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이야마 만화경
모리미 도미히코 지음, 권영주 옮김 / 문학수첩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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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기온마츠리의 전야제라고 하는 요이야마의 하룻저녁 이야기를 그린 소설 [요이야마 만화경宵山万華鏡]은 교토의 천재작가라 불리는 모리미 도미히코森見登美彦의 상상력이 빛나는 또 하나의 작품이다. ‘천년고도(千年古都)’ 교토京都를 대표하는 가장 큰 규모의 마츠리(祭り)가 바로 ‘기온(祗園)마츠리’라고 한다. 수십만 명의 관광객이 모여든다는 이 7월 축제의 절정은 마을마다 공들여 만든 가마를 끌고 나와 거리를 행진하는 야마보코 순행山鉾巡行지만 그보다 더 화려하고 흥청거리는 기분을 맛볼 수 있는 것이 행진 당일에서 3일 전부터 진행되는 전야제라고 한다. 바로 전날은 요이야마(宵山)라 하고, 전전날은 요이요이야마(宵宵山), 전전전날은 요이요이요이야마(宵宵宵山)라 부른다니 듣기만 해도 신이 나는 명칭이다. 거리 곳곳에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줄줄이 등을 밝힌 노점상에서는 맛있는 냄새가 흘러나오며, 특색을 살린 가마마다 제등식이 벌어지는 진풍경에 야릇한 흥분이 술렁이는 분위기라면 어디선가 불가사의한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듯하다. 그렇게 작가가 펼쳐 보이는 환상의 세계는 여름밤의 꿈처럼 훨훨 날아오른다.


같은 시간대를 배경으로 한 6개의 신비로운 이야기가 연작소설 형태로 전개된다. 포인트는 각 편마다 각자의 입장에서 겪는 요이야마의 요지경이 두 편씩 짝을 이룬다는 것이다. 축제를 구경하다 손을 놓쳐 서로 길을 헤매는 초등학생 자매, 요이야마에 놀러 온 남자와 그를 놀려주려고 거창한 촌극을 준비하는 학창시절 친구, 15년 전 요이야마 때 실종된 여자아이의 아빠와 아버지를 잃은 아들. 그들을 중심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우연히 만나기도 하고, 스쳐지나가기도 하면서 야릇한 경험을 공유하는 만화경 같은 세상을 그리고 있다. 유쾌함이 흐르는 한편으로 애잔함이 깃든 이야기들이 서로 얽혀 들며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이다. 안 좋은 일이 벌어지지나 않을까 살짝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기묘한 사건과 안타까운 사연을 담고 있는 기온 거리를 빨간 유카타를 입은 여자아이들을 따라 달리다보면 어느 샌가 따스한 빛이 비추는 곳으로 나오게 된다.


모리미 도미히코의 팬이라면 한층 즐거울 듯한 요소도 몇 가지 찾을 수 있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에 등장했던 에피소드가 섞여 있다는 점도 반갑고, [다다미 넉장 반 세계일주]처럼 되풀이되는 날들이라는 설정도 흥미롭다. 잉어산(鯉山), 당랑산(蟷螂山, 사마귀), 초(超)금붕어, 마고타로 벌레(孫太郎虫), 복고양이(招き猫), 시가라키 도자기 너구리(信楽焼 たぬき), 유리 방울 속 금붕어, 커다란 붉은 잉어 풍선, 별별 신기한 물건들이 연이어 튀어나오는 마법의 세계로 끌려들어가 버라이어티 리얼 쇼를 구경하는 듯하다. <요이야마 금붕어>와 <요이야마 극장> 그리고 <요이야마 회랑>과 <요이야마 미궁>은 연달아 이어지지만 첫 번째 이야기 <요이야마 자매>의 짝인 <요이야마 만화경>은 맨 마지막에 안배되어있다는 점도 세심하게 짜인 각본일 것이다. 둥글게 이어진 세상 속에서 축제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하기 위해 쏘아 올리는 불꽃처럼 경이로운 판타지가 활짝 열리는 장이 바로 <요이야마 만화경>이기에.


“속이는 내가 나쁜 건지, 속는 네가 나쁜 건지......” 

“이런 일을 해서 무슨 의미가 있는데?”

“의미는 없어, 전혀. 하지만 머리의 천창이 열렸지?”

p.84


사실 가장 비슷하기로 따지자면 ‘하여튼 단순한 인간’인 <요이야마 금붕어>의 ‘바보’ 주인공에 가까운 나이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인물이라면 <요이야마 극장〉편의 무대장치 담당 고나가이를 꼽고 싶다. 그의 인내심과 노력이 가상하기도 하거니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대단히 제멋대로 구는 사람이지만, 그 결과 발생하는 고통은 감내한다. 

내 행위의 대가는 내가 치른다. 다만 불평만은 남보다 갑절로 하련다.” 

p.89


별 의미는 없는 일일지 몰라도 결국 열정이 만들어낸 최고의 촌극에 박수를 보내고 싶은 심정이다. 짜증스런 일상에 부루퉁해 있던 누군가가 ‘인생은 의외로 즐거운 일이 이것저것 많은가 보다.’라는 생각을 갖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는 일 아니겠는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한편의 소동극을 보고나니 나 역시 머리의 천창이 조금은 열린 기분이다. 뜨거운 여름밤의 열기와 천창으로 불어드는 한줄기 바람이 그대로 느껴지는 작품, 어떤 서스펜스 스릴러보다 시원한 한 방을 날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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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지은 남자 발란데르 시리즈
헤닝 만켈 지음, 권혁준 옮김 / 좋은책만들기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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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낚.였.다. 스웨덴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소개에. ‘발란더(Wallander) 형사’ 시리즈로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었다는 이력에. 해리포터 시리즈를 누르고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기도 했었다는 사실에. “헤닝 만켈의 소설을 읽는 독자는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의 내용을 단숨에 들이킨다고 할 수 있다. 단번에.” 라는 홍보문구에. 그동안 북유럽 소설에 대한 기대감이 너무 커진 탓인지도 모르겠지만. 영국에서까지 '형사 월랜더'라는 드라마로도 제작되었다는데 과연 재미있었을까? 의문이다. 배우 케네스 브래너는 자신이 배역을 맡은 ‘Kurt Wallander’라는 인물에 대해 "삶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가 매일 일을 왜하는지, 그리고 폭력 행위가 결코 정상이 될 수 없는지에 관해 질문하고 있는 실존주의자"라고 묘사했다고 한다. 인간 사회에 철학적인 접근을 시도했다는 건가본데, 하지만 사회성을 띠고 있지만 흥미진진한 추리소설도 많지 않은가 말이다.


발란더는 지난 번 수사 과정에서 한 사람을 죽인 충격을 극복하지 못해 병가를 내고 쉬고 있었다. 그는 여행이나 술로 죄책감을 잊고자 하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경찰 생활을 그만두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변호사 친구가 찾아와 자신의 아버지의 미스터리한 죽음에 대해 알리고 도움을 청하지만 거절한다. 얼마 뒤 신문을 읽다가 그 친구가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수사에 착수하게 되는데... 범죄를 통해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관찰하고 삶의 의미를 찾아 번민하는 인간상을 그렸다.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책소개 중


이렇게 지루할 수가 있을까. 프레드 바르가스의 롱폴(ROMPOL) 소설 ‘아담스베르그 시리즈’ 이후 이런 느낌은 처음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 책장을 넘기는데 끈기가 필요했던 마루야마 겐지의 <납장미>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적어도 아름다운 문체와 전편을 아우르는 비장감이나 은근한 스릴은 멋스러웠다. 그런데 이 소설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발란더 형사가 경찰을 그만두려고 한 이유가 전작에 있었는지는 몰라도 현직에 복귀하기까지 서두가 긴데도 불구하고 간추린 사건 설명도 없고 감정이입이 될법한 표현도 그다지 등장하지 않는다. 어차피 형사라는 직업을 선택한 이상 ‘정당방위에 의한 살인’이라는 어쩔 수 없는 순간이 언젠가는 자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각오했을 것 아닌가 말이다. 이 책으로 처음 발란더 형사를 만나는 독자에게 불친절한 도입부에, 발란더가 그토록 오랫동안 방황하던 시간에 대한 불충분한 설명에, 시작부터 등장한 수상한 인물에, 이미 흥미는 식어버린 채 긴 여정을 시작하려니 앞이 깜깜할 지경이다.


무엇보다 이 작품을 읽기에 방해가 되었던 문제는 책의 판형이다. B6, 128*188mm(?) 직접 재어보니 125*215mm다. 가로는 좁고 세로는 긴 이 두꺼운 책을 부여잡기가 너무 힘들다. 잠들기 전 누워서 책을 보는 걸 좋아하는 나로서는 도대체가 각이 나오지 않는 자세로 읽다보면 놓치기가 일쑤. 재미도 없고 긴장감도 없는데다 궁금하지도 않은 전개에 그냥 잠이 들어버리기가 며칠째. 중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다잡기가 정말 어려운 나날이었다. 번역도 한몫 했다. 선후배 관계없이 ‘자네’라 부르고 반말을 해대니 인물의 이미지가 잘 떠오르질 않는다. 가독성 떨어지는 문장은 원작이 원래 그런 건지 번역의 문제인지... 그래도 끝을 보기 위해 노력했다. 왜? 추리소설이니까. 그나마 끝부분의 추격전에서 조금이나마 보상을 받았다고 위안을 삼아본다. 그러나 아쉬움을 완전히 해소시켜줄 만큼은 아니었다. 어차피 범인이나 동기는 뻔했으니 그럴 수밖에. 고로, 안녕, 헤닝 만켈. 바이바이, 발란더 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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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집사를 믿지 마라 스펠만 가족 시리즈
리저 러츠 지음, 김지현 옮김 / 비채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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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리저 러츠(Lisa Lutz)’의 ‘스펠만 가족’ 이야기를 모두 읽었다. 물론 국내 출간 도서는 전4권뿐이지만. [네 집사를 믿지 마라]는 [네 가족을 믿지 말라 The Spellman Files], [네 남자를 믿지 말라 Curse of the Spellmans], [네 아내를 믿지 말라 Revenge of the Spellmans]에 이은 네 번째 이야기다. 원제는 (The)Spellmans strike again. 번역서의 제목은 어쩌다 믿지 말라 시리즈가 되었을까나. 가족, 남자, 아내, 집사. 모두 이자벨이 추적하는 사건 중 하나이기는 해도 딱히 전체를 대표하는 제목은 아닌데 말이다. 특히 이번 편에서는. 뭐 어쨌든. 나로서는 가장 짜임새 있게 느껴지면서도 재미있는 전개가 바로 이번 작품이었다. 이자벨이 정신을 좀 차린 듯해서이기도 하고, 얄미운 레이에게 제대로 된 벌이 내려져서일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사건의 흐름이 매끄럽게 진행된다. 이자벨이 조금씩이나마 나름대로 진화하는 것처럼 작가도 진화한 것일까.


전작의 방황을 끝내고 이자벨은 가족 사업인 사립탐정 사무소를 이어받기로 하고 복귀한다. 그녀에게 들어온 의뢰는 대저택 집사 실종사건과 파기된 시나리오 쓰레기 수거 정도. 그러나 타고난 호기심과 가족과 관련된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 개인적인 용무 또한 바쁜 와중에 엄마의 협박으로 변호사와의 맞선까지 봐야만 한다. 여동생 레이는 오빠 데이비드와 열애 중인 매기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조사 일을 거들다 ‘레비를 석방하라’ 운동에 열을 올리고 급기야 하지 말아야 될 선을 넘는데, 덕분에 이자벨과 헨리는 다시 친구 관계를 회복해 가는 중이다. 한편 집안의 가재도구 실종 현상과 부모님이 숨기는 문제는 어떤 관계가 있으며, 입시 집사라는 배역에 몰입한 친구 렌은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을까. 이런저런 사건사고 속에서도 이자벨은 또 다른 일을 벌이기 시작한다. ‘드미트리어스는 무죄다.’ 입증하기 어려운 사건이지만 자신이 희망을 주었다는 책임감에 고민하는 이자벨. 그런 그녀의 곁에서 떠나는 친구들도 생긴다. 하지만 또 새로운 만남도 찾아오는 법. 그게 인생 아니겠는가.


코미디 시나리오 작가 출신이라 그런지 시트콤을 여러 편 이어서 보는 것처럼 쏠쏠한 재미가 있다. 범상치 않은 유머, 개성 강한 인물들, 강한 불신만큼이나 단단하게 결속된 가족사랑, 다양하게 펼쳐놓은 사건들과 의외성, 등장인물들 간의 적절한 밀고 당기기. 다채로운 요인들이 뷔페식당처럼 푸짐하게 차려져 있는 것이다. 특히 이 시리즈가 마음에 드는 이유는 실수도 잘하고, 약점도 있으며,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는 진지해질 줄 아는 보통 사람들의 현실적인 면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황당한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공감대가 형성된다는 점이다. 원작은 앞으로 두 권의 이야기가 더 있어 예전에는 모두 출간되었으면 싶었지만 4권을 모두 읽은 지금은 어쩌면 이쯤에서 스펠만 가족과 이별을 하는 것도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자벨이 더 성장하게 되면 그만큼 아픔이나 고민도 커질 것 같으니 말이다. 스펠만 가족의 행복을 원하는 독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후의 관계나 인생은 나름대로의 상상에 맡기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러면 스펠만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은 계속 즐거울 테니.



나는 여러분에게 반전, 악당, 징벌, 깔끔한 결말이 있는 모범적인 탐정소설을 선사할 수 없다. 현실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으니까. 현실에서 내가 맞닥뜨리는 의문은 대부분 풀리지 않았고 미스터리는 숙제로 남았다.
다만 이것만큼은 말해줄 수 있겠다. 아무런 해답이 나오지 않았는데도 삶이 온전하게 느껴지고 인생을 뒤바꾸는 결단을 내리게 되는 순간이 있다고. 그것만은 확실하다고. - P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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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미스터리한 일상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권영주 옮김 / 북폴리오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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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와카타케 나나미若竹七海의 데뷔작 [나의 미스터리한 일상ぼくのミステリな日常]은 발표 이듬해인 1992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6위에 선정된 연작단편집이다. 일본에는 ‘일상계 혹은 일상의 미스터리’라는 범주가 있을 정도로 소소한 일상의 수수께끼를 주제로 한 작품이 많다. 수많은 작가들이 한번쯤은 다루는 장르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은 그만큼 애독자 층이 넓다는 반증이리라. 점점 더 미스터리적인 터치가 소설의 필수요소가 되어가는 바 당연한 추세일는지도 모르겠다. 하긴 폭력성이 날로 과격해지는 요즘 미스터리 소설을 읽다보면 이렇게 쉬어갈 수 있는 작품이 기대하지 않았던 작은 힐링 효과를 주기도 한다. 이 작품은 아예 제목부터가 ‘미스터리한 일상’이다. 별다를 것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는 내 입장에서 보면 일상에 무슨 수수께끼가 그리 많겠느냐 싶은데, 참 이야깃거리도 다양하다. 


갑자기 사보편집장이 된 작중 인물 와카타케 나나미는 사보에 실을 단편소설을 써달라고 대학 선배에게 매달린다. 그 선배가 소개해 준 미지의 인물에게서 다달이 받은 원고가 사보에 실리는 형태로 연재되는 구성의 작품이다. 순수한 창작이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일을 바탕으로 각색한 것으로 해석 자체에 오리지널리티가 있다는 묘한 전제가 붙어 있기에 더욱 이야기는 생동감을 띤다. 로맨틱한 요소와 가벼운 터치의 수수께끼, 유머러스한 전개에 방심하고 있다 보면 오싹한 괴담이 등장하기도 하는 다양한 미스터리풍 소설은 회사에서도 큰 인기를 모은다. 하지만 그런 다양성 때문에 주의가 산만해지는 소설이라고 생각될 즈음 작가는 마지막 한 방을 준비해 두었다. 4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일 년 동안 작가에 대한 궁금증을 꾹꾹 눌러 참고 있던 와카타케 나나미가 드디어 익명의 작가를 만나러 가는 후기가 백미라 할 수 있다. 각각의 동떨어진 내용 같았던 12편의 이야기 속에 감춰진 퍼즐이 존재했던 것이다.


사실 초반에 괴담이 등장할 때는 그만 때려치울까도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무섭지는 않아서 꿈자리를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끝까지 완주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의 한 수 때문에 결국 나의 평점은 올라갔다. 그런 이야기가 있었던가 하고 책장을 다시 되짚어 볼만큼 흥미로웠다. 나와 닮은 인간과 엄마랑 취미가 똑같은 사람이 등장한다는 것도.


벚꽃은 4월, 새 학기의 상징이다. 나는 4월이 싫었다. 주변이 갑자기 어수선해지고, 반이 바뀌고 자리가 바뀌면서 좋든 싫든 익숙해진 것들과 헤어져야 한다. 인간관계를 처음부터 새로 쌓아야 하는 것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나는 그 어수선한 분위기가 지긋지긋하게 싫었다. 그런 주제에 소심했기 때문에, 학급 내 인간관계에서 소외되지 않으려고 친구를 확보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p. 16


나쓰미의 어머니도 도무지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눈이 크고 애교 있고 게다가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인인데, 왜 그런지 상처의 딱지를 떼는 게 취미다. 초등학생 때 나쓰미의 여름방학 숙제를 도와주러 외삼촌댁에 가자, 어느 틈에 내 무릎에 앉은 딱지를 보고 “얘, 100엔 줄게 외숙모가 그 딱지 뜯자.” 하면서 슬금슬금 다가왔다.

p.92


뒷맛이 완전히 개운하지는 않아도 저 밑바닥에 감도는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벚꽃, 빙수, 보름달, 군고구마, 크리스마스 케이크, 밸런타인 초콜릿 등의 계절감을 소재로 한 것 역시 친근감을 주는 요소다. 특히 놀라웠던 것은 각 편마다 표지처럼 등장하는 사보 ‘르네상스’의 목차였다. 전국의 지점 안내라든가 동호회나 취미 소개도 다채롭게 소개되어 있는데다 이런 사보라면 다달이 받아보는 재미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만큼 알차게 꾸며져 있다. 작가의 세심한 노력에 박수를 쳐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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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기사단장 죽이기 1~2 세트 - 전2권 (리커버 특별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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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다운 작품을 만났다. 1, 2권 합쳐 천 페이지가 넘는 장편소설 [기사단장 죽이기 騎士團長殺し]. 하루키 소설만은 발간되자마자 구입하던 예년과는 달리 이렇게 몇 년을 묵혔다 읽은 건 근간 만난 작품들에 조금 실망을 했기 때문인데, 이번만큼은 과연 ‘하루키 문학의 집대성’이라는 평에 공감하는 바이다. 유려한 문체는 여전하고 현실과 비현실 사이의 모호한 경계에서 벌어지는 수수께끼 같은 일련의 사건들이 독자의 사고회로를 분주히 움직이게 한다. 하루키 문학은 이미지와 음악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인데, 이 작품은 화가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기에 더욱 색채가 생생하게 표현된다. 


제1부. 현현하는 이데아 第1部 顯れるイデア編

제2부. 전이하는 메타포 第2部 遷ろうメタファ-編


육안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통찰되는 사물의 순수하고 완전한 형태 ‘이데아(idea)’. 추상적인 무언가에 대하여 마음속에 떠오른 구체화된 이미지 ‘메타포(metaphor)’. 전편을 아우르는 철학적인 접근은 읽는 사람에 따라, 또는 읽는 순간의 기분에 따라 다른 감상을 낳을 것으로 기대되는 부분이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을 읽는 시간이 즐거웠던 이유는 작가의 전작들을 떠올리게 하는 공통적인 요소들이 심심치 않게 튀어나오는 지라 기억의 서랍을 열어보는 잔재미가 더해졌기 때문이다. 아내의 부재, 옆집 소녀, 전쟁기의 난징과 만주, 구덩이와 우물, 지하 통로의 여정, 고즈넉한 별장과 한적한 요양소, 60센티미터의 인물들, 비현실적인 임신 등, 그리고 모든 작품을 아우르는 주인공 ‘나’와 굉장히 흥미로운 남자 ‘멘시키 와타루’와의 관계도 [태엽감는 새 연대기],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해변의 카프카], [1Q84]의 이야기들과 연결된 듯해 하루키 월드의 또 다른 나라에 들어선 기분이었다.


“여기까지 제가 거쳐 온 길은 ‘메타포 통로’입니다. 그 길은 사람마다 각기 달라요. 똑같은 통로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에게 길안내를 해드리는 건 불가능합니다.”


유명한 노화가(老畫家) ‘아마다 도모히코’가 그린 그림 <기사단장죽이기> 속에서 ‘긴 얼굴’이었던 메타포가 ‘나’의 앞에는 여동생의 목소리를 통해 기억 속 풍혈로 나타난다. 울퉁불퉁 바위투성이 황야를 가로질러 세찬 물살이 흐르는 강을 건너고 울창한 숲을 빠져나가 다다른 암흑의 세계에서 눈을 뜬 주인공. 하루키 작품은 등장인물의 이름에도 의미가 담겨있는 경우가 많다. [태엽감는 새]에서 출세지향주의자가 와타야 노보루(綿谷 昇)였던 것처럼. 이번에 눈여겨봐야할 이름은 멘시키 와타루(免色 渉). 색을 면한 백발의 핸섬한 멘시키 씨는 왼손잡이다. 강을 건너서 왼쪽으로. 그리하여 ‘나’는 자신이 속한 세계로 돌아왔다. 그의 여정에서 무의식중에 잃거나 혹은 얻게 된 자아로 인해 새로이 뜬 눈에 비친 세상은 조금 달라져 있을지도 모른다. 등뒤는 울창한 수해, 눈앞은 가파른 절벽, 그리고 어두운 입을 벌리고 있는 동굴 입구 하나. 인생의 길은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리라. 부조리와 폭력, 상실감과 상처, 희생과 시련을 딛고 자신과의 싸움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라는 메시지를 얻으며 책장을 덮은 날, 우연히도 이런 메일을 받았다. 신기하네. 이런 게 바로 하늘의 계시라는 걸까.


“삶을 개선하는 방법은 익숙한 나와 결별하는 것이다.”


내 인생의 주인은 나 자신이다.

내 인생만큼은 남의 시선이 아니라 나의 시선으로 살아갈 자유가 있다.

변화는 저절로 일어나지 않는다.

과거의 나를 뜯어 고칠 때 변화가 일어난다.

삶을 개선하는 방법은 익숙한 나와 결별하는 것이다.

얻고자 하면 그만큼 대가를 치러야 한다.

때로는 불편함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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