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들여다보는 사람 - 한국화 그리는 전수민의 베니스 일기
전수민 지음 / 새움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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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들여다보는 사람 : 스스로 타협하지 말고 뼛속까지 예술가가 되세요

1.

참으로 중요한 철학적 문제는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을 판단하는 것, 이것이 철학의 근본적인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다.

이방인, 페스트의 소설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실존주의 철학자 알베르 까뮈. 그는 그의 저서인 시지프스 신화를 이렇게 시작한다. 대지에 뿌리를 박고 있는 나무와 달리, 인간은 자유로운 다리를 가진 대신, 그 자유의 대가로 계속 흔들리며 동시에 종종 자신을 뒤덮는 죽음의 그림자에 공포를 느끼며 무너지곤 하는 존재다.

P.14 사실 매년 아무도 모르게 유서를 써왔어요. 나름대로는 '언제 죽어도 괜찮을 만한 준비'를 늘 해왔달까요. 진심으로 죽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쓰다 보면 이상하게도 결국에는 '만약에 내가 산다면 얼마나 잘 살지' 다짐하는 글이 되어서, 매년 유서 내용이 더 나아지곤 했죠. 매번 죽을힘을 다해 이룬 목록은 빼고 다시 썼으니까요.

공교롭게도 전수민 화가의 오래 들여다 보는 사람도 자신의 유서 쓰는 버릇을 언급하며 자신이 느끼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넋두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녀도 까뮈를 읽은 것일까? 그토록 아름답기로 유명한 베니스로 행하는 비행기를 타면서도, 이로 인해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고 그녀의 까뮈가 말한 부조리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을 생각하면 우리는 무엇이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향하게 됩니다. 죽음이 우리에게 우리가 마음속에서 귀중하게 여기는 삶의 길을 따라가도록 용기를 주는 거죠.

동시에 <공항에서 일주일은>에서 알랭 드 보통이 만난 히드로 공항의 목사의 말이 떠올랐다. 과연 그녀는 죽음을 생각하면서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찾았을까? 그리고 거기서 퍼올린 용기로 자신의 예술 활동을 지속하는 것일까? 몇 쪽을 읽지도 못했는데 벌써부터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으로 차올랐다.

2.

p.45 베니스는 마치 꿈결 같았어요.

모든 것이 물빛이고 햇빛이고, 온통 빛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베니스에서 그녀는 예술가들이 사는 공간에 입주를 하고, 베니스를 유람하며 예술 활동을 지속해나간다. 그녀는 여행이 주는 낯섦에 두려워하면서도 그것이 주는 쾌감과 신선함을 온 몸으로 받아들인다. 곧이어 이어지는 베니스에 대한 찬사. 하지만 동시에 발이 닿지 않는 물을 무서워하는 그녀에게 베니스는 종종 날선 긴장을 선사하곤 한다.

여행은 흥미롭게도 지리적이라기보다 심리적인 활동으로 읽을 수 있다 - 외적인 여정은 내적으로 욕망하는 여정의 은유다. - 여행을 예약하는 자신이 이런 활동을 즐기는, 다른 사람으로 변신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다.

알랭 드 보통은 우리는 사랑일까에서 여행은 심리적인 활동이라 지적한다. 여행은 일종의 일상으로부터의 탈출, 곧 일탈이다. 자신이 현재 일상에서 느끼는 구태와 권태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시위다. 하지만 새로운 곳에 가더라도 이런 탈출의 서사로는 그 무엇도 얻을 수 없다. 먹는 것과 자는 곳이 달라질 뿐, 결국 삶의 양식이 똑같이 때문이다.

p.96 예술가의 삶을 살게 된 이후로 비슷한 사람들이 주변에 늘어나면서 마음 놓고 맘대로 하는 나를 발견했어요. 직장생활을 할 때는 누려 보지 못한 호사랄까요.

그때는 내가 뭔가를 솔직히 얘기하면,

……정신과 치료를 권유하기도 했어요.

그래서 이상하려면 몰래 이상해야 했고,

난 직장생활에 철저히 적응하고 편입되어야 했지요.

그러나 저자는 조금 다르다. 그녀는 애초부터 삶이 여행이었다. 자신의 꿈을 위해서 직장을 그만두고 화가의 길로 들어섰으며, 화가가 되는 과정에서 겪어왔던 수많은 죽음의 그림자들을 극복해왔다. 그런 그녀이기 때문에 베니스는 단순히 새로운 공간에 스스로를 던지는 일탈적 행위가 아니다. 새롭게 관계를 맺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치유의 공간이 된 것이다.

p.23 먼지 하나 없이 깔끔한 스튜디오의 내 방.

낯선 곳에서, 우리는

누구나 '최초의 인간'이 된다.

최초의 인간. 그것은 아마 자신을 둘러쌌던 많은 맥락들과 구속들에서 벗어난 나신(裸身)의 인간일 것이다. 모든 것을 놓아버렸기 때문에 자신의 본성대로 자신의 세계를 재구성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인간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명소맛집에 취해 자신의 색깔을 확장시킬 기회를 포기하고 마치 공장에서 찍어낸 것과 같은 기념품의 굴레 속에 스스로의 여행을 구속한다.

3.

p.146-147 '예술가에게 예술은 밥보다 큰 의미인가' 하는 문제로 토론한 적이 있어요.

글쎄요, 먹고사는 문제보다 크고 작고를 떠나 먹고사는 문제만큼 절박한 것 같긴 해요. 늘 창작의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전시를 열어야 내가 살아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먹고사는 방법은 많잖아? 그저 먹고사는 게 중요해서 예술을 하는 것 같진 않아. 우린 뭔가 어쩔 수 없이 타고났고, 그것을 해소하면서 살아야 하는 운명인 게 아닐까?"

이 에세이는 여행기라기보다는 일기에 가깝다. 실제 여행에서 체험한 것들은 한 장의 사진과 몇 줄의 문구로 대신 되고, 대개는 작가 본인의 인생과 자신이 꿈꾸는 예술에 대한 진솔한 고백들로 가득 차 있다. 나에겐 이것이 비단 예술만이 아니라 먹고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고 믿는 이들에게 바치는 따뜻한 위로로 들렸다.

p.173-174 "이것 봐요, 뼛속까지 예술가가 되세요. 먹고사는 게 그리 중요한 것이었다면 직장을 그만둘 이유가 없었지 않나요."

, 그래요. 먹고사는 것만으로는 갈증을 채울 수 없어서 직장을 그만두고 그림을 시작한 거죠. 하지만 그 꿈을 너무 일찍 이루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그리고 내가 이룬 꿈이 내가 기다리고 기대하던 꿈이 아니면 또 어떻게 되는 거죠?

"그러면 이제는 우리처럼 꿈을 이루려고 하는 사람을 도와주면 돼요. 이제 다른 사람의 꿈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 연민에 빠지지 말고 자신을 다듬고 지켜나가요. 자신이 먼저 스스로를 아껴야 다른 사람들도 건드리지 못하는 겁니다. 힘들었던 지난 과거는 이미 일어난 일이지 바뀌는 게 없어요. 하지만 미래는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바뀌잖아요?"

"부디 자신을 과소평가하지 마세요. 스스로 타협하지 말고 뼛속까지 예술가가 되세요."

다시금 까뮈로 돌아오면, 그는 자살이 답이라 말하지 않는다. 까뮈는 절망도 그렇다고 덧없는 희망도 거부한다. 까뮈는 반항의 삶을 제안한다. 나의 실존을 위협하는 부조리에 대해서 직시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마치 시지프스가 신의 저주를 받아 결국 다시 굴러 떨어질 돌을 굴러올리듯이 묵묵히 할 일을 임하는 삶의 방식을 제시한 것이다.

나는 이 에세이에서 전수민 화가를 통해 까뮈가 말한 부조리에 반항하는 삶의 모습을 보았다. 일상과 구태, 먹고 사는 문제를 넘어서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꾸준히 나아가는 삶. 어떻게 보면, 극복의 대상인 한국사회의 일상이 아니라, 베니스라는 일탈의 장소이기 때문에 또렷이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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