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호동 이태준 문학전집 10
이태준 지음 / 깊은샘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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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태준의 '왕자 호동'은 호동 왕자와 낙랑 공주의 설화를 기반으로 한 역사 소설이다.

때로는 허구적인 인물과 사건이 때로는 실존한 역사적 사실들이 뒤엉키는 것이 역사소설의 묘미인 것으로 안다. 그러나 사료 등의 부족으로 상고시대를 배경으로 한 국내의 역사 소설을 접하기 힘든 현실에서 왕자 호동이란 과실은 소중하기 짝이 없다.

나는 여기서 왕자 호동을 통해 보이는 낙랑에 대해서 얘기해보고 싶다.

우선, '왕자 호동'의 전반 줄거리를 살펴 보자.


왕자 호동 전반의 줄거리---------------------------------------------------------------
고구려 대무신왕(고구려 3대 왕)은 아직 호동이 어릴 적에 부여성을 공격하여 함락 시킨다. 이때 부여왕 대소의 목을 벤 자는 괴유란 사람으로 삼국사기에 그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대무신왕이 나라를 비운 사이 원비(元妃)는 왕에게 총애받는 차비를 음모로 죽이고 만다. 차비의 뱃속에서 나온 이가 바로 호동이다. 호동은 장성한 후 남쪽 정벌 즉, 낙랑 정복을 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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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준은 소설 속에서 낙랑은 고구려의 남쪽에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는 삼국사기의 낙랑왕 최리와 호동 왕자가 첫 대면하는 장면을 인용한 듯 싶다. 즉,

'그대는 혹여 북국(北國) 사람이 아닌가?'라고 호동을 처음 본 최리가 묻는 장면이 있는데, 북국이란 고구려를 말함으로 자연 낙랑은 고구려의 남쪽에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먼저 얘기하지만, 일부에선 최리가 다스린 낙랑과 한사군에 설치 되었던 낙랑군이 다르다고 보는 모양이다. 우선은 낙랑의 최후가 서로 다르다.

최리의 낙랑은 설화에 따르면 결국 공주가 자명고를 부셔버린 후 고구려에 항복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한사군의 낙랑은 313년까지 존속되다가 마침내 미천왕에게 멸망되고 만다.

이때의 통치자 역시 최리가 아니라 요동사람 장통이였다고 <자치통감>에 기록되어 있다.

물론, 최리의 낙랑이 전후(戰後) 복구되어 다시 한사군에 편입되었을 수도 있다.

이런 논란은 우선적으로 사료의 부족이 1차적이겠고 이에 따른 낙랑의 위치 문제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최리의 낙랑과 한사군의 낙랑이 별개의 것인지는 나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앞서 이야기 했듯 나는 우선 이태준의 '왕자 호동'을 비준하여 얘기하길 원하므로 그가 책속에서 바라본 시각을 우선 존중하여 얘기하고자 한다.

* 낙랑의 위치 문제에 대해선 <이곳>을 참조 바람.
이태준은 낙랑이 고구려의 남쪽 왕검성(평양)에 위치하였다고 보고 있다고 했다.
또한, 한사군의 한 군으로써 최리는 한나라 사람이라고 설정하였다.
이는 기본적으로 학계에서 통용되는 정설에 가깝다. 


한사군이란 고조선을 점령한 한나라가 그 자리에 설치한 4개의 행정구역을 말하는데 그 중심이 바로 낙랑이였던 것이다. 고조선이란 위만 조선을 말하는데 고고학적으로 위만 조선의 마지막 수도의 위치를 왕검성(평양)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고조선 특유의 유물인 세형동검이 평양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고 있기 때문인데 비파형동검이 요서, 요동 지방에 걸쳐 발견되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이는 고조선의 최후의 수도가 평양이였다는 것을 얘기한다.

때문에 낙랑의 위치 역시 평양이라고 보는 것이다. 여기에서 낙랑이나 대방에 관한 유물이 출토되고 있는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물론 봉니나 점제현신사비 등 이들 유물에 대한 의혹도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 출토 유물의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이곳>을 참조 바람. 


심지어 일부에서는 낙랑과 대방이 요서, 요동의 한사군에 있었고 동 지명의 이름으로 한반도에도 있었다고 얘기한다.

* 이에 대해선 최태영 옹이 대표적으로, 그에 대해서는 <이곳>을 참조 바람. 


아무튼 다시 '왕자 호동'으로 돌아가 보자.

 

다시 왕자 호동---------------------------------------------------------------------
낙랑 정벌을 준비하던 중 한나라 군사의 침입을 받은 고구려는 환도산성에서의 농성 끝에 이를 물리친다. 여기에선 작가의 상상력이 덫붙여 지는데 이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이가 바로 소읍별이란 인물이다. 작가의 산물로서, 호동-낙랑-소읍별이라는 삼각 로맨스의 한 축을 담당하는 이가 바로 소읍별이다. 한나라 군사를 물리친 고구려는 다시 남쪽 정벌을 위해 호동을 위시한 다섯 병사가 낙랑으로 잠입한다. 신기로 불리는 자명고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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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서 이태준은 최리를 한나라 사람으로 비정하였다고 했는데, 한나라는 자신의 행정구역에 태수와 같은 관리 인원을 본국에서 파견하였으므로 관직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은 역시 한나라 사람이였을 것이다(물론 현지인(옛 고조선인)도 채용되었다).

출처를 잊어버렸는데, 재미있는 가설이 있다.

자명고가 한나라의 악사와 같은 사람이였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이다.

기록에도 한나라는 자신의 행정구역에 이런 이들을 파견했다고 하고 있다. 아마도 설화 속의 자명고는 한나라와 관계하고 있는 낙랑의 정치적 현황을 상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물론 이를 뒷받침할 만한 근거는 부족하지만 바보 온달에서 보듯 설화라는 이야기 매체는 때로 우회적으로 현실을 돌려 말하는 버릇이 있는 모양이다. 아무튼 흥미로운 얘기이다.

한나라가 당시 고구려를 침략한 것은 아마도 한사군과 고구려의 끊임없는 다툼 때문이였을 것이다.

한사군과 현도군은 몇 차례 자리를 옮기는데 고구려 등 현지인과의 마찰이 원인인것 것같다. 특히 고구려는 현도군의 한 현으로서 존재하다가 점차 그 세력을 넓혔기 때문에 한나라와 고구려의 심상은 내내 뒤틀려 있었을 것이 틀림없다.

 

다시 왕자 호동---------------------------------------------------------------------
옥저 땅까지 잠입한 호동은 그곳에서 낙랑 왕 최리를 만난다. 최리는 한 눈에 그가 고구려 왕자라는 것을 알고 자신의 사위로 삼는다. 최리는 한나라 군사까지 물리친 고구려의 강세를 등에 업고 낙랑을 자신이 직접 통치하기 위해서 호동을 사위로 삼은 것이다. 하지만 본국으로 돌아간 호동은 낙랑 과 손을 잡기보다 낙랑 땅을 차지하길 원하고, 공주를 시켜 자명고를 부셔버리게 한 직후 왕검성을 포위하여 최리의 항복을 받아 낸다.

그러나 낙랑 공주의 죽음을 애달파하며 개선하는 호동의 무리 앞에 자신의 어미를 죽인 병사의 고백을 받고 원비가 자신의 원수임을 알게 된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원비는 끝끝내 왕을 책동하여 호동을 옥에 갇히게 만들고 만다.

이를 억울하게 생각한 소읍별은 호동을 찾아가고, 호동은 자신을 구하러 온 소읍별의 칼을 빌여 낙랑 공주의 무덤 앞에서 자결코야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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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렇게 최리의 낙랑은 고구려에 함락되고 만다.

자국의 이익이나 자신의 감정을 대변하기 위해 스스로의 감정마저 속여야 했던 이들의 최후는 아주 무자비 할 정도로 비참하기 이를 데가 없다.

낙랑 공주는 지 아비의 손에 두 동강이 나버리고, 호동은 낙랑 정벌 직후 원비의 모함을 받아 누명을 쓰고 자결하고야 마는 것이다. 소설에선 호동의 누명을 차비를 죽인 원비의 음모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적어두고 있다. 진위여부는 알 수 없으나 이들의 원통함은 알고도 남음이 있다.

결국 이런 한이 서려 지금까지도 이들 설화가 읽히고 있는 원동력이 된 것이 아닐까(한국 최초의 TV사극도 호동과 낙랑공주의 설화를 바탕으로 하였음).

아무튼 이태준의 '왕자 호동' 속의 낙랑의 최후는 이렇게 허무하다.

사실 학계에서 통용되고 있는 낙랑에 대한 이야기는 이보다 조금 더 폭이 넓다.

예를 들면 낙랑 토착 세력의 반란이라던지 대방군과의 유지 등등 일부 기록에 의하면 낙랑은 313년까지 지속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낙랑국과 낙랑군은 엄연히 다른 성격의 지역이므로 이를 분리해야 한다는 의견도 다수이다. 이에 대해서는 여타의 기록을 찾아보시기를 권고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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