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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형식


영화는 현재에서 1980년대의 소설책을 가지고 있는 여자의 모습에서 시작한다. 그 소설의 작가는 60년대에 한 호텔에서 호텔 주인 제로 무스타파의 이야기를 소설로 적는다. 그리고 영화의 주 내용은 제로가 어렸을 때 스승이었던 호텔의 컨시어지 무슈 구스타브와의 모험담이다. 소설처럼 장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액자의 액자의 액자 구성에, 시대마다 화면 비율이 달라진다. 가장 주된 이야기는 거의 가로세로가 비슷한 비율로 마치 옛 영화를 폴라로이드로 찍은 활동사진 같은 느낌을 준다. 카메라는 거의 고정되어 있고 상하 또는 좌우로만 움직인다. 모든 장면이 잘 계산된 미장센에, 모든 씬 하나하나를 팬시점의 엽서로 만들어도 될 만큼 키치적으로 귀여우면서도 아름답다.



2. 모험담


구스타브는 몸은 어른이긴 하지만 생각과 행동은 아직 자신만 생각하는 아이같다. 향수를 뿌리고 금발을 사랑하며 손톱 색깔에 신경쓴다. 아이는 모두 순수한 동시에 이기적이다. 구스타브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면서, 제로와의 처음 관계는 순수한 우정보다 이기적인 계약관계로 시작한다. 충성을 맹세하게 하고 보수로서 일부의 재산 지급을 약속하는 계약을 한다.


모험을 끝내고 영화의 마지막에 처음의 열차 검문과 비슷한 씬이 나온다. 단 이번에는 제로 뿐만 아니라 아가사도 함께다. 구스타브는 가족이 모두 살해당한 제로와 고아로 보이는 아가사의 주례를 보며, 힘든 사건을 함께하며 도움도 주고받은 유대감도 쌓인 유사 가족이다(제로는 나중에 전 재산을 물려받게 된다). 구스타브는 이번에도 제로의 통행증 문제에 항의하다 얻어맞고 그에 더해 총에 맞아 숨진다. 그리고 아가사는 병으로 2년뒤 세상을 떠난다. 제로는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았지만 사랑하는 이들을 모두 잃었다.



3. 작가와 예술


"작가란 언제나 머릿속으로 상상의 나래를 편 채 무궁무진한 소재를 가지고 끊임없이 사건과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사실 작가는 직접 이야기를 창조할 필요가 없다. 그저 인물과 사건이 자신을 찾아오게 만들기만 하면 된다. 눈여겨보고 귀기울이는 능력만 갖추고 있다면 사람들은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기 마련이다. 운명을 좇는 자에게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을 이야기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 또한 뜻하지 않게 누군가가 내게 들려준 이야기를 거의 손대지 않고 있는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다." (초조한 마음, 슈테판 츠바이크)


영화나 소설은 당연히 허구의 이야기이고, 작가는 관찰과 상상을 통해 이야기를 그럴 듯하게 꾸미는 사람이다. 액자구성을 통해 이 영화(또는 소설)는 꾸며낸 이야기일 뿐임을 강조한다. 마치 할머니가 옛날 이야기를 해 주듯, 제로라는 화자를 통해 모험담을 들려준다. 그리고 듣는 사람은 그 이야기에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웨스 앤더슨은 어른들의 동화를 보여준다. 비율이 좁은 화면 내내 여정은 코믹하고 경쾌하다. 이야기가 끝나고 식사를 마친 작가는 제로에게 호텔의 유지가 누구를 위해서인지 묻는다. 제로는 호텔을 아가사를 위해 유지한다.


영화의 처음과 끝, 작가의 묘에서 여인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소설을 펼친다. 모든 이야기와 소설과 영화와 예술은 언젠가 빛바랜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영원한 것은 없다. 하지만 누군가를 기억해 주고 그 소중한 기억을 유지하려 한다면, 그 이야기와 예술은 오랫동안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4. 잘 모르겠음


영화라는 매체는 흡입력있는 경험을 주는 게 필요하다고 본다. 동화같은 모험담은 분명 예쁘고 귀엽다. 한데 이 영화는 삶이 이런 거라는 느낌을 주거나 하는 내용도 아니고, 어떤 가치를 추구하거나 찾는 것도, 어떤 감정이나 느낌을 불러일으키지도 않는 듯 하다. 분명 재기발랄하고 형식적으로나 비쥬얼적으로 흥미롭긴 한데, 훌륭한 영화인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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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란 것은 무엇일까. '말'은 수단이다.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도구이며 사실 언어 자체에 뭔가 대단한 가치가 있는 양 신격화하거나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말을 하고 싶어하고 듣고 싶어한다. 말은 사람과 사람을 잇는 수단이고, 사람을 이해하고 감정을 공유하며 사람과 연결되고 싶기 때문에 말을 한다. 단어를 채집하고 사전을 사랑하는 사전편집부 사람들은 단어를 바다에 떠있는 배에 비유한다. '단어'라는 재료를 엮어 넓은 바다를 헤쳐 상대에게 나아감으로써 '소통'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배를 엮다(짜다)'라는 원제목은 이를 잘 나타낸다. '아무'는 털실을 '뜨거나', 계획이나 일정을 '짜거나', 책을 '엮거나 편찬한다'는 뜻이라고 사전에 나와있다.


마지메군은 이름만큼이나 마지메해 보인다. 오타쿠 같은 느낌의 사회성 없는 인물이나, '단어'와 '말'로써 점점 사람들과의 소통에 눈을 뜬다. 사람은 원래 알 수 없기에 상대의 감정과 생각을 알고 싶어 말을 붙이고 말을 듣게 된다. 하숙집의 딸에게 꽂힌 마지메는 다소 어설프지만 서서히 다가간다. 그리고 전국시대 무사가 썼을 법한 붓글씨의 연애편지를 카구야에게 건네준다. 하지만 사전편집부의 선배인 마사시도 읽을 수 없는 난해한 편지다. 카구야는 겨우 나이많은 주방장에게 읽어달라고 부탁해서 내용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자신을 무시하는 듯 하다고 마지메에게 화를 낸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좋았던 장면이다. 카구야는 편지 말고 '말'(고또바)로 직접 '말하라'(윳떼)고 한다. 이미 편지라는 '수단'으로써 '내용'을 알아버렸지만, 그 도구 자체를 듣고 싶어한다. '소통'의 도구로써 '말'의 역할이 아닌, '말'이라는 것 자체를 듣고 싶어하는 것이다.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안다고 생각한다. 연인이 손을 잡고 아이를 껴안고 힘들때 누군가 말없이 안아주거나 토닥여주는 것. 가끔은 침묵 속에 감정이 공유되고 전달되는 것 같다. 하지만 어떤 때는 말이 필요한 때가 있다. 갓 시작한 연인의 열정 상태에서 서로의 감정을 느끼고 손을 잡고 있어도, '사랑한다'는 말 자체를 누구나 듣고 싶어하지 않던가. 그리고 그 말을 듣는 것 자체로 마음 속에 무엇보다 풍요롭게 채워지는 느낌을 받지 않던가. 어떤 때는 '사랑한다'는 말, '니가 젤 이쁘다'는 말, '오빠가 최고야'라는 말이 필요하다. 카구야가 말하라고 하고 마지메가 '좋아합니다'라고 말하는 부분은 정말 좋았다. 


단 하나의 오류도 용납하지 않는 사전만들기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모두 함께 나아가는 모습, 직업, 좋아하는 일, 장인정신, 돈벌이가 되는 일과 가치있는 일 등 여러가지 면에서 생각할 거리를 준다. 하지만 영화 자체는 템포도 개연성도 일본영화 특유의 유머나 으쌰으쌰하는 부분도 모두 별로였는데, 무엇보다 마지막 장면이 좀 그랬다.


아무리 마감이 얼마 안 남았기로서니 '단어'에 빠진 남편은 아내가 걱정하며 챙겨주는 밥도 거들떠 보지도 않고 일만 한다. 그리고 사전 출간 이후에도 개정판을 위해 또 열심히 일만 할 것 같다. 택시에선 내린 마지메는 카구야에게 말한다.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이게 뭔가. 앞으로도 이렇게 살려고? 마지메의 전임자 역시 훌륭한 편집인이었지만 병든 아내의 옆에 있어 주기 위해 출판사를 떠났다(죽고 나서 다시 돌아왔다). 일과 가정의 양립이란 게 신화일 뿐이든, 현실이 시궁창이어서 불가능한 것이든, 뭐든,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니, 여자는 거기에 대고 '마짱은 역시 재밌어'라고 대답한다. 이게 뭐야...


쓸데없이 혼자 열내나 싶어 생각해보니, 이제 스승이 죽고 홀로된 미망인처럼 외롭게 하지 않을테니, 지금껏 옆에서 잘 보살펴줬지만 (앞으로는 나도 잘할테니) 지금부터도 (그동안 해줬던 것처럼) 잘 부탁한다는 것일 수도 있긴 하겠다만.


토라(호랑이)라는 이름의 뚱보고양이는 완젼 귀엽고 카구야 역의 마야자키 아오이는 완젼 사랑스럽다.




ps 초반에 집중을 못해서 제대로 못 봤는데, 사전에 대해 설명하면서 올바른 용법과 흔히 사용하는 틀린 용법까지도 사전에 넣고 싶다는 이야기를 한다. 언어에 맞고 틀린 게 있을까. 언어는 항상 변화하므로 언중이 선택하면 그 뿐이다. 사전에 없다고 틀린 것도 아니고, 뜻이 변화하면 용법도 변하는 것이다. 변화하는 와중에 서로 같은 말을 해서 다른 뜻으로 오해할지언정 단어를 '올바른', '틀린', '잘못된'이란 제한을 둘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원문을 보기도 찾기도 귀찮아서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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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피곤한 삶


아버지는 선원으로 평생 배위에서 일만 하다 요양원에서 치매로 죽어간다. 그 아들 르윈은 항해사 자격증이 있지만, 하고 싶은 음악을 하며 살고 싶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다. 돈이 없어 친구들과 지인들에게 빌리고, 집도 없어 하루하루 그들에게 빌붙는 불안정한 삶이다. 음악만으로는 "이치닌마에" 즉 성인으로써의 일인분,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스스로 건사할 수 있고 사회에서의 몫을 감당할 최소한의 삶이 불가능하다. 삶이 비루해서인지 어쩐지 알 수 없지만 파트너의 자살도 아마 음악으로 유지가 불가능한 삶에 대한 비관이었을 것이다.


거기에 자존심은 있어서, 빌붙는 교수집에서 저녁식사 후 음악을 들려달라는 부탁을 탐탁치 않아한다. 음악은 밥벌이의 도구이며, 프로의 음악은 주크박스에 동전넣듯 아무앞에서 보여주는 게 아니다. 교수보고 저녁식사 후 강의를 부탁하면 아무렇지 않게 강의를 해야하는 게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확실하진 않지만 친구 짐의 아내 진을 임신시킨 건 더할 나위없는 피곤함의 극치다. 돈도 없는데 병원비를 구해야만 한다. 또 종종 그 친구집의 소파를 빌리는 데도 진의 짜증을 들어줘야 한다.


소파를 전전하는 그의 삶은 항상 피곤하고 지쳐있다. 이 피곤한 삶은 임계점에서 폭발하는 성질의 것이 아닌 듯 보인다. 그저 마지막으로 시카고의 클럽 거물에게 자신의 음악을 들려주고 성공하면 음악을 하고 아니면 이제 아버지와 같은 선원의 길로 들어가려 한다. 삶의 무게에 눌린 기나긴 피곤함과 무력함, 되면 좋고 안되면 이제 더이상 어쩔 수 없는, 희망도 출구도 없는 삶일 뿐이다. 내 목을 달아주어라.



2. 돈이 없어 피곤한 삶


능구렁이 같은 레코드 사장 멜은 르윈의 전 앨범 판매에 수익이 없다고 르윈에게 돈을 주지 않는다. 선원 조합은 밀린 조합비를 요구하고, 자격증 재발급비를 요구하며, 자격증이 없어 밀린 조합비를 돌려달라는 요구는 무시한다. 진은 낙태를 위한 병원비를 요구한다. 클럽 사장도 진과 관계한 마당에 진의 아이가 남친의 아이인지, 르윈인지, 클럽 사장인지, 아니면 다른 아이인지 모른다. 그래도 진은 루저 르윈에게 돈과 의사를 요구한다.


서로는 서로를 착취하고, 선원의 권리를 위한 조합은 조합원을 착취하며, 진은 개중 만만한 루저를 착취한다. 최소한의 경제적 안정이 없는 르윈은 착취의 대상이 될 뿐이다. 한심한 르윈은 코트도 없고 집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그저 기타 하나뿐이다.



3. 노마드


로드무비의 흔한 성장, 기회 같은 클리셰는 없다. 르윈은 히치하이킹을 하며 차를 타고 꾸준히 이동하지만 집이 없이 떠돌아 다니는 유목민의 정서, 황량한 도로의 이미지만 떠다닌다. 르윈에게는 시카고의 클럽이 마지막 기회다. 거물에게 인정받으면 음악을 계속하며 살 수 있을 것이다.


그 마지막 기회도 실패한 뒤 돌아오는 길에는 다이앤의 마을로 나가는 출구가 있다. 고속도로에서 본 다이앤의 마을은 불빛이 있고, 자신의 핏줄도 있을 것이다. 가고 싶지만 갈 수 없는 곳. 자신이 버린 여자와 아이가 있는 곳. 책임을 회피했다고 비난할 수 있을까. 여자는 아이를 낳는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사실 책임을 질 수 있는 능력도 없다. 우연히 품게 된 고양이도 결국 버리고 떠난 사람이 르윈이다. 아마 돌아오는 길에 차에 친 절뚝이며 숲길로 도망친 동물은 아마 그 고양이일지 모른다. 그리고 마을에 있을 그 자식일 수도 있다.



4. Winner takes it all


이제 곧 포크의 시대가 올 것이다. 하지만 르윈도 누구도 아무도 모른다. 우스꽝스런 노래로만 여긴 짐의 노래는 교수의 집에서 만난 손님에게 호평을 받고 저작권으로 인생역전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하지만 르윈은 실연에 따른 저작권을 병원비를 위해 포기했다. 포크의 시대가 와도 르윈은 성공할지 어떨지 클럽을 전전할지 모른다. 쇼비즈니스의 세계는 승자만이 모든 걸 갖는다.



5. 처음과 끝


영화의 마지막은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간다. 이번에는 고양이를 놓치지 않는다. 르윈은 클럽에서 연주하고 똑같이 양복 사내에게 얻어맞는다.


그리고 그 후에는 어떻게 될까. 아마 연주를 끝낸 돈으로 항해사 재발급을 위한 돈을 번 르윈은 배를 타고 그 아버지의 삶과 같이 똑같이 일만 하다 포크의 시대가 온 것을 후회하며 나중에 치매에 걸려 삶을 마감할 지도 모른다. 르윈은 루저다. 삶에 대한 책임도 없다. 할머니의 촌스런 음악과 촌뜨기들의 음악, 짐의 우스꽝스런 음악은 무시의 대상이다. 할머니는 남들을 즐겁게 해주고 싶어 무대에 섰을 뿐인데, 르윈의 독설을 듣는다. 르윈은 양복 사내가 타고가는 택시에 대고 냉소할 뿐이다. 


영화의 처음에는 맞는 이유가 나오지 않는다. 마지막에는 자신이 무시했던 음악을 한 할머니의 남편이 양복 사내임을 밝힌다. 사내는 계속 시궁창에 살라는 얘기를 하고 돌아선다. 자신만 생각하는 에고가 강한 르윈은 아마 앞으로도 변하지 않고, 그렇게 루저의 삶을 살 것이다. 경제적인 일인분도 못하고 책임을 지지도 않는 루저는 포크의 시대가 와도 고작 조그만 클럽을 전전하거나, 배를 타고 치매에 걸리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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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리뷰를 보니 여러 관점이 있다. 아마 다음에 다시 보게 된다면 더 넓은 시야로 미처 캐치하지 못한 부분을 볼 수 있겠다. 그러면 또 다른 의미로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영화의 처음과 끝 클럽씬에서 앵글이 다르다. 마지막에 밥딜런의 노래 제목은 "farewell"이다.

골파인 교수의 고양이 이름은 율리시스다. 그리고 머나먼 여정의 포스터를 본다.

골파인 교수의 부인이 화음을 넣었을 때 화내던 노래를 이제 죽은 친구 없이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음악적으로 나를 위한 노래를 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

르윈의 음악을 듣는 청중은 안 잡는다. 르윈은 왜 음악을 하는 것인가. 유일하게 잡은 청중인 아버지는 음악에 반응을 하는 것 같으나, 바지에 일을 본다.

왜 음악을 하나. 세상 힘든데 구경잘했다는 Hang me. 짐과 진, 짐과의 미스터 케네디, 화음4인조, 할머니의 음악 등 남의 음악을 들을때는 대체로 심드렁하다. 자기의 음악에만 집중한다. 예술은 별게 아닌게 아닐까. 아니면 원래부터 남의 마음을 움직일만한 힘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인가. 그럼에도 남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위대한 예술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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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touch of sin 지아 장 커 

 

 

1. 분노 

 

황량한 산을 가로지르는 오토바이. 멀리 고속철도로 보이는 다리는 공사중이다. 남자는 토마토를 싣고가던 트럭 옆에 멈춰있다.

 

남자는 마을의 공동재산이었던 탄광을 팔아먹은 촌장에게 불만이 있다. 관리해주는 대신 일정 수수료를 받기로 했는데, 한참이나 주지 않는다. 회계한테 얼마냐 받아처먹은 건지 묻고, 당 중앙위원회에 고발해보려고도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내말 좀 들어보라고 한다. 하지만 버스 안의 다른 사람들은 그저 듣기 귀찮다는 표정 뿐이다. 달구지를 끄는 말은 움직이려 하지 않고 농부에게 채찍질을 당하고 있다.

 

지주인 사업가 부부가 홍콩에서 개인비행기를 타고 돌아오는 환영회 때, 남자는 어처구니 없게 회장에게 도발한다. 그리고 골프공처럼 처맞는다. 남자는 퇴원후 호랑이를 두른 사냥총을 가지고 길을 나선다. 차례로 회계, 촌장을 차례로 살해하고, 달구지를 끄는 말을 채찍질하는 농부에게 총을 겨눈다. 전에는 그저 말을 무시하듯 지나갔지만, 이번에 그는 채찍질 당하는 말의 편이다. 마지막으로 회장의 머리를 날려버린 후, 주인없이 달구지를 끌고 가는 말을 보며 미소짓는다.

 

남자는 분노한다. 마을 사람들은 공동재산으로 자신들만의 배를 불린 회장과 촌장에게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돈을 달라고 했다가 골프공처럼 얻어맞은 자신에게 골선생이라며 놀린다. 남자는 순수한 분노를 표출한다. 그저 목적은 회계, 촌장, 회장을 죽이는 것 뿐.

 

 

2. 싸이코패스

 

영화 처음에 청년 셋을 무심히 살해한 남자는 총 소리를 듣는 것이 즐거울 뿐이다. 어머니의 칠순 잔치에 맞춰 고향에 내려가지만, 오랜만에 보았을 아이를 억지로 잡아끄는 폭력적인 남자다. 물론 설날의 불꽃놀이에 맞춰 총의 화염을 보여주기도 하는 가부장이기도 하다. 남자의 집은 시골이다. 저 멀리 고층 아파트와 비교하면 너무나 가난한 동네다.

 

가난한 동네에서 가난한 자들이 마작판에서 시비가 붙어 싸움을 한다. 상대의 부인은 타지로 돈 벌러 나갔고, 어떤 남자와 붙어있을지 모르며 그로 인해 에이즈 검사를 해야한다는 시비다. 남자는 싸움을 보며 썩은 미소를 날릴 뿐이다. 

 

사실 남자는 부인에게 꽤 많은 돈을 부쳐주기도 하지만, 부인은 그 돈을 쓰기에 떨떠름하다. 부인은 남자가 시골에 정착하기를 원하지만 남자는 더 좋은 총을 가지기 위해 미얀마로 갈 생각을 한다. 집을 다시 떠난 남자는 대낮 길거리에서 은행에서 나오는 부잣집 부부를 총을 쏘고 가방을 탈취한다. 그리고 유유히 사라진다.

 

슬리핑 버스를 타고 가다 어딘가에서 그냥 정처없이 내린다. 사소한 시비를 거는 양아치든, 대낮 길거리든, 어디든 가리지 않고 총질을 해대는 남자에게도 처자식과 엄마가 있다. 목적없이 또는 돈을 목적으로 죄책감없이 마음껏 살인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

 

 

3. 여자

 

불륜관계의 남자는 여자를 만나고 돌아가는 고속철도 안에서 사고를 당한다. 멈춰있던 고속열차를 들이받은 고속열차는 탈선하고, 다리 위에서 몇 량이 떨어져 200명이 넘게 사망한 사건이다. 이유야 여럿 있겠지만 철도 인맥의 공직자 비리도 한 몫 했다. 여자는 몸을 파는 안마소의 카운터에서 일한다. 남자의 부인이 찾아와 여자를 구타하고, 여자는 심신이 지쳐있다.

 

마침 공사중인 동네의 도로에서 통행세를 받아 먹던 건달이 찾아온다. 그리고 업소의 아가씨를 초이스하지 않고 여자에게 서비스를 받고 싶어한다. 여자는 싫다고 난 몸파는 여자가 아니라고 하지만, 건달은 돈을 듬뿍 줄테니 서비스를 받자고 한다. 건달은 돈다발로 여자의 얼굴을 치고, 여자는 맞아도 맞아도 두 눈을 치켜뜬다. 그리고 어느 순간 불륜의 남자가 주었던 과도 칼로 건달의 가슴을 베고, 배를 찌른다.

 

 

4. 청년

 

청년은 고속철도로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떠난다. 전에 일하던 세탁 공장에서는 자기잘못이 아님에도 월급을 차압당해 도망쳤다. 새 일자리는 카지노 업소의 웨이터다. 젊은 여자들을 코스프레식으로 입혀놓고 쇼를 보여주기도 하고, 상황 설정을 하고 성매매를 하기도 한다.

 

탈의실에서 청순한 얼굴의 여자를 만난 청년은 여자에 관심이 있다. 둘은 여자의 아이패드로 인터넷에 댓글을 달면서 낄낄댄다. 남자의 핸드폰은 제일 싼 모델이다. 친해진 둘은 같이 방생을 하기도 하고, 부처님을 만드는 석상 공장 앞에서 참배를 올리기도 한다. 비오는 날 폐차장에 놓인 차안에서 키스를 하지만, 여자는 업소에서는 진정한 사랑이 없다고 한다. 자신은 부양해야 할 아이가 있단다.

 

청년은 손님에게 과일을 갖다주며 여자를 훔쳐본다. 여자는 손님의 요구에 가슴을 핥고, 청년은 그 모습을 보고 일을 그만둔다. 새로 일하게 된 공장은 일주일의 실습에는 돈을 받지 못하지만, 기숙사도 있고 적당히 돈을 벌 수 있는 글로벌 전자회사다. 청년이 관리자에게 어디 출신이냐고 묻자, 관리자는 타이완이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기숙사에서도 어디에서도 뿅뿅 거리는 전자음이 들린다.

 

고향의 엄마에게 돈을 부치고 나오는 은행 앞에서 엄마의 전화를 받는다. 엄마는 돈을 함부로 쓰지 않냐며 청년을 비난하고, 청년은 짜증나고 억울할 뿐이다. 명백히 폭스콘을 연상시키는 공장의 청년은 아이패드를 쓰는 여자를 떠나, 공장에 들어왔지만 이제 더 이상 돈도 없고, 일하고 싶지도, 사랑을 하지 못하는 자신도 싫다. 그리고 폭스콘의 노동자처럼 기숙사에서 투신한다.

 

 

5.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가

 

영화는 내내 폭력을 보여준다. 직접적인 폭력, 총과 칼과 구타가 일상적이다. 하지만 물리적인 폭력을 부르는 구조적인 폭력은 어떠한가. 누구나 물리적 폭력에 대해서는 쉽게 비난할 수 있지만, 구조적 폭력을 받고 있음에도 무기력하다. 상대가 누군지, 실체가 있는지도 불분명하다. 비리, 탄광, 고속철도, 폭스콘, 가난, 물리적인 폭력은 어딘가 원인이 있고 그것이 인간의 탐욕이든 사회의 시스템이든, 구조적으로 내재되어 있지만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영화는 중간중간 탐관오리를 벌하는 경극을 보여준다. 아마도 경극은 사회가 너무나 썩었기 때문에 발전한 지도 모른다. 현실 속에서 힘이 없는 자들은 저항할 수 없고, 연극 속에서만 정의를 실현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경극을 구경하던 단체관광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경극의 관객이다. 카메라의 시선은 할아버지 할머니를 가리키고 있고, 경극 배우는 "네 죄를 네가 알렸다!"고 외친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시선은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을 향한다. 그리고 묻는다. "네 죄를 네가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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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큐브의 영사기 상태가 좋지 않아, 처음 5분을 한 세번 다시 반복해서 틀어줬다. 덕분에 쓸데없는 옥의티 하나 발견. 모자쓴 살인자의 오토바이가 토마토 트럭 옆 멈춰선 오토바이 사이로 지나가는데, 처음 장면을 보면 그 정도 공간이 나오지 않는다. 중간중간 끊김 현상으로 인해 또 언제 끊기려나 하는 불안감으로 집중하기 힘들었다. 필름 영사기처럼 픽하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화면이 이지러지면서 그린스크린이 뜨기도 하고 디지털 시대에 맞는 영화의 끊김이었다. 하지만 영화 상영 후 초대권으로 짜증은 사라졌다-_-;; 태광그룹은 최근에 증여세 및 소득세 관련해 뉴스에도 몇번 나오긴 했다. 문화재단으로 사회공헌을 하는 기업으로 문화적 안목이 높다는 세간의 평가가 아쉬울 따름이다. 그래도 시네큐브는 계속 유지했으면 하는 바람. 천주정을 보고 나오니 더욱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중국이 이 영화 개봉을 허가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인터넷도 검열하는 곳에서. 영화를 보면 역시 아직은 기 소르망의 중국에 대한 판단이 맞는 듯 싶기도 하다. 영화 속 사건이라든가, 지리 등, 옆나라임에도 중국에 대해 잘 몰라, 영화를 더 즐기지 못함이 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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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진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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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바스 키아로스타미

 

 

1. 혼자 말하는 것처럼

 

오프닝의 롱테이크는 바에서의 모임을 보여준다. 시선은 바를 향해 있고 여주인공 아키코가 전화하는 목소리를 듣는다. 마치 일인극 같은 느낌을 준다. 이런 기법은 할머니의 문자메시지를 듣는 아키코, 노교수 타카시의 옆집 아주머니 등 전반적으로 사용된다. 한쪽의 말을 다른 쪽에서 듣는다. 듣는 사람은 대답할 수 없거나, 굳이 길게 대답하지 않는다. 그리고 화면은 듣는 사람의 표정을 보여준다.

 

아키코의 남자친구 노리아키는 우연히 만난 노교수 타카시의 차 안에서, 아키코와는 대화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노리아키는 비록 집착의 형태이긴 하나 아키코를 사랑한다. 타카시와 아키코는 처음 만난 밤에도 특별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림에 대한 이야기, 사진, 지네 농담만 했을 뿐이다. 타카시는 와인을 마시면서 아키코와 대화하고 싶지만, 아키코는 그저 피곤해서 자고싶다. 그럼에도 노인은 아키코를 사랑한다.

 

사랑에는 여러 형태와 감정이 있다. 연민으로 시작된, 집착하는, 항상 싸우고 투닥거리는, 우리가 진정한 사랑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것들도 모두 사랑일 것이다. 노리아키도 타카시도 아키코를 잘 모른다. 노리아키는 아키코에 집착하고, 타카시는 연민이든 사랑의 대상이 필요한 것이든 그 무엇이든, 둘 다 아키코를 사랑한다. 상대를 잘 몰라도, 대화가 통하지 않아도, 사랑에는 조건이 없다. 타카시는 노리아키에게 사랑은 해도 결혼은 안된다고 말한다. 사랑에는 조건이 없고, 결혼에는 조건이 있다. 타카시 역시 아키코를 사랑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결혼은 불가능할 것이다.(아키코의 감정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2. 타카시의 사랑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하는 아키코는 추측상 시골에서 도쿄에 상경하고 대학을 다니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일 게다. 젊고 순진한 남자일 수록 화류계 여성을 만나면 사랑에 빠지기 쉽다는 속설이 있다. 연민의 느낌으로 시작하는 감정은 이 사람을 보호해 주고 싶고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발전하며 사랑의 감정으로 나아간다. 타카시는 연민으로 시작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노리아키는 공중전화에 붙어 있는 찌라시를 보고 의심하며, 보호해주고 싶은 한편 나만이 소유하고 싶은 욕구가 집착으로 나타난다.

 

타카시는 아키코와 밤에 만나 짧은 이야기만 나누었고, 밤을 같이 보냈다. 그리고 다음날 대학에 데려다 주고 아키코의 시험치는 시간을 기다려준다. 그리고 노리아키와 우연히 만나 대화하고, 정비소에서 차를 고친다. 타카시는 아키코를 고작 만 12시간 정도 밖에 보지 않았다.

그렇지만 돌아오는 차 안에서 긴장이 탁 풀려서 졸며, 아키코의 전화를 받고는 출판사에서 인쇄 중단을 일으킨 한 줄의 원고 수정 일을 박차고 나간다(전날에는 몇줄의 번역 부탁을 마지못해 들어주었다). 마지막 시퀀스에서 노리아키의 갑작스런 들이닥침에 안절부절하고, 창문으로 여기저기 기웃거린다.

 

타카시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사랑은 안정기에 접어들기 전에는 언제나 불안한 것이어서, 노리아키의 고성과 차의 유리창이 깨지는 장면에서는 안절부절 못한다. 그리고 돌이 날아들어 창문이 깨지며 뒤로 나자빠지는 장면은 올해의 마지막 장면이라고 할 만하다. 사랑의 설렘, 긴장, 불안, 들뜸을 이 장면 하나로 보여준다. 그리고 관객은 이 귀여운 노인때문에 미소짓게 되고 입꼬리가 나도 모르게 올라간다.

 

 

3. 도쿄, 캐릭터

 

도쿄는 세계에서 가장 도시화된 대도시 중 하나일 것이다. 키아로스타미는 도쿄의 도시화된 모습과 자동차가 인상적이었나보다. 차를 운전하는 모습이나, 차 안에서 보는 시점 숏이 많다. 특히 아키코와 하룻 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키코를 데려다 줄 때의 차 앞유리에 비친 고가도로 씬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영화의 여러 좋은 점에도 불구하고 캐릭터가 전형적인 모습이 아쉽다. 아키코는 집착하는 남자친구와 쉽게 헤어지지 못하는 수동적이 모습에, 지네 농담을 이해못하는 순진함을 가졌고, 내내 피곤해하며 잠을 자는 무기력하고 수동적인 캐릭터이다. 일본 여성의 수동적인 면과 화류계에서 일한다는 자기비판으로 무기력하다는 느낌이다. 타카시는 나이 많고 지혜로워 보이며 인자한 고학력 교수다. 노리아키는 젊고 혈기넘치는 중졸의 자동차 정비 사업가로 폭력적이고 공격적이다. 영화의 물리적인 2시간과 내용상 만 하루도 채 되지 않는 시간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딱히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도 없고 필요도 없지만 전형적인 일본 화류계 여성과, 지혜로운 노교수, 폭력적이고 감정적인 젊은 남자친구라는 클리셰를 사용한 점은 아쉬운 점이다. 어쩌면 전형적인 사람들이 사랑하는 것, 사람 사는 건 어디나 누구나 비슷하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함일 수도 있겠다.

 

 

4. 사랑에 빠진 사람

 

한때 화제가 되었던 변종 성매매 업소인 키스방에서는 중년 남성이 먹을 것을 사들고 가, 같이 먹으면서 대화를 나누기 위해 온다는 경우도 들었다. 중년 노년이 되면 사회적으로 마치 무성의 생물이라는 가정하에 보고 대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리고 가정과 사회에서 소외되는 사람들은 아직도 여전히 사랑이 부족하다. 노인인 다카시가 한참 젊은 아키코를 사랑한다고 해서, 잘못된 점이 있을까. 누군가 비난할 수 있을까. 사랑에는 우리 모두 항상 초보고, 나이, 인종, 성별, 종교를 떠나 사랑은 무조건 옳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에 빠지면 일단은 될대로 되라, 케세라 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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