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아직은 악보다는 선을 믿고, 우리를 싣고 가는 역사의 흐름이 결국은 옳은 방향으로 흐를 것을 믿을 수 있는 것도 이 세상 악을 한꺼번에 처치할 것 같은 소리 높은 목청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소리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무의식적인 선, 무의식적인 믿음의 교감이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 P26
삶을 누구나 읽을 수 있는 한 권의 책으로 옮기는 일은 요원해 보인다. 단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 중요한 내용을 골라내고 또 골라내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최대한 많은 내용을 담기 위해쓰고 또 쓰다 보면 그것은 보르헤스의 소설에서처럼 실물 크기의 지도를 그리는 일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82세에 사망한사람의 삶의 책이란 82년 동안, 혹은 그보다 더 오래 읽어야 하는분량의 책이다.그리하여 누구나 죽을 때에 이르러서는 오로지 자신만이 읽을 수 있는 외로운 책을 갖게 된다. 자신만이 읽었고 읽을 수 있으며 단 한 번 낭독되었고 앞으로 결코 완독될 일이 없는 책이다. 누구도 읽을 일 없는 이 책을 최선을 다해 아름답게 쓰는 태도를 우리는 품위라고 부른다. - P153
그러므로 책 읽기란 얼마나 비효율적인 행위인가. 어떤 이들은 문학을 읽지 않는 자신을 자랑스러워한다. 허구의 세계가 쓸모없다 믿고, 당장 써먹을 만한 지식을 알려 주는 책만이 가치 있다 여긴다. 그러나 비효율이 곧 우리가 삶을 버틸 수 있게 만들어 주는 힘임을, 더 나아가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힘임을 경청하는 이들은 안다. 이 힘이 쓸모없다는 평가를 받더라도 한탄할 것은 없다. 슬프지만 어쨌든 우리 모두 바쁘지 않은가. - P29
바다는 나의 비밀을 듣고도, 고해사제처럼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바다에는 모래보다 소금보다, 비밀의 밀도가 더 높을 것이다. - P78
겨울을 겨울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이 당연한 듯해도, 돌이켜보면 그런 시선을 갖지 못한 적이 더 많다. 봄의 마음으로 겨울을 보면, 겨울은 춥고 비참하고 공허하며 어서 사라져야 할 계절이다. 그러나 조급해한들, 겨울은 겨울의 시간을 다 채우고서야 한동안 떠날 것이다. 고통이 그런 것처럼. - P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