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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의 건너편 ㅣ 작별의 건너편 1
시미즈 하루키 지음, 김지연 옮김 / 모모 / 2023년 5월
평점 :
품절
어릴 적에 지점토를 가지고 놀았던 기억이 난다. 그 중에 새하얀 지점토. 엄마가 어디선가 꺼내오신 식용색소를 한 방울 톡 떨어트리고 내가 그것을 받아 조물조물 반죽하다 보면 색소의 색깔이 은은하게 배던 지점토. 내가 원하는 모양과 색깔로 얼마든지 만들며 가지고 놀다가 굳거나 저녁 먹을 시간이 되어서 지점토를 치우고 나면 손에 살짝 기름진듯하게 남은 막이 어딘가 모르게 아쉬움을 자아냈다.
[작별의 건너편]은 그런 새하얀 지점토 같은 책이다. 죽음 이후의 이야기인데 너무나도 감각이 현실적이다. 사무적이고, 항상 일어나는 당연한 일 같다. 그래서인지 책을 읽었을 때의 기분상태에 따라 등장인물들이 다르게 보인다. 억울한 날에는 내 주변의 제대로 작별인사를 하지 못 한 사람들이 생각나서 집의 문이란 문은 다 닫고 오열하듯 울게 하고, 기분이 좋지 않은 날에는 등장 인물들이 세상 백치처럼 느껴져서 삿대질을 하고 싶어진다. 어떤 각도에서 봐도 공감을 이끌어 내는 옴니부스식 단편 시리즈이고, 이웃의 이야기이고,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다른 사람의 삶과 억울함을 엿보는것도 나름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 이 책은 독자 내면의 하얀색 지점토에 쌓인채로 굳어버린 어떤 기억을 마주할 용기를, 간접적 연습을 통해 주는데에 더 의미가 크다.
개인적으로 나는 항상 내 죽음의 순간은 내가 모든 요소를 다 통제하는 그런 상황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죽음을 부정하는 마음이라든가, 당황스러운 감정에는 공감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다른 세계로 건너갈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에게 갑작스럽게 자신이 죽었다는 소식은 큰 충격으로 다가오겠지. 사고를 당해 죽은 사람, 갑작스런 병세 악화로 죽은 사람 등 저마다의 억울함이 있을 것이다.
들고 있는 [작별의 건너편]은 정식 출간물의 70% 정도가 들어있는 가제본판이다. 전체 5편의 단편 중 3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얼추 계산해보니 정식 출간시에는 250 페이지 내외가 될 것같다. 각 단편의 주인공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죽음을 당한 사람들이고, 마지막으로 이승에 못 다한 말을 다 하기 위해 주어지는 24시간동안 산 자들을 만나고 올 수 있다. 단,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만 만날 수 있고, 24시간이 지나거나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을 만나면 바로 환생의 문을 통과해야 한다.
이 소설의 버질(Virgil)은 이름도 주어지지 않은 '안내인' 이라는 인물인데, 항상 고카페인 음료인 노랗고 까만 캔에 들은 '조지아 맥스' 캔커피를 마신다. 하도 이 커피가 자주 등장해서 PPL이 아닌가 의심할 지경이었고, 비건이 선택하지 않을 우유가 들어간 커피임에도 왜인지 그 짜릿한 단맛이 당겨서 나도 한 캔 사먹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안내인의 정체는 무엇이며 왜 이 일을 하는가? 너무도 궁금하지만 역시 합리적인 답은 그 역시 이전의 안내인의 안내를 받았을 망자인데 그냥 눌러앉았을 뿐이고, 연옥에 해당하는 작별의 건너편이라는 장소라 커피의 단맛을 느끼는게 아닌가 하다.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눈물샘을 자극할지에 대해서만 한참 궁리를 한 끝에 나온 책 같다.
정말이지, 와사비보다 매운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