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파는 남자 - KI신서 916
페르난도 트리아스 데 베스 지음, 권상미 옮김 / 21세기북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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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시간관리라는 테마를 공부하기 위해 시간관리 전문서적들을 읽기 시작했고 계속 진행중에 있습니다. 잠깐 쉬어갈 요량으로 '시간을 테마로 한 소설이 없을까?'를 찾다가 <시간을 파는 남자>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호불호가 갈리는 리뷰 별점들이 달리긴 했지만 시간관리라는 명확한 테마를 공부하고 있는는 저로써는 베르나르베르만큼이나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담긴 이 책에 박수를 보내는 바입니다. 최근에 읽었던 실망스러운 자기계발서보다 오히려 더 나은 좋은 점수를 주고 싶을 정도니까요.


이 책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평범한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주인공 TC는 (이 책에서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이런 식으로 명칭을 표기하는 센스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심지어 시간도 T라고 표현하고 있어요. 책에서 그랬던 것처럼 리뷰도 저자 방식을 따라 볼께요. ㅎㅎ)  어느 날 자신의 대출금을 다 갚으려면 35년이 걸린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말은 즉 35년이라는 T를 남을 위해 써야하는 부채라는 걸 뜻하지요. 그래서 TC는 회사를 박차고 나와 자신의 아이디어를 팔기 위한 사업을 시작합니다.


그 사업이란 5분이라는 T를 플라스틱 용기에 담아 사람들에게 파는 것이죠. 모두가 다 허무맹랑하다고 이야기 한 이 사업은 대박을 칩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 플라스틱에 담긴 용기를 사서 5분을 자신을 위해 쓰게 됩니다. 심지어 이 허무맹랑한 아이디어 취재를 나온 리포터들도 직접 체험해 보겠다고 하면서 용기를 사서 5분 동안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러 떠납니다. 그러다보니 그 방송 자체도 5분 동안 화면정지 상태로 송출될 정도였으니까요. 참 재미있지 않나요? ㅎㅎ. 이런 사소한 아이디어가 책 곳곳에 심겨져 있는데 ,이 점이 <페르난도 트리아스 데 베스>라는 이 작가의 역량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람들은 왜 5분의 T를 사는걸까?'

 

책을 읽다보니 '이렇게 되면 회사에서 문제가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는데 이 역시도 소설에서 자연스럽게 이야기 됩니다. TC의 아이디어를 탐탁치 않게 보고 있던 기업들도 개인들이 5분을 자신을 위해 쓰면서 실수도 점점 줄어들고 지각/결석도 줄고 오히려 생산성이 향상되는 긍정적인 효과를 거두자 생각이 변해 오히려 T 판매를 지지합니다. '개인과 회사가 근무시간에 대한 계약을 했지만 개인이 소비재를 구매한 것에 대해 기업이 그 사용을 제재할 이유가 없다. 그것은 자유시장경제에 어긋난다'라는 판결도 나옵니다. 묘하게 말이 되는 논리이긴 합니다. 


아뭏든 이야기는 책장을 넘길수록 점점 더 흥미롭게 진행됩니다. 5분 시간캡슐이 대박을 치자 나중에는 2T, 일주일 그리고 마지막에는 35년이라는 T를 팔게 됩니다. 'T를 판다는게 말이나 되나?'라는 황당함이 주는 거부감은 작가가 풀어가는 이야기 덕분에 어느덧 걷혀버리고 그 마지막을 궁금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35년이라는 T을 파는 주인공 TC가 어떤 마지막 결말을 맞이하는지는 직접 책을 읽어보시는게 좋겠습니다. ^^




'시간의 주인은 누구인가?를 묻는 질문

 

이 책의 핵심 메시지는 단 하나예요. '시간의 주인은 누구인가?'라는 명제입니다.

'당연히 내 시간은 내꺼지, 그게 무슨 또라이 같은 소리야?'라는 반문을 하실지 모르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을 비추어보면 사실 그렇지도 않습니다. 집값 대출을 상환하기 위해 수 십년 이상을 일터로 나가야 하는 가장들. 그렇기에 하루도 쉴 수 없고 자신의 꿈을 위해 직장을 그만두는 생각은 엄두도 못냅니다. 더 많은 성취와 성과를 내기 위해 끊임없이 달려야 하는 샐러리맨들도 자신들의 시간을 회사를 위해 쏟아 붓고 있지요. 결국 우리는 단 5분도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못하고 나중을 위해, 성과를 위해, 돈을 위해 유예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저자는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책을 통해서 처음에는 시간의 주체와 함께 시간의 소중함을 느끼게 하지만 마지막 부분은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비판으로 점점 메시지를 확대시키고 있습니다. 이는 저자가 가진 생각의 깊이를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 아닌가 싶습니다.


시간의 소중함을 딱딱한 자기계발서가 아닌 스토리텔링으로 접하고 싶으신 분들은 주말 나들이나 캠핑 가실 때 혹은 1박 2일로 여행을 가실 때, 이 책을 한 권 들고 가 보시기를 권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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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
윌리엄 세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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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극작가, 셰익스피어]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고 셰익스피어에 관심이 일었다면 한 번쯤 셰익스피어의 일생이 궁금해 자료를 찾아봤을터인데, 의외로 그의 생에 대한 이러쿵 저러쿵 말들이 많다. 가상의 인물이라든지, 프랜시스 베이컨이 셰익스피어였다는 둥, 문학의 거장답지 않게 돈을 밝혔다는 둥, 그의 작품이 너무 과도하게 신성시 되어 있다는 - 왜냐하면 정작 셰익스피어가  창작한 작품은 몇 편에 불과하고 대개는 당 시대에 널리 알려진 소설이나 희곡을 각색했거나 특정 구절 등을 베꼈다는 비판 - 비평들을 찾아 볼 수 있으니 말이다.


이런 질투나 비난은 셰익스피어가 이룬 명성이 워낙 거대한 탓에 따라올 수 밖에 없는 식자층들의 시기, 질투의 성격으로 봐야 할런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그가 죽은 후 그의 문학적 명성은 수 백년간 동안 절대적이었고 현재까지 이르고 있을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탑 만큼이나 강력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촌 어디에선가 그의 작품들이 상영되고 있을테니까. (악플도 관심이 있어야 달리는 법이다. 심지어 시골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 어머니도 그 이름을 들어봤을지도 모르겠다)



셰익스피어는 희곡을 만들었던 극작가다. 젊을 때는 단역배우를 한 경험도 있고 성공한 이후에는 <글로브>라는 극장을 소유한 소유주이기도 했지만 현대인들이 우러러보는 그의 정체성은 극작가로써의 위대함으로 보는 것이 적절할터이다. 극작가라 함은 오늘날 영화를 만드는 시나리오 작가라든지 드라마를 쓰는 작가와 같은 일 것인데, 단순히 작가라는 현대적 직업으로 매칭시켜 이해하기에는 많은 한계가 있다. 뒤에 다시 이야기 하기로 하자. 


어쨌든 그가 쓴 4대 비극과 5대 희극은 신분과 이름 그리고 배경만 살짝 바꾸어 무대에 올려도 현대물과 크게 다를 정도가 없을 정도로 그의 작품은 현대인들에게 친숙하게 다가오는데, 그 힘이 있다. 인류문학의 힘이라고 불리우는, 시대를 결쳐 공유되는 인류적 보편성말이다. 



<GLA-문학> 수업 중에서 나왔던 셰익스피어에 대한 비판 중 하나로, 그가 쓴 희곡의 대사들이 삶에서 사용되는 구어체가 아니라는 점을 들 수 있는데 이는 현대적인 상황에 비추어 보자면 부적절한 비판이라는 생각이 든다. 서두에 이야기한대로 셰익스피어는 극작가로써 자신이 쓴 희곡이 무대에 올릴 목적으로 썼기 때문에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보자면 셰익스피어는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기 위해 의도적이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현대 영화들이 흥행을 위해, 진솔한 스토리나 드라마 보다 화려한 CG를 과도하게 사용하는 것을 선호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여기서 잠깐, 그가 활동했던 엘리자베스1세 시대의 연극에 대한 배경지식은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기에 여러 자료들을 찾아보고 적어본다.


당시 극장은 여러가격대의 입장권을 팔았기 때문에 대중들을 끌어 모을 수 있었다. 무대주위에 서서 보는 것은 1페니 밖에 안했지만 비싼 좌석은 6팬스나 하는 것도 있었다. 입장료는 런던 노동자의 일주이리 급료의 1/12 에 해당되었기에 누구나 쉽게 살 수 있었다. 연극은 깡패, 소매치기, 창녀들과 같이 다양한 신분을 가리지 않고 입장해서 연극을 즐겼다. 심지어 입석도 있었는데, 입석의 경우에는 2시간 동안이나 서서 봐야했기 때문에 강렬한 매혹이 없고서는 대중들의 비판을 받기 일쑤였다. 어쨌거나 극장은 온갖 부류의 관객들이 한데 섞여 시끌벅적하게 떠들고 먹고 마시며 감정을 분출시키는 장소였기 때문에 당시 연극은 당시 사람들에게 삶의 활력소이자 낙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그 당시 연극은 현대사회의 영화와 같은 대중 미디어 성격을 가진다고도 볼 수 있다. 그의 전기를 보자면 관객들에게 극적 효과를 내기 위해 셰익스피어는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이번 리뷰할 <햄릿>의 3막 2장에서는 셰익스피어 자신이 연극과 연기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햄릿을 통해 직접 들려주기도 한다.


"연극의 목적은 예나 지금이나 말하자면 자연을 거울에 비추어 보이는 일이지. 그 시대의 시대상과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니까" (P 75)


따라서 그의 역할은 단순한 출판/인쇄를 통해 읽히는 문학(희곡)을 쓴 것뿐만 아니라 무대라는 장소에서 대중과 호흡하고 소통 하기 위한 총체적인 종합예술을 이루어 낸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듯 싶다. 그러니 대사가 과하거나 일상에서 사용되는 대화와 이질적이라는 비난은 내게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못했다.




[02. 4대 비극, 햄릿]

셰익스피어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만 언급하고 4대 비극 중 하나인 <햄릿>에 대한 이야기를 써보도록 하자. <햄릿>은 셰익스피어가 만든 순수 창작이 아니라 덴마크 왕자 햄릿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상영하기 위해 만든 각색한 희곡이다. 자신의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한 주인공 햄릿 왕자의 고민과 갈등을 그리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보여주는 인간심리의 사실적이고도 디테일한 묘사들이 <햄릿>이 4대 비극안에 꼽히는 요인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이 작품은 영화, 뮤지컬, 공연 등으로 꾸준히 상연되는 단골 레퍼토리이기도 하다.


<4대 비극>을 출판한 셰익스피어연구회는 옛날 딱딱한 문어체의 낯섬에 대한 장애를 넘어 고전문학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신경 쓴 모습이 출판사의 의도가 눈에 들어왔다. 덕분에 작품에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다. (그에 반해 책의 폰트나 편집 레이아웃은 좋지 못했다) 1600년에 씌여졌음에도 불구하고 <햄릿>에 나오는 대사 하나들은 시적 표현이 가득 담겨진 인상적인 표현으로 가득했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말고도 더 좋은 표현들이 많이 있었다)



나는 <햄릿>에 대한 감상평 중 하나로 햄릿 왕자의 성격에 대한 탐구를 선택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선택이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읽어내는데 매우 의미있는 방법론이라고 생각한다. 셰익스피어의 위대함은 거기서 나오는 것이니까. 아버지 즉 선왕에 대한 복수를 위해 햄릿이 보여주는 그 과정들이 행동주의자들이 볼 때는 참으로 답답하기 이루 말할 데가 없겠지만 복수가 주는 의미 그리고 상황에 따라 햄릿이 보여주는 깊숙한 고민들은 행동주의자들과 반대편에 있는 성향을 가진 독자들과 관객들에게는 엄청난 동질감을 심어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이 셰익스피어의 힘이고.


한데 이런 부분은 4대 비극을 관통하는 셰익스피어의 힘이다. 정의와 목적을 이루기 위한 행동이 인간이 감정과 대립하는 그 구도에서 표현되는 갈등이 인간심리를 탁월하게 그렸냈다는 사실이 셰익스피어의 탁월함이고 그의 필살기니까.



어찌보면 복수라는 간단한 스토리인데 '이게 왜 대단한거야?'라는 팔짱 낀 비평적 태도로 책을 읽었다가는 햄릿이 가지는 문학적 의미를 놓치기 쉽다. 셰익스피어에 대해 전문적으로 공부하고 탐구한 이들의 해설서를 읽게 되면 '왜 햄릿은 이토록 깊은 고민을 할 수 밖에 없는가?'가 이해될 수 밖에 없고, 종국에는 이 작품에 대한 사람들의 칭송에 고개가 끄덕여 질 것이다. (모든 지식과 진리가 그렇듯이 문학에서도 아는 만큼 보인다. 아직까지는 내 독법이 치밀하게 작품을 분석해 내고 있지는 못함을 많이 깨닫는데, 이런 무지를 깨닫는 자체가 아주 유익한 성과이자 의미라고 생각한다. 반면 일부 해설서들은 <햄릿>에 대해 지나친 의미들을 도출하고 평가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책은 마지막 5장 1막 연인 오필리아의 죽음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클라이막스로 진행된다. 레티어스와의 결투에 셰익스피어는 반전장치를 심어 놓았고 , 그 반전장치로 인해 왕비와 레티어스 그리고 숙부인 왕이 죽고 난 후 햄릿 자신도 죽게 된다. 그 마지막 대목 즉 5장의 분량이 약간 짧아, 서둘러 마무리 짓는 듯한 아쉬움이 느껴진다. (조금 더 길었으면 좋으련만) 하지만 이는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의 미디어에 노출된 현대적 시각에서는 보는 시선이기에 내 스스로도 적절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400년이 지난 지금에 읽었는데도 이 반전장치가 자연스러울정도니 당시의 관객들의 놀라움은 충분했으리라. 


아버지의 복수를 해야하면서도, 아버지가 죽자마자 숙부에게 재혼을 한 어머니에 대한 도덕적 타락에 대한 고민을 고민해야 하는 햄릿 왕자의 비극적 운명을 그리고 있는 작품 <햄릿>. 사실 개인적으로는 그리스 신화에 나온 '오이디푸스'보다 더 비극적인 운명을 태어난 사람이 있나 싶다. 자기도 모르게 자기의 아버지를 죽여야 했고 자신의 어머니와 결혼을 해야하는 운명을 타고난 '오이디푸스'의 삶이 내겐 더 비극적이고 문학적 의미가 크게 다가왔다. 


소포클레스가 <오이디푸스왕>에서는 비극적이고도 비극적인 운명 자체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비극적인 운명에 대한 주인공의 극심한 고통과 절망감이라는 내면심리를 그려냈다는 부분을 비교해 읽으면 <햄릿>에 대한 또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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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어 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7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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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view

재산에 눈이 멀어 부모를 내치는 두 딸, 야망을 실현하고자 형과 아버지를 죽이려 했던 서자 그리고 한 남자를 쟁취하기 위한 두 자매의 욕정이 얽히고 얽혀 종국에는 모두가 파경을 맞이해야 했던 작품 <리어왕>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탐욕'이다. 물론 <햄릿>에서도 숙부의 욕심이 사건의 발단이 되긴 하지만 <햄릿>의 초점은 햄릿왕자의 내면갈등과 심리가 중점인 반면 <리어왕>에서는 그릇된 욕망이 빚어내는 사건과 인물들의 뒤엉키는 파국의 과정과 결말에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다는 차이가 있겠다.


400여년이 지난 작품을 읽으면서 느낀 점은, 확실히 셰익스피어는 대중들을 다룰 줄 알았다는 점이다. 383페이지에서 시종2의 대사에서 볼 수 있듯이 "저런 것들이 잘산다면 나도 무슨 악행이든지 저지르리라"라고 말하는 것 - 악한자들을 벌하는 권선징악으로 쉽게 매듭짓지 않는다. 셰익스피어는 불효를 넘어 천륜을 거스른 두 딸을 죽음으로 심판함과 동시에 정의로 상징될 수 있는 코델리아까지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런 과정에서 등장인물들을 사건과 사건으로 얽히게 그려냄으로써 관객들이 긴장의 끈을 끝까지 놓치지 않도록 그렸냈다. 거기다 각 캐릭터들에게 시대를 살아가는 탐욕스러운 사람들의 자화상까지 투영시켰으니 작품의 위대함을 칭찬할만한 이유를 더 찾게 된 셈이다. 현대물과 비교해 봤을 때도 전혀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자신의 우매한 실수를 딸들로부터 보답받게 되자(?) 미쳐버리는 리어왕의 장면. 두 눈이 뽑힌 글로스터가 자신의 아들인지도 모르고 자신을 한탄하며 에드가와 재회하는 장면, 코델리아의 죽음에 비통해하는 리어왕의 장면 등은 4대 비극 중의 비극으로 꼽는 <리어왕>의 백미라 할 수 있겠다.


오히려 영국에 낭만주의 사상이 퍼졌을때는 셰익스피어가 그린 원작의 결론을 대중들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코델리아를 죽이지 않고 두 언니들을 벌한 후, 에드가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산다는 결론으로 바꾸어 상영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 만큼 셰익스피어가 그린 <리어왕>의 비극이 주는 강력함과 함께 불편한 진실을 담는 마력이 있다.




Feature 01

<리어왕>을 읽으면서 한 가지 특징이 눈에 들어왔는데, 저주의 언어들이 과격하기도 하지만 낯뜨거운 성적 표현으로 씌여졌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셰익스피어가 이런 성적표현에만 함몰되어 있지는 않아 보인다. 저주의 언어를 담아야 할 상황과 캐릭터에 대해서만 적용했으니 말이다. 몇 대사들을 인용해 보자면...


리어 : 만약 이년의 몸에서 자식을 낳게 할 뜻을 가졌다면 멈추어다오. 이년의 배를 불모지로 만들어다오. (325)

리어 : 이런 일로 두 번 다시 눈물을 흘리는 날에는 네 눈동자를 도려내어 헛되이 흘리는 눈물과... (326)

리어 : 네가 기쁘지 않다면 그런 딸의 어머니는 분명히 화냥년일거야. (326)

애드가 : [...] 마님의 색정을 채워주느라 컴컴한 곳에서 정사도 했죠. (367)

고네릴 : 진절머리나는 그의 잠자리에서 저를 구출해주세요. 수고하신 보답으로 그 잠자리를 당신께 드릴테니까요. (408)


다시 읽어봐도 쎄긴 쎄다. <햄릿> 리뷰에서도 썼지만 당시에는 깡패, 소매치기, 창녀들과 같이 다양한 신분을 가리지 않고 연극을 보러왔기 때문에 상류층들이 아닌 대중의 언어에 맞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330페이지에서 광대가 여성 관객들에게 향해 이야기하는 대사는 셰익스피어의 이런 의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듯 하다.


광대 : (관객에게) 지금 히히거리며 웃고 있는 처녀들아, 웃지 말라. 남자의 물건을 잘라버리기 전에는 처녀성 결단나는 것도 시간문제일테니까. (330)




Feature 02

<햄릿>과 다른 <리어왕>의 또 다른 특징은 <리어왕>에서만 볼 수 있는 캐릭터가 있다는 점이다. 셰익스피어는 자신의 주요작품에서 은유와 환유의 대사들을 자주 사용하는데, 이런 메시지들을 정리하면서 극을 이끌어가거나 의미심장한 말을 등장인물들에게 던지는 역할을 바로 광대라는 캐릭터가 하고 있다. 이 때문에 어느 블로거의 표현대로 '<리어왕>에서 가장 정상에 가까운 캐릭터는 광대 밖에 없다'라는 해석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뿐만 아니라 막내딸을 내쫓는 바보짓을 한 리어왕에 대한 관객들의 답답함을 이 광대가 대신함으로써 관객들에게 하여금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기도 했겠구나'는 생각도 들었다. 


광대 : 충실한 개는 개집에서 쫓겨나 매질만 당하고, 아첨쟁이 암캐는 따뜻한 난롯가에 누워 냄새를 폴폴 풍기고 있지요 (319)

광대 : 아저씨는 이 노래 아시죠? 바위종다리가 뻐꾸기를 길렀다가 결국에는 먹혀 버렸네. 그래서 우리는 어둠 속에 남게 되었네 (323)

광대 : 제 머리를 쑤셔 둘 곳을 달팽이는 딸들에게 주지 않지요. (329)


광대의 역할은 비중이 높지는 않지만 <리어왕>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면서 보이지 않는 씬 스틸러(Scene Stealer)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으며 셰익스피어가 생각하는 악의 정의 혹은 탐욕에 대한 불편한 진실들에 대해 화두를 던지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Note 01

등장인물들이 보여주는 탐욕들이 이해되지 않고 과장되었다는 의견들을 리뷰에서 간간히 접할 수 있는데,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원래 탐욕이 우리를 지배하게 되면 정상적인 사고와 행동을 못하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니까. 우리는 아동성폭행, 근친상간, 자녀살인 후 유기, 묻지마 살인 등이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세상에 살고 있지 않는가? 오히려 중세인들이 현대인들을 보고 야만인이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사실 틀린 이야기가 아니기도 하고.


RSS로 즐겨구독하고 있는 한 블로거는 <리어왕>의 후기를 '도덕론자 대 현실론자'라는 명제로 압축해서 해석하고 있었다. 

도덕적 천륜의 정당성을 중요시한 리어 왕, 코딜리아, 올바니 공작과 같은 인물들은 냉혹한 현실의 정치가와 동떨어진 ‘도덕론자’로 치부된다. 이와 반대로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고너릴은 마키아벨리의 말에 따르면 현실을 직시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정치가로써, 이상적 군주상에 걸맞은 인물이 될 수 있겠다. ([출처] 127. 리어 왕, "도덕론자 대 현실론자"|작성자 홍)


도덕적으로 보자면 코델리아가 이겨야 하는데, 현실에서 그렇듯이 반드시 도덕이 승리하는 것이 아님을 셰익스피어는 <리어왕>을 통해 말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부모자식이라는 천륜문제를 명분삼아 [도덕론자 대 현실론자]라는 대결구도를 보여주는 극이라는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Note 02


셰익스피어의 비극 단편선들은 분량이 많지 않기도 하고 현대의 시각에서 읽다보니 <햄릿>처럼 인상적인 감흥이나 여운이 남지 않을 수 있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나도 이해는 간다. 하지만 책을 읽고, 리뷰를 통해 다른 이들의 생각을 읽으며, 글을 쓰다보면 작품에 대한 이해도가 점점 늘어나는 것이 느껴진다.<햄릿>때 그랬던것처럼.

책을 읽을 때보다도 리뷰라는 글을 쓰면서 작품을 더 음미하고 사색하는 것 같다. 

그런 점이 나는 좋고, 나는 그것을 즐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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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의 상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2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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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베니스의 상인>은 셰익스피어를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로 '피를 흘리지 않고 1파운드의 살 덩어리를 떼어가라'라는 명판결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셰익스피어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치하에서 많은 작품을 발표했었기에 그 시대적 특성이 그가 남긴 희극과 비극에 많이 담겨져 있다. <베니스의 상인>에는 '유대인 고리대금업'이라는 사회이슈가 샤일록이라는 독특한 캐릭터를 통해 작품은 전개된다. (물론 제임스1세 시기에도 많은 작품들이 발표되었다)


<리어왕>에서 글로스터의 이야기가 보조플롯으로 추가되어 극을 풍성하게 했듯이 셰익스피어는 <베니스의 상인>에도 '유대인 고리대금업'이라는 주 플롯 말고도 3개의 플롯을 에 더 추가해 극을 이끌어 가고 있다. 주인공 안토니오와 그 친구가 보여주는 우정 그리고 세가지 선택이라는 시험대의 구혼에 관한 이야기. 사랑을 찾아 도피하는 샤일록의 딸 제시카의 이야기가 그렇다. 출판사의 매끄러운 번역이 좋기도 했지만 이 3가지 플롯이 잘 버무려진 탓에  400년 전의 작품이 지금에도 재미나게 읽힌다. 이렇듯 시대과 인종을 넘은 보편성을 획득한 Humanitas의 힘이 담긴 고전문학들의 위대함이 이런 부분이 아닌가 싶다.




02.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해상무역의 발달로 상업이 번영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대부업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이 대부업은 누구나 다 기피하는 대상이었다. 하지만 상업에는 대부업은 없어서는 안 되었고, 그 과정에서 유럽인들에게 가장 미움을 받는 유대인들에게 이 역할이 맡겨졌다고 한다. 그래서 이때부터 유대인들은 세상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었다. 대금업 초기에는 이윤을 남길 수 없었으나 칼뱅 때에 그 조건을 완화시켰다는 사실도 같이 찾아볼 수 있었다.


법정에서 샤일록은 '원금의 몇 배에 해당하는 돈도 다 필요없으니 자신은 오직 차용증서대로 집행하길 바랄 뿐이다'고 자신의 주장을 마치고 칼을 가는 대목이 나온다. (개인적으로는 이 장면이 좀 웃겼음. 재판정 한쪽 구석에서 전의를 불태우며 칼을 가는 그 배우를 생각하니 웃음이 안 나올 수 없었다) 안토니오의 친구들은 그런 샤일록을 향해 <리어왕>에서 볼 수 있었던 과격한 저주의 언어를 샤일록에게 퍼붓지만 샤일록의 반응은 냉담할 뿐이다. 이 대목은 당시 사람들이 유대인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잘 표현한 부분이라 하겠다.


또 그에 앞서 샤일록이 왜 이렇게까지 기독교인들이 강조하는 미덕인 '자비'를 거부하면서까지 감정적으로 대하는지에 대한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는 장면이 나오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은 당 시대를 살아가는 유대인들의 억울함이 느껴지는 대목이라 그들의 심정이 나름 이해가 되었다. 피도 눈물도 없이 돈만 아는 파렴치한 악마같은 자식으로, 모든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욕하며 침뱉는 유대인들의 숙명에 대한 한서림이 어찌 없겠는가. 셰익스피어는 그 점을 놓치지 않고 샤일록의 항변을 잘 표현해 놓았다. 셰익스피어의 장점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03.

현명하고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포샤라는 인물은 모든 남성들로 하여금 자기 배우자에 대한 이상향을 꿈꾸게 하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그녀가 보여준 남편 바사니오에 대한 사랑의 표현은 지혜롭고 헌신적이다. 그래서 그녀는 남자들로 하여금 이상형적인 여성상을 꿈꾸게 한다. 구혼자를 시험하는 상자 선택에 대한 플롯으로 그녀는 처음으로 등장했고 이후에는 바사니오를 거쳐 주인공 안토니오의 재판 플롯으로 합쳐지게 된다. 각 플롯은 독립적으로 시작하나 극이 전개될수록 플롯들이 합쳐지는 연출은 셰익스피어가 극작가로써의 재능이 유감없이 표현되는 대목이다. (영화 'Love Actually'는 플롯의 교차와 통합에 대한 힘을 보여주는데, 이런 점이 영국 문학과 예술의 힘인가 싶기도 하고...)


포샤는 자신의 하녀와 남장으로 변장하고 법정에 출두하여 자기 남편의 친구인 안토니오를 구하게 된다. 셰익스피어는 샤일록의 집착을 극대화시켜 안토니오가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 관객들의 애간장을 태운다. 갈등이 최고로 고조되었을 때, 포샤가 등장하고 법학박사로 분장한 포샤는 지혜로운 판결로 그 갈등을 한 순간에 정리한다. 그 명판결에서 시원한 카타르시스가 느껴졌다. 글로브 극장에서 이 연극을 상영할 때 관객들이 모두 일제히 박수를 치며 환호했을 풍광을 떠올려 보기도 했다.




04.

재판이라는 주 플롯이 끝나자 극이 끝날 줄 알았는데, 셰익스피어는 반지라는 플롯을 곁들여 또 다른 재미를 관객들에게 선사한다. 법학박사로 남장을 한 포샤는 짖궃게도 바사니오가 자신의 아내를 평생토록 사랑하겠노라고 약속한 반지를 판결에 대한 답례로 요구한다. 이에 바사니오는 친구를 죽음으로부터 구해준 법학박사에게 기꺼이 선물한다. 집에 돌아온 포샤는 반지에 대해 묻고 이를 추긍하며 바사니오에게 소위 말하는 약점을 잡는다. 이 부분은 또 다른 갈등의 재앙으로 전개되지 않고 하나의 즐거운 에피소드로 극은 마무리 된다. 이 부분은 남자들이 사랑보다 우정을 더 선호하는 (여자들이 보기에) 바보같은 행동들을 보여주는 대목인데 나름 공감가면서도 재미있게 느껴진 부분이었다. 여전히 우리네 남자들은 이런 선택 때문에 자신의 연인들과 자주 싸우기도 하니까.




05.

<베니스의 상인>의 리뷰를 준비하며 이 작품에 깔려 있는 음모론이라는 비평 글을 읽게 되었는데, 그 의의 제기가 참 흥미롭다. 첫째는 재판과정의 문제점이다. 명실상부하게 판사가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법학박사라는 이방인이 와서 그 판결을 내린다는 점인데 샤일록에게는 불공정한 재판이 될 수 있겠다. 또한 1파운드의 살이라는 계약문구에는 피도 함께 가지고 간다는 게 당연히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는 해석이라는 점인데, 이는 충분히 논쟁이 될 수 있는 대목이라고 본다. (항상 법정의 시시비비는 해석에 달려 있지 않는가?)


또한 포샤를 비롯한 주인공 안토니오 진영은 '자비'에 대한 가치를 강조하면서 돈만 아는 샤일록의 이미지와 대비시킨다. 지금 현대도 마찬가지지만 기독교인들의 사랑은 자신의 종교를 믿는 형제와 자매들에게는 관대하지만 여전히 이교도들에게는 냉대하다는 점이다. 셰익스피어는 겉과 속이 다른 이런 기독교인들의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다는 것이다. 셰익스피어가 그런 의도를 작품 속에 포함시켰는지 아닌지는 내 안목으로는 판단히 힘들다. 


이에 대한 움베르토 에코의 말이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소설이라는 것은 수많은 해석을 발생시키는 기계이다'

그러니 문학작품에 대한 각자의 해석은 당연히 있을 수 있는 것이며 이는 당연한 것일 수 있다.


어쨌든 작품에 대한 다채로운 시선과 심층적인 분석 그리고 문제점에 대한 지적도 좋지만 어쨌든 이는 문학작품이 아니던가. 셰익스피어가 당대의 상황을 그가 만든 캐릭터들이 풀어가는 이야기 힘, 그 자체를 느끼고 즐기는데 초점을 맞추어 보는 것이 좋을 듯 하다. (하지만 그런 관점과 해석은 작품에 대한 이해를 더욱 깊게 해 주는 유익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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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의 눈물 - 서경식의 독서 편력과 영혼의 성장기
서경식 지음, 이목 옮김 / 돌베개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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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제일교포 작가가 일본땅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문필가의 삶을 희망하며 자신이 만났던 책들을 자기 삶의 이야기와 함께 쓴 책이다. 저자는 이 책으로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받았다고 한다. 빼어난 일본어 표현이 수상의 주된 이유라고 했다. 좀 의아스럽긴하다. 아무리 번역을 잘한다 한들 그 빼어난 번역을 원작 느낌 그대로 느낄 수 있을지. 더구나 재일교포인 작가는 한글이 아닌 일본어로 썼다는데… 본인 역시 자신의 글이 한글로 잘 번역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는 내용이 책의 서문에 적혀 있다. 또,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을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만났던 책들이 당연히 일본책이라 책에 대한 공감이 약할 수 밖에 없었음에 이 책을 읽는 나에게는 한계가 미리지워진 책이다.


친구들처럼 밖에서 놀기 보다는 책을 읽기 좋아했다는 자신의 어린 시절로부터 책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자라면서 자신이 만났던 다양한 책들의 매력들을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다. 어느 정도 성숙해지자 자신은 일본인처럼 될 수 없겠다는 자기인식이 생긴 후로부터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고 삶의 고민에 이어진다. 그 이후 두 형 모두가 한국에 유학을 왔다가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연루되어 한국 감옥에 수감되었고 그로 인해 그 갈등은 더욱 커져만 간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얻을 수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를 읽는 내내 되뇌여보았다. 한 사람이 성장하면서 만났던 책들이 외국 책이니 그 책에 대한 공감대가 일리는 만무하겠고 작가의 성장배경과 삶에서의 갈등, 독서에 대한 비평을 엿보는 것으로 그쳐야만했다. 이번 책만큼 리뷰를 쓰기가 어려운 책도 없었다.


핵심메시지 파악을 위한 객관적 독서와 책을 읽고 난 후 자신의 삶과 연결시켜 삶을 바꾸려는 주관적 독서. 그 무엇하나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책장 끝이 덮여버린 이 책, 소년의 눈물. 필력에 대한 무능, 매력적이지 못했던 책의 내용 그리고 식어버린 열정과 나태함으로 리뷰를 쓰는데 한참이나 애를 먹어야 했다. 최악의 리뷰가 될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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