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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숨막히는 오렌지색
이 책을 받은건 작년이었나 재작년이었나
아파서 입원했었던 쑥이언니를 보러갔는데, 보라고 준 책이었다.
받아놓고 책장에서 묵혀두길 여러달이 지나갔지만, 나는 이 책의 표지색깔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째서 이렇게 숨막히는 오렌지 색인가? 어울리지 않는다.
책을 다 읽은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고, 커버를 벗겨 하얀 속살만 드러나게 하고싶지만 조금 참아본다.
나라면 차라리 흰색을 택했으리라.
그저 부분 부분 알아온 글귀들이 아니라 이 책을 온전히 다 읽은건 처음이다.
앞으로 여러번 읽게 될 것 같은 책이었다.
내가 왜 그랬지 하는걸 내가 이래서 그랬구나 하고 소상히 밝혀준다.
현학적인 문체가 싫었지만, 이제 그것 때문에 좋아하게 된 것 같다.
꼬장꼬장
홈쇼핑에서 내 친구에게 전화를 하여 다른 사람의 이름을 대면서 상품주문에 대해 구구절절 말을 늘어놓았다.
내 친구는 말했다.
나는 그 사람이 아니다. 나는 8년째 이 번호를 쓰고 있고, 당신네 홈쇼핑에서 이런 전화를 받은게 벌써 다섯번째다.
내가 번호수정하라고 몇번이나 말했는데 왜 자꾸 전화를 하느냐?!
홈쇼핑 상담원은 고객님이 분명히 정보를 이렇게 가입해 놓으셨다면서 말을 이어가더란다.
영화 <내 아내의 모든것>에 나오는 임수정처렁 내가 화가났고, 꼬장꼬장해지는 아침은 엊그제였다.
학교에 들고갈 것을 챙겨놓고 까먹은채 인간 콩나물처럼 낑기는 버스를 타고 힘들게 터미널쪽에 내렸다.
다시 그것을 사러 제일 가까운 편의점에 들어갔는데, 물건들의 가격택이 하나도 붙어있지 않았다.
저번에 갔던 터미널 근처의 편의점도 그랬었다.
건방진 편의점 같으니라고!!!!
나는 카운터에 있는 주인과 알바생에게
"왜 가격택이 하나도 안붙어 있어요? 가격택 전부 붙이셔야 할 것 같은데요?!"
하고 계산을 하며 볼멘소리를 했다.
여자주인은 미안한 목소리로 말도 안되는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그건 변명이라는거 본인도 알겠지.
유머
요즘 왜 이렇게 짜증이 날까? 하는 그녀의 질문에 공감한다.
다들 그런 날이 있지 않은가?
그날은 계속 짜증스런 일이 일어나고 그 짜증의 기운이 쉬이 가시지 않는 그런 날.
(나는 최근에 짜증이 난다기 보다는 우울한 순간이 더 많았다.)
어차피 일년기준으로 볼 때 이유없이 기분좋은 날이나 이유없이 짜증나는 날의 갯수는 비슷할것이라고.
여하튼 우리들의 결론은 짜증나지만 유머를 잃어서는 안된다고.
그런 의미에서 말하는데, 나 칼퇴근한다고 책상서랍에 화장품이 몽땅 든 파우치를 두고 집에왔다고.
내일 쌩얼로 출근해야 하는 참사를 상상하며 웃어보라고.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나는 지금 나의 배경지식과 경험으로 너무나 공감되는 부분에 연필로 밑줄을 긋거나 포스트잇으로 페이지를 표시하기도 했다.
알랭드 보통은 사랑의 탄생에서 부터 죽음까지 너무나 보편적이고 누구에게나 있을법한 그런 연애사를 쓰고 있다.
그의 통찰력(?)과 현학적인 문체를 빼버렸다면 이 책은 그냥 그런 연애소설이었을거다.
사랑의 탄생도 죽음도 그냥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누구나 똑같은 사랑과 연인의 변화과정을 겪고 새로운 사랑을 할 것이다.
뭐랄까.
이 책은 예수컴플렉스에 잠시 빠져있었던 나를 비추어주었으며,
내가 아프다는 것을 과거연인에게 끝까지 말하지 않은 뭐라 확실히 말할 수 없는 그 마음을 확실히 알게 해주었다.
난 내가 조금 기특해졌다.
백퍼센트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유야 어찌되었건
본질은 한가지라고 본다.
사랑의 보답을 받을 수 없게 되자 사랑을 받고 싶다는 오만이 생겨났다. 나는 내 욕망만 가지고 홀로 남았다. 무방비 상태에, 아무런 권리도 없이, 도덕률도 초월해서, 충격적일 정도로 어설픈 요구만 손에 든 모습으로. 나를 사랑해다오! 무슨 이유 때문에? 나에게는 흔히 써먹는 지질하고 빈약한 이유밖에 없었다. 내가 너를 사랑하니까.... |
정말 분명히 깨달은 것이다.
예수컴플렉스에 여배우 놀이는 이제 그만.
그냥 아기가 태어나고 그의 생을 살고 죽듯이,
우리의 사랑도 태어났고 그의 생을 살았고 이제 죽은 것이다.
그 뿐인 것이다.
내가 막을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이건 별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당연히 언젠가 그런 생각을 하는 날이 올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나 빠른 속도로 인정하게 되다니 나는 천재인가보다.
이 책은 내가 내일 당장 새로운 사랑에 빠져도 이상하지 않고,
일주일 뒤에 헤어진다해도 이상하지 않게 여길만한 마음가짐과 용기를 주었다.
다른 독자리뷰의 한 제목에 몹시 공감하며 인용한다.
누구와도 사랑에 빠질 수 있는데, 왜 나는 그것이 운명의 귀결이라고 믿었던가.
나는 내가 조금 가벼워져서 기쁘다.
김춘수, 꽃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싶다
어쩌면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아주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하는 말을 이해하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다는 것도. 본질적으로 우리는 사랑을 받기 전에는 온전하게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
2013.4.23 포스팅
http://blog.naver.com/sooday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