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의 배신 - 불편해도 알아야 할 채식주의의 두 얼굴
리어 키스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3년 2월
평점 :
품절


이 책에 대한 아주 솔직하고 주관적인 감상부터 쓰겠습니다. TV나 광고는 거짓말을 하지 않을 거라고 으례 믿듯이, 책으로 인쇄된 내용은 당연히 검증을 거쳤을 거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책 중의 하나가 바로 <채식의 배신>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떤 주제에 대한 사전지식 없이, 또는 책에 쓰여 있는 내용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면 채식에 대한 엄청난 오해를 하게 만드는 책이 이런 책이죠. 채식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이런 책부터 읽으면 채식에 대해 굉장히 왜곡된 사고를 하게 됩니다. 특히 윤리적 채식주의에 대한 이 책의 내용은 너무나 많은 부정확한 정보가 담겨 있어 많이 위험합니다.  사실 이 책의 원서가 출간된 미국에서는 주목도 못받고 묻혀버린 책인데, 국내에는 어떤 이해관계가 결부되어 있는지 몰라도 자극적인 제목으로 번역되어 홍보되고 있네요.

출간때부터 이슈를 끌어서 관련 기사, 리뷰도 많은데,... 그 중 사실관계를 제대로 잡아낸 글은 거의 찾아볼 수 없더군요. 거의 대부분이 "채식이 알고보니 이런 배신을 하더라~" 는 카더라 통신입니다. 그런 평을 쓴 사람 중 일상에서 채식을 구현해본 사람은 당연히 없는 것 같구요.

제가 이렇게 이 책에 대해 혹평을 하는 이유는 채식이 인간만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먹히는 동물들을 말을 못합니다. 우리가 무심코 갖는 편견에 동물들은 엄청난 손해를 보지요. 아무 생각없이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 죽는 겁니다..

이 책은 20년간 채식했다던 사람이 썼음에도 불구하고 채식에 대한 총체적인 편견과 오해를 담고 있어 한 편으로는 어처구니가 없지만 없지만 채식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총체적으로 담고 있어서 채식을 전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역으로 이용하면 좋은 토론거리와 교재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채식/육식에 대한 균형잡힌 사고를 하고 싶은 분들께는 피터 싱어의 <동물해방>, <죽음의 밥상>, 에리카 퍼지의 <동물에 반대한다>부터 읽고 이 책을 읽으실 것을 추천드립니다. 그래야 최소한의 객관적인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이 책에 임하실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다음은 이 책에 대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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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채식주의가 소수 문화이며, 이 책이 다루는 도덕적, 정치적, 영양학적 채식주의의 역사가 오래되었다고도 할 수 없다. 채식주의가 국내에 제대로 자리잡기 전에 <채식주의의 신화(The Vegetarian Myth)>라는 책이 <채식의 배신>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것이 시기 적절한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채식주의 운동에 동참하여 동물과 사람 모두 잘사는 세상을 만들고 싶은 사람의 입장에서 이 책이 채식주의에 대한 발전적 비판이나 대안을 제시하기 보다는 기존의 편견과 오해를 강화시키기 쉬운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이 아쉽다. 이런 점에서 이 책에 대한 반론을 통해 채식에 대한 일반의 오해를 바로잡고 채식주의자로서 나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를 갖는 것은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다음의 사실을 바탕으로 읽혀지고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1) 현대인의 육식이 대부분 '공장식 밀집 사육 시스템'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

2) 공장식 밀집 사육 시스템은 동물의 비인도적인 사육과 도살, 환경오염, 3세계의 기아 양산으로 비판 받고 있다는 사실.

3) 현대 곡물의 대부분은 식용 가축에게 먹이기 위해 재배되기 때문에 육식하는 사람들이 채식하는 사람보다 곡물을 더 많이 소비한다는 사실.

 

채식주의는 아주 간단히 정의하면 "육식을 하지 않고 식물로부터 양분을 얻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양한 생활 양식이 존재하는 현대에 채식주의가 일상에서 구현되는 모습은 무엇을 먹는가, 어느 정도의 융통성을 허용하는가 등의 측면에서 개인의 생활 환경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이 책의 저자는 자신이 20년 동안 '비건' 으로 살았다고 했을 뿐, 비건 채식주의를 어떻게 실천했는가에 대해서는 자세히 언급하지 않았다. 책을 읽고 이해한 바에 따르면 저자는 채식주의를 '일체의 살생을 피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일탈이나 융통성을 불허하는 극단적인 채식주의를 지향한 것 같다. 저자는 이 책에서 20년의 비건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육식을 하게 된 경험에 기초하여 도덕적, 정치적, 영양학적 채식주의의 무지와 신화를 이야기하고 있다. 지금부터 이 책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고 이에 대한 반론을 펴기로 하겠다.

 

I. 도덕적 이유의 채식주의가 놓치는 것들

 

1) 동물 권리 옹호주의는 동물이 아닌 인간의 행복과 고통을 앞세우기 때문에 인간 중심적이고 감상적이다.

"엄마가 있거나 얼굴이 있는 건 먹지 않겠다"는 주장이 동물을 위한 것은 아니다. 이런 특징이 동물에게도 통증, 공포, 염려를 느끼는 능력이 있음을 증명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동물의 고통에 대해 신경 쓰는 사람들은 감상적이라는 비난을 듣는데, 그런 비난에는 맞는 구석이 있다. 동물 권리 옹호론은 인간의 필요와 욕구를 동물에 투사한 것이지 동물의 필요와 욕구를 반영한 것이 아니다. (p.135-136)

아무리 객관적이라 할지라도 인간은 인간의 시각에 의존하여 동물을 이해할 수 밖에 없다. 인간이 순수하게 동물의 입장에서 행복과 고통을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우리가 인간의 행복과 고통에 기초하여 동물의 행복과 고통을 가늠하는 인도주의적 시선을 완전히 걷어낸다면 내 앞에 있는 강아지와 책상이 다를 바가 무엇일까? 인간이 동물을 윤리적으로 대우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을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며,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동물 학대를 주저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동물을 인간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잘못이라면, 저자의 식물도 감각과 감정을 느낀다는 주장이나 우리의 생존을 가능케 하는 모든 생명을 귀하게 여기자는 주장도 같은 비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참고해볼만한 문제: 데카르트의 동물기계론 "동물은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2) 동물 권리 옹호론자들은 동물의 동물적 본성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한다.

세렝게티 한가운데에 담을 세워 초식동물과 육식동물을 갈라놓는 담장을 쌓자고 제안한 비건처럼 동물 권리 옹호론자들은 동물의 동물적 본성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 (p.137)

폴런의 동물권 옹호 철학에 대한 비판: "동물 권리 옹호자들은 인간의 동물성 뿐만 아니라 동물의 동물성마저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들이 싸우는 대상은 바로 자연 그 자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p.141)   

저자는 일부 괴상한 채식주의자의 생각을 보편적인 동물 권리 옹호론으로 간주하는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 나는 동물보호단체가 자연의 포식관계를 부정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환경 운동가인 저자의 동물권 운동에 대한 몰이해가 놀랍다.

 

3) 도덕적 이유의 채식주의는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일년생 곡물을 기본으로 한 식단이 "아무 것도 죽이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들의 무지를 드러낸다. (p.140) 동물 권리 옹호자들은 다른 생명을 죽이지 않고도 먹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죽음이 생명의 일부라는 기본적인 사실을 부정한다. (p.142)

이렇게 생각하는 채식주의자가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채식주의 운동의 정론은 모든 살생을 부정하는 교조주의가 아니라 동물이라도 소비하지 말자는 것이다. 게다가 인간 때문에 죽는 동물이 식용동물이 전부는 아니며, 아무리 극단적인 채식주의자라도 살면서 일체의 살생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완벽하게 채식하지 않을 바에는 하지 않느니만 못하다"라는 생각이나, 모피를 입지 않는 사람에게 "당신이 먹는 동물은 불쌍하지 않냐?"고 따지는 것은 개인이 가능한 선에서 행하는 윤리적 실천의 본질을 흐리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먹을 거리는 윤리문제이지만 광신도는 필요 없다"는 피터 싱어의 조언(보기 클릭)은 매우 중요하다. 저자는 자신의 극단적, 교조적인 채식주의를 채식주의 전체로 투사한 것 같다.

 

4) 식물도 감각(고통)을 느낀다.

저자는 식물도 '생명 활동'을 하는데 인간의 척도로 가늠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이 알지 못할 뿐(p.154)이라며, 우리는 식물에게 감각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들을 인간과 DNA 50%를 공유하는 '우리'의 하나로 인정해야 한다(p.159)고 주장한다. 저자가 식물의 '감각'에 고통도 포함시키는지는 명확하게 설명되어 있지 않지만, "식물은 먹어도 괜찮은가?"라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식물을 "살아있고, 영예를 돌릴 가치가 있으며, 존중하고 감사할 대상이지만 감각은 없는 생물"의 범주로 규정했지만 식물을 접하면 접할 수록 그런 범주가 말이 안돼 보였다(p.151-153)고 한 것으로 비추어보아 식물도 고통을 느낀다고 믿는 것 같다.

 

그런데 식물의 감각을 운운하며 채식주의자의 세계관에는 이것이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p.151)고 비판한 저자의 결론이 황당하다. 저자는 식물도 감각을 느낀다는 전제하에 생명의 범위를 정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어디서 선을 그어야 할까?"란 질문을 던지는데, 엉뚱하게도 생명과 죽음을 가르는 것은 밤낮의 경계를 가르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하기 때문에 자신은 선을 긋지 않고 원을 그리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를 먹이기 위해 죽는 것들을 외면하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개별 개체들이 죽더라도 생물 종 전체가 멸종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p.162-163)라고 말한다.

 

저자의 주장은 동식물이 서로 먹고 먹히는 관계에 있고 감각을 느낀다는 점에서 서로 다르지 않으니까 동물, 식물을 구분하지 말고 전부 먹자는 것인데, 이것이 비채식주의자의 육식 옹호론이라면 몰라도 한때 동물의 고통에 반대하여 채식을 했던 사람이 다시 육식을 하게 된 근거로 주장할 수 있을까? 동물의 고통에 반대하는 입장은 변치 않았다는 전제 하에 "식물이 감각을 느낀다"는 주장에 정당성을 확보하려면, 저자는 동식물 모두 먹지 않는 쪽을 택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사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뭐든 먹어야 하는 현실에서 윤리적인 태도를 고수하려면, 현대 과학의 테두리 안에서 감각을 느낀다고 밝혀진 동물은 먹지 말고, 식물의 감각은 그것이 실제로 밝혀진 후에 고민하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나는 저자가 똑같은 심정으로 살아있는 당근과 닭에게 칼을 들이대는지 궁금하다. 

 

식물의 고통을 거론하며 밥상의 윤리를 추상화시키는 것은 실존하는 고통을 줄이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동물과 식물 모두가 감각을 느낀다고 믿는다면, 둘 중 어느 하나라도 먹지 않음으로써 고통을 줄이는 것이 옳을까, 둘 다 먹는 것이 옳을까? 게다가 육식은 채식보다 더 많은 식물의 죽음을 야기하는데? 만약 저자가 이 책에서 언급한 호흡주의자로 살아가기로 했다면 나는 심정적으로나마 저자에게 동의했을 것이다(물론 호흡주의가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5) 동물 사육에서 인간은 주도권을 쥐고 있지 않으며, 실은 그들을 키우기 위해 중노동을 하고 있다.

닭이 마실 물을 나르느라 겨울에 얼어붙은 문을 여는 과정에서 손바닥에 화상을 입고 목덜미에 눈 한 덩이가 떨어지는 것을 맞으면서 든 생각이 있다. "지금까지 몇 년 동안 모든 걸 거꾸로 봐 왔구나. 내가 닭을 착취하는 게 아니었어. 모두 따뜻하고 안전하고 배부르고 행복하잖아. 고생하는 것은 나뿐이야. 닭이 나한테 물을 가져다 주기는 커녕 눈 위에 발끝 하나 내밀지 않아도 되니까." 마치 나를 찌르는 냉정한 현실의 칼처럼 느껴졌다. 닭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들을 위해 일하도록 만든 것이다. (p.58-59)

살면서 더 나은 대우를 받고 고통과 스트레스 없이 도살된 동물을 먹는 것이 그렇지 않은 동물을 먹는 것보다 윤리적인 육식이라고 할 수는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자처럼 가축을 직접 키울 여건이 안 되기 때문에 자신이 먹는 동물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기 어렵고, 동물 복지 농장의 고기가 아직까지는 소수의 수요만 충족시켜 준다는 현실에서, 저자의 이런 주장이 현대의 육식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닭과 인간은 동반자로 지내 왔고, 공장형 축산법이 나오기 전까지 이 관계는 건강하게 지속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야생 가금류는 유전적으로 인간을 상대로 도박을 했고 그 도박은 성공이었다. 인간은 온 세계에 닭을 퍼뜨렸다. 정글에 사는 모성애 강한 어미 닭이 자식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하더라도 못다 이뤘을 원대한 꿈을 현실이 되도록 만든 것이다. (p.59)

저자는 현대 농장 동물의 번식이 대부분 인공 수정으로 이루어진다는 현실을 간과하고 있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강제 임신, 출산으로 이루어지는 번식을, 게다가 그런 번식을 통해 태어난 농장의 환경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게 낫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지옥같은 환경인데, 이런 번식을 동물이 인간을 상대로 벌인 도박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저자의 논리에 따르면 충동구매에 따른 동물 유기를 양산하거나 말거나 인간에 의한 개, 고양이 대량번식과 판매도 정당화되어야 할 것이다.   

 

 

II. 정치적 이유의 채식주의가 놓치는 것들

 

정치적 채식주의자들은 일년생 곡물을 키우는 농사가 생태계를 통째로 파괴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곡물은 또 다른 화석 연료이다. 풍요로운 곡물은 사실은 진짜 풍요가 아니다. 화석연료로 만든 비료로 대량 생산된 곡물은 결국 '줄기에 달린 화석 연료'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 곡물 시장을 지배하는 몬샌토, 카길 등의 거대 곡물 카르텔은 곡물 가격을 생산비용보다 낮게 형성시켰다. 그리고 낮은 가격과 생산 비용의 차액은 납세자의 돈으로 메우게 되었으며, 이것은 전 세계 소규모 농장과 지역 경제를 망쳤다. 이러한 기업의 공급 장악과 과공급, 덤핑 가격대 형성의 순환구조는 지역 생존 경제를 파괴하고 전세계 극빈민의 생계를 위협한다. 따라서 미국 곡물은 기아의 원인이지 해결책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몰랐던 사실이다. 정의롭고 지속 가능하며 지역 경제를 살리는 방법을 모색하다 보면 지구에 인간이 너무 많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는 저자의 주장에도 매우 깊이 공감한다.

 

그런데 저자가 농업의 해악을 근거로 채식주의에게 화살을 돌리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곡물 생산의 수혜자가 오직 채식주의자뿐인가? 대부분의 곡물이 식용 가축을 위해 재배된다는 것은 오늘날 상식이 되어 가고 있다. 결국 육식하는 사람들이 채식주의자보다 곡물을 더 많이 소비하는 셈이다. 이 책에서 제기된 현대 농업과 곡물 카르텔의 문제점, 윤리적 소비는 채식주의자/비채식주의자 모두가 고민할 문제이지 채식주의를 탓할 일이 아니다.

(참고로 유엔 국제식량농업기구는 2006 11 29일 발표에서 공장식 축산을 지역적, 전세계적인 토지 황폐화, 기후 변화, 공기 오염, 물 부족, 수자원 오염, 생물 다양성 파괴의 원흉 중 하나로 지목하였다.)  

 

III. 영양학적 이유의 채식주의가 놓치는 것들

 

, 채식을 가리지 않는 소화 능력은 인류가 멸종하지 않고 살아남게 한 유리한 습성이다. 인간은 오래 전부터 육식을 해왔고 육식을 통한 영양소를 통해 오늘날의 인간이 되었다.(p.236-7) 인간의 뇌가 지금의 크기로 성장한 것은 고기 덕분에 소화 기관의 크기가 줄어든 결과 남은 에너지를 뇌에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p.238) 인류의 조상이 육식을 했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p.241)  

인류가 고대부터 육식을 했다는 주장은 현대에도 육식을 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가 될 수 없다. 과거에 식인 문화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그것을 부활시키는 근거가 될 수 없듯이, 과거에 어떤 것을 먹었다는 사실은 오늘날 그것을 먹는 것의 타당성과 아무 상관이 없다. 게다가 현대 인류는 생존 조건에서 고대 인류와 비교 불가능한 우위를 점하고 있다. 인류 진보의 과정에서 여러 문화가 폐기되었듯이, 육식 문화도 이롭지 않다고 판단되면 폐기될 수 있는 것이다. 혹시 아는가? 인간 정신이 진보하고 기술이 발전해서 인류가 살생 자체를 야기하지 않는 음식으로 살게 될 날이 오게 될지?

 

나는 이 책에서 저자가 채식 때문에 앓게 되었다는 병에 대해서는 자세히 기술했으면서도 채식하던 시절 어떤 음식을 먹었는가는 거의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 의아하다. 저자가 어떤 식으로 채식을 했는가에 대해 내가 이 책에서 찾아낸 문장은 물론 다른 것은 전혀 입에 대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했으니 그렇게 먹은 것은 모두 탄수화물이었고... 고기에 대한 금기가 너무 엄격해, 단백질을 먹고 싶은 감정마저도 거의 동족 살해와 맞먹는 끔찍한 범죄처럼 느껴졌다.(p.288) 뿐이다. 물론 20년 동안 채식 라면만 먹고도 채식을 했다고 주장할 수 있겠지만, 전부 탄수화물로 이루어진 식단이 건강에 좋을 리는 당연히 없다. 탄수화물만 먹는 것이 채식이라고 믿는다면 저자는 한참 착각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황당하면서도 저자가 애처롭게 느껴진 부분이 있다. 채식의 영양학적 문제점을 기술한 후 저자는 이제 기름진 음식을 찾아 나설 때라며 지난 20년 동안 굶주려 온 바로 그 음식을 당장 먹자. 그게 무엇이든 지금 당장(p.335)이라고 외치는데, 생태계를 살리는 음식만 먹겠다는 초반의 비장한 결심은 온데간데 없다. 또한 저자는 , 이 정도면 뭔가 기름진 음식을 찾아 수렵, 채집에 나설 때가 아닌가?(p.288)라고 말하는데, <잡식동물의 딜레마>의 마이클 폴란처럼 멧돼지 사냥이라도 떠날 기세이다. 저자의 히스테리는 참치를 먹고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고동치고, 마침내 먹을 것이 공급되는 환희를 느꼈다(p.379)에서 절정에 달하는데, 참치는 저자가 이 책에서 먹자고 주장하는 지역 생산물은 아닐 것이다.    

 

나는 저자의 나라인 미국에서 채식으로 병을 치료하고 올바른 채식에 대한 강연, 저술을 통해 채식을 과학으로 확립시키고 있는 닐 버나드, 존 맥두걸, 콜린 캠벨, 조엘 펄먼, 칼드웰 에셀스틴을 비롯한 의학 전문가에 대한 언급을 이 책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 의아하다. 건강한 채식주의자와 채식으로 병을 고친 사람들은 저자에게 전부 투명인간일까? 게다가 현대인이 먹는 고기의 지방질에는 수렵, 채집 시대의 고기와 달리 각종 환경 오염 물질이 축적되어 있고 이것이 인체에서 암을 비롯한 문제를 일으킨다는 건 상식인데 이 책에는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다.

 

인스턴트, 정크푸드, 가공식품을 즐겨먹던 사람이 건강이 나빠진 원인을 육식으로 돌릴 수 없듯이, 저자도 채식을 탓하기 전에 자신이 먹는 것에 문제가 없었는지 점검해보았어야 할 것이다. 동물성이든 식물성이든 건강에 해로운 음식은 존재하며, 해로운 식품을 즐겨 먹던 사람이 건강 악화의 원인을 육식이나 채식 전반으로 돌리는 건 온당하지 못하다   

 

한편, 채식의 영양학적 문제점과 관련해서 이 책의 정보를 신뢰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한 전문가의 리뷰를 링크한다.  

 

베지닥터 이덕희 경북대 예방의학과 교수의 리뷰:  

http://vegedoctor.net/vegedoctor/bbs/board.php?bo_table=column5&wr_id=136

 

채식 영양 전문가 Ginny Messina의 리뷰:  영어로 된 리뷰인데 이 책의 저자는 영양학 자체에 대한 기본 지식이 부족하고, 책에 인용된 정보 역시 신뢰할 수 없는 것이며, 저자가 찬양한 지방에 대한 정보도 오류로 가득하다는 내용이다.  

http://www.theveganrd.com/2010/09/review-of-the-vegetarian-myth.html

 

 

 

맺음말: 세상을 구하려면

 

저자는 총체적 난국을 극복하기 위한 개인적인 해결책으로 다음을 제시하고 있다.

 

1. 가능하면 아이를 낳지 말자.

2. 차를 더 이상 몰지 말자.

3. 자기가 먹을 음식을 직접 기르자.

 

저자는 채식주의자들이 "광신적 추종 심리에 빠져 있다"고 비판하지만(p.425), 한번 더 혹평을 하면 내가 보기에 이 책은 자신이 한때 심취했던 광신적 채식주의를 세상의 모든 채식주의에 투사하여 자기 위안을 도출한 어느 극단주의자의 채식 탈출기이자 사이코드라마이다. 저자는 '카스리말'이라고 하는 성인의 지식을 얻었다고 하지만, 그녀는 채식 근본주의에서 생태 근본주의로 이동했을 뿐 극단적인 사고 방식은 변하지 않은 것 같다.    

 

이 책에서 저자가 인류의 현실에 대해 제기한 문제는 채식주의자들이 고민하는 문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수렵, 채집 시대에 대한 갈망이나 채식주의나 결국은 같은 고민에서 탄생한 대안이다. 하지만 이 책에 제시된 세 가지 해결책에 동참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저자의 생각에 통렬하게 동의하는 사람들도 대부분은 자기가 먹을 음식을 직접 기를 수 없고 여전히 공장식 축산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는 엄존한 현실에서, 이 책이 현재의 문제를 타개하는 것에 또는 동물의 고통을 줄이는 것에 채식주의보다 얼마나 기여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 책의 비판에서 멈추는 건 별로 의미가 없다. 나는 이 책에 대한 온라인 상의 반응을 검색해 보았다. "뭐든 골고루 먹는 게 좋지," "잘난 척 하더니 고소하다"는 반응들이 보였다.  

 

사람들이 채식주의에 대해 느끼는 장벽의 원인으로 세 가지를 들자면, 첫째는 "고기를 안 먹기는 어렵다," 둘째는 "채식은 건강에 좋지 않다," 셋째는 "채식주의자가 잘난 척하는 게 아니꼽다"일 것이다.   

 

첫 번째 "고기를 안 먹기는 어렵다"라는 장벽과 관련하여, 나는 완벽하기 보다는 최선을 다하는데 집중하자고 말하고 싶다. "채식주의자가 되자"는 말보다는 육식을 최대한 줄이자"는 말이 훨씬 쉽게 느껴질 것 같다. 채식'주의'라는 용어는 많은 사람들에게 완벽에 대한 강박을 심어주어 중도에 포기하게 만들곤 하는데, 완벽을 기하다가 중도에 포기하는 것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오래 지속하여 고통과 희생의 총량을 줄이는 것이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채식은 건강에 좋지 않다"는 장벽과 관련하여, 채식은 식단에서 단순히 육식을 제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잘못된 채식으로 건강을 해치는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올바른 채식에 대한 연구와 홍보가 꾸준히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나라에 채식을 권장하는 의사들의 모임인 베지닥터가 출범한 것은 매우 환영할 일이다. 이와 함께 채식인 스스로가 빛나는 모범이 되어 채식주의자는 건강하다는 인식을 일반에 심어주어야 할 것이다.   

 

세 번째 "채식주의자가 잘난 척하는 게 아니꼽다"는 장벽과 관련하여, 채식인의 당당함과 윤리의식이 잘난 척으로 비춰지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채식주의자가 잘난 척한다는 생각을 양산하는 직접적인 원인은 육식을 야만적이라고 비난하는 일부 채식주의자들의 배려심 부족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런 말을 노골적으로 들은 적이 몇 번 있지만, 채식주의자들의 의식도 진보해서 점점 듣기 힘들어지는 것 같다. 윤리적인 이유로 채식하면서 주위에 채식을 전하고 싶다면 스스로 자세를 낮춰야 할 것이다. 채식은 윤리적인 실천임에 틀림없지만 남들에게 우월의식과 반감을 느끼게 하는 태도는 채식에 중립적이었던 사람들마저 등돌리게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나 자신이 항상 조심했지만 예전부터 수없이 저질러왔으며, 지금도 고치려고 노력하는 문제이다. 물론 이 글에서 내가 잘난 척한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을 텐데 부디 너그러운 양해를 부탁 드린다.

 

나 혼자 열 걸음보다는 다 함께 한 걸음씩 나아가면서 옆 사람의 손을 잡아준다면, 그리고 이러한 노력을 초석 삼아 후대가 이어간다면 언젠가는 인간과 동물 모두 잘 사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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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맛계피사탕 2013-08-09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정말 정성스럽고 논리적인 서평입니다. 잘 읽고 갑니다. 덕분에 채식의 배신 안낚였네요 ㅎㅎ

다프네 2013-12-19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정말 잘 읽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건강하고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