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큘라
브램 스토커 지음, 홍연미 옮김, 찰스 키핑 그림 / 열림원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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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가을, 대학 졸업을 앞두고 나름 진지한 인생 고민 끝에 선배가 자리 잡은 미국 자동차의 고장, 디트로이트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아직 당시에는 나오지 않은 유행어였지만 분명 내 마음 속에는 “까짓 인생 뭐있어 어차피 한방이지” 이런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생각대로만 하면 내 인생은 그야말로 장미꽃 만발한 화원에 깔린 비단길이었다. 미국이란 나라가 그 이름만으로도 던지는 그 황홀한 아우라 아래에서 이미 자리 잡은 선배가 펼쳐 놓은 안정된 사업터에서 건강 있지, 패기 있지..내 인생은 아우토반을 달리는 페라리랄까..정말 그런 기분이었다. 그러나 이런 환상이 깨지기 시작한 것은 그리 시간이 오래 흐르지도 않아서였다. 그때의 상황을 너저리 늘어놓는 것은 내 자신에게도 그리 유쾌하지도 않거니와 그것이 이 글의 목적은 아니기에 생략하기로 하고...여하간 내 상상의 스크린에 균열의 조짐이 점점 명확해지기 시작하던 어느 날, 발길이 이끄는 대로 무작정 걷고 걸었던 것 같다. 도로를 따라서 걷다가 마을 몇 개를 지나고 그러다가 도착한 약간 번화가에서 극장 간판을 보고는 기억으로는 6달러인가를 주고 표를 끊고는 영화관으로 들어갔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도입되지 않았던 멀티플렉스형 극장에서 나는 표 끊은 시간에서 제일 가까웠던 극장안으로 들어갔고 그 스크린에서 상영되던 것이 바로 드라큘라였다. 물론 영화자체를 보러 들어간 것이 아니었기에 애써 영화를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았지만 후에 돌이켜보니 당시 스크린을 가득채우던 시빨간 피를 바탕으로 한 어두운 화면 전개가 당시 내 상황과 어우러져 내 의식에 상당한 파편을 남겨 놓았던 것 같았다. 나중에 한국에 돌아와서 그때의 드라큘라 영화를 비디오라도 찾아보려고 했는데 끝내는 찾지 못하고 말았다.


검은 망토에 기름 발라 올린 올백 머리. 박쥐와 늑대, 마늘과 십자가와 말뚝, 그리고 기절한 미녀와 그 목에서 흘리는 두 개의 핏줄기. 정확히 이정도가 소설‘드라큘라’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선지식 전체인 상태에서 받아든 책의 인상은 너무 두꺼웠다.

“헉..이렇게 긴 이야기였어....”

생각해 보니 대부분이 그런 것 같았다. 춘향전, 흥부전, 로미오와 쥴리엣, 걸리버 여행기 등등 어려서 동화 형태로 이야기를 들었거나 아니면 어린이용 문고판으로 줄거리만 대충 적힌 책을 읽고는 내용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원작들이 얼마나 많은지...하기야 드라큘라 이야기 역시 그 내용 전개야 누가 모르겠는가..하도 들어서 드라큘라 백작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고 어떻게 활동하고 그리고 끝내는 착한 주인공들에 의해 어떻게 죽어가는가를.

나이가 들면서 내가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책의 원본들을 하나씩 읽어가면서 가졌던 감동들이 있기에 드라큘라 책을 신청하면서도 나름 그런 기대가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생각보다는 의외로 두꺼운 분량이었다. 하지만 소설의 미덕이 책의 분량과는 관계없이 그래도 빨리 읽어 낼 수 있는 것에 있지 않은가 싶다. 물론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조정래 선생이 쓴 책 중에서 선생은 소설가가 지향해야 할 작법중 하나가 3인칭의 인물들을 등장시키는 것이라 했었다. 1인칭의 화자가 주인공이 되어서 이끄는 소설은 어찌 보면 작가의 역량과 관계있다고 까지 이야기했었는데, 이 소설은 전부 3인칭 시점의 인물들이 등장해 일기와 편지 형식으로 내용을 전개해 나간다. 1인칭과 3인칭의 절묘한 조합이랄까... 따라서 화자의 입장에서 내용을 파악하면서도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내용을 살필 수 있는 독특한 구조의 소설이었다. 이런 형식을 유지하면서도 긴장을 이완시키지 않고 끌어가는 작가의 글 솜씨가 탁월하다고 해야 할까.


소설의 시대 배경은 19세기 말 동유럽의 루마니아와 영국을 배경으로 한다. 이 시기면 영국에서는 한창 산업혁명의 결과물들이 쏟아져 나오던, 그야말로 인간 지성의 황금기를 누리던 시기였을텐데 - 그래서 책에서는 기차와 전보를 비롯한 인간 문명의 결과물들이 상당히 많이 등장한다- 책의 내용 자체는 마치 고대의 전승 설화와 같은 내용으로 전개된다. 늑대와 쥐, 파리등을 자유로이 부리고 박쥐를 비롯하여 개와 안개등으로 자유로이 변신도 가능하며 사람의 피를 먹으면서 수백년을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언데드’의 상태를 유지하지만 그것의 죽음 역시 총을 비롯한 현대식 무기가 아닌 마늘과 십자가 그리고 말뚝이라는 설정은 한번쯤은 작가가 이 소설을 쓰면서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했는가를 고민하게끔 한다.

당시에 이미 벌어지고 있던 산업혁명으로 발전된 기계 문명 속에서 비참하게 생활하던 서민들과 아동들의 노동 착취에 대해, 작가는 혹시 그런 작태를 일삼는 자본가들을, 아니면 향후 인류 문명이 그렇게 마치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 같은 존재가 될 것을 예견하면서 저술한 것은 아니었을까?


배경이 영국이다 보니 몇가지 영국의 문화 일단을 엿볼 수가 있었다.

첫번째로 신사의 나라라는 영국에서 남자들의 여자들에 대한 태도가 ‘이런 것이 신사도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책의 내용 곳곳에서 여인을 앞에 놓고 남자 입에서 줄줄이 이어지는 여인에 대한 찬사의 내용들이 실제 당시의 언어 생활에서도 저런식으로 말들을 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 장황하였기 때문이다. 예전 우리나라 60년대 영화처럼 영화에서의 출연 인물들의 대화 양식이 실제 일상생활과는 다른 억양과 톤이었듯이 당시 시대에서도 글쓰기에서의 내용과 실제 생활에서의 언어 습관은 다른 것은 아니었던게 아닐까? 얼마 전 읽었던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에서도 이 드라큘라에서 나오는 장황한 표현들이 등장했기에 들었던 생각이다.


두 번째로 현대와 같이 인간에 대한 신뢰가 상실되고 약속에 약속을 믿을 수 없어 증인에 공증까지 세워야 하는 시대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문화이기는 하지만 책 내용 곳곳에 등장 인물들이 맹세와 약속을 하는 장면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런 약속들을 한 당사자들은 반드시 그 약속이 지켜질 것이라고 믿으며 책 내용에 흐르는 전반적 분위기상에도 하류 계층의 사람들일지라도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문화가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기독교 문화가 바탕이 되어서가 아닌가 싶기도 한데, 우리나라에서는 중고차를 살 때 자동차 계기판의 주행거리 표시가 혹시 조작되지는 않았는지를 의심하게 된다. 그런데 영국에서는 그 자동차 계기판의 주행거리를 바탕으로 세금을 비롯한 과금이 매겨진다고 한다. 운전자가 주행기록을 속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는 신뢰가 바닥에 깔려있는 것이리라. 하기야 좋은 대학에 보내기 위해 학생들의 성적과 생활기록부마저 조작하는 우리 문화에서, 대학에서 시험문제를 배달받아 담임 선생 감독아래 학생 혼자 시험을 치루고 그 답안지를 대학으로 보내어 학생의 입학 여부를 평가받게 하는 외국의 문화와 비교를 해보면 어쩌면 아직 우리가 가야 할 길이 멀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여하간 소설의 책 전반에 깔린 인간에 대한 신뢰의 문화는 이 당시의 책들에 나타나는 일면중의 하나가 아닌가 싶다.


마지막으로 기저에 깔린 기독교 문화의 일단이다.

주인공들이 대화 속에 등장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들과 드라큘라를 죽여야 하는 이유들이 바로 기독교 사상들과 연결된다. 또한 주인공들의 사후 세계에 대한 견해도 역시나 기독교를 바탕으로 이야기가 되어 진다. 그리고 결국은 드라큘라도 그런 십자가와 성체 앞에서는 힘을 잃고 말아버린다. 이런 기독교 문화속에서 위에서 말한 신뢰의 문화가 형성되었다고 볼 때 도심의 밤하늘을 십자가로 뒤엎고, 기독교 전래 130년을 이야기하며 천만 신자를 자랑하는 기독교 천국의 한국에서는 왜 이런 긍정적 문화는 전파되지 않았는지 의아하기만 할 뿐이다.


참 재미있게 읽었다. 아들 녀석이 아빠가 참 우스운 책도 읽는다고 놀리기도 했지만 오랜만에 묵직한 중량감도 손맛으로 느끼며 또 다 읽고 나서는 책꽂이에 폼나게 꽂아도 놓을 수 있는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다.


참, 그런데 삽화는 영.... 내가 그림을 볼줄 몰라서지만 너무 그로테스크하게 그려 놓아서인지 별 마음에 들지도 않고 마치 아이들이 대충 그려놓은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적고 보니 혹시 작품 자체도 현실 세계와는 낯설은 작품이었는데 그런 의미에서 작품을 낯설게 하는데 일조하는 의도된, 그래서 작품을 더욱 그로테스크하게 만들어주는 정말 잘 기획되어서 그려진 삽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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