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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자에게 보내는 교황의 편지
프란치스코 교황 & 에우제니오 스칼파리 외 지음, 최수철 외 옮김 / 바다출판사 / 2014년 7월
평점 :
절판
2013년 7월과 8월, 이탈리아의 <라 레푸블리카>라는 신문의 설립자이면서 무신론자를 자처하는 스칼파리는
교황에게 신문지면을 통해 질문을 던집니다.
대략 이런 내용입니다.
1. 진리는 단 하나인가? (절대적인 단 하나의 진리가 존재하는가?)
2. 교회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예수의 촉구를 어느 정도나 실현하고 있는가?
3. 유대교나 이슬람교와 같은 다른 유일신 종교와 구별되는 삼위일체 교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4. 프란치스코 교황은 청빈과 목회의 교회가 제도적이고 세속적인 교회보다 우위에 있음을 분명히 표방하는가?
5. 기독교의 신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한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인가?
6. 믿지 않는 자가 죄를 지은 경우 그도 기독교의 신에게 용서받을 수 있는가?
7. 무신론자는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진실들만 있다고 믿는데, 이러한 태도는 교회의 관점에서 오류를 범하거나 죄를 짓는 것인가?
8. 인류가 사라지면, 신은 모든 인간과 함께 죽을 사라질 것인가?
스칼파리가 프란치스코 교황이 즉위 후 보여준 일련의 행동과 그의 회칙 <신앙의 빛>을 본 후 감동을 받고,
내친 김에, 그러나 답을 받으리라는 기대는 별로 없이,
기독교에 대해 제기할 수 있는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해 질문을 던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웬걸! 교황은 같은 신문에 위 질문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보냅니다.
그리고, 이어 대담을 하고, 이걸 계기로 여러 신학자, 철학자들이 같은 신문에 여러 내용의 기고를 합니다.
이를 엮어서 낸 것이 이 책입니다.
교황의 답변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꼭 위 질문에 맞추어 답변한 건 아닙니다.)
1. 이러한 대화는 두 가지 면 – 근대성에 의해 제기된 신앙과 이성의 의사소통 불능 상태를 타개하기 위한 대화를 시작하려는 노력과
이러한 노력은 신앙을 따르는 사람들의 삶에서는 필수적이고 내밀한 것이라는 점 - 에서 바람직하고 의미 있다
즉, “신앙이란 비타협적인 게 아니며, 오히려 타자를 존중하는 공존의 상황 속에서 성장한다는 사실 ----
신자는 교만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진리가 그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그가 진리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그에게 입을 맞추고 그를 소유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확고한 신앙은 그를 경직시키는 대신, 그로 하여금 언제든 훌훌 털고 일어나서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그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게 합니다.”
2. 예수의 말과 행동, 그가 일으킨 스캔들은 그의 놀라운 “권위(그리스어로 exousia – 자신의 존재로부터 비롯되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한 권위는 아바(Abba) 하느님이 부여한 것으로서,
타인들을 힘으로 굴복하려는 의도가 없는 권위,
오히려 타인들을 위해 봉사하고 그들에게 자유와 삶의 충만함을 부여하려는 권위이다.
3. 그가 십자가에 못박히고 부활한 것은,
하느님의 사랑이 죽음보다 더 크다는 것, 하느님의 용서가 모든 죄보다 더 강하다는 것,
그리고 이 무한한 축복을 증거하는 데 자기 삶을 바쳐 볼 가치가 충분하다는 것을 만천하에 알리기 위한 것이다.
4.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으로 강생하였다는 점을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둥으로 본 것은 타당하다.
하느님의 아들이 우리의 몸으로 지상에 내려와서 우리 삶의 기쁨과 고통, 승리와 좌절을 함께 경험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때까지 ‘아바’에 대한 사랑과 헌신 속에서 살았다는 사실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크나큰 사랑을 품고 있음과 우리에게서 헤아릴 수 없는 가치를 발견하고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5.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예수와 우리 사이에 넘어설 수 없는 경계가 존재하고 있음을 밝히려는 게 아니라,
예수와 더불어 우리가 유일한 아버지의 아들이고 우리 모두가 서로 형제라는 사실을 말해주기 위함이다.
예수의 독특함은 배척이 아니라 소통의 원천인 것이다.
6. 하느님이 유대인들 형제에게 한 약속은 결코 져버리지 않았다.
7. 만약 누군가가 진지하고 참회하는 마음으로 호소를 하면 신의 자비는 한계가 없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양심을 따른다.
믿음 없는 사람들에게도 죄라는 것은 자신의 양심에 역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양심에 귀 기울이고 양심이 시키는 대로 따른다는 것은 사실상 우리가 선이나 악으로 느끼는 어떤 대상 앞에서 나름의 결정을 내린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 결정에 따라 우리의 행복이나 불행이 좌우된다.
8. 진리가 절대적이라는 이야기는 신자들에게조차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절대적인 것은 이탈되어 있는 초월적인 것, 모든 관계를 벗어난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에 따르면 진리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고 그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롤 통해서 나타난다.
따라서 진리는 관계이다.
그렇다고 진리가 가변적이고 주관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보다는 진리가 우리에게 언제나 그리고 유일하게 하나의 길과 하나의 삶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진리가 사랑과 하나로 어우러지는 순간부터 우리에게는 그 진리를 찾고 맞아들이고 표현하기 위해 겸손함과 열린 마음을 갖추는 태도가 요구된다.
9. 하느님은 대문자로 시작되는 궁극적인 실재이므로 인류의 존속과는 무관하다.
10. 예수는 “가난한 자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 주고, 갇힌 자들을 해방시키고,
눈먼 자들을 눈뜨게 하고,
억압받는 자들을 자유롭게 하고,
우리 모두에게 주님이 베푸는 은총의 날을 선포하기 위해”
우리의 하느님 ‘아바’가 보내신 분이다.
이상과 같은 질문과 답변이 오고 간 후, 교황과 스칼파리의 대담이 이루어지고, 다른 여러 논자들의 기고가 이루어집니다.
그 중 한 논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신앙이란 인간이 지배할 수 없는 누군가와의 예측할 후 없는 관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것이 바로 우리가 자유로워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한다.”
이 책을 보면서 떠올랐던 다른 또 하나의 책은 바로 ‘달라이 라마의 종교를 넘어(이현 옮기, 김영사)” 입니다.
달라이 라마는 궁극적으로 우리 문제의 근원은 인간의 기본적인 내적 가치로서 도덕 및 진실성이라는 개인 차원에 놓여 있는데,
그 내적 가치를 세우기 위해 종교와 무관하게, 나아가 종교를 넘어, 현세적 도덕에 대한 논의를 해보자고 합니다.
달라이 라마 역시 그 중심가치로 자비를 말하고 있습니다.
최고의 종교지도자들이 자기의 종교를 넘어서 자비와 공감을 이야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