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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이야마 만화경
모리미 도미히코 지음, 권영주 옮김 / 문학수첩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기온마츠리의 전야제라고 하는 요이야마의 하룻저녁 이야기를 그린 소설 [요이야마 만화경宵山万華鏡]은 교토의 천재작가라 불리는 모리미 도미히코森見登美彦의 상상력이 빛나는 또 하나의 작품이다. ‘천년고도(千年古都)’ 교토京都를 대표하는 가장 큰 규모의 마츠리(祭り)가 바로 ‘기온(祗園)마츠리’라고 한다. 수십만 명의 관광객이 모여든다는 이 7월 축제의 절정은 마을마다 공들여 만든 가마를 끌고 나와 거리를 행진하는 야마보코 순행山鉾巡行지만 그보다 더 화려하고 흥청거리는 기분을 맛볼 수 있는 것이 행진 당일에서 3일 전부터 진행되는 전야제라고 한다. 바로 전날은 요이야마(宵山)라 하고, 전전날은 요이요이야마(宵宵山), 전전전날은 요이요이요이야마(宵宵宵山)라 부른다니 듣기만 해도 신이 나는 명칭이다. 거리 곳곳에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줄줄이 등을 밝힌 노점상에서는 맛있는 냄새가 흘러나오며, 특색을 살린 가마마다 제등식이 벌어지는 진풍경에 야릇한 흥분이 술렁이는 분위기라면 어디선가 불가사의한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듯하다. 그렇게 작가가 펼쳐 보이는 환상의 세계는 여름밤의 꿈처럼 훨훨 날아오른다.
같은 시간대를 배경으로 한 6개의 신비로운 이야기가 연작소설 형태로 전개된다. 포인트는 각 편마다 각자의 입장에서 겪는 요이야마의 요지경이 두 편씩 짝을 이룬다는 것이다. 축제를 구경하다 손을 놓쳐 서로 길을 헤매는 초등학생 자매, 요이야마에 놀러 온 남자와 그를 놀려주려고 거창한 촌극을 준비하는 학창시절 친구, 15년 전 요이야마 때 실종된 여자아이의 아빠와 아버지를 잃은 아들. 그들을 중심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우연히 만나기도 하고, 스쳐지나가기도 하면서 야릇한 경험을 공유하는 만화경 같은 세상을 그리고 있다. 유쾌함이 흐르는 한편으로 애잔함이 깃든 이야기들이 서로 얽혀 들며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이다. 안 좋은 일이 벌어지지나 않을까 살짝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기묘한 사건과 안타까운 사연을 담고 있는 기온 거리를 빨간 유카타를 입은 여자아이들을 따라 달리다보면 어느 샌가 따스한 빛이 비추는 곳으로 나오게 된다.
모리미 도미히코의 팬이라면 한층 즐거울 듯한 요소도 몇 가지 찾을 수 있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에 등장했던 에피소드가 섞여 있다는 점도 반갑고, [다다미 넉장 반 세계일주]처럼 되풀이되는 날들이라는 설정도 흥미롭다. 잉어산(鯉山), 당랑산(蟷螂山, 사마귀), 초(超)금붕어, 마고타로 벌레(孫太郎虫), 복고양이(招き猫), 시가라키 도자기 너구리(信楽焼 たぬき), 유리 방울 속 금붕어, 커다란 붉은 잉어 풍선, 별별 신기한 물건들이 연이어 튀어나오는 마법의 세계로 끌려들어가 버라이어티 리얼 쇼를 구경하는 듯하다. <요이야마 금붕어>와 <요이야마 극장> 그리고 <요이야마 회랑>과 <요이야마 미궁>은 연달아 이어지지만 첫 번째 이야기 <요이야마 자매>의 짝인 <요이야마 만화경>은 맨 마지막에 안배되어있다는 점도 세심하게 짜인 각본일 것이다. 둥글게 이어진 세상 속에서 축제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하기 위해 쏘아 올리는 불꽃처럼 경이로운 판타지가 활짝 열리는 장이 바로 <요이야마 만화경>이기에.
“속이는 내가 나쁜 건지, 속는 네가 나쁜 건지......”
“이런 일을 해서 무슨 의미가 있는데?”
“의미는 없어, 전혀. 하지만 머리의 천창이 열렸지?”
p.84
사실 가장 비슷하기로 따지자면 ‘하여튼 단순한 인간’인 <요이야마 금붕어>의 ‘바보’ 주인공에 가까운 나이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인물이라면 <요이야마 극장〉편의 무대장치 담당 고나가이를 꼽고 싶다. 그의 인내심과 노력이 가상하기도 하거니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대단히 제멋대로 구는 사람이지만, 그 결과 발생하는 고통은 감내한다.
내 행위의 대가는 내가 치른다. 다만 불평만은 남보다 갑절로 하련다.”
p.89
별 의미는 없는 일일지 몰라도 결국 열정이 만들어낸 최고의 촌극에 박수를 보내고 싶은 심정이다. 짜증스런 일상에 부루퉁해 있던 누군가가 ‘인생은 의외로 즐거운 일이 이것저것 많은가 보다.’라는 생각을 갖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는 일 아니겠는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한편의 소동극을 보고나니 나 역시 머리의 천창이 조금은 열린 기분이다. 뜨거운 여름밤의 열기와 천창으로 불어드는 한줄기 바람이 그대로 느껴지는 작품, 어떤 서스펜스 스릴러보다 시원한 한 방을 날려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