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하는 글쓰기
탁정언 지음 / 메이트북스 / 2021년 10월
평점 :
품절



글을 쓰고 책을 내는 일을 해야 하는 작가가 그 일에 회의가 들기 시작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작가뿐만 아니다.

밥벌이로 하고 있는 일이 회의가 들기 시작한다면 당신을 어떻게 하겠는가?

참고 인내하며 계속해야 하는 걸까? 아님, 밥벌이를 바꿔야 하는 걸까?

작가 탁정언님은 깊은 회의감에 스스로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위기 상황에서 명상을 붙들었다.

명상을 시작하고 앎이 깊어지면서, 외부 세계가 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었는데,

'나'를 경계로 바깥의 외부 세계와 내면의 내부 세계, 두 개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부 세계가 외부 세계보다 더 거대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미 직업으로 하고 있던, 글을 쓰는 일을 내부 세계의 일이었다.

명상 역시 내부 세계의 일이었으니, 명상을 지속하면서 글을 쓰는 일이 곧 명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19년 동안 명상을 하고 내면세계로 탐구의 길을 걷다 보니 글이 저절로 되었고 다시 글을 쓰는 일이 즐거운 일이 되었다고 한다.

'내'가 아닌 어떤 '힘'에 의해 저절로 써지고 있다는느낌이 들었다.



'명상 meditation - 고요히 눈을 감고 차분한 상태로 어떤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Meditatio 같은 말이지만 보통 '묵상'이라고 한다. '들은 것을 숙고하는'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나는 「명상하는 글쓰기」를 다른 표현으로 「묵상하는 글쓰기」라고 말하고 싶다.

고요히 눈을 감고 듣는 것이다.

종교가 있다면 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나의 내면이 말하는 목소리를 듣고,

세상의 소리를 듣고

이웃의 목소리를 듣는 작업.

그리고 들은 이 소리들을 숙고함으로써 '참 나'를 만나는 시간.

나는 작가님께서 19년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참 나'를 만나는 이 작업을 끊임없이 해왔기에 글을 쓰며 치유를 받으실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쓰지 않는 글쓰기는 명상이 된다

명상은 결국 '나'와 '나'의 것들이 진정한 나가 아님을 알아차리고, 그것들로부터 한발 떨어져 나와서

자신이 경험의 목격자, 경험자, 관찰자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나'의 것들과 동일시를 끊는 것이다.

하지만 에고는 이 몸도 '나'의 것이고 이 마음도 '나'의 것이라고 악착같이 동일시하고 있는데 그것이 가능할까? 평범한 사람의 생각이나 논리, 의지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명상하는 글을 쓰는 순간만큼은 가능하다.

명상하는 글쓰기

명상을 통해 글을 잘 쓰는 법을 알려주는 책이 아니다.

명상을 통해 '참 나'를 만나게 해주는 책에 더 가깝다고 해야 할까?

이 과정 중 글을 쓰던 작가님에게는 글쓰기가 치유 방법이 되지 않았을까?

글을 쓴다는 것은 나를 드러내는 작업 중의 하나이기에.

생각은 진동하다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

말 역시 진동하며 주로 파문만 일으키고 곧 사라져버린다.

하지만 글은 진동하며 계속 존재한다. 계속 진동을 하면서 변화를 끌어당긴다.

명상하는 글쓰기를 하면서 '나'와 '나의 것들' 사이에 '~에 대해서' '~에 대한'이라는 구절을 끼워 넣는다면, '나'라는 말을 아예 사용하지 않는다면,

소소한 것들부터 먼저 공명하고 변화가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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