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되어가는 기분이다 창비시선 439
이영재 지음 / 창비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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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다, 이질적이다, 다르다, 생소하다, 새롭다. 이런 분절적인 단어들이 만들어내는 '덜' 분절적인 느낌만이 이영재 시인의 시집을 수식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거의 모든 시에서 이러한 느낌이 가득 묻어 난다. 그가 쓰는 언어가 다르고, 그 언어의 조합이 다르며, 그 의미와 결이 다르다. 이미지가 선행하고 이를 묘사하는 언어가 뒤따른다기보다, 언어가 선행하며 그 언어의 매듭으로 이미지가 탄생되는 느낌이다. 그리고 아주 많은 경우에 그러한 이미지는 꽤나 '비상식'적이다. 내가 살아가는 세계가 사실은 지극히 평범한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음을 수차례 자각하게 한다.

언어와 사고에 대한 담론은 대개 언어와 사고는 불가분의 관계임을 전제로 한다. 언어는 세계가 되고, 전병준 평론가가 해설에 남겼듯,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가 된다. 그리고 언어라는 것에는, 생각보다 많은 틀과 한계가 생각보다 굉장한 무게로 얹혀있기에, 우리는 그러한 암묵적인 한계의 세계를 헤매고 있다. 그러는 와중에 이영재 시인의 시는 언어의 틀에 얽매이지 않는, 그래서 무한하고 본질적인 세계를 향해 무게 없는 숨을 내쉬고 있다고나 할까. 언어의 결이 달라 그가 그린 세계의 결이 다르고 그렇기에 한없이 낯선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려지는 중의 꽃을 어찌할 수 없다

날개를 펴는 중의 새를 어찌할 수 없다

친밀 중의 사람들을 어찌할 수 없다

출생 중의 태아를 어찌할 수 없다

(중략)

터지는 중의 폭탄을 어찌하고 싶지 않다

포화 중의 모방을 어찌하고 싶지 않다

상승 중의 새를 어찌하고 싶지 않다

(중략)

고백 중의 소년을 어찌하지 말자고

발광 중의 전구를 어찌하지 말자고

획득 중의 관념을 어찌하지 말자고

(중략)

내리는 중의 비를 어찌할 수 없고

고이는 중의 비를 어찌할 수 없고

흐르는 중의 비를 어찌할 수 없고

이영재, 「상태」 中

그려지는 중의 꽃, 날개를 펴는 중의 새, 친밀 중의 사람들은 '상태' 속에 존재한다. 아무리 연속적인 세계를 산다 해도, 모든 시간은 표현되는 순간 무수한 순간과 찰나들로 분절되어 버리기 마련인 데 반해, 그의 언어 속 'A 중의 B'는 행위가 계속되고 있는 상태 자체로 박제되어 있다. 죽은 활자가 아닌 무한한 생명력이 담긴 활자로서, 모든 상태는 그렇게 존재를 차분히 압도하는 힘이 있다고, 접속사 없이 그의 세계가 말한다.

설탕에 대한 약간의 오해 중, 아니다 설탕은 충분히 오해이기에 솔직하다 충분히

희다

아름다움이란 것은 대단해서 아름다움에 처하면 누구나 안쪽으로 휘말릴 수밖에 없다 너무 밝은 날, 밝음이 밝음에 육박한 날이었는데 아름다움을 넋 없이 보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저 희고 아름다운 것이 분명 아름답지 않았을 텐데 어쩌다

아름다워졌을까 왜 굳이,

미화된 거지?

이영재, 「캐러멜라이즈」 中

자유를 위해서 피가 필요하다면 딱 그 정도로, 언어에서 해방되기 위해선 사고를 구부러뜨릴 필요도 있을 지 모른다. 그것이 아직까지 내가 이영재 시인의 문장들을 읽어 나가는 방법이라면 방법이다. 직관을 내려놓고 상식을 해체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다보면 어느 순간에는 그의 언어의 접합부가 보이기 시작한다. 단어 사이의 공백들이 세계를 만들어가기 시작하며, 그가 "죽지 않은 사람을 믿지 않는"다고 한 것이, 대체 왜 "질량이 질량을 보존하기 때문"이었는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래도 여전히 알 수 없는 공백들이 다분하지만. 낯섬과 새로움은 충분히 동일한 말이라는 듯, '이질적이다', '다르다'라는 표현이 정말 그의 시를 묘사하기 위해 존재하는 듯, 이번 시선에서 처음 이영재 시인을 알게 되었을 때의 설렘과 그의 언어를 처음 마주하였을 때의 이질적인 낯섦은 시를 모두 읽은 지금에서도 훼손됨 없이 그대로다. 도통 익숙해질 기미가 안보이는 그의 언어 앞에 매일을 새롭게 다가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새롭다. "접속사 없이, 이영재의 '외곬'의 시는 주목되어야 한다"던 이원 시인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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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찾아서 창비시선 438
정호승 지음 / 창비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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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정호승 시인의 시는 내게 정말 과분한 위로였다. 그의 시마다 담긴 특유의 희망적인 메시지와 단호하면서 부드러운 어조 때문인지 정호승 시인의 시를 읽을 때면 어느 성인(聖人)에 가까운 어른으로부터 위로의 말을 듣는 것만 같았다. 이미 정호승 시인하면 누구나 떠올릴 법한 시 「수선화에게」의 "울지 마라/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라는 구절과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의 "홀로 일어난 새벽을 두려워 말고/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되라"라는 구절은 정말 그 언어를 눈과 마음으로 삼키는 것만으로도 어둠 속에서 방황하지 않고 나아갈 힘을 주었고, 시 「부치지 않은 편지」의 "밤마다 인생을 미워하고 잠이 들었던/그대 굳이 인생을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라는 구절은 하루 종일 아무런 의미도 찾지 못한 채 방황하며 좌절했던 나날들에 그 어느 말과도 견줄 수 없는 심심한 위로가 되었다.


그런데 이번 정호승 시인의 신작시집 「당신을 찾아서」에서는 이전까지와 조금 다른 느낌을 받았다. 시집 제목을 빌려 말하면, 누군가 '당신을 찾아서' 길을 떠나지만 영원히 당신을 만나지 못한다. 시 「당신을 찾아서」에서 '나'는 '잘린 내 머리를 두 손에 받쳐 들고' 먼 산을 걸어갈 정도로 간절하지만, 끝내는 쓰러진다. 영원히 쓰러져 잠이 들고야 만다. 따스한 봄은 왔는데, 먼 산에 꽃은 피었는데, 당신을 찾는 데 평생을 바쳤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당신을 만나지 못한 나는 잠에 든다. 절망적이다. 이외에도 대부분의 시에서 투명한 슬픔 같은 게 비추어질 뿐, 막연한 희망이 묻어나거나 하지는 않는다. 아니 사실 비단 이번 시집만이 그런 건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라는 구절이나, 「슬픔이 기쁨에게」 시의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라는 구절만을 떠올려보아도 그의 시선이 온통 희망과 기쁨, 이상에만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내가 지금까지 그의 시에서 막연히 희망만을 찾아왔다는 게 옳은 말일지도 모른다.


이 시집을 여러번 읽다보면 언젠가 생각이 바뀔 수도 있겠지만, 우선 지금으로선 이 시집에 대해 '정화'라는 이미지가 가장 강하게 남는다. 제 1부의 첫 시 「새똥」에서부터 '새똥'이 눈 안에 들어가 눈이 '맑게 씻'겨진다는 시상이 등장한다. 그 이후에도 새와 새똥이라는 소재는 거듭 등장하고, 새와 인간은 단절된 듯 연결되어 더럽고 불순한 인간에게도 '정화'의 가능성이 열린다. 또한 죄와 지옥, 죽음이라는 소재도 빈번히 등장하여 인간이 지닌 해악과 증오, 욕망, 추악함의 이미지가 극대화되는 한편 죄와 지옥 안에도 사랑과 간절함을 담는 발상의 전환으로 역시나 정화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사실 악의 정화인지 선의 타락인지 속단하기는 이르나, 두 극단이 완전히 대립각을 이루는 게 아닌 적절히 조화되며 경계가 흩뜨려지는 것이 정호승 시인 시의 매력인 듯하다. 슬픔과 기쁨, 빛과 그늘, 죄와 사랑, 지옥과 천국, 그리고 새와 인간.

시인과 시, 예술가와 예술작품 간 관계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은 여전하고 항상 시와 시인을 연결지어 보는 건 지양해야 하지만 어느 시인의 시를 여러 편 쭉 읽어나가면서 그 시인의 내면이 그려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설령 그게 진정 시인의 내면 그 자체가 아닐지언정, 어느 한 인물의 겉과 속이 점점 윤곽을 찾아가는 것만 같은 느낌은 지울 수 없을 때가 있다. 나의 시선 속 「당신을 찾아서」 시집에는 누구보다 외로운 사랑을 하는, 누구보다 순수를 애타게 열망하는, 은은한 슬픔과 우수가 가득 서린 한 인물이 비친다. 당신을 만나지 못하리란 걸 가장 잘 알면서도 모든 걸 바쳐 당신을 찾아가는 이 사람은 가장 외롭지만 가장 순수하고 진솔하다. 그 점이 참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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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D] 세상을 보는 눈, 창문 - 인천하늘고등학교 문학동아리 창문 시집 세상을 보는 눈, 창문
박동주.김영서 외 10인 지음 / 부크크(bookk)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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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은 사랑입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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