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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의 일 (양장)
이현 지음 / 창비 / 2022년 1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호수의 일이라는 건 무슨 의미일까, 생각하며 읽었던 소설이었다. 이 소설 속에는 주인공 호정을 둘러싼 여러 사람들이 등장한다. 가족이 필요했을 시기에 호정의 곁에 없었던 가족과, 호정의 첫사랑인 은기, 은기를 둘러싼 진실인지 거짓인지 모를 소문, 호정에겐 두려움의 대상이자 동시에 상종도 하기 싫은 대상인 곽근,… 호정은 그 사이에서 다만 안전하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너무 커서 텅 빈 것 같게 느껴지기도 하는 호수. 잔잔하지만 때로는 문득 그 잔잔함이 두려워지기도 하는 호수. 호수는 결국 호정이 아닐까? 제목인 <호수의 일>은 호정이 겪는 성장통을 빗대어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
또한 호수는 이 소설 속에서 보여주는 사회이기도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특히 소설 속에 등장하는 학교라는 틀이 꽤 분명하게 우리 사회를 보여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폭력적인 소문이 급속도로 퍼지고, 폭력적인 아이들은 그 소문을 빠르게 흡수한다. 페미니즘에 관심이 있고 비건을 지향하며 읽고 쓰는 일을 좋아하는 인물이 나오기도 하고, 올바른 사람인지 아닌지 불분명하게 애매한 태도를 보여주는 인물이 나오기도 한다. 학교 안 아이들로 우리 사회 속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모습의 인간상을 보여준 것 같다. 이 소설을 읽으며 학교는 작은 사회, 라는 말이 문득 떠오르기도 했다.
청소년인 호정이 겪는 성장통을 함축시켜놓은 글을 읽은 기분이다. 누군가는 시간이 지나고 나면 청춘이었다고, 그저 성장통일 뿐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시절이지만, 그 시절을 겪어본 우리는 안다. 온몸으로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견디고 있는 호정의 마음을 안다.
중반부까지는 소설의 흐름이 천천히 이어진다고 느꼈는데, 후반부로 이어지며 흐름에 속도가 붙었다. 주제의식 또한 결말부에 분명하고 정확하게 말하고 있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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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의 은기를 생각하면 기우뚱한 가로등이 떠오른다. 한낮에 홀로 불이 켜져 있는 가로등. 그러다 밤이 되면 슬그머니 빛을 잃고 어둠에 잠기는 가로등.’ (p.23)
‘하지만 의사에게는 국어 시간에 배우는 소설의 얼개 정도를 털어놓을 뿐이다. 얼개 사이의 여백에 담긴 수많은 문장들은 내 안에 있다. 어떤 문장은 나조차 알아볼 수 없다.’ (p.50)
‘나는 다만 안전하고 싶다. 그래야 한다는 걸 일찌감치 배웠다. 지윤이랑 신나게 자전거를 달리던 때에, 이미.’ (p.61)
‘시간은 순서대로 흐르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다. 기억도 마찬가지다.’ (p.84)
‘어떤 질문은 그것만으로 상처가 된다.’ (p.110)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말해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다른 사람의 눈길만으로 아파지는 것들이 있다. 돌이킬 수 없으면서 사라지지도 않는 것들이 있다. 사라진 후에도 사라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p.131)
“사랑은 항상 모자르거나 넘치더라고. 적당한 법은 없지.” (p.262)
‘간절히 바라는 일이란 얼마나 실감 나는 꿈인지. 어떤 의미에서 그건 사실이기도 하다. 이미 마음에서 일어난 일. 명명백백한 마음. 다른 누가 아닌 자신에 의해 쓰인 사실. 그것을 어떻게 의심할 수 있을까.’ (p.287)
‘어떤 일은 절대로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 나쁜 일만 그런 건 아니다. 좋은 일도, 사랑한 일도 그저 지나가 버리지 않는다. 눈처럼 사라지겠지만 그렇다고 눈 내리던 날의 기억마저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p.3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