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이후의 철학
시노하라 마사타케 지음, 최승현 옮김 / 이비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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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이 좋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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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일리언 현상학, 혹은 사물의 경험은 어떠한 것인가 카이로스총서 86
이언 보고스트 지음, 김효진 옮김 / 갈무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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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물론 관련 역자분의 광폭 행보를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하면서 지켜봐왔습니다만,
이 책의 경우, 특정 개념어 번역 선택의 경우 아쉬움이 있는데(주요 개념의 경우 번역어 선택에 대한 주석 혹은 해제 정도를 붙여주었으면 좋았을 것 같고요), 보다 문제는 ‘비문‘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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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캉젤리크 - 바타유 시집
조르주 바타유 지음, 권지현 옮김 / 미행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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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마르셀 프루스트의 신간 『쾌락과 나날』을 우연히 알게 되었고, 찾아보니 미행 출판사라는 곳에서 낸 첫 책이라 했다. 프루스트라니. 유명세에 비해 막상 읽은 사람 없기로 1등이 셰익스피어라면, 프루스트는 3등쯤 되지 않을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분량은 아무래도 부담이 되니까. 그런데 미행 출판사에서 낸 책에는 단편소설을 포함해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을 법한 글들이 실려 있는 듯하였고, 그러니 언제든 사 읽어야지, 하고 있었다. 이런 책을 내주는 ‘작은’ ‘문학전문의’ 출판사라니, 내심 응원하던 와중에 두 번째 출간 책 정보를 접했다. 조르주 바타유의 ‘시집’이라는 것을 보았고, 서평단 어쩌고 하여서 신청을 해보았다. 가제본 책을 받았다. 바타유라니.

 

 

 

1. 시집 『아르캉젤리크』의 말미에 이런 문장이 있다. “내가 추락하는 밤이 그 어디에서도, 그 어떤 방법으로도 보상될 수 없다는 생각. 그렇지 않다면 나는 ‘가능’에 종속될 것이다. 그것은 나를 포기하는 대신 (나의 모습 그대로) 내 주권(···)을 보상할 것이다”(148). 다른 시에서 바타유는 이렇게 썼다. “별 하나 없는 밤/무수히 점멸된 공허여/그런 절규가/그토록 오랜 추락으로/그대를 관통한 적이 있는가”(『불가능』, 172).

 

 

 

2. 별: “별 하나 없는 밤” 같은 표현은 블랑쇼의 논지를 참조해도 무방할 것이다(블랑쇼는 바타유와 친연성이 있으니까). 블랑쇼의 『재난의 글쓰기』(『카오스의 글쓰기』라는 제목으로 출간된)에서 재난(재앙, dés-astre/dis-aster)은 ‘별(astre)이 없는(dés)’을 뜻한다. 여기서 ‘재난’을 기존의 단어적 뉘앙스로서 접근하여 긍/부정의 이분법 중 하나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예컨대, 별이나 별자리는 시각적·인식적으로 익숙한 배치, 일종의 질서이고, 별 없음이란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그래서 질서 바깥이나, 혹은 ‘나’였던 것의 바깥으로써 공허, 무한의 영역이다. 이 영역은 (질서이건 익숙한 인식이건) ‘안’에 있던 ‘나’로서는 견딜 수 없는 ‘불가능’의 지대이다. 하지만 블랑쇼는, 혹은 바타유는 그러한 지대로의 이탈이 (어쨌든 ‘나’의 죽음을 담보하니까) 굉장한 고통을 동반할 것임을 알면서도, 바깥을 종용한다.

 

한병철은 블랑쇼를 참조하여 이렇게 쓴다. “재앙은 비성非星으로서 ‘별들의 공간’에 침입한다. ‘근본적인 이질성’이, 바깥이 정신의 내면성을 열어젖힌다. [...] 재앙은 ‘별들의 보호로부터 벗어남‘을 의미”한다(한병철, 『아름다움』, 64). “하늘의 공허, 유예된 죽음: 재앙”은 “‘어마어마한 기쁨’을, 부재의 행복을 안겨준다”(한병철, 『에로스』 27). 그러니까 ‘별 하나 없는 밤’은 재앙이고, 카오스, 무한성, 공허 등등의 무엇이다. 별들의 질서에서 벗어난, 그러므로 ‘불가능’의 곳이다. 거기 바깥으로, 상처와 균열을 열어서 불가능에 내쳐지는 것,

 

 

 

3. 추락, 죽음 혹은 바깥: 반복하자면, “나를 포기”해야 갈 수 있다. ‘내’가 ‘나’인 상태에서 카오스, 무한성, 불가능에 임할 수 없다. 그곳은 ‘내’가 죽는 곳이다. 내가 나의 바깥에 서는 것은, 엑스터시(ex-stasis)의 뜻이기도 하며, 황홀경, 무아경 등등의 절정의 쾌락을 의미하는 표현과도 동일한 뜻이다. 그러니까 바타유가 ‘에로티즘’에 천착했던 것 중 하나, 오르가즘을 다른 말로 ‘작은 죽음’이라고 부른다. “그 결과 에로티즘의 극단적 양상들이 떠오르게 하는 것은 무질서”(바타유, 『에로티즘』 197)이다. “우리는 오직 마구 탕진할 때 마치 상처가 우리 안에서 열리는 것 같은 진정한 행복을 느낀다”(같은 책, 198).

 

들뢰즈는 이러한 죽음에 대하여 (블랑쇼를 참조하여) “동일한 주체가 나로서 고정되어” 죽는 양상과 대비해서 “죽기를 그치지도 않고 끝내지도 않는다”는 문장을 인용한다(『안티』 485). 즉, 고정된 ‘나’로 사는 것이 죽음과 다를 바 없고, 삶은 끊임없이 동일한 주체 ‘나’로부터 벗어나는 것, 이전의 ‘나’를 끝없이 죽이는 것을 통해서 이뤄진다고 본다. 내가 나의 바깥에 서는 것(엑스터시). 그 바깥이, 유한성, 존재, 유용성, 가능, 의미 등에 종속되지 않는 재난, 무한성, 불가능의 어디.

 

 

 

 

4. 균열, 상처: 이 바깥은 나의 상처, 균열을 열어젖혀서 도달할 수 있는 곳이다. 바타유는 이렇게 쓴다. “내 존재 너머에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무다. 이것은 내가 갈가리 찢기는 가운데, 고통스러운 결여의 감각 속에서 알아차리게 되는 부재absence다. 그런데 이 부재는 또 다른 사람의 현존을 드러낸다”(바타유, On Nietzsche, 21-22).

 

 

 

5.

나라는 존재는,

그렇지 않다면

있는 그대로를

비겁하게 받아들인다.

나는 증오한다,

이 도구적 삶을

나는 균열을 찾는다,

나의 균열,

부서지기 위해.

나는 비를 사랑한다,

벼락을,

진흙을,

어느 넓은 바다를,

땅속을,

하지만 나는 사랑하지 않는다.

땅속에서,

오 나의 무덤,

나에게서 나를 해방하라,

나는 더 이상 나이고 싶지 않다.

- 바타유, 「『내적 경험』에서」 부분, 『아르캉젤리크』 중.

 

 

 

6. 바타유에게는 소위 금기와 위반의 철학자, 라는 등의 수식어가 붙는다. 성적인 표현을 거침없이 쓰려고 하거나(『에로티즘』에서 사드의 이런 문장을 인용하기도 했다. “아무것도 방종을 억누를 수는 없다. ······ 방종자의 욕망에 불을 지르고 욕망을 다양하게 하려면 그를 제한하는 방법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똥’이니 ‘오줌’하는 표현은 바타유 시대(20세기 초중반)에서는 ‘위반’이었을 것이다. 바타유의 표현이나 방식이, 아주 도발적인, 쉽게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떤 것이었을 텐데, 일단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지향은 참조할 만하다. 바타유는 자신의 사상을 “분변학糞便學, scatology” 혹은 “이종성異種性, heterology”이라 불렀다고 한다, 예컨대, “저급함le bas/lowness을 향한 것”(이브 알랭 브아, 『비정형』, 21).

 

 

지향. 그 대상이 무엇이 되었건 우리가, 단단히 믿고 있는, 안정된 것으로 여기는 모든 것을 우리(cage)라고 보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성적인 금기를 넘거나 ‘저급함’으로 내려가는 것이 이제 더는 ‘위반’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면, ‘위반’일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나. 바꿔 말해, 안정적이고 익숙한 것들이 무엇이 있나.

 

 

 

7. 바타유라니. 그것도 시라니. ‘읽는다’기보다는, 단어들을 가지고 (앞서 바타유의) 지향을 조금 참조하여(물론 절대적이지 않고), 그저 별자리를 그리듯 재조합/재구성을 시도할 따름이다. 일단 별이 없는 곳으로 가려면, 일단 별이 먼저 있어야 하니까. 별을 보고, 위치를 확인하고 해야 하니까. 어떤 별(성적인 것이나 저급한 것이나 하는, 바타유의 시대와는 분명히 다를,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있는 듯 없는 듯 금기로 작동하고 있을)인지, 어떤 별이 마치 천장에 붙박힌 듯 있는지, 그리고는 별이 무엇이건, 상처를 열고 바깥으로-‘너’에게 가려면 무얼 파기하고 또 해야 하는지. “나를 무너뜨려라/이 눈물밖에/모르도록”(바타유, 「저 높은 곳에 나의 영광」, 『아르캉젤리크』).

 

표정 없는 죽음이 내쉬는
무덤에서의 길고 거친 숨결
희망의 부재는
하늘의 별에서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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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들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 창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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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발트에 대한 약간의 신뢰가 필요하다. 읽어 내려가기 쉽지 않지만, 읽어내고 나면 읽을 때의 고단함 이상의 무엇을 줄 것이라는 신뢰. 이민자들의 경우엔 수많은 연도를 비롯해서 연도 수만큼의 시대와 세대들, 너무 많은 인물들, 낯선 지명들(국가명이나 대도시 이름 뿐 아니라 생전 처음 들어보는 소도시와 시골의 지명들), 그리고 구체적인 나무나 곤충의 이름들을 포함한 묘사들까지 줄을 잇는다. 또 소설의 전체를 잇는 특정의 드라마가 있다면, 중심 줄기를 따라가며 다소 부수적이라 여겨지는 정보들은 성글게 읽어가도 되겠지만 그런 소설이 아니고, 무심히 지나쳤던 어떤 인물 혹은 사물이 뒤에 다시 등장하면 앞을 다시 뒤적여 보기도 해야 되는 등, 읽기 피로한 부분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니, 그의 글에 대한, 그의 세계에 대한 약간의 신뢰와 동의, 그것에서 비롯된 어떤 인내심 같은 것들이 필요하다. 그러면 어느 지점에서는 그런 세세한 이름들이 필요한 이유를 납득하면서(그 각각이 여기 제시된 특수한 삶들의 증빙이므로), 동시에 그 이름들에 얽매여도 되지 않게 되는 지점이 온다. 물론 이 교차는 전자의 것을 손쉽게 버릴 수 있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특정 이름에 내재된 사건의 특이성과 이름들에 공통된 역사의 보편성, 양자의 가릴 수 없는 경중 사이에서, 그때-거기의 삶을 위해 외려, 지금-여기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음에 대한 시점의 전이, 혹은 확장 같은 것을 요청받는다는 의미에서이다. 가령, 프루스트라면(제발트의 이 소설도 잃어버린 시간을 찾고 있으니.) 이렇게 얘기했던 어느 지점.

 

    “그렇다. 이제 시간은 소거되어 버렸다. 왜냐하면 나는 베네치아에서의 한순간과 게르망트 가에서의 한순간을 하나의 과거와 하나의 현재로서가 아니라, 지속의 흐름 전체에 의해 분리된 양립할 수 없는 여러 순간들을 어떤 감각적인 동시성 속에서 공존하게 하는 어떤 동일한 현전으로서, 일시적이긴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적인 포착방식으로서 동시에 포착하고 있기 때문이다”(블랑쇼, 도래할 책, 30).

 

​   주로, 20세기 초중반 독일의 유대인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모두가 유대인은 아니고(제발트는 '유대인'이라는 아이덴티니가 가진 허구성도 문제 삼는다. 가령, '파울 베라이터'4분의 3의 아리아인, 41의 유대인이다), 그들이 이민자가 된 이유가 오직 홀로코스트 때문인 것도 아니다. 네 사람의 이름을 딴 4편의 중단편으로 구성되었지만, 소설에는 훨씬 많은 사람들의 삶이 묘사되어 있다. 또 떠나온 거나 상실한 것이 특정 지역이나 유년 시절인 것만도 아니다. 누구는 나치에 의한 가까운 이들의 죽음을(파울 베라이터에게 헬렌, 막스 페러브의 부모).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화재와 죽음과 들판에 썩어 있는 시체들"(120)을 머릿속으로 보는 누구에게는(코즈모) 어쩌면 인간성 같은 것. 등등. 각각의 삶.

 

    하지만, 또 그러한 인과 하나로 한정된 것도, 그 인과의 선들이 꼭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4분의 1의 유대인은 유대인인가, 아니, 4분의 1이라는 숫자는 선명한가, 라는 질문이 불필요한 것처럼). 어떤이유가 가장 클 때라도 그 못지않은 여러 복합적인 이유들이 각각의 삶을 구성하니까. 오히려 뭔가 선명하게 해소되지 않는, 그렇게 연결짓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고, 또 이유를 납득해버리면 안될 것 같은 위화감들도 가득하다.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으니까. 실은 제발트는, 어떤 은둔의 삶을(쎌윈 박사), 혹은 꼿꼿한 자세로 "구원이자 자기파괴"(126-7)를 행하는 삶을(암브로스 아델바르트), 어떤 정신착란들을(코즈모 등), 그 끝에 자살에 이르는 삶들을, 그저 손쉽게 이해해버린 채, 동시에 망각해버린 채 두지 않기 위해서, 라고 하는듯.

 

   다만, 저 낮은 곳의 어떤 공통성, 막스 페르버는 그뤼네발트의 그림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엄청난 고통, 전면에 그려진 인물로부터 자연 전체로 번져간 후에 다시 소멸된 풍경에서 죽은 인간의 형상으로 되돌아오는 그 엄청난 고통이 내 안에서 파도처럼 솟아올랐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지. [...] 고통이 일정한 정도에 도달하면 고통의 조건, 즉 의식이 사라져버리고, 그와 함께 고통 자체도 아마······ 우리는 그런 것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어.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영혼의 고통은 한마디로 무한하다는 걸세. 고통의 극단에 도달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더 큰 고통이 남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 이 심연에서 저 심연으로 다시 떨어지는 거야. 그때 나는 꼴마르에서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었네. 하나가 어떻게 다른 것으로 연결되었는지, 그뒤에는 또 어떻게 되었는지 말일세"(215-6).

 

    고통의 공통성, 그 깊은 심연에선 모두가 같은 표정을 짓는다. 존 버거는 이렇게 썼다. "역사상 가장 처참한 인종 학살을 경험한 민족이 세운 나라가 파시즘을 행한다"(모든 것을 소중히 하라, 11).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얘기다. 팔레스타인 작가 리야나 바드르(Liana Badr)1975년 탈 자아타르 난민 캠프 학살 사건에 대하여 겨울의 눈(1991)이라는 소설을 썼고, 일본 학자 오카 마리는 "팔레스타인 사람이 팔레스타인 사람이기 때문에 민족적으로 겪어야만 했던 사건에 대해 그것을 체험하지 않은 팔레스타인 출신 작가가 그 사건의 기억을 나누어 갖기를 바라는 소망을 담아서 쓴 소설이 겨울의 눈"이라고 쓴다(기억 서사38). 폭력이 반복되는 것은 망각 때문만은 아니겠으나, 공공연한 폭력이 가능해지는 이유의 중심엔 망각과 회피가 있을 것이다

 

     물론, 이 깊은 고통의 심연을 함께 겪는 건 힘든 일이고, 제발트도 타인의 고통을 똑같이 들여다보는 일이 가능하리라고 믿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 불가능성에 대하여 쉽게 눈 돌리지 않을 필요, 가령 손택(손택은 "이민자들은 내가 .. 지난 여러해 동안 읽은 작품들 가운데 가장 탁월하고 감동적이"라고 했다고 한다)의 이런 바람은 옮길 수 있을 것이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타인의 고통, 154)

 

​   아니다. '과제'도 쉽지 않다. 쉽지 않아서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좀더 가까이, 우리가 연결되어 있음을 우선 아는 일. "하나가 어떻게 다른 것으로 연결되었는지"(216). 인종이나 국가에 따른, 각각의 고통과 사건의 특이성을 쉽게 포기해서도 안되겠지만, 그것이 그저 바깥의 일이 아님을, 편재하고 있음을 느끼는 일. 루이자의 일지에서 보았듯, 유대인이나 독일인 같은 커다란 (다분히 환상의) 담론의 문제가 아니라 거기 삶이(밥을 짓고 사람을 만나고 사랑하고, 하는 일반의 삶이), 곤충채집을 하러 뛰어다니는 그 숱한 일반의 공통성이 여기도, 거기도, 어떤 누구에게도 너무 당연하게 존재한다는 것을, "한사람 한사람의 몸에 얼마나 많은 사연과 애틋한 기억이 서려있었던지 새삼 깨닫게" 되는 일(옮긴이의 말, 304).

 

​   "초등학교 2학년 시절의 페르버를 찍었다는 사진 속 인물이 정말 페르버인지, 암브로스가 혼자서 쓸쓸한 말년을 보낸 방의 사진인지 정말 그의 방인지 우리는 확인할 수 없다. 확실한 것은 그런 소년과 그런 방이 있었다는 사실 뿐이다"(옮긴이의 말, 316-7). 그러니까 그런 소년과 그런 방이 있었다는 사실 뿐이다. 어쩌면, 소설에서 어떤 역사적 시공간과 무관하게 반복해서 등장하는 나비를 쫓는 인물은, 그 '나비'에는 대단한 상징 같은 것이 있는 게 아니라 그저 당신의 유년에도 그런 기억이 있지 않습니까, '모두' 그런 '사람'으로 살아 왔지 않습니까. 같은 질문, 혹은 그것을 위한 환기 같은 것일지 모르겠다(프루스트의 '마들렌'처럼). 그 역사의 질곡 한 가운데에 그저 그렇게 인종이니 담론이니 죽음이니 하는 것들과 무관한 어떤 것을 좇았던 적이 있지 않느냐고. 

     

    "찰나에 불과한 한순간, 작업 중이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얼굴이 사진기에 얼굴을 보여주기 위해 고개를 들고 있었다. [···] 수직으로 서 있는 베틀 뒤에 스무살쯤 되어 보이는 젊은 여자 세명이 서 있다. 그녀들이 짜고 있는 카펫의 색깔이나 불규칙한 기하학적 무늬가 우리집 거실 소파 무늬와 비슷하다. 그 젊은 여자들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뒤쪽 창문에서 스며드는 역광 때문에 그들의 눈이 잘 보이지 않지만, 그들이 모두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만은 느낄 수 있다. 내가 서 있는 자리는 회계원 게네바인이 사진기를 들고 서 있던 바로 그 자리이기 때문이다.

    가운데에 있는 밝은 금발의 여자는 왠지 새색시처럼 보인다. 그녀 왼쪽의 여자는 고개를 약간 옆으로 기울이고 있고, 오른쪽의 여자는 거리낌없이 똑바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나는 이 여자의 시선을 감당하기 어려워 사진을 오래 보지 못한다. 그들의 이름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본다. 로자, 루지아, 레아였을까, 아니면 노나, 도쿠마, 모르타였을까. 물렛가락과 실과 가위를 들고 나타나는 밤의 딸들 말이다"(302-3).

 

    그러므로 제발트, 우선은 그때-거기의 삶에 대한 예의가, 그것이 어느 한 개인의 고통이나 상실이건, 혹은 어떤 사회역사적인 결절이건, 각각의 삶속에 공통된 겹겹의 질감으로 현전하는 것을, 그곳의 삶은 끝없이 여기로 오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어쩌면 손쉽게 놓아 버린 그 연결을 그것의 이음매를 충실히 엮으면서, 종국에는 그 삶이 지금-여기를 지켜보고 있고, 지키고 있다는 것을, 어쩌면 현재 내 것인, 언제든 내 것일 수도 있는 질곡들을 위해서. 그러면 "사슴벌레가 죽음에서 깨어나 다시 살아 움직이고, 시간도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263).

 

 

 

 

244쪽. 지금까지 그가 기록을 읽어본 것은 딱 두 번 뿐이었다고 했다. 처음 기록을 받았을 때는 대충 훑어보고 말았고, 그뒤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다시 기록을 펼쳤을 때 자세히 읽어보았다고 했따. 두 번째 읽을 때 그는 어머니의 기록이 때로 놀라울 정도로 훌륭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 기록이 마치 고약한 독일동화 같다고 느꼈다고 한다. 한번 읽기 시작하면 일단 시작한 작업을, 그러니까 이 경우에는 회상과 쓰기와 읽기를 도무지 멈출 수 없는, 그리고 결국에는 가슴을 옥죄어 지극한 고통을 느끼게 하는 동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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