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책의 페이지는 초기 아동기에서 그 중요성이 과소평가된 페트리접시입니다. 페이지는 인지적, 언어적 반복과 재연에 물리적 실체를 부여하지요. 그럼으로써 그 페이지 위의 이미지와 개념에 반복적으로 필요한 노출을 제공합니다. 이런 것이 아이의 배경 지식을 구축하는 최초의 입력 값들이지요. 저는 아이들이 사용자와 늘 조금은떨어져 있고 약간은 대용품 같은 스크린을 접하기 전에 책의 물리적,
시간적 존재감을 먼저 체험했으면 합니다. 아주 어린 아이들이 너무나 빠르게 인지적으로 전자 기기에 내맡겨진 채로 끊임없이 화면에•빠지게 된다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무릎에 앉아 그 사람이 자신에게만 책을 읽어주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목소리를 듣는 체험은 누릴수없게 되지요.
앤드루 파이퍼와 나오미 배런이 주장하듯이, 읽기는 어린아이들의 - P203

뇌에만 관계되는 것이 아닙니다. 온몸에 관계됩니다. 아이들은 책을보고 냄새 맡고 듣고 느끼지요. 모든 것을 받아주는 부모 덕분에 아이들은 책의 다양한 것들을 맛봅니다. 그런 부모의 무릎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스크린으로는 그럴 수가 없지요. 아이가 입으로 아이패드를 무는 것이 책을 무는 것과 같을 수는 없습니다. 아이들이 책을 보고 듣고 맛보고 만지는 것은 뇌신경에 최선의 다중감각적, 언어적 연결이 구축되도록 도움을 줍니다. 이것은 피아제가 아동의 인지 발달과정에서 감각운동 단계라고 이름 붙인 기간에 일어납니다.
둘째, 지난 몇 년간 발달심리학자의 연구들을 보면, 아이들의 양육에 사용된 다양한 전자 기기들에 부가기능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두 살 전후의 초기 언어 발달에 차이가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언어적 입력을 사람들로부터 받아들인 아이가 언어를 찾아 쓰는 데도 더뛰어났습니다. 그런 사실은 직관적으로도 알 수 있지요. 비인간적인매체를 통한 입력은 한 걸음 떨어져 있는 데다가 특정한 아이 한명에게만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습니다. 더욱이 그런 매체가 아이의주의를 끌지는 몰라도 아이의 시선이나 귀에 정확히 초점이 맞춰지는 경우는 드물지요. 아주 어린 아이들의 세계에서 우리 인간은 더중요해집니다. 그 사실을 굳이 입증해야 한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지경입니다. - P204

좀 더 정신이 번쩍 들게 말하자면, 21세기미국 아동의 불과 3분의 1만이 충분한 이해력과 속도로 글을 읽을줄 안다는 이야기입니다. 4학년 시기는 읽는 법을 배우는 단계에서읽기를 사고와 학습에 활용하는 법을 배우는 단계로 넘어가는 마지노선입니다. 미래의 학습력이 이 시기에 달려 있지요.
더욱 충격적인 점은 아프리카계나 라틴계 미국인 아이들의 절반가까이가 4학년 시기에 읽기 능력이 능숙하기는커녕 ‘기본적인 수주도 못 된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아이들이 읽은 내용을 충분히이해할 정도로 글을 해독하지 못한다는 뜻이지요. 이것은 그 후에 배울 수학 등의 다른 과목을 비롯한 거의 모든 것에 영향을 줍니다. 저는 이 기간을 ‘미국 교육이 사라지는 구멍‘이라고 부릅니다. 아이들이 이 기간에 원활하게 읽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모든 교육적인 목표가이 아이들에게는 무의미해지기 때문이지요. 실제로 이때 많은 아이들이 꿈을 이룰 희망도 거의 품지 못한 채 낙제생이 되고 맙니다.
미국의 모든 주에 있는 교정국들이 이 사실을 잘 압니다. 많은 교정국이 3~4학년생의 읽기 능력 통계를 토대로 장래에 필요한 교도소의 침상 수를 예측하지요. 전 CEO이자 자선사업가인 신시아 콜 -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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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의 질은 사고의 질을 보여주는 지표




읽기에 관한 믿기 어려울 정도로 단순한 첫 번째 사실은 문해력이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문화적인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 말은 어린 독자에게는 읽기에 필요한 신경회로를 발달시킬 유전적 프로그램이 없다는 뜻이지요. 읽는 뇌 회로가 형성되고 발달하는 과정에는 자연적인 요인과 환경적인 요인이 모두 영향을 줍니다. 환경적 요인에는 읽기의 습득과 발달 과정에서 사용되는 매체도 포함되지요. 각각의 읽기 매체는 서로 다른 인지 과정을 촉진합니다. 다시 말해 어린 독자의 경우 완전히 발달한 전문가 수준의 읽는 뇌에 체화된 다중적 심층-독서의 전 과정을 발달시킬 수도 있는가 하면, 초보자 수준의 읽는 뇌에서 발달 중인 단축-회로를 만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아예 다른 회로 안에 완전히 새로운 신경망을 구축할 수도 있지요.
어린아이의 읽기 회로가 형성되는 동안 어떤 과정을 따르느냐에 따라 읽고 생각하는 방법에도 심대한 차이가 생깁니다. - P30

저는 이 책을 통해 과거에 제가 했던 작업보다 훨씬 멀리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각각의 편지는 제가 이전에 다른 곳에서 다루었던 모든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특히 저의 최근 논문과 저서에 소개한 연구 내용이 많습니다. 각 편지와 관련하여 참고할 만한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책뒷부분에 방대한 주석으로 붙였습니다. 두 번째 편지는 저의 연구 성과를 가장 많이 담고있지만, 사실 가장 가벼운 마음으로 쓴 것이기도 합니다. 읽는 뇌에 관한 지식을 색다르게 풀어낸 내용이 담겨 있지요. 이를 통해 어떻게 읽는 뇌 회로의 가소성이 사고의 복잡성을 점증시키는지, 또한 이 회로가 무슨 이유로 어떻게 변하는지 명확히 보여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 편지는 독자의공감과 추론 능력에서부터 비판적 분석과 통찰에 이르는, 깊이 읽기의 핵심적인 과정으로 안내합니다. 이 세 통의 편지에서는 다양한 매체의 특성, 구체적으로는 인쇄물을 읽는 것과 스크린을 읽는 것이어그렇게 뇌 회로의 가변적 연결망뿐 아니라 우리가 읽는 방식과 내용에또 반영되는지를 검토하기 위한 공통의 토대가 제시됩니다.
읽는 뇌의 가소성이 함축하는 의미는 결코 단순하지도 일시적이지 - P34

도 않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읽느냐와 무엇이 씌어 있느냐의관련성은 우리 사회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계속 직면하는 정보 과잉의 환경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쉽게 소화되고밀도도 낮으며 지적인 부담도 적은 정보들로 둘러싸인 익숙한 골방으로 뒷걸음치고 싶다는 유혹을 느낍니다. 한눈에 들어오는 정보의 조각들이 매일 쏟아져 나오면서 우리는 모든 것을 안다는 착각에빠지지요. 그 때문에 눈앞의 복잡한 현실에 대한 비판적 분석은 뒤로밀릴 수도 있습니다. 네 번째 편지에서는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릅니다. 민주사회에서 비판적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그런 능력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얼마나 빠르게 퇴화하는지 논의합니다.
다섯 번째 편지부터 여덟 번째 편지에서 저는 미래 세계를 살아갈아이들을 위해 ‘읽기의 전사‘로 변신합니다. 여기서는 아이들의 지적, 사회-감성적, 윤리적 형성에서 읽기가 하는 다양한 역할들을 지키는 문제에서부터 점차 사라져가는 아동기의 여러 모습들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걱정스러운 일들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많은 부모와조부모가 제게 우려 섞인 질문들을 던졌습니다. 사실 그 질문들은 칸트가 제기했던 세 가지 질문으로 요약됩니다. 우리는 무엇을 아는가? 우리는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
여섯 번째 편지부터 여덟 번째 편지에서는 뇌 회로의 발달에 관해 제안을 하는 동시에 세 가지 질문에 대한 제 생각을 소개합니다. 그중가장 중요한 것은 어쩌면 다소 예상 밖의 제안처럼 보일 수도 있을양손잡이 읽기 뇌biliterate reading brain 를 만들기 위한 계획일 것입니다. - P35

양손잡이 읽기 뇌를 목표로 하지만 이 책 어디에도 이분법적 해법은 제시되지 않습니다. 지금 제가 진행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연구중에는 글로벌 문해력 향상을 위한 사업도 포함돼 있습니다. 이 사업을 통해 저는 학교가 없거나 시설이 부실한 지역에 사는 아이들의 문맹을 낮춰줄 디지털 태블릿의 설계를 공개적으로 주창하고 지원합니다. 그러니 저를 디지털 혁명의 반대자로 생각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사실은 모든 아이들이 사는 곳과는 상관없이 어떤 매체로든 깊이읽기를 훈련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매체에 관한 지식을 갖추어야 할니다.
이 편지를 통해 독자 여러분은 관련된 핵심 이슈들을 살펴볼 준비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은 여러분 자신에 대해 생각해봐야 합니다. 마지막 편지는 여러분이 변화하는 시대에 진정 ‘좋은 독자‘란어떤 사람인지 생각해보시기를, 그리고 그런 사람이 민주사회에서맡고 있는 더없이 중요한 역할에 관해 성찰해보시기를 청합니다. 오늘날 그런 역할은 정말 중요해졌습니다. 현재의 맥락에서 좋은 독자란 글의 해독 능력과는 별 상관이 없습니다. 예전에 프루스트가 독서의 핵심이라고 했던 저자의 지혜를 넘어 자신의 것을 발견해내는 것이야말로 좋은 독자의 조건이니까요.
좋은 독자가 되는 지름길은 없습니다. 하지만 좋은 독자가 되도록이끌어주고 유지해주는 삶은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은 사회에는 세 가지 삶이 있다고 썼지요. 하나는 지식과 생산의 삶, 다른 하나는 그리스인 특유의 이해 속에서 나오는 즐기는 삶. 마지막은 관조 - P36

의 삶입니다. 좋은 독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지막 편지에서는 좋은독자와 좋은 사회가 어떻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세 가지 삶을 구현하는지 자세히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지금 우리 문화에서는 세 번째삶인 관조의 삶이 매일 위협받고 있지요. 누구도 다가올 세상을 예측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그런 세상에서 살아갈 다음 세대에게는 자율적인 정신의 삶이 필요하고, 읽기가 그런 삶의 기초가 되어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경과학과 문학 그리고 인간 발달의 관점에서 볼 때그런 생각이 듭니다. 지금 우리의 읽는 뇌에서 일어나는 통찰과 성찰을 뒷받침하는 자기 확장적이고 포괄적인 과정이야말로 삶을 증진해주는 디지털 시대의 다중적인 성취들에 수반되는 인지적, 감성적 변화에 대한 최선의 보완물이자 해독제가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가장 사적인 마지막 편지에서 여러분과 저는 스스로를마주하고 질문해볼 것입니다. 우리는 좋은 독자로서 세 가지 삶을 살고 있는지, 은연중에 세 번째 삶으로 들어가는 능력을 잃어버린 것은아닌지, 읽기라는 우리의 고향을 아예 잃어버리지는 않았는지, 그렇게 확인하는 과정에서 저는 읽는 뇌가 간직한 관조의 차원을 육성하고 보호해야 비로소 우리 공동의 지성과 연민, 지혜를 최상으로 유지하고 전수할 수 있다고 제안할 것입니다.
커트 보니것은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을 광산의 카나리아‘에 비유했지요. 예술가와 카나리아 둘 다 우리에게 위험을 경고해줍니다. 읽는 뇌는 우리 정신의 카나리아입니다. 그것이 경고하는 바를 무시한다면 우리는 최악의 바보가 될 것입니다. - P37

언어와 사고가 위축되고 복합성이 줄어들며 모든 것이 점점 같아질때, 우리의 사회 정치는 종교 조직이나 정치 조직 내의 극단주의자들로부터든, 그보다는 덜 명확하게 광고주들로부터든 큰 위협을 받게됩니다. 집단이나 사회 또는 언어 내의 동질화는 잔인하게 강제되는미묘하게 강화되든, 결국 다른 것, 즉 ‘타자‘라면 무엇이든 제거하는방향으로 치닫을 수 있습니다. 사회 내부의 다양성 보호는 헌법이 존재하기 훨씬 오래전부터 우리의 유전적 신경다양성 cerebrodiversity에도구현돼 있는 원리입니다. 유전학자와 미래학자는 물론, 보다 최근에는 토니 모리슨이 저서 《타자들의 기원 The Origin of Others》에서 썼듯이.
다양성은 우리 종의 발전은 물론, 우리가 사는 상호 연결된 지구상의삶의 질, 나아가 우리의 생존까지 증진합니다.
이런 중대한 맥락에 비춰볼 때 우리는 언어의 풍부하고 확장적이며 거침없는 사용을 보호하고 보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인간의 언어는 잘 양육되면 무한한 상상 밖의 생각을 창조해낼 가장 완벽한 도구를 제공하는가 하면, 우리의 집단적 지능을 발전시킬 토대를제공하기도 합니다. 그 역도 참입니다. 그 함의를 생각하면 우리 모두 방심할 수 없습니다.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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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는 우리가 말다툼을 하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않고 바라보고 있다가 마침내 한마디 하더군.
"에밀, 내버려둬! 저들이 바로…………."
"저들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에밀은 앙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어.
"변압기 폭파범 말이야, 바로 저들이 폭파범인 게 분명해. 그렇지 않으면 왜 우리를 제비뽑기에서 빼주겠어?"
"아니, 절대 그렇지 않아. 다만 자네들의 아내를 생각해서 살려주고 싶었을 뿐이야!"
네 아버지가 우기자,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지.
"나는 자네들이 진짜 범인이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해. 중요한 것은 독일군의 계략에 말려들어서는 안된다는 거야. 가장 좋은 방법은 독일군 - P79

에게 자네들 전부를 죽이라고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아무도 죽이지 못하게 하는 거야. 자네들 스스로 희생양을 선택한다면 반인륜적 선택을 하도록 한 그들의논리에 덩달아 춤추는 꼴이 되는 거지. 그렇게 되면 도리어 그들의 논리가 정당하고, 그들은 자네들에게 동정을 베푼 셈이 되는 거란 말일세."
다시 구덩이 가에 앉아 베른은 ‘희생양‘, ‘반인륜적선택‘과 같은 단어를 쓰며 거침없이 말을 내뱉었어. 그가 충동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숙고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 그의 말이 얼마나 멋있었는지 지금도 생생하구나.
"아주 속편하게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군. 우리 네 사람 다 죽음의 구덩이로 빠지느니, 한 사람이 희생하여나머지 세 사람을 살리는 편이 훨씬 낫지 않겠어?"
"죽고 사는 일을 타인의 손에 맡기거나, 다른 사람의목숨을 빼앗는 대가로 자신이 살아난다면 인간으로서존엄성을 포기하는 것이고, 악이 선을 이기는 것에 동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네. 악의 편에 있는 독일 군복 - P80

을 입고 있는 나 자신이 부끄러울 따름이야."
이렇게 말한 후 그는 구덩이에서 좀 떨어진 곳으로 가버리더구나. 더 이상 그가 보이지 않았어.
네 아버지는 잠자코 있더니 나무 뿌리를 던져버렸지. 우리 모두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어. 그런데 갑자기 술병이 위에서 굴러 떨어지는 거야. 술병에는독일 곡주가 반쯤 남아 있었어.
우리가 위를 쳐다보니 베른은 벌써 사라져버리고 없었단다. 네 아버지가 "고마워!"라고 소리쳤어. 제일 먼저 술병을 들고 벌컥벌컥 마신 것은 앙리였단다.
날이 어슴푸레 저물어가기 시작할 때 놈들이 다시 왔어. 그래서 시간이 얼마쯤 흘렀는지 대충 짐작할 수있었지. 날이 저물어가는 것과 동시에 우리의 인생도 끝장이 나는구나 하고 생각했단다. 술병에 있던 곡주를 다 마셔버린 지는 이미 오래 전이었어. - P81

아버지! 제가 당신의 여행가방을 가지고 있어요. 지금당신의 여행가방은 릴르를 거쳐 브뤼셀에서 보르도로가는 테제베 기차 선반에 놓여 있습니다. 가방 안에는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정리해놓은 그대로, 크레용이 색깔별로 정돈되어 있고, 레이너 화장품 풀셋트 그리고분이 들어 있어요. 아버지가 무대에서 입던 낡은 광대 의상도 그대로 있구요. 제 직장 동료들인 유럽연합재정부 고위관료들은 제가 들고 가는 여행가방이 무엇이며, 제가 무슨 계획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제가 여자에게 실연이라도 당해 깊은 상처를 입은 나머지 머리가 돌아버렸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들은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으니까요.
아버지! 낡은 광대옷이 들어 있는 여행가방이나 어릿광대 교사, 아버지의 돌출행동들, 그리고 가스똥 삼촌이해준 이야기, 그 모든 것들은 나의 내면 속 장롱 깊숙이숨겨 놓았습니다. 그리고 릴르 역에서 아버지를 끝내 만나지 못한 것에 대한 어두운 기억은 매일밤마다 악몽이되어 저를 찾아왔습니다.
아버지! 이제 그 모든 것을 끄집어내어 먼지를 털어내려고 합니다. 내일이면 한 사람이 판결받게 됩니다. 전쟁 후에 그는 몇 개의 훈장을 받았고, 국가의 고위관리까지 지낸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젊은 시절에 자칭 "프랑스 정부"라고 일컫는 비시 정부하의 보르도 경찰에서 치안 담당 부국장으로 있으면서 범죄를저지르고도, 공복으로서 거역할 수 없는 명령에 따랐을뿐이라며 자신의 잘못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그는 분명히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사람입니다. 비시정부는 실제로 존재했었고, 역사에서 그 부분을 떼어버릴 수는 없기 때문에 그는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사람입니다. 또한 인류에 대한 책임, 인간의 존엄성, 도덕에 따른 행동이 어느 시대의 법률이나 명령보다 우선하기에 그는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사람입니다.
지금 기차는 그 살인자를 재판하는 도시로 저를 싣고 - P98

가고 있습니다. 아버지! 가스똥 삼촌과 니꼴 숙모, 그밖의 전쟁의 고통을 안고 간 영혼들을 대신하여 제가 그재판에 참석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 식인귀는 형편없는 어릿광대 짓을 하며 재판을 하나의 가장무도회로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는 옛날의 적들보다도 더 악랄합니다. 옛날의 적들조차도 인간의 존엄성을 배신하는그의 행동을 보며 그를 혐오스럽게 여길 것입니다.
살인자는 자신이 목숨을 빼앗은 사람들의 삶과 영원한 시간을 대신 누릴 권리라도 있는 양 아직도 자유로운 몸으로 살고 있습니다. 저는 법정이 살인자에게 어떤형벌을 내리는지 보려고 합니다.
빛나는 권위의 상징인 법정이 무고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한을 풀어줄 것인지 보려고 합니다.
피고의 이름이 뭐냐고요? 마치 갑자기 들려온 메아리처럼, 또는 갑자기 얻어맞은 따귀처럼 그의 이름은 거의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내일이 되면 그 이름을 완전히잊어버리고 싶습니다. 다만 그가 앗아간 생명들의 이름만을 기억 속에 간직하고 싶습니다.
내일이 되면 저는 눈에 검은 칠을 하고, 양볼에는 빨간 동그라미를 그릴 것입니다. 내일 저는 밤나무와 자작나무가 우거진 그 숲에서 마지막 미소를 거둔 그들을대신하여 존재하려고 합니다. 아버지, 당신이 그렇게도부활시키고 싶어했던 그 사람들 말입니다.
아버지, 내일 저는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최선을다해서 어릿광대 노릇을 하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그들을 대신하여 그들의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 인간이고 합니다. 믿어 주십시오! 아버지!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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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에 대한 책은 아니지만, 이 글을 쓰는 동안 내가 읽은 것 중에 나는 예쁘지 않습니다」(2018.10)라는 책이 있어. 표지에쓰인 "화장을 지우고 페미니스트가 되다"라는 문구처럼 그책은 자신이 그렇게 된 과정을 보여주는데, 초등학교 때부터외모 때문에 핍박을 당하다가 6학년 졸업 전에 혼자 떠난 캐나다 유학 생활에서는 그런 핍박을 전혀 느끼지 않아 자존감을 회복했다는 내용이었어. 덕분에 나도 앤의 나라인 캐나다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지. 캐나다는 다양성과 개성을 존중하고 외모 평가나 압박은 우리보다 훨씬 덜한 모양이야. 그러나저자는 2년 만에 한국에 돌아와서 또다시 외모지상주의의 지옥 불에 빠졌나 봐.
넷플릭스 드라마 <빨강머리 앤>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중 하나는 앤과 친구들이 한밤중에 숲에 모여 자신의 성과몸을 보호하겠다는 의지로 벨테인 축제를 벌이는 것이었어.
벨테인은 치료와 정결을 상징하는 불을 가운데 두고 동그랗 - P230

게 돌며 춤을 추는 의식인데, 길고 하얀 옷을 입은 소녀들이다 함께 손을 모아 불을 붙이고 돌아가면서 한마디씩 소망을외친 후 반딧불이가 되어 해방의 춤을 추지. 너무나 아름다운 장면이었단다.
벨테인의 여신이자 신성한 어머니, 5월의 여왕님
숲의 야생 사랑과 생명의 수호신 어서 오소서!
강인하고 성스러운 우리 여성들이
이 신성한 밤에 선포하노니
우리 성체는 오로지 우리 것입니다.
스스로 사랑할 사람과 신뢰를 나눌 사람을 택하겠습니다.
품위와 경의를 지키며 살아가겠습니다.
뛰어난 지성을 늘 자랑으로 여기겠습니다.
우리 감정을 존중해 정신을 고양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무시하는 남자는 물리치겠습니다.
우리의 정신은 꺾을 수 없고 상상력은 자유롭습니다.

마침 이 책의 집필을 마치며 밖을 둘러보니 초록이 반짝거리는 5월이 되었더구나. 벨테인 축제를 열기 딱 좋은 시기야. 1나는 너를 비롯한 세상의 모든 딸이 벨테인 축제에 참여한 앤처럼 자신을 당당하게 주장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길 바라. 자기 모습이나 성향을 사람들이 싫어한다고 해도 기죽지 말고 자신을 한껏 드러내는 사람이 되길 바라. - P231

살면서 후회했던 일이 적지 않지만, 내가 그중에서 가장 후회하는 점은 너와 네 동생에게 ‘공부해‘라고 압박하거나 강요한 적이 있다는 거야. 나름으로는 너희들을 자유롭게 키웠다고 자부했던 터이기에 이 책을 쓰면서 매우 괴로웠단다. 늦었지만, 이 아버지를 용서해주기 바란다.
넷플릭스 드라마 시즌3 제9화에는 진보적인 교사 스테이시가 배시에게 ‘교사는 새로운 학생을 만날 수 있지만 부모는학생들처럼 새로운 자식을 만날 수 없고 평생 같이 살아야 하므로 화해하고 살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와. 그 장면은 기숙학교에 끌려가는 카켓을 보호하려다가 부상을 당하고 앤을 찾아온 카켓 부모의 모습, 그리고 그들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하는 앤을 말리는 마릴라의 모습과 매우 대조적이야.
마지막에는 배시가 백인에게는 잘하면서 아들인 자신을 포함한 같은 흑인에게는 모질게 대했던 어머니를 책망하자, 그녀는 ‘백인에게 대들다가 맞아 죽은 남편을 보았기에 아들만큼은 그렇게 되지 않도록 그랬다‘고 울면서 말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드라마를 보는 내내 많이 울었지만, 가장 가슴 아 - P232

팠던 장면은 바로 그것이었어. 배시 어머니가 하는 말을 들으면서 내 부모, 곧 너희 할아버지 할머니를 떠올렸기 때문이야.
이 책의 머리말에서 썼듯이, 이 세상의 모든 아이와 모든사람이 자신이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것을 언제나 자각하고당당하게 살기를 바라. 물론 부모나 가족, 친구나 스승, 지역이나 나라에 대한 관심과 사랑도 필요하지만, 그 모든 것은 당당한나 자신의 존재감 없이는 무의미한 것 아닐까? 당당한 나없이는 그 무엇과도 제대로 관계를 맺을 수 없으니까.
이 새벽에 문득 앤 그림을 그리다가 네게 부탁하고 싶은 말이 떠올라 한 자 적어본다. 네게 뭘 하지 마라, 고 이야기하지않으려고 평생 노력했지만 오늘만큼은 참고 들어주었으면 좋겠구나. 무엇보다 아이를 앤처럼 자유롭게 자라게 해주렴. 공부 잘하고 말 잘 듣는 모범생으로 키우지 마라. 부모 찬스니스펙 조작이니 하는 더러운 짓은 제발 상상도 하지 마. 가난한 집 아이라고 함께 놀지 못하게 하는 비인간적인 부모가 되지 말아라. 마릴라나 매슈처럼 딸도 아닌, 그냥 가족으로 입양한 아이인데도 지극한 사랑으로 키우는 그런 어른이 되어주림. 그들이 앤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고, 당당하게 자라도록 도와준 것처럼 너도 그랬으면 좋겠어.
내가 기억하는 너는 나의 앤이지. 앤과 비교할 것도 없지. - P233

모든 부모에게 그렇듯이 세상에 둘도 없는 딸이고 아들이지.
그 유일성을 지켜주는 게 바로 부모란다. 세상이 요구하는 틀에 집어넣어 인형처럼 만들지 마라. 앤이 인형처럼 변하는 모습은 섬찟하잖아? 그래서 나는 『빨강머리 앤만 좋아하고 그뒷이야기는 싫어했어. 너는 좋은 아내이자 엄마이고 딸이란다.
그러나 앤처럼 언제나 네 유일성을 잊지 말고 살아가길 바라이렇게 긴 편지를 쓴 이유도 바로 그거야. 나도 편지를 쓰는동안 ‘이제 여생을 나의 유일성을 찾는 시간으로 살아볼까‘
생각해보았단다. 그래, 우리 모두 동심으로 돌아가면 세상은좀 더 좋아지겠지? 사랑한다, 딸아, 우리, 앤처럼 살자, 자기만의 삶을 살자, 기성의 속물이 되지 말자, 나를 세우되 남을 돕자, 야만에 맞서 바르게 살자, 그래서 다시 ‘앤‘처럼 살아보자.
앤은 못생기고 충동적이고 때로 거만해. 한마디로 문제아일지도 몰라. 그런데 앤은 계속 문제를 일으키기에 펄펄 살아있어. 앤이 만약 바른생활 어린이였다면 어땠을까. 아마 이런이야기는 나오지 않았겠지. 앤은 어린 반항아이자 그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 어린 아나키스트야. 그래, 뭔가 새로운 게나오려면 그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에이번리도 재미있는 마을이란다. 20세기 초인데도 자동차가 아니라 마차를 몰아. 농부들은 권력과 무관하게 마을회관 - P234

을 중심으로 자치적으로 살아가. 이장이나 동장도 없어. 다들보수적이지만 결국은 진보가 이겨. 세상은 옳은 방향으로 바뀌게 되어 있으니까 마을 사람들도 천천히 변화를 겪고. 물론그들은 자연 친화적이야. 앤을 보렴. 말을 비롯해 모든 동식물과 교감하잖아? 앤이 벚꽃과 교감하던 첫 장면을 떠올리면서나도 이 새벽, 자연을 만나러 간다. 이게 바로 하루의 시작이자 인생의 시작이지. 내가 죽는다 해도 그날 새벽은 오늘처럼여전히 새로운 시작일 거야. 안녕. - P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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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타일은 돌에 끼워져 있고, 영원히는 아니겠지만 무기한으로 거기에 있을 것이다. 이렇게 찾아가서 부모님을 떠올릴 장소가 생겼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기억하는 것, 그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표시하는 것은 중요하다. 나는 잊을까 봐 걱정하고, 그래서 잊지 않도록 기억을 환기시켜주는 것들을 간직한다. - P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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