연대성, 정의, 평화 등의 덕목들은 도덕윤리과에서 피교육자들에게 가르쳐야할 기초덕목을 정하는데 참조가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면 이제 레비나스 타자윤리의 한계와 더불어 본 논문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논문의 마무리를 짓겠다.
첫째, 레비나스 타자의 윤리학에서 가장 미흡한 부분을 지적한다면, 그것은 법과 제도윤리에 관한 부분, 그리고 그에 연관된 사회윤리에 관한 논의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이같은 문제는 사실상 타자 윤리학의 장점과 맞물려 있는 약점으로 보여지는 데, 왜냐하면 레비나스는 윤리를 근본적으로 개인성과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개인들의 윤리성을 고양시키는 측면이 있는 반면, 현대사회에서 광범위하게 요구되는 제도적 차원의 사회 윤리에 대한 적극적 논의는 미약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 타자윤리의 ‘비대칭적 책임윤리’는 서구전통윤리가 갖지 못했던 새로운 충만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구체적 실천성과 더불어 약자를 배려하는 자비의 윤리가 내포되어 있다. 그래서 타자윤리를 통해서 탈현대사회의 많은 문제들에 대한 자연스런 해결을 기대해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비나스의 타자윤리는 오늘날 인간들에게 닥친 현실적 문제들 특히 생태학적 환경위기라든지 유전공학의 윤리적 위기 등에 대해서 함구하고 있다. 레비나스가 1995년에 타계한 사실을 감안할 때, 도덕철학자로서 이같은 시대적으로 절박한 문제에 대한 언급과 논의가 없었다는 점은 아쉽다. 다만 앞의 논의에서 밝혔듯이, 타자윤리에서 인간과 환경적 타자의 관계는 자연스럽게 기존의 자연과 인간의 이분법적 정복 관계를 극복하고 있다.
셋째, 본 논문은 타자윤리의 정확한 해석과 이해, 그리고 윤리교육에의 응용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 이유는 아직 레비나스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지 못한 국내의 학문적 여건이 마련되어 있지 못한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논자의 역량부족이 이유이기도 하다. 이 점은 앞으로 연구해 가야할 과제가 주어진 것으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겠다. 특히 본 논문 안에서 논의되기는 하였지만, 타자윤리에서 말하는 비대칭적 도덕적 책임윤리와 보편성이 어떻게 연결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더욱 정교화가 요구된다고 본다. 그리고 본 논문에서 직접적으로 연구되지는 않았지만, 윤리학과 종교의 상호관계는 계속된 연구를 통해 정리되어야 할 부분이다.
이 밖에 특히 타자윤리와 동양의 전통사상을 접목시키는 작업은 우리의 전통윤리와 타자윤리 양쪽 모두를 획기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예컨대 레비나스의 ‘타자윤리’와 우리의 전통적 정서에 가까운 ‘유교적 관계윤리’등의 동양의 에토스를 접목시키면 ‘타자윤리’의 이론을 정교화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전통윤리는 溫故知新의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우리의 전통윤리는 자아중심의 존재윤리가 아니라, 나와 타인의 관계로부터 형성되는 관계윤리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타자윤리와 도덕?윤리과에 대한 접목과 응용은 더욱 더 심층적으로 행해져야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구체적으로 배려윤리와 타자윤리의 비교라든지, 탈현대사회에 윤리과의 방향에 대한 지침으로서 타자윤리를 고려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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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 교훈, “한국의 근대화 과정과 윤리의식의 변천”, 『윤리학과 윤리교육』(서울: 경문사, 1997), 106 쪽.
2) 탈형이상학의 특징은 자연과학의 영역뿐만 아니라 근대이후 학문의 전반적 특징으 로 나타난다. 특히 철학에서 탈형이상학의 경향을 대변해 주는 이는 하이데거(M. Heidegger)와 니체(F. Nietzsche)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서구철학을 그리이스이 래 도덕성을 존재-신학적으로 다룬 ‘존재론 신학(onto-theology)’이었다고 비판한 다. 그리고 존재론적 신학이 실재의 세계를 신의 발현, 실체, 초월적 자아로 환원 시켰다고 비판한다.(Emmanuel Levinas, Ethics and Infinity, trans. by R.A. Cohen,(Pittsberg : Duquesne university press,1985), pp.1-2. 코헨의 번역자 서문 참조. 이하 각주에서는 Ethics and Infinity를 EI로 약칭해서 표기함. / 존재론과 탈 형이상학, 형이상학의 재건에 관한 문제를 본 논문 Ⅱ. 4.「제일철학으로서의 윤리 학」에서 본격적으로 논한다.
2) 탈형이상학의 특징은 자연과학의 영역뿐만 아니라 근대이후 학문의 전반적 특징으 로 나타난다. 특히 철학에서 탈형이상학의 경향을 대변해 주는 이는 하이데거(M. Heidegger)와 니체(F. Nietzsche)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서구철학을 그리이스이 래 도덕성을 존재-신학적으로 다룬 ‘존재론 신학(onto-theology)’이었다고 비판한 다. 그리고 존재론적 신학이 실재의 세계를 신의 발현, 실체, 초월적 자아로 환원 시켰다고 비판한다.(Emmanuel Levinas, Ethics and Infinity, trans. by R.A. Cohen,(Pittsberg : Duquesne university press,1985), pp.1-2. 코헨의 번역자 서문 참조. 이하 각주에서는 Ethics and Infinity를 EI로 약칭해서 표기함. / 존재론과 탈 형이상학, 형이상학의 재건에 관한 문제를 본 논문 Ⅱ. 4.「제일철학으로서의 윤리 학」에서 본격적으로 논한다.
3) Arnold Gehlen, Moral und Hypermoral, Wiesbaden, 1969, S. 154.
4) 진교훈, “윤리학과 철학적 인간학,” 『철학적 인간학연구Ⅰ』(서울: 경문사,1986), 193쪽.
5) 오늘날 인류에게 닥친 핵절멸의 위협, 생태학적 위기,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 전, 인종간 끝 없는 갈등 사태, 유전공학의 발전에 따른 인간복제와 신 인류 탄생 의 예고 등은 새로운 위기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체험한 레비나스 역시 도덕성의 위기를 감지한다. 그래서 그는 ‘우리가 아우슈비츠이후에 도 절대적 요청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 것인가’의 근본적 문제를 제기한다.
5) 오늘날 인류에게 닥친 핵절멸의 위협, 생태학적 위기,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 전, 인종간 끝 없는 갈등 사태, 유전공학의 발전에 따른 인간복제와 신 인류 탄생 의 예고 등은 새로운 위기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체험한 레비나스 역시 도덕성의 위기를 감지한다. 그래서 그는 ‘우리가 아우슈비츠이후에 도 절대적 요청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 것인가’의 근본적 문제를 제기한다.
6) 레비나스는 그의 논문 “철학과 무한의 이념(Philosophy and the idea of Infinity)”에서 서구철학 특히 하이데거의 철학을 ‘나르시시즘(le narcissisme)과 동 일성의 철학’으로 비판하고 있다.
7) 레비나스의 열망의 개념은 플라톤의 에로스로부터 영감을 얻고 있다. 그러나 플라 톤의 에로스는 선의 이데아를 향한 무한한 충동으로 불멸성을 목표로 하지만, 레 비나스의 열망은 타자, 낯선 이를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TI. 63.) 열망의 개념은 욕구와 구분할 때, 그 의미가 더 분명해진다. 욕구(needs, besoin)는 자기 자신의 불만족, 빈곳을 메꾸려 하는데 반해, 무한한 타자를 동경하는 열망(desire, desir)은 충족되기를 바랄 수도 없는 것으로, 열망되어지는 것에 가까워질수록 더 욱 커지는 것이다. 보통 besoin은 필요로, desir는 욕망으로 옮겨지는데, 본 논문 에서는 레비나스적 의미를 살려 besoin을 욕구나 필요로 옮기고 desir를 熱望으로 옮긴다.
8) 초월성(transcendance)의 개념은 보통 내재성(immanence)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무엇을 넘어서 있음’을 의미한다. 하이데거는 존재론적 입장에서 존재적 입장으로 넘어서는 것, 즉 존재자가 존재자체로 넘어서는 것을 ‘초월’로 보았다. 하이데거와 비교해서 말한다면, 레비나스의 초월은 자아로부터 타자로의 초월로 말할 수 있다. 서구철학의 특징은 내재적 초월성에 있다. 내재적 초월성은 결국 타자의 다름을 동 일자로 재흡수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레비나스에 있어, 초월성의 본래적 의미는 자아와 타자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타자의 외재성을 유지시켜 가는 것이다. 이같 은 의미에서의 초월성은 나 자신의 실재성(realite)으로부터 거리 지어진 실재성과 의 관계를 나타낸다. 초월성의 개념은 그의 저서 『전체성과 무한』과『존재와 다른 것 또는 존재사건 저편』에서 설명되고 있다. 그 저서의 제목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초월성은 존재와는 다른 것(otherwise than being)에로의 이행, 존재 사건 저 편(the beyond)에로의 이행, 존재보다 선한 것(better than being)에로의 이행의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이들이 구체적으로 가리키는 것은 바로 벌거벗은 타인의 얼 굴이다.
8) 초월성(transcendance)의 개념은 보통 내재성(immanence)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무엇을 넘어서 있음’을 의미한다. 하이데거는 존재론적 입장에서 존재적 입장으로 넘어서는 것, 즉 존재자가 존재자체로 넘어서는 것을 ‘초월’로 보았다. 하이데거와 비교해서 말한다면, 레비나스의 초월은 자아로부터 타자로의 초월로 말할 수 있다. 서구철학의 특징은 내재적 초월성에 있다. 내재적 초월성은 결국 타자의 다름을 동 일자로 재흡수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레비나스에 있어, 초월성의 본래적 의미는 자아와 타자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타자의 외재성을 유지시켜 가는 것이다. 이같 은 의미에서의 초월성은 나 자신의 실재성(realite)으로부터 거리 지어진 실재성과 의 관계를 나타낸다. 초월성의 개념은 그의 저서 『전체성과 무한』과『존재와 다른 것 또는 존재사건 저편』에서 설명되고 있다. 그 저서의 제목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초월성은 존재와는 다른 것(otherwise than being)에로의 이행, 존재 사건 저 편(the beyond)에로의 이행, 존재보다 선한 것(better than being)에로의 이행의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이들이 구체적으로 가리키는 것은 바로 벌거벗은 타인의 얼 굴이다.
9) 레비나스에게서 형이상학의 개념은 하이데거와 비교하면 명확히 드러난다. 하이데거는 기존의 철학이 존재자에 관한 연구에 머물면서, 존재일반의 원리를 묻지 않은 ‘존재망각의 역사’였다고 하면서, 자신의 철학의 과제를 ‘존재’에 관한 연구로 삼는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현존재의 형이상학은 그 자신의 구분에도 불구하고, 레비나스에 의하면 여전히 존재에 머무는 존재론의 철학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레비나스에 있어, 진정한 의미의 형이상학이란 ‘존재에 관한 탐구를 넘어서 있는 것, 즉 존재보다 선한 것, 존재사건을 넘어서 있는 것’에 대한 탐구라고 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존재보다 선한 것, 존재사건을 넘어서는 것은 바로 선성에 관한 것, 선성이 구현되는 자아와 타자의 관계, 인간간의 윤리적 관계에 관한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레비나스에게서 형이상학이란 윤리학과 다르지 않다.
10) 타자성과 차이에 대한 탈근대적 사유를 나타내는 대표적 개념들로는 데리다(J. Derrida)의 차연(differance), 료타르(J.F.Lyotard)의 불일치(differend), 레비나스의 타 율성(heteronomy), 세르토(Michel de Certeau)의 이종성(異種性, heterology) 그리고 바흐친(M. Bakhitin)의 이종언어(異種言語, heteroglossia) 등이 있다.
11) 레비나스 사상이 가장 독창적이고 선명하게 제시되고 있는 주저는 『Totalite et Infini -Essai sur l'exteriorite, 1961.』와『Autrement qu'etre ou Au-dela de l'essence, Otherwise than Beiong or Beyond Essence, 1974.)이다. 본 논문에서는 Emmanuel Levinas, Totality and Infinity, trans. by Alphonso Lingis, (Dordrecht:Kluwer Academic Publishers, 1991)와 Emmanuel Levinas, Otherwise than Being or Beyond Essence, trans. by Alphonso Lingis (Dordrecht : Kluwer Academic press, 1974)를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한다. 이하 각주에서는 Totality and Infinity는 TI로 약칭해서 표기하며, Otherwise than Being or Beyond Essence는 OB로 약칭해서 표기함.
12) 레비나스 사상을 포괄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저서는 레비나스 자 신과 네모(Philippe Nemo)의 대화내용을 중심으로 엮은 『Ethics and Infinity』이 다. 레비나스 저서 중에서 ‘자아와 타자의 관계’를 중심내용으로 하는 것은 『Totality and Infinity』이고, ‘윤리적 자아’의 구성과 의미를 밝힌 저서는 『Otherwise than being or beyond Essence』이다. 이들 저서를 읽으면서 레비나스 자신이 직접 표기한 각주나 영문판인 경우 링기스(A. Lingis)가 첨부한 각주을 꼼꼼 히 읽는다면 레비나스의 개념들을 이해하는데 있어 큰 도움을 얻을 수 있고, 시행 착오를 줄일 수 있다. 그 외에 특히 『Totality and Infinity』를 읽는데 도움이 되 는 책은 페이프르작(A. T. Peperzak)의 『To the other』와 레비나스 자신의 『시 간과 타자』(강영안 역) 그리고 그의 논문인 “The Philosophy and the Idea of Infinity”이다. “The Philosophy and the Idea of Infinity”는 『Totality and Infinit y』의 전반부에 대한 이해를 도우며, 『시간과 타자』는 자아와 무한한 미래의 타 자성의 관계를 다루고 있는 『Totality and Infinity』의 후반부의 이해를 도울 수 있다. 그리고『To the other』에서 페이프르작은 『Totality and Infinity』에 대한 안내서 역할과 더불어 “The Philosophy and the Idea of Infinity”에 대한 상세한 텍 스트 해석의 작업을 함께하고 있다.
13) Bollnow, O. F., Die anthropologische Betrachtungsweisen in der Padagogik : Neue padagogische Bemuhungen, No 23, Essen 1965, S. 30ff. 진 교훈, 『철학적 인간학 연구Ⅰ』, 앞의 책, 43쪽 재인용.
14) 플라톤의 소피스트에서 동일자(tauton)와 타자(to heteron)의 개념은 존재의 최고 범주를 구분하는 개념이다. 동일자와 타자는 불어로는 l'autre와 le meme이고, 영어 로는 the same과 the other로 옮겨지고 있다. 『전체성과 무한』의 영문번역자인 링기스(A. Lingis)는 레비나스의 감수아래 ‘autrui’ 즉 다른 사람(the you, the personal Other)을 뜻하는 말은 대문자 O로 시작하는 ‘Other’로 표기하고, 다른 모 든 존재자들(all other beings)을 뜻하는 ‘autre’는 소문자 o로 시작하는 ‘other’로 옮 기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TI.24.) 본 논문에서는 타자와 타인을 구별하지 않고 보통 타자로 쓰고 있다. 왜냐하면 레비나스가 ‘타인’을 의미할 때는 단순히 ‘나 아닌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무한의 이념을 현현하고 있는 얼굴을 가진 사람’이라는 함축이 있기 때문이다.
14) 플라톤의 소피스트에서 동일자(tauton)와 타자(to heteron)의 개념은 존재의 최고 범주를 구분하는 개념이다. 동일자와 타자는 불어로는 l'autre와 le meme이고, 영어 로는 the same과 the other로 옮겨지고 있다. 『전체성과 무한』의 영문번역자인 링기스(A. Lingis)는 레비나스의 감수아래 ‘autrui’ 즉 다른 사람(the you, the personal Other)을 뜻하는 말은 대문자 O로 시작하는 ‘Other’로 표기하고, 다른 모 든 존재자들(all other beings)을 뜻하는 ‘autre’는 소문자 o로 시작하는 ‘other’로 옮 기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TI.24.) 본 논문에서는 타자와 타인을 구별하지 않고 보통 타자로 쓰고 있다. 왜냐하면 레비나스가 ‘타인’을 의미할 때는 단순히 ‘나 아닌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무한의 이념을 현현하고 있는 얼굴을 가진 사람’이라는 함축이 있기 때문이다.
15) 레비나스에 있어,외재성(exteriorite)의 개념은 의식의 외부에서 처음 마주치는 실재를 의미한다. 외부의 실재는 물질 또는 자연과 같이 표상과 개념으로 환원되 고 통합될 수 있는 영역과, 이와 반대로 의식에 의해 침해될 수 없는 초월적인 것 의 영역이 있다. 그리고 초월적인 것은 또한 타인과 신으로 구분된다.
▶환경적 물질의 세계--- 대상화가능, 자기동일시의 영역 - 향유의 관계
타자― ▶타인 -------------- 열망과 초월의 대상 - 형이상학적 윤리적 관계
(외재성) 자아 안으로 동일시할 수 없는 무한성을 내포함
▶신 -------------- 열망과 초월의 대상이지만, 타인의 얼굴을 통해서만 나타남
16) 박동환, 『동양의 논리는 어디에 있는가』 (서울:고려원, 1993), 246-7쪽.
17) “집에서” 라는 것은 불어 “chez soi”, 독일어 “bei sich”를 나타낸다. 링기스(A. Lingis)는 『전체성과 무한』의 주석을 통해, chez soi 는 헤겔 bei sich를 나타내는 것으로, 레비나스에게서 그 말은 실존자가 홀로(for itself) 존재하는 본래적이고 구 체적 형태를 나타내는 용어임을 설명한다.
18) 구약성서 창세기 4:9
19) 現象(phenomene)이 동일자의 의식의 대상으로 나타난다면, 현현은 동일자의 의도 와 무관하게 타인이 그 스스로 벌거벗은 얼굴로 보여주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顯現 (epiphanie)에서 우리에게 윤리적으로 행동하도록 호소하고 명령하는 윤리적 근원 어의 의미를 밝혀준다.
20) 보통 ‘가까움’으로 옮겨지고 있는 ‘proximite’는 약간의 개념정리가 필요하다. ‘proximite’는 ‘자아안에서의 타자의 가까움’으로 상태나 정지가 아니라, 정지 바 깥에 있는 불안이고 운동이다. ‘가까움’은 자아의 동일성 아래 휴식할 수 없이, 타 자? 이웃에게 무심할 수 없는 자아의 불편한 상태이다. 그러므로 ‘ proximite’는 관계안에서 형성되는 유대라고도 말한다. 요컨대 자아와 이웃의 관계에서 ‘proximite’는 이웃에게 가까워지는 영혼의 상태인 것으로, 자아에 의한 이웃의 통 합작용 즉 자기-동일시와 대조된다. ‘proximite’에 대한 논의는 ‘윤리적 자아’로서 인간의 自我性을 구성하려는 『존재와 다른 것 또는 존재사건 저편』의 가장 중요 한 개념중의 하나이다. 『존재와 다른 것 또는 존재사건 저편』에서 ‘proximite’는 CH.Ⅲ.Sensibility and Proximity의 §6.Proximity a. Proximity and Space b. Proximity and Subjectivity, c.Proximity and Obsession d.Phenomenon and Face e.Proximity and Infinity f.Signification and Existence 로 구성되어 논의되고 있다.
21) 代贖은 레비나스가 설명하는 의 윤리적 자아의 核이라고 볼 수 있다. 대속은 타자 에 대해 책임을 지는 자아로서, 타자에로 다가가는 자아안에서 타자의 가까움의 극 치로 볼 수 있다. 대속은 타자로부터 가해지는 박해의 고통 속에서도 박해자에 대 한 책임으로 이행하는 것 즉 타자를 대신한 속죄(expiation)로도 설명될 수 있 다.(OB.111) 대속의 특징은 자아의 심사숙고한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자신과 무관 하게 기소되는 상태로, 다른 사람들이 행한 것에 대해서 기소 당하거나 그들이 행 하고 겪은 것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는 것이다.(OB.112) 그래서 레비나스는 대속을 타자에 사로잡힌(obsession) 자아, 내가 지시하기 전에 타자가 나를 지명하여, 그에 게 사로잡혀 있는 상태로 설명한다. 대속은 바로 ‘동일자 안의 타자’인 것으로, 이웃 으로부터 오는 도덕적 요청을 짐진 자를 나타내준다.
22) 레비나스에 있어, 타율성의 의미는 도덕적 행위를 유발시키는 근원을 나로부터 기 원한 자기책임이나 자율성이 아니라, 도덕적 호소와 명령을 보내는 타인의 얼굴, 타 인의 불쌍하고 결핍된 모습에서 찾는 것이다.
22) 레비나스에 있어, 타율성의 의미는 도덕적 행위를 유발시키는 근원을 나로부터 기 원한 자기책임이나 자율성이 아니라, 도덕적 호소와 명령을 보내는 타인의 얼굴, 타 인의 불쌍하고 결핍된 모습에서 찾는 것이다.
23) 레비나스는 특히 도스토에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다음구 절을 인용하여 ‘비대칭적 책임윤리’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We are all responsible for all for all men before alls, and I more than all the others.” Fyodor Dostoyevsky, The brothers Karamazov, trans. C. Garnett (New York, New American Library, 1957), p.264. / EI. 105.
24) 본 논문은 논문의 범위가 지나치게 확대되는 것을 우려해, 이 문제에 대한 논의 를 에로스, 시간, 생산성의 문제로 한정하고 있다. 에로스와 시간이 결합하면서 나 타나는 생산성은 바로 타자를 통해 새롭게 태어나는 인류의 탄생과 성장, 늙어감, 쇠퇴의 불연속적 연속성을 잘 보여준다. 이같은 새로운 탄생과 쇠퇴의 개념자체가 끝없는 진보의 이념에 익숙해졌던 근대 이후의 세계관에 대한 하나의 반전이라 하 겠다.
25) EI. 26-7.
26) EI. 27.
27) EI. 28.
28) EI. 29.
29) Edmund Husserl, "Philosophy as Rigorous Science"(1911), in Phenomenology and the Crisis of Philosophy, trans. by Quintin Lauer (New York :Harper nbsp; Row, 1965), pp. 71-147. / EI. 29.
30) EI. 32.
31) EI. 32.
32) Adriaan Peperzak, To the other, (Indiana : Purdue univ. press,1993), p.12. 하이데거에 대한 레비나스의 논문은 처음에는 존경을 담고 있었으나, 1933년 이후 하이데거의 나치 가담에 대하여, 그리고 국가사회주의와 하이데거 사상간의 간과할 수 없는 상관성에 대하여 해명을 요구하였다.
33) 레비나스가 철학사에서 가장 탁월한 저서로 기억하는 책들은 플라톤의 『파이드 로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헤겔의 『정신현상학』, 베르그송의 『시간과 자유의지』, 그리고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이다.
34) EI. 40.
35) EI. 41.
36) EI. 42.
37) 레비나스는 『전체성과 무한』을 장발과 마르셀에게 헌사하고 있다.
38) 논자는 레비나스의 『Totalite et Infini』를 졸고, “레비나스의 타자성의 윤리 에 관한 연구”(『국민윤리연구』 제37호, 1997)와 “레비나스의 탈현대적 이성비판 과 타자의 윤리학”(『국민윤리연구』 제40호, 1998)에서는 『총체성과 무한성』으 로 읽었으나, 본 논문에서는『전체성과 무한』으로 통일하여 표기한다. 레비나스에 게서 쓰여지는 ‘Totalite’의 개념은 강조점에 따라 보통 ‘총체성’과 ‘전체성’의 두가지 측면의 해석이 가능하다. 레비나스가 동일자 철학의 전형으로 보고 비판하는 철학 자는 헤겔과 하이데거이다. 레비나스에게서 윤리적 자아의 단독성과 고유성을 가능 하게 해주는 것은 개인성에 근거한 ‘의지의 진실’이다. 그런데 헤겔에게서 보편화와 객관화의 작용으로 전개되는 절대정신은 ‘개인의 의지’적 측면을 익명적인 변증법적 총체화과정으로 전화시킨다. 이같은 맥락에서 레비나스의 헤겔에 대한 비판적 관점 을 부각시킨다면, ‘Totalite’는 ‘총체성’의 의미에 가깝다. 그러나 우리가 동일자가 자 아의 이기적 욕망이나 자기의 가능성 추구를 위하여 타자의 외재성을 자기에게로 동화?통합시키는 하이데거적 관점에 대한 레비나스의 비판적 관점을 부각시킨다면 ‘Totalite’는 ‘전체성’의 의미에 가깝다. 왜냐하면 타자에 대한 자아의 자기동일시 과정은 필연적으로 자의적 폭력을 동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레비나스 이전에 ‘Totalite’는 일반적으로 ‘총체성’의 의미로 해석되는 경우가 많이 있었지 만, 본 논문은 레비나스에게서 후자의 의미가 새롭게 부각된 점을 고려해서, 『Totalite et Infini』을 『전체성과 무한』으로 통일해서 사용할 것이다.
39) 강영안,“레비나스”, 김상환 외,『103인의 현대사상 - 20세기를 움직인 사상의 모 험가들-』,(서울:민음사, 1996), 135쪽.
40) Robert Gibbs, Correlations in Rosenzweig and Levinas,(New Jersey: Princeton univ. 1992), p.157. / 레비나스는 상처받은 세계에서 살고, 사유하였다. 그는 아 우슈비츠이후에도 사람들이 그 불행이전에 생각하던 방식으로 여전히 생각할 수 있 을 것인지를 묻는다. 그는 이와 같은 재난 속에서 유대교가 철학과 기독교적 전통 이 지켜 줄 수 없었던 의미, 잊혀졌던 의미를 되새겨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 다. Catherine Chalier, "The Philosophy of Emmanuel Levinas and the Hebraic Tradition", in Ethics as first Philosophy, ed. Adriaan T. Peperzak, (New York: Routledge, 1995) p.4.
41) EI. 24./ 철학과 종교에 관한 레비나스의 입장은 우리가 예언적 책들로부터 고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같은 입장은 비합리성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고가 담론적인 사고만으로 채워질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려는 것이다. 서구문화 의 붕괴이후에 레비나스는 동시대인들에게 유대교에 독특한 것을 설명하고자 하였 으나, 철학언어에 충실하였다. Catherine Chalier, Ibid., p.5.
42) Robert Gibbs, op. cit., p. 158. /레비나스의 장례식에서 조사를 하였던 데리다 (J. Derrida)는 레비나스 철학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철학의 그리이스적 유래와 본성을 근본적으로 문제삼는 것, 그리고 완전히 새로운 기원으로 돌아가서 철학을 변혁하는 것. 둘째, 이 새로운 기원의 철학을 형이상학 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적 형이상학에 작별을 고하는 새로운 형이상학적 초월론으 로 펼쳐 가는 것. 셋째, 이 형이상학적 초월을 윤리적 관계 안에서 혹은 윤리적 초 월 안에서 사유하는 것이다. (J. Derrida, "Violence et metaphysique :essai sur la pensee d'Emmanuel Levinas", L'ecriture et la difference (Paris : Seuil, 1968), pp.115-228. / 김상환, “해체론, 경험론, 초월론 -데리다의 레비나스론 소고” 3쪽. 재 인용.)
43) Robert Gibbs, Ibid., p. 160. /우리는 모든 타자적인 것의 경험을 자기안으로 환원시 키는 것에 대한 레비나스의 논의를 앞으로 4절 ‘전체성(totalite)의 한계와 무한의 이념 (l'idee de l'infini)’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44) ‘냉혹한 역사의 심판’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헤겔 역사철학 등이다. 레비나스 는 헤겔 역사철학의 본질을 강자의 논리로 보며, 이같은 역사철학은 역사의 주변에 홀대받는 이들을 간과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레비나스는 역사에 대한 올바른 태도 는 역사 앞에서 윤리적 주체로서 참회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에 대한 내용은 레 비나스 『전체성과 무한』안에 있는 ‘의지의 진실’에서 주로 다루어지고, 본 논문 안에서는 Ⅳ.3.「나와 타자의 다원성의 윤리」에서 논의된다.
45) Ibid., p. 159.
46) 이 인용문은 레비나스가 탈무드에 관한 콜로키움에서 강의한 것으로 깁스가 인용 한 것임. Ibid.
47) Ibid.
48) 레비나스에 따르면 끔찍한 박해의 경험은 절망을 낳은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자 기 자신에 대한 새로운 요구를 일으키게 만든다. 고통받을 때, 사람들은 타자의 고 통을 잊어버린 채, 자기자신만을 생각하려는 유혹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박해의 고통에서 살아남은 자의 특별한 징후인 죄책감은 절망이 아니라, 자기자신에게 새 로운 도덕적 책임의 요구를 일으킨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잔인함, 타는 듯한 고통, 죽음에 대한 고통이 어떻게 나의 이웃의 죽음과 삶에 대한 관심으로 전향되 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레비나스는 나치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존재할 권리가 없다”라고 외친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살아남은 유태인들은 그들 자신 이 무죄임을 주장한다든지, 자신을 변호하기보다는, 오히려 약한 자와 박해받는 이 들에 직면하게 될 때, 자신의 삶이 정당한지를 자문하면서 살아간다. 즉 “타자의 고 통에 직면할 때, ”나는 존재할 권리를 가지는가?”라고 자문한다. (Catherine Chalier, op. cit., p.5.)
49) 나와 타자의 윤리적 관계의 문제는 Ⅳ장.「타인과의 만남과 다원성의 수용」에서 논의할 것이다. 레비나스에게서 타자의 윤리는 나-너의 친밀한 관계의 윤리를 넘 어서 제3자에 대한 존중으로까지 확대되는 비폭력적 보편성의 윤리이다.
50) 데카르트의 『성찰』은 근세 서구인들의 형이상학을 대변한다. 데카르트는 이 저 서에서 영혼, 신, 세계의 존재를 논증하고 형이상학의 체계를 재건하고자 한다. 그 런데 데카르트가 회의의 끝에서 찾아낸 제1원리는 코기토이다. 데카르트는 내가 나의 존재를 확신하는 것은 곧 내가 ‘이것저것을 생각함으로써’ 라는 사실을 강조한 다. 이런 관계를 통해 나의 존재와 사고는 상보적으로 나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코 기토는 의심하거나 이해하고, 긍정하거나 부정하고, 원하거나 원하지 않으며, 상상 하거나 느끼는 것 등등을 포괄한다해도, 코기토의 용어 자체가 말해주듯이, 지능적 인 작용을 나타낸다. 그래서 『성찰』은 무엇보다도 존재하는 것은 나라는 것, 나는 무엇보다도 사고 작용하는 존재라는 것을 확립했다고 볼 수 있다. 코기토는 자존 적인 존재이며, 어떤 면에서 물질적 실체보다 더 확실하고 본래적인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이다. 제1원리를 코기토로 놓을 때, 즉 생각하고 회의하는 사유작용을 제1원리의 핵심으로 놓을 때, 우리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이해의 지평이 극단적으 로 축소됨을 볼 수 있다. (이 정우, “도덕적 주체의 탄생”, -茶山의 인간존재론-, 『인간의 얼굴』, (서울: 민음사, 1999), 171-5쪽 참조.) 우리의 사유방식의 경우, 인 간은 전체적으로는 <身>이나 <己>와 같은 말을 썼고, 인간의 정신의 차원을 강조 할 때면, <心>, <神> , <靈>, <魂> 과 같은 말들이 사용되었다. 요컨대 인간의 정 신을 말할 때도, 단지 인지적 사유작용의 의미로만 제한되지 않았다. 이 점에서 인 간을 몸, 감성, 정신, 인격화된 영혼, 영혼 등의 다차원성에서 이해하는 레비나스의 인간관과 동양의 인간관을 비교해 볼 수 있다.
51) 데카르트의 지나친 단순화를 장발(Jean Wahl)은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프랑스 는 데카르트의 탄생과 더불어 17세기의 형이상학적 제 탐구의 흐름을 결정한 정신 (l'esprit)을 낳았다. 데카르트는 스콜라철학의 실체들로부터 영혼(ame)의 인식을 해 방시켰고,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는 그의 四原因중에서 형상인과 결합된 작용인 만 을 보존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가 구별한 여러 혼들(ames)중에서도 하나만을 취하 였고, 여러 운동들 중에서도 ‘위치운동’만을 보존했다. 데카르트의 중요한 비판자인 파스칼은 이를 빗대어 ‘위대한 정화자( le grand purificateur)’라고 칭한다. ” (Jean Wahl, 『프랑스 철학사』, 金寬五외 역, (서울: 대한교과서주식회사, 1987), 4쪽.) 레비나스에 있어, 데카르트는 비판받는 측면도 있지만, 긍정되는 측면도 있다. 다 음의 ‘무한의 이념’에서 논의할 것인 바, 레비나스는 데카르트의 ‘유한자’와 ‘무한 이 념’의 구분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 점은 데카르트 이후, 철학적 사유의 영역에 서 ‘무한의 이념’이 배제되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무한의 이념에 대한 이같은 평 가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52) 진교훈, “한국의 근대화과정과 윤리의식의 변천”, 『윤리학과 윤리교육』 앞의 책, 124쪽.
53) 강영안, “향유와 거주”, 한국철학회 편,『철학』, 제 43집, 1995. 봄. 306쪽.
54) 위의 논문, 같은 쪽.
55) 윤명로, “후설에 있어서의 현상학의 구상과 지향적 함축”, 한국현상학회편,『현상학이란 무엇인가』, (서울: 심설당, 1990), 15쪽 .
56) 위의 논문, 17-8쪽 참조.
57) 신귀현, “현상학적 환원과 그 철학적 의의”,『현상학이란 무엇인가』, 앞의 책, 64쪽.
58) 자연적 태도는 일상생활에서 사물을 지각할 때, 우리의 관심을 전적으로 경험적 인 대상세계에만 집중시키며 이 대상세계를 하나의 독립적이고 자명한 존재로 확신 하는 반면, 지각하는 주체인 인격의 존재는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태도이다. 그러 나 인격주의적 태도는 사물을 지각할 때, 지각하는 주체인 인격을 중심으로 사물을 지각하기 때문에 대상세계를 하나의 독립된 세계로서가 아니라 인격과 불가분의 관 계를 맺는 환경세계로 소박하게 확신하는 태도이다.
59) 자연 과학주의적 태도는 대상을 일정한 방법이나 기구를 매개로 하여 정확히 관 찰?분석?실험함으로써 그들의 성질이나 구조를 법칙에 근거하여 파악하고 그것을 다시 수식화하여 계량적으로 설명하는 태도이다. 이 세 가지 태도들은 모두 경험적 인 대상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자명한 사실로 확신한다. 후설은 이런 확신을 ‘자 연적 태도의 일반정립’이라고 하면서, 이들은 인식 비판적 관점에서 보자면 소박한 전제나 편견일 뿐 철학적 인식이 아니라고 구분한다.
60)『후설전집Ⅵ』Die Krisis der europaischen Wissenschaften und die transzendentale Phanomenologie, hrsg. v. w. Biemel, 1954. S.100.
61) 신귀현, 앞의 논문, 67쪽.
62) 현상학의 기본개념으로서 ‘지향성’은 의식의 성격 또는 의식의 본질을 말하는 것 으로서 모든 의식은 언제나 그리고 반드시 어떤 대상에 관한 의식이며, 어떤 대상 을 의미하고 어떤 대상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의식은 반드시 무엇에 관한 의식(Bewußtsein von etwas)이라는 뜻이다. (이규호, 『현대철학의 이해』, (서울: 대영사, 1985), 122-3쪽 참조.
63) 강영안, 앞의 논문, 306-7쪽.
64) Edmund Husserl, Ideas : General Introduction to pure Phenomenology, trans. by W. R. Boyce Gibson (New York : Collier, 1962), pp.102-3.
65) Edmund Husserl, Cartesian Meditations : An Introduction to Phenomenology, trans. Dorion Caims (Boston : Nijhoff, 1960), p.93.
66) Anthony F. Beavers, Levinas beyond the Horizons of Cartesianism, (New york: Peter lang press, 1995). p.23.
67) Ibid., pp.24-5.
68) Emmanuel Levinas, The Theory of Intuition in Husserl's Phenomenology, trans. by Andre Orianne (Evanston, IL: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p.157. 이하 각주에서는 The Theory of Intuition in Husserl'sPhenomenology를 TIHP로 약칭해서 표기함.
69) 후설자신이 이같은 결과를 인식하고, 후기작품에서는 생활세계(Lebenswelt)로 선 회하였다. 그러나 생활세계에서도 여전히 인간관계의 본질을 드러내어 밝히고 있지 는 못하다. Anthony F. Beavers, op. cit., p.27. 참조.
70) EI. 91.
71) Anthony F. Bears, op. cit., pp. 72-3.
72) TIHP. 94.
73) TI.170.
74) 자아와 타자의 본래적 관계의 의미는 ‘유한한 자아’와 ‘무한한 타자’의 개념을 통 해 이해할 수 있다. 자아의 유한성과 타자의 무한성에 비추어 볼 때, 유한한 자아가 무한한 타자를 내포하거나 통합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이것은 더 작은 것이 더 큰 것을 자기안에 가두려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 레비나스는 유한한 자아와 무한한 타자의 관계에서 올바른 형태는 무한한 타자를 열망해 가는 움직임으로 설명한다. 열망을 통해서만, 유한한 자아는 무한한 타자에 다가갈 수 있다.
75) Anthony F. Bears, op. cit., p.78.
76) TI.119.
77) 감각작용의 충만은 후설의 에포케를 침해한다. 이것은 레비나스에게 문제되지 않지만, -그것은 타자의 접근으로 열려진다- 후설에게는 문제된다. 후설의 방법은 그의 기획을 위하여 에포케의 완전한 사용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78) TI.188.
79) 하이데거나 레비나스 모두 ‘제일철학의 재건’에서 플라톤의 소피스트의 중심적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존재에 대하여’라는 부제가 붙은 『소피스트(ΣΟΦΙΣΤΗΣ)』 에서는 존재?운동?정지?동일자?타자의 다섯 가지 범주의 문제가 주제로 등장한 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철학이 ‘존재의 의미’에 대한 논의로 시작하는 반면, 레비나스는 ‘동일자와 타자’에 관한 문제로 시작한다. 이같은 문제의 식의 차이로부터 하이데거가 서구철학의 문제를 존재와 존재자들의 관계나 존재망 각에 있다고 본데 반하여, 레비나스는 동일자와 타자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한 채, 모든 타율성을 자율성으로 환원한데 있다고 본다. 특히 레비나스에게서 타자와의 관계는 존재론적 문제가 아니라, 윤리학적 문제이다. 존재론으로부터 윤리학으로의 전환은 본 장의 4절「제일철학으로서의 형이상학」에서 논의된다.
80) Martin Heidegger, Sein und Zeit (Tubingen : Max Niemeyer 1963), S. 37, 38.
81) a. a. o. S.37.
82) 신오현, “현상학과 실존철학”,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앞의책, 167쪽.
83) 신오현, 위의 논문, 174쪽.
84) Martin Heidegger, a. a. o. S.12.
85) a. a. o. S.12.
86) 신오현, 앞의 논문, 176쪽.
87) 이기상, 『하이데거의 존재와 현상』, (서울: 문예출판사,1992), 169쪽.
88) Anthony F. Beavers, op. cit., p.31.
89) Anthony. F. Beavers, pp.32-34. 참조.
90) 소광희, 앞의 책, 104쪽. 참조.
91) Anthony. F. Beavers, pp. 32-33.
92) 하이데거와 레비나스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인간경험의 기본구조에 대한 근본 적 불일치에 연원한다. 인간존재란 염려하면서 세계안에 거주한다고 말하는 하이 데거에 대해, 레비나스는 인간존재란 근본적으로 향유를 누리면서 세계에 거주하는 존재로 본다. 이같은 근본적인 시각차로부터 하이데거가 대상적 사물을 도구적 관 점에서 보는 반면, 레비나스는 대상적 사물을 도구적 대상이 아니라 영양과 기쁨과 고통이 되는 삶의 내용의 궁극성으로 본다.
▶하이데거 - 도구적 세계 ---- 도구 ---- 염려
▶레비나스 - 환경적 세계 ---- 궁극적 의미 ---- 향유
93) TI. 133.
94) TI.170.
95) TI.170.
96) Martin Buber,"Die Verwirklichung des Menschen, Zur Anthropologie Martin Heidegger" Philosophia 3, 1938, S. 293 f.
97) Dieter Thoma, "Existenz", in Ethik, ed. Heiner Hastedt/Ekkehard Martens, Rowohlt Taschenbuch Verlag Gmbh, 1994, S.261.
98) Dwight Furrow, Against Theory (New York : Routledge,1995).pp. 139-144.
99) 강영안, “철학의 종말과 인간의 미래”,『주체는 죽었는가』(서울:문예출판사, 1997), 291-2쪽.
100) 진교훈, “Martin Heidegger의 인간관”, 철학적 인간학 Ⅰ, 앞의 책, 136쪽.
101) 서구철학의 흐름이 전적으로 적대적 인간관으로 나타난 것은 아니다. 특히 마 르셀은 자아들의 깊은 교통을 명상의 본질로 삼고 있다. 사르트르의 경우『존재와 무』에서는 자아의 절대적 분리가 존재하지만, 마르셀의 경우 자아(moi)는 본질적으 로 너(toi), 인격들, 절대적 너(le Toi absolu), 신(Dieu) 등과 관계를 맺고 있다. 마 르셀에게서 나는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우리는 우리와 관련된 사람들과 절대적 너 (toi absolu)와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마르셀은 타자성(alterite)의 문을 열어 주는 것, 동경에로 열린 세계 등에 대해 말한다. 그는 “존재(etre)의 신비가 존재한다.” 고 본다. 그의 이론은 인격의 이론이다. 그에게 철학적 문제는 언제나 인격에서 인격에 로 호소하는 인격의 문제이다. (Jean Wahl, 앞의 책 . 165-8쪽.) 앞의 이론적 배경 에서 마르셀과 레비나스 사이에 친밀한 교류가 있었음을 언급한 것처럼, 양자는 계 시?동경?너와의 관계 등을 중시하는 점에서 서로 친화성이 있다.
102) 전경갑,『현대와 탈현대의 사회사상』(서울: 한길사, 1997), 103-121쪽.
103)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L'Etre et le Neant) 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헤겔로 부터 유래된 즉자(l'en-soi)와 대자(le pour-soi)의 구분이기는 하지만, 무엇보다 도 이런 구분 자체가 사르트르와 헤겔을 구분하고 있다. 왜냐하면 즉자와 대자, 그 중에서도 특히 즉자는 헤겔과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정의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르 트르의 경우, 즉자는 묵시적이기보다는 오히려 불투명성이며, 또 즉자의 결합과 대 자의 결합, 그리고 더욱이 이 둘의 결합이란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자와 대자의 결합 불가능성의 단언은 신의 관념의 부정 그 자체이다. 바로 그 곳 에서 사르트르의 사상은 니체의 영감을 받고 니체의 사상과 만난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사르트르의 대자는 헤겔과 유사한 방식으로 정의된다. 즉 정신은 영원한 운동 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내가 아닌 바의 것이며, 또한 나는 내가 나인 바의 것이 아니다(je suis ce que je ne suis pas et je ne suis pas ce que je suis.). (Jean. Wahl, 앞의 책, 158쪽.>
104) 사르트르,『존재와무Ⅰ』 손우성역, 삼성세계사상9, (서울: 삼성출판사, 1993), 191-8쪽 참조.
105) 위의 책, 204쪽.
106) 위의 책, 408쪽.
107) 위의 책, 411-413쪽. 참조./ 헤겔의 부정(negation)과 존재(l'existence)의 관념은 사르트르에서 변형된다. 헤겔 철학의 즉자(l'en-soi)와 대자(le pour-soi)가 화합되는 절대정신은 무신론적 실존주의자인 사르트르에게서 거부된다. 그러나 동일성의 주 장은 유지된다.
108)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 Ⅰ』의 <시선>의 제하에서 ‘타인의 시선’에 관한 논의 를 전개하고 있다. 타인의 시선은 ‘나를 봄’이고, 내가 ‘쳐다보여져 있음’이고 (442쪽), 나는 ‘잡혀진 것(443쪽)’ 으로 설명된다. 사르트르는 이같은 상황을 ‘나 는 더 이상 나의 상황의 주인이 아닌 상황’으로 설명한다. 이를 사르트르는 “타자 의 평가에 나를 내맡긴다”(447쪽) 는 말로 설명하면서, “나의 자유가 아닌 하나의 자유, 나의 존재의 조건 자체인 하나의 자유의 중심에서 내가 예속적으로 있는 한 도에서 나는 노예이다”(447쪽) 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같은 관점에서도 사르트르와 레비나스의 관점상의 차이를 알 수 있다. 레비나스에게서 ‘타인이 나를 보는 상 황’, ‘타인이 나를 부르고, 나를 보는 상황’은 윤리적 호소가 발생하는 상황이고, 선임된 이로서 윤리적 자아의 고유성이 형성되는 자리이다. 윤리적 자아의 고유성 에 관한 논의는 본 논문 Ⅴ장에서 이루어진다. (위의 책 참조.)
109) 사르트르에 있어, 나 자신의 완전한 자아의식은 나에 대한 타자의 의식에 의존 한다. 이 점은 타인과 무관하게 자기 자신과의 왕래속에서 홀로 존재할 수 있는 독 거적인 하이데거의 현존재에 비하여 훤씬 더 사회적 자아로 발전되었다.(Dieter Thoma, a.a.o.S.참조.)
110) 사르트르, 『존재와 무Ⅱ』, 손우성역, 삼성세계사상 30, (서울:삼성출판사, 1993). 114쪽./이종영,『가학증, 타자성, 자유』,(서울: 백의,1996),41-54쪽 참조.
111) TI. 83.
112) TI. 82-3.
113) TI. 84.
114) 敍品의 사전적 정의는 정해진 수도과정을 거치거나 자격요건을 갖춘 사람에게 특별한 예식을 거쳐 자격을 부여함을 의미한다. 레비나스는 자유의 서품(ette investiture de la liberte)이란 말을 쓰고 있다.(TI.84.) 그가 말하는 ‘자유의 서 품’은 자유가 타자에 대해 갖는 윤리적 책무성을 고려하는 개념이다.
115) TI.88.
116) TI.303.
117) Catherine Chalier, op. cit., pp.3-13. 참조.
118) Adriaan T. Peperzak, To the Other, op. cit., p.120.
119) TI.36.
120) 헤겔, 『정신현상학』Ⅰ.Ⅱ., 임석진 역, (서울:지식산업사,1984) 참조.
121) 레비나스는 이기적 자아를 나타내는 ‘ego’ 또는 ‘I’와 구분 지어, 윤리적 자아 를 ‘self’ 또는 ‘me’로 나타낸다.
122) TI.36-7.
123) TI.36.
124) 세계라는 타자에 대한 자아의 존재 방식은 쓸쓸하고 외로이 버려진 존재가 아니 라, 친밀성이 깃들어 있는 집안에서 세계를 자기화하고 동일시하면서 존재한다. 자아가 제일 먼저 부대끼는 대상적 세계의 타자 속에서 자아는 자기보존(conatus essendi)적이다. 자아는 세계 속에서 자신의 자리, 집을 구축한다. 거주는 바로 스스로를 유지하는 양태이다. 이 과정에서 세계의 타자성은 자기-동일성으로 전도 된다. 이들 동일화의 요소들은 육체, 집, 노동, 소유, 경제의 구조를 가진다. 레비 나스는 동일자의 동일시를 바로 에고이즘의 구체성이라고 말한다. TI.38. / 이와 같은 동일화의 과정은 본 논문의 Ⅲ장 향유적 자아의 내면성에서 다루게 될 것이 다.
125) 강영안, 『주체는 죽었는가』, 앞의 책, 208-9쪽.
126) TI.35.
127) TI.53.
128) EI.73-83.
129) TI. 39.
130) TI. 40.
131) TI. 41-2.
132) 인간과 인간관계를 알기 위해서는 타자의 타자성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19 세기 포이어바흐(L. Feuerbach)가 당신(thou)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 발견을 한 이 후, 타자중심성(heterocentricity)에 대해 가장 진지하게 연구한 이는 바로 레비나 스이다. 우리가 타자를 또 다른 자아(alter ego)로서 보는 차원을 넘어서, 자기보 다 선차적인 존재로 인식할 수 있는 윤리는 타자중심성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타자 본위의 윤리 안에서 책임은 자유보다 선행하는데, 자유가 자기중심적 또는 자아 중 심적인데 비해 책임성은 타자 지향적이기 때문이다. 윤리의 개념은 ‘여기 아닌 곳 에’, 그리고 ‘다른 방법 속에’ 그 중심이 놓여 있다. 즉 ‘책임지는 자기’야말로 진 정 윤리적인 자기인 것이다. 레비나스는 이것을 윤리적 탈존재론(meontology)이라 고 본다. 이와 같은 의미의 탈존재론이나 타자중심성의 관점에서 볼 때 존재 (existence)의 의미는 재해석된다. 즉 존재의 어원 ex/istence에서 볼 수 있는 것 처럼, 존재의 가장 핵심적인 측면은 자아중심성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세계 (mitwelt) 및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환경, Umwelt)를 향한 탈중심성(excentricity) 이다. 탈중심적인 것으로서 인간은 외부세계에 노출된 존재이며, 외향성으로 향하 는 존재이다. 말하자면 존재의 모토는 “안으로 들어가지 말고 밖으로 나가라! 인식 론적 주체가 되기보다 먼저 윤리적 행위자가 되라!”인 것이다. 존재의 고유성은 자 아중심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타자중심성 또는 탈중심적 요소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만 보장되기 때문이다. 탈중심적 존재로서 인간은 외부세계에 노출되어 있고 저편 까지 넘어서 도달하려는 존재이다. 다시 말해서 존재의 고유성은 자아중심성에 의 해서가 아니라 타자중심성 또는 탈중심적 요소들과의 대화를 통해서만 보장되기 때문이다. (정화열, 『몸의 정치』, 박현모 옮김, (서울: 민음사,1999), 19-20쪽.)
133) 레비나스에 있어 형이상학은 어떤 신비주의나 신학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윤리 학과 관련된 문제이다.(TI. 78) 이 점에 레비나스 윤리학의 탁월성이 있다. 그는 인간과의 관계와 별개로 신(Dieu)에 관한 인식이란 있을 수 없음을 보여준다. 레비 나스에게서 신과의 관계는 인간에 대한 실천을 외면하고는 가능하지 않다. / 타자 와 신의 관계는 레비나스의 논문 “타자의 흔적”과 “신과 철학” 그리고 그의 저서 『존재와 다른 것 또는 존재사건 저편』에서 논의된다.
134) TI.78-9.
135) Emmanuel Levinas, "Philosophy and the Idea of Infinity", Collected Philosophical Papers, trans. by Alphonso Lingis, (Netherlands: Kluwer academic publishers), 1995. PP. 55-6.
136) Ibid., pp.53-4.
137) Adriaan Peperzak, To the Other, op. cit., p.105.
138) Emmanuel Levinas, op. cit., pp.54-5.
139) 강영안, “향유와 거주”, 309쪽.
140) 자아의 통일기능이 미치지 않는 초월의 타자에다 존재와 지식의 원천을 두는 서 양 철학자들 자신의 예외가 있다. 이것은 타자의 자기화에 있어서 자아의 동일성이 한계에 부딪치고 있음을 시인하는 것이다. 플라톤에 있어서 존재와 지식의 원천인 善은 존재와 지식자체로 동일화될 수 없는 초월의 타자성이다. 플로티누스에게서 도 그의 가장 높은 진리인 一者는 개념으로 서술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존재 자 체도 아니다. (박동환, 앞의 책, 247쪽.)
141) Emmanuel Levinas, op. cit., pp. 53-4.
142) TI.92-3.
143) 말브랑슈는 기독교 철학자로 데카르트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을 자기의 정신 안에 융합시킨 사람으로 평가된다. 데카르트의 이성과 감성의 분리를 거부하는 말 브랑슈의 사상은 철학과 신학의 융합, 기회원인, 신의 존재증명 등을 내용으로 한 다. (이광래, 프랑스철학사, (서울: 문예출판사, 1996), 67-76쪽.> 말브랑슈는 유한존 재의 모든 이해는 무한의 이념을 참조한다고 말한다. 궁극적 이념의 지식 (knowledge)은 다른 모든 지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특성과 구조를 가진다. 만일 지식이 본질적으로 객관화와 주제화 하는 방식이라면, 무한에 관한 지식이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타자는 대상도 아니고 주제도 아니며, 그들에로 환원될 수도 없 기 때문이다. 우리는 타자를 제한하고 측정하기 위하여, 자신의 지평 앞에 놓을 수 없다. 무한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규정하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Nicole Malebranche, Conversations on Metaphysics and Religion, Entretiens sur la Metaphysique et sur la Religion, Œuvres Completes [Paris : Vrin, 1965], pp.53-54)
144) Emmanuel Levinas, op. cit., p.56.
145) TI. 33-5.
146) 플라톤은 『향연』에서 에로스에 관한 아리스토파네스의 양성의 신화를 거부한 다. 레비나스가 여기서 이같은 주제를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레비나스에 있어, 열 망은 우정, 에로틱한 사랑, 부성애, 모성 등에서 만족의 욕구나 사랑의 정서가 아니 다. 레비나스는 “무한에 대한 열망은 사랑의 감상적인 만족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절박성의 엄격함이다.”라고 구분한다. 그의 논문 “자아와 전체성(Le Moi et la Totalite)”은 사랑(amour)과 사회성(socialite)의 차이를 보여준다. 레비나스에게서 사회성과 윤리성은 같은 개념으로 사용된다.
147) 레비나스는 ‘죽음’의 현상에서 절대적으로 다름을 나타내는 타자성의 외재적 성 격을 본다. 죽음에서 주체는 더 이상 자율성과 능동성을 띨 수 없다. 주체는 죽음 에서 주체로서의 자신의 주도권을 상실한다. 최소한의 짐작이나, 계획도 세울 수 없이, 하나의 사건으로 다가오는 것이 바로 죽음이다. 죽음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절대적으로 다른 것(absolument autre)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 이다. 이 다른 것이 짊어지는 타자성은 우리 자신의 것으로 동화시킬 수 있는 타자 성이 아니라, 그것의 존재자체가 타자성인 그런 의미의 타자성이다. (TA. 84)
148) TI. 3-5/ 33-35
149) TI. 64-5.
150) TI. 33-5.
151) TI. 40-2.
152) TI.38.
153) TI. 55-60./ 이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Ⅴ. 다원성의 수용에서 자세히 다루어짐.
154) TI. 64./ 레비나스는 자아와 자아사이의 분리와 거리를 강조한다. 왜냐하면 분 리와 거리를 유지할 수 있어야, 자아로의 동화, 통합 그리고 표상 등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아들간의 윤리적 관계는 거리를 유지하고 타자를 열망해 가는 운 동, 초월성에서 가능해진다.
155) TI. 62.
156) Platon, Phaedrus, 276 a. TI.73.
157) TI.73.
158) TI.72-3.
159) TI.39.
160) TI.77-8.
161) 是故로 形而上者를 謂之道ㅣ오 形二下者를 謂之器오.(周易, 繫辭上傳,十二章.)
162) Martin Heidegger, Nietzsche Ⅱ, Gallimard, 1971. SS.122-138.
163) TI. 45-6.
164) 손봉호, 『고통받는 인간』(서울: 서울대 출판부, 1996), 15쪽.
165) TI. 48.
166) TI. 42.
167) TI.48.
168) EI. Richard A. Cohen의 Translater's Introduction, pp. 5-8. 참조.
169) 존재론에 대한 윤리학의 우선성에 대한 레비나스의 설명은 『전체성과 무한』안 의 “형이상학은 존재론에 앞선다”(TI.42.) 라든지 “진리는 정의를 전제로 한다.” (TI.90.)에서 논의된다.
170) EI.10-11.
171) EI. 14.
172) Anthony F. Bears, op. cit., pp. 37-8.
173) TI. 163.
174) TI.164-5.
175) OB. xxix.
176) TI.127.
177) Anthony F. Beavers, op. cit., p. 90.
178) Ibid., p. 86.
179) 논자는 ‘윤리적 자아’를 왜 다른 사람에게 사로잡힌 ‘인질’로 설명하게 되는 가 를 Ⅴ장「윤리적 자아의 구성」에서 논의할 것이다.
180) TI.197.
181) 강영안, “향유와 거주”, 310쪽.
182) 위의 논문, 311쪽.
183) 레비나스의 초기저서인 『존재에서 존재자로』에서, 자아의 자기정립은 ‘홀로 서기’(hypostase, 실체)로 표현된다. 이후 TI 에서 ‘홀로 서기’는 ‘분리’의 개념으 로 전환된다. ‘홀로 서기’의 개념은 다음 논문 참조. 강영안, “레비나스의 주체와 타자”, 『주체는 죽었는가』, 위의 책, 225-231쪽.
184) 레비나스의 분리의 개념은 부버의 분리의 개념과 비교하면 그 뜻이 좀 더 분명 해진다. 부버는 근원어 ‘나-너’와 ‘나-그것’의 관계에서, ‘나-그것’ 관계의 나는 개적존재(Eigenwesen)로서 자기를 주체로 의식하지만, ‘나-너’ 관계에서의 나는 인 격(Person)으로 자기를 주체성으로 의식하는 존재로 구분한다. 개적존재는 다른 여 러 개적존재에 대하여 자기를 분리시키면서 나타난다. 자기분리의 목적은 경험과 이용이며, 경험과 이용의 목적은 삶의 전기간에 걸친 죽음이라고 표현한다.(마르틴 부버, 나와 너, 표재명 역, (서울: 문예출판사, 1993), 82-3쪽.) 부버와 레비나스 를 비교한다면, 부버가 자아들간의 분리를 경험과 이용의 측면에서 본 반면, 레비 나스는 자아들간의 분리를 전제로 해서만 타자와의 거리가 유지되고, 동화나 통합 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레비나스는 부버가 발견한 ‘나-너’관계가 놀라운 것 이긴 하지만, ‘나-너’관계는 인간에게 있어서 우정과는 다른 삶의 요소 즉 행복추 구, 경제, 사물과의 표상적 관계, 향유 등의 요소에 대해서는 설명해 줄 수 없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이같은 간과의 결과는 오만한 유심론(spiritualism)에 머무는 것으로 비판한다. TI. 68-9.
185) 강영안, “레비나스의 주체와 타자”, 231쪽.
186) 위의 논문, 232쪽.
187) TI.131.
188) TI.141.
189) TI.33.
190) TI.110.
191) TI.127.
192) TI. 114.
193) Platon, Philebus 46a. TI. 116.
194) TI. 116.
195) TI.115-6.
196) TI.114-5.
197) TI. 143-4.
198) 이정우, 앞의 책, 167-8쪽.
199) OB. 63.
200) OB. 64.
201) TI. 130-134.
202) TI. 135.
203) TI. 136,.
204) TI. 127.
205) TI. 128.
206) TI. 129.
207) TI. 37.
208) TI.137-8.
209) TI. 138.
210) ‘귀를 갖지 않은 자’란 은유적 표현이다. ‘들을 귀 있는 자 들어라’는 성경 귀 절은 윤리적 호소와 요청에 귀기울이는 자를 의미한다고 볼 때, ‘귀를 갖지 않은 자’란 그같은 요청을 무시하고 외면하는 자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211) TI. 118.
212) TI. 120.
213) TI. 147.
214) 자아, 향유, 감성 그리고 내면성은 분리된 존재로서 타자와의 관계를 열기 위해 서 그리고 무한성의 이념을 위해서 필요하다. 형이상학적 열망은 향유하는 분리된 존재 안에서만 발생할 수 있다. 그렇다고 분리된 존재와 무한한 존재가 반대 명제 (anti-these)의 개념에서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분리를 보증하는 내면성 (interiority)은 절대적으로 닫혀진 존재를 형성한다. 그러나 이같은 닫힘이 내면 성으로부터의 탈출을 방해해서는 안된다. 분리된 존재에서, 밖으로 난 문은 동시 에 열고 닫을 수 있어야 한다. (TI.148) 레비나스의 이같은 관점은 전통적으로 자 아의 내면성의 추구가 자아의 이기성에 머물러, 타자로 향한 출구가 없었음을 감안 할 때, 윤리학으로서 그의 이론의 통찰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215) 현대 철학에서 몸적 삶에 대한 관심이 증대해가고 있음을 염두에 둘 때, 우리는 레비나스에게서 우리의 몸의 의미가 어떻게 밝혀 지는가를 주목해 볼 만하다. 레비 나스는 몸적 삶에서 욕구를 지닌 인간의 이기성과 몸에 의해 타자에 노출된 존재로 서의 인간의 윤리성을 동시에 밝혀 주고 있다. 본 논문 Ⅲ.「향유적 자아의 내면 성」에서는 몸적 존재의 이기성을 다루고, Ⅴ.「윤리적 자아의 구성」에서는 타자 에 노출된 몸의 윤리적 의미를 다루게 될 것이다.
216) TI. 163./ 몸에 대한 신체현상학의 효시인 마르셀(G. Marcel)에 따르면 몸은 실 존의 중심 문제인 것으로, 다른 문제는 몸의 문제의 해결에 달려 있다. 마르셀은 몸은 소유의 질서가 아니라 존재의 질서에 속해 있다고 주장한다. 살아가는 몸은 대상들 속의 한가지 대상이 아니다. 몸은 타성적인 것이 아니라, 느끼는 주체이다. 우리는 우리의 몸이다. 몸은 더 나아가 사회적인 것으로 연결시키는 탯줄이다. 사 회적이라 함은 무엇보다 앞서서 몸으로 서로 부대낌을 의미한다. 몸이 있기에 우리 는 타인에게 보일 수 있고, 다른 몸들, 다른 정신들과 교류할 수 있다. 몸은 세계 속에서의 사회적 처소이다. 메를르 퐁티가 말했던 것처럼, 지각의 생생한 장소인 몸이라는 매체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자신을 세계와 연결시킨다. 이같은 현상학적 설명을 통해서 볼 때, 푸코(M. Foucault)와 하버마스(J. Habermas)의 기본적 결함 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이들이 살로서의 몸을, 주체적인 몸을 이해하지 못한 것 이다. 하버마스의 경우 주체적이자 객체적인 몸의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 에, 그의 의사소통적 행위 이론은 기반이 약하다. 그는 ‘의사소통하는 몸’에 대해 무지하며,(하버마스의 은유적 표현을 사용한다면, “몸은 의사소통적 행위이론의 몸 집에 끼어 있는 가시이다.”(Jurgen Habermas, Postmetaphysical Thinking. Trans. William Mark Hohengarten, Cambridge:MIT press. p.47.)) 주체중심의 이성을 의 사소통적 행위로 옮겨진 이성으로 대체하려 한다는 점에서 논리중심주의자로 남아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푸코의 경우, 감금된 몸을 밝혀내는데는 기여했지만, 살로 서의 몸, 주체로서의 몸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의학의 몸, 처벌 대상의 몸, 감금된 몸을 보여주는 일에는 탁월했고, 후기에 ‘새로운 형태의 주체성’을 보 여 주고자 했지만, 여전히 구조주의에 사로잡혀 있던 그는 몸에 기초한 새로운 주 체성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정화열, 앞의 책, 243-246. 참조) 논 자는 이같은 맥락의 몸의 연구 중에서, 레비나스가 몸의 ‘윤리적 의미’를 밝혀내는 점에서 그를 높이 평가할 수 있다고 본다.
217) TI. 164.
218) TI. 165.
219) TI. 166.
220) 강영안, “향유와 거주”, 320-1쪽 참조.
221) TI.159.
222) TI. 160.
223) TI.159-60.
224) TI. 161-2.
225) TI. 162.
226) TI.156
227) TI.152.
228) TI.153.
229) TI.154-5.
230) TI.155.
231) 강영안, “향유와 거주”, 324-5쪽.
232) 진교훈, 가정의 근원적 의미, 「정신문화연구」 제19권 2호., 한국정신문화연구 원, 1996. 7쪽.
233) J. H. Pestalozzi, Wie Gertrud ihre Kinder lehrt. R. Ⅵ., 1801. 위의 논문, 10쪽 재인용.
234) 위의 논문, 14-5쪽.
235) TI 155.
236) TI. 183.
237) TI. 251.
238) 레비나스에게서 얼굴(visage)은 인간의 얼굴 즉 존재자(l'etant)를 나타낸다. 존재자는 존재(l'etre)에 대하여 우선한다.
239) TI.189./ 여기에서 빛이 은유하는 것은 서구철학이 전통적으로 지향해온 보편성, 일반성, 추상성이다. 레비나스는 플라톤 이래로 지향해 온 이같은 의미의 빛이 사 실상 중립성, 무인격성의 오류를 범하면서, 구체적 인간들을 억압하고 있다고 비판 한다. 그리고 서구적인 ‘보편성’의 개념은 도덕적 책임을 가능하게 하는 개인의 의 지를 억압한다는 점에서 폭력적이고 획일적인 것으로 비판받는다. 보편성의 획일주 의를 극복하려는 레비나스의 노력은 벌거벗은 얼굴을 지닌 모든 타인과의 윤리적 관계에서 형성되는 비대칭성의 보편성, 즉 윤리적 관계의 보편성의 개념으로 나타 난다.
240) TI. 188./ 시각에 대한 특권은 최근의 포스트-모던적 관점에서는 남성중심주의, 논리중심주의, 로고스중심주의, 서구중심주의 등으로 비판받는다. 몸적 존재의 감 성과 향유는 시각 중심적 인식론을 전복시킨다. 향유는 ‘보이는 어떤 것을 대상화 하려는 것’을 벗어난다. 레비나스의 타자성의 철학은 프랑스 페미니스트 철학자인 이리가레이(L. Irigaray)에게서 신체페미니즘의 논리로 연결된다. 레비나스의 가까 움의 윤리와 대면의 윤리에 영향을 받은 이리가레이는 “시각만을 강조하여 다른 감 각을 희생할 경우 몸의 구체성과 신체적 관계성이 빈곤해진다.”고 말한다.
241) 우리말 인간이란 말에서 人間은 사람(人)과 사이(間)라는 한자어가 결합되어 있 다. 이는 인간됨 또는 존재의 핵심이 사람들 사이에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부버 (M. Buber)의 용어 das Zwischenmenschliche와도 비슷하다. 존재는 관계적 개념으 로서 타자로서 어떤 사람과 다른 어떤 사람의 결합이다. 윤리학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 대한 문제를 불가피하게 다루게 된다. (Watsuji Tetsuro, Rinrigaku, 2 vols.(Tokyo : Iwanami Shoten, 1965). 정화열, 앞의 책, 223쪽 재인용.) 레비나스 에게서 ‘관계 안에 있는 자아’의 형태는 Ⅴ장.「출산과 무한한 타자와의 관계」와 「효와 자애, 우애의 공동체」에서 다루게 된다. 이 중에서 출산을 통해 형성되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관계 안에 있는 자아’의 형태를 가장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신의 고유성을 빚지며, 아버지는 아들을 통해 무한한 미래와 관련되면서, 자신의 유한한 가능성을 넘어선다.
242) ‘동일자 안의 타자(l'autre dans le meme)’란 어떤 경우일 수 있는가? 레비나스 의 이 말은 代贖을 의미하는 ‘윤리적 자아’를 나타낸다. 윤리적 자아란 나의 이기 적 동일성에 저항하면서, 내 안에 타자를 수용하는 것, 즉 내 안에 타자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을 의미한다. 윤리적 자아와 代贖의 의미는 본 논문의 Ⅴ.「타자로 향 한 윤리적 자아」에서 논의된다.
243) TI. 187.
244) Emmanuel Levinas, "Philosophy and the Idea of Infinity", p.55.
245) Adriaan Peperzak, To the Other, op. cit., p.110.
246) Emmanuel Levinas, op. cit., p. 55.
247) Ibid., p.20.
248) 로젠츠바이크는 얼굴이 몸중에 가장 수용적인 기관을 구성한다고 말한다. 코헨 (Richard Cohen)은 레비나스의 얼굴의 개념은 로젠츠바이크의 저서 『구원의 별』 (Der Stern der Erlosung)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Susan A. Handelman, Fragments of Redemption (Bloomington and Indianapolis : Indiana university, 1991), p.208.
249) TI.51.
250) TI.199.
251) Ludwig Wittgenstein, Culture and Value, Ed. G. H. von Wright and Trans. Peter Winch. Chicago :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0. p.23.
252) Emmanuel Levinas, Outside the Subject, trans. Michael B. Smith. Stanford :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3. p.158.
253) TI. 196.
254) Adriaan Peperzak, op. cit., P.20.
255) TI.199.
256) TI.198-9.
257) 정화열, 앞의 책, 57쪽.
258) TI.198.
259) TI.199-200.
260) 이 말은 자신의 자유를 제약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실존철학의 ‘사실성’을 은유 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261) TI. 201.
262) TI.202.
263) Adriaan Peperzak, op. cit., p.22.
264) 소쉬르의 구조언어학은 언어에 어떤 근원(현상학자들은 인간의 의식과 같은 주 관적 실재를, 초기비트겐스타인 등은 객관적 실재를 언어의 근원으로 보았다)이 있 다는 근원주의적 입장에 반대한다. 소쉬르는 언어를 능기, 소기, 지시대상으로 구 분한 후, 능기와 소기의 결합을 언어의 기본 단위 즉 기호로 규정하고, 기호의 의 미는 언어체계 내의 변별적 차이를 통해서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언어적 기 호의 의미의 원천은 언어외적 실재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같은 주장에 근거하여 구조주의 언어학은 언어의 의미가 어휘들 자체보다는 어휘들간의 관계적 구조에 있 음을 강조하고, 언어의 가치나 의미가 공시적 관계의 구조 혹은 차이를 통해서만 구성된다는 점에서, 언어는 본질상 실체가 아니라 형식이라고 주장하게 된다. (김형 효,『구조주의의 사유체계와 사상』(서울: 인간사랑, 1989). 특히 제2장 제1절 참조.)
265) 라깡은 프로이드의 무의식을 소쉬르의 언어학적 관점에서 접근하여, 무의식이 언어의 조건이 아니라, 오히려 언어가 무의식의 조건임을 발견하였다. 라깡은 프로 이드의 꿈의 분석에 나타나는 압축(condensation)과 치환(displacement)은 구조언어 학의 은유와 환유에 상응한 의미화 기능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압축과 치환을 통한 무의식의 구조적 기능은 은유와 환유의 언어적 수사능력이 없다면 불가능하기 때문 에, 라깡은 “언어가 곧 무의식의 조건”이라는 혁명적 선언을 하게 된 것이다.
266) Derrida, Speech and Phenomena , Evanston : Northwestern Univ. press, 1973. 서문 참조.
267) 전경갑, 앞의 책, 145쪽.
268) Susan A. Handelman, op. cit., p. 221.
269) 레비나스는 서구의 진리를 자율성에 근원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것의 대표 적인 경우가 플라톤의 상기설(reminiscence)이다. 플라톤의 상기설에서 스승의 역할은 내가 이미 언제나 알고 있던 것을 기억해내는데 필요한 도움을 주는 것이다. 레비나스에게 있어서, 이같은 진리관은 모든 초월성과 기억불가능성을 배제하면서, 자기자신의 자유로운 사유에 의해서 재생산될 수 없는 모든 진리를, 결국 계시를 배제한다고 비판받는다. 이같은 사유형태에서 진리는 개념적 통찰에 의해 존재로 통합되며, 소유된다. 이것은 결국 계시하는 신도 배제한다. 이같은 비판적 관점으로부터, 레비나스는 서구철학을 근본적으로 무신론(atheisme)으로 본다. 심지어 ‘존재론적 신학’의 신도 다른 존재자들 중의 한 존재로, 인간 영혼(ame) 안의 단순한이념에 불과하다. 레비나스는 진리전체가 자신의 지평으로 가두어지는 한, 철학은 자아론이라고 비판한다. 이같은 의미의 서구적 진리를 비판하면서 레비나스는 참된 진리는 외재성, 생생한 경험, 다름, 초월성, 타율성을 함유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참된 철학은 낯선 것에로의 여행(vers l'etrange)인 것으로, 자율성에 의한 지식의 정복이 아니라, 외재적 진리와의 교제이다. 자아와 타자의 외재적 교제를 가능하게 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대화이다. 물론 대화의 형태에서도 레토릭과 대화는 구분된다.
270) TI. 62.
271) TI. 60.
272) 구조언어학이 주장하는 “랑그가 말한다”는 명제는 화자가 언어규칙을 따라야 하 는 한, 타자의 자율성은 확보되지 못하고 따라서 주체는 탈주체화된다는 의미를 내 포한다. 이에 대해 레비나스의 “담론이 의미를 정초한다”는 명제는 담론이 이미 너 와 나의 구체적인 얼굴을 가진 주체들간의 관계를 전제하는 만큼, 의미는 자아와 타자의 주체들로부터 정초됨을 나타내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레비나스가 주장하는 말하기(saying)의 수동성(passivite)은 구조주의자들처럼 “주체 없이 언 어가 말한다”(OB. 54)는 의미에서의 수동성이 아니라, 타자의 도덕적 요청에 따른 다는 의미의 수동성이다. 레비나스는 윤리학은 대화(dialogue)의 틈(hiatus)을 가 로질러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대화에 있어서, 말해진 것의 연속성과 불연속 성에서가 아니라, 응답의 요구에서 윤리학이 성립함을 의미한다. 타자에게 응답해 야할 책임이 자아의 본래적 책임이며, 자아이전에 타자를 위한 무한책임, 윤리적 책임이다.
273) TI. 204.
274) OB. 25.
275) TI. 89.
276) TI. 97.
277) OB. 101.
278) OB. 173-4.
279) Patricia H. Werhane : "Levinas's Ethics : A Normative Perspective without Metaethical Constraints", in Ethics as first Philosophy, ed. Adriaan Peperzak, op. cit., p.61.
280) Ibid., p. 62.
281) Ibid., p. 62
282) J. Habermas, Communication and the Evolution of Society (Boston: Beacon press, 1979), p. 26. / 전경갑, 앞의 책, 322-5쪽 참조.
283) 료타르에 의하면, 탈현대적 조건하의 다양한 언어놀이와 다양한 언술적 실천에서 하버마스가 주장하는 합의에 이른다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주장한다. 료타르는 일반적으로 진리여부를 가리는 지시적 언어(denotative language), 효율성을 판단하는 수행적 언어(performative language), 정의를 논의하 는 규범적 언어(prescriptive language) 등은 획일적 기준에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 로 이질적이기 때문에, 각기 그 영역 고유의 언어규칙에 따라 진술이 정당화되는 고유의 언어놀이(language game)라는 것이다. (Scott Lash, Sociology of Postmodernism, (London : Routledge), 1990), p. 95. / Jean-Francois Lyotard, The Postmodern Condition : A Report on Knowledge, trans. by G. Bennington et al, (Minneapolis : Minnesota University press, 1984), p. 66.
284) 졸고, 윤리적 행위의 정초방법(Begrundungsmethode)에 관한 연구, 사회와 사상, 서울대 대학원, 1995. 164-7쪽 참조.
285) Annemarie Pieper, Einfuhrung in die Ethik, (Tubingen: Franke, 1991), SS. 177-81. 참조.
286) Jurgen Habermas, Diskursethik, in : Moralbewußtsein und kommunikatives Handeln, Frankfuhrt, 1983. 113f.
287) John Rawls, A Theory of justice, Cambridge, Massachusetts :Harvard Univ., 1973. p. 3.
288) OB. 18-9.
289) Patrica H. Werhane, op. cit., p.63.
290) TI. 304.
291) M. Buber, Between Man and Man, trans. Ronald Gregor Smith (New York : Macmillan, 1965). p. 206. 책임의 윤리를 강조하는 부버에 따르면, ‘나’라는 주체가 의미를 가지려면 ‘나-당신’ 또는 ‘나-그것’이라는 두 개의 관계와 관련지어져야 한다. 말하자면 본래적인 ‘나’란 있을 수 없고, 위의 둘 중 어느 하나와 관계가 이루어질 때 비로소 나는 의미를 갖는 것이다.(M. Buber, I and Thou, trans. Ronald Gregor Smith (New York : Cribner's, 1958) p.4.)
292) OB. 46.
293) TI. 205.
294) OB. 48
295) TI. 290.
296) EI.85-7.
297) TI.72.
298) 레비나스는 언어를 통한 타자와의 교제에서 마주보기의 대화와 레토릭을 구분한 다. 마주보는 대화(dialogue)는 내가 타자를 진정으로 대면하면서, 외재적 존재와 근원적 관계를 형성하는 것으로, 미리 구성된 논리의 전개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다른 그 무엇의 경험이다. 즉 타자의 절대적으로 다른 외재성과 무한한 타자성에 놀라면서, 그의 현현을 수용하면서 전개하는 것이 대화이다. 반면에 레토릭은 타자 와 더불어 말을 나누면서도 그를 이미 안다고 생각하여 그를 대면하지 않고, 내안 에서만 수용하면서, 타자로서의 그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레토릭 (rhetorique)은 타자를 정면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측면으로 대하는 것으로, 불의 이자 폭력으로 비판한다.(TI. 70-1.) 이같은 관점은 부버(M. Buber)가 말하는 교제 에서도 나타난다. 부버 역시 대화란 어떤 타자와 본질적으로 교제할 때, 그래서 타 자가 나 자신의 현상이 아니라 나에 대한 너일 때만 참된 상호성을 형성할 수 있다 고 말한다.(표재명, 키에르케고어 연구, (서울: 지성의 샘, 1998), 212쪽.)
299) TI. 203.
300) TI. 207.
301) OB.47.
302) OB.49.
303) OB.48.
304) 장소에서 추방되어 거주도 없이, 더 이상 집에 머무는 자아가 아닌 존재로서의 ‘말하기’의 주체는 더 이상 자기에로 복귀하는(recueillant) 자기동일성의 주체가 아님을 시사한다.
305) OB. 50.
306) OB. 50./계약관계가 주고받는 상호성(reciprocite)의 관계를 전제한다면, 타인 에게 자신을 노출시키는 ‘말하기’의 수동성에서 보여지는 관계는 타자를 위하여 자 기를 희생하는 비대칭성(asymmetrie)의 도덕적 책임구조를 보인다.
307) 레비나스는 『전체성과 무한』의 「타자와 타자들」, 「얼굴과 윤리학」, 그리고 「인간간의 비대칭성」에서 자아와 타자들간의 사회철학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308) TI. 215.
309) TI. 229-30. /252.
310) TI. 215.
311) Adriaan Peperzak, op. cit., p. 170.
312) Ibid., p. 174.
313) TI. 76.
314) TI. 217.
315) TI. 243.
316) TI. 245.
317) 이같은 명제들은 ‘타자의 인정’에 관한 헤겔과 레비나스의 개념적 차이, 시각의 전환을 통해 알 수 있다. 헤겔 변증법의 주-노관계에서 생사를 건 상호 승인은 타 자로부터 나의 자유를 인정받기 위한 투쟁이다. 그러나 레비나스에게서 ‘인정’은 타자에게서 자기를 인정받는 문제인 것이 아니라, 내가 타자를 인정해 주는 문제이 다. 좀 더 부연하자면, 주체에 대해서 타자적인 것, 주변의 홀대받는 이들에 대한 관심, 역사의 흐름에서 주변적 자리로 밀려나 간과되고 희생되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인정을 의미한다.
318) TI. 187-90 / 212-14. 참조.
319) Emmanuel Levinas, "The Ego and The Totality", Collected Philosophical Papers, op. cit., pp.25-46. 참조.
320) Adriaan Peperzak, op. cit., p.192.
321) OB. 4.
322) OB.3. 이 말에 대하여 링기스는 다음과 같이 주석을 붙인다.;‘essence’를 essance로 보는 것은 무리이다. essence는 ens와는 구별되는 esse, 존재사건, 존재 과정, 즉 존재자들로부터 구별되는 존재를 나타낸다. 우리 나라에서 레비나스를 본 격적으로 소개하기 시작한 강영안도 essence를 ‘존재사건’으로 옮기고 있다. 본 논 문에서도 essence를 ‘존재사건’으로 이해한다.
323) OB.4.
324) OB.3-4.
325) OB. 9-10.
326) OB.10.
327) OB.11.
328) OB. 51
329) OB. 51-2.
330) OB. 52. /죽음을 향하는 존재는 인내이고, 비-전망이고, 자신을 희생하는 지속 이며, 복종의 형식이다. 여기서 시간의 시간성은 복종의 의미를 지닌다. 이같은 맥 락의 함의는 플라톤이건 레비나스이건 시간의 흐름에 인내하는 주체의 모습을 보여 주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순리에 따르는 동양적 사유전통과는 유사하지만, 죽 음을 향한 존재로서의 실존의 각성을 촉구하는 하이데거와는 특히 비교된다.
331) 강영안, 『주체는 죽었는가』, 앞의 책, 13쪽.
332) 위의 책, 14-5쪽.
333) 김정현, 『니체의 몸 철학』(서울: 지성의 샘, 1995), 88쪽.
334) 위의 책, 89쪽.
335) OB.78-9.
336) OB.77.
337) 본문에서 사용하는 ‘정신’의 의미는 전통적으로 사용하여왔던 ‘spirit’가 아니라 ‘psyche’이다. ‘psyche’는 원래 ‘영혼을 인격화한 표현 또는 육체에 대한 정신’을 의미하고, ‘spirit’는 ‘육체를 떠난 영혼’을 의미한다. 레비나스는 『존재 와 다른 또는 존재사건 저편』에서‘psyche’를 ‘감성(sensibility)와 관련지어 논하고 있다.(OB. 68-72.) 본 논문에서는 ‘psyche’를 ‘정신’으로 옮기고 있는데, 그 이유는 레비나스가 좀 더 영혼에 가까운 soul이라는 말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 유로 본 논문에서는 psyche를 정신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렇지만 본 논문에서 말하 는 정신(psyche)의 의미는 이제까지 이해되어왔던 이론적 정신(spirit)보다 훨씬 더 포괄적이고 심층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문자 그대로 표현하자면, ‘인격 화된 영혼’이다. psyche는 타자를 위함이고, 타자를 위함은 노출의 노출로까지 가 는 보여짐의 수동성(la passivite)인 것이다. 이같은 개념적 구분을 통해서도 우리는 레비나스의 인간이해가 서구철학의 정신위주의 인간이해의 틀을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몸적 존재인 인간을 감각적 차원으로부터 무한의 이념을 수 용하는 초월적 존재로까지, 그리고 이기적 자아이자 윤리적 자아인 것으로 다차원 성에서 설명하고 있다. 이같은 점에서 그의 인간이해는 이론적 정신에 집중해 있는 서구적 사유에 가깝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을 심성적 차원에서 설명하는 동양적 인간 이해에 가깝다. 예컨대 다산의 경우, 몸과 마음은 신묘하게 결합되어 있다(神形妙合 乃成爲人). 그에게 몸과 마음은 두 실체이기보다는 한 실체의 두 측면이다. (다산에 대한 참조는 다음 논문 :이정우, 앞의 책, 175-6쪽 참조.)
338) OB.69.
339) OB.69.
340) OB.70.
341) OB.71.
342) OB.70.
343) OB.73.
344) OB.74.
345) OB.74.
346) OB.76.
347) OB.75-6.
348) OB. 76.
349) OB.78,
350) OB.79.
351) OB.72.
352) OB.74.
353) OB. 103.
354) OB.103-4.
355) 인간의 자아에서 ‘me’의 사회적 의미를 이미 밝혀낸 사람은 미드(G. H. Mead)이 다. 미드는 사회로부터 분리된 자아란 존재할 수 없으며, 그 안에서는 자아의식이 나 의사소통도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미드는 자아구성을 ‘I’와 ‘me’로 분석 하고, ‘me’를 ‘한사람 속에 내면화된 타자’로 설명하고 있다. (미드의 I와 me에 대 한 좀 더 심화된 설명은 다음 논문 참조. 조태훈, “주체적 자아와 사회적 자아”, 『개인과 국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5.) 레비나스에게서 ‘me’는 언어구조에 서 목적격 자아가 의미하듯이, 타자와의 관계 안에 있는 자아로서, 윤리적 호소와 불리움을 받는 자, 노출되어지는 자아, 지명되어진 자아로서 윤리적 의미를 지닌 자아를 나타낸다.
356) OB.105-6.
357) Y. A. Kang, "Levinas on suffering and solidarity", Tijdschrift voor filosofie, 59ste Jarrgang 1997. 9. p.485.
358) OB. 11O.
359) OB.107-8.
360) OB.111.
361) OB.112.
362) OB.112.
363) OB.114.
364) 대속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서 레비나스는 “내가 나일 때, 나는 너이다.(Ich bin du, wenn ich ich bin)”라는 세란(Paul Celan)의 싯귀를 인용하고 있다. (OB.99.) 세란의 시 는 대략 다음과 같다. “ 내가 나 일때, 나는 너이다. / 너의 눈가의 눈물 / 내가 벗겨질수록 나는 더 검어진다. / 나는 정말로 믿지 않네 / 내가 나일 때 나는 너이다. ; 그리고 너의 눈가의 눈물에 서 / 목 매달린 사람이 로프에 질식하네. ” 세란 시의 텍스트와 레비나스 대속의 의미를 관련지어 논의하고 있는 베버(Elisabeth Weber)는 “만일 내가 나일 때 너라 면, 너의 눈의 눈물은 나의 눈의 눈물이 된다”라고 해석한다. 그래서 대속은 너의/ 나의 눈가의 눈물로 울 수 있음, 애도할 수 있음으로 시작한다고 해석한다. Elisabeth Weber, "The Nortion of Persecution in Levinas's Otherwise than Being or Beyond Essence" Trans. by Mark Saatjian, ed. Adriann T. Peperzak, Ethics as first Philosophy, op. cit., p.73.
365) OB. 118.
366) OB.116.
367) 구약성서 창세기 4:9. OB.117.
368) OB.114.
369) OB.117-8.
370) “자아와 타자의 윤리적 관계”는 다소간 개념적 구분이 필요하다. 본 절에서 타 자의 의미는 단순히 ‘타인으로서의 타자’의 의미만을 내포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 의 시간과 같은 무한한 타자성과 관련되는 의미의 타자이다. 레비나스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아이들을 통해 펼쳐지는 무한한 미래의 시간성 등의 타자성에 관 련되는 자아를 논의하고 있다. 이들은 단지 ‘얼굴을 가진 구체적으로 현존하는 존 재자들과의 관계’만을 내용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존재하지 않는 존 재’(pas-encore-etre)와의 관계까지도 포함한다. 이같은 관계는 동양적 에토스에서 는 역시 윤리의 범주 안에서 설명될 수 있는 내용들이지만, 레비나스는 인간간의 관계를 넘어서 있는 것이기에 이 문제를 다루었던 『전체성과 무한』에서 ‘얼굴을 넘어서’(CH.Ⅳ. Beyond theFace)라는 제목을 붙이고 있다.
370) “자아와 타자의 윤리적 관계”는 다소간 개념적 구분이 필요하다. 본 절에서 타 자의 의미는 단순히 ‘타인으로서의 타자’의 의미만을 내포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 의 시간과 같은 무한한 타자성과 관련되는 의미의 타자이다. 레비나스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아이들을 통해 펼쳐지는 무한한 미래의 시간성 등의 타자성에 관 련되는 자아를 논의하고 있다. 이들은 단지 ‘얼굴을 가진 구체적으로 현존하는 존 재자들과의 관계’만을 내용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존재하지 않는 존 재’(pas-encore-etre)와의 관계까지도 포함한다. 이같은 관계는 동양적 에토스에서 는 역시 윤리의 범주 안에서 설명될 수 있는 내용들이지만, 레비나스는 인간간의 관계를 넘어서 있는 것이기에 이 문제를 다루었던 『전체성과 무한』에서 ‘얼굴을 넘어서’(CH.Ⅳ. Beyond theFace)라는 제목을 붙이고 있다.
371) 엠마누엘 레비나스,『시간과 타자』,강영안 역,(서울:문예출판사, 1996).103쪽.
371) 엠마누엘 레비나스,『시간과 타자』,강영안 역,(서울:문예출판사, 1996).103쪽.
이하 각주에서는 『시간과 타자』(LE TEMPS ET L'AUTRE)를 TA로 약칭해서 표기함.
372) TA. 106.
373) TA. 109.
374) TI. 254./ 플라톤의 『향연』에서 아리스토파네스는 신화를 통해 사랑의 힘을 설명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인류는 본래 여성, 남성, 양성체의 원통형 인간이었 다. 이들 인류가 강력한 힘을 뽐내고 오만한 것을 벌하기 위하여 제우스는 이들 인 간을 반쪽으로 갈라놓는다. 그러므로 인간의 에로스는 자신의 잃어버린 반쪽을 회 복하고자 하는 강력한 욕망이라는 것이다. <에로스에 대한 설명은 다음 논문 참조: W. K. C. Guthrie, A history of greek philosophy Ⅳ. Cambridge: Cambridge Univ. 1975, pp.371-372.> / 레비나스는 에로스의 본질로서 연인의 결합욕망에 대 한 아리스토파네스의 설명을 수용하지만, 이같은 결합욕구에도 불구하고 결코 하나 로 결합될 수 없는 연인의 이원성을 설명하고자 한다. 그는 이것을 에로스의 이원 성으로 부른다.
375) TI.260.
376) TI.255.
377) 사르트르, 앞의 책, 131 쪽.
378) TI.258-9.
379) TI.259.
380) TI.271.
381) TI.271.
382) TI. 271.
383) 동양사상의 근간이 되는 『周易』에서는 周易下經 31 卦 澤山咸과 32괘 雷風恒 에서 남녀가 결합하는 이치와 부부의 도를 설명하고 있다. <彖曰咸은 感也ㅣ니 柔 上而剛下하야 二氣ㅣ 感應以相與하야 止而說하고 男下女ㅣ라 是以亨利貞取女吉也 ㅣ 니라. 天地ㅣ 感而萬物이 化生하고 聖人이 感人心而天下ㅣ 和平하나니 觀其所感 而天地萬物之情을 可見矣리라.:여기서 感 이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라면, 咸은 보다 포괄적인 뜻으로 모든 음양의 기운이 서로 느끼는 것을 말한다. 천지가 느껴서 만 물이 화생하고, 성인이 인심을 느껴서 천하가 화평하나니, 그 느끼는 바를 보아 천 지만물의 정을 볼 수 있으리라.> 대산 김석진, 주역강해 下經, (서울: 대유, 1993), 15쪽.
383) 동양사상의 근간이 되는 『周易』에서는 周易下經 31 卦 澤山咸과 32괘 雷風恒 에서 남녀가 결합하는 이치와 부부의 도를 설명하고 있다. <彖曰咸은 感也ㅣ니 柔 上而剛下하야 二氣ㅣ 感應以相與하야 止而說하고 男下女ㅣ라 是以亨利貞取女吉也 ㅣ 니라. 天地ㅣ 感而萬物이 化生하고 聖人이 感人心而天下ㅣ 和平하나니 觀其所感 而天地萬物之情을 可見矣리라.:여기서 感 이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라면, 咸은 보다 포괄적인 뜻으로 모든 음양의 기운이 서로 느끼는 것을 말한다. 천지가 느껴서 만 물이 화생하고, 성인이 인심을 느껴서 천하가 화평하나니, 그 느끼는 바를 보아 천 지만물의 정을 볼 수 있으리라.> 대산 김석진, 주역강해 下經, (서울: 대유, 1993), 15쪽.
384) 김충열, 유가윤리강의, 예문서원, 1997. 62-4 쪽 참조.
385) Michel Foucault, 『성의 역사 Ⅰ권』-앎의 의지, 이규현 역, 나남출판, 1992, 106-111쪽 참조.
386) TI.267.
387) TI.268.
388) 레비나스는 이같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통해서 미래의 타자성을 깨닫는 ‘타 자 안의 나’도 우리에게 善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계기로 본다. 이들의 연관성 은 우리의 동양적 사유방식에서는 지극히 일상적이면서 자명한 진리로서 세밀하게 정교화되어 있다. 유교적 전통에서 부모와 자식, 형제지간에는 ‘同氣同屬의 원리’에 의해서 상호 유기적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말해진다. 이같은 에토스 는 조상에 대한 공경과 형제간의 우애와 자손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가능하게 해준다.
389) TI. 277.
390) Susan A. Handelman, op. cit., p.205.
391) TI.268.
392) Adriaan Peperzak, To the Other, pp.196-7.
393) Ibid., p.200.
394) TI.282.
395) Susan A. Handelman, op. cit., p.207.
396) TI. 282.
397) TI.284.
398) TI.272.
399) TI.273. 이런 사실로 인해서 아이를 갖지 않은 사람들이 어떤 평가절하를 볼 필 요는 없다. 생물학적인 효는 효를 가지게 되는 첫단계이다. 그러나 생물학적 유대 감 없이도 인간들 사이의 관계로서 효를 인식할 수 있다. 우리는 타자적 존재에 대 하여 부성의 태도를 취할 수 있다. 타자적 존재를 아들과 같이 대함으로써, 그와 더불어 자신의 가능성을 넘어서는 관계를 확립할 수 있다. EI.63-72.
400) TI.282-3.
401) TI.278.
402) TI. 278-9.
403) TI. 279.
404) TI.258 / TI. 282.
405) TI.280.
406) 레비나스는 「효와 우애」뿐만 아니라 「타자와 타자들」에서도 이미 연대성, 조직, 보편적 평등으로서의 사회는 보편적 우애의 공동체의 형태 안에서 있는 특수 한 인류공동체를 전제한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407) TI.279-80.
408) 김충열, 앞의 책, 62쪽 참조.
409) <표1>
409) <표1>
콜버그
(정의의 도덕성)
길리간
(배려와 책임)
레비나스
(타자윤리학)
도덕적 명령
정의
따뜻한 배려
타인의 얼굴
도덕성의
요소들
자아와 타인의 권리
공정성
존경
호혜성
규칙/법칙성
자아와 타인에 대한
책임
따뜻한 배려
동정심
조화
이기심/자기희생
응답의 책임윤리
자신을 희생함
감성의 수동성
비대칭성
타율성-타인으로부터
오는 윤리적 호소와
명령
도덕적 의무의
결정 요소
원리들
관계들
타인의 벌거벗은 얼굴
(타인의 존재 사실)
도덕적
행위자로서
자아관
분리된 개별적 자아
연관된 부수적 자아
관계안의 자아 :
* (윤리적 자아 =
내안의 타자)
* (타자안의 자아 =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정서의 역할
구성요소가 아님
따뜻한 배려, 동정심
을 동기화 시켜 줌.
감성?정성를 중시함/
타인의 도덕적 호소를
수용하고,타자로부터
영향받는 수동성의
윤리적 의미를 강조함.
철학적 지향
합리적? 보편적
정의의 윤리
현상학적/상황적
상대주의
제일철학으로서의 윤리학
<표 1>의 콜버그와 길리간의 자료는 브러벡(Mary Brabeck)의 분석자료를 참조하고 있다. 이들 각각의 개념들을 레비나스와 비교?분석하는 작업이 필요하지만, 본 논문 의 진행상 개략적인 비교를 나타내는 것으로 그친다. (Mary Brabeck, "Moral Orientation : Alternative Perspectives of Men and Women," in Psychological Foundations of Moral Education and Character Development ed. Richard Knowles & George F. Mclean , (Washington, DC : The Council for Research in Values and Philosophy, 1992), p.69. 박병기·추병완, 『윤리학과 도덕교육』 (서 울:인간사랑,1996), 289쪽 재인용.)
410) David Carr, 『인성교육론』, 손봉호?김해성 역, (서울:교육과학사, 1997), 188쪽.
411) Jean Piaget, The Moral Judgment of the Children (New York: The Free Press, 1965), p.353. 박병기?추병완, 앞의 책, 57쪽. 재인용.
412) Lawrence Kohlberg, "The Adolescent as a Philosopher," Daedalus, Fall 1971, p. 1059.
413) David Carr, 앞의 책, 194-5.
414) 이성의 질서에 대한 감성의 질서, 마음의 질서는 파스칼의 팡세에서 이미 논의 되고 있다. 파스칼은 데카르트의 이성적 방법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첫째, 수학 적 방법, 과학적 방법은 우리가 진리를 터득하는 유일한 수단이 아니다. 둘째, 수학 적 및 과학적 진리는 인간이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진리가 아니다. 파스칼은 이 와 같이 진리추구를 위해 필요한 방법은 수학적이거나 과학적 진리가 아니라, ‘섬세 한 마음’으로 본다. 이에 대한 그의 글을 살펴보면, “섬세한 ‘마음의 원리’란 본다기 보다는 느끼는 것이다. 이것을 스스로 느끼지 못하게 자들에게 깨닫게 하기란 무한 히 힘들다. 이것을 느끼려면 아주 섬세하고 정확한 감각이 있어야 한다. 이같이 섬 세한 마음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직관이다. ‘섬세한 마음’이란 영혼의 가장 내부의 본성에 자리잡은 일종의 지적 직감이다.” (B. Pascal, 팡세, 홍순민역, 삼성세계사상 전집, 12. 삼성출판사, 1985. 「정신과 문체에 대한 사고」참조. / 이광래, 프랑 스 철학사, 65-7쪽. 참조.
415) J. 헤센, 가치론, 진교훈 옮김, 서울:서광사, 1992, 99-100쪽 참조. 셀러는 가 치인식의 기관은 오성이 아니라 감성임을 밝혀주고 있다. “오성은 가치에 대해서 맹목적이다. 가치인식의 기관은 오성이 아니라 감정이다. 근원적인 지향적 느낌이 존재한다. 이것은 감정들과 느낌이 동시에 존재하는 곳에서, 가장 잘 나타날 것이 다.”(M. Schler, Der Formalismus in der Ethik und die materiale Wertethik (Halle, 1916), 262면) 이 세상의 가치내용은 우리의 지향적?정서적 삶의 회고단 계를 형성하는 사랑과 미움의 작용과 마찬가지로 먼저 취하는 것과 뒤로 미루는 것의 작용이 정립하는 지향적 느낌의 작용에서 우리에게 밝혀진다. 하르트만은 셀 러의 이런 입장을 대변한다. “가치의식이란 일차적으로 가치감이며, 가치가 충만한 우선적이며 직접적인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이다. 모든 가치파악은 가치감에 기인한 다. 가치를 파악하는 작용은 결코 순수한 인식작용이 아니라 감정작용이며, 지성적 이 아니라 정서적이다. 가치는 느껴질 수밖에 없으며, 느낌의 기초를 구체적으로 직관한 것일 수밖에 없다.”(N. Hartmann, Ethik(Berlin und Leibzig, 1926),42면. 104면. 528면.) 가치를 느끼는 것은 가치를 직관하는 것을 의미한다./ 레비나스는 셀러와 하르트만의 ‘가치감’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논의하지는 않지만, 셀러의 공감 의 원리도 타자의 근본적인 다름의 의미를 밝혀주지는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셀러의 가치윤리학이나 레비나스의 타자윤리학이 모두 ‘현상학에 뿌리를 둔 윤리 학’이란 점을 고려해 볼 때, 이들의 윤리학적 전개에서 차이점이 나타나는 근본적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연구해 볼 가치가 있겠다.
416) ‘합리적 이성’의 개념은 근대의 산물로 볼 수 있다. 확실성을 추구하던 근대인 은 합리성 개념을 합당함(reasonableness)에서 이성적 합리성(rationality)으로 바 꾸어 버렸다. 즉 맥락에 따라서 합당한 것에서 기하학적 확실성과 필연성, 형식적 이성 등으로 합리성의 범위를 제한시켰다. Stephen Toulmin, Cosmopolis:The hidden agenda of modernity,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0), 이 종흡 옮김, 코스모폴리스 : 근대의 숨은 이야깃거리들, (마산 : 경남대학교출판부, 1997), 27쪽.
417) EI. 60.
418) TI. 85.
419) TI. 88.
420) TI. 203.
421) TI. 217.
422) TI. 84.
423) TI. 218.
424) TI. 219.
425) TI. 219.
426) TI. 252.
427) TI. 85.
428) 푸코는 도덕적 규정에 있어서 자신이 자기자신에 대해 가지는 관계를 윤리로 정 의하고 있다. 그는 윤리는 개인이 자신을 자신의 행위의 도덕적 주체로서 구성 짓 는 방식을 결정해준다고 본다.(드레피스?라비노우, 미셸푸코; 구조주의와 해석학 을 넘어서, 서우석 옮김, (서울: 나남, 1990) 334쪽.) 주체가 자아와 관련되는 관 계유형은 윤리적인 것의 내용을 정하는 윤리적 실질, 도덕적 구속을 인정하거나 스 스로 행위의 동기를 부여하게 되는 예속의 방식, 윤리적 주체로 되기 위해 사용하 게 되는 수단인 테크네로서 금욕의 형식, 도덕적 행위를 통해 추구하는 목적인 텔 로스이다. 이들은 도덕적 경험을 존재론, 금욕주의, 목적론으로 구성한다.(Michel Foucault, 성의 역사 2권, 쾌락의 활용, 문경자외 공역, (서울: 나남, 1995) 참 조.) 푸코와 레비나스는 이성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적 입장에 서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으나, 윤리적 주체를 다루는 방법이나 인간관계를 해석하는 시각은 여러 가지 점 에서 대조적임을 알 수 있다. 윤리적인 문제에서 푸코의 접근법은 ‘존재론적 주체 의 윤리학’으로 볼 수 있을 만큼 상호성이 결여된 자아중심성의 특징을 보여준다. (이에 대한 논의는 다음 논문 참조: 졸고, “푸코의 존재론적 주체윤리학에 관한 비 판적 연구”, 서울대 대학원, 사회와 사상 제 16집, 1997. 참조.) 또한 그가 보는 사회적 관계는 대부분 ‘지식-권력의 패러다임’안에서 설명된다. 이에 비해 레비나 스는 윤리학의 문제설정을 타자중심성에 놓는다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자아 와 타자의 사회적 관계는 본 논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내 안의 타자(l'autre dans le meme)’와 ‘타자 안의 나(moi etranger a soi)’로 구체화된다. 자아는 타자 를 수용하면서(내안의 타자) 윤리적 자아로 형성되고 뿐만 아니라 타자를 통해서 나의 유한성을 벗어나 무한성에 접할 수 있다(타자 안의 나). 이같은 관계는 단순 히 ‘지식-권력’관계로는 설명될 수 없는 인간관계의 화해의 의미를 밝혀주고 있다.
428) 푸코는 도덕적 규정에 있어서 자신이 자기자신에 대해 가지는 관계를 윤리로 정 의하고 있다. 그는 윤리는 개인이 자신을 자신의 행위의 도덕적 주체로서 구성 짓 는 방식을 결정해준다고 본다.(드레피스?라비노우, 미셸푸코; 구조주의와 해석학 을 넘어서, 서우석 옮김, (서울: 나남, 1990) 334쪽.) 주체가 자아와 관련되는 관 계유형은 윤리적인 것의 내용을 정하는 윤리적 실질, 도덕적 구속을 인정하거나 스 스로 행위의 동기를 부여하게 되는 예속의 방식, 윤리적 주체로 되기 위해 사용하 게 되는 수단인 테크네로서 금욕의 형식, 도덕적 행위를 통해 추구하는 목적인 텔 로스이다. 이들은 도덕적 경험을 존재론, 금욕주의, 목적론으로 구성한다.(Michel Foucault, 성의 역사 2권, 쾌락의 활용, 문경자외 공역, (서울: 나남, 1995) 참 조.) 푸코와 레비나스는 이성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적 입장에 서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으나, 윤리적 주체를 다루는 방법이나 인간관계를 해석하는 시각은 여러 가지 점 에서 대조적임을 알 수 있다. 윤리적인 문제에서 푸코의 접근법은 ‘존재론적 주체 의 윤리학’으로 볼 수 있을 만큼 상호성이 결여된 자아중심성의 특징을 보여준다. (이에 대한 논의는 다음 논문 참조: 졸고, “푸코의 존재론적 주체윤리학에 관한 비 판적 연구”, 서울대 대학원, 사회와 사상 제 16집, 1997. 참조.) 또한 그가 보는 사회적 관계는 대부분 ‘지식-권력의 패러다임’안에서 설명된다. 이에 비해 레비나 스는 윤리학의 문제설정을 타자중심성에 놓는다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자아 와 타자의 사회적 관계는 본 논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내 안의 타자(l'autre dans le meme)’와 ‘타자 안의 나(moi etranger a soi)’로 구체화된다. 자아는 타자 를 수용하면서(내안의 타자) 윤리적 자아로 형성되고 뿐만 아니라 타자를 통해서 나의 유한성을 벗어나 무한성에 접할 수 있다(타자 안의 나). 이같은 관계는 단순 히 ‘지식-권력’관계로는 설명될 수 없는 인간관계의 화해의 의미를 밝혀주고 있다.
429) Anthony F. Beavers, op. cit., p.90.
430) 콜버그는 구체적 덕목의 제시보다 도덕적 추론과정을 강조함으로서 도덕적 교화 의 위험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Lawrence Kohlberg, "Moral Education for a Society in Moral Transition," Educational Leadership, October 1975, p. 50.) 후기 콜버그는 도덕교육에 있어서 추론의 구조뿐만 아니라 내용으로서의 가치들 자 체도 강조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도덕적 추론이라는 형식만이 중요한 것 이 아니라 도덕적 추론의 내용으로서의 가치들도 마땅히 중시되어야 한다는 입장이 다. (박병기· 추병완 저, 앞의 책, 74-5쪽 참조.)
431) David Carr, 앞의 책, 196쪽.
432) 위의 책, 196-7쪽.
433) J. Hessen, Wertlehre, Leherbuch der Philosophie, Zweiter Band (Munchen - Basel : Ernst Reinhardt Verlag, 1959) S. 208.
434) Nicolai Hartmann, a.a.o. S. 121.
435) Robert Spaemann, Moralische Grundbegriffe, Munchen 1991. S. 85.
436) 졸고, 윤리적 행위의 정초방법에 관한 연구, 사회와 사상 제 14집, 서울대 대학 원, 1995, 161-2쪽 참조.
437) I. Kant, Kritik der praktische Vernunft, in : Werke, Bd. 6, 140. / 졸고, 앞의 논문, 164-5쪽 재인용.
438) David Carr, 앞의 책, 198쪽.
439) Annemarie Pieper, a. a. o. S. 192.
440) Anthony F. Beavers, op.cit., p.103.
441) TI. 84.
442) TI. 82-3.
443) Emmanuel Levinas, "Philosophy and the idea of infinity", p.37.
444) Adriaan Peperzak, To the other, pp.115-6.
445) Emmanuel Levinas, “Philosophy and the idea of Infinity", p.57.
446) Ibid., pp. 58-9.
447) 정화열, 앞의 책, 25쪽.
448) 위의 책, 262쪽.
449) Levinas and Kearney, "Dialogue with Emmanuel Levinas," in Face to Face with Levinas. ed. Richard A. Cohen. (Albany :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86, p. 2.
450) Max Schler, "Mensch und Geschichte", in Philosophische Anthropologische Weltanschauung (Bonn, 1929), S. 3.
451) Michael Landmann, Philosophische Anthropologie (Berlin : Walter de Gruyter & Co ., 1969), 진교훈 역, 『철학적 인간학』, 앞의 책, 14쪽.
452) 위의 책, 209-240쪽 참조.
453) Thomas Rickona, "How parents and schools can work together to raise moral children," educational Leadership, May 1988, p.56.
454) 정세구, 도덕?윤리과 교육의 당면과제, 도덕 윤리과 교육, 한국도덕윤리과 교육학회, 제7호, 1996. 7.
455) 위의 논문, 같은 쪽.
456) 교육개혁위원회, 「신교육체계 수립을 위한 교육개혁방안」, 1995.
457) 졸고, “푸코의 존재론적 주체 윤리에 관한 연구”,(1997) 참조.
458) 전통적으로 우리 나라는 가족애를 중시하는 예로 孝와 慈愛를 내용으로 하는 『심청전』과 형제간의 友愛를 중시하는『흥부전』 등과 유사한 많은 전래동화와 설 화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레비나스가 가족애의 확대에서 20세기 도덕성의 실패를 극복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고 있음은 전통윤리를 溫故知新해야할 과제를 안고 있 는 현대윤리학의 좋은 귀감이 된다.
459) 진교훈, 철학적 인간학Ⅱ (서울: 경문사, 1994), 234쪽.
460) J. H. Pestalozzi, Wie Gertrud ihre Kinder lehrt, R. Ⅵ, pp. 345-7.
461) 하버마스는 이 경우를 경제·행정 등 體系의 작동기제인 돈이나 권력이 가정이나 문화 등 생활세계(Lebenswelt)의 영역까지 침투해 들어오는 것으로, 이같은 현상을 생활세계의 식민화(die Kolonialiesierung der Lebenswelt)라고 부른다. (Habermas, The Philosophical Discourse of Modernity, trans. by F. Lawrence, (Cambridge : MIT Press, 1987), p.355.
462) 교사를 도덕교육의 촉진자로 보는 콜버그의 경우, 도덕교사가 아동들에게 적극적 으로 가치교육을 수행하는 것에 반대한다. 단지 아동들이 스스로 도덕성을 발달시 켜 가도록 측면적으로 보조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같은 주장은 이미 아동들안에 모든 지식의 근원이 들어 있다고 보는 플라톤의 상기설과 무관하지 않다. 반면 뒤 르케임의 경우 교사를 사회적 가치의 옹호자로 보고 있다. 이같은 주장의 배경에는 도덕?윤리?종교 등의 사회적 실재가 존재한다고 보는 사회실재론이 있다. 레비나 스는 플라톤의 상기설에 대해 대표적인 ‘자기에로 복귀하는 자아’로 비판한다. 콜버 그에 대한 레비나스의 입장도 이같은 비판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반 면 뒤르케임의 입장과는 유사성이 있다. 레비나스는 ‘teaching’을 자아의 유한성을 깨우쳐 주면서 높이로부터 오는 자아와 타자의 윤리적 교제의 계기로 강조한다.
463) Michel Foucault, 『성의역사 1-앎의 의지-』, 이규현 역, (서울:나남출판, 1992), 106-111쪽 참조.
464) 탈현대사회를 후기산업사회적 추세와 연관지어 지식의 문제를 논하는 료타르의 탈현대적 지식론에 의하면, 학문적 지식의 발전은 연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 니라, 기존의 사유구조와 모순된 독창적인 逆理 즉 패럴로지(paralogy), 기성학계의 확립된 권위를 과감히 벗어나는 상상력의 도약, 과학적 지식에 관한 기존의 패러다 임을 동요시키고 새롭게 할 수 있는 역설적 사고실험을 통해서 가능해진다. 료따 르에 따르면, 탈현대적 지식은 권위의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차이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을 정교화시키고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이질적인 것에 대한 관용성을 요한 다. 요컨대 탈현대적 지식의 원칙은 전문가의 상동성(homology)이 아니라, 발명의 패럴로지라는 것이다. (Jean-Francois Lyotard, The Postmodern Condition : A Report on Knowledge, trans. by G. Bennington et al, Mineapolis : Univ. of Minnesota Press. p. xxv.) 후기 산업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누구든지 완전한 정보 에 접근할 수 있다. 모든 지식이 정보언어로 저장 유통되기 때문에 모든 지식이 원 칙적으로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는 것이 정보화 사회 혹은 컴퓨터화된 후기 산업 사회의 특징이다. 바로 이와 같은 완전한 정보의 조건아래 기존의 정보를 재배열하 고 전혀 다른 방식과 예측하지 못한 방식으로 과학적 언어놀이의 새로운 규칙을 고 안해 낼 수 있는 상상력과 페럴로지가 지식의 발전을 가져온다고 볼 수 있다. (전경 갑, 앞의 책, 369-372쪽 참조.)
465) 진교훈, 『환경윤리』 (서울: 민음사, 1998), 참조.
466) 엘빈 토플러, 『전쟁과 반전쟁』, 李揆行 監譯, 한국경제신문사, 1993. 참조.
467) 진교훈, 『철학적 인간학연구 Ⅱ』, 306쪽.
468) 위의 책, 308쪽.
469) M. Scheler, "Die Idee des Friedens und der Pazifismus," 2. Auflage, (hrsg), M. S. Frings, Bern, 1974, S. 13. / 위의 책, 305쪽 재인용.
470) 강영안, “레비나스의 평화의 철학”, 『평화의 철학』, 서강대철학연구소 편, (서울: 철학과 현실사, 1995), 239쪽.
471) 이미 자본주의적 상호성의 윤리에 익숙한 현대인들이 이와 같은 비대칭성을 이 해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러나 롤즈가 사회의 경제적 부의 배분에서 가장 가난한 자가 최대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최소수혜자 최대혜택의 원리’라는 분배원칙을 정 한 것과 레비나스가 비대칭적 윤리에서 주장하는 내용은 서로 통하고 있다. 롤즈와 레비나스의 차이점은 롤즈가 ‘정의가 사회제도의 제일덕목이다’라는 직관적 가정으 로부터 출발하는데 반하여, 레비나스는 ‘왜 정의가 사회제도의 제일덕목이어야 하는 가’를 밝혀주고 있다는 점이다. (롤즈의 비대칭적 차등의 원리에 관한 논의는 다음 논문 참조 : 박효종, “롤즈 정의의 원리에 대한 비판적 고찰, -차등의 원리를 중심 으로”, 진교훈 외 공저, 『윤리학과 윤리교육』, (서울: 경문사, 1997), 137-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