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밤의 눈 - 제6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박주영 지음 / 다산책방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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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밤의 눈 / 박주영


스파이하면 제임스 본드 생각이 먼저 난다. 그 다음엔 킹스맨. 이런 영화에서 묘사되는 스파이들은 멋있는 외모에 깔끔한 옷차림을 하고 적국 혹은 테러리스트들이라는 명확한 대상을 감시하고, 그들을 억제하고 제압하여 세상의 평화를 가져다주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 고요한 밤의 눈에서의 스파이들은 약간 다르다. 여기선 불량국가도, 테러리스트들도 없다. 다만, 점점 절망 속에 죽어가고 있는 90%들이 있을 뿐이다. 스파이들은 이 90%들이 혁명을 일으킬 수 없도록 은밀하게 통제하는 역할을 맡는다. 그들은 직접 첩보활동을 펼치는 스파이들 외에도, 스파이가 아닌 스파이, 즉 그들의 통제에 협조하는 정치, 경제 인사들을 포섭한다. 그들이 필요한 이유는 구조조정, 청년실업 등 사람들의 삶을 옥죄는 단어들로 머릿속에 혁명이라는 생각을 말살하기 위해서다. 그들에게 책을 읽을 여유조차 없는 삶, 시간에 쫓기고 돈 앞에 망설이는 삶을 살게 하는 이유는 상상할 수 없게 만들기 위해서이다. 눈앞만 바라보고, 내일만 생각하고 심지어 오늘이 가장 걱정인 삶. 그래야 생각을 할 시간이 없다.”


음모론에서 종종 등장하는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를 연상시키는 이 스파이 조직에, 15년간의 기억을 잃은 남자가 가입 권유를 받으며 책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는 유능한 애널리스트로, 공교롭게도 그의 삶을 둘러싼 모든 것들은, 스파이들의 손길이 닿아 조작되거나 편집된 것들이다. 그가 사랑한다고 믿은 여자조차도, 그 스파이 조직의 요원인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 상담을 받는다. 내가 누구인지조차 혼란스러운 상황, 사람은 기억의 총체라고 하는데 과연 내가 15년간의 기억을 모두 잃었다면 아마 미쳐버리지 않았을까.


한쪽에선 스스로의 기억을 되짚어가며 스스로를 다시 구성해나가는 반면, 어느 공간에서 한 소설가는 소설이 잘 써지지 않아 고심 중이다. 등단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 인정받던 그는, 차기작들이 줄줄이 망하면서 그 존재 자체가 대중들에게 희미해져 가는 중이다. 그런데 그를 스파이 조직은 주시한다. 그가 소설 속에 읊조리는 단어, 오랜 세월동안 언급조차 되지 않았던 그 단어, ‘혁명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스파이들은 그를 지하 취조실에서 고문하지도, 쥐도 새도 모르게 한강에 담그지도 않는다. 그저 그런 생각조차 할 수 없도록, 삶의 궁핍과 사회적 명성이라는 찬물과 뜨거운 물에 이리저리 담굴 뿐이다.


조지 오웰의 ‘1984’에서 빅 브라더를 연상시키는 스파이 조직을 보며, 1984의 명대사가 생각났다. 그들은 의식을 가질 때까지 절대로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며, 반란을 일으키게 될 때까지는 의식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현대의 통제는 의식 수준에서 이루어진다. 그렇기에 경영 전문가를 동원해 사람들을 궁핍으로 몰아넣고, 소설가를 회유해 체제에 순응적인 글들을 지어내게 한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패배의 이야기인가? 1984처럼, 현실에서 일어났던 그 수많은 반란의 서사들처럼 혈기로 들고 일어나 피눈물로 마무리 짓는 이야기인 것인가?


하지만 이 소설은 절망을 노래하지 않는다. 스파이들은 그들이 죽인 자들 중, 오히려 죽음으로 인해 더욱 큰 영향력을 지니게 된 사람을 이야기한다. 죽음으로서 오히려 더 세상에 기억된 이들. 스파이 내부에서도 '혁명'을 바라는 이들이 생겨나고, 이들은 스스로를 '은둔자'라 부른다. 그들은 언젠가 있을 혁명을 위해 조용히, 그러나 치밀히 싸움을 준비해나간다. 혁명은 사람들의 기억과 핏속, 심장에 있다. 모든 사람의 피를 세탁할 수도 모든 사람의 기억을 지울 수도 모든 사람의 심장을 바꿀 수도 없다. 피는 흐르고 기억은 숨고 심장은 뛴다. 어디선가 여전히.” 사람들에게 내재되어 있는 혁명을 위해 필요한 것은 아주 작은 불씨다. 그 불씨를 지키는 자들은 '스파이'들에 의해 패배하면서도 결코 굴하지 않는다. 그저 꾸준히 지금의 전투를 기록해나간다. 언젠가 승리할 그날을 위해서.


"역사가 승자들에 의해 쓰여지는 건 상식입니다. 승자는 누구입니까? 야만적인 살인자들, 미친 왕들, 탐욕스러운 반역자들, 폭력적인 전쟁광들, 아마도 우리 역사의 대부분은 그 승자들이 조작하고 편집하고 날조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패자들은 무엇을 쓸까요? 패자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남길까요? 승자들이 인멸한 증거를 상상력으로 극복하고, 이야기로 전달하고 유포시키겠죠. 최고의 이야기에는 진실이 담겨 있는 법입니다. 멈추지 마십시오."

"그들에게 책을 읽을 여유조차 없는 삶, 시간에 쫓기고 돈 앞에 망설이는 삶을 살게 하는 이유는 상상할 수 없게 만들기 위해서이다. 눈앞만 바라보고, 내일만 생각하고 심지어 오늘이 가장 걱정인 삶. 그래야 생각을 할 시간이 없다. (p.144)

"혁명은 사람들의 기억과 핏속, 심장에 있다. 모든 사람의 피를 세탁할 수도 모든 사람의 기억을 지울 수도 모든 사람의 심장을 바꿀 수도 없다. 피는 흐르고 기억은 숨고 심장은 뛴다. 어디선가 여전히."(p.188)

"역사가 승자들에 의해 쓰여지는 건 상식입니다. 승자는 누구입니까? 야만적인 살인자들, 미친 왕들, 탐욕스러운 반역자들, 폭력적인 전쟁광들, 아마도 우리 역사의 대부분은 그 승자들이 조작하고 편집하고 날조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패자들은 무엇을 쓸까요? 패자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남길까요? 승자들이 인멸한 증거를 상상력으로 극복하고, 이야기로 전달하고 유포시키겠죠. 최고의 이야기에는 진실이 담겨 있는 법입니다. 멈추지 마십시오." (p.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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