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되지 않더라도
김동영 지음 / arte(아르테)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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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자 프로이트는 '정상'이란 약간의 강박증, 약간의 편집증 그리고 약간의 히스테리가 있는 상태라고 말했다. 쉽게 말해, 특정한 것에 집착도 좀 하고, 망상도 좀 하고, 정신적 아픔으로 인해 신체적으로도 고통을 앓는 것이 바로 인간 본연의 '정상적' 심리 작용이라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정신분석학을 탄생시켰던, 19세기 특유의 억압적이던 시대가 무려 200여년 가량이 지났다. 아마, 21세기 현대인들에게 맞춰 '정상'의 정의를 다시 수정하다면 아마 이럴 것이다.


약간의 불안, 약간의 우울증, 약간의 공황장애.


무엇인가 되어야 한다는 주변의 기대, 하지만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무한경쟁사회, 그 과정 하에서 '나'는 오히려 그 무엇도 되지 못하고 달팽이마냥 두꺼운 외피 속 말랑한 실존을 보호하려 몸서리칠 뿐이다. 북유럽의 어떤 우울한 철학자는 절망이란 죽음의 이르는 병이라고 했다던데, 이 나라는, 이 사회는 절망이라는 페스트가 돌아다니고 있는 중세 유럽의 도시마냥 생기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겨내야 한다. 다행히도 인간의 나약한 실존을 보듬기 위해 '글'이라는 것이 주어졌고, 누구보다 더 격한 고독과 불안의 떨림을 이겨낸 인생 선배들이 어떻게든 꾸역꾸역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만한 글들을 몇 줄씩 남겨놓았다.


에세이 「무엇이 되지 않더라도」는 누구보다 처절하게 존재의 불안과 맟서야했던 한 40줄에 들어서는 남성의 자기 고백서다. 중간중간 여행기를 담아내지만, 액자 속에 담긴 스틸 사진 마냥 철저히 배경으로 남을 뿐, 초점은 그의 성찰과 되뇌임에 맞춰져 있다.


이 책의 저자, 생선 김동영 작가는 여러 여행 에세이를 펴낸 사람이라고 한다. 독서 관련한 팟캐스트를 운영하고 있다던데 솔직히 들은 적은 없다. 여러모로 배경지식이 없지만, 이 책을 통해 두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이 여행을 많이 다녔다는 것, 그리고 그에겐 여행이 아니고선 씻어낼 수 없는 큰 불안과 우울, 그리고 슬픔이 있다는 것.


여행 에세이를 읽다보면 그곳에 가고 싶어지거나, 저자의 여행 스타일을 닮고 싶어진다. 이 책을 평하자면 후자쪽. 그러나 그의 여행 스타일에서 느껴지는 짙은 불안과 우울의 그림자는 멀리하고 싶다. 역마살(驛馬煞)이 끼었다고 하나? 처음엔 남들 같이 사진도 찍고 랜드마크를 꼭 들러야했던 풋내기 여행자 시절을 지나, 어느새 가장 마음에 드는 카페를 하나 정해 거기서 글을 쓰며 장기투숙을 하는 글쟁이 노마드로 변해가는 과정을 동경하다가도 어딘가 정을 둘 수 없는 그의 상실감과 부유감에 가슴이 저렸다.


차라리 이 책은 에세이라기보단 철학서에 더 가깝다. 어떻게 자신이 살아왔는가, 그리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스스로에게 묻고 스스로가 답한다. 다만, 언어가 그리 철학적이고 사변적이진 않다. 쉬운 언어, 읽히는 언어를 통해 독자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그가 그만의 내밀한 여행을 통해 줏어모았던, 그만의 내밀한 상처를 통해 아로새겨질 수밖에 없었던 그의 체험과 잠언이 담긴 보따리를 한아름 선물해준다.


이 책을 통해 그의 빈 공간, 그리고 망각하고 싶은 괴로운 기억들이 오롯이 노출된다. 하지만 그의 상실은 여행을 통해 새로운 감각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이 되고, 그가 잊고 싶어하는 스스로의 아픔은 새로운 인연의 새겨짐 속에 어느덧 견딜만해진다. 잃는만큼 채워지고, 잊는만큼 새겨지는 삶의 전환. 아마 그의 여행이 지금까지 그치지 않고, 그의 글이 울림이 있는 것은 그 탓일 것이다.

비록 지금 우리는 이렇게 초라하고
앞으로도 계록 이런 식으로 대책 없이 살아갈지도 모르지만
모두 우리가 선택한 것이니까
후회하지 않고 지치지 않고 의심하지 않으며
우리는 그렇게 잘 살고 싶다. - p.41

언젠가부터 여행은 내게 산소통이 되었다. 그 산소통에서 산소를 조금씩 빼 마시며 나는 일상이라는 거친 바닷속에서 살아갈 수 있었다. 여행은 중독이라고 했다. 한번 중독되면 독이 빠질 때까지 길 위를 헤매야 하는 것이다. - p.105

여행을 통해 무엇을 얻고 싶지도 않다. 그저 길을 갈 뿐이다. 거기서 얻은 게 있고 느낀 게 있다면 그건 대부분 여행 중이 아니라 여행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와 어렴풋이 느낀 것이리라. 여행 중에는 정작 모른다. 여행은 온전히 받아들이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 p.123

난 나름대로 당신들 없는 세계에서 잘 지내보려 분투 중이다. 아직은 견딜만 하다. 좋은 날도 있고 힘든 날도 있지만 좋은 사람들이 곁에서 날 다독여주고 있으니, 나는 당신들이 항상 대견해하고 좋아해주던 모습으로 살아갈게. 그러니 어디에 있든 편히 쉬어.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보고 싶어. - p.211

나는 제대로 된 어른이 되고 싶다.
지나온 시간만큼 넓고 깊어져
모든 강과 시내를 받아들이는 바다처럼 되고 싶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 어쩔 수 없이 꼰대가 되더라도
괴물은 되고 싶지 않다. - p.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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