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 것인가 - 힐링에서 스탠딩으로!
유시민 지음 / 생각의길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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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봉화마을에서 만난 유시민 사인회.

여기서 사온 책을 이제서야 완독했다.

좀 늦게 읽긴 했지만 내 삶에서는 적절한 타이밍에 읽음.

'독서력'도 훈련을 하면 에너지가 커지는 듯 하다.

올해 들어서 나는 무슨 일이 있거나하면 책을 찾아보는 버릇이 생겼는데,

관심거리와 현안이 있다보니 그 부분에 대한 흡수가 커진다.

정말이지 독서는 나에게 '종교의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다 :)

나는 왜 그 동안 독서는 '촌스러운 취미'라고 생각하였을까?

항상은 아니지만...

이젠 지하철안이나 버스안,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에

책을 읽는게 별로 부끄럽지도 어색하지도 않아졌다.

 

 

이 책의 주요 키워드를 몇가지 꼽아보았다 :)

내가 생각할 때 핵심은 이것들이지만, 다른 분들은 다른 부분에 더 주목하였을 수도 있을 거라고 본다.

 

 

주요키워드

놀이, 일, 사랑, 연대, 자기결정권, 자유의지, 칸트의 정언명령, 거울뉴런, 진보의 생물학적 정의, 신념의 주인되기

 

 

 


 

내가 인상깊게 받아들인 부분들은 줄을 치거나, 종이를 접어놓거나 하였는데, 발췌기록을 남긴다.

 

 

 

제 1장. 어떻게 살 것인가

 

  '닥치는 대로' 산 것은 전적으로 내 책임이다. 다른 사람이나 세상을 원망할 수 없다. 세상은 제 갈 길을 가고, 사람들은 또 저마다 자기 삶을 살 뿐이다. 세상이, 다른 사람이 내 생각과 소망을 이해하고 존중하고 배려해준다면 고맙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서 세상을 비난하고 남을 원망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소극적 선택도 선택인 만큼, 성공이든 실패든 내 인생은 내 책임이다. 그 책임을 타인과 세상에 떠넘겨져서는 안된다. 삶의 존엄과 인생의 품격은 스스로 찾아야 한다. 죄악과 비천함에서 자기를 지키는 것만으로는 훌륭한 삶을 살 수 없다. 악당이나 괴물이 되지않았다고 해서 훌륭한 것은 아니다. 무엇이 되든, 무엇을 이루든, '자기 결정권' 또는 '자유의지'를 적극적으로 행사해 기쁨과 자부심을 느끼는 인생을 살아야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결정권'을 행사하는 일이다. '자기결정권'이란 스스로 설계한 삶을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아가려는 의지이며 권리이다.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의 표현을 가져다 쓰자.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삶을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히다. 그 방식이 최선이어서가 아니라, 자기 방식대로 사는 길이기 때문에 바람직한 것이다." 사람마다 인생을 다르게 산다. .... 스스로 설계하고 선택한 것이라면 어떤 삶이든 훌륭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화려해 보여도 자유의지로 만들어낸 삶이 아니면 훌륭할 수 없다.

 

(내 인생은 나의 것 p.37~38)

 

 

..... 아프고 지친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요즘은 책도 신문 방송도 모두 '힐링 healing'이 대세다. 그런데 나는 그런 말을 잘 하지 않는다. 어떤 이야기가 위로와 치유의 효과를 내는지 몰라서 그러는게 아니다. 자기의 삶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타인의 위로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청년은 아기가 아니다. 넘어져 무릎이 깨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하고,  상처를 입어도 혼자 일어나야 한다. 그런 사람이라야 비로소 타인의 위로를 받아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말이 냉정해진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나 말고도 위로하는 사람이 많은데, 나까지 그럴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삶의 의미는 사회나 국가가 찾아주지 않는다. 찾아줄 수도 없고, 찾아주어서도 안된다. 각자 알아서 찾아야 한다.

 

.... 자기가 원인을 제공하지 않은 문제 때문에 고통을 받는 것은 부당하다. 이렇게 주장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고통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내 책임이든 사회의 책임이든, 닥쳐본 고통은 일단 내가 견디고 이겨내야 한다. 세상을 원망해본들 달라질 것은 없다. 누구도 그 짐을 대신 져주지 않는다. '88만원세대'를 만들어낸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그것을 받아들인 정부를 비판하는 일은 정당하고 필요하다.  그러나 이 시련을 견뎌야 하는 것은 '세대'가 아니다. 청년들 각자 이겨내야 한다.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 철폐를 요구하는 사회정치적 연대에 참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나름의 삶의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이룰 방법을 찾아야 한다. 만약 이런 의지가 없다면 '88만원 세대'라는 말은 청년들이 세상을 원망하면서 자신을 비하하게 만드는 부작용을 낳을 뿐이다. '88만원 세대' 가설은 본질적으로 시장만능주의가 불러들인 사회악에 대한 비판이다. 그러나 이것을 개인의 악덕을 합리화하는 알리바이로 오용用해서는 안 될 것이다. 사회악과 개인적 악덕은 연관되어 있지만 둘 사이에 필연적 인과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이 말도 위로를 준다. 우리 현대사에서 아프지 않은 청춘은 없었다. 내 할아버지 세대는 청춘기에 나라를 빼앗겼다. 아버지 세대는 일제의 징용 징병과 한국전쟁을 겪었다. 내 세대는 박정희 전두환의 독재와 혹심한 노동 착취에 시달리면서 청춘을 보냈다. 어느 세대의 청년들도 망국과 전쟁과 독재에 대해 책임질 일을 한 적이 없었지만, 어떻게든 그 고통을 견디면서 의미 있고 존엄한 삶을 찾으려 분투했다.

 오늘의 청년들 역시 자기 책임이 아닌 고통을 겪고 있다.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할 필요가 있다. 평생이 하루라면 20대 청년의 인생 시계는 이제 겨우 오전 9시에 왔을 뿐이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있고 노력하면 반드시 기회가 올 것이다. 그러니 절대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마라. 아버지가 이렇게 아들에게 말하면 따뜻한 위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위로의 힘은 거기까지다. 아버지가 아들의 아픔을 대신해 줄 수는 없다. 아픔을 견디는 능력을 상속해줄 방법도 없다.

 

 상처받지 않는 삶은 없다. 상처받지 않고 살아야 행복한 것도 아니다. 누구나 다치면서 살아간다.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은 세상의 그 어떤 날카로운 모서리에 부딪쳐도 치명상을 입지 않을 내면의 힘, 상처받아도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정신적 정서적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그 힘과 능력은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확신, 사는 방법을 스스로 찾으려는 의지에서 나온다. 그렇게 자신의 인격적 존엄과 인생의 품격을 지켜나가려고 분투하는 사람만이 타인의 위로를 받아 상처를 치유할 수 있으며 타인의 아픔을 위로할 수 있다.

 

(위로가 힘이 될까? P.51~)

 

 

 

제 2장. 어떻게 죽을 것인가

 

..... 그러나 자유의지가 제멋대로 살고 제 마음대로 죽는 것을 무조건 정당화 하지는 않는다. 자유의지를 발현할 때 지켜야 할 규칙 또는 도덕법이 있다. 칸트는 이 규칙을 이성이 내리는 '정언명령定言命令,kategorische Imperativ' 이라 했다. 그는 경험의 도움이 없어도 사람은 이 규칙을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칸트의 도덕법은 두 가지이다. "첫째, 스스로 세운 준칙에 따라 행동하되, 보편적 법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준칙이어야 한다." , " 둘째, 나 자신이든 다른 어떤 사람이든 인간을 절대로 단순한 수단으로 다루지 말고 언제나 한결같이 목적으로 다루도록 행동하라." 존엄한 인간의 자유의지를 옳게 발현하려면 이 두가지 규칙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 칸트의 주장이다.

 (자유의지  P.139~140)

 

  

 

 

제 3장. 놀고 일하고 사랑하고 연대하라

 

 지금의 5060은 그렇게 한 시대를 살았다. 그렇게 자기의 시대를 살면서 대한민국을 산업화와 민주화 둘 모두에게 성공한 나라로 만들었다. 그래서 박정희와 전두환의 독재와 인권유린, 부정부패에 대한 혹독한 비판은 전적으로 정당하지만 그것이 그 시대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否定으로 여겨진다면 일정한 반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5060세대가 독재자의 딸을 압도적으로 지지한 것은 지난 시대와 자기 개인의 삶을 동일시하는 정서 때문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나는 나와 같은 세대의 시민들을 위로하고 싶다. 유신과 제 5공화국 체제에 대한 비판은 우리들 각자의 삶에 대한 비난이나 부정은 아니다. 그것은 지난 시대의 그들에 대한 집단적 성찰을 위해 제기한 비판일 뿐이다.

.... 누군가를 지지하는 것은 그 후보가 패배할 가능성까지 함께 받아들이는 행위이다. 

(품격있게 나이를 먹는 비결 p.231~232)

 

 나는 정치의 일상을 즐기지 못했다. 글쓰기는 지성과 영혼을 건드리는 작업이지만 정치는 국가권력을 다루는 사업이다. 국가권력의 본질은 합법적이고 정당하다고 간주되는 폭력이다. 합법적이고 정당하다고 인정되는 폭력이라 할지라도, 폭력으로는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거나 마음을 행복하게 할 수 없다. 정치가 해야 할 일은 합법적이고 정당한 폭력을 선용善用함으로써 사람들이 저마다 원하는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글쓰기로 돌아오다 P.238)

 

나는 진보주의와 보수주의에 대한 '생물학적 접근법'을 좋아한다. 생물학적 접근법에 따르면 진보주의란 '유전자를 공유하지 않은 타인의 복지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타인의 복지를 위해 사적 자원의 많은 부분을 내놓는 자발성'이다. 이러한 의미의 진보주의자는 생물학적으로 부자연스러운 또는 덜 자연스러운 생각과 행동을 한다. 생물학적으로 부자연스럽다는 것은 '진화가 인간에게 설계해놓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유전자를 공유하지 않은, 가족과 친척이 아닌 타인의 복지를 위해 사적 자원을 자발적으로 내놓는 것은 기나긴 생물학적 진화의 마지막 단계에서 새롭게 나타난 행동방식이다. 이것 역시 진화의 산물이기는 하지만 혈연집단에 대해서만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동물 행동과 비교하면 새롭고 덜 자연스러운 것임에 분명하다.

 

(진보의 생물학 P.250~251)

 

 우리는 어디까지 참여해야 할까? 누구나 다 목숨을 바쳐야 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인간은 이타행동을 하는 이기적 존재이다. 이타 행동의 한계는 정해진 것이 없다. 어디까지 해야 바람직한지 객관적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다. 마음이 움직이고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죽음까지도 감당할 수 있다면 그럴 수 있고, 그저 작은 성금을 보내는 정도만 감당할 수 있다면 그래도 좋을 것이다. 사람은그 무엇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누구도 타인에게 어떤 이념이나 공동선을 실현하는 도구가 되라고  강요해서는 안된다. 스스로 느끼는 만큼, 그리고 자기가 할 수 있고 또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참여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진보의 생물학 P.262~263)

 

  

 

 

제 4장. 삶을 망치는 헛된 생각들

 

 신앙이나 이념은 훌륭할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조건이 있다. 다른 이념과 다른 신앙에 대한 관용을 갖추는 것이다. 그럴 때에만 신념은 삶을 풍요롭고 기쁘고 의미있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래야 사람이 이념의 도구나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 되는 것이다. 빛나야 할 것은 신앙이나 이념이 아니다. 정말 빛나야 할 것은 자연이 준 본성과 욕망을 긍정적으로 표출하고 실현하면서 영위하는 기쁜 삶이다.

(신념의 도구가 되는 것 P.275)

 

 신념을 지니고 살면서 그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 것인가. 나도 정답은 모른다. 내 나름의 방법이 있을 뿐이다. 신념은 훌륭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사람은 훌륭해야 한다. 나는 내가 가진 신념 덕분에 내 자신과 내 삶이 더 훌륭해지는 지를 주의깊게 살핀다. 내 자신을 비루하게 만드는 신념은 좋은 것이 아닐 가능성이 많다. 그런데도 신념 그 자체가 확실히 훌륭해 보인다면, 그 신념을 실천하는 방법을 잘못 선택한 것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많은 국민의 관심과 비판을 받았던 이른바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국회의원 후보 부정부실 경선 사건'을 겪으면서 나는 신념 그 자체보다는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신념의 도구가 되는 것 P.276)

 

 

 

 

 

마지막 붉은 글자들이 너무나 마음에 와닿아 남는다.

는 내가 가진 신념 덕분에 내 자신과 내 삶이 더 훌륭해지는 지를 주의깊게 살핀다.

내 자신을 비루하게 만드는 신념은 좋은 것이 아닐 가능성이 많다.

그런데도 신념 그 자체가 확실히 훌륭해 보인다면,

그 신념을 실천하는 방법을 잘못 선택한 것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저 구절이 와 닿는 이유는 최근에 내가

자신의 '바른 신념'을 '바른 방식'으로 지키기 위해 애쓰는 사람을 보았기 때문이다.

친구 중에 그런 사람이 있었다.

나는 아직 그러지 못해서 혼란스럽기도 했는데, 생각할 수록 다르게 생각된다.

그냥 친구였던 그 사람을 이제는 존경하게 되었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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