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나의 시민들 슬로북 Slow Book 1
백민석 글.사진 / 작가정신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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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에 대해서 당신은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있을까? 캐리비안 해에 있는 멋진 섬나라라는 건 어디서 얼핏 들었을 것이다. 혁명가 체 게바라, 독재자 피델 카스트로, 훌륭한 몇몇 야구 선수들 정도면 양호하다. 당신이 시사나 역사에 좀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3차 세계 대전 직전까지 몰고 갔던 쿠바 핵미사일 배치라던가 아직 오바마가 대통령이던 시절 미국과의 오랜 적대를 멈추고 국교를 맺었던 것도 알 것이다. (그리고 트럼프가 그것을 얼마나 고까와 하는 지도.)


만약 당신이 문화적 소양이 깊다면, 혁명 이후 자취를 감췄던 쿠바 음악인들의 열정적 공연을 담아낸 빔 벤더스 감독의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을 떠올릴 것이다. ('석봉아'로 유명한 밴드 불나방 스타 쏘세지 클럽의 이름이 여기서 왔다.) 애연가라면 쿠바산 시가도 빼놓을 수 없다. 물리적·정서적 거리에도 불구하고 당신 일상엔 이미 쿠바의 편린(片鱗)들이 흩날리고 있다.


이렇게 드문드문 떠다니는 조각들로 한 나라를 파악했을 때의 폐해는,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판단했을 때의 문제점과 유사하다. 상대방을 '일상을 영위하는 존재'가 아닌, '일탈적 존재'로 파악하고 자신의 고정관념에 맞는 행동을 해주길 기대한다. 라틴 박자의 맞춰 춤추는 쿠바인, 야구를 잘하는 쿠바인, 시가를 입에 문 쿠바인, 체 게바라와 카스트로의 후예로 혁명을 부르짖는 쿠바인! 오호, 마치 스타크래프트를 미친듯이 잘하고, 수학과 과학에 재능을 보이는 샤이한 한국인들을 보는 기분이랄까.


p.31 아바나에서 밤낮의 바뀜은 이데올로기적이다. 당신은 현대의 아바나에서 사회주의와 자유주의가 동시적 세계를 이루고 있을 가능성을 생각지 못했기 때문에, 눈앞의 현실을 초현실적인 마주침, 경이로 받아들었던 것이다.


백민석 작가의 <아바나의 시민들>은 이러한 기존의 쿠바인들에 대한 편견을 배반하지도, 그렇다고 계승하지도 않는 '날 것 그대로'의 여행기다. 사회주의와 자유주의의 묘한 긴장 사이, 온전한 통제도 그렇다고 완전한 자유도 영위하지 못하는 경계의 나라 쿠바의 매력이 듬뿍 담겨 있다.


p.136 당신이 좋았냐고 묻자 아바나에는 뭐 볼만한 자연경관이 없잖아, 라고 했다. … 아바나의 진정한 볼거리는 자연경관이나 유적보다 길거리를 걸어 다니는, 아바나의 현재를 구성하는, 과거를 짊어지고 미래를 향한 시민들인데.


이 책에서 작가는 '당신'이라며 독자에게 말을 건다. 하지만 사실상 이 '당신'은 작가 자신이다. 자신의 경험에 2인칭을 덧붙여 우리를 쿠바의 아바나 시 어딘가에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거기에 더불어 생생한 사진들이 완벽한 짝을 이룬다… 기계 눈으로 포착한 사진들에 작가의 덤덤한 듯 자상한 설명이 덧붙여 지며, 나는 어느새 가보지도 않은 쿠바를 그리워하게 되었다.


p.155 쿠바에서는 스펙터클한 대자연의 장관이 언제나, 다양하게 펼쳐진다. 당신이 알던 그 태양이 아니고, 그 구름이 아니고, 그 파도가 아니고, 다신이 알던 그 하늘이 아니다. 아바나에서 황도를 가로지르며 당신의 정수리를 태우는 그 태양은 전혀 새로운 태양이다. 쿠바는 햇볕이 강하고 대기오염이 적은 탓에, 카메라로 피사체를 겨냥할 때마다 명암의 멋진 대비를 맛볼 수 있다. 누군가의 말처럼 셔터만 눌러도 사진이 되어 나온다.


강렬한 태양, 맑은 하늘, 그리고 바다와 사람들… 피사체들에 목마른 사진가들에겐 쿠바의 아바나는 천국과 같은 곳일 것이다. 다만, 백민석 작가가 포착하려는 것은 쿠바는 배경 앞 멋진 모델들의 전경도, 유명한 유적지와 관광지도 아니다. 그는 사진을 통해 이곳에서 퇴색해버린 도시와 다양한 인종들이 자아내는 미묘한 감상들을 포착하려고 애를 쓰며, 그 간격을 통해 삶에 대한 통찰 또한 제시한다.


p.309 중요한 것은 결과보다는 생산의 실천에 익숙하다. 아바나의 시민들이 어딘지 모르게 당신보다 행복해 보인다면, 이 때문일 수 있다. 그들은 우연히도 대중매체가 시원찮은 아바나에서 태어나 살게 되었고, 필연적으로 문화의 소비자가 아닌 생산자가 되어야 했던 것이다.


누군가에겐 쿠바가 그저 먼 나라이고, 어떤 관광객에겐 쿠바는 그저 와이파이도 잘 안 터지는 불편한 나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백민석 작가는 그 불편함에서 오히려 즐거움과 행복을 본다. 대중매체가 시원찮아 스스로 즐거움을 생산하게 된 쿠바인들은 지금 우리가 산업화를 거치며 어느새 잃어버린 '생산'의 기쁨을 누리고 있다. 


p.233 당신이 한국에서와 똑같이 생활하고 싶다면, 아바나가 싫어질 것이다. 당신의 영혼이란 변화를 싫어해 습관과 규범에 묶여 있고, 귀가 얇아 통념에 휘둘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코디네이터의 말처럼 이런저런 영혼의 족쇄를 훌훌 벗어던질 수 있다면, 당신은 아바나에서 즐거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물론, 자본의 힘을 빌어 더 나은 일자리를 얻고, 더 많은 상품을 소비하는 것도 나쁘진 않은 일이다. 허나 그 과정에서 내가 왜 살아가는지, 어떤 것에 기쁜지조차 사유할 기회조차 잃어버린다면 그만큼 애석한 일이 있을까? 혹 당신이 그런 처지에 놓여있다면, 아바나의 시민들의 삶은 당신을 회복시킬 실마리를 제시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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