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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 - 제8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 문학동네 청소년 39
이꽃님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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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은유와 미래의 은유, 둘은 서로 다른 시대에 속해 있다. 느리게 가는 우체통의 편지로 연결된 그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비슷한 소재의 영화가 생각났다. 영화 속 주인공들 역시 두 은유와 비슷한 과정을 거쳐 서로가 다른 시대에 속해있음을 확인했다. 그 뒤 미래를 알 수 있게 된 과거의 존재는 미래를 바꾸기 위한 시도를 한다.

만약 이런 일이 나에게 생긴다면 나의 행동 역시 영화나 소설 속 주인공과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우리는 왜 이런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일까? 후회라는 감정 때문은 아닐까. 내가 원하는 미래의 모습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 원인이 무엇인지 생각할 것이다. 원인으로 지목된 선택과 행동을 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원하는 미래에 도착했을 것이라는 상상을 근거로 우리는 후회를 하기 시작한다. ‘그때 그 선택과 행동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때 다른 선택과 행동을 했더라면....’

<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는 소중한 사람과의 관계에 적용할 수 있는 후회 최소화 전략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후회 최소화 전략에 대해 생각하다가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후회의 측면에서 생각해 본다면 미래의 은유는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지 않을까? 과거의 은유는 미래에 일어날 큰 사건, 시험 답안, 로또 번호 등의 정보를 이용해 더 나은 선택을 하여 후회를 줄일 수 있지만 미래의 은유는 과거를 안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택에 미치는 과거의 영향에 대해 생각해보니 미래의 은유도 얻게 되는 것이 있었다. 선택은 어떤 것을 하겠다는 것뿐만 아니라 어떤 것을 하지 않겠다는 결정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만약 과거의 부정적인 경험이나 잘못된 정보가 어떤 것을 하지 않거나 못하게 막고 있다면 과거를 재평가하는 작업을 통해 후회를 줄일 수 있는 선택을 할 수 있다. 과거를 제대로 알고 재평가하여 현재의 내가 더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소중한 사람과의 관계에서 후회를 줄이려면 서로를 이해해야 한다. 만약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지역, 언어, 종교, 시대에 속해 있다면 상대가 속한 세계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그를 이해할 방법이 없다. 상대를 이해하려면 그가 속해 있는 세계를 제대로 읽을 수 있는 문법을 공부해야만 한다.

하지만 비슷한 우리가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가 각각 다른 하나의 세계라고 인정하면 어떨까? 서로의 유사성이 아닌 고유성을 전제로 받아들이면 서로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수집하려 할 것이다. 미래의 은유가 과거의 은유에게 아빠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처럼 말이다. 미래의 은유는 할머니 댁에 가서 아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고 사진을 보면서 마음만 먹으면 내가 전혀 알지 못했던 아빠 모습을 알 수 있다는 걸 왜 난 몰랐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다른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상대에 대한 관심이 아닐까.

서로의 고유성을 전제로 받아들이면 상대가 내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더라도 크게 실망하지 않을 것이고 상대를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바꾸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딸이 원하는 모습의 엄마, 엄마가 원하는 딸의 모습이 아니어도 그 자체로 사랑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두 명의 은유는 편지를 주고받으며 성장하고 있었다. 둘은 서로 다른 시대에 속해 있고 서로의 시간은 다른 속도로 흐르고 있었다. 미래 은유의 입장에서는 일 년 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과거의 은유에게는 열 살에서부터 시작하여 이십 년의 시간이 흘렀다. 미래의 은유는 과거의 은유가 보내 온 편지를 보면서 조금씩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고 했다. 언니(과거의 은유)를 포함한 세상 모두가 자라나는데 자신만 제 자리에서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고 머물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스스로 성장하는데 필요한 것은 충분한 시간일지 모른다. 빠른 속도의 일처리와 즉각적인 반응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을 기억하고 되돌아보고 후회하고 더 나은 선택이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할 수 있는 시간 말이다. 시간이 충분히 주어진다면 후회를 최소화하는 더 나은 선택을 할 확률은 높아질 것이다.

두 명의 은유처럼 미래의 나와 과거가 될 현재의 내가 대화를 나눈다면? 과거의 나와 미래가 된 현재의 내가 대화를 나눈다면 어떨까? 이 역시 소중한 관계 속에서 후회를 최소화하는 선택을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어쩌면 우린 너무 많은 기적을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사는지도 모르겠어.

엄마가 딸을 만나고 가족이 함께 밥을 먹고 울고 웃는 평범한 일상이 분명 누군가한테는 기적 같은 일일 거야. 그저 우리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

(p217) 

 

미래의 은유는 과거의 은유에게 2002년에 태어나는 자신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같은 세계에 속해 있을 때 서로 만날 수 있다면 과거, 현재, 미래 속에서 계속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비록 이 부탁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둘은 계속 연결되어 있다. 편지가 그랬던 것처럼 세계를 건너 은유에게 도착한 은유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은유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은유가 있다면 둘은 계속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여태까지 알지 못했던 커다란 세계가 쿵쿵대며 다가왔던 순간, 온 세계를 기다렸던 그 마음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후회를 최소화할 수 있는 더 나은 선택을 하여 인연을 계속 이어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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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 3부작
막상스 페르민 지음, 임선기 옮김 / 난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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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무엇일까? 눈에 대해 알기 위해 소설에서 눈과 같은 이름으로 불린 것들을 생각해본다. 시 그리고 소세키와 유코의 여인 네에주. 이들의 공통점을 찾으면 눈이 색을 입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시와 네에주. 이 둘은 선 위에 있다. 한 점에서 시작하여 다른 점으로 이동하는 움직임을 가지고 있는데 움직임의 범위가 제한되어 있다. 선 위에서 벗어날 수 없고 왔던 길을 되돌아 갈 수 없다. 정해진 한 방향을 보고 정신을 집중하면 될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균형감이었다. 


네에주가 줄타기를 할 때 균형을 잡지 못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선 위에 있는 점 하나와 선 아래에 있는 여러 점들 모두 위태로워진다. 그렇다면 시는 어떤가? 바닥에서 떠 있는 줄처럼 현실에서 거리를 두고 있지만 실제의 삶과 균형을 이루지 못한다면 줄 위에 서 있는 시인, 시인이 속한 세상 모두 위태로워지지 않을까. 소세키가 세상의 빛을 보았던 기억과 경험이 없었다면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유코의 여정처럼 시가 현실의 색을 입을 수 있도록 시인도 현실의 삶과 균형을 이루며 살아본 경험과 기억이 필요하지 않을까. 


<눈>을 읽으며 우리 자신이 살아있음을 보게 해주는 눈에 대해 생각했다. 


어느 날 아침 우리는 깨어난다. 그때는 세계에서 물러서서 세계에 대해 더욱 놀라게 된다.

어느 날 아침 우리는 자신이 살아 있음을 보게 된다.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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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얼굴
제임스 설터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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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독한 얼굴’의 이미지는 나와 시선을 마주하지 않은 채 생각에 잠긴 누군가의 옆모습이다. 그 옆모습은 젊음보다는 노년의 시간에 가깝다.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진 고유한 얼굴이랄까. 제임스 설터의 「고독한 얼굴」을 읽으면서 내가 볼 수 없을 나의 고독한 얼굴에 대해 생각했다. 혼자서 하는 인생 등반이 길어질수록 나의 고독한 얼굴은 고유한 모습을 만들어 갈 수 있을까?


인간의 얼굴은 항상 변하지만 완전히 완벽해 보이는 순간이 있다.

그 모습을 갖춘 것이다. 그것은 불변의 얼굴이다.

p227




정상에 이르는 길

소설은 교회 지붕 위에서 일하는 일꾼의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건강한 육체를 가진 두 명의 젊은이는 시간당 3달러의 임금을 받는 노동자였다. 더운 여름, 지루하고 고된 노동의 장면에서 랜드의 영혼에 큰 영향을 미칠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다. 같이 일하던 게리가 지붕에서 미끄러져 떨어진 것이다. 다행히 게리는 랜드의 손을 잡아 추락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죽음의 위기에 놓인 사람을 구하는 일. 누군가는 이것이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이라고 이야기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위기에 놓인 사람을 구하는 일에 나의 안전이 보장되지 못하거나 그 일이 나의 성공에 장해물이 되는 일이라면 어떨까?

랜드는 교회 지붕 사건 이후 일관된 선택을 한다. 낙석에 부상을 당한 캐벗을 데리고 두뤼 등반에 성공했고, 드뤼에서 조난당한지 9일째 되는 이탈리아인 두 명을 구조하는 데 성공했다. 경찰과 산악 부대, 가이드 등 20명이 동원된 구조작업이었지만 그들이 선택하지 않았던 위험한 서벽 루트를 통해 가이드 구조대 보다 일찍 조난자들에게 도착할 수 있었다.

고독한 얼굴로 혼자 정상에 올라야 하는 인생 등반이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것이 무엇인지를 랜드는 보여주고 있었다.


우리는 저마다의 몽블랑을 가지고 있다. 각자의 몽블랑은 인생의 목표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몽블랑은 에귀유(aiguille)라고 불리는 눈에 덮여있는 크고 뾰족한 봉우리들이 있다. 에귀유는 100년 이상 산악인들을 끌어모을 만큼 정상에 이르는 도전 정신을 자극하는 요소인 동시에 죽을 수 있을 만큼 위험한 요소가 되기도 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인간을 도전하게 하는 삶의 목표 역시 에귀유에 둘러싸인 몽블랑처럼 저항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압도적인 것일지 모른다. 그런 인생 등반에서 정상에 올랐을 때 얼마나 행복할까?


커다란 산은 심상히 않다. 그것은 어렵고도 아름다워야 한다. 잊을 수 없는 여인의 이미지처럼 기억 속에 있어야 한다.

p90


그러나 정상에 오르는 과정은 쉽지 않다. 랜드가 등반을 앞두고 악몽에 시달렸던 것처럼 용기가 없어 정상에 이르지 못하고 실패하는 상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개인의 역량을 향상시키는 과정뿐만 아니라 등반을 위해 좋은 날씨를 기다릴 수 있는 것과 같은 준비도 포함된다. 무심히 다가오는 구름, 바람의 변화처럼 중요해 보이지 않은 것들이 갑작스러운 폭풍우를 암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인생 역시 중요해 보이지 않았던 작은 일들이 위험을 초래하는 경우가 있지 않던가.


등반 과정 중에서는 가장 어렵고 힘든 피치가 있다고 했다. 산이 무엇도 허락하지 않는 지점이라고 했는데, 살면서 어떤 것을 시도해도 계속 실패가 이어졌던 순간과 비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피치는 기술적으로 가장 어려운 지점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니 계속되는 실패에서 마음을 가다듬지 못해서 정신적으로 더 힘들었던 경험과도 닿아있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상을 누리는 기쁨

드뤼의 성공에 대해 세상에 알리자는 캐벗의 제안에 랜드는 “난 우리가 드뤼를 어떻게 올라갔는지 사람들이 알게 되길 원하지 않아, 우리가 해냈다는 것만 알아줬으면 해. 나머지는 그들의 상상에 맡기고 말이야.”(p121)라고 말했다. 요즘처럼 각자 채널을 만들어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는 시대라면, 정상에 오르는 자체보다 성공을 세상에 알림으로써 얻게 되는 이름과 그 이름을 통해 얻게 되는 부와 명예가 더 큰 기쁨일지 모르겠다.

우리가 타인의 성공에 함께 기뻐하는 이유는 그들이 자신의 험난한 몽블랑을 혼자의 힘으로 올랐기 때문이 아닐까? 정상에 올랐을 때의 기쁨은 그 성공을 세상에 알려 명성을 얻는 것까지 포함되는 일일까.


그는 자신이 무엇을 했고 무엇을 할 것인지와 같은 일들이 설명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뭔가가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었다. 그가 많은 대가를 치르고 얻으려 한 지극히 가치 있는 단 한 가지는 방해받지 않고 혼자 나아가는 것이었다.

p121


캐벗과 드뤼 등반에 성공했던 때와 달리 두 명의 이탈리아인을 드뤼에서 구조한 뒤 랜드는 유명인이 되었다. ‘아름다운 미국인’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프랑스 언론에 얼굴과 관련 사건이 공개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랜드는 프랑스에서 유명인의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인생 역시 정상에서 내려오지 않을 수는 없었다.



정상에서 내려오는 길, Il faut payer(대가를 치러야 한다.)

등반과 마찬가지로 인생 역시 정상에 오른 뒤 다시 내려와야만 한다. 정상에서 내려올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안전하게 내려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쉬워 보이는 지점에서 달리다 추락하여 죽은 사람도 있었고, 내려와야 하는 데 더 높은 곳을 오르다가 추락하여 하반신이 마비된 사람도 있었다.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알기 위해 도전을 해야 하는 경우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도전을 멈춰야 하는 경우를 판단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리고 도전을 멈추기로 결정할 때 역시 도전을 감행하는 것만큼의 용기가 필요하다.


예전 같으면 쉽게 할 수 있었을 일이 이제는 위험했다. 몸이 얼어붙을 지경이었다. 서쪽에 구름이 있었다. 긴장되고 겁이 났다. 계속할 수 있다는 믿음을 잃어갔다. 갑자기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은 먼지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슴이 휑했다. 그는 돌아설 준비가 되어 있었다. 바위는 용서가 없었다. 만약 집중력을 잃는다면 의지를 잃는다면 바위는 그가 살아남아 존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p230



랜드는 목표가 높다는 사실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문제는 겁을 먹었을 경우라고 했다. 의지가 고갈되어 등반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 즉 자신에 대한 믿음이 사라졌을 때 그는 도전을 멈췄다. 그리고 자신의 용기 없음으로 등반에 성공하지 못했음을 인정하고 세상에 알렸다. 우리는 랜드처럼 여기까지 해낼 수 있을까?


그는 가능한 한 말리까지 나아갔고 최대한 높이 올라갔다.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았다. 무릎이 떨리기 시작했고 떨어지고 있었다. 그 순간 그는 미끄러지기 싫어서 계속 필사적으로 홀드를 붙들고 싶었으나 그 대신 양팔을 활짝 펴고 얼굴은 하늘을 향한 채 성자처럼 떨어졌다.

p271


랜드가 폴라에게 했던 이야기를 나에게도 건네는 것 같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견디는 거예요. 두려워하지 말고." (p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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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
벵하민 라바투트 지음, 노승영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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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년 전 폴란드 바르샤바 마리 퀴리 박물관에서 보았던 흑백 사진 한 장이 기억에 남아있다. 기차 안에 마리퀴리와 아인슈타인, 내가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한 명의 남자가 함께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을 찍은 것이었다. 마리 퀴리와 아인슈타인이 기차에 앉아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을지 궁금했었는데 이번 소설을 읽으면서 그들이 브로이와 슈뢰딩거, 하이젠베르크와 보어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솔베이 회의에 가던 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잠시 해보았다.


 이렇게 소설 속 한 장면과 관련된 작은 정보까지 생각나게 할 만큼 작가의 이야기는 어디까지가 허구이고 사실인지 구분할 수 없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그 매력은 물리학 책에서 보았다면 결코 책장을 넘기지 않았을 양자역학과 관련된 역사와 인물들의 주장을 이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도록 만들었다. 책에 등장하는 것처럼 슈뢰딩거의 이마가 칭찬받아 마땅한 것인지 궁금하여 인물의 사진을 검색하고, 하이젠 베르크의 부분과 전체가 어떤 내용인지 궁금하여 관련 도서를 검색한 뒤 책 소개 내용을 읽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깜작 놀랐다. 소설이 이런 일을 해낼 수 있다니!


 소설을 읽고 When We Cease to Understand the World, 다음에 이어질 이야기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런데 이야기를 이어가려면 멈추다이해하다와 관련된 상당히 긴 이야기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부의 압력이나 어쩔 수 없는 조건에 의해 멈추어야 하는 것이 아닌 주체의 의지나 의도가 반영된 멈춤이라면. 이해한다는 것이 우리가 받아온 교육과 보는 방식, 즉 지금까지 만들어진 약속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세계 자체를 부정하는 일이라면.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 우리는 어떤 세상에 살게 되는 것일까?


 “언제부터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춘 겁니까?” 하이젠베르크에게 압생트였을 것 같은 초록 요정 술을 따라주며 곰 같은 남자가 했던 이 질문이 기억에 남는다. 과거와 현재로부터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그런 방식의 통제력을 타인과 세상에 적용하고 싶어 하고 심지어 그럴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길 때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이 아닐까.


 하나를 더 정확히 파악할수록 다른 하나는 더 불확실해지는 것은 우리가 타인과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과도 비슷할 것 같다. 타인을 더 정확히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파악의 주체인 내가 타인을 이해하기 전과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내가 상대를 파악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타인 역시 타자를 이해하는 나와 같은 행위를 하면서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한 평생 한 곳에 있지 않고 움직임 속에 머물러야 하는 존재들임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통제력을 행사 할 수 없다고 해서 세상을 이해하는 일을 멈춘다면 우리는 어떤 관계도 맺지 못하게 될 것이다. 양자역학은 관계속에서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른다. 우리가 타인,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고 싶은지 결정한 뒤에야 When We Cease to Understand the World, 다음에 이어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심장의 심장>을 읽다보면 모치즈키의 프린스턴대학교 룸메이트로 김민형 교수님이 등장하시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건 허구일까? 사실일까? 번역가님은 아실까요? 궁금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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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먼트
테디 웨인 지음, 서제인 옮김 / 엘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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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파트먼트 리뷰 대회] 


아파트먼트를 읽고 나니 자신의 경계를 열심히 파고들어가는 흰개미의 모습이 떠올랐다. 흰개미들이 완성한 집과 아파트가 닮은꼴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흰개미 예술이란 좁은 프레임 안에서 많은 것을 한다는 뜻이라고 했다. 가진 것이라곤 자신이 태어날 때 주어진 것이 거의 전부인 청춘들, 그들이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노력하는 삶 자체가 흰개미 예술처럼 느껴졌다.

소설 속 나와 빌리는 작가가 되기 위해 공부하는 대학원생이다. 둘은 서로 알게 된 지 일주일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아파트 동거인이 되는 데 동의했다. 하지만 그들은 문학에 대한 열정 외에는 공통분모를 거의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나는 기숙사가 아닌 대고모의 아파트를 전대하여 거주하고 아버지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아 어려움 없이 공부하는 중상위 계층 학생이었다. 반면 빌리는 쇠락한 일리노이 출신으로 비행기를 타본 적도 없고 베이글을 먹어본 적도 없는 학생이었다.

무엇이 이렇게 다른 둘을 끌어당긴 것이었을까? 서로의 결핍 요소 때문이 아니었을까. 나는 빌리의 매력적인 외모뿐만 아니라 그가 가진 작가로서의 재능을 알아보았기 때문에 소설 합평 시간에 그가 나의 작품을 방어해 준 것을 나를 인정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싶어 했다. 나는 안정된 경제적 환경 속에서 살고 있지만 자신의 아파트에 고립되어 쪼그라들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사회적 관계 맺기를 힘들어한다. 이런 나는 빌리를 내 곁에 묶어두기 위해 아파트라는 힘을 사용했고, 빌리는 자신의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해줄 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나는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처럼 빌리와 내가 서로의 문학적 성장을 돕는 상호보완적인 관계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둘의 동거가 시작된 이후 둘의 차이점은 점점 갈등의 요소가 되었고, 심각해진 갈등을 봉합하지 못한 채 그들은 결국 함께 살던 아파트를 떠나게 된다. 함께 머물던 아파트에서 나온 나는 교정교열 일자리에서 자신의 영역을 확장했고 빌리는 교수, 가족이 있는 중간급 작가가 되었다. 둘은 함께 갇혀있던 고치에서 나와 각자 자신의 경계를 파먹어 들어가는 흰개미처럼 단단하고 안정적인 자신만의 아파트 공간을 마련한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자신의 아파트를 마련하기 위해 삶을 살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겉으로 보기에는 수만 명이 거주하는 똑같아 보이는 공간이지만 저마다 자신의 이야기가 담긴 공간을 만들고 그것을 지키고 확장해가는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공간을 혼자의 힘만으로 완성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빌리가 말했던 것처럼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재정적 완충재가 필요하다. 이것은 부모에게 받은 경제적 지원일 수 있고 빌리처럼 자신의 시간과 노동을 투여하여 얻게 되는 소득이나 장학금이 될 수도 있다. 그리나 무엇보다도 가장 소중한 재정적 완충재는 한 시절을 함께하고 다음 시절로 건너갈 수 있게 해주는 사람들이 아닐까?

자신의 영역을 계속 만들어가며 성장하기 위해서는 한 시절을 함께하는 사람과 그 시절을 건너가게 도와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아파트먼트는 확장된 다음 세계로 나아가는 연결통로가 되어주었던 소중한 사람들과 그들과 함께 했던 시절과 공간을 기억할 수 있게 해 준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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