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솔지 소설
손솔지 지음 / 새움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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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상 같은 지옥, 일상 없는 지옥

1. 우리가 평소에 누리고 있는 일상이라는 것은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가? 출퇴근을 위해 버스를 타고, 식사를 하고, 친구들과 카톡을 하는 게 일상이라고 한다면, 그 일상은 팔이 부러지거나 감기에 걸리거나, 심지어 전날에 잠을 설쳤다는 이유만으로도 쉽게 붕괴하곤 한다. 하지만 그 일상이 주는 편안함과 익숙함이 너무 달콤하기에, 우리는 그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서 사회의 비극들을 외면하고, 현재 누리는 얄팍한 이권들을 부여잡기 위해 발버둥을 친다.

하지만 누군가에겐 그 일상이라는 것이 탈출하고 싶은 지옥이다. 여성, 외국인, 입시생, 취준생이 사회에서 어느새 약자가 되어 그 존재만으로 절망의 구렁텅이 속을 헤매는 자들은 우리 시야의 밖에서 그들의 울분을 삭히고 있다는 건 사회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들을 착취하는 것 또한 이 시대의 약자이며 결국 약자들이 더 약한 자를 잡아먹는 정글의 모습이다.

2. 손솔지 작가의 단편 소설집 는 그런 사각지대의 약자들, 그래서 일상적인 지옥을 체험하는 이들에 대한 르포라 말할 수 있다. 주인공들은 부모에게 버림받거나 차라리 버림받았으면 하는 이들이다. 시작부터 불행한 이들이었기에 그들이 현재 처한 상황도 그다지 희망적이지 않다. 그런 인간 군상들의 처절한 일상을 활자 속에 꾹꾹 담아놓았다. 읽다보면 내 삶과 그 주변에서도 발견되는 구조적 학대와 트라우마의 조각들을 마주하게 되어 불편할 것이다.

이 책에 수록된 8개의 단편들은 한국사회의 만연한 약자에 대한 혐오와 착취의 굴레, 속칭 왕따의 메커니즘을 각기 다른 시점에서 조망한다. 절망 속에서도 피어나는 한 떨기 희망의 꽃을 노래하다가도, 장마철 자취방 벽면을 점령한 곰팡이 마냥 다시금 피어오르며 자신의 존재감을 떨치는 이 세계의 비극들을 조명한다. 단편집이라고 생각해서 가볍게 집었다가는 자신의 멘탈이 부숴져 가볍게 흩날리는 경험을 할지도 모른다.

3. 그렇다면 우리는 이 혐오와 증오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 책에 등장하는 이들은 사람에게 상처를 받지만, 동시에 사람에게서 구원을 받는다. 필연과 같은 우연이 반복되며 운명적인 만남으로 그들을 이끌어주는 것이다. 그 끝에는 가족 혹은 가족과 진배없는 이들과의 재회로 이어지기도 하고, 새로운 인연이 맺어지며 자신의 상처를 보듬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완벽한 치유는 아니다. 우리는 종종 떠오르는 기억들에 맞서 싸워야 한다.

그 기억들은 고통이면서 동시에 증거이기도 하다. 앞에 말했듯, 우리의 일상이 얼마나 취약한지에 대해 종종 우리는 잊곤 한다. 일상을 잃는 데는 내 존재의 아주 작은 일부가 상처 받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일상이 지옥 같았던 이들이 그들의 일상을 회복하기 위해선 누군가의 죽음이 필요하다. 그것이 상징적 죽음이든 물리적 죽음이든, 그 죽음마저 극복한 이후에야 그들은 일상이 회복된다. 그렇기에 그들을 옥죄는 죽음의 공포와 학대의 기억마저 일상의 회복과 앞으로 보장될 평범한 일상에 대한 증거인 것이다.

4. 소설집 에 있는 8개의 단편 중 는 다른 단편들에 비해 이질적이다. 단편소설이라기보다는 작가 개인의 이야기를 담은 에필로그라고 봐도 될 정도다. 소설을 빙자한 에세이에서, 주인공은 어떤 봄, 제주도를 향해 항해하던 어떤 선박에서 일어난 비극과 집권 세력의 무능, 그리고 그것에 대한 합당한 분노에 대해 침묵과 망각을 강요하는 세력에 대해 말한다. 또한, 그 세력들을 결국 패퇴시켰던 소시민들 간의 촛불의 연대에 대해서 말한다.

왜 작가는 이 8개의 단편 중 마지막에 이것을 배치했을까? 그전까지 단편들에서 작가는 질문을 던져왔다. 당신들이 보는 이 약자들의, 고통 받는 자들의 삶에 대해서 당신은 어떤 느낌이 드는가? 이들이 구원받기 위해 필요한 것은 과연 무엇인가? 아마도 작가는 일상이 지옥인자들, 그리고 일상을 잃어버린 자들에 대한 연민 그리고 연대만이 그 지옥 속에서 그들을 이끌어내고 동시에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길임을 제시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p.238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우리가 얼마나 깊이 가라앉고 있는지를. 불 꺼진 암흑 같은 마음속에서 어떻게 일어서야 하는지도 우리는 배운 적이 없었다. 더 이상 뉴스에서 기대하는 소식을 듣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사람들은 불처럼 번지는 마음속 분노와 설움을 잊기 위해서 불에 탄 부분을 싹둑 잘라냈다. 평소처럼 하루하루를 견디며 살기 위해서는 더 이상 연명하는 데에 쓸데가 없고 타기 쉬운 말랑한 부분부터 잘라내야 했다. 그중 하나가 희망이었다.

p.240 나는 절대로 남이 되어보지 않고는 남의 심정을 상상할 수 없는 사람의 뒷모습이 멀리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어쩌면 세상은 이대로 잊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검푸른 바닷물 속에 잠들어 있는 진실은 그대로 영영 잊힌 유물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p.45 "계집은 요물이야." … "우리를 유혹하기 위한 가느다란 목소리나 긴 머리칼을 봐라. 두부처럼 부드럽고 조기 살점처럼 뽀얀 젖가슴은 어떻고. 그들이 허연 속살을 벌려 보이며 군침을 유도하는 이유는 단 하나야. 저희 몸뚱이에 우리가 홀려버리면 그 뒤엔 우릴 제 맘대로 부리기 위해서지. 눈을 현혹하는 살덩어리와 웃음을 빌미로 우리에게 기생해서 살아가려는 거야. 흙탕물 한번 안 디디고 어깨 위에 업혀서 알맹이만 날름 핥아 먹겠다는 심산이지. 하지만, 얘야.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얼마나 가여운 족속이냐. 그렇기 때문에 속으면 안 되는 거다."

p.79-80 어쩌면 십일 등이나 십 등이 학교에서 죽는 것은 당연할 일인지도 모른다. 이곳은 둥지나 다름없다. 캄캄한 어둠 속을 걸어서 집에 돌아가 잠시 눈을 붙이고 다시 등교하는 수험생들은, 집 안의 가구 배치가 바뀌어도 단번에 눈치채지 못할 만큼 집보다 학교에서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책상에 엎드려 쪽잠을 자는 것에 익숙해져, 집 안에도 폭신한 침대를 놔둔 채 책상에서 꼬꾸라져 잠드는 아이들이었다.

p.106-107 "나는 사람 아니야."
한밤중에 슬그머니 마당으로 빠져나와 서성이다가 며느리가 중얼거렸다. 그러곤 알아들을 수 없는 이국의 언어로 울었다. 모든 울음은 가엽다. 며느리는 사람이 맞을 것이다.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사람뿐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 아니야."
개도 뱀도 닭도 그런 일로 울지 않는다. 오직 사람만이 그렇게 운다.

p.215-216 "나는 포기했어요. 사람은 고장난 물건 같아요. 좀처럼 맘대로 되질 않죠."
… "마음대로 할 필요가 없죠. 남의 의지는 관할구역이 아니에요. 울타리 밖의 일이니까요."

p.5 한글에는 한 글자마다 주문처럼 큰 힘이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단단하고 작은 몸 안에 아주 많은 의미를 끌어안고 있어서,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느새 그 속에 숨은 이야기들을 상상하게 되곤 합니다. 소설은 그 글자들을 드문드문 징검다리처럼 이어 붙여, 한 발자국씩 돌을 밟고 따라올 사람들을 내가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 속으로 인도하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p.250-251 얼굴도 모른 채로 살아온 수많은 인파가 나를 감싸고 있었다. 그 안에서 나는 내가 두려워했던 것의 실체를 깨달았다.
나는 가만히 있는 내가 무서웠다. 고요한 정적 속에서 누군가 가만히 옹송그린 채로 눈을 감을 때, 언제나 그래왔듯이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그를 안전한 세계로 데려가기주기를 기다리고만 있던 관람자인 내가 두려웠던 것이다.

p.249 사람들은 망설임 없이 나아갔다.끝을 알 수 없이 길게 이어지는 초의 행렬은, 한곳을 향하고 있었다. 가차 없이 잘라내고 살아가려고 해도 도저히 외면할 수 없었던 이야기들이 모두의 마음에 빛을 밝히는 순간이었다. 나는 이 순간의 우리가, 끝없이 이어지는 질문의 대답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p.252 나는 초가 된다. 말없이 미소를 건네는 앞사람의 촛불에서 불씨를 빌려와 더 뜨거워진 불덩이를 옆으로 옮긴다. 심지가 뜨거운 초의 마음으로, 찬 바닥 한곳을 밝히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꼿꼿이 선다. 불길은 점점 더 먼 곳까지 널리 퍼져 우리는 다시 물결을 이룬다. 사방이 밝아지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고, 나는 그 누군가였다. 스위치를 눌러서 끌 수 없는, 방대하고 광활한 불길 앞에서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본다. 낯설지만 익숙한, 거울에 비친 마음 같은 표정들.
빛은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저 그 은밀하고 그늘진 구석까지 지치지 않는 마음으로 비춰줄 뿐이다. 한순간 바람이 깊이 불어와 심지에 달라붙어 타오르던 불씨를 앗아간다. 그러나 이내 웅크리고 있던 몸을 펼치듯이 푸른 불꽃이 심지를 붙들고 일어선다. 또렷하게 진실을 바라보는 눈동자처럼, 절대로 꺼지지 않을 등대의 불빛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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