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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어 시간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평점 :
요즘 한강(韓江)이라는 여류작가가 쓰고 있는 희랍어시간이라는 인터넷연재 소설을 읽고 있다. 아니 어제서부터 오늘까지 47회 분량을 다 읽고 또 내일의 글을 기다려야 한다.
서늘하다
라는 그녀의 글을 읽으면 서늘했다.
한두줄의 문장으로 읽는 나의 가슴을 사각사각 갉아대더니 문득 잊고 있었던 감각의 단어를 집어들고 "혹시 찾으시는 것이 이것 아닌가요, 서늘함?"이라는 느닷없는 습격은, 짝사랑하던 사람이 "날 사랑해?"라고 물었을 때의 정곡을 찔린 화끈함과 고개를 끄덕일 때의 후련함, 그것처럼 복합적이면서도 깔끔하다.
이렇게 우리말을 쓸 수 있다는 것에 놀란다.
20110810에 인터넷 연재를 읽으며
큰 변화를 겪고 있다. 그래도 마음 속은 고요하고 따스하다.
오늘은 강 가에 있는 도서실로 갔다. 넓은 창 가에 앉아 강물에 겨울 오후의 빛이 스미는 것을 보며, 책을 읽었다.
이 곳의 여름밤을 기억하니.
한 낮의 무더위를 보상하는 듯 서늘하게 젖은 공기.
흥건히 엎질러진 어둠.
플냄새. 활엽수들의 수액냄새가 진하게 번져있는 골목.
새벽까지 들리는 자동차들의 엔진소리.
뒷산과 이어지는 캄캄한 잡풀숲에서 밤새 우는 풀벌레들.
그 속으로 네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어.
희랍어시간 79쪽
이 글을 읽었을 때 강물 위로 감귤빛 햇살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그리고 창에 맺혔던 한기가 무릎 위로 슬며시 올라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강의 문장은 이미 가슴에 엎질러져 흥건했다. 마저 다 읽기로 한다. 서서히 장님이 되어가는 희랍어 강사와 말(言)의 날카로운 의미에 질려 그만 실어가 된 여자. 그녀는 어렸을 적 불어를 배우면서 실어에서 풀려난 기억을 더듬어 아무데도 쓸데없는 희랍어를 배운다.
강사와 수강생에 불과하던 그들은, 불의에 안경을 잃고 볼 수 없게 된 강사를 여자가 집에 데려다 준 때문에 강사와 하루밤을 보내게 된다. 거의 볼 수 없는 남자와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여자가 물끄러미 앉아 보내는 개와 늑대의 시간. 남자는 "거기 계세요"라고 물으며 어둠 저 편 어디에 앉아 있을 실어의 여자에게 자신을 이야기한다. 여자는 대답하지 못한다. 단지 속으로...
가끔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나요.
우리 몸에 눈꺼플과 입술이 있다는 건.
그것들이 때로 밖에서 닫히거나, 안에서 부터 단단히 걸어잠길 수 있다는 건.
같은 책 161쪽
그들이 입맞춤을 하게 된다는 사실은 논리도 필연도 아니다. 단지 난잡한 우연이고 고독한 탓이다. 하지만 이 문장은 진실에 근사하다.
눈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침묵이라면, 비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끝없이 긴 문장들인지도 모른다.
같은 책 17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