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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 숟가락 하나
현기영 지음 / 창비 / 2018년 4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기억되는 내 인생의 첫 장면은 항상 시골 외딴집의 조그만 방 한 가운데부터 였었다. 아주 무서운 악몽을 꾸고나서 처음 어머니 아버지의 이름을 불러대며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 울음소리는 내가 기억하는 세상을 향한 첫마디였다. 그 이전에도 나는 꿈을 꾸고 밥을 먹고 울음을 터뜨리고 아장아장 걸어다녔을테지만 그런 것들은 모두 내가 기억할 수 없는 무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유년 시절의 아련한 추억들이 현기영 장편소설 "지상에 숟가락 하나"를 통해서 생생하게 되살아 나고 있다. 수 십년이라는 긴 간격을 두고서도 이어지는 작가와 나의 유년시절의 삶이 어찌 그리 똑같은지.....페이지를 한장씩 넘길때마다 깜짝 깜짝놀라는 중이다.
다른게 있다면 작가는 제주4.3 사태와 6.25와 같은 시대의 아픔을 몸소 겪으면서 성장했다는 것이고 나는 그저 한적한 시골 평화로운 시기에 강아지 한 마리 데리고 들로 산으로 돌아다니다 시장기를 느끼면 엄마! 배고파 하면서 집에 돌아 왔다는 것이다. 응당 밥줘! 하는 나의 바램은 어머니의 매서운 회초리로 돌아 오기가 십상이었다. 부유하지 못했던 어린시절 그렇게 싸돌아다니다 보면 아무리 헌옷인들 배겨날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 창문을 닫을 수가 없어서 마침표는 좀 더 있다가 찍기로 한다.
내가 9살때인가, 어느날 마을에서 돼지를 잡은 기억이 난다. 일년에 몇 번씩은 마을 행사있을때 돼지를 잡는데 그 날은 웃동네 아랫동네 해서 두 마리나 잡는 모양이었다. 그런 날이 되면 으레 우리같은 아이들에게는 커다란 구경거리가 된다. 말 못하는 같은 동물이지만 개를 잡을라치면 불쌍한 맘이 먼저들어 하루종일 방에만 틀어박혀서 훌쩍거리는데 이상하게 돼지 잡는 날은 신이나고 즐거운 잔치날이 되었다. 생목숨을 죽이는 게 잔인하긴 하지만 힘센 장정 서 넛이 네 발이 묶인 돼지를 단단히 붙잡고 그 앞에 묵직한 몽둥이를 든 아저씨가 두손으로 돼지 코를 힘껏 내리친다. 제대로 맞으면 돼지는 즉사를 하지만 그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닌가 보다 빗맞은 돼지는 코피를 무지막지흘리면서 꽥~꽥~하고 비명을 지르고 몸서리를 친다. 두 서너번 그렇게 맞으면 결국 돼지는 숨이 끓어진다. 그러면 돼지를 뒤집어 놓고 아저씨 한분이 날이선 칼로 배를 좍 가른다. 그러면 속에 있던 돼지 내장이 다 쏟아진다. 그 중에서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돼지의 시뻘건 생간이 가장 인기가 좋았다. 도마위에 올려놓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생간을 송송송 썰어 놓으면 아저씨들이 그 주위를 에워싼다. 뒤이어 소주 한잔씩 돌아가고 돼지 생간 한 조각을 집어서 소금을 약간 찍어서 한 입에 쏙 집어넣는다. 나야 별로 였지만 아저씨들은 정말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은 일년에 몇 번 안되는 고깃국을 먹는 날이었다!
책은 세상을 향해 열려있는 창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창가에 앉아서 세상을 보려고만 한다면 우리는 그 창이 보여주는 다양하고 멋진 세계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제가 보고 있는 창은 한동안 잊고 지냈던 저의 아름다운 유년시절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끔씩 그 창으로 비가 내리지만 그래서 더욱 좋습니다! 지금 제 방 창가엔 진짜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