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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즘
손원평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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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즘 : 광선을 굴절, 분산시킬 때 쓰는 유리나 수정 따위로 된 다면체의 광학 부품.

 

네 사람의 살아온 이야기, 살아갈 이야기, 그 속에 낀 사랑 이야기. 이 소설은 사랑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제각기 다른 빛깔로, 다른 모양으로 나타내는 삶의 이야기이다. 

예진, 호계, 도원, 재인. 나이대도 살아온 환경도 다른 각각의 남녀가 같은 지역에서 마주치며 삶을 나누고 사랑을 나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을 듯한 여자 주인공이 예진이다. 늘 사랑할 준비가 되어있고 사랑이 잠시 쉬기라도 하면 무슨 병이라도 걸릴 듯 불안한 여자들, 그래서 누군가와 만나면 사랑이라는 프리즘 안에 가둔다.

 

우리나라 가요 속에는 사랑이라는 말이 가장 많이 나온다고 들었다. 사랑 이야기, 이별 이야기 아니면 노래가 안 만들어지나... 사랑 타령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많은 사람들은 사랑하면서 살 수밖에 없기 때문일까. 지금 사랑하지 않아도, 미래의 사랑을 늘 안타깝게 갈구하며 살아가기 때문이 아닐까.

 

결혼 19년차, 오래된 부부인데도 때론 한몸처럼 가깝게 느껴지기도 하고, 때론 완전 남보다 더 남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우리이다. 부부가 같은 프리즘을 쓰면 좋으련만, 아직도 우린 아니면 영원히 우린 각기 다른 프리즘을 다른 각도로 눈에 대며 세상을 바라볼 것 같다. 나와 남편에게 비치는 색깔과 모양이 다르듯이 하나 하나 다른 마음과 생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그래서 우린 외롭기도 하지만, 그래서 우린 자유롭기도 하다. 하나의 프리즘으로 같은 각도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우린 지금처럼 갑작스럽게 튀어오르는 공 같은 일상을 살 순 없을 것이다. 어디서 어떻게 튀어나올지 모르는 공처럼 잔잔하던 일상에 파문이 일기도 하고 , 그치지 않을 듯 내리는 궂은 비 속에 반짝이는 태양처럼 활짝 개기도 한다. 

 

길고 짧은 파장의 빛이 벽 위로 자연스럽게 용해되어 색 간의 경계가 흐릿한 아름다운 무지개가  만들어진다. 프리즘을 들어 햇빛을 통과시키면.

하루하루 일상이 모여 삶이라는 아름다운 무지개가 만들어진다. 나만의 프리즘을 들어 일상을 통과시키면.

 

가을이다. 코로나로 지치고 힘들었던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한줄기 시원한 바람이 코스모스밭을 스쳐지난다. 이  가을, 작가의 말대로 사랑을 멈추지 말자. 나에 대해서도 누군가에 대해서도, 이 세계에 대해서도.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그렇게 애정을 쏟았는데 돌아오는 건 도리어 상처와 아픔이라니. 그때 느낀 감정은 어른의 언어로는 배신감이었다. 너무 날카롭고 아름다운 건 결국 속성을 뒤바꿔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 걸까. - P13

도원은 재인이 알던 사람과 같은 사람일까. 다른 사람일까. 한마디로 규정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가 모든 고백을 마쳤을 때 재인은 이 어려운 얘기를 모두 털어내준 그가 진심으로, 깊이 고마웠다. - P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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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아 있는 모든 순간
톰 말름퀴스트 지음, 김승욱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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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시인이었다. 대중음악가였다. 한 여자의 남편이었고 태어날 아기의 아빠였다. 10년 동안 동거한 아내는 출산을 앞두고 있었고 그들은 결혼을 계획해두고 있었다. 그러나... 인생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아내는 급성 백혈병으로 죽었고 딸은 태어났다.

 

실화를 바탕으로 내밀한 이야기를 고백한 작가는 예민하고 까칠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마지막 1시간 정도, 아내에게 남아있는 마지막 시간을 아내의 부모님과 함께하고 싶지 않았던 그는 둘만의 시간을 고집했다. 그 부분에서 아내의 어머니는 그가 슬픔에 빠진 그들을 발로 차내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을 정도로 절망하기도 했지만 나중에 사위의 고통을 보고 화해한다. 아내를 잃은 그의 현실, 갓난 아기를 돌봐야하고 친부를 증명해야하는 딸의 법적인 문제를 처리해야 하고, 삶을 살아가야했기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을 이제 터득해야하는 그.

아내의 장례식에서 관을 열고 아내에게 키스하고 싶다는 그의 소망은 거절당하고, 아내의 유골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관계자에게 전화해서 절차에 대해 문의하지만 자세한 것은 듣지 못한다.

아내의 머리빗에 남겨진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장례식에서 발표할 문구를 고쳐 쓰는 그. 자질구레한 장례식 절차에 대해 의논하면서 아내가 묻힐 묘지를 고른다.

 

죽음 이후... 남겨진 사람들에게는 처리해야할 문제들이 많이 있다.

 나는 이번 추석날 90이 넘은 큰아버지의 장례식에 가족들과 함께 다녀왔다. 코로나로 인해 마스크를 쓴 상태에서 위로의 말을 건네는 사람들, 한쪽에선 삭힌 홍어에 식사를 하는 사람들, 오랜만에 만난 친척일가와 인사하는 사람들, 장례식장은 썰렁했지만 입구에 늘어선 화려한 화환들은 유난히 빼곡하게 자리를 빛내고 있었다. 마치 망자가 이렇게 열심히 삶을 살았다는 것을 증명해주기라도 하는 듯...

밖에는 섬진강변에 가을 햇살이 뒹굴고 코스모스는 강변을 따라 바람에 한들거리는 오후였다.

 

삶과 죽음, 아내는 죽고 딸은 태어났다. 우리가 살아있는 모든 순간은 그렇게 한가지는 죽음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한가지는 삶 속으로 내쳐지는 것이다. 지금 뱉는 호흡 하나 하나가 죽음 속으로 사라지는 것처럼, 내가 순간 순간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난 그저 아내에게 작별의 키스를 하고 싶을 뿐입니다.
톰, 부인에게는 이제 입술이 남아있지 않아요.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 비닐을 제거한다면 균이 퍼질 위험도 있습니다. 악취도 무시무시할 거고요, 부패 과정이 아주 빨리 진행됐습니다.
좋아요, 좋습니다. 이해했어요.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겠습니다.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 P242

여보세요, 카린 있나요? 내가 모르는 목소리다. 죄송하지만 누구시라구요? 내가 묻는다.
카린 집에 있나요? 여자가 말한다. 여자의 목소리는 여전히 쾌활하다. 어디서 일하시는 분입니까? 내가 묻는다.
그 얘기는 카린과 하고 싶은데요,
카린은 죽었습니다. 내가 대답한다.
그렇군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 P268

화장 과정이 왜 궁금합니까? 직원이 묻는다.
그냥 알고 싶어서요.
안치소에서 시신이 도착하면 우리는 시신을 냉장실로 옮깁니다. 직원이 설명한다.
냉장실 온도는 얼마나 되죠?
혹시 기자십니까? 아뇨, 그냥 궁금해서요.
직원은 웃음을 터뜨리며 말한다. 그냥 평범한 냉장실이에요. 슈퍼마켓에서 볼 수 있는 것 같은. - P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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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호스
강화길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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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말하길 이번 소설집은 문을 열고 들어간 사람들의 이야기, 그 집에 머무는 사람들의 이야기,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고리를 끊고 의미를 바꾸려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 모든 실패와 모순과 애착이 만드는 희미한 틈새에 대한 이야기 라고 했다.

 

이 책에 실린 7편의 소설, 모두 편치 않게 읽혔다. 어렵고 애매하다 하기엔 와 닿는 장면이나 구절들이 많았고, 그렇다고 재미있고 쉽다고 하기엔 불편한 부분들이 많았다. 여자들의 이야기인데도 불구하고 투명하지 않다.  '그런 여자' 를 만들어내는 가십, 소문, 평판, 험담, 폭로, 전기, 광고, 소설 등 일관되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으면서 허술하기 그지 없는 구조로 세상은 여성들의 삶을 옥죄어간다. 그것이 가족이라는 보금자리가 되기도 하고, 시모가 사는 시골 마을이기기도 하고, 소설가들에게 개방한 사택이기도 하다.

 

난 이 소설집에서 '가원' 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한번도 내 편이 되어주지 않은 인생의 역경 속에서 살아남아야했던 외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나'. 평생을 백수로 살면서도 마지막 남은 큰돈까지 사기를 당한 외할아버지와 달리 현실에서 먹고 사는 문제를 평생 책임지면서 새벽부터 화장을 해야했던 여자들. 조부모의 모습에 감춰진 진실을 알면서도 '나'는 할머니를 사랑하긴 어려웠고 할아버지를 미워하긴 더 어려웠다.

 

여성들이 불합리한 구조 속에서 살아가며 맺는 은밀한 협약과 비밀, 묵인으로 인한 차가운 사실들, '알아챈 여자들' 이 소설 속엔 많이 등장한다.  

  

표제작 '화이트 호스' 는 강화길이 쓰고싶어하는 고딕 소설의 전형이다. 무너진 중세 건물들 속에서 느껴지는 신비하면서도 공포스러운  분위기, 여자들의 이야기라서 페미니즘적인 의미가 깔려있으면서 그 위에 농밀하게 짙어지는 스릴러적 구조,  

쉽게 읽혀지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어쩌면 한 여자의 삶이 그렇게 쉽게 읽혀져서는 안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오늘도 신문 한쪽면에는 웃는 모습이 얼핏 기억날 듯한 한 여자 연예인의 죽음이 실렸다. 그 연예인이 에스엔에스에 올린 여러 말들이 실려있었고 그 중에  '몸뚱이 하나로....' 라는 말이 뭔가 죽음의 끈을 암시하는 말로 실려있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기에 왜 죽었는지 알 수 없고, 그 죽음조차 다른 뉴스들에 묻혀 사라질 것이다. 

 

어쩌면 소설 속에 나오는 여자들 모두 우리가 사는 세상 속에서 우리와 같이 살고있는 여자들일 수도 있다. 우리 옆집 여자일 수도 있고, 회사에서 만나는 김대리 이 대리일 수도 있다.  

비릿한 애증을 안고 살아가는 여자들, 어디에나 있는 여자들 이야기.

그래, 쉽게 재미있게 읽혀서는 안되는 여자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왜냐하면 너는 아마 영원히 모를 테니까. 뭔가를 모르는 너. 누군가를 미워해본 적도 없고, 미움 받는다는 것을 알아챈 적도 없는 사람. 잘못을 바로 시인하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사람. 너는 코스모스를 꺾는 이유가 사실 당신 때문이라는 걸 말하지 못하는 사람도 아니고, - P41

그렇게 일상은 유지되었다. 할머니는 새벽부터 화장을 했고 엄마는 출근을 했고 나는 학교와 학원과 독서실을 오갔다. 제일 싼 샴푸로 머리를 감았고 생리대는 몰래 여러 번 갈았다. - P67

대체 김미진이 뭐길래? 뭐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길래? 수많은 인간 연예인 작가 딸 누나 연인 아내 여자 오물자, 그것들 중 하나에 불과한 그녀가 대체 무엇이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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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준비해온 대답 - 김영하의 시칠리아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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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년 전에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인가 하는 제목으로 나왔던 책이 절판되어 이번에 다시 책을 엮어낸 것이 '오래 준비해온 대답' 이다.

 

깊은 사유 속에 해박한 지식과 넓은 품성을 가진 작가의 예전 모습이 담겨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작가에 대해서 자세히는 모르지만, 30대와 40대를 거쳐 이제 막 50대가 시작된 사람은 알 수 있는 살아온 자취, 성숙해진 흔적, 상처와 회복 등등...

 

시칠리아는 이탈리아의 섬이다. 마치 우리나라의 제주도와 같은 곳이다. 시칠리아하면 쏟아지는 강렬한 햇빛, 짙푸른 사이프러스, 먼지 이는 황량한 들판과 구릉, 콧수염이 있는  남자들, 대부라는 영화, 시네마 천국의 한 장면 등이 떠올랐다. 

 

이 책 속에는 시칠리아의 도시 곳곳의 특징이 아주 잘 나타나 있다. 막 골목을 돌면 있을 듯한 생선가게, 높은 언덕에 자리잡은 짙은 색의 알록달록한 작은 집들, 눈을 돌리면 보이는 드넓은 지중해 바다, 그 중에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그리스의 유서 깊은 신전들, 그리스인들이 연극을 구경했다는 원형극장들, 메두사가 등장하는 신화 속의 섬.

 

작가와 아내는 시칠리아의 이름 모를 시골 평범한 동네에서 며칠씩 묵기도 있고 몇주씩 지내기도 하면서 천천히 여행하는 것을 즐긴다. 왔다 스쳐가는 관광객이 아니라 반찬거리를 매일 사러나가고 아침으로 먹을 빵을 준비하는 생활인으로서 시칠리아 사람들과 살아간다. 모두가 모두를 아는 사람들 속에 섞여서 식사를 손수 준비해 먹고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며 틈틈이 베란다에 앉아 지중해 바다를 보며 글을 쓴다. 생존 요리법을 소개해주기도 하며 홍합이 들어가는 파스타, 오징어와 함께 내는 스파게티를 옆에서 먹는 것처럼 생생하게 보여준다.

ebs에서 보여주는 여행기가 아니라 한 여자의 남편으로서, 서울로 돌아가야하는 생활인으로서의 모습이 나타나있어 정감있게 읽혀졌다.

 

여행과는 거리가 먼 코로나19 펜데믹 시대가 모두가 원하지 않았지만 찾아와 버렸다. 사람들은 이제 랜선 여행으로 만족하며 유튜브에서 해외 관광지를 사진으로 구경하며 떠나지 못함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고 있다. 떠날 수 있을 때는 몰랐던 여행에 대한 설레임, 여행에 목매는 사람이 아니었던 나에게도 시칠리아는 어디에 있는 어떤 곳이며 꼭 한번 가보고 싶다는 왠지 모를 그리움이 가슴 깊이 차올랐다.

 

시칠리아. 내가 잃어버렸던 것을 기억하게 하는 섬. 바쁘게 살아가느라 놓치고 있었던 삶의 소중한 것들이 그곳에 있을 것만 같다. 항상 옆에 있어서 소중함을 몰랐던 가족에 대한 사랑도 어쩌면 시칠리아 여행 중에 찾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떠날 수 있을 때 떠나란 말이 생각난다. 우리는 언제쯤 모든 것을 이곳에 놓고 시칠리아로 훌쩍 떠날 수 있을까.    

여행안내서엔 이 섬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모두가 모두를 아는 섬‘ 거리에선 모두가 모두에게 인사를 한다. 차가 멈추면 그것은 인사를 하기 위해서고 클랙슨이 울려도 인사를 하기 위해서다. - P78

어떤 풍경은 그대로 한 인간의 가슴으로 들어와 맹장이나 발가락처럼 몸의 일부가 되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가볍게 전해줄 수 없는 그 무엇이 되어버린다. - P124

"난 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
"어떤 사람?"
"난 모든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안절부절못하는 사람이었어.
특히 여행 같은 거 떠날 때는 더더욱 그랬지. 예약하고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그런데 시칠리아 사람들 보니까, 이렇게 사는 것도 좋은 것 같아."
"이렇게 사는 게 뭔데?"
"그냥, 그냥 사는 거지. 맛있는 거 먹고 하루종일 얘기하다가 또 맛있는 거 먹고"
"그러다 자고"
맞아.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고 그냥 닥치는 대로 살아가는 거야 - 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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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을 위한 마음
이주란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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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에서 아이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다가 그만 두고 동네 서점에서 근무하는 조.지.영.

아침 일곱시부터 오후 다섯시까지 일한다. 다른 사람들의 밥을 차려주느라 땀에 흠뻑 젖은 엄마가 퇴근하면 집밥을 천천히 열심히 만들어 차려내고, 죽은 언니의 딸을 돌봄교실에서 데려와 돌보는 일상.

나이 든 어머니와 그의 딸과 손녀, 모두 아버지가 없다. 어버이날 언니의 사진 앞에 빨간 카네이션을 두고 모두가 울었다. 모두가 한 사람을 위한 마음이었다.

 

이 책에 실려있는 단편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있다. 조지영, 조수영, 수연 , 수진 등 비슷비슷한 느낌의 삶을 천천히 살아내고 있는 여성들이 나온다. 천천히 생각하고 오래 생각하는 그녀들. 그래서 행동은 어느새 느려지고 반응은 엉뚱하게 나오고... 누군가에게 그렇게 살지말라는 말을 듣고, 아랫집에선 시끄럽다고 문을 쾅쾅 두드려댄다. 불행 속으로 스스로 걸어들어가는 사람, 슬프지만 그녀들은 모두 그랬다.

 

언니가 죽었거나, 동생이 죽었거나, 언니가 이혼했거나, 애인이 떠났거나, 갑자기 뚱뚱해지거나, 월세조차 낼 돈이 없거나...

사라지거나 사라질 것들...

 

이주란의 '모두 다른 아버지' 란 소설을 읽고 꽤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던 구절이 있다. 왜 그는 그녀들에게만 폭력을 쓰는 아버지였을까. 다른 자식들에겐 다른 모습으로 기억되는 아버지였건만, 그 자매들에겐 폭력을 쓰는 아버지였고 그랬기에 화해할 수 없는 아버지였다.왜 그녀들에게만...

 

이 소설집을 읽으면 홍대 거리에 쏟아져나오는 젊은이들의 활기가 다른 세상 같게 느껴진다. 밤을 새고 악착같이 공부하는 학생들이 다른 우주에서 온 듯하고, 세련된 인테리어를 갖춘 넓고 쾌적한 아파트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인 것 처럼 느껴진다.

 

코로나19로 사회가 잠깐 멈춰있고 더불어 나의 일상도 느린 화면으로 움직이는 듯한 요즘. 뚜렷하고 명확하지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 내일 또 우리 동네에 확진자가 나와서 학원을 쉬어야할지 모르는 불안. 걱정. 내 노력과 성실로 대처할 수 없는 어딘지 모르는 먼 우주 같은 곳에서 시작되는 듯한 불행.

어쩌면 나의 불안과 걱정이 내가 생각하는 그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명확함까지 더해지면서... 

 

운동을 하기 싫을 땐, 내가 김연아 선수라고 생각하고, 하기 싫은 일이 있을 땐 연기를 하는 배우라고 생각하기. 이 책에서 배웠다.

이렇게 하다보면 그 일도 지나가고 그 사람도 지나가고 우리의 삶도 지나갈 것이다.

 

힘을 내자거나 화이팅 하자거나 이런 말들보다는 낮은 자세로 낮은 곳에서 삶을 기다리며 견뎌내자라는 말이 더 와 닿는 소설들. 그 속에서도 오래된 사랑은 깊어지고, 새로운 사랑이 찾아오기도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M은 내가 다시 예전의 일상을 찾아가기 시작했을 때 나를 떠났다. M이 떠날까봐 정신을 차리려 노력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가고 없었다. 나는 가끔 그때 나를 살게한 것이 나였는지 M이었는지 생각할 때가 있다. - P31

지난날들이 다시 오지 않는다는 것에 가슴을 쓸어내리는 밤. 그 날들은 지나갔고 다른 날들이 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나는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사실에 잠시 안도했던 적이 있었으나 어쩌면 그 사실이 싫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언제든 마지막이 될 수 있는 모든 날들을 비슷하게 만들며 살고 싶었다. 나 혼자 그런다고 되는 게 아닌 걸 알면서도. -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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