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터의 꽃
김옥숙 지음 / 새움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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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터의 꽃 : The Life Must Go On


1. 아무리 모진 일이 있어도, 다시 살아나는 뿌리처럼

우리 민족은 종종 민초(民草)라 불린다. 그 이유는 질긴 생명력을 지닌 풀처럼, 외세의 침략 등으로 인해 국가가 무너진 상황에서도 끈질기게 삶을 유지해서다. 그러나 민초의 자생력이 곧 국가 붕괴를 정당화 시켜주지 않는다. 그리고 자생력이라는 이름 아래 감추어진 멸시와 착취의 서사 또한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김옥숙 작가의 흉터의 꽃은 흉터로 상징되는 원자폭탄에 따른 피해에도 불구하고 인생이란 꽃을 피워낸 민초들에 대한 찬사를 담은 책이면서, 동시에 그 지옥 같은 삶에서 표출되는 한국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고발하는 작품이다.


2. 버림받은 국민, 외면 받는 인생

흉터의 꽃은 액자식 구성으로, 아버지의 고향 합천에서 왜 이토록 원폭 피해자가 많은 지에 대해 취재하며 소설을 써내려가는 정현재와, 4대 째 원폭으로 인해 고통 받는 강분희, 박인옥의 한 많은 삶이 교차되며 진행된다. 처음엔 왜 강분희의 아버지인 강순구가 왜 일제강점기에 고향 합천을 떠나 히로시마에 온 가족을 끌고 갈 수밖에 없었는지를 보여주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국민을 지켜주지 못하는 국가, 아니 생존조차 할 수 없도록 철저히 버려진 국민의 모습을 보여주며 실패한 국가 조선과 제국주의 일본에 대해 분노하도록 이끈다.

그러나 이 책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원자폭탄으로 인해 얼굴의 반이 화상을 입어 일그러진 분희를 괴롭히는 건 일본인도 아니고, 해방 뒤 그녀가 돌아간 조국 대한민국이다. 그녀를 손가락질하며 비난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이웃들이 아닌, 그녀의 남편과 시댁 식구들이다. 피폭으로 인해 약해진 몸으로 낳은 아이들이 얼마 안 지나서 죽어버리면 모든 비난은 아내의 몫이다. 남편이라는 작자들은 술에 취해서 때리거나 돈 내놓으라고 성화다. 작가는 한국의 가부장주의가 유독 여성 원폭 피해자들에게 더욱 가혹한 환경을 만든 것을 고발한다.


3. 원자폭탄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사랑뿐이다

침략 전쟁을 일으킨 전범국 일본, 동아시아 내에서 입지를 잃지 않기 위해 원폭을 터트린 미국, 자국 원폭 피해자들을 돌봐주기는커녕 무시로 일관한 대한민국, 원폭 피해자들을 멸시하고 심지어 폭행을 일삼는 가족들. 흉터의 꽃에서 보여주는 현실은 절망적이다. 하지만 절망 속에서도 그들은 사랑 하나만으로 극복하고 일어선다. 우리는 항상 사랑 받을 수는 없다. 그러나 상대방을 언제나 사랑 할 수는 있다. 사랑 받는 객체에서 사랑 하는 주체로서의 발돋움, 그 과정에서 불완전한 자기 자신까지 사랑하게 되는 기적을 이 책에서 볼 수 있다.

에리히 프롬이 말했듯, 사랑은 기술이다. 사랑은 다른 사람이 주는 선물이 아니라, 나의 행동이다. 앞에 말한 가부장주의라는 권위주의적이고 가족구성원을 착취하는 문화에 젖어 사랑하는 능력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작품 곳곳에 등장한다. 역설적으로, 원폭 피해로 인해 육체적인 한계가 명확한 이들이 더욱 사랑하면서 살아간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조금이나마 이웃에게 기여하려며 살아간다. 원자폭탄이라는 저주의 사슬을 끊어버리는 건 완벽한 치료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 주위를 사랑할 수 있는 힘이라는 것을 흉터의 꽃은 보여준다.


4. 어떠한 일이 있어도,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자신의 연약한 신체에도 불구하고 원폭 피해자들의 참상을 알리려고 노력한 고 김형률 씨야말로, 이런 사랑의 힘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람이다. 원폭 2세 피해자로 촛불처럼 간신히 삶의 불꽃을 지키던 그가, 횃불 같은 열정으로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외치는 장면이 바로 이 소설의 백미라고 본다. 비단 원폭 피해자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는 삶을 지속할 수 없도록 하는 수많은 비극들이 있다. 각자 비극의 당사자이기도 한 우리가, 그 고통을 나누고 서로 사랑할 수 있도록, 그래서 어떠한 일이 있어도 삶이 계속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p.191 "뿌리만 살아 있으마, 살아갈 수 있는기라. 내 말 무슨 말인 줄 알제?" … "아무리 모진 일을 당해도, 뿌리라도 살아 있으마 된다, 분희야."

p.68 원폭이 터지는 꿈을 꾸는 모양인지 누군가 고함을 질렀다. 비통한 여자의 울음소리도 들려왔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울려 퍼지는 울음소리는 기괴하고 음산했다.
영문도 모른 채 졸지에 당한 일이었다. 개미나 벌레보다 못한 목숨. 폭우에 휩쓸려 내려가는 풀포기보다 하찮은 것이 사람의 목숨이었다. 강순구는 살아오면서 남들에게 무슨 해코지라도 한 일이 있었는지 되짚어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떠오르지 않았다. 단지 목숨 하나 부지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온 죄밖에 없었다. 모든 것을 도둑맞고도 넋을 놓고 있는 바보 천치 같은 나라, 저만 살겠다고 자식을 내팽개친 부모 같은 나라, 조선의 백성으로 태어난 게 죄라면 죄였다.

p.447 인간이 하는 행동 중에 가장 어리석고 끔찍하고 추한 것이 바로 전쟁이라면 인간이 할 수 있는 행동 중에 가장 아름다운 것은 바로 사랑이 아닐까. 사랑만이 전쟁과 죽음을 이길 수 있다. 사랑은 원자폭탄보다 힘이 세다. 사랑만이 원자폭탄을 이길 수 있다. 오직 사랑만이.

p.393 삶은 금방 깨지는 유리컵처럼 연약했다. 살아 있는 순간만이 유일한 진실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 있다는 것, 살아서 밥을 먹고, 살아서 노래를 듣고, 살아서 내 옆에 있는 사람들과 한 시간이라도 더 마주 보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 일인지를 새삼 실감했다. 누군가를 보살펴줄 힘이라도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p.287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을 존재 자체로 인정해주고 사랑해주는 것밖에 없다는 말이었다. 그 사람이 존재했던 시간, 그 사람과 함께했던 시간만이 강분희 할머니에게는 살아 있던 유일한 순간이었다는 말임을 나는 겨우 이해할 수 있었다. 아, 어쩌면 강분희 할머니는 이 길고 긴 이야기를 통해 박동철이라는 한 남자에 대한 고백을 한 건지도 몰랐다. 나를 사람 대접 해줘서 고마웠노라고, 사랑해주어서 고마웠노라고, 나를 살 수 있도록 해줘서 고마웠노라고. 어쩌면 박동철과 강분희 이 두 사람은 그 원폭의 지옥 속에서도 죽지 않는 꽃 한 송이를 피워낸 것인지도 몰랐다. 시들지 않는 노란 꽃송이 하나, 죽지 않는 꽃, 그것은 사랑이었다.

p.421-422 "고통을 겪은 자만이 그 고통의 진가를 알 수 있습니다."
… "고통은 고통을 겪은 당사자만이 해결할 수 있습니다. …… 원폭 피해 당사자인 우리들이…… 스스로 문제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싸워나갈 때…… 비로소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습니다."
"…… 다시는 이 땅에 핵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은 없어야 합니다. …… 어떠한 일이 있어도…… 우리 원폭 2세 환우들의 삶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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