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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트하우스
욘 포세 지음, 홍재웅 옮김 / 새움 / 2020년 1월
평점 :
3149. 욘 포세 『보트하우스』 : 새움
지난여름 적어도 10년은 보지 못했던 옛 친구 크누텐과 우연히 마주친 ‘나’는 더 이상 집밖에 나가지 않는다. 불안감이 엄습하여 밖에 나가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일을 하지 않고, 사람을 만나지 않으며, 집에 머문 채, 오직 글쓰기에 몰두한다. 이 모든 이야기는 불안감에서 시작된다.
문밖에 나선 지도 몇 달이 되었다. 불안 증세로 왼팔과 손가락 마디가 쑤신다. ‘나’가 글을 쓰려는 이유나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바로 불안감 때문이다. ‘나’는 지난여름 어린 시절 단짝이던 크누텐과 마주쳤다. 그는 결혼을 했고 두 딸이 있었다. 음악 교사가 된 크누텐은 긴 휴가를 보내기 위해 이곳 고향을 방문했다. ‘나’는 가장 친했던 크누텐이 이제는 가장 멀게만 느껴진다. 지난여름 우연히 마주친 크누텐과 그의 아내, 그리고 두 딸은 ‘나’를 불편하게 한다. ‘나’는 극심한 불안 증세를 겪는다. ‘나’는 불안하다.
오랜만에 마주친 친구와 그의 가족 사이에서 느껴지는 균열은 ‘나’에게 위기감을 조성한다. ‘나’는 자리를 모면하기 위해 저녁엔 피오르에서 낚시를 할 거라며 자리를 뜬다. 돌아본 크누텐의 아내는 매력적이다. 그녀는 ‘나’를 바라본다. ‘나’는 점점 더 불안해진다.
저녁 무렵 ‘나’는 피오르에 나가 작은 배에 오른다. 날씨가 좋은 여름 저녁 피오르에서의 낚시는 언제나 즐겁지만, 오늘의 ‘나’는 불안하다. 어쩐지 크누텐의 아내가 나타날 것만 같아 불안하다. 10년의 공백은 익숙함을 낯설게 변모 시킨다. 그러나 단지 낯섦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나’는 원인 모를 위기감에 빠지고, 계속해서 불안해진다.
피오르의 낚시에서 ‘나’는 결국 크누텐의 아내를 만난다. 자그마한 낚싯배엔 크누텐 대신 그의 아내만 올라있다. 그녀의 배는 빠른 속도로 ‘나’를 향해 다가온다. 그리곤 몇 마디 인사를 나눈다. 우리는 그녀의 요청에 따라 작은 섬에 오른다. 저 멀리 절벽에선 크누텐이 두 눈으로 우릴 좇고 있다. ‘나’는 알 수 있다. 크누텐은 우리를 보고 있고, 우리를 의식하고 있다. 나는 불안하다. ‘나’는 크누텐과 함께한 행복한 시절을 회상한다. ‘나’, 크누텐 그리고 친구들은 ‘보트하우스’에서 모였다. 그날을 회상하는 나는 더없이 불안하다.
어느 저녁 크누텐의 아내는 ‘나’를 크누텐과 묵고 있는 그의 옛집으로 초대한다. 크누텐은 아내에게 집착적이고, ‘나’의 불안은 강박에 가깝다. 그녀는 크누텐을 옆에 두고도 대놓고 ‘나’를 유혹한다. 그녀의 유혹으로 ‘나’는 어지럽고, 불안하다. 이 자리를 떠야 한다는 생각만이 머리를 지배한다. 크누텐과 아내의 티격 거림에 ‘나’는 집을 나오지만, 발소리를 따라 이내 그녀도 집을 나온다. ‘나’와 그녀는 이윽고 우리의 옛 터인 ‘보트하우스’에 도착한다. 아무도 없는 컴컴한 그곳에서 ‘나’와 그녀만이 남아있다. ‘나’는 불안함을 감출 길이 없다. ‘나’는 불안하다.
총 세 개의 장으로 구성된 욘 포세의 『보트하우스』는 1장에서 불안증세로 인하여 집 밖에 나가지 못하는 ‘나’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놀라운 것은 2장에서 이어진다. 화자인 ‘나’의 글쓰기라는 범주 내에서 친구 크누텐의 시점을 이용하여 서술하는데, 1장과 같은 내용을 서술함에도 ‘나’가 아닌 크누텐의 시점으로 옮겨온 탓에 사건은 전혀 다르게 해석된다. 인연에서 시작된 인간의 관계는 꾸준히 생성되고 발전하다가 어느 시점에선가 이별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그마저도 시간이 오래 지나고 나면 어떠한 이유에서 이별을 하게 되었는지 우리는 기억하지 못한다. 혹은 애써 기억한 이별의 이유는 각자의 관점에서 다르게 해석된다. 인간은 집단적이며 동시에 개별적이다. 그런 인간의 관계 속엔 서로 다른 인식이 포함된다. 다름에서 이어지는 낯섦의 현장은 참을 수 없는 불안감을 유발한다.
욘 포세의 『보트하우스』의 구조는 희한하게도 직렬적이지 않다. 완전히 병렬적이지도 않을 만큼 이야기의 틈새엔 시점에 따른 공백이 존재한다. 여기서 표현된 공백은 허구를 실제로 바꾸는 힘을 지닌다. 생각해보라 우리의 기억에 얼마나 무수히 많은 공백이 존재하는가. 공백이 만들어낸 탄식은 안개와 같이 부옇기만 하다. 작가는 공백과 함께 반복된 서술 기법으로 ‘나’를 끝없는 불안으로 몰고 가고, 독자는 ‘나’를 통해 씻을 수 없는 불안감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한 채 ‘나’와 크누텐 그리고 크누텐 아내의 균열 속에 머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