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
울리히 알렉산더 보슈비츠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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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때 읽은 <안네의 일기>를 시작으로 나치의 유대인 탄압, 홀로코스트를 주제로 한 작품은 몇 번이고 읽고 또 보아왔다.

 

그러나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이 20세기 유럽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볼 때마다 생경하게 느껴졌다. 멋진 고층 건물에, 전차에, 영화상영까지 했었던 당시 선진화된 독일 사회 문화와 그들이 행한, 원시 사회에서도 존재하지 않을 끔찍한 행위가 도무지 겹쳐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상황과 정서는 내가 접근할 수 없는 저 너머의 일로 느껴지곤 했다.

 

[180마르크. 어느 정도 안심이 되었다. 이 정도면 나라를 뜰 수도 있을 거야. 아직 뜰 수 있다면 말이지. 하지만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는 떠날 생각이 없었다. 재산을 지키고 싶었다. 이렇게 졸지에 뺏길 순 없어. , 안 되지....(중략) 그는 이런 결론을 냈다. 가난한 반유대주의자들은-가난한 반유대주의자들이 정말 아직도 있다면- 온갖 단점에도 불구하고 부유한 유대인이랑 처지를 바꾸려고 할 거야. -<여행자> 50-]

 

<여행자>의 저자 울리히 알렉산더 보슈비츠는 그 시대 독일의 유대인으로, <여행자>는 그의 자전적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자연스레 주인공 질버만은 나치의 부당한 탄압을 피해 도망하는 유대인이지만, 저자는 그를 선량하고 무고한 백색의 피해자로만 그리지 않는다. 질버만은 소설 초기 집에서 도망나와 떠돌이 신세가 된 상황에서도 본인은 돈이 많으므로 가난한 반유대인주의자보다 나은 신세라며 자기 위안을 하기도 하고, 다른 가난한 유대인들과 자신을 구분하며 우월감을 느끼기도 한다. 또 그는 도망 도중 기차에서 만난 유부녀와 짧은 외도를 저지르는 부도덕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1919년에 우리가 젤리히&질버만 회사를 설립했을 당시, 내 출자 자본은 3만 마르크였어. 2만은 아버지에게서, 1만은 브루노에게 빌렸지. 그러니까 이 3만 마르크가 원래 시작이었다! 지금은 종말이고, 지금까지는 그저 벌었던 것을 잃었는데, 이제는 초기 자본을, 미래를 위해 투자할 수도 있는 돈을 잃었어....(중략) 그건 내 미래 전부였어. 내 인생 이십 년을 잃은 거다. 이십 년을! 정말 배은망덕한 소리였어. 내 재산은 평생 위기로부터 보호해주는 벽이었찌. 나를 도와주지 못한 날은 얼마 되지 않았어. 나는 존재 기반을 도둑맞았다! 나는 죽은 목숨이야. 완전히 죽었어. 완전히! -<여행자> 328-329-]

 

질버만의 오만과 희망이 모두 서류 가방 속 상당한 액수의 돈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에서 그가 떠돌며 돈을 조금씩 잃고, 이에 비례해 점점 자신이 처한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이 소설의 큰 줄거리라고 할 수 있다.

 

소설의 결말부에서 그가 서류 가방을 통째로 도둑맞고 그동안 애써 부정하고 있었던 매서운 현실을 한꺼번에 받아들면서 무너져내리는 모습은 이 소설의 최고 명장면이자 잔인하지만 필연적인 결말이다.

 

["저는 이 책에 분명 성공할 만한 힘이 있다고 믿어요." -<여행자>의 저자 울리히 알렉산더 보슈비츠의 원고, 마지막 문장 인용-]

 

우리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끔찍한 모순의 시대 1938년의 독일, 저자가 자신을 본떠 만든 질버만이라는 인간적인 인물은 독자들로 하여금 당시의 어수선하고 부조리하며 잔혹한 시대를 함께 전전하게 만든다.

 

* 이 서평은 김영사 대학생 서포터즈 활동의 일환으로 김영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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