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영화와 드라마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소설은 생각보다 많이 어두운 느낌이었다. 일본문학 특유의 담담하고 차분한 어조는 분명했지만 그다지 유머러스하다거나 따뜻한 정감은 느낄 수 없었다. 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작가가 하고 싶었던 말들을 하려다보니 전체적으로 난해하고 어렵게 느껴지기도 했다. 또한 처음부터 끝까지 잔잔하게 이어지는 이야기의 흐름은 자칫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이런 점들이 이 책의 정체성인 것일까. 어찌됐던 몇 가지 요소들은 아쉬웠지만 소설의 전반을 관통하고 있는 ‘사랑’과 ‘죽음’이라는 주제는 꽤 신선한 조합이었다.

 

그런 것이다. 아키가 없어졌다는 사실은, 그녀를 잃는다고 하는 것은 곧 내가 볼 것이 모두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호주에서도 알래스카에서도, 지중해에서도 남극해에서도. 전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마찬가지다. 어떤 웅대한 경치에도 마음은 움직이지 않으며, 어떤 아름다운 광경도 나를 즐겁게 하지 못한다. 보는 것, 아는 것, 느끼는 것…. 내가 살아가는 것에 동기를 부여해주는 사람이 없어져 버렸다. 그녀는 더 이상 나와 함께 살아주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다루고 있는 <어젯밤 카레, 내일의 빵>과 비교했을 때,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는 조금 더 철학적이고,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남편의 죽음 이후에 시아버지와 단둘이 생활하며 남편의 주변인들로부터 치유 받으며, 소소한 일상이지만 유쾌하고 빛나게 살아가던 데쓰코와 달리 사쿠타로는 그 상처가 무척이나 깊게 느껴졌다. 그는 데쓰코와 조금 다른 방법으로 아키를 추억하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죽은 이를 기억하고 떠올리기보다 혼자만의 세계에서 그녀를 추억하는 것이었다. 그녀와 함께 했던 둘만의 시간들을 떠올리고, 그녀와 함께했던 장소에 찾아가기도 한다. 그녀와 마지막으로 떠나고자 했던 여행을 그녀의 부모님과 떠나기도 한다. 일상 속 소소한 아키를 떠올리기보다 보다 적극적으로 그녀와의 기억을 떠올리려 한 것이다. 이로써 데쓰코의 사랑이 따뜻하고 보다 성숙하게 느껴졌다면, 사쿠타로의 사랑은 소년의 풋풋하지만 열정적인, 처절하고 보다 애절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나는 마스크를 내려 턱에 걸고 가글액으로 정성들여 입을 닦았다. 그리고 침대 끝에 앉아 마주 보았다. 처음 키스했을 때의 일을 생각해냈다. 무균 상태에서 키스를 감행하는 것은 첫키스 이상의 긴장을 필요로 했다. 우리는 살짝 입술을 포갰다.

시간의 감각이 이상했다. 이미 그녀를 잃고 유품을 검사하기 위해서 이 방에 발을 들여놓은 듯한 착각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기괴하고 생생한 착각이다. 마치 미래를 추억하고 있는 듯했다.

 

정말이지 소년의 사랑은 처절했던 것이 맞는 것 같다. 저 어린 나이에 사랑하는 여자를 병으로 잃게 되는 경험은. 마지막 밀월여행을 준비하던 소년의 모습이 우리를 너무도 슬프게 만든다.

그리고 이 책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랑이 등장한다. 바로 사쿠타로 할아버지의 사랑이다. 다른 여자와 결혼한 이후에도 먼 곳에 있을 그녀만을 평생 생각하며 살아가는 삶.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현대 사회의 인스턴트식 사랑과는 분명 다르다. 아마 이런 종류의 처절한 사랑은 죽음까지 초월하려나보다.

 

“이건 네가 가지고 있어주면 좋겠다.”

돌연, 할아버지가 그런 말을 꺼냈다.

“할애비 죽을 때 내 뼈와 함께 뿌려줘.”

“잠깐 기다려 봐.”

나는 당황하여 말했다.

“이 사람의 뼈와 내 뼈를 같은 양으로 섞어서 사쿠가 좋아하는 곳에 뿌리는 거야.”

할아버지는 유언처럼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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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선화>라는 책의 인물들은 나에게 매우 난해하게 다가왔다. 책을 다 읽은 후에도 그들의 감정선을 나로서는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하겠다. 다소 난해하고 복잡한, 변덕쟁이 어른들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조금만 다르게 생각해보자. 그들이 겪는 여러 가지 감정들의 소용돌이는 이처럼 난해하고, 복잡하며 변덕스럽고 이해하기 어려운 종류의 것들이어야 더욱 현실적인 것이다. 흔들림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확고하고 변함없는 종류의 감정은 오히려 현실적이지 못하다. 그런 면에서 <선화>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그 어느 소설보다 마음으로 와 닿았다.

 

이런 나에게 꽃을 건네다니. 이런 내가 꽃을 받다니. 게다가 나는 그 꽃을 보고 혼자 비실거리고 있지 않은가. 영흠은 내가 이럴 줄 알고 있었을까. 알고 있을 것 같았다. 영흠이 바란 건 바로 이런 내 모습일 거란 생각까지 들었다. 말도 안 되는 공상이었지만 생각이 뻗어나가는 대로, 생각이 제 마음대로 활개치도록 내버려두었다. 왜냐하면 이런 감정의 흐름을, 나는 처음 목도하는 중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선화는 상처 입은 사람인 동시에 상처 입힌 사람이라는 점에서 또 한 번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누구나 크고 작은 상처를 지니고 살아간다. 그 상처는 타인으로부터 입은 상처일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입힌 상처들로 인해 더 아파하며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선화의 상처는 보다 컸을 것이다. 그녀의 상처는 단지 ‘화염상모반’ 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보다도 더 큰 상처는 아마 자신이 언니를 상처 입혔다는 데에서 오는 아픔일 것이다.

 

언니도 나를 따라 담배를 물었다. 언니는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나는 이제 열두 살의 언니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나라도 그랬겠다.”

“뭐라고 써 있었는지 안 궁금해?”

“기껏해야, 사실 언니는 너를 사랑한단다, 그런 말이었겠지.”

언니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언니도 잊어. 잊어버려. 이십오 년 전의 일이야. 그걸 아직도 부여잡고 살면 어떡하니? 저절로 아물었으면 그냥 둬. 그걸 왜 또 후벼파? 그래봤자 흉터만 더 커지지. 근데, 고물상에서 몇 시에 온다고 했지?”

 

어린 시절, 서로에게 상처 받고 상처 입혔던 이들이 어른이 되어 담담하게 자신들의 상처를 보듬어주던 이 장면이 나는 가장 인상 깊었다. 몇 마디 안 되는 짧은 대화 속에서도 그들이 얼마나 큰 상처를 앓으며 살아왔는지가 너무도 잘 나타나는 장면이다.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린 서로에게 상처받고 때로는 서로를 상처 입히기도 한다. 그러나 그 상처가 덧나지 않도록 보듬어주는 것 또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몫이기에 ‘새살’이 돋아날 때까지 서로 함께하라고, <선화>가 말해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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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행운>은 일본 문학 특유의 따뜻함이 특히나 잘 드러나는 책이었다. 특유의 따뜻하고 잔잔한 웃음, 소소하고 유쾌한 에피소드들로 가득 채워진 이 책은 마지막으로 다다를수록 이 책의 저자인 고바야시 사토미를 친근하고 사랑스럽게 바라보게 만든다. 마지막 에피소드에서는 그녀가 마치 오랫동안 알고지낸 유쾌하고 친근한 언니처럼 느껴지기까지 하는 것이다.

책 속의 그녀는 어쩐 일인지 TV 속에 등장하는 화려한 여배우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막연히 그녀의 소박한 일상 때문 만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어찌됐던 그녀는 여배우였기에 나보다 훨씬 호화스럽고, 금전적으로 여유로운 생활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을 소박하다고 표현하기에는 뭔가 꺼림칙한 것이다. 내가 진짜로 반한 그녀의 일상은 그녀의 정신적 생활로부터 기인하는 것이었다.

 

채소 가게 아줌마는 따끈따끈해서 맛있어 보이는, 토비가 엄청 좋아하는 군고구마를 반으로 갈라 나눠줬다. 저거, 사실 나도 엄청 좋아한다. 제법 커다란 절반이었기에 나는 그 반을 다시 잘라(미안!) 토비에게 주고 나머지는 내가 먹었다. 꼬리를 보니 토비가 얼마나 기뻐하는지 알 수 있었다.

아주 가끔씩, 이렇게 별거 아니지만 기쁜 일이 생긴다. 그런 거구나 싶다. 그나저나 아까 그 군고구마는 정말이지 크고 맛있었다. 나도 꽤나 행복했다. 이렇게 개와 같은 수준이다. 뭐 그래요.

 

저런 게 진짜 행복이겠구나 싶었다. 맑은 휴일 날, 반려견과의 산책, 우연히 얻게 된 군고구마와 느릿하고 평화롭게 흘러가는 나날들은 내가 꿈꾸는 미래이기도 하다. 물론, 그녀가 말했듯이 바쁜 나날 속의 삶은 그녀 또한 힘겹게 만들 것이다. 온종일 대본과 씨름하고, 밤새도록 촬영으로 시간을 보내는 몇몇 날들도 그녀 삶의 일부인 것이다. 그러나 그런 몇몇의 날들 때문에 ‘사소한 행운’을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살아가며 쉬어가는 시간은 필요한 것처럼. 그것이 혼자만의 한가로운 여행이 되었던, 눈썹을 다듬고 브래지어를 쇼핑하는 지극히 일상적인 시간이 되었던, 산 속에 조그마한 정원을 꾸미는 일이 되었던 말이다. 우리는 그 동안 입시, 취업, 결혼과 같이 거창한 일들만을 ‘행운’이라 불러왔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토미의 행운은 조금 특별한 것들이었다. 그녀의 빛나는 일상은 나에게도 무언가에 도전하고 싶다는 의지를 불러일으켰다. 나는 책을 읽다가도 불끈불끈 의지가 솟아났다.

 

다큐멘터리를 다 보고 난 나는, 깊은 만족감과 함께 ‘나도! 내게도! 나라도!’ 하고 몸속 어딘가에서 활기가 끓어올랐다. 때마침 시기도 봄. 봄 하면 역시 정원 가꾸기. 정원 가꾸기 하면 야츠가타케. 산! 산에 가야겠다! 저 빛나는 버블 산장으로 고고!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으며 나는 한 가지 습관을 만들어보기로 마음먹었다. 최고로 행운이 따르는 여자가 되어보기로.

 

어쨌든 머릿속 성공 스위치를 ‘ON'으로 돌리고 부정적인 이미지와 말은 일절 배제한다. 언제나 뇌를 행복한 상태로 유지하면서 ‘나는 미인이다’ ‘나는 부자다’ 같은 말만 계속 되풀이하면 (대체 어디서 해야 하지?) 슬슬 저 너머에서 자신이 그려왔던 행복이 점점 찾아온다, 뭐 그런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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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따분하고, 지금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조금의 색다른 시각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빠빠라기>는 우리가 어떠한 시각으로 현재를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해답을 제시하는 책이다.

남태평양 티아비아 섬의 투이아비 추장이 연설했던 이야기들을 책으로 엮은 것이 바로 <빠빠라기>이다. 책의 제목인 ‘빠빠라기’라는 단어부터 짚고 넘어가고 싶다. 빠빠라기란 추장이 문명 세계의 인간들을 부르는 이름으로, ‘하늘을 찢고 내려온 사람’이라는 뜻이 담겨있다고 한다. 묘한 어감이 불러일으키는 느낌은 어쩐지 문명의 이기 속에서 타성에 젖어가는 문명인들과 잘 어울린다. ‘빠빠라기의 고깃덩어리 감추기, 허리 도롱이와 거적에 관해서’, ‘둥근 쇠붙이와 묵직한 종이에 대하여’, ‘돌궤짝, 돌 틈, 돌섬 그리고 돌 사이에 있는 것에 관하여’ 등 투이아비 추장의 연설에서는 끊임없이 낯선 표현들이 등장한다. 이는 문명인들의 의복 문화, 화폐문화, 주거문화 등을 일컫고 있는 것이다. 충격적이었다. 우리에게 이토록 익숙한 것들이 그들에게 이토록 희한한 것으로 인식된다는 사실이.

 

여자들이 몸을 그렇게 단단히 감추고 있기 때문에 남자들은 어떻게든 한번이라도 그것을 보고 싶어 안달이 난다. 사정이 그러하니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밤이든 낮이든 그 생각만 하고 여자의 몸매에 대해 많은 말을 나눈다. 그런데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그 논의가 큰 죄라도 되는 양 어두운 그늘 속에서 이루어진다. …

육체가 죄악이고 악령의 선물이라니! 그런 어리석은 말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런 궤짝들을 오가며 빠빠라기는 하루하루를 보낸다. 시간에 따라 이 궤짝에서 저 궤짝으로 옮겨 다닌다. 아이들도 그곳에서 자란다. 땅에서 그렇게 떨어져 있는데도 말이다. 심지어 어떤 때는 다 자란 야자수보다 더 높은 곳에서 돌 속에 파묻혀 지낸다. … 신의 손을 더 이상 잡지 못하는, 정신이 혼미하고 병든 자들만이 햇살과 바람이 없는 돌 틈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이보다 부끄러운 일이 있을까. 그들은 우리의 문명을 부러워하고 신기하게 여기기는커녕, 비아냥대고 의문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비싼 옷을 입고, 높은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삶, 많은 돈을 벌고, 한 달에 한 두 번은 영화를 보여 문화생활을 즐기는 삶, 아침마다 신문에 코를 박고 세상의 온갖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들을 빠짐없이 읽어나가는 삶은 아무래도 그들에게 너무나도 괴기스럽고 가증스러운 것으로 느껴졌나 보다. 우리의 세상에서 철저히 바깥에 있는, 아니 우리가 그들의 바깥에 있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들에게 비춰지는 우리의 모습을 가감 없이 객관적으로 파악해볼 수 있다는 점이 신선하게 느껴지는 책이었다.

 

빠빠라기들이 사는 세상에서는 한 인간의 가치가 ‘성품의 고상함, 용기, 넓은 마음으로’가 아니라 하루에 돈을 얼마나 많이 벌 수 있느냐에 따라 정해진다.

 

이전에 누군가로부터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대충 요약하자면, 문명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점점 생존력이 약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걱정스럽다는 것이었다. 사실 아주 오랜 옛날의 우리는 화폐가 없고, 집이 없고, 옷이 없는 와중에서도 남자들은 사냥을 하고 여자들은 채집을 하며, 발가벗은 채로도 아무 문제없이 생존해나갔던 것이다. 그 누군가의 말처럼, 어느새 우리의 문명은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을 거듭했지만, 사실상 생존력은 상당 수준감퇴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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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영화, 책에서 여전히 '로봇의 일탈'이 흥미롭게 다뤄지고 있는 것은 인간 스스로의 근본적 두려움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들의 창조물이 언젠가 자신의 주인을 배신하고 세계를 지배하고야 말 것이라는 이 두려움은 이제 식상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가마틀 스타일>의 로봇 '가마틀'이 행하는 일탈은 내 예상을 너무나도 크게 빗겨가서 약간 당황스럽고, 심지어 황당하기까지 했다. 초반의 분위기는 '로봇 일탈'에 관한 평범한 보통의 소설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전투로봇 한 대가 전투 시작과 동시에 사라지고, 젊은 여자들이 또한 한 명씩 사라지는, 굉장히 뻔하고 식상한 줄거리는 어쩐지 너무 식상해서 더욱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지게 만드는 이상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야기가 진행되면 될수록 나는 이상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무섭고 섬뜩하게 느껴져야 할 가마틀이 점점 친근하고 인간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소설의 형식상 내가 가마틀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저 사라졌던 여자들이 피부가 백옥이 되어 돌아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건 당신들이 생각하는 그런 위험한 무기가 아니래도. 그건 그냥, 지구 최초의 인공지능 로봇 피부관리사라고!'

 

정말 황당한 결론이 아닐 수 없었다. ​헛웃음이 다 나왔지만 이 기괴한 결말은 로봇에 대한 우리의 막연한 두려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금은 친절하게 알려주고 있는 듯했다. 중요한 것은 로봇의 일탈이 아무 탈 없이 마무리 되었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또한 SF 영화의 결말처럼 인간이 로봇 부대를 격파함으로써 평화가 찾아온 것도 아니었다. '인간성의 획득'과 '자아의 형성'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처럼 우리는 이제 '로봇 vs 인간'이라는 진부한 이분법이 아닌 '로봇의 인간성 획득'을 통해 본 '인간의 자아 형성'에 대해 더 깊이 이야기 나눠야 할 때인 것 같다. '로봇의 인간성 획득' 이 아닌 '우리의 인간성'에 대해 돌아봐야 할 때이다.

 

"아기들이 처음 태어날 때 주먹을 이렇게 꼭 쥐고 있잖아. 손을 쫙 펼 힘이 없으니까. 그렇게 세상에 태어나 조금씩 자라나면서 그 운명을 스르르 놓게 된대. 주먹이 조금씩 펴지면서 꼭 쥐고 있던 운명이 세상으로 달아나는 거지. 그 운명을 쥐고 있던 흔적이 뭔지 알아?"

"모르겠는데."

"손금이래."​

​나는 또 어떤 운명을 쥐고 태어났었나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구절이다. 숱한 소설들과 영화들을 보며 나는 로봇과 인간 세상에 대해 고민한다. 그렇다면 나는 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얼마만큼 고민해보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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