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의 높은 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1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포르투갈의 높은 산


인간은 매번 상실을 겪는다. 상실을 애도하는 방법은 각기 다르다. 누군가는 엄숙한 장례식을 통해 죽은 이를 떠나보내고, 누군가는 멈추지 못하는 식욕을 통해 변심한 애인을 떠나보내기도 한다. 어떤 방식으로든 누군가를 ‘떠나보내기’를 성공하기만 한다면, 그때부터는 새로운 삶이 시작되기에 우리는 필사적으로 누군가의 빈자리를 메우려고 한다. 하지만 종종 극복할 수 없는 상실과 메울 수 없는 빈자리가 있기 마련이다. <파이 이야기>의 저자로 유명한 얀 마텔의 신작 <포르투갈의 높은 산>은 너무나 큰 상처로 인해 자신을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원망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자, ‘포르투갈의 높은 산’으로 대표되는 영적-치유적 공간으로 자신도 모르게 향하는 자들의 이야기다.


<포르투갈의 높은 산>의 등장하는 세 남자, 토마스-에우제비우-피터 토비 모두 사랑하는 이들을 죽음으로 읽은 뒤 고통스러움에 몸부림치는 사람들이다. 1901년 리스본 사람인 토마스는 뒤로 걷는 걸로 슬픔을 표시한다. 세상에게 반기를 들고 자신의 아내와 아들을 앗아간 신께 복수하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숙부에게 자동차를 빌려 포르투갈의 높은 산으로 향한다. 1939년 포르투갈의 높은 산 인근 브리간사에 사는 에우제비우는 병리학자로, 자신과 비슷하게 사랑하는 이를 상실한 슬픔을 온몸에 새기면서 살아갔던 이의 시체를 해부하면서 비로소 안식을 얻는다. 마지막 1980년대 캐나다 상원의원을 하던 피터 토비는 아내의 죽음 이후 침팬지 ‘오도’를 입양한 뒤 포르투갈 높은 산에 있는 고향집으로 이주하는 걸로 자신들의 버틸 수 없는 슬픔에 대처한다. 80년이 넘는 시간과 포르투갈의 높은 산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얽히고설킨 그들의 슬픔의 직물은 단순히 개인의 비극을 넘어서 언제나 고통과 슬픔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을 상징하는 것 같다. 그와 동시에, 그 절망이라는 진창 속에서 구원을 찾기 위해 신의 그림자를 좇는 인간의 노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1부는 배경이나 소재 자체에서 파스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가 떠올랐다. 일상이 낯설어진 한 남자가 우연히 발견한 일기장의 주인을 찾아 여행한다는 내용과, 자신의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 14세기에 있었던 신부의 일기장을 토대로 신부가 남긴 유물을 찾기 위해 여행한다는 소재에서 어떤 공통점을 보았다. 하지만 차이점도 존재한다. 전자가 타인의 시선에만 신경 쓰다가 ‘나’를 잃어버린 어느 중년의 일탈이라면, 후자는 절절한 슬픔 끝에 신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던 이의 복수극이라는 점이다. 또한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그 자체로 완결이 되지만, <포르투갈의 높은 산> 1부는 그 말대로 1부이며, 이후의 2-3부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다른 점을 찾을 수 있다.

3부에서 캐나다의 상원의원인 피터 토비가 침팬지 ‘오도’를 입양하고 공존하는 부분은 어쩔 수 없이 얀 마텔의 대표작인 <파이 이야기>를 생각나게 했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인간과 동물 사이의 교감이 묘사되며, 서로의 존재를 의지함을 통해 한계 상황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이 많이 닮았다. 그러나 확실히 ‘호랑이 리처드 파커’와 ‘침팬지 오도’는 위협과 공포 수준이 다르다. 으르렁거리면서 언제 내 목을 물어뜯을지 몰라 계속 감시해야했던 리처드 파커와 달리, 오도는 인간의 언어와 상호작용을 부분적으로나마 이해하도록 훈련 받은 존재다. 다만, 오도에게 남아 있는 ‘야생적 감각’은 과거-현재-미래 사이에서 계속 염려하고 후회를 반복하고 있던 피터 토비에게 지금, 현재에 집중해야한다는 깨달음을 준다.


이 책의 전체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종교적 코드는 신앙이 없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불편하게 느껴지기 보다는 더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줄 것 같다. 이러한 상실의 고통 앞에 ‘신’은 무슨 역할을 하며, 이 슬픔 속에 나를 방치하는 ‘신’은 과연 믿을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여러 질문이 떠올리게 하는 여러 장면들이 소설 속에서 지나가던 와중에 나는 한 가지를 깨달았다. 세상에 죽지 않는 사람은 없고, 상실은 일상으로 느껴질 정도로 잦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 슬픔에 빠져서 살아갈 순 없다. 아마 <포르투갈의 높은 산>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자세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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