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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자에게 보내는 교황의 편지
프란치스코 교황 & 에우제니오 스칼파리 외 지음, 최수철 외 옮김 / 바다출판사 / 2014년 7월
평점 :
절판


2013 7월과 8, 이탈리아의 <라 레푸블리카>라는 신문의 설립자이면서 무신론자를 자처하는 스칼파리는

교황에게 신문지면을 통해 질문을 던집니다

대략 이런 내용입니다.

1.     진리는 단 하나인가? (절대적인 단 하나의 진리가 존재하는가?)

2.     교회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예수의 촉구를 어느 정도나 실현하고 있는가?

3.     유대교나 이슬람교와 같은 다른 유일신 종교와 구별되는 삼위일체 교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4.     프란치스코 교황은 청빈과 목회의 교회가 제도적이고 세속적인 교회보다 우위에 있음을 분명히 표방하는가?

5.     기독교의 신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한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인가?

6.     믿지 않는 자가 죄를 지은 경우 그도 기독교의 신에게 용서받을 수 있는가?

7.     무신론자는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진실들만 있다고 믿는데, 이러한 태도는 교회의 관점에서 오류를 범하거나 죄를 짓는 것인가?

8.     인류가 사라지면, 신은 모든 인간과 함께 죽을 사라질 것인가?

스칼파리가 프란치스코 교황이 즉위 후 보여준 일련의 행동과 그의 회칙 <신앙의 빛>을 본 후 감동을 받고,

내친 김에, 그러나 답을 받으리라는 기대는 별로 없이,

기독교에 대해 제기할 수 있는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해 질문을 던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웬걸! 교황은 같은 신문에 위 질문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보냅니다

그리고, 이어 대담을 하고, 이걸 계기로 여러 신학자, 철학자들이 같은 신문에 여러 내용의 기고를 합니다

이를 엮어서 낸 것이 이 책입니다.

 

교황의 답변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꼭 위 질문에 맞추어 답변한 건 아닙니다.)

1.     이러한 대화는 두 가지 면 – 근대성에 의해 제기된 신앙과 이성의 의사소통 불능 상태를 타개하기 위한 대화를 시작하려는 노력과

이러한 노력은 신앙을 따르는 사람들의 삶에서는 필수적이고 내밀한 것이라는 점 - 에서 바람직하고 의미 있다  

, “신앙이란 비타협적인 게 아니며, 오히려 타자를 존중하는 공존의 상황 속에서 성장한다는 사실 ---- 

신자는 교만하지 않습니다반대로 진리가 그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그가 진리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그에게 입을 맞추고 그를 소유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확고한 신앙은 그를 경직시키는 대신, 그로 하여금 언제든 훌훌 털고 일어나서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그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게 합니다.

2.     예수의 말과 행동, 그가 일으킨 스캔들은 그의 놀라운 “권위(그리스어로 exousia – 자신의 존재로부터 비롯되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한 권위는 아바(Abba) 하느님이 부여한 것으로서,

타인들을 힘으로 굴복하려는 의도가 없는 권위,

오히려 타인들을 위해 봉사하고 그들에게 자유와 삶의 충만함을 부여하려는 권위이다.

3.     그가 십자가에 못박히고 부활한 것은,

하느님의 사랑이 죽음보다 더 크다는 것, 하느님의 용서가 모든 죄보다 더 강하다는 것,

그리고 이 무한한 축복을 증거하는 데 자기 삶을 바쳐 볼 가치가 충분하다는 것을 만천하에 알리기 위한 것이다.

4.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으로 강생하였다는 점을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둥으로 본 것은 타당하다

하느님의 아들이 우리의 몸으로 지상에 내려와서 우리 삶의 기쁨과 고통, 승리와 좌절을 함께 경험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때까지 ‘아바’에 대한 사랑과 헌신 속에서 살았다는 사실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크나큰 사랑을 품고 있음과 우리에게서 헤아릴 수 없는 가치를 발견하고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5.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예수와 우리 사이에 넘어설 수 없는 경계가 존재하고 있음을 밝히려는 게 아니라,

예수와 더불어 우리가 유일한 아버지의 아들이고 우리 모두가 서로 형제라는 사실을 말해주기 위함이다

예수의 독특함은 배척이 아니라 소통의 원천인 것이다.

6.     하느님이 유대인들 형제에게 한 약속은 결코 져버리지 않았다.

7.     만약 누군가가 진지하고 참회하는 마음으로 호소를 하면 신의 자비는 한계가 없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양심을 따른다

믿음 없는 사람들에게도 죄라는 것은 자신의 양심에 역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양심에 귀 기울이고 양심이 시키는 대로 따른다는 것은 사실상 우리가 선이나 악으로 느끼는 어떤 대상 앞에서 나름의 결정을 내린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 결정에 따라 우리의 행복이나 불행이 좌우된다.

8.     진리가 절대적이라는 이야기는 신자들에게조차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절대적인 것은 이탈되어 있는 초월적인 것, 모든 관계를 벗어난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에 따르면 진리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고 그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롤 통해서 나타난다

따라서 진리는 관계이다.

그렇다고 진리가 가변적이고 주관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보다는 진리가 우리에게 언제나 그리고 유일하게 하나의 길과 하나의 삶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진리가 사랑과 하나로 어우러지는 순간부터 우리에게는 그 진리를 찾고 맞아들이고 표현하기 위해 겸손함과 열린 마음을 갖추는 태도가 요구된다.

9.     하느님은 대문자로 시작되는 궁극적인 실재이므로 인류의 존속과는 무관하다.

10.  예수는 “가난한 자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 주고, 갇힌 자들을 해방시키고,

눈먼 자들을 눈뜨게 하고,

억압받는 자들을 자유롭게 하고,

우리 모두에게 주님이 베푸는 은총의 날을 선포하기 위해”

우리의 하느님 ‘아바’가 보내신 분이다

 

이상과 같은 질문과 답변이 오고 간 후, 교황과 스칼파리의 대담이 이루어지고, 다른 여러 논자들의 기고가 이루어집니다

그 중 한 논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신앙이란 인간이 지배할 수 없는 누군가와의 예측할 후 없는 관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것이 바로 우리가 자유로워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한다.

 

이 책을 보면서 떠올랐던 다른 또 하나의 책은 바로 ‘달라이 라마의 종교를 넘어(이현 옮기, 김영사)” 입니다

달라이 라마는 궁극적으로 우리 문제의 근원은 인간의 기본적인 내적 가치로서 도덕 및 진실성이라는 개인 차원에 놓여 있는데,

그 내적 가치를 세우기 위해 종교와 무관하게, 나아가 종교를 넘어, 현세적 도덕에 대한 논의를 해보자고 합니다

달라이 라마 역시 그 중심가치로 자비를 말하고 있습니다.  

 

최고의 종교지도자들이 자기의 종교를 넘어서 자비와 공감을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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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해도 괜찮아 - 나와 세상을 바꾸는 유쾌한 탈선 프로젝트
김두식 지음 / 창비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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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글 쓰는 걸 드~럽게(^^) 싫어 합니다.

웃긴 이야기죠

그러면서 별 영양가도 없는 잡설을 이렇게 쓰고 있으니~

 

글 쓰는 걸 싫어하는 이유는

글을 쓰려면 주제에 대하여 좀 정리가 되어야 하는데 제가 정리가 잘 되는 사람은 아닙니다.

온갖 종류의 서로 상반되는 관념과 생각들이 계속 왔다 갔다 하니 글 쓰는 것이 괴롭습니다.

또 제가 쓴 글을 나중에 보는 경험도 한 몫 합니다.

어떨 때는 “이걸 내가 썼단 말이야!” 하면서 자뻑에 빠지는 순간도 있지만, 대부분 손발이 오글거립니다“아우 정말 유치해! 

결국 글 쓰길 싫어하는 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글을 통해 제 바닥이 드러날 것 같다는 두려움입니다.

아무리 미사여구를 동원하고 가식을 떤다고 한다고 하더라도 나의 외화물들은 나를 드러내기 때문이죠

눈 바른 사람들은 군더더기를 다 떼어내고 그 알갱이를 제대로 보거든요

그런 눈 앞에 내가 발가벗겨지는 느낌….

 

그런데 그렇게 싫어하면서도 쓰는 이유는 “쓰고 싶기 때문”입니다^^

자랑질 하고 싶은 욕망

인정받고 이해 받고 싶어하는 마음,

나를 표현하고 싶은 욕구!

이런 것들이 글을 쓰게 만듭니다.

그리고 이런 것도 있습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너는 어떠니? 아마 나는 너를 이해할 수 있을 거야.”라는, ‘공감의 토대가 되어 있음’을 먼저 건네길 원하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소통에 대하여 말하면서 소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경청’이라고 하지만,

그 전에 선행하는 것은 ‘말하기’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듣고 싶어도 들을 말이 없으면 들을 수가 없죠.

人間 – 즉 사람 사이의 관계는 소통이라고 한다면 그 소통은 누군가 ‘말하기’를 시작함으로써 시작됩니다

(그런데 저는 소심^^해서 하고 싶을 말만 불쑥 해버리면 오해의 소지가 없을까 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내가 말하기에 앞서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여러 전제 조건을 깔아 나갑니다.) 

 

결국 글을 쓰고 그걸 남에게 보여주는 것은 소통을 원하는 인정 욕구의 발현입니다

 

이런 인정 욕구는 집요합니다

결국 글쓰기 드~럽게 싫어하게 만드는 비겁함과 게으름까지 이겨냅니다.  

 

진짜 잡설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여간 이런 자신의 욕구나 욕망에 대해서 관찰을 하다 보면 참 모순되는 게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그런 욕구나 욕망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제가 보기에, 그런 욕구나 욕망에 대해서 이를 ‘색()’으로 이름하고, 그에 대립되는 규범을 ‘계()’로 보고,

겉으로는 ‘계’의 세계에서 살아가지만 속으로는 ‘색’의 세계에서 분열되어 가는 모습을 분석(?)한 책이 오늘 소개하는 책입니다

 

저자는 경북대 법전원 교수이고, 세종의 대표변호사님과는 동명이인입니다.^^

 

책은 남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자신의 치졸한 욕망을 어떻게든 감추어서 포장하려는 자신의 모습,

신정아 사건을 통해 드러난 희생양 이론과 중년의 욕망, 정신승리의 필요성, 중산층의 허위의식,

저자와는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저자의 형과의 에피소드, 몸의 중요성, 규범에 대한 의심의 필요성 등등을 이야기 하고,

결론적으로 욕망을 부정할 것이 아니라 살살 달래면서 그 선을 넓히자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책 내용은 직접 보시기 바랍니다 – 안 보고 읽은 척하기 방지용^^)

 

제가 잡설을 통해 전에 소유적 삶, 당위적 삶, 존재적 삶을 이야기 한 적이 있었는데요,

이 책은 당위적 삶을 살고자 하는 또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원초적 욕망에 대해서 가지는 죄책감과 부담감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지만, 결국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내면에 꿈틀거리는 욕망을 잘 다독이며, 자신만의 공간을 지키고, 깊은 내면을 이웃과 나누다 보면,

나도 모르는 새 주변에는 같은 길을 걷는 친구들이 하나씩 늘어납니다.”라고 결론을 내고 있습니다.

 

비뚤어진 시선으로 보면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 모든 사람은 다 ‘계’를 준수하지 못하므로 나 역시 마찬가지고,

내면에 꿈틀거리는 욕망을 잘 다독이며 -> 욕망은 ‘계’에 어긋나는 것이므로 어는 정도는 허용하되 어느 선을 넘지 않도록 관리해야 할 대상이고,

자신만의 공간을 지키고 -> ‘나’는 남들과 구별되는 소중한 존재이므로, 나를 잘 보호하며’

뭐 이런 식으로 적당한 타협의 선에 머물라는 이야기로 들립니다.

제 욕구는 관리의 대상이 됩니다

항상 감시하고 당근을 줘야 하는 대상입니다.

채찍을 들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엉뚱한 이야기지만, 예수님이 왜 바리새파 사람들을 그렇게 싫어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한 말

-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그냥 제 ‘색’과 ‘계’가 스스로 어우러지는 존재적 삶을 살고 싶습니다.

제 욕구는 계와 어긋나는 비뚤어진 색이 아니라,

색이 공이고, 공이 색인 (色卽是空, 空卽是色) 것을 알아 그저 스스로 그러해지길 (自然)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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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죽음 - 죽음과 임종에 대하여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 지음 / 분도출판사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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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정신과 의사 출신으로 호스피스 운동의 창시자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원제는 “On Death and Dying” (죽음과 죽어감) 입니다. 

이 책도 워낙 유명한 책입니다.  (저한테만 유명할 수도 있습니다^^.  모른다고 자책하지 마세요)

 

죽음을 앞둔 말기 환자들의 인터뷰를 정리하여 죽음에 대하여, 죽음을 맞는 사람의 태도에 대하여 성찰한 책입니다.  

 

책 자체로도 좋은 책이지만, 책에서 나온 죽음을 대하는 다섯 가지 단계는 더 유명합니다.

 

죽음을 선고 받은 사람들의 태도는 다음 다섯 단계의 변화 과정을 거친다고 합니다.

1단계 부정(과 고립)

2단계 분노

3단계 타협

4단계 우울

5단계 순응 (수용)

 

대체로 단계적으로 나타나지만, 어느 정도 진행되다가 퇴행하기도 하고 마지막 단계까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이러한 다섯 단계는 죽음에서 뿐만 아니라 급박한 심리적 변화를 겪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일반적인 인간의 심리적 대응의 단계로 확장되어 이해되고 있습니다.

 

1 단계 부정은 그럴 리가 없어. 이건 뭔가 잘못된 거야라는 반응입니다.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거죠.  아니면 직시하지 않거나

 

2단계 분노는 부정의 단계를 지나면서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되, 그것에 대하여 화를 내는 겁니다.  왜 하필 내가 죽어?”  다른 사람들은 저렇게 멀쩡한데”… 견딜 수가 없습니다 .

 

3단계 타협은 부정, 분노를 지나 불가피한 기정사실을 어떻게든 연기하려는 시도라고 합니다.  죽음을 선고받은 사람이 이건 내가 무슨 무슨 잘못을 했기 때문이야.  내가 이런 걸 하면 괜찮아 질거야하는 태도죠.  내 앞의 현실을 다른 것으로 대체해 보려는 시도입니다.

 

4단계 우울은 무력감, 상실감, 자조감을 느끼는 단계입니다.  현실을 정면으로 바라 보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고 느낄 때의 그 감정….

 

5단계 수용은 이 모든 걸 받아들이는 상태죠.  그런데, 그것은 행복감은 아니고, “머나먼 여정을 떠나기 전에 취하는 마지막 휴식의 시기라고 합니다.  우울의 단계와는 구별하기 좀 힘들지만, 평안한 침묵의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용의 단계까지 가게 되면 제대로 된 죽음을 맞이 할 수 있을 겁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 그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일 겁니다.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그것은 어떻게 오늘의 삶을 맞이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현실에 대하여 부정하고 분노하고, 타협하며 우울해 하다가 그칠 것인지, 그걸 모두 겪어내고 수용의 단계로까지 나아갈 것인지?

 

바로 수용의 단계로 나갈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앞의 단계들을 겪지 않은 상태의 수용은 아마 가짜인 경우가 많을 겁니다. 

 

각오를 단단히 다지고 사는 수 밖에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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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 1~9 완간 박스 세트 - 전9권 - 아직 살아 있지 못한 자 미생
윤태호 글.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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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웹툰으로 연재되었던 만화입니다

 

현재 웹툰은 연재가 완료되어 유료로 서비스 되고 있더군요책은 9권으로 완간되어 나왔습니다.

 

한국기원 연구생으로 들어갔던 주인공 장그래가 입단에 실패하고 군대를 다녀와서는

아는 사람 빽으로 종합상사에 인턴이 되었다가 비정규직으로 입사하여 2년간 회사 생활을 한 이야기 입니다

장그래는 사무직이긴 하지만, 고졸 비정규직이죠.

 

지금은 먼 추억이 된 제1회 잉창치(응창기)배 결승전 제5국 조훈현과 네웨이핑(섭위평)의 바둑이 각 장 서두에 한 수씩 나오고 만화 내용이 전개됩니다

책에서는 박치문씨가 그 기보에 대한 해설을 하고 있습니다

웹툰에는 그 해설은 없고 정말 훌륭한 댓글들이 부지기수 였습니다

저는 웹툰 내용 뿐만 아니라 댓글들까지 다 읽어봐야 비로소 미생 읽기가 끝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직장인들과 취업준비생 외에 많은 사람들의 격한 공감을 끌어낸 웹툰입니다

 

비록 만화지만 정말 현실적입니다.

이 시대의 한 모습을 정말 잘 반영하는 수작이고, 거의 최근 한국의 직장인 생태 보고서 수준입니다.

 

물론 여러 일화들에서 위기를 헤쳐 나가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약간의 영웅담이 섞여 있어 그걸 현실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직장인들이 겪는 여러 가지 문제들 – 사내 정치, 여성 직장인의 육아 부담, 비정규직의 애환, 회사를 그만 두고 자영업을 하다 실패한 사연,

기타 자잘하지만, 직장생활에서 한번쯤은 겪었을 만한 여러 사연들 - 이 나오고,

거기서 겪는 내적 갈등 등이 거의 다 내 사연으로 다가옵니다

정작 만화가는 직장 생활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고 하는데, 하여간 직장인들도 놀랄 정도로 세밀하게 심리 묘사가 됩니다.

 

또한 작가는 어설프게 권선징악, 인과응보, 해피엔딩(?) 등의 교훈을 늘어 놓진 않습니다

그냥 현실을(또는 현실에 가까운) 이야기() 합니다

물론 비정규직이 난무하고 살아가기 팍팍한 현실을 만든 원인을 분석하지 않는다거나,

그냥 회사 조직 내에서 충실하다는 것이 결국 그러한 구조를 더 공고히 하는 것이라거나,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비전과 연대를 이야기 하지 않는다는 비판도 가능하겠지만,

그건 뭐 이 만화에서 추구하는 바가 아니라고 양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만화는 안정된 직장을 소망하는 바램과 직장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고자 하는 꿈을 산산조각 내는 것^^으로 종결되긴 합니다

그러나 비극으로 종결되는 것은 아니고, 새로운 출발을 말합니다.  

 

저에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1권에 나오는 장그래가 입단에 실패한 후 “노력을 하지 않아서 떨어진 것으로 해야 한다”는 독백이었습니다

실패를 합리화 하는 아니, 회피하는 방법 중 가장 수준 높고^^ 치사한 변명입니다

또 만화를 보신 분이면 알겠지만, 여성인 선차장과 그 남편과의 인터뷰 내용이 있습니다

일반화시키면 남자와 여자가 서로에게 바라는 바의 차이를 너무 선명하게 그려낸 장면입니다

명 대사들이 난무합니다.   그 중 하나 – “직장은 전쟁터이지? 그래도 나오지 마라! 바깥은 지옥이다. - 도 있습니다.

 

잘 고른 만화 하나는 열 소설 안 부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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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위한 변론 - 우리가 잃어버린 종교의 참의미를 찾아서
카렌 암스트롱 지음, 정준형 옮김, 오강남 감수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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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고해다.  그 고해 속에서도 의미를 찾고 살아가게 만드는 것은 사랑이다. 

사랑은 삶의 신비인 은총에 대한 깨달음으로 인하여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종교는 사랑의 의미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정도가 ‘아직도 가야 할 길’에서 나온 사랑, 은총, 종교에 관한 핵심주제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종교가 과연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특히 진화론을 부정하고 모든 다른 종교와 무신론을 저주하는 근본주의적 기독교(험한 말로 개독교 라고 하는 경우도 많이 봤습니다)가…..

 

종교의 의미는 좀 더 침묵과 모름을 받아들이고,

‘영혼의 어두운 밤’ 또는 ‘무지의 구름’ 속에서 ‘사실과 이성에 연연하지 않고 불확실성, 신비, 의심 속에 머물면서’도

지금 현재의 삶을 치열하고 풍요롭게 사는데 있다고…

참된 종교의 전통은 그러한 깨달음을 얻기 위한 실천적 노력이었음을 알려 주는 책이 “신을 위한 변론”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유태교/이슬람교가 의인화된 신을 믿는다거나 문자주의적 경전 해석에만 머무른다면

본래 종교의 의미를 가장 극단적으로 왜곡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책은 최근의 기독교/이슬람교/유태교 등의 근본주의자/원리주의자들에 대한 통렬한 논박이자 도킨스, 히친스 등의 전투적 신무신론에 대한 우회적 가르침(?)입니다. 

 

이 책의 1장 호모 렐리기수스는 라스코 동굴 벽화에서 시작합니다. 

기어코 어둡고 좁고 도달하기 어려운 동굴에 벽화를 그려놓은 뿌리깊은 인간의 종교성에서 호모 렐리기우스의 기원을 봅니다.

 

2장에서는 구약성경의 성립과정을 봅니다.  J문서, E문서, D문서, P문서… 

토라(모세 5경 –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가 결코 하나의 관점에서 쓰여진 것이 아니라,

신의 계시를 끊임없이 재해석하고자 하는 종교적 인간들의 치열한 노력임을, 그래서 서로 모순될 수 밖에 없음을 알려줍니다.

 

3장에서는 그리스 자연철학, 소크라테스의 진리를 위한 분투,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지혜에 대한 갈망(필로소피아)을 언급합니다.

모름(네 자신을 알라)에서 출발하여 로고스의 한계를 건전하게 존중할 줄 하는 필로소피아.  

 

4장 신앙에서는 기독교의 성립과 유대교의 발전(미드라시와 탈무드의 성립), 이슬람교의 가르침을 다룹니다.

 

5장 침묵에서는 4세기 이후 기독교가 로마에서 공인된 이후 사막 교부들을 중심으로 한 신비주의 전통의 성립,

동방정교와 아우구스티누스를 중심으로 한 삼위일체론의 성립을 통해 인간의 한계, 케노시스(자기 비움)의 전통을 말합니다.

 

6장 신앙과 이성에서는 중세의 신앙을 다룹니다. 

이슬람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를 알게 된 서방기독교의 이성주의를 수용하려는 노력, 이슬람의 팔사파 운동.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한 아포파시스(침묵)적 신학의 결맺음.  

 

7장 과학과 종교, 8장 과학적 종교에서는 그 유명한 갈릴레이에 대한 종교 재판과 데카르트에 의한 근대철학의 출발,

뉴튼 역학의 성립을 통해 종교와 과학의 갈등 및 오히려 근대과학을 통한 신의 존재 증명을 이야기합니다.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회의론과 뉴튼의 역학은 우리 생각과는 달리 오히려 신의 존재 – 창조자 또는 지적 설계자로서의 신 - 를 증거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종교와 과학의 밀월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9장 계몽주의와 10장 무신론에서는 신학과 자연과학, 신학과 철학의 분열을 말합니다. 

서로 분야가 다른 자연과학을 신학의 틀 안에 억지로 집어 넣으려 함으로써 신을 오히려 인간적 존재로 격하시킨 모순을 말합니다.

 

11장 ‘모른다는 것’은 그러한 신의 격하에 대한 반동으로서의 근본주의의 태동과

20세기 초 물리학 혁명 –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 – 을 통해 밝혀진 인간 이성의 한계와 새로운 신학에 대한 모색(모름에 대한 발견)을 말하고,

12장 ‘신은 죽었나’에서는 근본주의와 그에 대한 반동으로서의 신무신론, 이들에 대한 대한으로서의 포스트모던 신학을 이야기 합니다. 

 

맺음말에서는 저자의 결론을 말합니다.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      신은 어떠한 말로도 표현 불가능하며 신 앞에서는 오직 침묵할 수 밖에 없다.

-      당신이 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든 신은 그 이상이다. 

-      종교는 문자적 또는 관념적 교리들을 머리로 믿는 것이 아니라,

그 종교의 제의에 참여하거나, 묵상하거나, 기도하며 수련하는 실천 과정에서 그 신비를 경험하고 깨닫게 되는 것이다.

-      우상숭배는 언제나 유일신교의 함정 중 하나였다. 

인격화된 신을 주된 상징으로 삼음으로써 사람들이 ‘그’를 단지 자기 자신보다 더 크고 더 강력한 존재로 상상하고

자신들의 생각, 관행, 사랑, 증오를 지지하는 존재로 이용하여 때로는 치명적 결과로 이어질 위험이 있었다.

-      모든 종교들의 최고 덕목이자 참된 종교의 시금석은 바로 황금률(내가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또는 네 자신이 싫어하는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마라)

표현되는 실천적 “공감(Compassion)”이다. 

-      공감과 황금률을 날마다 온종일 습관적으로 실천하는 것이야 말로 끊임없는 케노시스(자기 비움)을 요하는 일이다. 

끊임없이 나 자신의 선호와 편견 ‘밖에 서는(엑스타시스)’ 경험은 그 자체가 우리가 추구하는 초월성이다. 

-      그냥 믿기만 해서는 아무 소용도 없다.  자기중심적 사고를 뿌리부터 체계적으로 없애나가는 방법(부처의 방법)을 수련해야만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이 책에 대한 제일 웃긴 서평입니다.

“아찔할 정도로 지적인 이 책을 읽노라면 내가 엄청 똑똑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기독교/유태교/이슬람교 외에 힌두교, 불교, 유교, 도교 등에 대한 걸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으면 같은 저자의 “축의 시대”(원제는 The Great Transformation)룰 보시기 바랍니다.

저자가 어떤 배경을 가진 사람인지 보려면 “마음의 진보”(저자의 자서전)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신을 위한 변론에서 말하는 종교의 본질인 공감(또는 자비 또는 긍휼) 관련해서 좀 더 쉽게 설명하고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제시한 “카렌 암스트롱, 자비를 말하다”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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