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는 당연하지 않다 - 어쩌다 자본주의가 여기까지 온 걸까?
데이비드 하비 지음, 강윤혜 옮김 / 선순환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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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출신의 마르크스 이론가이며 지리학자이다. 현 뉴욕시립대학교 대학원 인류학 교수로 재직 중이고

자본주의 모순에 대해 사회주의적 대안을 찾는 학자이자 실천가이기도 하다.


책을 읽기가 많이 힘들었다.

갑자기 바빠진 일정 탓도 있지만 책이 담고 있는 무거움이 자꾸만 책장을 덮게 만들었고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대한민국, 이 시대,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당면한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있는 책의 내용 때문이기도 하다.

지구촌 곳곳의 불안한 상황을 염려하는 시각으로 시작되는 글은 희망 없는 미래를 바라보는 민중들의 마음과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투쟁과 소요를 통해 나타나고 있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지적하고 있다.

매체의 발달로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을 알고 있는듯하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소요가 어느 곳에선가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으며 이로 인한 고통으로 신음하며 오늘을 살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의 삶은 자본주의가 가져다준 상처이다.


자본주의의 결정적 모순 그것은 '사회적 불평등' 이었다. 또한 자본의 결집과 더 많은 자본을 축적하기 위해 행해지는 산업화는 기후의 변화를 초래했고 자연환경의 파괴가 시작되었다.

환경의 파괴 -- 심각하지만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되었다.

자본의 속성은 항상 성장을 추구하고 이윤추구를 위해 더 많은 노동력을 착취해야 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복리 성장 - 라처드 프라이스는 예수가 태어난 날에 5% 복리 이자로 1페니를 투자할 경우 1772년이면 투자가치가 순금으로 지구 부피의 150배에 달하게 될 것이라고 계산했다. 반대로 1페니를 단리 이자로 투자할 경우에는 1772년이 되면 불과 7실링과 잔돈 몇 푼의 가치밖에 안될 것이라고 했다.


자본주의는 복리 성장을 추구한다.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자본 없이 살수 없지만 다른 한편으론 자본은 자멸의 길을 가고 있기 때문이다.


1970년대에는 환경규제 법, 소비자보호법, 산업안전보건법 등 반기업적 성향의 법안들이 많이 통과되자 기업들은 위기의식을 느꼈고 이러한 반자본주의로 기울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단체들이 결집했고 비즈니스 라운드 테이블과 같은 새롭게 조직된 조직들이 무수히 조직되기 시작했다.


정치세력을 유지하기 위한 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기업들과 손을 잡게 됐고 기업은 정치적 권력의 지지 아래 그 세력을 더 키워나갔으며 이는 역사 속에 늘 존재해왔던 정경유착의 고리가되어 더 견고해졌다.

마거렛 대처는 경제체제를 신자유주의로 전환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고방식과 경제 문화 전반을 바꾸려 했고 개인주의, 개인의 책임, 자기계발 등을 중시하는 사고방식을 주입시켰으며 가난은 자신에게 투자를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돌려 자립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국가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신자유주의는 독재체제로 바뀌어갔다.


주택은 사람이 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투자의 목적으로 변모했고 상품이 되어 투기화되어갔다. 삶이 목적이 되지 못한 주택은 사용 가치가 아닌 교환가치로서의 주택으로 추락하게 되었다.

인간생활의 모든 것이 화폐화 되어가는 현실 속에서 정치적으로 난해한 문제에 부딪쳤을 때 돈을 쫓아가라. 돈의 끝은 권력이라는 말은 누구나 다 아는 정설이 되었다.


곽수종 박사가 저술한 혼돈의 시대, 경제의 미래에서도 언급한 중국 경제에 대한 이야기를 데이비드 하비도 강조하는 것을 보면 세계경제에서 중국의 중요성은 이제 공공연한 사실이 되었다.

중국은 경제침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2009-2012 건설에 투자를 하면서 미국이 100년에 걸쳐 사용한 시멘트를 3년 만에 소비하였다. 이로 인해 금융위기로 인해 침체되었던 세계경제가 조금은 활력을 얻기도 했다. 이제 중국은 거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은 어떠한 종류의 자본주의가 될 것인가?


자본주의 국가들은 이제 노동자들을 한 인격이 아닌 기계의 일부분으로 취급하고 있으며 분업화된 노동력은 조직화를 방지하는 구실을 하게 되었다. 노동자들은 시간과 자유를 박탈당한 채 열악한 환경과 적은 임금체제 안에서 유린을 당하고 있지만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대책은 제시되지 않고 있다.

부자들은 돈으로 시간을 사고 가난한 사람들은 시간으로 돈을 벌어들이기 위해 허덕이고 있을 뿐이다.

정규직 감소와 비정규직의 증가는 노동자들로 하여금 소외감을 가지게 했고 노동의 불만족스러운 삶은 보상적 소비 현상으로 나타났다.

소비는 기업의 자산을 증가시키는 일일뿐인데 말이다.


소외된 가난한 사람들의 불만이 응축되어 폭발하면 걷잡을 수 없는 소요가 발생할 것이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또 하나의 문제는 기후변화로 인한 생태계의 파괴이다. 미국 본토를 가로지르는 비행기 한대의 배출가스는 1년 동안 차량 수천 대를 사용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관광을 위해, 비즈니스를 위해 수많은 비행기들은 하늘을 가로지르며 가스를 배출하고 가스는 대기를 오염시키며 기후변화를 촉진하고 있다.

이에 대한 대안은 나무(木)이다.

하지만 아마존을 비롯한 지구 곳곳의 열대우림은 파괴되고 있고 이 모든 것의 배경에는 근본적으로 자본축적이라는 커다란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북극의 영구동토층이 녹고 있다.

그 안에 갇혀있던 메탄가스는 대기층을 가로막고 있다. 메탄가스는 탄소보다 더 치명적인 온실가스이다.

이미 환경복원에 대한 기대는 없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자연은 스스로를 치유하기 위해 여러 번의 시도를(빙하기 등) 통해 간신히 유지해 왔지만 이제 산업이 발전하기 시작한 지난 40여 년에 걸쳐 파괴된 환경은 복원할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다고 말한다,

코로나19는 폭력적이고 무절제한 신자유주의 자들이 자연을 무자비하게 학대하고 남용한 죄에 대한 자연의 보복이다. 끝없이 팽창하고 성장하는 자본주의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는 많은 생명을 앗아갔지만 반대로 자연적 생태계의 복원을 가져오기도 했다. 중국의 미세먼지가 감소하고 대기가 맑아졌다.

또한 강대국들이 표현을 하지는 않지만 코로나로 사망한 많은 고령자들은 고령화사회를 완화하는 역할을 했다는 통계가 있기도 하다.


자연은 복원할 수 없는 단계까지 훼손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이라는 말이 무색하다.

누가 누구와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일까?

돈을 벌기 위해 시간을 들여 노동을 해야 하고 노동으로 인해 약해진 육체는 돈을 소비해도 회복될 수 없는 상황이 되어가고 있다. 결국 노동을 하기 위한 시간과 에너지는 일부만의 재산을 증식시키고 증식된 재산은 복리 성장을 하여 거대한 괴물이 되어가고 있다.


고정순 작가의 시소라는 그림책이 있다.

시소(SEESAW)는 영어의 발음 그대로의 말이다.

시소는 혼자서는 탈 수 없는 놀이 기구이기에 누군가 상대가 있어야 하지만 그 상대가 너무 무겁거나 반대로 너무 가벼우면 재미없는 놀이 기구가 된다.

비슷한 무게를 가진 상대와 시소를 타면 동력을 이용하지 않은 최고의 놀이 기구가 되어 발을 굴러 내가 위로 올라가면 상대는 내려가고 반대로 상대가 오르면 내가 내려간다.

그리고 시소를 타다 보면 상대와 눈을 마주치기도 한다. 마주 본다는것은 상대를 받아들인다는 뜻이기도하다.

놀이 기구가 중심을 잡고 있지만 그것을 이용하는 것은 놀이 기구를 이용하는 사람이다.

자본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누군가 얻으면 내가 잃는 게 아니라 자본이 중심을 이루고 높고 낮음은 존재하지만 서로를 의지하고 도움을 주고받는 시소처럼 살아갈 수 있다면 소외된 약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 않을까?


인간의 성장은 노화라는 말이 생각난다. 생명이 시작되면서부터 성장을 통해 노화가 진행된다. 처음엔 성장이 기쁨이 되고 자랑이기도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성장은 멈추고 노화가 시작된다.

소멸을 준비하는 것이다. 세상에 죽고 싶어 사는 사람은 없겠지만 누구나 죽음을 향한 시간의 흐름을 멈출 수는 없다.

어차피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시간들이라면 조금은 더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찾는 것이 조금 더 의미 있는 죽음으로의 여정이 아닐까 생각한다.

자본주의는 수많은 모순을 안고 쇠퇴하고 있다. 자본은 인간 생존을 빌미로 인간의 목숨줄을 잡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더 많은 자본을 소유하기 위해 자본의 노예가 되어 오늘도 혹독한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자본을 생명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며 앙망하기까지 한다.

분명 자본은 인간이 만든 것이지만 이제는 자본이 인간을 조종하고 있다. 그것도 저열하게....


이제는 자본을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고

자연에 관심을 돌려

설사 되돌리기에 늦었더라 하더라도

더 훼손되지 않게 노력을 하고

작은 회복이라도 이루어지도록

온 힘을 기울여야 할 때이다.


자본주의 건 사회주의 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진정한 평등을 위한 노력과 인간존중의 마음을 갖는 일이 그 어떤 주의보다 우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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