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의 글쓰기 특강 - 유시민의 30년 베스트셀러 영업기밀
유시민 지음 / 생각의길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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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잘 쓰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우신 유시민 님의 본격 글쓰기 강좌 책입니다. 그동안 인터뷰나 기사로 짧게 접하던 그의 글쓰기를 제대로 만나보고자 이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나온 지 2년이 다 되어가는데 아직도 베스트셀러네요. 정말 대단합니다. 

저는 유시민 님의 책을 정치를 그만둔 직후에 출간한 <어떻게 살 것인가>를 통해 처음 접했습니다. 그때 당시 받았던 인상은 ‘글을 정말 친절하게 쓰신다’였습니다. 바꿔 말하면 '글을 쉽게 쓴다’ 가 되겠지요. 많은 분들이 알다시피 유시민 님은 쉽고 명료한 글쓰기로 유명합니다. 읽다 보면 어떤 부분은 굳이 부연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될 법한데도 친절하게 첨삭지도해주신다는 인상을 줍니다. 

어떤 책의 경우, 특히 많이 배운 이가 쓴 책일수록 그러한데 서점을 둘러보면 도대체 알 수 없는 단어와 문장으로 자신의 지적 수준을 자랑하듯 쓴 경우가 꽤 있습니다. '그런 책을 제대로 읽은 적이라도 있는가' 하고 묻는다면 딱히 할 말은 없습니다만, 그래도 하나 예를 든다면 우리나라 소설에 만연한 뒷부분의 ‘해설’입니다. 소설은 어렵지 않게 읽었는데 해설을 읽다 보면 도무지 이게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지 못할 때가 태반입니다. 제 기억으로는 김영하 님의 <살인자의 기억법>의 경우가 해설을 읽다가 분통을 터뜨린 사례입니다. 해설자는 마치 자신의 지식을 자랑이라도 하듯 살인자의 기억법에 사용된 철학이나 이론 등을 가져와 자기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당신은 소설을 제대로 읽은 것이 아니라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합니다. 당시의 서평이나 댓글들을 보면 저 뿐만 아니라 많은 독자들이 난독(難讀)을 호소했습니다. 김영하 님은 잘못이 없지만, 해설 때문에 소설이 애꿎은 욕을 먹을 뻔한 사례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외에도 많은 소설에 실린 해설은 대게 읽어도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게 써놓은 게 태반이라고 생각하는 입장입니다. 제 지식의 폭이 얕은 이유가 첫 번째라고 생각은 합니다만, 이것은 문인들만 소통할 수 있는 언어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일반적인 독자가 과연 이런 어휘와 개념들을 이해할 수 있을까. 소설 평론가들이 독자를 위한 배려는 전혀 하고 있지 않은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신형철 문학 평론가님의 경우는 예외인데, 어려운 이야기를 잘 풀어서 설명하려는 노력을 많이 하신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역시 대중이 호응하는 글을 쓰려면 기본적으로 쉽고 친절해야 한다는 사실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01 논증의 미학 - 취향과 주장의 구별/논증하기/주제에 집중
02 글쓰기의 철칙 - 발췌 요약/주제와 논리/많이 써라/두려움 극복
03 책 읽기와 글쓰기 - 독해/모국어/번역어/말하듯이 써라/읽고 싶은 대로 읽자
04 전략적 독서 - 독해의 예/독서법/도서 목록
05 못난 글을 피하는 법 - 못난 글 알기/우리글/한문/일어. 영어/단문 쓰기/어휘/무늬
06 아날로그 방식 글쓰기 - 습관들이기/짧게/명료하게/소통
07 글쓰기는 축복이다 - 잘 살자/정신/마음가짐
08 시험 글쓰기 


책의 구성입니다. 전체적으로는 글쓰기에 관한 이야기와 자신의 과거의 일화들을 함께 엮어서 들려주고 있습니다. 과거의 일화를 소개하다 보니 자칫 자랑처럼 들릴 것을 걱정하지만,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경험만큼 좋은 사례는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자기자랑으로 점철되어서도 안되겠지만, 그 정도 균형은 갖추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자신의 글을 가져와 예를 들지만, 자랑보다는 반성적 사례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땐 잘 쓴 줄 알았는데 지금은 아니더라 그래서 다시 고쳐보았다 이런 식이죠. 그밖에 다른 이의 글을 가져와 문제를 지적하고 수정하기도 하는데, 이런 과감한 부분이 매우 맘에 들었습니다. 

글이란 기본적으로 많이 읽어야 잘 쓸 수 있습니다.  뭐든 많이 읽는 것이 전제되죠. 그러다 보니 쓰기와 함께 읽기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에도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역시, 쓰기에 관한 챕터들이 이 책의 백미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중에서도 고쳐 쓰는 방법에 대한 건 꼭 한번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1, 3, 5 챕터가 가장 중요한 챕터가 아닌가 싶습니다. 2, 4, 6은 기존의 글쓰기 책에서도 만날 수 있는 이야기이고 7번은 글쓰기의 대한 저자만의 생각 또는 소신을 밝히고 있고 8번은 좀 사족 같지만 역시 저자 특유의 노파심으로 인해 부연 설명한 챕터 같은 느낌입니다. 

글쓰기를 처음 시작하는 이라면 취향과 주장을 구분하고 자신의 주장에 맞는 근거를 적절하게 가져와 설명하는 논리적 구성 능력이 매우 중요하겠지만, 그 단계가 지나면 문장을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상급자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글쓰기의 문제는 논리 보다도 잘못된 문장에서 온다는 것인데, 이는 외래어의 오남용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바로 중국의 한자말, 일본식 표현, 영어식 표현 이 세 가지입니다. 저자는 잘못된 문장을 고치는 시범을 직접 보여줌으로써 풍부한 사례를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책을 읽고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우리가 문장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외래어의 오남용 때문이라면, 어쩌면 우리글을 제대로 쓰지 못한 책임은 공부를 적게 해서가 아니라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가 아닐까? 하는 의문 말입니다. 

영어 공부를 하다 보면 영어식 수동태와 피동형 문장에 익숙해집니다. 영어 문장을 번역하던 습관에 익숙해진 나머지 우리 문장도 수동태로 쓰는 사례는 정말 많죠. 일본어와 한문도 마찬가지입니다. 학문을 깊이 있게 공부하다 보면 자연히 서양문명이 이룩한 성과를 들춰보게 됩니다. 또는 그것이 한번 걸러진 일본의 것을 공부하기도 하죠. 결국 배운 사람들이 외국식 표현을 자신도 모르게 사용하기 때문에 현재 우리의 글쓰기가 이렇게 된 것 아닐까요? 

개인적인 경험을 보아도 독서가 어려워지는 시점은 대부분 어려운 학술 서적, 전문서적을 접할 때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쓰인 문장들은 주로 복합 문장이거나 외국식으로 읽히는 문장들입니다. 마치 영어공부를 할 때, 우리가 속으로 해석하면서 사용하는 문장의 느낌으로 서술되어 있는 것입니다.  

저자가 예시를 통해 비판하는 글들을 보면 더욱 명백해집니다. 대부분 고위급 정관계자들의 글인데, 방송에서 발표할 때는 전혀 몰랐지만 글로 다시 읽어보니 정말 말도 안 되는 표현이 많더군요. 하지만 이조차도 저자가 지적하지 않았다면 모르고 넘어갔을게 뻔합니다. 혹은 본인의 독해력이 부족한 탓에 이해가 안 되는 거라고 청자들은 생각했을 겁니다. 

앞서 언급했지만, 영어식 표현은 정말 많이 오남용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저야 글을 써보려고 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파워블로거들의 글을 읽은 지는 오래되었으니 이야기하자면, 양질의 포스팅으로 엄청난 이웃을 가지고 있는 블로거들의 문장에서도 이런 표현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는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의 생각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입니다.~~라고 생각합니다.로 해도 될 것을, ~~라고 생각되어집니다. 식으로 생각을 피동형으로 표현하거나, "~~라고 하겠습니다." 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3인칭으로 바라보듯 이야기하거나, "~~라고 할 것입니다." 식으로 현재가 아닌 미래에 일어날 것처럼 쓰는 걸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어떨 땐 이런 표현이 한 문단 안에 다섯 번, 여섯 번 등장하곤 합니다. 너무 많아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지 헷갈릴 때도 많았습니다. 전에는 제가 독해력이 부족한 줄 알았습니다만, 이 책을 통해 문장을 쓰신 분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 블로거들이 이미 상당한 양의 게시물을 발행한 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양을 포스팅 할 동안, 그런 글쓰기 방식을 바꾸지 못한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물론 포스팅은 자기만족으로 하는 것이지만, 좀 더 올바른 글쓰기를 했다면 더 많은 대중에게 닿을 수도 있는 더 많은 가능성이 열리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듭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남 걱정할 때가 아니군요. 제 글부터 돌아보려 합니다. 몇 개 되진 않지만, 과거를 돌아보니 매끄럽지 못한 표현들이 참 많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생각을 쏟아놓고 정리하지 못한 것들도 보이고, 지나보니 얼굴을 화끈거리게 만드는 부분들도 굉장히 많습니다. 이 책이 나온 지 2년밖에 안되었으니, 그리 늦게 읽었다고 원통할 일은 아닙니다. 그러니 이제 고치러 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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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권 독서법 - 인생은 책을 얼마나 읽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인나미 아쓰시, 장은주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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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초창기 시절, 독서법에 대한 책은 5권당 1권 정도의 비율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처음에는 책이 잘 안 읽히기에 그런 책이 필요하기도 했고, 읽고 나면 나름 도움이 되기도 했습니다. 독서량이 쌓이고 읽는 것이 어렵지 않게 된 후부터는 거의 보지 않았는데, 이 책은 자극적인 제목 탓인지 한번 확인이나 해보자는 심정으로 읽게 되었습니다. 사실 1만 권은커녕 1천 권, 아니 1백 권도 읽는 것이 쉽지 않은데 이렇게 무모하게 책을 읽는 방법이 있다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제목만 보고 폄하하기보다 한번 읽어 보고 판단해도 늦지 않겠다는 생각에 책을 들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몇 가지 점들만 제외하면 생각보다 괜찮았습니다. 우선 저자가 자신의 독서론이나 독서방법, 그리고 독서의 효용에 대해 상당히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 무척 맘에 들었습니다. 책의 제목이 직접적이고 자극적이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서 해명하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부분이 있는데, 이걸 저자도 알았는지 초반부터 일찌감치 빨리 읽을 수 있는 책과 빨리 읽을 수 없는 책을 분류하고 있습니다. 마치 카드사가 이것저것 할인 혜택을 제공한다고 신나게 떠들고 난 뒤 말미에 작은 글씨로 통합한도 할인액을 보이지도 않게 명시하여 분노를 터뜨리게 만드는 것과는 달리, 시작부터 언급하여 애초에 독자의 반감을 살 여지를 차단하고 있다고 할까요. 뭐 이것도 짜증 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습니다. 솔직한 저자의 자세가 좋았습니다. 

살다 보면 교육에 의한 가르침이 아니어도, 부모 또는 선배의 덕담이 아니어도, 스스로 깨닫게 되는 삶의 진리나 노하우가 각자에게 존재합니다. 그래서 어렴풋이 자기 안에 형성되어 가고 있는 그 무언가, 그러나 확실하게 잡히지 않았던 어떤 생각이나 개념을 책에서 만날 때에는 아, 이 저자가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을 이야기하고 있구나 하면서 반가운 기분을 느끼게 되죠. 개인적으로는 새로운 지식과 깨달음이 아닌, 내 안의 있던 희미한 것을 책의 저자가 확인시켜주는 것만으로도 읽을 가치가 있다고 느끼는 편입니다. 이 책은 그런 것들이 많았던 경우에 속합니다. 

먼저 독서 타입에는 두 가지가 존재합니다. 바로 정독의 저주에 매여있는 사람과 정독의 저주에서 벗어난 사람. 이것은 사실 의견이 분분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아니, 정독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과연 독서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기에 앞서 말했듯이 필자는 사전에 빨리 읽을 수 있는 책과 읽을 수 없는 책을 분류하고 있습니다. 빨리 읽을 수 없는 책은 스토리의 흐름과 플롯이 중요한 소설과 같은 책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런 책들은 정보를 얻기 위함이 아닌, 그저 즐겁기 위해 읽는 것이기 때문에 빨리 읽을 필요도 없다고 말합니다. 저 역시 동의합니다만, 김이 좀 세기도 하더군요. 이미 많은 다독가들이 통감하고 있는 사실이니 말입니다. 이걸 처음부터 깔고 간다는 건 결국 이 책의 제목이 낚시였다는 걸 일찌감치 시인하는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빨리 읽을 필요가 없는 책을 설명하면서 저자는 문자를 접하는 현대의 환경이 달라졌음을 언급합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상당한 양의 기사를 클릭하고 읽어내려갑니다. 모바일 환경이 우리를 이미지와 영상언어에 더욱 길들일 것으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기사의 독해를 위해 문자를 읽는 것에 기여한 측면이 더 크다는 것이죠. 어쩌면 과거에 신문이 존재하던 시절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문자를 읽고 있으니, 이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루에 몇 개의 기사를 읽는지는 천차만별이겠지만, 누구나 한두 가지 기억에 남는 기사는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우리가 기억하기 위해 노력해서 얻어진 것이 아니죠. 그냥 기억이 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책 읽기도 이와 같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책도 기억하기 위해 읽을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책을 성의 없이 읽으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정말로 가치 있는 정보는 자연스레 기억에 남기 때문에 안심하고 읽으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를 저자는 플로우 리딩(flow reading)이라고 말합니다. 하루가 다르게 정보가 쏟아지고 사라지는 시대에 적합한 읽기 방식은 한 글자, 한 문장을 꾹꾹 읽어내려가는 정독이 아닌 플로우 리딩 이라는 것이죠. 분명 어느 정도는 맞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할 수 있다. 애초에 1만 권을 플로우리딩 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알찬 내용의 책들을 선별하여 정독을 하면 되지 않는가? 어중이떠중이의 책들 1만 권을 플로우 리딩 하는 대신에 엄선된 책 1천 권을 정독하는 것과 어느 것이 더 경제적일까?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하루가 다르게 쏟아져 나오는 책들을 일일이 살펴보고 엄선하기란 탁월한 안목을 가진 전문가가 아니고서야 힘든 일입니다. 게다가 그게 나에게 맞을지 안 맞을지는 순전히 자신이 판단할 문제이고요. 결국 일반 독자가 정보의 홍수의 시대에 스스로 대처하는 방법으로 플로우 리딩을 주장하는 저자의 말에 어느 정도는 수긍이 갔습니다. 그리고 저자는 결국 플로우 리딩을 하는 와중에 정독하는 책이 나타나면 주말이든 따로 시간을 내어 읽으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독서법은 우리가 융통성 있게 적용하면 되는 것이지, 무작정 모든 책을 이렇게 읽을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독서법을 이야기하는 많은 책들이 말미에 가면 필사 또는 서평 쓰기의 대해 언급합니다. 이 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저자의 독창적인 예시가 그 의미를 새롭게 환기시키고 있습니다. 예시란 바로 우리의 인체가 작동하는 방식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숨을 쉬어야 살 수 있죠. 숨을 쉰다는 것은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뱉는 행위입니다. 어느 한쪽만 작동해서는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숨을 쉬듯 책을 읽고, 숨을 내뱉듯 읽은 책에 대해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되새김질하여 출력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서평 쓰기를 하지 않는 독서는 지속하기 어렵습니다. 다시 말해 책을 읽고 깨달은 것을 계속 쌓아만 둬서는 건강한 작동 방식이 될 수 없다는 것이죠. 입력이 있으면 출력이 있듯이 읽고 느낀 것을 펜으로 쓰든 키보드를 사용하든 직접 작성하여 기록하는 것, 그것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출력하지 않으면, 우리의 뇌는 과부하가 걸려서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기 힘들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어쩌면, 많은 이들에게 독서에 지치는 시점이란 건 사실 출력 없는 입력의 과부하로 인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깨달음이었습니다. 그래야 새로운 지식, 새로운 책을 지치지 않고 읽을 수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말이 출력이지, 출력으로 생산된 글은 자신의 머릿속에 담지 않아도 언제고 꺼내보면 되살아나지 않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의 기억에 의존하기 보다 손을 사용하여 서평을 써 내려가는 출력은 사실은 저장 방식과 공간을 늘리는 행위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미 독후감이나 서평 쓰기를 생활화한 이들에겐 사실 진부한 이야기이지만, 읽기만 하다가 슬럼프에 빠진 이들이라면 충분히 도움이 되는 이야기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엔 저도 포함되는데, 지금 같은 글을 써 내려가는 이유에는 더 이상의 다독이 의미가 없는 것 같다고 느끼던 시점에 자연스럽게 쓰는 방향으로 행동이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그 즈음에 독서 페이스는 떨어졌지만 반대로 쓰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고, 그리고 다시 읽는 즐거움으로의 선순환이 작동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 책은 어렴풋이 필자가 느낀 깨달음을 좀 더 명확한 언어로 설명해주고 있어서 공감했던 것입니다. 

이 외에 빨리 읽는 구체적인 노하우와 다독가를 위한 책 읽기 습관, 책을 관리하는 노하우 등의 내용은 대체로 평이한 편이었습니다. 하지만 적당한 플로우 리딩의 필요성, 그리고 숨 쉬는 비유를 통한 입력과 출력, 곧 읽기와 함께 행해져야 할 글쓰기의 필요성. 위의 두 가지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한번 펼쳐볼 가치가 있는 책입니다. 별로 내용도 어렵지 않고, 길지도 않습니다. 저자는 자신의 책 또한 어떤 이에게는 빨리 읽어도 되는 책일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저자의 말처럼 플로우 리딩으로 이 책을 읽어 하나라도 남는 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것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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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한 연결 - 검색어를 찾는 여행
아즈마 히로키 지음, 안천 옮김 / 북노마드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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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음악을 들을 때 랜덤 재생은 하지 않는 편입니다. 보통 몇 곡을 정해두고 주야장천 반복해서 듣습니다. 랜덤이 아니라면 순차적으로 들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조차 거의 실행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음악 감상을 한곡 단위로 계획적으로 하는 것이죠.

낯선 음악은 잘 듣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귀에 감기는 음악을 만났을 때 설렘보다 별로인 음악을 만났을 때 실망감이 더 컸기 때문입니다. 다른 분들에게 이 두 가지 경험은 대체로 오십 대 오십이겠지만, 제 경우는 후자가 훨씬 커서 결국은 계획적으로 듣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새로운 음악에 대한 갈증은 점점 커짐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습관을 바꾸지 못하고 있습니다. 양질의 음악을 찾는 일에도 충분한 시간 투자는 필요한 법이니까요. 이를 넓게 말하면 저는 효율성을 추구하는 생활방식을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아즈마 히로키의 신간 <약한 연결>은 이렇게 효율성을 중시하는 삶을 부정하면서 시작됩니다. 어쩌면 저자는 누구보다도 효율적으로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는 꽤 이른 나이에 자국의 학계로부터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많은 땀과 노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데 있어 효율성을 우선시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 그가 갑자기 자신의 방식을 부정하는 뉘앙스의 책을 쓰다니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삶에서 효율성을 우선시하는 것은 대부분의 현대인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어느새 경쟁은 양의 시대, 질의 시대를 지나 속도의 시대가 된지 오랩니다. 근로자들도 속도 경쟁에 시달립니다. 그리고 속도에 대한 강박은 휴식을 취할 때도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1분짜리 스포츠 하이라이트를 볼 뿐인데 15초짜리 광고를 봐야 하냐며 격노하고, 조금만 로딩이 늦으면 새로 고침 또는 뒤로 가기를 실행합니다. 이렇게 보기 싫은 것에는 가차 없이 반응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신문에서 모바일로 넘어온 뉴스 환경은 더 이상 우리가 보고 싶은 면을 위해 페이지를 하나둘 넘기지 않아도 되게 되었습니다. 과거엔 종이신문을 열댓 장은 넘겨야 스포츠면이나 연예면에 도달했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포털사이트는 원하는 분야의 메뉴를 순서대로 설정할 수 있게 해놓았고, 관심 없는 분야는 가차 없이 빼버릴 수 있는 자유를 주었습니다. 즉, 과거처럼 신문을 넘기다 우연히 다른 기사에 관심을 갖게 되는 체험은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인터넷을 통해 하나로 연결된 세상이 우리의 지식과 견문을 더 넓혀줄 거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오히려 정반대라고 아즈마는 주장합니다. 보고 싶은 걸 더 깊이 파고들게 되었을 뿐, 관심 없는 분야는 근처도 가지 않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아즈마에 의하면 전자는 강한 연결이요, 후자는 약한 연결입니다. 정보의 양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정보의 질의 평균치는 낮아집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점점 강한 연결을 중시하게 됩니다. 정보 선택이 조심스럽다 보니, 섣부른 모험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때일수록 아즈마는 약한 연결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오히려 우리의 삶을 환기시키고 우리의 인생을 풍요롭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원래 이 개념은 아즈마 히로키가 창시한 개념은 아니고 1970년대의  마크 그라노베터란 미국의 사회학자가 제창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모두 유일한 존재입니다. 세상에서 한 명뿐이지요.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직장에서 사표를 낸다면? 회사는 그 자리에 비슷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누군가를 채워 넣을 겁니다. 그는 내 입장에선 나와 다르지만 회사 입장에선 외모만 다를 뿐 똑같은 일을 처리하는 직원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만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우리도 타인에 대해 마찬가지 아닌가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똑같은 교육을 받고 똑같은 과정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는데 어찌 다를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것은 결국 환경이 얼마나 중요하느냐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아즈마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는 환경에 규정되어 있다. 
'유일무이한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 좋아하는 것, 욕망하는 것은 
대체로 환경으로부터 예측 가능한 것에 지나지 않다. 
당신은 당신의 환경으로부터 예상할 수 있는 변수의 집합일 뿐이다. 
...
하지만 우리 모두는 유일한 나로 살고 싶어 한다. 
통계적으로 예측될 뿐인 인생 따위는 지겹다고 느낀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즈마는 이를 위한 방법은 오직 단 하나, 환경을 의도적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환경이 바뀌어야 자신의 사고, 발상, 욕망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이죠. 하지만 그렇다고 바로 이사를 가거나 직장을 옮기거나 할 수는 없는 법, 그렇기 때문에  아즈마는 여행을, 그보다도 관광을 하라고 주장합니다. 계획이나 거창한 마음가짐이 요구되는 여행도 필요 없고 그저 가이드가 안내해주는 몇 박 며칠의 관광을 가끔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지속 가능한 삶의 방식이기 때문에 권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맨날 구도자처럼 여행만 다니며 살 수는 없죠. 우리는 대부분 생계를 위해 월급쟁이의 삶을 떠날 수 없는 존재들이니까요. 

"여행을 하라"라는 결론을 진부하다고 생각하는 독자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책의 제목을 다시 상기해봅시다. 이 책은 우리의 삶 속에 약한 연결을 의도적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여행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인 것입니다. 중요한 건 우리 삶 가운데 약한 연결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좀 더 경제적이고 쉬운 방법도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저자가 실생활에서 쉽게 실천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도 제시해주었다면 더할 나위 없는 책이 되었겠지만, 그것들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둔 것 같습니다. 

저자는 그동안 학자로서 연구 및 저술활동을 위해, 다시 말해 강한 연결을 위해 많은 것들을 지나치며 바쁘게 살아온 듯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딸을 낳게 되고 키우는 와중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내가 다시 과거로 돌아가도 지금의 딸을 만날 수 있을까? 지금의 딸은 전적으로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이고, 우리의 삶은 어쩌면 이러한 우연들이 모였을 때 더욱 유일해지는 것이 아닐까? 환경에 의해 지배되는 변수에 지나지 않는 삶이란 지루하지 않은가? 결국 약한 연결에 의한 우연이 우리의 삶을 다채롭게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면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때로 운명적 만남, 운명적 사랑을 꿈꾸기도 합니다. 하지만 인간에게 정해진 인연, 정해진 미래, 정해진 운명이란 게 있다면 그것만큼 재미없는 인생도 없지 않을까요? 

그는 이 사실을 이곳저곳 여행하면서 확인한 듯합니다. 기존의 환경과 다른 새로운 곳에 처했을 때 자신의 생각이 변하는 것을 보면서, 그리고 그것들이 자신의 정신을 훨씬 풍요롭게 만든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아즈마는 인터넷에서 자료를 서치하고, 필요 없는 문서는 빠르게 스킵 하는 인생에서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는 이러한 깨우침을 여행한 도시에 따라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생각은 해봤을 것입니다. 자신이 이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다면 더 좋은 내가 되어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하나 마나 한 생각 말이죠. 환경의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대체로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매우 이해타산적으로 살게 됩니다. 한때 극도로 술자리를 피하고 무엇을 하든 목적 지향적으로 살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정말 필요한 행동만 하고 필요한 관계만 유지하고, 필요한 정보만 습득하고 이외의 것들은 배제하며 사는 삶 말입니다. 이러한 삶에 뭔가 문제가 있음을 느끼면서도 그 문제가 뭔지 규명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계속 그렇게 살아가게 되죠. 그러면서 조금만 더 여유가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을 마음속에 묻어두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악순환일지 모릅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삶에 대해 열린 자세를 취할 필요가 있습니다. 계획적인 삶은 계획한 만큼의 결과만 예측할 수 있습니다. 삶을 바꿀지도 모르는 우연은 계획에서 오지 않습니다. 조금만 속도를 늦추고 주변을 둘러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아가 낯선 곳에 자신을 던질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입니다. 아즈마처럼 자주 여행을 갈 수는 없으니, 지금 바로 할 수 있는 건 뭘까요. 책을 읽고 나니 숙제가 생겼네요. 우선은 가벼운 것부터 변화를 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귀갓길에 낯선 버스를 타볼까 합니다. 집으로는 향하지만, 조금 돌아갈지도 모르겠네요. 당장 떠날 수 없으니 이렇게라도 움직여보는 거죠. 물론, 음악은 랜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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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시작된다
이노우에 다케히코, 이토우 히로미 글 그림 / 학산문화사(만화)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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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만화를 통해서 즐거움을 얻는다.

나 또한 만화를 보면서 때로는 눈물이 글썽거릴만큼 코끝이 찡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즐겁게 웃기 위해 보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다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의 인식속에 만화는 아무래도 문학이나 다른 여타 분야의 텍스트보다는 당연히 어렵지도, 심각하지도 않은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자연히 '한 수 아래'의 매체로 치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특히 우리나라만큼 만화를 '애들이나 보는 것' 이라는 인식이 강한 나라가 다른 어디에 또 있을까?)


최근에 우리나라에서도 윤태호선생님의 '미생'이 수많은 사람들의 클릭수와 열화와 같은 성원속에서 막을 내렸다. 많은 사람들이 미생을 두고 그랬다.  "이건 만화가 아니다!!" 그렇다. 만화가 만화 이상의 가치를 획득하게 되면 그건 '만화'라고 부를 수 없는(?) 이 기묘한 현실이 우리나라 만화계의 현실이다.


여기서 우리나라 만화의 현실을 장황하게 늘어놓을 생각은 없다.

이노우에 다케히코와 이토 히로미라는 시인의 대담집을 읽으면서 한가지 내 가슴에 와닿는 것이라고 한다면 바로 이노우에 다케히코는 만화를 그리면서 자기 자신을 좀더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이다. 슬램덩크와 베가본드의, 그리고 리얼의 등장인물 하나하나에 이노우에 다케히코는 자기 자신을 투영하면서 수양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은 스스로의 정신수양과 인간다운 삶을 위해 윤리와 도덕 종교를 만들어 그 가르침을 설파하고 생활이 되도록 노력했다. 그리고 각각의 개인은 철학 과학 문학 수학 등등 학문을 통해 우주와 사물의 본질에 더욱 다가가고자 노력하고 그로써 자기자신이 이 지구위에 어떤 존재이며 어떤 의미를 갖는지 획득하려고 노력해왔다.


이 책에서 이노우에 다케히코는 질문 하나하나에 아주 친절하게 답하고 있지는 않다. 때로는 덤덤하고 두리뭉실하게 넘어가는 대답도 있으며, 때로는 그저 씨익 미소지으며 듣고만 있는 태도도 느껴진다. 하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느낄수있는 것은 이노우에 다케히코는 만화를 통해서 자신을 수양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물 하나하나 움직이면서 자신을 들여다보고 '삶이란 무엇인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자기가 펜을 드는, 붓을 드는 의미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보고 싶은가, 그리고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책을 다 읽고나서 우리가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만화에 열광하고 만화가 아니라고, 만화 이상의 텍스트라고 느낄 수 있었던 건 이러한 자세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 일본의 만화를 있게한 또 하나의 원동력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많은 만화들이 기본적으로 즐거움을 추구하지만 또한 축으로써 성찰을 위한 만화도 일본은 풍성하게 보유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만화를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물론 나 또한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팬으로써 작품의 후일담과 연재중의 에피소드들에 관심을 가지고 이책을 집어 들었으나 결국 감상은 우리나라 만화시장과는 너무 다른 일본의 만화계와 "역시 일본만화는 다를 수 밖에 없다." 고 느끼게하는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작품을 대하는 자세를 통해 역시 우리만화는 지금 어떠한가, 왜 우리의 만화는 아직도 여기에 있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이토 히로미씨의 질문과 개인적인 감상에 치우친듯한 이야기들은 인터뷰의 본래 목적을 해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게다가 50대의 여성이자 어머니로서의 시선의 감상이다보니 내가 생각해도 작가본인은 그다지 의미를 두지않았을 부분에까지도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선수들의 부모님이 나오느냐 마느냐를 가지고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한다...이것은 여성독자라는 데서 오는 독법의 차이일지도...)


우리나라의 대답형식의 책과는 좀 다르다고 느끼는 부분이 있다면, 일본의 작가들은 대부분 우리나라의 작가들처럼 멋들어진 말로 자신의 작품세계를 표현함으로써 작품의 가치를 더 상승시키거나 하는 그런 욕심이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건 욕심이 없는 것보다는 본디 자기의 속내를 내비치고 싶어하지 않는 일본의 국민성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도...) 그래서 그다지 읽고서도 대단한걸 발견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러가지로 잘 읽으면 나름 건질게 있는 텍스트이다. 오히려 속내를 숨기는 작가의 본심을 잘 읽을수록 추측이 가능하며 깨달아지는 것들이 많은 텍스트라고 생각한다.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만화 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을 대하는 자세까지 궁금한 이라면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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