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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대륙기 1 ㅣ 블랙 로맨스 클럽
은림 지음 / 황금가지 / 2016년 2월
평점 :
한 어미가 밥을 지어 먹이고
다른 한 어미가 옷을 지어 입힌
두 계집아이가 있었다.
하나는 공주의 피가 흐르고
다른 하나는 천것의 피가 흘렀지만
누가 봐도 꼭 닮은 아이들이었다.
서미와 무화.
상단의 배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두 아이는 자라서
남편의 반역죄로 유폐되었던 녹옥공주가 낳은 아비 없는 딸 서미는
왕실이 인정한 반半공주라는 신분으로,
그녀의 벗 무화는 그 사이 왼팔을 쓸 수 없는 시녀가 되어
그들이 어릴 적 살던 고래등걸로 돌아온다.
그러나 고귀하고 우아한 자태에 어울리는 사람으로 살고자 했던 아이와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아이를 지켜주고자 했던 아이는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아니 태어난 그 순간부터 누군가의 장기말이 되어 누군가 깔아놓은 길을 걷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놀랍도록 하나의 인물에 집중되어 있다.
노래하는 나무의 옥인, 탑 속의 예언하는 새,
생명의 씨앗을 삼킨 용 그리고 모두가 부르기조차 꺼려하는 존재
그 모두가 무화에 대한 편애와 견줄 대상이 되지 못한다.
하지만 서미가 그토록 소망하고 지켰던 삶에 전혀 흥미가 없는 무화는
그 자리를 가볍게 버리고 떠난다.
남자들의 세계에서 여자가 아닌 한 명의 온전한 무인으로 살아가며
중성적인 생활을 하지만
그 주변에는 날파리처럼 꼬여드는 엄청난 출신의 남성들과
이형의 존재들은 무화를 가만히 놔두질 않는다.
외향적으로는 결코 평탄치 않은 인생을 살고 있다지만
가진 것이 너무 많아 전혀 동정이 가지 않다는 게 문제지만 말이다.
그럴수록 그 옆의 초라한 서미라는 존재가 눈에 밟힐 수 밖에 없다.
홍등가에 팔려갔다 흉측한 팔병신이 되어
충격으로 정신줄이 오락가락한 게 안쓰러워
온갖 위험을 감수하며 그 자리를 대신 살아줬더니만
어느날 보니 고장난 팔은 멀쩡히 움직이고
자기 것이 아니라고 떠넘겼던 기억마저 되찾은 무화를 바라보는 서미의 심장은 내려 앉았을 것이다.
왜 나는 공주가 아닌 거야? 걔랑 나랑 뭐가 달라서!
아무리 그 아이를 닮으려고 발버둥쳐도
비슷해 보이는 외모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결국 자신은 가짜였다.
무화를 중심으로 세계를 구하는 전쟁이 벌어지는 과정에서
그나마도 존재가 사라졌던 서미는
종국에 어릴 적과 마찬가지로 무화대신 험한 꼴을 당하다
어둠으로 끌려들어간다.
그리고 책을 덮고도 한동안 서미가 안쓰러운 존재로 남을 것 같다...
결국은 핏줄이라는 건가요? 운명이란 이미 다 정해졌고 우리 같은 천것들에겐 기회조차 없는 건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