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파이 이야기 (특별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토미슬라프 토르야나크 그림 / 작가정신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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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이야기 (일러스트 파이이야기) : 절망 속에서도 운명을 사랑할 힘


몇 달 전 쯤, 영어 공부 삼아 파이 이야기(Life of Pi)를 영어판으로 읽으려고 했다. 100쪽 쯤 넘겼을까?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그 후 어쩌다보니 다시금 이 책이 내 손으로 왔다. 익숙한 한글과 생상한 일러스트와 함께 말이다. 번역에 대해서는 아주 사소한 불만사항이 있는데, ‘기니피그돼지쥐로 번역한 것이다. 전국의 수만 기니피그 주인들이 들고 일어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기니피그에 대해 의약품 실험 등에 주로 쓰이는 쥐의 종류라고 적어놨던 주석과 비슷한 정도의 충격이다. , ‘미어캣미어고양이라고 하지 그랬나?


파이 이야기에서 기니피그보다 좀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종교에 대한 관점이다. ‘파이 이야기를 짧게 요약한다면, ‘태평양에 조난된 소년, 그를 구한 건 신앙이었을까?’로 이야기할 수 있겠다. 종교라는 모티브 아래에서 파이 이야기는 성경에서 신을 거부하다 고래 뱃속으로 들어간 요나, 신을 잘 믿다가 뜬금없는 재앙 속에도 신앙을 지키는 욥, 전쟁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온갖 신화 속 존재들과 마주하는 오디세우스와 궤를 같이 한다. 하지만 이 청년은 크리슈나(힌두교 신)과 예수, 알라 모두 섬긴다는 점이 좀 특이할 뿐이다.


동물학과 종교학을 복수전공 할 만큼 상당히 특이한 정신세계를 자랑하는 이 파이라는 인물은, 어린 시절 겪었던 그 끔찍한 사고와 조난의 경험 때문에 저렇게 된 건지, 아니면 저런 정신세계를 가졌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고민하게 될 정도의 통합적 신앙심을 자랑한다. 아마 당신이 신학이나 종교학 관련 수업을 듣고 있다면 교수님께 파이 이야기에 대해서 물어보라. 죽음과 맞닿은 그 순간마저도 신을 찾는 쪽을 강조하느냐, 여러 종교를 두루 걸친 바람둥이 기질을 언급하느냐로 그 교수님의 성향을 리트머스 종이 마냥 판별할 수 있을 테니.

p.318 절망은 빛이 드나들지 못하게 하는 무거운 어둠이었다. 그것은 이루 표현 못 할 지옥이었다. 그것이 늘 지나가게 해주시니 신께 감사하다. 다시 매달라고 아우성치는 매듭이나 그물 주변에 물고기 떼가 나타났다. 내 가족 생각을 했다. 그들이 이런 무시무시한 고통을 당하지 않아도 되는 것에 대해서도. 어둠이 휘휘 젓다가 결국 물러갔고, 그때마다 신은 내 마음에 환한 빛으로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는 계속 사랑하면 됐고.

개인적으론 이 책이 소설이라기보다는 실용서적, 아니 조난 시 생존을 위한 필수 교범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포스터의 날렵하게 생긴 인도 소년과 우람한 벵골 호랑이를 보고서 알라딘같은 판타지 활극을 상상했다면, 그 대신 파이의 베어그릴스 뺨치는 처절한 생존 사투를 볼 수 있다. 영화는 생략이라는 구명보트가 있지만, 소설에는 그런 거 없다. 파이가 느꼈을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과정을 실감나게 느낄 수 있다. 당신이 고시원 보다 위 아래로 조금 더 긴 보트 안에 냉장고만 한 호랑이와 함께 출렁이는 파도를 느낀다고 상상해보라! 와우!

p.157 "내 동물 가족은 어떻게 되는 거야? 새, 야수며 파충류들은? 다 물에 빠져 죽었어.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하나도 남김없이 죽는구나. 왜 이래야 되는지 설명도 듣지 못하고? 천국에서 오는 설명도 듣지 못하고 지옥을 겪으며 살라고? 그렇게 되면 이성이 뭐 하러 있는 거냐구, 리처드 파커? 이제 이성은 실용성보다 - 음식과 옷과 쉴 곳을 얻는 것보다 - 빛나지 않는 거야? 왜 더 위대한 대답을 주지 못하는 거야? 한데 왜 우리는 대답을 끌어낼 수 있는 이상으로 질문을 하는 거지? 잡을 고기가 없는데 왜 그렇게 큰 어망을 갖고 있냐구?"

p.358-359 "사랑한다!"

터져 나온 그 말은 순수하고, 자유롭고, 무한했다. 내 가슴에서 감정이 넘쳐났다.

"정말로 사랑해. 사랑한다, 리처드 파커. 지금 네가 없다면 난 어째야 좋을지 모를 거야. 난 버텨내지 못했을 거야. 그래, 못 견뎠을 거야. 희망이 없어서 죽을 거야. 포기하지 마, 리처드 파커. 포기하면 안 돼. 내가 육지에 데려다줄게. 약속할게. 약속한다구!"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호랑이 리처드 파커를 사랑하고, 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운명마저 긍정하는 그의 모습에서 진정한 ‘Amor Fati(운명애)’를 볼 수 있었다. 나도 파이처럼 배가 난파되어 온 가족과 가족과도 같았던 동물들이 모두 물속에 가라앉은 상황을 견뎌낼 수 있을까? 200여일을 태평양에서 호랑이를 돌보며 살아갈 수 있을까? 아마 신이 돕지 않고서야 불가능할 것이다. 아니, 신이 돕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선 불가능했을 것이다. 마치 죽음의 독가스를 앞두곤 신외엔 부르짖을 곳에 없었을 아우슈비츠 수용소 속의 유대인들처럼 말이다.

p.149 예상대로 풀리지 않는 세상일을 우리가 어쩔 수 있을까? 다가오는 삶을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해 살 수밖에 없는 것을.

p.227-228 "난 죽지 않아. 죽음을 거부할 거야. 이 악몽을 헤쳐 나갈 거야. 아무리 큰 난관이라도 물리칠 거야. 지금까지 기적처럼 살아났어. 이제 기적을 당연한 일로 만들 테야. 매일 놀라운 일이 일어날 거야. 아무리 힘들어도 필요하다면 뭐든 할 테야. 그래, 신이 나와 함께하는 한 난 죽지 않아. 아멘."

어찌 보면 우리의 일상 자체가 구명보트에 의존하는 위태로운 항해다. 존재라는 부실한 구명보트에 고난이라는 파도, 공포라는 호랑이살아가는 순간순간마다 권태와 공포 사이에서 담금질을 당함에도 불구하고 살아남는다. 신의 은총일 수도, 노력의 보상일 수도 있다. 어찌되었든 당신도 당신의 인생을 긍정할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애석하게도 앞으로도 조난은 계속될 것이다. 파이가 태평양을 헤맨 200여일마냥. 그러나 하나 확실한 것은, 파이 같이 당신에게도 구원의 빛이 언젠가는 닿을 것이라는 점이다. 살아만 남는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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