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노그라피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2
비톨트 곰브로비치 지음, 임미경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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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3대 욕구를 흔히 식욕, 수면욕, 성욕이라 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욕구이자, 여타 욕구에 비해 가장 강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동물의 3대 욕구도 이와 다르지 않다. 다만 모두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성욕부분에서 차이가 난다. 동물의 발정기간은 무척 시끄럽고 번잡하다. 기간 안에 짝을 찾아 번식을 해야 하니 유난을 떨 수밖에 없다. 사람의 경우는 발정기간에 제한이 없다. 발정기간이라 해도 외관상으로는 확인하기 힘들다. 역시, 사람다우려면 비밀이 많아야 한다.



 

 

비톨트와 프레드릭은 참 비밀이 많은 사내들이다.(말도 많긴 하다) 헤니아와 카롤을 엮어주려고 무척 애를 쓰면서 이것을 들키지 않아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탄다. 이들의 뻔한 계획이 들키지 않는 것은 닭털이 죄다 뽑힌 닭이 남쪽나라로 날아가는 것만큼이나 현실성 없는 이야기지만 그렇게 된다. 작가가 등장인물들을 둔하기 그지없게 설정한 덕이다. 독자는 다시 쓰거나 던져버리지 않는 이상 그대로 읽을 수밖에 없다. 여자애와 남자애를 일부러 붙여놓고, 여자애에게 남자애의 구두끈을 메어주라고 시키거나, 둘의 상황을 요상하게 꾸미고 일부러 함께 있는 모습을 약혼자에게 목격하게 하는 등의 일들을 이 두 명은 끈질기게 계획하고 성취한다. 약혼녀가 바람피우는 장면을 보여주거나 조장하는 말을 하는 것은 이 두 사람뿐인데 '명석한 변호사'로 나오는 알프레드가 왜 짐작을 못하는지 정말 의문이다. 모두 자신의 내면만 들여다 볼뿐 두 사람의 행동을 문제 삼는 사람은 없다. 당사자인 헤니아와 카롤 역시.



 

 

책장을 넘기며 ‘이 변태들’하고 몇 번이나 되뇌었는지 모른다. 심지어 이들은 그냥 변태도 아니다.‘관념적 변태 성욕자’다. 왜냐. 첫 번째로 성적 취향이 독특한 변태들은 대부분 직접 행동하길 좋아한다. 그 행위 자체가 그들에게 쾌락을 주기 때문이다. 피해 대상에게 접근해 강제로 추행하거나 겁탈하기도 한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구역질나지만 자신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경우도 종종 있다. 가끔 보기만 하는 관음증을 앓는 변태들도 있지만 이들도 실제 피부를 보는 것을 낙으로 여긴다. 비톨트와 프레드릭을 굳이 변태 무리에 넣어 분류하자면 관음증에 가깝겠지만, 엄밀히 말하면 위의 사례 중 어느 경우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이들은 헤니아에게 손을 대는 것보다 카롤이 헤니아에게 손을 대는 게 더 관능적이라고 느끼는 변태들이기 때문이다. 이로서 친애하는 우리의 두 주인공이 일반적 변태 순위에서 제외되었다. 이들의 관심은 실은 ‘어울림’에 있다. 누가 누구에게 ‘그럴듯하게’ 알맞은 상대인가다. 변호사 알프레드같이 어른입네 하는 사람은 아직 청소년기를 벗어나지 않은 헤니아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녀의 짝으로는 동갑내기 카롤이 적합하다. 헤니아는 알프레드를 존경하고 그의 약혼녀인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그들에게 이야기하지만 관념적 변태 성욕자들이 보기에 그녀가 ‘뭘 모르고’하는 얘기에 불과하다.


 

 

 

이들은 구분하기를 무척 즐긴다. 어른과 아이, 지식인과 비지식인, 법칙과 종속 따위로 등장인물들을 재단하고 인형인양 말끔하게 재단된 천 위에 올려놓는다. 이쯤 되니 이들이 말하는 관능이라는 ‘성적性的’ 감각을 자극하는 행위 자체가 하나의 *알레고리가 아닌가 의심스럽다. 그들은 헤니아와 카롤이 세상에 대해 더 많이 알기를 바라지 않는다. 법칙에 종속되지 않는 ‘아이’이기를 원한다. 헤니아와 카롤은 현재의 상태에서 맺어져야 하며 그것이 가장 완전한 그들의 결합 방법이다. 두 사람은 절대 어른이 되어선 안 된다.



 

 

소설의 첫 장에서 작가는 '1943년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처음 읽을 때 무슨 의미인지 몰라도 괜찮다. 친절하게도 '나치의 대량 학살로 당시에 폴란드 60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는 주석이 달려있다. 잠시 허생전을 떠올려보자. 돈 못 벌어온다고 구박받던 찌질이 허생을 지나 무인도에서 변산 도둑들과 함께 큰 농사를 지은 거상 허생이 나오는 장면이다. 거기서 3년 살며 먹고 남은 것을 팔아 허생은 백만큼을 번다. 그 중 반은 바다에 버리고 글을 아는 이를 데리고 섬을 나온다. 남은 배도 불태워 육지와 교류하지 못하도록 한다. 허생은 글을 아는 자들이 화근이 될까 염려했다. 무인도인 채로 두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좋은 길이라 여겼다. 친애하는 우리의 관념적 변태 성욕자 두 분이 떠오른다. 아는 것은 화근이다. 그들은 미성숙한 상태로 있어야 한다. 전쟁의 상흔 따위 알 거 없다.  모두가 무지한 채로, 순수한 채로, 누군가의 복종을 바라지 않는 상태로 세계가 온전히 존재했다면 이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작가의 말소리를 들은 것만 같다. 그렇다. 환청이었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원래 꿈보다 해몽이 좋은 법이고 독자에겐 오독의 권리가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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