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페스트 열린책들 세계문학 229
알베르 카뮈 지음, 최윤주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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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의 프랑스 도시 ‘오랑’에서 느닷없이 쥐들이 죽어 나오고, 급기야 시민들이 하나 둘 쓰러진다. 무방비 상태에서 페스트가 급격히 확산되어 도시는 혼란 상태에 빠지게 된다. 『페스트』는 전쟁과 같은 재난 속에서 인간이 대처하는 다양한 모습과 부조리 상황에 대한 개인의 자각을 넘어 타인과의 연대를 통해 부조리를 극복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특히 작품의 큰 줄기인 페스트로 인한 패닉 상황이 지금 2020년의 코로나19 판데믹 위기와 참 많이 닮아 있다.

의사이자 작품의 서술자이기도 한 ‘리유’, 자발적으로 보건대를 조직하고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는 ‘타루’, 말단 공무원이지만 자신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재난 상황을 기록으로 남기고 보건대 살림을 맡은 ‘그랑’, 페스트의 원인을 인간의 죄악에서 찾으며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기를 설득하는 ‘파늘루’신부, 평시에는 무기력한 삶을 살았으나 페스트가 퍼지자 오히려 왕성한 생존 본능으로 페스트에 누구보다 잘 적응하는 ‘코타루’, 외부인으로서 오랑의 위기를 남의 일로 생각했으나 결국 자발적으로 연대에 동참하는 ‘랑베르’ 기자 등의 인물은 모두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 저마다 작품 속에서 자신의 영역을 확고히 하고 있다.

전염병과 같은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대재앙 앞에서 인물 제각각의 모습은 지금 상황과 매우 닮았다. 전염병이 나를 피해가기를 바라며 스스로를 고립시키거나 자신의 위치에서 부조리에 맞서거나 종말을 맞이하며 타락의 세계에서 하루하루 즐기는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페스트』에서 그리는 이상적인 모습은 바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보건대의 모습일 것이다. 특히 작가는 보건대 조직에 앞장선 ‘타루’나 전염병의 최전선에서 환자들을 보살피는 ‘리유’보다 말 없이 묵묵히 보건대의 살림을 챙기고, 좋은 문장을 찾아 글쓰기에 매달리는 ‘그랑’을 보건대의 실질적인 대표로 추켜세운다.
⸢아주 힘든 일도 아닌걸요. 페스트가 발생했으니 막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죠. 아! 만사가 이렇게 단순하다면야 얼마나 좋겠어요!⸥ (295쪽)
작가 카뮈는 자발적인 보건대의 조직을 고귀한 시민의식의 발로로 포장하지 않고, 매우 당연하고 일상적인 것으로 여기며 영웅시 하지도 않는다. 재난이 닥쳤을 때 포기하거나 숨지 않고 자기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묵묵히 해나가는 삶을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더 와닿았다.

오랑의 리유는 의사로서 갈수록 늘어나는 환자를 최선을 다해 치료하지만, 대재앙 앞에 무력하기만 하다. 그러다 오통 판사의 어린 아들마저 페스트로 고통받다 죽게 되자 결국 쌓였던 울분과 분노를 파늘루 신부에게 터뜨린다.
⸢사랑에 대해서 저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드리는건데, 아이들이 고통을 당하는 이 세상을 저는 죽는 날까지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
오통 판사의 어린 아들의 죽음을 계기로 작품 속 인물들의 모습이 많이 달라진다. 특히 파늘루 신부는 페스트라는 재난을 신의 분노와 인간의 회계로 설파하던 것을 벗어나 자신 스스로 보건대에 참여하고, 재앙에 순응하고 감당하는 것에서 지금 처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을 찾아 나선다. 우리 인간의 삶이 그렇지 않은가? 역경과 고난이 나와 내 주변을 덮칠 때 최소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되든 안되는 어떻게 해보려는 시도가 우리가 살아가는 에너지가 될 수 있다.

소위 금수저 집안에서 자랐음을 고백하고 왜 보건대를 조직하게 되었는지 말하는 타루는 어떻게 보면 서술자인 리유보다 더 애착이 가는 인물이다. 검사 아버지를 따라 유무죄의 생명들이 사라지는 것을 목도했던 타루는 평생의 트라우마로 마치 자신이 지금까지 페스트를 앓아 왔다고 고백한다. 이러한 트라우마, 죄의식을 치유하고자 시작했던 보건대의 역할이 자신의 치유와 동료, 사회의 치유로 확장되는 것을 느끼며 그나마 평안을 찾을 수 있었을까?

카뮈의 전작 『이방인』이 부조리와 모순의 상황에서 개인의 고뇌와 깨우침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을 그렸다면 『페스트』는 개인의 몸부림에 고난에 함께 처한 동료의 연대의식, 동료애로 극복하는 과정을 담담하게 기술한 점이 기억에 남는다. 그렇다고해서 작가는 이를 모범적이고, 영웅적으로 포장하지 않는다. 그저 부조리를 극복하기 위해 힘을 모으는 인간의 모습을 특별하지 않은 자연스러움이라고 말하는 작가의 말이 오늘의 우리, 나에게도 딱 들어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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