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hoyahan1 > 차갑고 하얀, 하지만 델 것 같은 세계
야성이 부르는 소리 - 잭 런던의 클론다이크 소설 잭 런던 걸작선 7
잭 런던 지음, 곽영미 옮김 / 지식의풍경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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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도덕이나 선과 악의 개념들은 등 따시고 배부르게 살 만할 때나 입에 올리는 얘기이기가 쉽다. 혹한이나 혹서, 굶주림, 투쟁만이 있는 세계에서 옳고 그름을 얘기하고 지키는 사람이라면 그는 붓다나 예수같이 인간으로서 다다를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영역에 속하는 사람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냥 타락해서 지저분해지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간혹 그곳에서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조건이자 힘인, 원시시대로부터 내려온 야생적인 본능과 지혜를 회복해 강인하게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세 개의 소설이 실린 이 책에서 잭 런던이 말하는 것은 마지막 영역에 속하는 인간에 대한 것이다.

인간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첫번째 소설의 주인공은 덩치 큰 개다. 하지만 잭 런던이 동물의 생태를 묘사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벅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덩치 큰 친구는 뭐랄까, 인간의 정신을 가진 개이자 동물의 훌륭한 신체와 본능을 가진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남쪽 지방의 귀족집에서도 살았고, 물욕에 눈이 먼 하인이 빼돌려 파는 바람에 북쪽 지방의 살이 에는 추위에서 썰매 끄는 개로 일하기도 했다. 그의 주인 중에서는 영리하고 폭력적인 자도 있었고, 멍청한 주제에 폭력적인 자도 있었으며, 진심으로 교감을 나눌 수 있었던 주인도 있었다.

하지만 벅이 어느 주인에게 속해서 어떤 대접을 받았던 간에 그의 존재를 결정짓는 것은 야생에서 들려오는 동물의 울음소리이자 그의 먼 조상인 들개와 늑대로부터 내려오는 야성을 향한 충동이었다. 주인들이 주던 먹이만 먹던 그가 스스로 사냥을 할 때 느끼는 희열, "삶의 극치를 이루는, 혹은 삶의 극치를 넘어선 황홀경"은 그를 주인이 있는 영리한 개로만 남겨두지 않고 점차 숲속으로 이끌었다. 벅이 모든 충성과 애정을 바쳤던 손턴과 있었을 때조차 이 본능은 사라지지 않았다. 활기, 잔인함, 순수함이 구분 없이 녹아 있는 강렬한 영혼이라고나 할까. 잭 런던은 벅의 이러한 상태를 창작열에 사로잡힌 예술가나 "공포에 휩싸인 전장에서 미쳐 날뛰며 항복을 거부하는 군인"과 비교하며 전적으로 긍정하고 있다. 이들은 이미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는 차가운 순백의 영역에 있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인간조차 동물을 닮아간다. 세 번째 소설인 '북쪽 땅의 오이세이아'에 나오는 금발의 사내와 인디언 사내, 인디언 여인은 벅의 멍청한 주인이었던 남녀들처럼 불평하고 흐느끼지 않는다. 불평하는 대신 무기를 들고 싸우고, 흐느끼는 대신 울부짖는다. 그들도 욕망이, 아주 뜨거운 욕망이 있지만 그것을 조심스럽게 살피며 우회하며 곁눈질하는 대신 직선으로 나아간다. 그러다가 무모한 행동을 해 위험에 처하거나 원하는 것을 찾아 헤매며 오디에세이아처럼 오랜 방랑을 하기도 하지만 결코 포기하는 법은 없다. 그들은 우직하고 멍청할 수도 있지만 어리석거나 나약하지는 않다.

두 번째 소설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이렇게 우직하고 상상력이 없는 한 남자가 피할 수 없었던 죽음의 상황에 대한 것이다. 동물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피해가지만, 인간은 상상함으로써 위험을 피해 간다. 동물은 털끝에서부터 느껴져오는 감촉으로 추위의 정도를 파악하지만 인간이라면 마땅히 온도계가 가리키는 숫자를 통해 혹한이 가져올 수 있는 위험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을 무시하고 집을 떠나 혼자 길을 나섰다면, 그는 이미 죽음의 영역으로 들어선 것이다.

하지만 남자는 느끼고 생각하기보다는 우직하게 앞으로 나간다. 그는 당장 처한 상황보다 앞으로 먹을 점심과, 저녁에 야영장에서 만날 동료들의 생각에 골몰해 있다. 그는 심지어 동행한 개조차 느꼈던 위기감도 감지하지 못한다. 그는 뒤늦게 혹한이 가져오는 동상과 고립, 신체적인 마비를 자각한다. 자신의 처지를 부정하려던 그는 뒤늦게 위험을 실감하고 살고자 노력하기 시작하지만 손과 발 끝을 파고들었던 동상은 너무 많이 퍼져 있었다. 점점 심해지는 동상은 불을 피우려고 하는 몇 번의 시도를 방해할 뿐이었다. 불을 피우려는 노력이 마비된 손발 때문에 불가능으로 끝나자 그는 미친듯이 달리기 시작한다. 그를 구해줄 야영장이 있는 곳으로. 야영장이 어디 있느냐는 이미 문제가 아니었다.

중국의 고대 철학자도 말했다시피 굶주림을 면하게 해주어야만 사람들에게 도덕을 가르칠 수 있다. 사람들의 배를 채우지 못하고, 따듯하게 해주지 못한다면 인간다운 높은 이상 또한 불가능한 것이다. 도덕이나 이상은 훈풍을 타고 오는 법이지 칼바람을 타고 오지는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에서 칼바람이 가져온 세계를 봤다. 그곳에는 미덕과 악덕의 구분도 없었다. 살아남아 승리한 자도 말을 남기지는 않았다. 그저 다른 이들보다 더 오래, 더 강하게 생존했을 뿐이다. 추호도 이런 세계를 동경하지는 않지만 책을 읽는 동안 뜨거운지 차가운지 구분할 수 없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것은 나에게도 야생의 기억이 한 조각이라도 남아 있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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