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의 식탁에서 고기가 사라진 이유 - 고기를 굽기 전, 우리가 꼭 생각해봐야 할 철학적 질문들
최훈 지음 / 사월의책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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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 12 1일 미국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시에서 로자 파크스라는 한 흑인 여성이 버스를 탔다. 그녀가 탄 버스 역시 백인과 유색인 좌석이 분리되어 있었다. 로자는 유색인 좌석 맨 앞줄에 앉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백인 좌석은 전부 찼고, 엠파이어 극장 정류소에 이르자 백인 몇 명이 더 탔다. 백인 두세 명이 서 있는 것을 본 운전기사가 유색인 좌석 표시를 로자가 앉은 자리 뒤로 밀고 중간에 앉은 흑인 네 명에게 일어나라고 요구했다. 다른 세 사람은 일어나 뒤로 갔지만 로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당신은 왜 안 일어나는 거요?”운전기사가 소리쳤다. 

“일어나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요.”

 

로자는 백인들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에 신물이 났다. 게다가 그녀가 앉았던 자리는 원래 흑인 좌석이었다. 

 

“경찰을 부르겠소!” 

마음대로 하세요.”

 

로자는 몽고메리시 분리에 관한 법률위반 혐의로 체포되었고, 이 작은 사건은 그녀의 일생뿐 아니라 현대 사회의 인권지형까지 뿌리째 뒤흔들어 놓았다. 흑인들은 이 사건에 항의하여 버스 안타기 운동을 벌임으로써 백인들을 놀라게 했다. '몽고메리 보이콧'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비폭력 흑인 민권운동 지도자 마틴 루터 킹 목사를 전국적인 인물로 부각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이 운동은 흑인의 시민적 권리를 찾는 운동으로서 '흑백인의 평등과 통합'을 목표로 삼았다.  

 

지금은 공기처럼 자연스러워 그 고마움을 잘 느끼지 못하는 인류보편의 가치가 불과 반세기 전만 해도 꿈꾸기조차 힘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런 비현실적인 꿈이 현실이 되기까지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함께 했겠지만, 그 중에서도 시대적 변화에 강력한 도화선이 되어준 용기있는 소수의 역할은 결코 빠뜨릴 수 없다. 미국의 흑인 민권 운동을 이끈 로자 파크스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연방대법원 판결 이후 흑백통합버스 제도가 시행된 첫날인 1956년 12월 21일, 버스 앞좌석에 앉은 로자 파크스. 

 

- 위 글의 원본 및 사진 출처: 유시민 <거꾸로 읽는 세계사>, 네이버 캐스트에 실린 박종대 <현대 시민권 운동의 어머니, 로자 파크스>에서 발췌 및 편집.   

 

 * * *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은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고 우리나라도 다문화 사회로 변화하면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차별이 사회문제로 부각되고 있지만, 마틴 루터 킹, 말콤 X 등이 이끄는 흑인 민권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1950년대까지만 해도 인종을 초월한 평등은 당연하고 보편적인 가치가 아닌 비현실적인 것이었다. 

 

인종차별, 성차별, 계급차별 철폐 운동과 같은 맥락에서 오늘날 부각되고 있는 운동이 있는데, 바로 동물 권리 운동이다. 오늘날 우리 나라에서 개, 고양이는 반려동물의 대우를 받고 있지만, 불과 20-30년 전까지만 해도 동물이 사람과 같은 방에서 사는 건 한국 사회에서 흔치 않은 일이었다.

      

서구에서 유입된 애완문화는 우리나라에 개, 고양이를 대량 번식시키는 지옥(개공장 또는 퍼피밀)과 이들을 판매하는 애견샵의 유통구조도 유입시켰다. 또한 돈만 있으면 언제든지 동물을 살 수 있는 산업구조는 15년을 넘게 사는 동물을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인식이 부족한 사람들의 충동 구매를 부추겨 하루 300마리 이상의 개, 고양이가 버려지는 현실을 낳고 있다.  

 

인간 사회의 동물에 대한 학대는 애완용으로 취해졌다가 버림받는 동물뿐만이 아니라, 식용동물, 모피동물, 오락동물, 실험동물 산업에서 정교하고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최훈 교수의 <철학자의 식탁에서 고기가 사라진 이유>는 이 중에서 식용 동물에 대해 생각해야 할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책은 공장식 축산 시스템의 도래와 함께 불과 50-60년 전과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육식이 흔해진 오늘날, 나의 밥상에서 나의 윤리를 찾을 수 있는 이유를 이야기하고 있다. 현상적으로 보면 (종교나 건강을 위해 채식하는 사람들은 논외로 하고) 채식주의자는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 사이에서 흔할 것 같지만, 이 책은 동물에 대한 애정과 무관하게, 이성과 윤리에 기초하여 채식이 옳은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 책은 개인의 동물 선호 여부와 무관하게,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이성을 약간만 발휘하면 채식주의는 누구든지 동의할 수 밖에 없는 선택이라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다(이 책의 저자는 자신이 동물을 좋아하지 않으며 심지어 '냉혈한'이라고까지 말한다).

 

따라서 이 책은 동물을 위해 채식하는 사람들을 감상주의자로 치부하는 생각을 반박하면서, 개인이 어떠한 윤리적 판단을 하려면 감정이 아닌 이성이 필요하며, 사람들이 고통 받는 동물의 모습에 경악하면서도 여전히 고기를 먹는 모순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결국 감성에 기대어 행동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 이성을 따르는 경우와 감성에 의존하는 경우 개인의 구체적인 실천은 전혀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조너선 사프란 포어가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에서, 동물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육식을 하지 않는 사람과 동물의 고통을 알고도 육식을 하는 사람 중 어느 쪽이 더 감상적인가는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고 말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의 주장이라고 볼 수 있다. 

 

'식탁 위의 고통'이라는 실존의 문제에 대한 채식주의의 철학적 이론을 제시한 것은 이 책이 처음이 아니다. 채식주의의 이론은 제레미 벤담, 피터 싱어, 톰 리건을 비롯한 사상가들이 정교한 논리 체계로 확립시켰고 이들의 철학을 반박하는데 성공한 학자는 지금까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철학자의 식탁에서 고기가 사라진 이유>는 서구 사상에 의존하지 않고 저자 자신의 생각에 기초하여 채식이 윤리적인 이유를 철학 용어 없이 알기 쉽게 풀이했기 때문에 채식주의나 철학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일반인이 (책 제목에 '철학'이 들어있는 것과 달리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  

 

또한 이 책은 채식이 육식보다 윤리적인 이유로 동물의 고통 이외에 공장식 축산으로 인한 환경 오염, 3세계 기아 등의 전 지구적인 병폐를 들고 있는데, 이러한 문제는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서적과 정보를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이미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내 자녀와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할 '빌려 쓰는 지구'라는 관점에서 우리의 육식이 초래하는 문제를 후손이 그대로 떠안게 된다는 현실을 생각하면육식을 상당 부분 줄이는 것은 후세대를 위한 현세대의 의무이기도 하다. 

 

집단주의가 강하고 튀는 것을 싫어하는 한국 사회에서 채식주의자로 살아가는데 유용한 전략을 제시한 것은 이 책의 큰 장점이다"어떤 사람이 내게 권한 케이크에 계란과 우유가 들어있는지 노심초사하기 보다는, 또는 고기 굽는 냄새에 무너져 그 동안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완벽해야 한다는 생각보다 내가 할 수 있는 실천에 집중하라"는 조언은 동물을 위해 채식하는 사람들의 실천적 전략으로 피터 싱어가 <동물 해방>을 비롯한 여러 저서에서 제시한 바 있지만, 한국에서 채식하는 사람들을 위한 채식 입문서가 출판되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반가운지 모른다. 실제로 나 자신도 여러 사람들과 함께 밥을 먹는 자리에서 채식을 실천할 때 고민하는 문제가 있는데, 이 책은 그런 고민에 많은 도움이 되는 훌륭한 길잡이다.

 

이런 측면에서 이 책은 부키 출판사가 비슷한 시기에 출판한 리어 키스의 <채식의 배신>과 대조를 이룬다. <채식의 배신>을 쓴 리어 키스는 일체의 살생을 거부하는 극단적, 교조적인 채식주의의 딜레마에 빠져 20년 동안 고통 받다가, 결국 채식주의가 무지와 오해의 산물이라고 비판하며 지구를 구하기 위해 1) 자녀를 낳지 말자, 2) 자동차를 타지 말자, 3) 자급자족을 하자는 대안을 주장했다. 윤리적, 환경적, 영양학적 채식주의를 반박하기 위해 어처구니없는 논리를 동원하고 건강한 채식주의자들을 전부 투명인간 취급한 이 과감하고 용맹스러운 책이 채식주의와 동물권 운동의 본토에서 수많은 동물권 운동가와 영양학자의 조소를 받은 것은 필연적인 귀결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사회 운동으로서의 채식주의와 동물권의 개념이 생소한 우리 나라에서 <채식주의의 신화(The Vegetarian Myth)>라는 이 책의 원제를 <채식의 배신>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으로 출판하고 홍보하여, 이 분야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들을 오도하고 많은 이들의 육식을 위로하고 있는 부키 출판사의 책 선정 안목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채식의 배신> 한 권만 읽고 채식주의를 비판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리어 키스의 허수아비 공격에 농락당한 것이니 부디 그러지 않기를 바란다. <철학자의 식탁에서 고기가 사라진 이유>만이라도 읽어 본다면 <채식의 배신>이 얼마나 황당한 주장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채식의 배신>에 대한 나의 서평과 반론은 블로그에 올려두었다. (서평 보기) 

 

<채식의 배신>의 저자가 저지른 오류와 관련하여 "채식주의자는 일체의 살생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 대해 덧붙이면, 나는 일체의 살생을 하지 않는 것은 그 누구에게도 불가능하다고 본다. 산에서 자연인으로 살아가는 채식주의자에게도 불가능한 일이다. 식물의 생명은 제쳐두고라도 식물에 붙어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생명을 죽이게 되는 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극단적이고 비현실적인 논리에 기대어 아침, 점심, 저녁 식사를 통해 하루 세 번 구할 수 있는 동물의 고통을 물타기하려는 시도가 종종 눈에 띄는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사람도 먹고 살기 바쁜데 동물까지 챙길 여력이 어디 있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 텐데 틀린 말은 아니다. 정말 먹고 살기 힘든 사람에게는 채식이 사치라고 할수 있다. 그러나 당장의 끼니를 걱정하지 않는 사람에게 또는 자신의 습관을 되돌아볼 여유가 있는 사람에게 이런 물음은 적절하지 않다. "사람도 살기 바쁜데 동물까지 챙길 여력이 어디 있냐?"는 물음에 대한 답도 이 책에 제시되어 있지만, 책 내용과 무관하게 한 마디 덧붙이면, 동물 학대는 인간 학대와 무관하지 않다. '고통'을 느끼는 대상을 향한 학대는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지 않고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아동 학대가 일어나는 집에서 동물 학대도 일어나는 경우가 많고, 동물 학대가 종국에는 인간을 향한 범죄로 이어지기도 하는 건 엄연한 사실이다. 동물이 인간의 말을 못한다고 해서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취급하는 공장식 축산의 학대에 침묵하고 용인하는 사회를 과연 건강한 사회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인간 사회에 만연하는 부조리의 근본적인 원인은 윤리 지식의 부족이 아니라 머리 속의 지식을 실천으로 옮기는 행동력의 부족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을 읽고 "그래, 좋은 이야기지"라고 고개를 끄덕이지만 막상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사람들이 많을 텐데, 이에 대한 저자의 글을 옮긴다.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동물의 고통을 줄이는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이지만, 나 한 명이 고기를 안 먹는다고 해서 과연 동물들의 고통이 사라질까 회의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은 "나 한 사람 더 투표한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겠는가?"라는 태도와 다를 바 없다. 분명히 나 한 명의 투표가 세상을 바꾼다. 육식을 하는 사람들이 1년에 얼마만큼의 고기를 먹을까? 쉽게 닭으로 계산해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1년에 10.68kg의 닭고기를 먹는다고 한다(한국육류수출입협회통계). 치킨집에서 가장 많이 쓰는 11호 닭의 무게가 1.1kg이므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1년에 닭을 10마리 정도 먹는 셈이다. 즉 내가 고기를 안 먹는다면 1년에 닭 열 마리가 고통을 덜 받게 되는 것이다. 물론 축산업자가 즉시 그만큼의 생산량을 줄이지 않겠지만,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늘면 늘수록 고통 받는 동물의 숫자도 줄어들 것이다."

 

채식은 자신의 부당한 처지를 고발할 수 없는 동물을 위해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꾸준한 문제제기와 항거를 통해 인종, 성, 계급을 초월한 만인 평등의 가치가 오늘날 보편적인 가치로 인정되고 차별 철폐의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듯이, 존중과 배려의 범위를 조금씩 넓히는 노력을 통한 인류 정신의 진보는 우리 아이들에게 더 나은 세상을 물려주기 위한 실천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앎과 실천의 불일치로 고민하는 그대여, 오늘부터 당신의 실천을 한 발짝 앞으로 내디뎌 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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