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인 (양장) 소설Y
천선란 지음 / 창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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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만든 척박한 환경(環境). 그건 익히 말하는 자연 환경에 한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인간이 무리를 짓고 만들어 낸 사회 환경 또한 가정과 학교 어느 곳에서든 벌어지는 폭력으로 척박해졌다. 그리고 <나인>은 바로 그 환경 속에서 싹을 잃지 않고 자라는 아홉 번째 싹, 주인공 ‘나인’에 관한 이야기다.


전체 줄거리

열일곱 살 유나인은 이모와 단둘이 지구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고등학생이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나인은 식물들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손톱 사이에서 새싹이 돋아난다. 나인을 키운 이모가 그제야 알려 준 비밀은, 나인은 ‘누브’라는 외계인이며 특별한 능력이 있는 존재라는 것. 식물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 나인은 2년 전 자취를 감춘 실종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고, 친구 ‘현재’와 ‘미래’, 그리고 같은 누브족 ‘승택’과 함께 이 사건을 파헤치기로 마음먹는데....

※해당 포스팅은 스포일러와 자체적인 해석을 담고 있습니다


《나인》이 말하는 죄책감이란 기적

- 붉은 선의 경계와 나인의 푸른 힘

<나인>은 다양한 사회 이슈를 다루고 있다. 능력주의, 자본 만능주의, 가정 폭력, 학교 폭력 등 하나하나 꼽자면 끝이 없을 정도다. 그 중에서도 <나인>에서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주제는 이를 모두 아우르는 ‘죄’와 그것을 뉘우칠 수 있는 감정인 ‘죄책감’. 그리고 마침내 죄를 뉘우치고 고치는 ‘회개’이다.

하지만 도현은 그런데도 들어가고 싶었다. 들어가서 딱 한 마디만 하고 싶었고, 딱 하나만 묻고 싶었다.

겁주려고 밀친 거예요.

그때 바로 구급차를 불렀으면 살았을까요?

(중략)

목사에게 뺨을 맞은 뒤에야 초점이 또렷해졌다. 아비 인생 망치려고 작정했느냐고 고함쳤다.사람을 죽인 자식을 둔 목사라는 건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그럼 목사를 그만두면 되었을 텐데 목사는 죽은 자를 없애자고 했다. 이미 죽었는데 어떻게 또 없애지. 도현은 그런 생각을 하며 목사가 시키는 대로 했다. 술을 안 마셨다면 안 그랬을까. 제정신이었다면 목사가 아니라 구급차를 불렀을까. 그럼 살았을까. 살았으면......

도현은 소위 ‘있는 집 자식’이다. 그의 부모는 도현의 주변 친구들을 다섯 개의 등급으로 나누어 1등급의 아이들이 그와 어울리길 바랬다. 부모가 양쪽 모두 살아있고, 집은 어느정도 부유하며, 공부도 썩 잘하는 친구들. 그러나 실종된 원우는 그와 반대되는 5등급의 아이였다.

ㅡ편부가정과 가난.

도현의 부모님은 원우를 단 두 단어로 정의내렸다. 도현 또한 처음에는 원우와 어울리다 점점 부모님의 압박이 심해지자 원우가 정말 5등급의 아이는 아닐까 의구심을 품게 된다. 그러다 서로 오해가 생겨 그만,도현이 원우를 밀쳐 원우가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여기까지는 비극적인 사고였다. 그러나 도현의 부모님이 도현이 소년원에 들어가는 것을 걱정해 원우의 시체를 도현의 손으로 직접 땅에 묻게 하며 상황은 달라졌다. 살인이 되었다. 도현은 그 이후로 죄책감에 시달리며 죽은 원우의 환영을 본다.


도현은 경계에 서 있다. 붉은 선의 경계. 넘으면 돌아갈 수 없다. 그 경계를 넘으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무언가 들려도 신경 쓰이지 않을 것이고, 보여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것이다. 경계 너머는 현실과 비현실이 혼잡하게 섞인 세계. 피는 꽃처럼 터지고, 길고양이는 솜 인형처럼 느껴지는 부드럽고 잔혹한 세계.

붉은 선의 경계 너머로 떠난 사람들은 더 이상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고 완전히 죄에 물들게 된다.

수많은 뉴스에서 우리는 죄책감조차 느끼지 못하고 붉은 선의 세계로 넘어가 버린 이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당직 때 죽는 환자 귀찮아서... 링거 살인 日 간호사 무기징역’, ‘무슨 낯으로 전자발찌 살인 강윤성, 국민참여재판 신청’ 등 세상에는 죄를 저지르고도 전혀 뉘우치는 기색 하나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나인>에서는 도현에게 당연하듯 친구의 시체를 묻으라 윽박질렀던 그의 부모님이, 금옥을 잔혹하게 총과 칼로 찔러 죽인 일본군이, 소수라도 살리기 위해서라며 같은 종족을 죽였던 승택의 조상이 그러했다. <나인>에서는 붉은 선을 넘은 자들과 그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교차해 보여준다.

그러나 도현은 아직 낯이 두껍지 않다. 죄책감에 이마를 찧으며 원우의 환영을 향해 꺼지라고 외친다.

도현이 그 경계의 선을 밟기 전에 누군가 다시 이곳으로 끌고 와야 한다. 비린 냄새와 어두운 산이 존재하는, 고통이 잇따르는 잔혹하기만 한 세상으로.

그렇지만 내일이 있는 세상으로.

“기회를 주려고 부른 거예요.”

그 말을 듣자마자 권도현이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기회?”

“선배가 한 짓을 인정하고 직접 용서를 구할 기회요. 이년 전 여기서 벌어졌던 일. 선배랑 선배 친구들이 벌인 일요.”

"말을 똑바로 해. 내가 무슨 짓을 했는데? 나는 잘 모르겠거든."

(중략)

“선배도 살리고 싶었잖아요. 죽이려고 한 거 아니었잖아요. 그래서 아빠한테 전화 걸었던 거였잖아요. 도와 달라고 그런 거잖아요. 그럼 그때 못 한 거 지금이라도 해요. 더 늦기 전에 박원우 여기에 있다고. 그래야 박원우가 가족한테 돌아가죠. 언제까지 내버려 둘 거예요? 더 후회하기 전에 그만 모든 걸 돌려 놔요.”

<나인>에서는 죄를 붉은 선으로 표현하며 동시에 도현을 붉은 선에서 ‘이곳’(죄를 뉘우치는 것, 모두가 있는 현실)으로 끌고 오는 매개체로 주인공 나인을 가리킨다. 이미 금옥은 일본군에 의해 살해당했다. 이미 많은 누브 족은 승택의 조상으로 인해 사망했다. 하지만 아직 도현을 구할 기회는 남아있다. 그가 아직 가해자이자 '피해자'일 때. 완전히 빨간 선을 넘기 전에... 나인은 식물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종족의 특성을 사용하여 도현과 원우 사이에 벌어졌던 일을 확인하고 도현이 자신의 죄를 스스로 토해내게 만드려 노력한다.


"외계인 같은 거 세상에 정말 있다고요."

나인이 권도현의 눈을 주시하며 말했다.

"그게 나니까."

나인이 오른발을 들어 올렸다가 바닥으로 세게 내리쳤다. 물줄기가 뻗어 나가듯 파란빛이 사방으로 퍼졌다. 닿을 수 있는 곳까지 멀리 퍼져 어둠이 내려앉은 산에 빛을 밝혔다. 파랗게 빛나는 땅을, 권도현이 바라본다.

"박원우가 어렸을 떄 이 산에서 외계인을 만났어요. 엄마라고 생각했던 나무가 죽어서 슬퍼하고 있는데 그떄 외계인이 나타나서 그 나무를 죽지 않는 나무로 살려 줬어요. 그리고 그 외계인이 박원우한테 당부했어요. 이 나무를 잊으면 안 돼."

권도현은 나인의 발만 응시했다.

"박원우는 선배한테 거짓말한 적 없어요."

"무슨......"

"박원우를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었던 건 선배예요."

권도현의 눈가가 빨갛다. 불그스름하거나 붉은 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당장이라도 피를 쏟아낼 것처럼 새빨갰다.

나인은 푸르른 식물이다. 그리고 그녀가 내뿜는 특별한 힘 또한 푸른빛이다. 빨강과 보색을 이루는(여기서 말하는 푸른빛이란, 초록과 파랑을 아우른다.) 푸른빛은 붉은 선으로 넘어가기 직전의 도현을 붙잡는다.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도현은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며 악을 쓰고 운다. 극적으로 이루어진 이러한 도현의 심경 변화는 기적과도 같았다.

나인이 손끝에서 싹을 피웠을 때도 놀라지 않았던 나는 도현이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장면에서 더없는 벅참을 느꼈다. 그건 아직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판타지를 믿기 때문일 것이다. 온갖 시련 속에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싹을 잃지 않고 현재를 살고 미래로 나아가는 나인은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ㅡ세상에는 아직 죄를 저질러도 진심으로 뉘우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희망을. 그럼에도 남아있는 기적을.

“금옥아. 나는 나인이야. 아홉 개의 새싹 중에 가장 늦게 핀 마지막 싹이라 나인이 됐어. 더는 생명이 태어날 수 없는 척박한 땅에서 나는 가장 마지막에 눈을 떴어.”

그러니까 나인은, 기적이라는 뜻이야.ⓦ


▶이런 사람에게 《나인》을 추천합니다!

●다양한 #사회 이슈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고 싶은 사람.

#섬세한문체를 사랑하는 사람. 묘사가 매우 상세하다. 감정 묘사는 물론이고, 판타지 소설임에도 극도로 현실적이고 실감나게 장면을 묘사한다.

#여성중심서사를 읽고 싶은 사람. 사건의 중심에 서 누구보다도 강렬히 세상에 발버둥치는 여성들을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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