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쓰카 에이지 - 순문학의 죽음, 오타쿠, 스토리텔링을 말하다
오쓰카 에이지.선정우 지음 / 북바이북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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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쿠 문화

오타쿠는 *마니아의 단계에서 더욱 발전하여 자신만의 문화를 창조할 수 있는 극도의 경지에 이른 사람을 말한다. 한편으로는 ‘이상한 것에 몰두하는 사람, 혹은 연구하는 사람’이란 뜻이기도 하다. 이들은 일본 만화의 발전을 이끈 원동력이기도 하다. 프로에 준하는 지식을 갖추고 자신이 원하는 문화를 향유하기 위해서 동인지부터 시작해 누구나 인정하는 새로운 창작자로 등장한 것이다. 만화 오타쿠 외에도 일본에는 컴퓨터, 게임, 전쟁, 자동차 마니아 등 여러 종류의 오타쿠가 존재한다. 그러나 현재 이들에 대한 인식은 그리 좋지 않다. 1989년 만화 오타쿠 중 한 명인 미야자키 쓰토무 벌인 연속살인 사건이 밝혀진 것이 큰 역할을 했다고 일컬어진다. 그는 자신의 성적 만족을 위해 유아 4명을 연속 살해했다. 오쓰카 에이지는 그의 변호인단으로서 그가 불완전한 이야기를 적은 것을 보았다. 다른 범죄자들에게서도 나타나는 이러한 사항을 미루어 보아 표현 욕구가 제대로 충족되지 않았을 때 범죄가 일어난다는 추론을 하기도 한다. 이 사건은 무척 슬프고 앞으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다. 그렇다고 ‘오타쿠’의 긍정적인 면까지 폄하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자신들이 원하는 문화를 만들기 위해 탐구, 개발한 그들의 노력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이었다. 이에 반해 현재 오타쿠들은 기업이 만들어 준 것을 그대로 받아쓰는 ‘유저’에 머물고 있다.

오쓰카 에이지도 염려하고 있듯 ‘라이트노벨이라는 한 장르만 반복해서 소비’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이것도 작품의 양이 방대하고 매우 세분화 되어 있어 자신이 좋아하는 라이트노벨 속 하위 장르나 선호하는 작가의 작품만을 읽는 경향도 많다고 한다. 나는 이 부분이 가장 경계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작은 관심 분야 안에서만 지내는 것은 언젠가는 파탄이 날 수밖에 없으므로 결국 받아들이는 독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성장하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기업이 계속 새로운 장르의 라이트노벨을 만들어 내어 독자들을 현혹한다면 독자를 기다리는 시간이 계속해서 길어질 수도 있다. 그 긴 기간 동안 오타쿠들도 ‘크리에이터’로서의 면모를 잃고 오로지 ‘유저’로서만 활동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전자회사에 의해 오늘날의 백색가전이 점차 개인용 전자기기로 그 영역을 확장해왔듯이 말이다.

출판기업이 조지오웰의 『1984』에 나오는 빅브라더와 같은 역할을 한다면 어떨까. 다른 문화는 철저히 통제된 채 ‘라이트노벨’이라는 장르 하나만 남는다면.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경쟁에서 도태된 것은 없어져도 되는 것이 당연할지 모르나, 이것은 생각보다 심각한 문제로 돌아올지도 모른다. 스스로 생산하지 못하고 받기만 하는 수동성에는 주는 사람에 따라 좌지우지 될 수 있다는 보이지 않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라이트노벨’ 12국 전기나 영미권의 ‘영어덜트소설’ 중 많은 사랑을 받은 『헝거게임』시리즈나 『다이버전트』 시리즈,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 등은 시대를 비판하고 현실인식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앞의 작품들 보다 랜덤하우스를 돈방석에 앉힌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시리즈나 『트와일라잇』 시리즈가 보다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수용자의 수준이 올라가지 않을 수 있다는 가설도 씁쓸하지만 세워봐야 할 것이다.

 

 

 

 

 

 

순문학의 죽음

오쓰카 에이지는 순문학에 대해 ‘불량채권’이며 ‘이미 내구연한이 끝난 문학’이라고 말한다. 나는 이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무척 당황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오쓰카 에이지가 ‘불량채권’이라고 말한 순문학은 ‘기득권’으로서의 순문학이다. 상업주의와 연결해 코믹에서 벌어들인 수입으로 문학을 먹여 살리고 있는 모순에 대해 이야기 한 것이다. ‘매상을 문학의 유일한 기준’으로 놓고 한 말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히 할 필요가 있겠다. 이 밖에도 문학이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는 많다.

예를 들어 전문지는 다수의 사람이 보지 않지만 존재의 이유는 분명 있다. 각 분야의 전문지식을 나누고 발전시켜 나가기에 틀림없이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문학도 이와 다르지 않다. 현재 소위 순문학이라 불리는 문학이 예전의 기능을 잃고 문학을 위한 문학이라는 틀에 갇혀있는 점은 안타깝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향유하지 않는 문화라는 이유만으로 사라져야 하는지는 생각해 볼 문제다. 판소리와 사물놀이 등은 우리의 전통문화이지만 향유 계층은 많지 않다. 그렇다고 그 문화가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민족문화를 연결해주는 문화가 사라진다면 나라와 민족의 역사성도 유지하기 힘들지 모른다. 생물종의 다양성을 보장하고, 언어의 다양성을 유지하려는 것도 이와 같다. 우루과이라운드에서 타결된 WTO로 세계는 글로벌 경제로 묶였다. 그 덕분에 각 나라의 경제상황이 어려워지면 다른 나라도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인터넷이 발달되어 대중문화가 세계적으로 비슷해지고, 군사적‧경제적인 이유로 한 나라의 문화가 정체성을 잃고 다른 문화로 편입되는 경우도 많아졌다. **세계 언어도 급속도로 사라지고 있다. ‘현재 7천여 언어가 21세기 말에 이르러 그 절반, 최악의 경우 90%가 사라질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고 한다. ‘한 언어가 사라진다는 것은 곧 그 언어에 반영된 문화, 즉 인류의 소중한 자산이 없어지는 것’과 다르지 않다.

현대문화를 저급문화라고 폄하하는 말을 종종 듣게 된다. 저급문화라고 불리는 많은 것들은 신나고, 가볍고, 빠르게 소비된다. 무거운 삶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고민하지 않고 즐길 수 있는 최적의 상품이라 해도 크게 다른 말은 아닐 것이다. 예전에 ‘문화’라고 칭송받으며 지식인들이 향유하던 고급문화와 현대문화에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철학을 논하고 세계에 대해 고민했던 살롱문화도 아니고, 절차와 예법이 중시되는 다도문화도 아니다. 즐기는 법을 배울 필요 없이 스스로 느낀 그대로 향유하는 문화가 현대문화의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느낀 대로 보는, 편하기 이루 말할 수 없는 문화다. 읽어주는 그림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고, 문학 작품에 녹아든 시대적 의미와 사상을 모르는 채로 작품 그대로를 마음껏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흔히 말하길 책이 써진 후에 텍스트는 철저히 수용자에 의해 판단된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우리는 학교에서부터 문학작품을 해석하는 방법을 익힌다. 문화적 지식이 계속해서 쌓여왔기 때문에 오랜 시간을 들여 노력하지 않으면 그 맥락을 이해하기가 예전보다 훨씬 더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문화를 접한 그룹으로 향유 계층 또한 한정된다. 이렇게 문화는 양분화 되어 격차가 분명해지고 골이 깊어졌다.

나는 라이트노벨의 인기는 한동안 지속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괴로운 현실을 잊기 위해서 한동안 사람들은 가볍게, 고민 없이, 때로 일상생활에 소소한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이야기에 빠져들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다보면 깊이를 추구하는 시기도 올 것이다. 그때 문학 자체를 다시 찾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의 역사는 언제나 파도처럼 물결모양을 이루었다. 생명력이 있는 문화인 한 변곡점은 언제나 찾아온다. 순문학이라 불리는 현대소설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만 소수의 문화라고 버리기보다 지키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지브리의 사상

‘지브리는 비평으로 맞서야만 한다’는 오쓰카 에이지의 말을 몇 번씩 곱씹었다. 공교롭게도 작년에 나는 지브리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내가 지브리 작품의 사상을 원작과 비원작으로 나눈 반면, 오쓰카 에이지는 각각의 이야기 속에 들어있는 사상으로 나누었다. 나와는 다른 판단 기준이었지만 내가 고민하던 지점을 전문가의 식견으로 들을 수 있어 뜻 깊었다. 원주민을 내쫓는 설정이라 아이누족을 내쫓은 일본인들이 보기에 괴로운 <마루 밑의 아리에티>나 <마녀 배달부 키키>에 대한 그의 평가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세계의 유수 영화제의 상을 안겨주었고, 흥행 면에서도 최고의 성적을 보였다. 나는 그 영화 덕분에 1권의 아성을 뛰어넘지 못하는 원작을 3권까지 읽게 된 사람으로서 원작과 영화의 내용은 상당부분 다르다고 생각했다. 원작에서는 영화에서처럼 전쟁의 폐해를 심각하게 다루지 않는다. ‘어쩔 수 없다, 애석하다’라고 표현해도 될 정도다. 그보다는 하울이 자신을 잡으려는 마녀를 피해 다니는 마법 세계의 힘겨루기와 소피의 자아 찾기에 더 많은 부분이 할애되어 있다. 그러나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린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는 전쟁으로 황폐해지고, 고통스러워하는 하울의 모습이 여러 번 등장한다. 관객들은 하울의 눈을 통해 전쟁의 참상에 대해 느꼈을 것이다. 그들이 전쟁을 다루고 있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나 <붉은 돼지>, <천공의 성 라퓨타>에서 느낀 감정은 프로파간다 문제로 몸살을 앓았던 <바람이 분다>와는 분명히 다른 모습이다.

나는 다른 영화에서는 적용 가능한 ‘보편성’이 <바람이 분다>에서는 ‘유일성’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했다. 호리코시 지로라는 인물이 전쟁에 대해 고민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행기를 만들고 싶은 욕망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마법이나 다른 나라에 속한 인물이 아니라 ‘일본’이라는 나라에 속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얼마 전에 이 영화를 본 나로서는 전쟁의 한 가운데서 고민하는 인물을 보았지만, 다른 면으로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란 생각한다. 더불어 3인칭으로 화자를 설정했다면 논란의 소지는 줄었겠지만 이야기성은 부족해 재미가 떨어졌으리라 생각했다. 논란에 휩싸여 흥행에 실패한 점이 아쉬운 대목이긴 하지만 지브리답기에 좋았던 것도 사실이다. 나는 지브리 사상의 문제가 오쓰카 에이지가 말한 ‘현재를 꼬집는’ 문제보다 ‘빌려오기’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브리 작품은 앞에서 말 한 대로 원작이 지브리인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으로도 나눌 수 있다. 2000년 이후의 작품들은 유독 원작을 가져와서 만든 작품들이 많다. ***10작품 중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벼랑 위의 포뇨>, <바람이 분다> 3작품을 제외하고 모두 원작이 있는 작품이다. 1986년에 설립되어 1999년도까지의 장편 애니메이션 11편 중 원작이 있었던 작품이 <바다가 들린다>, <귀를 기울이면> 단 두 편인데 반해 대조적인 모습이다. 나는 이것이 이야기성의 부족에서 나타난 현상이 아닌 가 조심스럽게 추측해 보았다. 남에게 빌려온 이야기는 패러디라는 새로운 창작의 모습일 수도 있지만, 결국 남에게 의존한다는 점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다’일 수도 있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나 잘 하지 못 하겠다’일 수도 있으며,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나 혼자서는 말 못 하겠다’일 수도 혹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다’가 될 수도 있다. ‘누가 이런 이야기를 했더라’에 기대기보다 스스로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지브리에게 더 좋은 일 아닐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한 번 더 읊는 것은 비평가가 할 일이지, 사상가가 할 일은 아니다.

 

 

 

 

 

>> 순문학 이야기의 내막을 모르고 인터뷰집만 봤을 때는 오쓰카 에이지를 잠시 오해하기도 했으나, 그의 사상에 감동 받았기에 오랜만에 좀 긴 글을 써 보았다. 지브리에 대한 그의 이야기는 나도 사상적 유려함에 감복하고 있던 터라 깊게 다루어 주어서 정말 좋았다. 지브리의 다른 축임에도 불구하고 잘 알려지지 않았던 다카하다 이사오 감독을 대등하게 조명해 그의 작품을 보고 싶은 마음이 샘솟고 있다. 그러나 순문학 논란에 대한 이야기는 앞에서도 말했듯 다소 부족한 것 같아 아쉬운 점도 없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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